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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달영은 양정 재학 시(1928~1933) 5년간 영등포구 도림동의 하숙집에서 학교에 다녔다. 하숙집에는 검둥이라는 개가 있었는데, 네 명의 하숙생 가운데 유독 류달영을 따랐다. 등굣길에는 영등포역까지 따라갔고, 하굣길에는 역 앞에서 류달영을 기다렸다가 함께 돌아오곤 했다.
어느 날부터 검둥이가 병이 들었는지 따라오지 않았다. 동물병원이 없던 시절이라 약방에서 약을 타다 물에 타 먹여 봤지만, 차도가 없었다. 겨우내 앓다가 새해 첫날이 되었다. 검둥이는 아예 드러누워 먹지도 못했다. 류달영은 검둥이를 바구니에 담아 자전거에 싣고 영등포에서 가장 이름난 스토 내과병원으로 달려갔다. 신년 초라서 병원 문에 휴일 표시가 있었다. 그는 바구니를 안고 병원 뒤 살림집으로 들어갔다. 마당에 서서 소리를 질러 의사를 부르니 스토 의사가 가족과 식사를 하다가 무슨 일인가 하여 문을 열고 나왔다. 교복 입은 조선인 학생이 왔기에 무슨 급한 환자라도 생겼나 생각했을 것이다. 류달영은 다짜고짜 바구니 속을 보여주었다. 의사는 개와 학생을 번갈아 보면서 꾸중을 했다.
“이놈아 정월 초하룻날 아침에 사람도 아닌 개를 데리고 와서 시끄럽게 구느냐? 재수 없게.”
반일 감정이 컸던 18살 청년 류달영은 그 멸시를 참을 수 없었다. 검둥이 걱정으로 가뜩이나 애간장이 탔던 그의 가슴이 폭발했다.
“이 새끼야, 뭐가 어째? 의사가 병 고치는 게 재수 없어? 네 집 강아지가 죽어가도 안 고쳐?”
약이 올라 멱살을 잡고 대드니 나이 든 의사가 밀렸다. 그 집 가족들이 나와서 뜯어말렸다. 그는 강아지를 다시 자전거에 싣고 하숙집에 돌아왔다. 검둥이는 다음 날 죽고 말았다.
1933년 봄에 양정을 졸업한 류달영이 수원 고등농림학교(현 서울대 농업생명대학)에 지원해서 입학시험을 치렀다. 작문 문제로 ‘친한 친구’라는 제목의 글짓기가 출제되었다. 그는 친구 검둥이가 죽게 된 사연을 답안지에 썼다. 그 글을 채점한 사람은 수원고농의 작문 담당 사토 교수였다.
수원고농에 입학한 류달영은 무엇보다 학교시설에 놀랐다. 특히 도서관 시설이 너무 훌륭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독서를 마음껏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도서관장은 철학개론과 독일어를 가르치는 사토 도쿠지 교수(1899-1970)였다. 그는 일본 제일고등학교와 도쿄제국대학 철학과를 나온 수재였다.
하루는 사토 교수가 불러 도서관장실로 갔다. 화제는 입학시험 때 쓴 작문에 관한 것이었다. 정월 초하룻날 죽어가는 개를 자전거에 싣고 일본인 병원에 가서 치료를 거부당하자 시비가 붙어 의사의 멱살을 잡고 말썽을 부렸다는 내용의 작문이었다. 사토는 껄껄대고 웃으면서 바로 그 작문을 채점한 교수가 자신이었으며, 작문의 내용이 재미있어서 류달영을 기억하게 되었다고 했다. 류달영이 문학에 취미가 있어서 세계문학전집 등을 읽었다고 했더니 “내가 문학에 대해 강의를 해줄 테니 매주 수요일 날 오후에 관장실로 오게”라고 했다. “문학 강의를 듣는 모임이 있습니까?” “그런 것은 없다. 문학 강의를 듣는 것은 류군 한 사람뿐이다.”
류달영이 상상도 못 해본 일이었다. 그 후 류달영은 노트 한 권만 들고 매주 수요일 오후에 관장실에 가서 일 대 일로 강의를 들었다. 그 강의는 3년 동안 계속되었다. 류달영이 김교신에게 이런 사정을 알리자, 다음 학기에 김교신은 류달영과 함께 고농에 가서 사토 교수를 방문해 류달영을 특별지도하고 있는 호의에 고마워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김교신과 사토는 우치무라 간조의 문하생이었다. 사토 교수는 김교신보다 2살 연상으로 다른 시기에 우치무라의 지도를 받았다.
