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닝> 감상문
문과대학 사회학과 2020130557 홍단비
“실존주의는 사람에게 자기 자신의 행동 밖에는 희망이 없다는 것, 사람으로 하여금 살 수 있도록 하는 유일한 것은 행동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실존주의 철학자로 알려진 장 폴 사르트르의 말로, 그는 인간의 자유에 따른 선택을 중요시하였다. 본질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본질에 앞서 실존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 없는 불안에 내몰리게 된다. <버닝>에 나타난 종수, 해미, 벤 모두 실존주의적 측면에서 신자유주의 시대 속 그러한 피투적 존재의 실존적 위기를 잘 나타낸다. 주인공 종수는 세상이 수수께끼 같다고 말한다. 우물의 존재도, 고양이의 존재도 당최 알 수 없다. 그에게 세상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스스로를 소설가라 말하지만 무엇을 써야할지 알지 못한다. 영화 내내 그는 어떠한 선택을 해야할지 몰라 방황한다. 그러던 그가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선택’을 보여준 장면이 있다. 바로 벤을 아버지의 칼로 찌르는 순간이다.
종수의 아버지는 분노조절장애가 있다. 이로 인해 종수의 어머니는 어릴 적 그로부터 도망치게 되었다. 그는 공무원을 폭행하여 수감될 처지에 놓이게 되었고, 자존심으로 인해 결국 실형을 선고받게 된다. 그런 아버지로부터 종수는 도망치고 싶어한다. 하지만 결국 종수는 아버지의 칼로 벤을 죽임으로써 ‘분노’라는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종수와 주변인물들 간의 관계는 오이디푸스적 갈등으로 해석해볼 수 있는 여지가 존재한다. 어머니의 부재는 종수로 하여금 정서적 결핍을 남겼다. 이에 종수는 해미와의 관계를 통해 이를 보충하고자 하지만, 결국 해미와의 관계 또한 상실로 마무리되며 어머니로부터 겪은 정서적 결핍은 다시금 반복된다. 타인과의 유대에 실패한 종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에 반해 벤은 아버지의 대리자로서 해석될 수 있다. 해미와 자신 사이에 등장한 벤을 종수는 질투하고, 경계한다. 자신이 갖지 못한 것들을 갖춘 채 해미를 대하는 벤의 모습은 종수에게 증오와 동시에, 동경심을 유발한다. 넘어야 할 경쟁자임과 동시에, 닮고자 하는 롤모델과 같다. 이에 종수는 벤을 극복하여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노력한다. 하지만 결국 종수는 벤을 살해하게 된다. 이는 자신의 수수께끼 같은 분노의 감정을 벤에게 투사하여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아버지의 폭력성을 스스로 내면화함에 이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벤은 아버지, 해미는 어머니로 상징되는 종수의 오이디푸스적 갈등이 드러났다고 생각하였다. 종수는 실존적 불안에 빠져있다. 오이디푸스적 갈등으로 비롯된 이 불안으로 인하여 그는 진정한 자유를 갈망하고, 불가해한 세상 속 자신의 방향을 찾고자 끊임 없이 노력하지만 오이디푸스가 그러했듯 그 누구와의 연대도 실패한 채, 방안에서 자위하며 자폐적 쾌락에 귀결되고, 결국 그의 자율적 선택에 대한 열망은 좌절된다.
이와 같은 <버닝>의 메시지를 종수라는 등장인물에 대한 해석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한국 사회의 두 가지 측면으로 확장시켜 보겠다. 아버지와 종수의 갈등은 한국 사회의 세대 간 갈등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산업화 시대의 논리와 권위주의적 가치관으로 대표되는 아버지 세대는, 한국의 젊은 세대들에게 종수가 그러했듯 억압의 틀로써 다가온다. 이러한 면에서 종수가 벤을 살해하는 행위는, 그러한 세대 간 갈등의 충돌에 대한 장면이라고 이해해볼 수 있다. 두번째는 사회 경제적 불평등의 차원이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삶을 살아가는 벤과 달리, 종수는 하루하루가 버겁다. 그 속에서 부유층인 벤에 대해 종수는 분노와 열등감을 느낀다. 즉, 세대간 갈등과 더불어 사회 경제적 불평등에 대한 저항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영화 <버닝>은 종수로 상징되는 현 한국 청년 세대가 마주한 수많은 사회 구조적 억압 속, 뚜렷한 분노의 표적도 없이 방황할 수밖에 없는 세태를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영화 시작, 짐을 메고 흔들리는 프레임 속 등장한 종수는 영화의 끝, 나체로 흔들리는 뿌연 차창 뒤 실루엣으로 사라진다. 수수께끼 같던 세상에 대한 방향 없는 분노와 결국 그가 내린 선택은 그를 자유롭게 하였을까? 우리는 알 수 없는 우리 존재의 본질에 대한 탐구 속에서 끝없는 공허에 내몰리지 않고 그 길을 찾아가야 한다. 종수의 분노는 그를 또 다른 혼란 속으로 이끌었지만, 해미의 귤이 그러했듯, 우리는 본질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기보다 본질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잊고, 끝없는 선택 속에서 우리의 본질을, 우리의 삶의 목적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방향 없이 표류하는 분노가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이 시대에는, 비록 “타인은 지옥”일지라도, 오직 타인을 통해서만 우리는 구원을 찾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누구와의 연대에도 실패한 채 홀로 떠난 종수와 달리, 우리는 연대를 통해 그 분노의 올바른 대상을 찾아야 하며, 이를 통해 함께 행동함으로써 진정한 변화를 이끌어내고 삶의 의미를 창조해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