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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海金氏三賢派譜卷之一(김해김씨삼현파보 제1권)
原典 : 1686년 숙종 병인보
解釋 : 2010년 7월 13일 金順大
始祖大駕洛國大王諱首露遠孫管(시조 대가락국 대왕 휘수로 원손 관)
公墓碑陰云系出大駕洛國始祖王四十一世宗苗裔 忠烈王以金州貫鄕降爲盆城郡主卽羅之金官小京麗太祖改置臨海金州金寧府也命公改築城更名盆城郡主未幾忠宣王庚戌陞金海府公仍籍盆城者
공의 묘비의 뒷면에 적힌 글에 의하면 대가락국의 계통에서 나왔으며 시조왕의 41세로서 씨족의 후예라고 한다. 충렬왕은 공이 금주가 관향이니 분성군주에 봉했으니, 즉 신라의 금관소경이고 고려의 태조가 임해로 고쳤으며, 금주의 금녕부이다. 공에게 명하여 성을 개축하라 하고 다시 이름을 분성군주라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충선왕 경술(1310)년에 김해부로 승격시키니 공은 이에 분성에 적을 두게 되었다.
等第官至版圖判書國子師號靖醒俗稱盆城公欲斥浮屠法諫王不聽隱武陵山中二招不就丙午哭晦軒安先生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은 판도판서 국자사에 이르고 호는 정성(靖醒)이며 세상 사람들은 분성공이라 불렀다. 공이 부도법(浮屠法)를 배척하고자 간했으나 왕이 듣지 않아 무릉산 속에 숨어 버렸다. 두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병오(1306)년에 회헌 안향(1243~1306) 선생이 죽자 곡하였다.
歸田里御招賜御屛爲國子師忠宣王被元流同隨還五年甲子都城大火公入火救王時火自列圻又天大雨滅火朝野知天出忠良仍以安晦軒遺簡諫王設列邑學校興儒化未意
고향으로 돌아와 있으니 왕이 그를 불러 병풍을 내려주셨고 국자사가 되었다. 충선왕이 원나라에 끌려가는 피해를 입었을 때 같이 수행하여[1] 돌아왔다. 5년 갑자(1324)년에 도성에 큰 불이 나니[2] 공이 불속으로 뛰어 들어 왕(충숙왕)을 구하였다. 이때에 불이 저절로 여러 곳으로 퍼졌는데 하늘에서 큰 비가 와서 불이 꺼졌다. 조정에서는 하늘이 충성스러운 사람을 보내었다고 하였다. 또한 회헌 안향이 남긴 문서로서 왕에게 간하여 여러 고을에 학교를 세우고 유학을 장려하자고 하였는데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 1278년 4월∼1297년 8월, 1297년 12월∼1298년 1월, 1298년 8월∼1308년 7월 등 여러 번 갔음
[2] 고려사에 의하면 1324년 1월3일(경인)에 연경궁문에 불이 났다고 적혀 있음.
退居儲福山中聞朝大變入元復前王位癸未忠惠王被元流同隨岳陽遭國喪代留元以忠誠放還乙酉二月十九日卒享年九十六
퇴거하여 저복산 속에 살면서 조정에 큰 변고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원나라가 다시 전 왕을 세웠다고 하였다.[1] 계미(1343)년에 충혜왕이 원나라로 끌려갈 때 같이 갔고, 악양에서 국상을 만나[2] 대신 원나라에 머물렀으나 원나라에서는 그의 충성에 감복하여 돌려보내었다. 을유(1345)년 2월19일 돌아가셨으니 나이는 96세였다.
[1] 1313년 충숙왕 ->1330년 충혜왕 -> 1332년 다시 충숙왕 -> 1339년 다시 충혜왕이므로 이때를 말함.
[2] 충혜왕이 원나라에 의해 게양현(揭陽縣)으로 귀양갔는데 게양으로 가던 도중 악양현(岳陽縣)에서 1344년 정월 30세의 일기로 죽었다.
朝廷以勳勞行實命禮官李仁復葬公於楮江野山負辛之原別加布瓦板培土成墳而 賜牌葬之洞崇賢之義
조정에서는 그의 훈공과 노고와 행실을 기려 예관 이인복[1]에게 명하여 공의 장례를 저강(楮江) 야산의 신좌 언덕에 지내도록 명하고 특별히 기와판으로 덮고 흙을 높게 쌓아 봉분을 만들었다. 또한 성현에 대한 도리로 장지의 땅을 하사하였다.
[1] 이인복(李仁復, 1308년∼1374년)은 고려 말기의 문신이다. 자는 극례(克禮),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配夫人林氏大司成宜衷女忌十月二日墓移祔一子文淑經德齋生孫伉都制庫判官曾孫湑官宰相玄孫克一童蒙○二曾孫渭隱逸洪武三十一年四月上旬墓碑重修立
부인은 임씨로서 대사성 임의충의 따님이다. 기일은 10월2일이고 묘소는 이장하여 붙어있다. 아들이 하나 있었으니 문숙으로서 경덕재생이고, 손자 항은 도제고 판관을 지냈고, 증손 서는 재상을 지냈으며, 현손 극일은 동몽을 지냈다. ○둘째 증손 위는 숨어살며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홍무 31년(1398) 4월 상순에 묘비를 다시 세웠다.
二世(2세)
子文淑(자, 문숙)
忠烈王癸巳生字雅淑經德齋生以積年病患絆世忠穆王戊子四月十日卒墓上同
配宜人瑞山柳氏丙午八月九日卒 墓祔父牧使方善
충렬왕 계사(1293)생이다. 자는 아숙이고 경덕재생[1]을 지냈다. 나이 들어 병환으로 세상에 얽매이다가(?) 충목왕 무자(1348)년 4월10일 돌아가셨고 묘소는 위와 같다.
부인은 의인 서산 류씨이고 병오(1366)년 8월9일 돌아가셨다. 묘소는 붙어있고 부친은 목사를 지낸 류방선[2]이다.[3]
[1] 經德齋生 ; 성균관에서 시전(詩傳)전공
[2] 유방선(柳方善 ; 1388년 ∼ 1443년)은 조선의 학자이다. 자는 자계, 호는 태재이며, 본관은 서산이다.
[3] 딸의 사망연도가 부친의 생년보다 앞선다.
三世(3세)
子伉(자, 항)
忠肅王丙寅生字而正號遯翁文科官都制庫判官嘗從遊於圃隱鄭先生夢周見鱉山郡北面小微洞三聖山淸邃爱卜築一舍恭愍王庚戌命子先移居壬戌公全家同居十月十日卒○墓遺命返葬于金海府西北五十里許儲福洞先墓同原
충숙왕 병인(1326)생이고 자는 이정이고 호는 둔옹이다.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은 도제고 판관을 지냈다. 일찍이 포은 정몽주(1337~1392)선생과 교유하였다. 별산군(현 청도) 북면 소미동 삼성산이 맑고 그윽함을 보고 집을 한 채 지어 공민왕 경술(1370)년에 아들(湑)에게 명하여 먼저 이사하게 하고, 임술(1382)년에 공의 모든 가족이 이사하여 살다가 10월10일 별세하였다. ○묘소는 유언에 따라 김해부 서북 50리 쯤의 저복동 조상 묘소와 같은 언덕에 옮겨 장사를 지냈다.
配恭人高氏同年七月十七日卒○墓祔 父學士知麟
부인은 고씨로서 같은 해(1382년) 7월17일 별세하였다. ○묘소는 붙어있고 부친은 학사를 지낸 고지린이다.
謹言公父祖墓所皆在金海儲福山麓而家經禍亂後墓所失傳至今子孫孤殘散在相信之故也
삼가 말하건대 공의 부친과 조부묘소는 모두 김해 저복산 기슭에 있었으나, 가문이 화를 입고 난을 만난 후 묘소는 실전되어 지금에 이르렀으니 이는 자손이 드물어 줄어들고 흩어져 서로가 믿었기 때문이다[1]?
[1]信을 愼으로 하면 ‘서로가 나타내는 것을 삼갔기 때문이다’로 되어 뜻이 통함.
後孫莢承以尋先墓所之意居金海府探聞邑吏而于問許宗氏前後所聞不如一
후손들이 서로 도와서 선조의 묘소를 찾겠다는 뜻을 가지고 김해부에 살고 있는 읍의 벼슬아치들에게 탐문하면서 허씨의 종씨들에게 물어 보았으나 전후의 소문이 하나같지 아니하였다(서로 달랐다).
故入柳洞楮沼近村居人先悟皆不知云以野服或問樵軰傳說則皆云金政成墓孫在淸道數世前尋來酷刑所居人故終不尋而去後至今未來也
따라서 유동의 저소 가까운 동네에 들어가 보았으나 거기에 사는 사람들도 모두 모른다고 하였다. 평민(거친 옷을 입은 사람)들이나 혹 나무꾼들에 전설을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김정성 묘’의 후손들이 청도에 살고 있어서 여러 세대 전에 찾아온 적이 있으나 가혹한 형벌을 받고 나서는 살고 있는 사람들도 끝내 찾아오지도 않고 그 후부터 지금까지 오지도 않는다.’고 하였다.
又居人玆村新入來故未知墓0000000訪先墓00000以0後也
또 이 마을에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은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므로 묘소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00000 선조 묘소를 찾아본 것은 00000 이후이다.
四世(4세)
子湑(자, 서)
忠惠王復位壬午五月三日生字遠允號退平以文行官宰相甲寅見機退居田里乙卯圃隱鄭先生斥群小請誣公亦據奸誣王不聽退居鄭圃隱公倡性理之學爲尙校宮監役復公須義興校學
충혜왕이 복위한 임오(1342)년 5월3일 태어났다. 자는 원윤이고 호는 퇴평이다. 글재주가 뛰어나 벼슬은 재상이 되었다. 갑인(1374)년에 어떤 일을 계기로[1] 고향으로 돌아와 살았다. 을묘(1375)년에 포은 정몽주 선생이 여러 소인들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리자 공도 역시 간신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왕이 듣지 않자 물러나와 살았다. 정포은 선생이 성리학을 일으키고 상교궁 감역이 되어 공을 복위시키자 학교를 부흥시켰다.
[1] 아마도 공민왕 시해사건인 것 같음
庚申除夜夢入大學朱晦菴先生賜小學一部曰此節孝子知篇云覺來十四月二日生子克一臥龍山溪雲籠七日故居里改定雲溪以病患杜門不出
경신(1380)년 연말의 밤 꿈에 대학(태학)에 들어갔는데 주회암(주자)선생이 소학 한 부를 주면서 ‘이는 절개가 있고 효성스러운 아들이 이 책을 알 것이다.’하여 꿈을 깨었다. 그때부터 14개월 후 2일[1] 아들 극일을 낳았는데 와룡산 의 시내에 구름과 용이 7일간 계속되어 살고 있던 마을을 운계로 이름을 바꾸어 정하고 병환으로 바깥에 나가지 않았다.