하루는 류달영이 사토 교수 댁에 초청을 받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사토의 어린 아들이 두 손과 흰 셔츠를 온통 잉크투성이로 만들어 환호를 올리면서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됐어요, 됐어요!” 잠시 전에 만년필을 들고 와서 아버지에게 잉크 넣는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했는데, 아버지가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혼자서 해보라고 이르자 아이는 제 방에 가서 만년필을 열고 잉크를 그 속에 부어 가지고 온 것이다. 깨끗한 다다미 바닥에도 잉크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류달영은 두 눈을 찡그리고 아이를 바라보고 있는데 사토는 껄껄대면서 대견스럽다는 듯이 소리치는 아들을 바라보고 웃었다. “그거 봐라, 생각하면 다 알게 되는 것이다.”
사토의 부인이 찻잔을 들고 방으로 들어오다가 그 꼴을 보았으나 역시 놀라지 않았다. 류달영은 그 남편에 그 아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인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나가서 깨끗이 씻어주고 다다미 위에 묻은 잉크도 비눗물로 닦아냈다.
방 한구석에는 일본의 시조인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위패가 들어있는 가미다나(神棚)가 팽개쳐져 있었다. 가미다나는 신도(神道) 제의(祭儀)에서 사용되는 도구로, 가정이나 사무실 등에서 가미(神)를 모시기 위한 선반 또는 제물상이다. 일종의 소형 신사(神社)라고 볼 수 있다. 총독부에서는 조선을 정신적으로 일본화하기 위해 집집이 가미다나를 배부하고 집안의 신으로 모시도록 강요했다.
사토 교수 댁의 가미다나는 그 아들이 장난감으로 가지고 놀다가 내버린 것 같았다. 류달영이 물었다. “가미다나를 저렇게 다루어도 괜찮습니까?” 사토는 껄껄 웃으면서 “천조대신을 믿지 않는 우리 집과는 관계가 없는 물건이 아닌가!”라고 대답했다. 일본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를 지지하지 않는 지식인임을 짐작하게 한다. 하긴 그런 인물이니까 일본인 의사와의 싸움을 글짓기 소재로 삼은 류달영에게 높은 점수를 줬을 것이다. (계속)
2
우치무라의 제자인 사토의 전공은 철학, 그중에서도 불교철학이었다. 작가이기도 한 그는 조선으로 건너와 수원 고등농림학교와 경성제국대학 예과 교수를 거쳐, 일본으로 돌아가 도쿄 제일고등학교(도쿄제국대학 예과) 교수를 역임했다. 김교신은 『성서조선』 1936년 4월(87호) 뒤표지에 사토 교수의 저서를 소개하는 광고를 올렸다.
<사토 도쿠지(佐藤得二) 『日本的 敎養의 根據; 日本地人論』(刀江書院) 광고
사토 교수는 범속을 초월하는 뜻을 품고 반도의 중요한 학원(경성제대 예과)에서 청년 훈도에 종사하는지 10여 년, 능히 조선인의 담화를 해득할뿐 아니라 능히 조선어로써 취임 연설을 할 수 있으며, 여러 해 동안 『성조』지와 같은 작은 잡지를 구독하는 등 조선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이가 아니고는 기도할 수 없는 일. 이번 저서는 지리, 박물, 역사 등 다방면으로 청년의 건실한 교양의 근거를 논술한 것. 지리, 박물 교사인 필자에게는 각별한 흥미 있었으나, 청년과 청년을 지도하는 직무에 있는 이는 누구나 한번 읽어야 할 명저임을 추천함. >
1936년 4월 29일 『일기』에는 김교신이 사토 도쿠지 교수의 편지를 받아 읽고 격분했다고 썼다. 김교신은 “지금은 그 전문(全文)을 발표할 수 없다”라면서 사토 교수의 글 일부만을 소개한다.
<그 일절은 다음과 같다. “소생과 같은 정도의 언사도 당국자에게 이렇게 불쾌하게 들린다면, 인면(人面)을 헤아리지 않고 신앙을 말하는 대형(大兄) 등은 신변에 칼을 들이대는 것 같은 생활을 하고 계실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비옵나니 위로부터의 가호와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함이 언제까지나 대형과 대형의 일 위에 있기를 원합니다. ‘You will survive all of them.’ 우리는 살아남는 것 말고는 승리의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번은 귀지의 지면에 졸저(拙著)를 광고해 주셔서 황송했습니다.” >
상시 검열을 당하는 잡지라서 그 전모를 발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추측건대 사토 교수가 총독부 당국자를 거스르는 발언을 한 게 문제가 되어 설화(舌禍)나 필화(筆禍)를 겪었던 걸로 보인다. 평소 총독부의 정책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던 사토였다. 사토는 당국자가 일본인인 자신에게도 이렇게 불쾌한 기색을 드러낸다면, 식민지 조선인인 김교신에게는 총독부가 얼마나 거칠게 나올 것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토는 이 시련에 굴하지 말 것, 그리고 반드시 살아남을 것을 주문한다. 끝으로 일전에 사토의 저서를 잡지에 광고해 준 것에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로부터 반년이 지났다. 사토의 대표 저작 『불교의 일본적 전개』가 출간되었다. 불교철학의 명저로 알려진 책이다. 책을 받아본 김교신은 일기에 이렇게 썼다.
