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추석이 지났습니다. 추석이 되면 아버지, 형 동생과 목욕탕에 갔었습니다. 설과 추석에는 꼭 간 거 같습니다. 연례행사였던 셈입니다. 목욕탕에 들어서면 얼마나 사람이 많던지. 추석이 되면 새 옷도 입고 새 신발도 신기도 해서 기다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 기억 때문일까요? 여름이 지나가면 신으려고 참한 슬리퍼 하나를 현관 앞에 내놓았는데 여태 여름이 가질 않아 신질 못했습니다. 이제 여름이 갔으니 새 슬리퍼 신고 다녀야겠습니다. 참 기나긴 여름이 지나갔습니다. 6월 초순부터였으니 거의 넉 달이었습니다. 거의 매 순간 돌아갔던 선풍기가 고생이었고 무더위를 견디신 여러분들 모두들 고생하셨습니다.
요즘 주일에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관한 예고의 말씀과 제자들의 몰이해, 그리고 다시 주님의 가르침으로 이어지는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마르코 복음은 특히 제자들의 고집과 신앙의 나약함에 대해서 전해줍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부활도 그들은 믿지 않았다고 전합니다. 하지만 마르코 복음은 이렇게 끝이 납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그 여자들은 자기들에게 분부하신 모든 것을 베드로와 그 동료들에게 간추려서 이야기해 주었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도 친히 그들을 통하여 동쪽에서 서쪽에 이르기까지, 영원한 구원을 선포하는 거룩한 불멸의 말씀이 두루 퍼져나가게 하셨다. 아멘.”
나약한 제자들은 믿지 않았고 완고한 마음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복음을 선포하였지만 불멸의 말씀이 두루 퍼져나가게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일이었음을 마르코 복음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바로 여기에 마르코 복음의 핵심이 숨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자들의 불신앙과 완고함, 나약함을 뛰어넘는 것은 바로 예수님 당신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은 흔들리며 살아가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위안이 되는 말씀입니다. 잘났든 못났든 인간적인 약함을 뛰어넘는 것이 주님의 힘이니까요. 함께 일하시고 함께 걷는 분은 바로 주님이시니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것은 제자들이고 우리들이지만 말씀이 퍼져나가게 하는 것은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복음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계획을 뛰어넘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하지만 복음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길을 가로막듯이 우리도 가로막으려 하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일입니다. 제자들이 누가 큰 사람이냐고 논쟁한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우리 삶의 중심에 두지 않는다면 우리도 쉽게 힘을 숭상하게 됩니다. 잘나고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그래서 큰 사람이 최고라고 생각하기 십상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군림을 용인하며 적당한 것이 좋은 것이 되어 버리지요. 그렇게 된다면 겸손과는 점점 더 멀어질 것이고 교만이라는 죄와는 점점 더 가까워지게 되겠지요.
겸손한 분에게는 그 말의 무게와 눈빛의 무게가 느껴집니다. 그래서 고개가 숙여집니다. 앞에 계신 당신의 겸손이 맞은 편에 서 있는 나의 고개를 숙이게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힘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첫댓글 안경을 안 쓰고도 글씨가 잘 보여서 너무 좋습니다 저를 위해서 글씨를 진하게 한것처럼 느껴집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친구에게 제 생각대로 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그것도 겸손과는 거리가 멀겠지요 제가 고쳐보려고 해도 타고난 성격은 잘 안바뀌는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