[1] 본 보첩에 휘극일의 출생은 1382년 2월 ?일로 되어 있음. ‘14개월 후 2월’ 이라면 맞으나 원문은 그렇지 않음
壬申七月十六本朝太祖大王登極癸酉大明太祖皇帝賜朝鮮國號甲戌四月四日往哭于圃隱鄭先生終喪及回尙州道會席諸問興復之策公曰周室之興初五星聚奎在史今于明朝時天以復聚人敢自回耶云
임신(1392)년 7월16일 조선의 태조대왕이 등극하고 계유(1393)년 명나라의 태조황제가 조선의 국호를 내렸다. 갑술(1394)년 4월4일 포은 정선생의 임종에 곡하고 돌아오면서 상주에 들리니, 도에서 모인 여러 사람들이 <고려의> 부흥책을 묻기에 공이 말하기를 ‘주나라가 부흥할 초기에 5개의 별이 모였다[1]는 것이 역사에 있고, 지금 새로운 세상이 되어 하늘이 다시 사람들을 모으고 있는데 감히 스스로 다시 돌아가겠는가.’라고 답하였다.
[1]즉 천운은 새 왕조편이다. 라는 뜻
太宗徵時得聞公天運所答甚善之招會盟脫行義興官誦陶淵明歸去來辭 世宗庚子十月十二日卒享年七九 墓豊角界蘿葍山甲坐虎占穴屬邑淸道郡今稱之
태종이 사람들을 모을 때 공의 ‘천운을 운운한 대답’에 대한 말을 듣고 심히 그것을 훌륭하게 여겨 회맹할 때에 불렀고, 의흥에 벼슬길로 나아가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읊었다. 세종 경자(1420)년 10월12일 별세하니 나이는 79세였다. 묘소는 풍각의 변두리에 있는 나복산 갑좌이고 호점혈(풍수지리의 한 가지)인데, 읍이 청도군에 속하니 지금 그렇게 칭해진다.
配夫人密陽朴氏父中書內令天鳳二云天翔中順令女丙申九月十九日卒
墓雙封左虎敎築土石成方墳如伏斗之相 二庶配墓所未詳
부인은 밀양박씨이고 부친은 중서내령은 지낸 천봉인데, 또 다른 설로는 중순령을 지낸 천상의 따님이라 한다. 병신(1416)년 9월19일 별세하였다.
묘소는 쌍분으로 좌측에 모셨으며 호랑이의 가르침으로 토석을 쌓아 네모의 봉분을 만든 것이 복두의 형상을 닮았다. 두 번째 부인의 묘소는 알 수 없다.
節孝公諱克一派初回
<管-文淑-伉-湑>
五世(5세)
子克一(자, 극일)
節孝先生 初號慕菴字用協子六男
절효선생으로서 처음의 호는 모암이고 자는 용협이며 6명의 아들을 두었다.
大明太祖洪武十五年壬戌二月八日生于淸道郡北面三聖山下臥龍嶝之陽雲溪里年甫五歲就齋開學陶靖節歸去來辭輒誦之
명나라 태조 홍무 15년 임술(1382) 2월8일 청도군 북면 삼성산 아래, 와룡고개의 양지바른 운계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5살에 재실에 들어가 학문을 하여 도정절(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아주 쉽게 외웠다.
八歲母夫人病疽公親吮血而完蘇又父患痢公貯痢埋地而經夜出嘗救藥完蘇出天孝子之論聞里不止也手種銀杏於北坪山下以築壇與諸兒日習禮
8살에 모친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서 완전히 낫게 하였다. 또 부친이 이질을 앓자 공이 모은 설사를 땅에 파묻고 밤잠을 자지 않고 지새워 새벽 일찍 나가서 약을 구해와 낫게 하였으니 하늘에서 나온 효자라는 말이 동네에 들리기를 끊이지 않았다. 손으로 심은 은행나무가 북평산 아래에 있었는데 단을 쌓고 여러 아이들과 같이 날마다 예절을 배웠다.
見父爰洛鯉膾公七夜前坪祝天七星神忽大雨臥龍山端自沒爲十尋沼通流大川料外鯉盛遊父托與釣䑓竟忘心患他人日釣不得一鯉皆感孝子公誠出之物也
부친이 강에서 잡은 잉어회를 즐기시는 것을 보고, 공은 7일 밤을 평평한 곳에서 하늘에 기원하니, <북두>칠성신이 갑자기 큰 비를 내려 와룡산의 끝자락이 저절로 무너져 내리고 10길이나 되는 깊은 늪이 통하여 흘러 큰 내를 이루어 의외로(料外) 많은 잉어들이 밖으로 나와 다녔다. 부친에게 부탁하여 같이 낚시를 하니 부친이 병중이라는 것을 잊을 정도였다. 다른 사람들은 날마다 낚시를 해도 한 마리의 잉어도 잡지 못하였다. 모두들 효자로서 공의 효성은 대단하다고 감동하였다.
十五歲以父命往學于冶隱吉先生賜小學一部留講三月告先生曰父母一老復不少文章錐晩年可成則願賜暇講先生甚善之賜事親之後也
15세(1396년)에 부친의 명으로 야은 길재(1353~1419) 선생에게 가서 배우고 소학 한권을 받았다. 거기에 머물면서 3개월간 공부했는데 선생에게 여쭈어서 말하기를 “부모는 한번 늙으면 다시 젊어지지 못하나 문장은 늙어서도 이룰 수 있으니 원하옵건대 휴가를 내어 주십시오.”라고 했다. 선생은 이를 심히 아름답게 여기고 부모를 먼저 섬긴 후에 하도록 했다.
二十奉恒産道三十五歲丁母喪泣血有虎來導葬地仍廬於墓側晨昏徒步於三十里奉親侍墓安二庶母至誠如一外舅判尹公常勸出仕以親老辭之
20세에 항산도(일반적인 생업)에 종사하고, 35세(1416년)에 모친상을 당해서는 피눈물을 흘리니, 호랑이가 와서 장지를 인도하여 주었다. 계속 묘소 옆의 오두막집에서 늦은 밤과 이른 새벽에 걸어서 30리 길을 다니며 부친을 봉양하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둘째 모친인 서모를 모시는 것도 지극 정성으로 하나같이 하여, 장인인 판윤공(한성판윤 이간)이 벼슬길에 나서라고 해도 늙은 부모를 모셔야 한다며 사양하였다.
庚子丁義興公喪葬於蘿葍洞虎占穴之左雙封仍侍墓有虎來護公以奠餘飼之如家畜泣血三年還古園虎又占先父母墓右下棺地
경자(1420)년 의흥공(부친 휘서)의 상에서는 나복동 호점혈의 좌측에 쌍분으로 모셨는데, 계속되는 시묘살이 중에 호랑이가 와서 공을 보호하고 제삿밥 남은 것을 주니 그것을 먹고, 마치 집에서 기르는 짐승처럼 피눈물을 흘렸다. 삼년을 마치고 돌아오려고 하니 옛날의 호랑이가 와서 또 부모묘의 오른쪽 아래에 관을 묻을 자리를 점지해 주었다.
公自感身後曾以吉先生賜暇命復正冠服日洗掃危坐講小學雖倉卒之時勿坐父母平日之座每佳辰歸省先墓又敎人有方設契相問吉凶事鄕隣同井莫不效倫理敦厚焉
공이 스스로 공부가 되었다고 느끼자 곧 길재 선생이 혼자서 공부하라고 명하였다. 다시 바르게 관복을 입고 날마다 청소를 하고 앉아서 소학을 공부했는데 비록 짧은 시간이라 할지라도 부모가 평상시에 앉았던 자리에는 앉지 않았고, 매번 한식을 전후한 좋은 봄날(佳辰) 때 마다 선조의 묘를 둘러보았다. 또 사람들로 하여금 계를 조직하게 하고 서로 간에 길흉사를 물어보아서, 같은 우물을 먹는 이웃 간에 윤리가 돈독해 짐을 본받지 않는 이가 없었다.
四十一歲見郡父老甚作鄕黨社稷祭誡司祭賢良名望士蟊蝗止息郡人皆慕熏化有也遭 國喪依從製禮世宗甲寅纂成三綱錄郡學修先生行實聞于 朝家道薦南臺持平潛深性理之學不就
41세 때(1422년) 청도군의 늙은이들이 자주 향당을 만들어 사직의 제사를 받드는 것을 보고, 사제와 어질고 착한 사람들이나 명망있는 선비들에게 벌레와 같은 일을 하지 말도록 훈계하니(?), 군의 사람들이 모두 따르고 감화됨이 있었다. 국상(정종별세)을 당하여서는 나라가 정한 예법에 따랐고, 세종 갑인(1434)년에 삼강록을 편찬하여 군에서 배우고 닦게 했다. 선생의 행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남대지평으로 추천되었으나 성리학에 심취하여 나아가지 않았다.
丙寅秋病彌留時遺訓子自羅末麗初先世復居金州又羅麗法曰王禮墓以下又士庶墓之五代則辭墓祭故擧皆無傳先墓又從火葬者亦然是以判書公以上墓則皆從先朝法以此知實守護判書公墓以下焉
병인(1446)년 가을에 병이 점점 심해졌을 때 아들에게 유훈하기를 “신라 말이나 고려 초에서 부터 선조들이 금주에 다시 돌아와 살았고, 또 신라나 고려의 법에서는 왕의 예를 갖춘 묘 이하와 일반 백성들의 묘는 5대 이상은 묘제를 지내지 않았다고 했으니, 대개가 다 선조의 묘소가 전해지지 않는다. 또 화장의 관습을 따른 것도 역시 그러하니 이 때문에 판서공(휘관) 이상의 묘소는 모두 이전 조정(신라와 고려)의 법에 따랐기 때문에 전해지지 않는다. 이런 사실을 바르게 알고 판서공 이하의 묘소를 수호해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自乙亥因病丙子十一月二日卒享年七十六儒林以禮葬于考兆下虎占穴艮坐尊號節孝先生郡守李椅修報孝行又後郡守趙嶔重事 聞 天順甲申表旌閭 贈職命禮官致祭
을해(1455)년부터 병으로 인하여 병자(1456)년 11월2일 별세하니 나이 76세였다.[1] 유림에서 부친(휘서)의 묘아래 호점혈 간좌에 예로서 장례를 지내고 존호를 절효선생이라 하였다. 군수인 이의수(李椅修)가 효행을 보고하고 또 그 후 군수 조금(趙嶔)이 다시 그 일을 들었으며, 천순 갑신(1464)년에 정려를 세워 표하고 증직하였으며 예관에 명하여 치제하게 하였다.