<1936년 10월 30일(금) 구름. 사토 도쿠지 교수로부터 『불교의 일본적 전개』라는 신저(新著)를 받고 씨의 생산 불식하는 학구적 정력에 경탄함을 마지 못하는 동시에, 기독교도로서도 불교의 연구를 등한히 하여서는 안 될 것을 절감했다. 시기를 기다려, 우리 동기 집회에서 불교 강좌를 열어볼까 하다.> (<김교신전집> 제6권 p. 122.)
우치무라의 제자인 사토가 불교에 관한 책을 썼고, 기독교 잡지에 그 책 광고가 실렸다. ‘기독교는 타 종교에 대해 배타적’이라는 선입견을 품을 수밖에 없는 풍토에서 얼마나 낯선 장면인가. 김교신은 『성서조선』 제95호(1936년 12월) 뒤표지에 이 책을 소개하는 광고를 올렸다.
<기독교 신자의 관점에서 불교를 논한 책. 단지 기독교 신자로서 아전인수적 주관론이 아니라, 불교 전문가의 교열을 거친 학구적 소산이다. 불교는 동양인 우리들의 구약이니, 기독교 신자는 누구든지 깊이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
불교를 ‘동양의 구약’이라고 했다. 유교도 마찬가지다. 불교와 유교로 다듬어진 정신 위에 이제 새로이 기독교가 유입되었다. 불교와 유교의 전통 위에 다시 기독교가 뿌리를 내림으로써 새로운 전통이 수립되는 것이다.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말처럼 ‘전통의 시제(時制)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다. 전통은 죽은 화석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서 부단히 형성되고 있다. (계속)
3
사토는 수원고농과 경성제대 예과 교수를 지낸 다음, 1938년 도쿄 제일고등학교로 영전하여 귀국길에 오른다. 김교신은 『일기』에 독자의 편지를 빌어 사토의 영전 소식을 전한다. 편지를 보낸 독자는 농업 관련 기술직 공무원이었다. 사토와 서신을 교환할 정도로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류달영은 개성 호수돈여고 재직 중이었다.)
<1938년 10월 12일. 편지 한 장. “지난 1일부터 이곳 군농회(郡農會)에 기수(技手, 기술직 공무원)로 채용되어 축산 사무를 보고 있습니다. 사토 선생께서 도쿄 제일고등학교로 영전하여 귀국하신 일 여간 섭섭한 일이 아닙니다. 조선과 조선 청년의 앞길에 대하여 충심의 동정을 가지는 선생을 잃은 것은 진실로 큰 손실이며, 앞으로 저곳에서 진리 운동에 한층 힘쓰시기를 간절히 기원하게 되었습니다. 지난날 선생에게서 온 단신 소개합니다.” >
조선과 조선 청년의 장래에 지대한 관심을 두고 노력하던 교육자·학자를 잃는 것이 큰 손실이라며 걱정한다. 이 독자가 사토에게서 받은 개인 서신 내용은 이렇다.
<“××부(검열을 의식해 ‘총독부’를 이렇게 표기한 것으로 추정)에서 싫어함을 받고 조선 학생에게 미움을 받고 그래도 12년을 반도에서 신세를 졌는데 이상한 인도로 모교에 돌아왔습니다. 지금 반도의 땅을 돌이켜 생각하고 참교육이 행해지기 얼마나 어려운가, 자기 같은 회색인(灰色人)마저 어려웠으니 참 반도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는 얼마나 괴로울 것인가 하고 느끼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위엄스러운 화려한 것, 아름다운 것, 그것은 얼마 안 가 망해버릴 것입니다. 약해도 생명적인 것을 굳게 견지하고 진정한 인간으로 사는 생활을 발밑에서부터 쌓아가도록 힘써 주십시오. 기도합니다.” >
스스로 ‘회색인’이라고 정의한 게 눈에 띈다. 일본인이면서 일본인답지 않게 일본 군국주의를 비판했다. 식민지 조선 청년들을 사랑했다. '회색인' 사토를 총독부만 싫어한 건 아니었다. 일부 조선 학생들도 그를 미워했다. 일본을 자기 조국으로 여기고 조선총독부를 자신의 믿고 따라야 할 유일한 정부로 믿고 따르는 조선인 학생들이다. ‘내선일체의 현현(顯現)’과도 같은 존재들이다.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다운 청년들이었다. 그들의 행동의 진정한 동기가 출세와 사리사욕이라는 건 물어볼 필요조차 없다. 현생의 부귀영달만을 꿈꾸는 자에게, 진리 위에 굳게 서서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사토는 걸리적거리는 방해물로 비쳤을 것이다.