[1]1382년∼1456년이니 75세임
庚子春火但保廟宇二子孟自龍仁來復修前處士孝行遣馹孫於佔畢齋金先生宗直請孝門神道碑銘畧曰金官後裔乃有斯人髫齕秉誠白首維新參乎不愧婁也思齊神物亦感來衛云
경자(1480)년 봄 불에 탄 사당을 보수하고자 둘째아들 맹이 용인에서 와서 전 처사의 효행을 다시 쓰고, 일손을 점필재 김선생(김종직)에게 보내어 효문의 신도비명을 지어주기를 청하였다. 그 내용을 개략적으로 말하면 ‘금관(金官)의 후예로서 이러한 사람이 있으니 어릴 때 정성스러웠고 늙어서 더욱 새로웠네. 증삼(공자의 제자인 증자)에 부끄럽지 않고 검루(남재(南齋) 유검루(庾黔婁)로 지극한 효자)와 견주었는데, 신물(神物;호랑이) 또한 감응하여 처소에 와서 호위했네.’ 라고 되어 있다.
墓碣則遺言不立他石故墓下小巖治面俱刻六子官名健孟勇順靭鉉 墓下仍建蘿山齋
묘갈은 유언이 있어서 다른 돌은 세우지 않았고 묘소 아래에 작은 암석을 다듬어서 면을 만들었는데 거기에 6명 아들의 이름과 벼슬을 새겼다. 아들은 건,맹,용,순,인,현이다. 묘소 아래에는 또한 라산재를 세웠다.
○以下續修先生卒後四十二年戊午諸孫濯纓被史禍是時惡法常忍言常氣塞相惧勿言之誡
○이하 계속해서 개수하였으나 선생의 별세 후 42년 무오(1498)년에 손자인 탁영이 사화를 입자, 이때의 악법에 의해서 항상 말을 참고 항상 기운을 막으며 서로가 두려워하여 말을 하지 않음으로서 조심하였다.
先生身後至玄孫代冠幼生卒合七十人禍前身故七人永絶島四人坐謫十六人作散冠幼四十二錄也叔姪兄弟相惧遇他方對同宗禮至于九年
선생이 별세한 후 현손대에 이르기까지 성년이거나 어리거나 태어나거나 죽거나 한 사람이 모두 70인 인데, 사화가 일어나기 전에 죽은 사람이 7인, 영절도[?]가 4인, 연좌되어 귀양 간 사람이 16인, 흩어진 성인과 아이들이 42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숙질형제가 서로 다른 곳에서 만나거나 종친사이에 예를 갖추는 것을 두려워한지 9년이 되었다.
[?]멀리 떨어진 섬으로 귀양 간 사람인가?
中宗反政首洗寃禍解配復職還家庄先生後孫漸惧入深而曾孫大有本以先生之禀故仍存先庄以守先墓詞五十年勤修濯纓公事實故後世孰不偉仰哉
중종반정[1]으로 원통한 화의 누명을 씻고 유배가 풀려 복직되어 집으로 돌아왔으나 선생의 후손들은 점차 두려움에 깊이 빠지게 되었다[2]. 그러나 증손인 대유가 선생의 품성을 본받아 가지고 있어서 선생의 집을 보존하고 선조의 묘소와 말씀을 지켜서 50년간 탁영공의 일을 부지런히 갈고 닦았으니 후세에 누가 훌륭하다고 우러러보지 않겠는가.
[1]1506년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 등이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晉城大君:中宗)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
[2]아마도 김대유가 1519년 조광조의 기묘사화에 연루된 것을 이르는 것 같음
嘉靖壬子大軍籍時先生六子世系見于龍門校正錄 宣廟戊寅道郡士儒合席慕于節孝公至行薰化濯纓公靑天白日三足堂公孝友出天之遺風廣規建紫溪書院三先生幷享俎豆
가정 임자(1552)년 대군적[1]이 실시될 때 선생의 여섯 아들의 세계(世系)가 용문교정록(?)에 보인다. 선조 무인(1578)년 도(道)와 군(郡)의 선비들과 유림들이 합석하여 절효공의 지극한 행실과 깊은 감화, 탁영공의 죄가 없음, 삼족당공의 효도와 우애가 하늘에 드러난 일 등의 유풍을 추모하여 넓게 뜻을 모아 자계서원을 세우고 세분 선생을 같이 제사를 드렸다.
[1]아마도 군역을 부과하기위한 호적조사인 듯함
聞于朝 贈司憲府執義盖尋遺蹟善山有休息所尙州吉先生門往來時與許警菴同遊云
이 일을 조정에서 듣고 사헌부집의로 증직하고 유적을 찾아보니 선산에 휴식소가 있고, 상주의 길선생(길재) 문하에 왕래할 때 허경암[1]과 교유하였다고 한다.
[1]허조(許租, 1369년(공민왕 18년) ∼ 1439년(세종 21년)); 조선의 문신. 본관은 하양(河陽)이며 자는 중통(仲通), 호는 경암(敬菴),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어질고 강직한 사람으로 존경을 받았다.
大亂後戊申本郡士儒與姓孫幷力重倡三先生妥靈所常享文寒岡鄭先生述撰曰節孝金先生至誠動天異類來徵敎拾家庭永錫孫曾濯纓金先生行峻言厲身危道隆鄕邦百代永傃高風三足堂金先生內蘊經濟外事沈冥桑梓千秋仰止儀刑
대란(임진왜란) 후 본 군의 선비와 유림이 후손들과 힘을 합쳐 세분 선생의 위령소를 세우고 상향문[1]을 한강 정선생(정구,1543∼1620)이 썼는데 찬하기를 ‘절효 김선생의 지극한 정성은 하늘을 감동시켜 기이한 동물[2]이 모여들었고 집안에서 가르쳐 영원히 손자에게 주었네. 탁영 김선생은 행실이 우뚝솟고 말에 화를 당하니 몸은 위험하나 도는 융성하도다. 고을과 나라에 오래도록 고결한 풍속이 영원히 지켜질 것이네. 삼족당 김선생은 안으로는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할 능력을 갖추었으나 밖으로는 침묵하네. 뽕나무와 가래나무(고향, 또는 고향집)가 천년을 지낼 것이며 기풍과 모범을 우러러 받드리라.’라고 하였다.
[1]상향문; 사당을 세우고 이를 기념하는 글
[2]호랑이를 뜻하는 것 같음
○後設籍於丁巳監司尹喧以請債不如意搆誣卽狀啓
停刊尹監司收於譜板爲其達城賣書板又令燒校錄時三先生草譜諸文券失傳 孝文神道碑重建侍講院司書金佐明書提學呂甫徵篆大提學趙絅孝門銘跋
○그 후 정사(1617)년에 호적을 만들 때 감사 윤훤[1]이 빌려주기를 청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사실을 왜곡하여 얽어 넣어 장계(보고서)를 올려 간행을 정지시켰다. 윤감사는 달성의 판매판을 찍은 보첩의 판목을 수거하고 또 교정록도 소각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때 세분 선생의 여러 문건들이 없어져 버렸다. 효문의 신도비가 중건될 때 시강원 사서 김좌명(1616∼1671)이 글을 쓰고 제학 려 누구[2]가 전서를 썼으며 대제학 조경(1586∼1669)이 효문의 발문을 지었다.
[1]윤훤(尹喧,1573∼1627);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윤두수의 아들, 1617년엔 경상도 관찰사를 지냄
[2]여이징(呂爾徵,1588∼1656)임
○道儒請 賜額疏庚子蒙允辛丑夏宣額 贈三賢前職 御遣承旨臣致祭文現初篇
○도의 유림들이 액호를 내려달라는 상소를 올리자 경자(1660)년에 윤허되고 신축(1661)년 여름에 선액(宣額)되었다. 삼현을 이전의 직책에다 증직하고 임금께서 승지(좌승지 홍처량)를 보내어 제사를 올리게 했는데 치제문이 초편에 나와 있다.
○戊申湖西士儒開木川濯纓公別墅遺文凡不通本院而成刊一券文集又月城寺潛刊族譜有者脫得聞遂破丙寅復修古傳草譜者其帳籍及徵據事健孟勇鉉四派
○무신(1668)년에 호서의 선비와 유림들이 목천의 탁영공 별채의 유집들을 펴보았으나 앞뒤가 연결되어 있지 않아 본 사원에서 한권의 문집을 간행하였다. 또 월성사에서 비밀리에 간행한 족보가 있었는데 얻어들은 것을 탈피하여 결국 없애버리고 병인(1686)년에 예부터 전해오는 초본을 다시 수정하였는데 그 호적과 모은 근거들로서 건,맹,용,현의 4파를 만들었다.
配淑人李氏甲子三月八日生父漢城判尹暕○癸未十二月卒享年八十墓雙封俱有石物
부인은 이씨로서 갑자(1384)년 3월8일생이고 부친은 한성판윤 이간이다. ○계미(1463)년 12월에 돌아가시니 나이는 80세였고 묘소는 쌍분으로 석물이 있다.
六世(6세)
子健(자, 건)
永樂四年丙戌二月三日生字子直號斗溪文郡守視民如傷登頌庚子正月十日卒享年七十五
配恭人朴氏忌七月十日墓先塋下祔
영락 4년 병술(1406)년 2월3일생이고 자는 자직이고 호는 두계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영광군수)를 지냈고 백성을 돌보기를 애처로이 여겨 칭송을 받았다. 경자(1480)년 1월10일 돌아가시니 나이는 75세였다.
부인은 공인박씨로서 기일은 7월4일이고 묘소는 선영아래에 붙어있다.
七世(7세)
<健子> 泰碩(태석)
善德十年乙卯生一云泰孫進士字孝元戊午史禍坐謫金海府乙丑十二月三日卒享年七十一 ○墓上同原有子四女七 配宜人金氏己未生戊午十月一日卒享年六十墓祔 ○父判校漢啓
선덕 10년 을묘(1435)생이다. 또는 태손이라고도 불린다. 진사를 지냈으며 자는 효원이다. 무오사화에 연좌되어 김해부로 귀양갔다가 을축(1505)년 12월3일 돌아가시니 나이는 71세였다. ○묘소는 위와 같은 언덕에 있고 4남 7녀를 두었다. 부인은 김씨로서 기미(1439)생이고 무오(1498)년 10월1일 돌아가시니 나이는 60이었다. 묘소는 붙어있다. ○부친은 판교를 지낸 김한계[1] 이다.
[1]김한계(金漢啓,1414∼1460); 본관 義城. 자는 亨運. 호는 休溪. 永命의 子. 1438년 문과 급제. 成三問, 河緯地와 同榜으로 集賢殿學士로 知承文院事에 올랐으나, 端宗이 廢位되자 병을 핑계하고 鄕里 邦適洞에 돌아와 다시는 벼슬에 나가지 않았음
六世(6세)
子孟(자, 맹)
太宗庚寅八月一日生字子進號南溪世廟戊午中生員進士辛酉登科弘文博士癸酉校理除龍宮官時夢三駿馬自天而化靑雲入懷覺來孕生三子長駿孫仲驥孫季馹孫
태종 경인(1410)년 8월1일생이고 자는 자진 호는 남계이다. 세종조 무오(1438)년간에 생원과 진사가 되고 신유(1441)년에 등과하여 홍문관 박사가 되었고 계유(1453)년에 교리가 되었다. 용궁관으로 근무할 때 꿈을 꾸었는데 3마리의 준마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푸른 구름으로 변하면서 품안으로 들어왔다. 이 때 낳은 세 아들을 큰아들은 준손, 가운데 아들은 기손, 막내를 일손이라 하였다.[1]
[1]전부 이름에 말(馬)의 변이 들어감
成廟朝官吏曺佐郞佐理原從功臣奉敎司憲府執義庚子辭都摠府經歷歸田里曾與佔畢齋金宗直梅溪曺偉諸先生道義交居龍仁家庄聞先庄火患復修先考孝行遣季子馹孫受于佔畢金先生文癸卯九月十一日卒享年七十四
성종조에 벼슬은 이조좌랑으로 좌리원종공신에 봉해지고, 봉교 사헌부집의가 되었다. 경자(1480)년에 도총부경력을 사직하고 시골집으로 돌아와서 점필재 김종직(1431~1492)과 매계 조위(1454~1503)등 여러 선생과 더불어 도의로서 교제하였다. 용인의 집에 살 때 고향의 옛 집이 불탔다는 소식을 듣고 내려가 부친의 효행문을 다시 쓰기위해 막내아들 일손을 보내어 점필재 김선생의 글을 받아왔다. 계묘(1483)년 9월11일 돌아가시니 나이는 74세였다.
○淸道郡上北面水也村山乾坐以儲福先墓治例布尾板培土用事墓碣金宗直撰權睡軒五福撰誌文碑銘涵虛亭洪貴達撰 贈吏曺參判有文集一券
○청도군 상북면 수야촌 산 건좌이다. 저복<산>의 선조 묘소에 한 것과 같이 아름다운 판으로 덮고 봉분을 높게 하였다. 묘갈은 김종직이 찬하고, 수헌 권오복(1467∼1498)이 묘지문을 찬하고, 비명은 함허정 홍귀달(1438∼1504)이 찬했으며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문집 한권이 남아있다.
配貞夫人鄭氏生一女○父翰林仲處號漁隱先生丁卯九月十一日卒墓祔 系配貞夫人龍仁李氏有賢德生于甲辰二月二十四日卒丙午閏三月二十六日享年七十三 ○墓公墓佐俱碣父刑曺參議讓曾祖工曺典書中順有三男二女
부인은 정부인 정씨인데 1녀를 낳았다. ○부친은 한림을 지낸 정중처이고 호는 어은선생이다. 정묘(1447)년 9월11일에 별세하여 묘소는 붙어있다. 두 번째 부인은 정부인 용인이씨이고 어질고 덕이 있었다. 갑진(1424)년 2월24일에 태어나 병오(1486)년 윤3월26일 돌아가시니 나이는 73세였다. ○묘소는 공의 묘소 좌측이고 묘갈이 있다. 부친은 형조참의를 지낸 이양이고 증조부는 공조전서를 지낸 이중순이다. 3남2녀를 두었다.
<孟子> 駿孫( 준손)
端廟甲戌生字伯雲號東窓壬辰中司馬壬寅冬與仲弟俱登謁登科公居第二丙午中秋官弘文博士直提學
단종조의 갑술(1454)생이고 자는 백운이고 호는 동창이다. 임진(1472)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임인(1482)년 겨울에 가운데 동생(기손)과 같이 알등과<오류,親試임>에 합격하니 공이 제2등이다. 병오(1486)년에 추관(형조)이 되고 홍문박사 직제학을 지냈다.
戊午史禍俱三子坐謫湖南庚申季弟終喪之月聞禮安金氏遺言使長子大有行從所願丙寅仍見燕山亂政以推戴晋城大君之意傳檄京師賢家朴元宗柳順汀成希顔適因慈順大妣命反政
무오사화(1498)에 세 아들이 연좌되어 호남으로 유배되었고, 경신(1500)년 막내동생(일손)의 탈상하는 달에 예안김씨(일손의 두 번째 부인)의 유언을 듣고 큰아들 대유로 하여금 소원을 따르게 했다. 병인(1506)년에 연산군의 폭정을 계속보고 진성대군을 추대하려는 뜻을 가지고 서울의 어진 선비인 박원종(1467∼1510), 유순정(1459∼1512), 성희안(1461∼1513)에게 전달하니 이러한 연유로 자순대비가 반정을 명하였다.
中宗大王是卽晋城君首洗史禍寃解諸配蒙還之日訓子爲科止于徵官末職丁卯十二月十日卒享年五十四 ○墓淸道次邑殯山子坐
중종대왕 이분이 즉 진성군이니 사화의 원한을 씻어주었다. 유배지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온 날에 자식들에게 훈계하기를 미관말직이라도 과거를 보지말라고 했다. 정묘(1507)년 12월10일 돌아가시니 나이 54세였다. ○묘소는 청도의 차읍 빈산 자좌이다.
配淑人李氏父生員設忌墓祔無育
系配淑人高父司諫台翼祖直提學吏部尙書左參贊禮曺參議得宗曾祖戶部典書臣傑○忌十二月十二日○墓水也先山白虎方子坐有墓表有一子大有
三系配淑人南原梁氏父直長普判尙書友龍曾孫忌己巳十月二十六日墓公墓左俱有碣子三男大壯大畜大雅
부인은 숙인 이씨로서 부친은 생원 이설기이고 묘는 붙어있으며 아이가 없다.
두 번째 부인은 숙인 고씨이고 부친은 사간을 지낸 고태익(1454년 식년시 급제)이고 조부는 직제학, 이부상서, 좌참찬, 예조참의를 지낸 고득종이고 증조는 호부전서를 지낸 고신걸이다. ○기일은 12월12일이다. ○묘소는 수야선산이고 백호방 자좌인데 묘표가 있다.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대유이다.
세 번째 부인은 숙인 남원양씨이고 부친은 직장을 지낸 양보판이고, 상서를 지낸 양우용의 증손이다. 기일은 기사(1509)년 10월26일이며 묘소는 공의 묘의 좌측에 있고 묘갈이 있다. 세 아들을 낳았는데 대장, 대축, 대아이다.
<駿孫子>大有(대유)
成廟己亥生字天佑號三足堂庄有先生之資受學於季父門史禍全家坐謫湖南
성종조 기해(1479)년생이고 자는 천우 호는 삼족당이다. 선생(준손)의 자질을 닮았고 계부(일손)에게서 공부했다. 사화로 말미암아 전 가족이 연좌되어 호남으로 유배되었다.
庚申七月先考有遺命曰爾季叔母金氏遺願從則情0有未安0禍中0爾二弟0爾仲父之后也0弟000爾000春長0而雪寃後使爾弟 同立于爾仲季叔父後
경신(1500)년 7월에 부친(준손)이 유언을 남기면서 하신 말씀이 “너의 막내숙모 김씨(예안김씨로서 일손의 두 번째 부인)의 유언에 따라서, 아직 유배 중에 있으나 너의 둘째동생(대장)은 너의 숙부(일손)의 후사이다. 0동생000너의000봄0000 원통함이 풀린 후 너의 동생으로 하여금 너의 막내숙부의 후사로 세워라.”라고 하였다.
自丙寅洗寃時特配直長丁卯中司馬丁父喪己巳連系母喪泣血侍墓與弟分給田庄公取薄田奉先祀事
병인(1506)년에 원통함이 씻기어졌을 때 특별히 직장에 제수되었고 정묘(1507)년에 중사마시에 합격했고[1] 부친상을 당하고 기사(1509)년에 계모(남원양씨)의 상을 당하여 피눈물을 흘리며 시묘하였다. 동생(대장)에게는 밭과 집을 나누어 주고 공은 땅이 나쁜 밭을 가지며 선조의 제사를 받들라고 했다.
[1] 사마방목의 기록에는 진사2등 2위임
聞孝女館集季父遺文趙靜菴諸賢耶推獎己卯登賢良科官司諫正言除漆原宦化行三月男女異路作群小誣因士禍就因削職 上悟蒙還家門復散推悔火諸自文而遯世南溟曺植每從講
효녀관에서 계부(일손)의 유집을 수집한다는 말을 듣고 조정암(조광조,1482∼1519) 등 여러 어진 이들이 추천하여 기묘(1519)년에 현량과에 합격하여 사간 정언이 되었다. 칠원현감을 제수받아 감화한지 3개월이 지나자 남녀가 길을 따로 걸었다[1]. 군소간신들의 무고로 사화(기묘사화)가 일어나 관직을 삭탈 당하였다. 이에 깊이 깨달아 집에 돌아와서 집안이 다시 흩어질까 조심하여 자신이 쓴 여러 문서를 불태우고 세상을 피하여 남명 조식과 매번 학문을 논하였다.
[1]풍속이 좋아졌다는 뜻
仁廟乙巳復科宦全家夙金谷築一室僉愚淵上韜晦自樂扁其堂曰三足盖取壽足榮足食足之義使鋮承嫡遺命壬子二月二卒享年七十四
인종조 을사(1545)년에 현량과와 관작이 회복되었다. 모든 가족이 조신하여 금곡에 우연(愚淵)의 연못위에 방 한 칸의 집을 짓고 자신을 감추며 스스로 즐겼는데 그 집의 편액을 삼족이라 하였으니, 대개 나이에 만족하고 영화도 만족하게 누렸고 먹는 것도 만족한다는 뜻이다. 성(鋮)으로 하여금 후사를 이어라는 유언을 남기고[1] 임자(1552)년 2월2일 돌아가시니 나이는 74세이다.