김교신은 ‘독자의 편지’에 이어 독자가 ‘사토에게 받은 편지’를 소개한 다음, 지난여름 사토 교수와 만나 나눴던 대화를 소개한다. 사토가 직접 김교신을 찾아온 걸로 보인다.
<지난여름 어느 날 저녁 사토 형이 와서 이야기하기를 “세속적인 인간들은 자기 지위를 보전하기에 본능적으로 강하다”라고. 그리고 자기의 사직 의사를 표명한 때에도 억지로 만류함을 마지 못하였다. 그러나 어느 학자의 말처럼 “퇴각해도 좋을 인간들은 움직이지 않고 꼭 유임해주어야 할 사람들은 가버린다.” 저와 같은 참사람 하나를 용납지 못하는 조선의 장래를 헤아릴수록 한심하다. 한 가지 기이한 것은 주위의 속리(俗吏)들이 저를 압박할수록 저는 영전하여 가는 일이다. 수원서 서울로, 서울서 도쿄일고로. 이제 한 번 더 박해가 오면 대학으로 갈 터이요, 또 한 번 당하면 천국으로 갈 것이다. >
김교신과 사토는 이미 속마음을 털어놓을 만큼 막역한 친구가 되어 있었다. 이날 대화 중 사토는 경성제대 예과 교수직을 사직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에 김교신은 물러나야 마땅한 인간들은 물러나지 않고, 꼭 자리를 지켜줘야 할 인물들은 떠나 버린다고 개탄하면서 사퇴를 만류했다. 사토 교수 같은 진실한 인물을 용납할 그릇이 못 되는 조선 사회가 한심했다.
그런데 인생이란 참 알 수 없는 것이다. 주위의 천박한 무리가 압박하고 괴롭힐수록 사토 교수는 영전을 거듭한다. 역설적인 상황이다. 수원 고등농림학교에서 서울의 경성제대 예과 교수로, 다시 도쿄의 제일고등학교 교수로 가게 된 것이다. 제일고등학교는 과거 우치무라 간조가 재직했던 곳이다. 교육칙어에 경의를 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국적으로 매도된 이른바 ‘우치무라 불경사건’의 무대가 된 학교다. 김교신은 사토가 도쿄일고에서 박해를 받으면 이제 천국으로 갈 차례라고 말한다. 박해받을수록 올라가기만 하는 사토 교수의 앞길에 대한 축복의 말이다. 1938년 12월에 김교신이 받아본 독자 편지에도 이런 내용이 나온다.
<1938년 12월 5일. 편지. “사토 선생님께서 일고(一高)로 가심은 10월 말에 S형의 서신과 성조통신(일기)으로 비로소 알았습니다. 가실 때 뵙지 못한 것이 끝없이 섭섭하오며, 이곳에 계실 동안 문생을 사랑하여 주심이 뼈에 사무칩니다. 보기 드문 스승의 사랑인가 합니다. 선생이 조선을 떠나심에 즈음하여 선생을 용납지 못하는 이 사회의 어둠도 한스럽거니와, 선생의 깊은 사랑과 참뜻을 조소와 증오로 갚은 이곳 젊은이들이 제일 한스러우며 또 가장 불행한 자라 하겠습니다. 조선이 선생에게 준 고통 그것은 이해하는 이가 적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토 선생님께서 10여 년간 조선에서 가르치심은 (인간적인 면에서는 혹 실패라고 하는 이가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그의 생애 중에서 가장 축복하실 부분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저곳 일고에서도 의인에게 쓴잔을 마시게 한 일이 아직도 세상 기억에 새로우니 불의에 추호도 타협을 불허하는 선생의 성격, 과연 세상은 저를 용납하고 사랑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10여 년간 조선에 머물면서 사랑을 베풀었던 사토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비웃음과 증오를 보낸 조선 청년들의 무지와 불행에 대해 안타까움이 크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괘씸한 조선 청년들 아닌가. 그러나 일본이라고 해도 안심하긴 이르다. 영전해 가는 일고도 우치무라 같은 의인을 핍박한 과거가 있다. 그러니 사토 같은 불의를 용납지 않는 성격이 그곳을 잘 견뎌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걱정이다. 사토의 이력을 조사해보니, 그는 도쿄일고 교수를 지낸 후 문부성 독학관(督学官), 사회교육국장 등을 지낸 것으로 확인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