[1]위의 내용으로 보아 鋮은 적자가 아니고 서자임
○墓金谷山艮坐丙辰南溟曺先生撰墓碣文栗谷李先生珥撰三足堂序傳
○묘소는 금곡산의 간좌이다. 병진(1556)년 남명 조식(1501∼1572) 선생이 묘갈문을 찬하고 율곡 이이(1536∼1584) 선생이 찬한 삼족당서문이 전해진다.
宣廟 贈應敎幷享于紫溪書院先生事載季父文集二卷譜責中或他賢卷
配淑人碧珍李氏縣監樑女乙卯四月九日召鋮鉎分給田庄仍卒墓雙封
선조조에 응교를 증직받고 자계서원에 같이 모시고 있다. 선생의 사적은 막내 숙부(일손)의 문집 2권에 실려있고 보책 중이나 혹 다른 현인들의 책에도 실려있다.
부인은 숙인 벽진이씨이고 현감을 지낸 이량의 따님이다. 을묘(1555)년 성(鋮)과 생(鉎)을 불러 밭과 집을 나누어 주고 돌아가셨다. 묘소는 쌍봉이다
<駿孫子>大壯(대장)
奉濯纓公祀
탁영공(일손)의 제사를 받들었다.
<駿孫子>大畜(대축)
奉梅軒公祀
매헌공(기손)의 제사를 받들었다.
<駿孫子>大雅(대아)
己未生字天俶號農隱己卯士禍隱于湖西南云
配豊山洪氏父縣監有範身后久未傳單故今於古傳
기미(1499)년생이고 자는 천숙이고 호는 농은이다. 기묘사화로 호서와 호남에 숨어 살았다고 전한다.
부인은 풍산홍씨이고 부친은 현감을 지낸 홍유범이다. 대아와 그의 부인은 오랫동안 단자가 전해지지 않아 지금 옛날에 전해온 것에 의해서 기록한다.
<大有子> 鋮(성)
○燕山甲子生字敬遠通德郞官軍資監正以先生遺命承嫡與弟鉎愛武陵山水石先考㔫爰命卜居種桃節花號四序齋壬子丁父喪乙卯丁歿六年侍墓每奠不0父母0日00丙辰00南溟曺先生撰000碣文昭0實誠
○연산조의 갑자(1504)년생이다. 자는 경원이고 통덕랑으로 벼슬은 군자감정을 지냈다. 선생(부친 대유)의 유언을 받들어 후사를 이었다. 동생인 생(鉎)과 더불어 무릉산의 산수를 좋아하여 부친의 명에 따라 살만한 곳을 가려 정하여 도절화의 씨를 뿌리고 택호를 사서재라 하였다. 임자(1552)년 부친이 별세하시고 을묘(1555)년 모친께서 별세하시자 6년간 시묘를 하였는데 제사를 지낼 때마다 부모님이 살아계신 때와 같이 하지 않음이 없었다. 병진(1556)년 남명 조식 선생이 찬한 묘갈<삼족당의 묘갈>에 소상하게 실제의 효성이 실려있다.
戊寅與本郡章甫倡紫溪書院己卯五月五日卒享年七十八墓上同有子二長早卒故不世季津奉先祀
配恭人李氏父僉使世鈿忌公同日○墓祔
무인(1578)년 본군의 선비(章甫;선비들이 쓰는 관)들과 같이 자계서원으로 일으키고[1] 기묘(1579)년 5월5일 돌아가시니 나이 78세<76세임>였다. 묘소는 위와 같고 아들이 둘 있었는데 장남은 어려서 죽어 세상에 없으므로 동생인 진이 선조의 제사를 받들었다.
부인은 공인이씨이고 부친은 첨사인 이세전이다. 기일은 공과 같은 날이다. ○묘소는 붙어있다.
[1]이전까지는 자계사(紫溪祠)였는데 이를 서원(書院)으로 격상시킴
<大有子> 鉎(생)
承重鋮之弟字愼遠受伯氏四序齋武陵家庄而號四時堂幼有至誠事親如小學專功癸未八月二日卒○人稱孝良人仍爲遊山之名乙未復還葬武陵山麓 贈司瞻寺僉正有一男一陽一女
配恭人星州李氏父二相長坤○忌正月二日○墓雙封以烈行蒙旌旌閭)
조부모의 제사를 받들고 성의 동생이며 자는 신원이다. 형으로부터 사서재의 무릉집을 받아서 택호를 사시당으로 하였다. 어려서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모시는 것이 소학을 공부하듯이 했다. 계미(1583)년 8월2일 별세했다. ○사람들이 칭하기를 효성스럽고 좋은 사람이라고 했으며 이로 인해 <효량이> 자주 놀던 산의 이름이 되었다. 을미(1595)년에 다시 무릉산의 기슭에 옮겨 장사지냈다. 사첨시 첨정에 증직되었고 1남인 일양과 1녀가 있다.
부인은 공인성주 이씨이고 부친은 찬성사 이장곤이다. ○기일은 1월2일이다. ○묘소는 쌍봉이며 열녀로서 정려가 세워졌다.
<孟子> 驥孫(기손)
乙亥十一月十一日生字仲雲號梅軒壬寅與伯兄登謁聖科公居第一上桃甲乙科官翰林佐郞養乞昌寧棄官還奉親壬子九月十六日卒
을해(1455)년 11월11일생이고 자는 중운, 호는 매헌이다. 임인(1482)년 형(준손)과 같이 알성과<오류,親試임>에 급제하였는데 공이 1등이었다. 갑을과(?) 벼슬은 한림과 좌랑을 지내다가 부모의 봉양을 위해서 창녕현감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와 부모를 모시다가 임자(1492)년 9월16일 별세하였다.
○墓龍仁介谷外祖墓側子坐有碣弟濯纓公撰曰黃甲第一名反第靑春三十八浮生云
配淑人興海崔氏乙亥生父直提學淵忌七月二日墓同原有一女○長姪大有以先命戊寅命其弟大畜奉于祀大經禍亂後世系依古傳錄之
○묘소는 용인 외조묘(刑曺參議 李讓) 옆에 있고 자좌이다. 묘갈이 있는데 동생인 탁영공이 찬하여 말하기를 “급제자 명단에 제1등으로 이름이 올랐으나 반대로 청춘은 38세로 뜬구름 같은 인생이었네.” 라고 했다.
부인은 숙인 흥해최씨로 을해(1455)생이고 부친은 직제학을 지낸 최연(1438년 식년시 급제)이다. 기일은 7월2일이며 묘소는 같은 언덕이다. 1녀를 낳았다. ○장조카 대유가 부친의 명으로 무인(1518)년 그의 동생 대축에게 명하여 제사를 모시게 했다. 화와 난을 지난 후 세계는 예부터 전해지는 기록에 의한다.
<驥孫系子> 大畜(대축)
生父駿孫丙辰生字天保蔭縣監出奉仲父母祀故居湖西
配全州李氏父箕川守種身後有五男古傳蠱缺故未詳忌墓子孫名今從古傳
생부는 준손이다. 병진(1496)년생이고 자는 천보이다. 음사로서 현감을 지냈다. 양자로 나가 가운데 숙부(기손)의 제사를 받들었다. 그래서 호서에 살게 되었다.
부인은 전주이씨이고 부친은 기천현감 이종신이다. 5남이 있었는데 예부터 전해지는 책이 좀이 썰고 결락되어 기일과 묘소와 자손이름은 상세하지 않다. 지금은 옛날부터 전해지던 것에 따른다.
<孟子> 馹孫(일손)
天順甲申正月七日生字季雲號濯纓庚子徃學于佔畢齋金先生門與金寒暄鄭一蠹諸先生道義交
천순 갑신(1464)년 1월7일생이고 자는 계운, 호는 탁영이다. 경자(1480)년에 점필재 김선생 문하에 가서 공부했는데 김한훤(김굉필) 정일두(정여창) 등 여러 선생과 도의로서 교제했다.
丙午連中生員進士及第官副正兼春秋記事典籍敎授弘文正字除遼東質正官庚戌奏天朝立遼禁弊碑名振中華而東國昌黎 復命 上嘉之賜駱山亭除注書檢閱史官
병오(1486)년에 연속해서 생원과 진사시험에 급제하여 벼슬은 부정겸 춘추기사, 전적교수, 홍문정자를 지내고 <1489년 11월 4일> 요동 질정관에 제수되었다. 경술(1490)년에 명나라 조정에 상소를 올려 요동에 금폐비(禁弊碑[1])를 세우게 하니 그 이름을 중화(중국)에 떨쳐 동국의 창려(한유;당나라의 문장가)라 했다.[2] 임금께 복명하니 임금이 기뻐하며 낙산정을 내리고 주서 검열사관에 제수했다.
[1]명나라 사람들이 요동의 조선 땅에 넘어오지 못하게 금지하는 글을 적은 비석
[2] 탁영선생연보기사 : ○遼東有中洲與義州只隔一帶水氷合之後漫爲平地彼此人民互相往來交通買賣 上恐惹事端嘗移咨遼東都司以防混處而不能禁至是委奏? 天朝以先生有專對之才特 召而遣之 帝諭都司將遼民冒耕等處盡行抛荒立碑禁約以革住種之弊
요동은 중주(中洲)에 있는데, 의주와는 다만 한 줄기 강물이 그 사이에 있는 곳으로서 얼어붙으며 평지가 되어 잇닿아지므로 피차의 인민이 서로 왕래 교통하면서 매매하였다. 임금은 이곳에서 사단(事端)이 야기될까 염려하여 일찍이 요동도사(遼東都司)에 공문을 보내어 서로 뒤섞여 사는 것을 방지하도록 요청하였으나 잘 금해지지 않고 있었다. 이에 임금은 선생이 혼자 능히 응대할 만한 재능이 있다고 판단, 천자(天子)의 조정에 주청하는 임무를 맡기기로 하고 특별히 소환하여 파견한 것이었다. 황제는 요동도사에게 유시하여 “장차 요동민으로 하여금 임자의 승낙없이 남의 땅에 농사를 짓거나 같이 거주하는 일을 하지 않도록 진력하라. 비석을 세워 금지조항을 약정하고 종족의 혼거(混居)에서 발생하는 폐단을 고치도록 하라.”하였다.
魯山君后復疏適見曺梅溪偉以 上命撰集金佔畢文首錄其吊義帝文因是登史欲扶節義也
노산군(단종) 후사의 복위상소 때, 마침 매계 조위(1454~1503)를 만나보고 임금의 명으로 김점필재의 글을 펴냈는데, 거기에 조의제문을 수록하여 역사에 올리고자 하였으니 절의를 북돋우는 것이다.
兼弘文博士司經世子侍講院說書修撰知製敎待敎爲天朝陳賀使書狀官入烏蠻館見禮部員外郞程愈得小學集說復命
겸하여 홍문관 박사, 사경, 세자시강원 설서, 수찬, 지제교대교를 지내고 명나라 진하사 서장관으로 오만관에서 예부의 원외랑 정유를 만나 소학집설을 얻고 돌아와 복명하였다.
上見嘉之命印頒中外有功於斯文特 命綱目校讎佐郞銓郞都事正郞校理奉敎直講 賜暇湖堂甲寅以獻納入兵曺正郞仍帶史官丙辰復 昭陵三疏蒙允戊午七月燕山主不悟羣小自己怨報囑說又不詳
임금이 보고 그것을 기뻐하며 인쇄를 명하여 여러 곳에 나누어 주도록 했다. 이 책으로서 공이 있어 특별히 명하여 강목교수, 좌랑, 전랑, 도사, 정랑, 교리, 봉교, 직강에 임명했다. 휴가를 주어 호당에서 학문을 연구하다가 갑인(1494)년에 헌납으로 병조정랑에 들어갔고 곧이어 사관을 맡았다. 병진(1496)년에 소릉복위를 위한 세 번의 상소를 올려 허락을 받았다. 무오(1498)년 7월 연산주가 군소 모리배 들이 자기들의 원한을 보복하려고 만든 설을 깨닫지 못하였고 또 자세히 알지도 못하였다.
成廟命錄忽寃棄東市二十七日午時京記則忽晝晦大風雨拔木飛瓦京都人不能行三日郡記則所居前川鳴咽鳴吐血流三日右二記見則天地之變乃止於收尸時仁心自然悲傷丙寅九月二日中廟反政洗寃復職解諸配
성종조에 왕명으로 기록된 것으로 인하여 갑자기 원통하게도 동쪽 시장터에 <시체가> 버려졌다. 27일 오시(11~13시)에 서울의 기록에는 갑자기 낮이 어두워지고 큰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나무가 뽑히며 기와가 날아다녀 서울사람들은 3일간 다니지도 못했으며, 군(청도군)의 기록에는 그가 살던 집의 앞 시내가 울음소리를 내며 흐르고 핏물이 3인간 흘렀다고 한다. 이 두 개의 기록은 천지의 변란이고 시신을 수습하자 멈췄으니 어진 마음이 자연히 비통하고 상처를 입었다. 병인(1506)년 9월2일 중종반정으로 원통함이 씻기어지고 관직이 복직되었으며 유배 간 사람들은 풀려났다.
戊辰先生伯兄小祥年長姪大有與弟大壯返葬于淸道水也考墓左下戌座原幷享于雲溪先祠改題紫溪盖取寃時血流之義事載草譜史禍記
무진(1508)년 선생의 큰형(준손)의 소상의 해에 큰 조카 대유가 동생 대장과 같이 청도의 수야산 부친의 묘소 왼쪽 아래 술좌 언덕에 옮겨서 장사를 지내고 운계의 조상 사당에서 제사를 모셨다. 고쳐서 부른 이름인 자계는 대개 원통함을 입었을 때 핏빛의 물이 흘렀다는 뜻이니 그 일이 보첩 초본의 사화의 기록에 실려 있다.
宣廟戊寅特贈都承旨顯廟辛丑遣左承旨洪處亮宣 額致祭緬仰三賢事見節孝公前註戊申湖西土不通本院先刊遺文一卷尤庵宋先生時烈撰序文本院則脫知故收其刊板藏 甲辰享竹林祠
선조 무인(1578)년에 특별히 도승지를 증직받고, 현종 신축(1661)년에 좌승지 홍처량을 파견하여 액호를 내리면서 치제했는데, 삼현을 우러러 생각한 일이 절효공을 나타낸 글에 보인다. 무신(1668)년에 호서의 선비들과는 서로 통하지 못하여 본 자계서원에서 먼저 간행하여 남긴 책 한 권에 우암 송시열 선생이 서문을 찬했는데, 본 자계서원에서 알고 있던 것이 누락되어 있으므로, 보관하고 있던 판각을 회수하였다. 갑진(1664)년에 죽림사에서 제사를 지냈다.
配淑夫人丹陽禹氏忌丁未四月十八日○墓先兆下寅坐父參判克寬
부인은 숙부인 단양우씨이며 기일은 정미(1487)년 4월18일이다. ○묘소는 선영묘소의 아래로서 인좌이며 부친은 참판을 지낸 우극관이다.
系配淑夫人禮安金氏父參奉尾孫祖掌令例曾祖參判淑良庚寅十二月二十五日生庚申七月召大有遺命二願曰一則汝弟大壯奉于先生祀一則我死汝季父墓移處祔我墓也眠闋日更衣血淚殉烈先生墓返葬時墓碣移立大小鵲城山夫人墓子坐前將遷祔標傳世遺訓
두 번째 부인은 숙부인 예안김씨로서 부친은 참봉 김미손이며 조부는 장령을 지낸 김예이고 증조는 참판을 지낸 김숙양이다. 경인(1470)년 12월25오일 생이고 경신(1500)년 7월에 대유를 불러 2개의 소원을 유언으로 말했는데 하나는 너의 동생 대장이 선생의 제사를 받들라고 한 것이고, 또 하나는 내가 죽거든 너의 막내숙부의 묘를 내 묘소 옆으로 옮겨달라고 하였다. 눈을 감던 날 옷을 갈아입고 피눈물을 흘리며 돌아가셨다. 선생의 묘를 옮길 때 크고 작은 묘갈을 옮겨 세우고, 작성산의 부인의 묘소의 자좌 앞에 장차 옮길 때는 옆에다 묻으라는 표시를 하여 유훈을 후세에 전하였다.
<馹孫系子> 大壯(대장)
成廟癸丑生字正中丙寅冬楊州石橋原養考權窆移葬養母金氏墓側仍居木川家庄戊辰生考小祥之年養考墓返葬于祖考墓左下己巳丁生母梁氏喪壬申受於伯大有遺命南原別庄仍居
성종조 계축(1493)년생이고 자는 정중이다. 병인(1506)년 겨울 양주(楊州)의 석교원(양주 남쪽 50리)의 양아버지(일손) 임시무덤(權窆)을 양어머니 김씨의 묘 옆으로 이장하고 계속해서 목천의 집에서 살았다. 무진(1508)년 친아버지(준손)의 소상 때에 양아버지의 묘를 조부의 묘 왼쪽 아래에 이장하였다. 기사(1509)년에 친어머지의 상을 당하였다. 임신(1512)년에 형 대유로부터 명을 받아 남원의 별장으로 가서 계속해 살았다.
戊寅蔭仕參奉己卯史禍全家居南原庄丙申官筮仕通訓大夫行昌寧縣監不差先訓微官之止入萬行山東店山水之美結廬自榮韜晦累召仕不就
무인(1518)년 음사로 참봉을 지냈고 기묘사화(1519년)때에 전가족이 남원으로 가서 살았다. 병신(1536)년 벼슬이 서사, 통훈대부, 행창녕현감이 되었으나 선조의 유훈에 조금도 차이가 없게 말단 관직도 그만 두었다. 만행산에 들어가 동점산의 산수의 아름다움에 초가집을 짓고 스스로를 감추고 벼슬에 불러도 나가지 않았다.
伯氏三足堂公常往來休息己酉冬伯兄贈訓曰有子二人一嶺一湖以守先祠家庄十一月二十八日卒享年五十七前號三俱堂或稱月谷遊人又稱白虎洞居士香山從侶○墓銅峴高節峙甲坐原俗傳具禮峴
형인 삼족당공이 자주 왕래하며 쉬어갔다. 기유(1549)년 겨울에 형님에게 말씀드리기를 “두 아들(갱과 장) 중 하나는 영남에 하나는 호남에 살게 하여 선조의 사당과 집을 지키게 하십시오.”라고 부탁하고 11월28일 별세하니 나이는 57세였다. 그 전에 호를 삼구당 또는 월곡유인 또는 백호동거사라 칭하며 향산과 더불어 살았다. ○묘소는 동현 고절치 갑좌언덕인데 사람들 사이에는 구례현(구례고개)이라 전해진다.
配淑人南原梁氏父縣監治準 壬申五月十七日遺命子月爾兄弟二人一嶺一湖以守先墓仍卒享年七十八○墓雙封有碣
부인은 숙인 남원양씨이고 부친은 현감을 지낸 양치준이다. 임신(1572)년 5월17일 아들에게 유언을 남기기를 너희 형제 두 사람은 한사람은 영남에 한사람은 호남에서 선조의 묘를 지키라하고 돌아가시니 나이는 78세였다. ○묘소는 쌍봉으로 묘갈이 있다.
<大壯子> 鏗(갱)
中廟丙子生字通遠蔭忠順衛以先訓還居淸道重修木川別墅00遺文忌十月十日墓東窓公墓山白虎方子坐原
중종조 병자(1516)년생이고 자는 통원이다. 음사로 충순위를 지냈으나 선친의 유훈으로 돌아와 청도에 살면서 목천의 별채를 수리하였다. 00글을 남겼다. 기일은 10월10일이고 묘소는 동창공(준손)의 묘소가 있는 산의 백호방 자좌언덕이다.
配恭人密陽朴氏父習讀河澄○ 忌八月十七日○墓雙封有阡表夫人以三足堂公遺命夫公卒後傳家二婿故遺稿散失言傳世
부인은 공인 밀양박씨이고 부치는 습독을 지낸 박하징이다. ○기일은 8월17일이다. ○묘소는 쌍봉이며 길이 있어서 표시하고 있다. 부인<삼족당공의 조카며느리가 됨>에게 삼족당공이 유언하며 명하기를 남편(갱)이 죽으면 둘째 사위(李濂)에게 이사가서 살라고 했는데 글들은 흩어져 없어지고 말만 세상에 전한다.
<참고>1924년 甲子譜(갑자보)
<鏗子> 致九(치구)
字五之號林隱 明宗八年癸丑五月十五日生早遊重峰趙文烈公憲門當 宣廟亂避于洪州嘉林居木川鵲城山磻谷里嘯詠林泉此地卽濯纓先生杖履之處也曾祖妣金氏墳墓之所也
자는 오지이고 호는 임은이다. 명종8년 계축(1553)년 5월15일생이다. 젊어서 문열공 중봉 조헌(1544~1592)의 가문과 교유하였다. 선조조의 임진왜란을 당하여 홍주(충남 홍성군)의 가림(현 충남 부여군)으로 피난갔다가 목천의 작성산 반곡리에서 시를 읖으며 살았는데 임천이 바로 이곳이다. 즉 탁영선생이 거닐던 곳이고 증조모 김씨(예안김씨로서 탁영의 두 번째 부인)의 분묘가 있는 곳이다.
丁酉遂入藍浦島捿山中潛心性理不求聞達 宣廟三十六年癸卯薦經學才行拜童蒙敎官不就濯纓先生年譜等編及先世文獻藏函錮鎻以遺子孫刻詩函面以戒之曰孤踪畏約隱山林不說先人只說金爲恐遺文重召禍故敎藏護更深深公之徵意盖有在也光海君二年庚戌四月二十日卒壽五十八墓洪州鶴山壬坐
정유(1597)년에 마침내 남포도의 서산에 들어가서 성리학에 마음을 쏟고 유명해지기를 바라지 않았다. 선조 36년 계묘(1603)년 학문에 밝고 재주와 행실이 뛰어나 추천에 의해서 동몽교관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탁영선생 연보 등을 편찬하고 또 선조의 문헌이 들어있는 함을 단단하게 잠그고 자손들에게 함의 면에 시를 새겨 경계한 말이 “외로운 종적이며 두려움에 위축되어 산림 속에 숨어 살며 선조에 대한 말을 하지 말 것이다.”하며 단 김씨들에게 두려움이 되는 것은 이 남겨 놓은 문적들이 다시 화를 부를지도 모른다는 것을 설명해 주며, 잘 보관하며 지켜야 할 것이라고 가르치고 다시금 깊이깊이 공의 뜻을 말했으니 대개 이 같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광해군 2년 경술(1610)년 4월20일 별세하니 나이는 58세였다. 묘소는 홍주의 학산 임좌에 있다.
配宜人昌寧成氏 明宗七年壬子三月一日生 宣祖三十九年丙午八月二十四日卒壽五十五父佐郞 贈吏判德元 祖 贈左承旨鳳曾祖郡守世功外祖監察瑞興金允章 墓祔左
부인은 의인 창녕성씨로서 명종 7년 임자(1552)년 3월1일생이다. 선조 39년 병오(1606)년 8월24일 돌아가시니 나이는 55세였다. 부친은 좌랑을 지내고 이조판서를 증직받은 성덕원이고, 조부는 좌승지를 증직받은 성봉이고 증조는 군수를 지낸 성세공이며 외조부는 감찰을 시낸 서흥 김윤장이다. 묘소는 왼쪽에 붙어있다.
<大壯子> 鏘(장)
中廟庚辰生字聲遠蔭司果以先訓仍居南原守先墓○忌四月二十二日墓先兆下甲坐一男三女
配全州柳氏忌三月十四日○墓雙封父司果世鳳祖大司諫贈吏曺判書軒高祖直提學克恕
중종조 경진(1520)생이며 자는 성원이다. 음사로 사과를 지냈으며 선조의 유훈으로 계속해서 남원에 살면서 선조의 묘를 지켰다. ○기일은 4월22일이고 묘소는 선영아래 갑좌이다. 1남3녀를 두었다.
부인은 전주류씨이고 기일은 3월14일이다. ○묘소는 쌍봉이다. 부친은 사과를 지낸 류세봉이고 조부는 대사간을 지내고 이조판서를 증직받은 류헌이고 고조는 직제학을 지낸 류극서이다.
<克一子> 勇(용)
太宗癸巳三月六日生字子樂號闌溪世廟丁卯文科官翰林奉敎檢閱與煙村崔先生德之友善有羣豹一班錄
成廟癸卯九月十一日卒享年七十一墓金海府北翰林亭山 坐五男一女
配淑人崔氏乙未七月八日卒○墓祔
태종 계사(1413)년 3월6일생이고 자는 자락, 호는 란계이다. 세종조 정묘(1447)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은 한림, 봉교, 검열을 지내고 연촌 최덕지(1384~1455)선생과 같이 우애와 선이 여럿 가운데 뛰어났다고 기록에 남겨져 있다.
성종조 계묘(1483)년 9월11일 돌아가시니 나이는 71세였다. 묘소는 김해부의 북쪽 한림정산의 좌에 있다. 5남1녀(漢孫,漢碩,漢柱.漢堅.漢萬,李連孫)를 두었다.
부인은 숙인최씨이고 을미(1475)년 7월8일 돌아가셨다. ○묘소는 붙어있다.
<勇子> 漢孫(한손)
世廟庚申生初諱漢裕科名漢文科察訪遂慶山亭史禍作散人
配都氏父振赫○乙丑生
세종조 경신(1440)년생이고 처음 이름은 한유이다. 한문과에 급제하고 찰방을 지내다가 경산정에 있을 때 사화를 당하여 세상일을 멀리하고 한가롭게 사는 사람이 되었다.
부인은 도씨이고 부친은 도진혁이다. ○을축(1445)생이다.
<勇子> 漢碩(한석)
壬戌生初諱益裕仕參奉忌十月十日
配全州李氏忌三月七日墓花堤山艮坐雙封
임술(1442)년생이고 처음 이름은 익유이다. 벼슬은 참봉을 지냈고 기일은 10월10일이다.
부인은 전주이씨로서 기일은 3월7일이며 묘소는 화제산 간좌에 쌍봉으로 되어있다.
<勇子> 漢柱(한주)
丙寅生一云春碩
병인(1446)년생이고 이름이 춘석이라고도 전해진다.
<勇子> 漢堅(한견)
一云泳碩壬申生
또는 이름이 영석이라고도 하며 임신(1452)생이다.
<勇子> 漢萬(한만)
一云用萬
또는 이름이 용만이라고도 한다.
<克一子> 順(순)
太宗乙未六月三日生字子祥號淸溪己酉進士以先訓居金海臥龍里以守先墓丁未十月七日卒享年七十三○墓金海淸川黃山庚坐有碣函特書進士金順之墓云有三男
配宜人宋氏忌三月十日○墓祔
태종 을미(1415)년 6월3일생이고 자는 자상, 호는 청계이다. 기유(1429)년 진사가 되어 선조의 유훈으로 김해 와룡리에 살면서 선조의 묘를 지켰다. 정미(1487)년 10월7일 돌아가시니 나이는 73세였다. ○묘소는 김해 청천의 황산 경좌이고 묘갈이 있는데 그 속에 진사 김순의 묘라고 특별히 써져 있다고 한다. 3남을 두었다.
부인은 의인송씨이고 기일은 3월10일이다. ○묘소는 붙어있다.
<順子> 伯堅(백견)
世廟壬子九月十二日生中生員與西岡係錦重倡會老堂癸丑請從弟濯纓公撰老堂記文○忌同年十一月九日享年六十二
墓還葬淸道郡東龍山內洞後艮坐
配宜人李氏忌公同日墓祔
세종조 임자(1432)년 9월12일생이다. 생원일 때 서강계금(김계금)과 같이 회로당을 지었다. 계축(1493)년 종제인 탁영공이 회로당의 기문을 찬하였다. ○기일은 동년(1493) 11월9일이고 나이는 62세였다.
묘소는 청도군 동용산 내동뒤 간좌에 이장하였다.
부인은 의인이씨이며 기일은 공과 같은 날짜이며 묘소는 붙어있다.
<順子> 仲堅(중견)
丁巳生生員史禍公坐謫延日三子作散人見刑曺錄 配宜人朴氏
정사(1437)년생이고 생원을 지냈다. 사화때에 공이 연좌되어 연일로 귀양갔다. 세 아들도 세상일을 멀리하고 한가롭게 사는 사람이 되었다고 형조의 기록에 보인다. 부인은 의인박씨이다.
<順子> 叔堅(숙견)
世宗壬戌生坐謫金海再見己卯禍金家晦跡
세종 임술(1442)년생이고 연좌되어 김해로 귀양갔다. 다시 기묘사화를 당하여 김씨 가문의 흔적이 희미해졌다.
<克一子> 靭(인)
太宗己亥正月十日生字子安號中溪蔭仕錄事丁巳與弟鉉俱得重病歲久丙寅偕蘇仍仍娶而有二男丁巳二月二十九日卒享年七十九○墓在慈仁赤堤山丑坐
配密陽朴氏父直長希孟祖兵使祗生曾祖典書忱生忌日未詳墓祔
태종<세종임> 기해(1419)년 1월10일생이고 자는 자안이고 호는 중계이다. 음사로 녹사를 지냈다. 정사(1437)년 동생 현과 같이 중병을 얻어서 오랫동안 아팠다. 병인(1446)년에 둘 다 병이 나아 장가를 들었다. 2남이 있다. 정사(1487)년 2월29일 돌아가시니 나이는 79세였다. ○묘소는 자인의 적제산 축좌에 있다.
부인은 밀양박씨로서 부친은 직장을 지낸 박희맹이고 조부는 병사를 지낸 박지생이고 증조부는 전서를 지낸 박침이다. 생일과 기일은 알 수 없고 묘소는 붙어있다.
<靭子> 騮孫(류손)
端廟乙亥生改諱驪孫史禍坐謫公須丙寅冬解配己卯復見家禍使四男散居遠鄕丙戌八月二日卒享年七十二墓自公須先山移葬考兆下號晩華齋
配安東權氏戊寅生○忌十月一日 墓祔
단종조 을해(1455)년생이고 이름을 여손으로 바꾸었다. 사화에 연좌되어 귀양갔다. 병인(1506)년 유배가 해제되었고 기묘(1519)년 다시 가문이 화를 당하여 네 아들이 고향에서 먼 곳에 흩어져 살았다. 병술(1526)년 8월2일 돌아가시니 나이는 72세였다. 공의 묘는 선산에 있다가 부친의 묘소 아래로 이장하였다. 호는 만화재라 한다.
부인은 안동권씨로서 무인(1458)년생이다.○기일은 10월1일이며 묘소는 붙어있다.
<靭子> 驖孫(철손)
朴氏譜書鐵孫史禍後稱玉孫學於叔父南溪先生門以文行官參奉見家禍入密陽菊花山中號晩香齋己卯禍移居觀晶洞三遷白蓮洞○忌十月九日享年五十七
配高阜李氏忌八月十九日○墓先山壬坐雙封
박씨의 보첩에 철손은 사화 후 옥손으로 불리었다고 적혀있다. 숙부인 남계선생(맹)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학식과 행실이 좋아 벼슬은 참봉을 지냈다. 집안이 화를 당하는 것을 보고 밀양의 국화산에 들어갔고 호를 만향재라 하였다. 기묘사화(1519) 때에 관정동으로 이사하고 세 번째로 백연동으로 옮겼다. ○기일은 10월9일이며 나이는 57세였다.
부인은 고부이씨로서 기일은 8월19일이다. ○묘소는 선산의 임좌에 쌍봉으로 되어있다.
<克一子> 鉉(현)
世廟六年三月三日生字子賢蔭仕進義副尉丁巳與五兄靭俱得重病至丙寅父病痢數月奄別世公祈天斷自己左四脂垂血于父口命還彌留仍得玄蛇藥與病兄感神同眼之厥疾偕蘇亞兄南溪先生賞婚具物又出天孝友事現郡題
세종조 6년(1424년) 3월3일생이고 자는 자현이다. 음사로 진의부위가 되었다. 정사(1437)년 다섯째 형인 인과 같이 중병을 얻어 병인(1446)년까지 아팠다. 부친이 이질을 앓아 수개월간 고생하다가 갑자기 별세하려고 하니 공이 하늘에 기도하고 자신의 왼쪽 넷째 손가락을 끊어 피를 부친의 입에 흘러 넣어 드리니 생명이 돌아와 오래도록 살아있었다. 계속해서 검은 뱀 약을 구하여 병중인 형에게 주니 신이 감동하였는지 함께 앓아온 병이 전부 나았다. 둘째형 남계선생(맹)이 상(賞)으로 결혼시키고 여러 세간을 갖추어 주었다. 또 하늘이 낸 효도와 우애의 사적은 군지에 실려 있다.
娶于昌寧成公以煥女生長女次男癸酉爲蔭乙亥丁荊憂丙子再娶于參奉李興女甲申自守隱逸而出居金谷托興釣坮號愚淵溪盖取黙深在溪之義
창녕사람인 성이환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장녀와 차남을 낳았다. 계유(1453)년 음사로 벼슬하고 을해(1455)년 부인을 잃어 병자(1456)년 참봉 이흥의 따님에게 다시 장가를 들었다. 갑신(1464)년 세상과 떨어져 지내다가 나와서 금곡에 살면서 취미삼아 낚시를 일삼았다. 호는 우연계이니 대개 침묵하며 깊은 계곡에 살고 있다는 의미이다.
雖遠居每朔初省賀于親墓或對美饌則自獻五兄誠孝敬友之道於人大闡戊午秋適遭史禍濯纓公之季父故年有八旬移配公須感慕于觀晶先廟頹敗命子重倡一室於太和城東幷安羅朝始仕五名祖從士林勿論名之祠曰太和不忘先遺城名也
비록 멀리 떨어져 살았지만 매달 초마다 어버이의 묘소에 성묘를 갔고, 혹시 맛있는 반찬을 대하더라도 스스로 이를 다섯 형님들에게 바쳤으며, 사람들을 대하는 정성과 효도와 우애의 도리를 크게 펼쳤다. 무오(1498)년 가을 마침 사화를 당하자 탁영공의 숙부로서 나이가 팔순인데도 유배를 가게 되었다. 공은 오로지 관정의 선조의 묘소가 쇠퇴할 것을 생각하여 자식에게 명하여 태화성의 동쪽에 집 한 칸을 마련하라고 하였다. 아울러 안라 조정에서 처음으로 벼슬한 5명의 조상을 따랐다.(?) 사림에서는 물론 이름난 사당에 대해서 말하기를 태화는 잊지 못할 선조의 유적인 성(城)의 이름이라 했다.
中廟二年七月七日卒 墓仍居後仍葬亥坐事蹟見於公須蔚山古邑誌大云封標錄子孫仍居或居西舍里雲谷
配成氏戊申生○忌十月十日○墓在蘿葍先兆下失傳迎魂祔公墓復作壬坐 系配李氏忌己巳二月二日○墓親兆下壬坐
중종조 2년(1507) 7월7일 돌아가셨다. 묘소는 살고 있던 곳의 뒤에 장례를 지냈는데 해좌이다. 사적이 공이 머물렀던 울산의 고읍지에 크게 나와 있다고 하며, 봉표(경계를 표시한 돌)에 자손이 오래도록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혹은 서사리 운곡에서 살았다고도 한다.
부인은 성씨이고 무신(1428)년생이다. ○기일은 10월10일이다. ○묘소는 라복의 선영 아래에 있었으나 전하지 않고 영혼만 공의 묘 옆에 다시 모셨는데 임좌이다. 두 번째 부인은 이씨이고 기일은 기사(1509)년 2월2일이다. ○묘소는 부친묘소 아래 임좌이다.
<鉉子> 洛孫(낙손)
改諱連碩永孫字瑞雲文廟庚午生以文學庚子春相公洪應薦官至薺浦僉使公留京桃洞洪相公戱贈號家人齋從遊皆稱之名望大聞戊午禍日記傳門學朴鄭二仁回奉親
이름을 연석, 영손으로 바꾸었고 자는 서운이다. 문종조 경오(1450)년생이다. 문장이 뛰어나 경자(1480)년 봄에 상공(좌의정) 홍응(1428∼1492)이 추천하여 벼슬은 제포첨사에 이르렀다. 공이 서울의 도동에 머물 때 홍상공이 장난삼아 가인재라는 호를 붙여주고 같이 교유하니 모두들 이름이 원대하다고 하였다. 무오사화의 일을 듣고 날마다 기록하여 박(朴)과 정(鄭)의 두 사람에게 전하고 돌아가 어버이를 모셨다.
庚午塩浦尒浦釜山浦三夷作亂先陷公須東平次圍熊川公倡義光山以保邑民千餘口大將軍黃柳二公事 聞官折衝將軍未幾合蔚山己卯十二月十二日卒
경오(1510)년 염포(울산시 염포동), 이포(경남 진해 웅천동), 부산포(부산 동래)의 세 곳에 오랑캐(왜)가 난을 일으켜(삼포왜란) 먼저 함락되자 공이 동평에서 기다렸다. 다음에 <왜가> 웅천을 포위하자 공이 광산에서 창의하여 읍민 1천여명을 보호하였다. 대장군 황과 류(黃衡, 柳聃年)의 두 분의 일을 듣고 절충장군이 되어 얼마 지나지 않아 울산에서 싸웠다. 기묘(1519)년 12월12일 별세했다.
○墓移上同原乾坐與子俱現散人四十二錄有八男大休大栽大植大甫大傑大潤大從潤一長女裴世綸○潤出系潤公派改名繼銅居南玉
配淑夫人李氏丁卯生○忌十月十日墓祔父通德郞馥祖五衛將宗茂曾祖中樞府事芸
系配淑夫人坡平尹氏○忌臘月十二日○墓上同山
○묘소는 위와 같은 언덕의 건좌에 옮겨졌다. 자식들과 같이 세상과 떨어져 사는 사람들인 42인 기록에 보인다. 8남은 대휴, 대재, 대식, 대보, 대걸, 대윤, 대종, 윤이고 한명의 장녀는 배세륜에게 시집갔다. ○윤은 양자로 가서 윤공파가 되었는데 이름을 계동으로 바꾸었고 남옥에 살았다.
부인은 숙부인 이씨이고 정묘(1447)생이다. ○기일은 10월10일이고 묘소는 붙어있다. 부친은 통덕랑을 지낸 이복이고 조부는 오위장을 지낸 이종무이고 증조는 중추부사를 지낸 이운이다.
두 번째 부인은 숙부인 파평윤씨이다. ○기일은 12월12일이다. ○묘소는 위와 같은 산이다.
<鉉子> {馬+昔}孫(석?손)
古傳散人錄公壬午生無育而卒配沃川全氏自西岳取公之兄子大從爲后今傳新靈黃山修其牒六兄弟又公配尹氏沒二女兄弟疑是大從改五從耶後不分生養家耶疑探知則靈山二地人久係各色其造自現故却而此遺後世訓傳世亦無訪移
예전에 전해오는 산인록[1]에 의하면 공은 임오(1462)년생이고 자식없이 별세했다. 부인은 옥천전씨이다. 서악에서 공의 형(낙손)의 아들인 대종으로 양자를 삼았다. 지금 전해오는 신령 황산에서 펴낸 가첩에, 여섯 형제와 또 공의 부인인 윤씨가 죽고 나서 2명의 딸이 있었다는 것이 의심스럽다. 이것은 대종(大從)이 오종(五從)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며 그 이후 양자로 간 집에서 아이를 낳았는지 불분명하다. 의혹을 찾아서 알아보니 영산은 두 곳이 있고 사람들도 오래되고 그 관계도 각색이므로 그 위조한 것이 저절로 나타난다. 그러니 받아들이지 않으니 이를 후세에 교훈으로 남겨 세상에 전하니 또한 옮겼는지 찾아볼 것도 없다.
[1]세상일에 관심없이 떨어져 사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
<참고>
金谷齋譜所任錄
都廳 幼學金聲律(克一-健-泰碩-仁孫-積-應龍-瑋-念河-聲律1644)
都有司 幼學金聲達(孟-駿孫-大壯-鏘-致三-善慶-濈-聲達1635)
校正 進士金重兼(孟-駿孫-大有-鋮-津-八凱-系基俊-碩玄-重兼1649)
幼學金聲大(孟-駿孫-大壯-鏘-致三-善慶-漾-聲大1661)
書寫 幼學金暁弼(鉉-連碩-大休-綱明-允福-有聲-念達-莢承-曉弼1659)
金世行(孟-駿孫-大壯-鏘-致三-善慶-潝-聲振-系世行1658)
監印 幼學金起周(勇-漢碩-元戒-芮昌-永浩-乙生-泗英-景琅-起周(1651)
收單有司 幼學金景琡(勇-漢碩-元戒-芮昌-永浩-義祥-泗鳳-景琡1624)
金聲呂(健-泰碩-仁孫-積-應龍-瑗-系洛-聲呂1646)
金聲重(孟-駿孫-大壯-鏘-致三-善慶-潝-聲重1640)
金鶴承(鉉-洛孫-大休-綱明-彦福-系振聲-念凱-鶴承1536)
金正憲(鉉-洛孫-大休-炯明-應福-今發-弘立-正憲1664)
掌貨 幼學金聲玉(孟-駿孫-大壯-鏘-致三-善慶-瀹-聲玉1645)
別有司 幼學金榮憲(鉉-連碩-大休-琛-福守-金伊-弘達-榮憲1663)
金繼遠(鉉-洛孫-大栽-堔明-錄守-金生-鈴森-繼遠1664)
※참고 : 원문 일부 글자의 판독이 어려워 필사본, 1914갑인보 및 1924년갑자보, 탁영선생연보. 기타 보첩 등을 참고하였지만 일부 해독할 수 없는 곳이 있고, 혹 다른 글자로 판독되어 해석에 오류가 있을 수도 있음. - 편집자 竹山 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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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게서원사액후수보(1686 병인년, 숙종)는 삼현파 최초의 대동보(족보)인 것으로 생각하고있습니다. 귀중한 시간을 할애하여 원문과 해석을 해서 제공해주신 노고와 정성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