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사
(忠烈祠)
조선시대 선조의 명에 따라 제7대 통제사 이운룡 (統制使 李雲龍) 이 1606년에 세운것으로 매년 봄과 가을 두 차례에 충무공 이순신 (李舜臣)장군의 제사를 올리던 곳이다. 1663년에 현종은 홍살문(紅살門)을 다시 세우게 하고 충렬사의 이름을 내려 현판으로 걸게 하였다. 1695년에는 제70대 통제사 최숙(崔숙)이 경충재 (景忠齋)를 세워 사당을 열고 충무공 정신을 계승하는 인재를 키웠고 1719년에 제92대 통제사 김중기 (金重器)는 숭무당(崇武堂)을 짓고 3명의 장교를 주재시켜 충무공의 제사와 충렬사의 관리를 담당케 하였다. 1795년에는 정조가 충무공전서 (忠武公全書)를 발간하여 여기에 보관케 하였는데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1895년에 통제영이 폐지되자 고장의 유지들이 충렬사보존회를 결성하여 충무공의 제사를 모시며 충렬사를 관리하고 있다.
강한루 (江漢樓)
강한(江漢)은 중국(中國)호북성(湖北省)의 성도(省都)무한(武漢)에 있는 지명이다. 강한(江漢)은 무한(武漢)을 가로질러 흐르는 장강(長江)과 지류(支流)인 한수(漢水)가 합류하는 지역으로 장강(長江)에서 강(江) 한수(漢水)에서 한(漢) 이두자(字)를 취하여 강한(江漢)이라 부르고 예로부터 열숙이 각축하던 삼국지의 무대이며 이름난 경승지(景勝地)이다.
충렬묘비명 (忠烈廟碑銘)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공 위는 선무공신 1등, 덕풍부원군 영의정 이시다. 묘는 사당을 비명은 비에 새긴글을 말하는데 충렬묘비명은장군의 공적을 기리고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광해군이 백사(白沙) 이항복 (李恒福)에게 명을 내려 글을 짓게하고 뒤에 제60대 통제사 민섬 (閔暹)이 비와 비각을 여기에 세웠다. 우암(尤巖) 송시열 (宋時烈)선생이 글을 쓰고 문곡(文谷)김수항 (金壽恒)이 전서 하였다.
이언상사적비 (李彦祥事跡碑)
이충무공의 5대손 (9위)는 가선대부에 이르렀다. 선대 충무공 이순신을 본받아 군선관리에 치밀하였고 갑병에 청교 하였다. 둔전을 크게 얿혀 군정(軍政)을 두터히 하고 창고를 열어 빈민을 구제하고 백성에게 덕을 끼치는 옛 풍속이 은연중에 되살아나게 하였다. 지극히 존귀 하였으나 군부개혁은 일상사요 청렴결백하여 의복은 좋은 갑옷이 두벌이 없고 음식은 조식(組食)을 마다하지않지 않았다. 위엄과 은혜를 같이하여 민심을 크게얻어 후세에 미명을 남겨 군정의 본이 되었다. 이충무공 이후 덕수 이씨 통제사가 없더니 여섯분의 통제사가 배출되었으니 가문의 중흥이 이루어졌다고 하겠다.
덕수이씨후손통제사공적비 (德水李氏後孫統制使功績碑)
제121대 이 태상 (李泰祥) 제138대 이 한창 (李漢昌) 제143대 이 한풍 (李漢豊) 제167대 이 항권(李恒權) 제172대 이 승권 (李升權) 충무공 이순신 초대삼도수군통제사 이후로 부임한 열두명 후손 통제사 가운데 위에 적은 다섯분의 공적비 이다.
동재 (東齋)
헌관 (獻官)과 집사 (執事)들이 향사를 봉행하기 전에 심선을 정화 (淨化)하고 제복으로 갈아 입는 곳이다. 제 51대 통제사 김경 (金鏡)이 맞은편의 서재 (西齋)와 동시(1670)에 건립 하였다.
정당 (正堂)
정당은 민족의 수호신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영명에계향을 올리고 공의 정신과 위혼을 만대(萬代)에 기리기 위하여 제 7대 통제사 이운몽이 선조의 명을 받아 세웠다. 이충무공 한분의 위폐를 모시고 역대 통제사가 약 300년간 제향을 받들어 온 가장 신선한 장소이다.
내삼문 (內三門)
정당의 출입문으로 삼문중 가장 안쪽의 문이다. 단아하면서도 정교한 건축양식으로 조선중기 삼문조형 (三門造形)정화 이다. 솟을 삼문으로 신문(神門)의 양측 초석을 해태로 조각하고 안박에 활주(버팀기둥) 8개로 지붕의 무게를 받쳤는데 각 활주 아래의 석가는 8기 돌기둥 이다.통용문인 양쪽 협문(狹門)을 낮게 만든것은 몸을 낮추고 삼가는 몸가짐으로 출입하기 위함이다. 익공식 맛배지붕에 겹처마이며 삼믄의 창방 위를 화반(花盤)으로장식 하였고 신문(神門)양쪽의 봉황은 연화단청문양 으로 조각하여 꾸몄다.
통영충렬사팔사품 (統營忠烈祠八賜品)
팔사품은 중국 명나라의 신종이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게 보내온 8종류의 물품이다. 임진왜란때 조선을 도왔던 명나라 수군 도독 진인이 충무공의 뛰어난 전략과 빛나는 전공을 보고하자 감동한 신종이 충무공에게 지휘관을 상징하는 8종류의 물품을 특별히 보내 주었다. 필사품은 임금이 내린 8종류의 물품이란 뜻으로 통제영에 보관되어 오다 1795년에 충렬사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도독인 (都督印)
선조 31년 (1598) 명나라 신종 (神宗)이 충무공(忠武公)에게 수군도독 (水軍都督 朝-明 聯合銃司令官)을 제수(際授)하면서 이 도독(都督)의 직인(職印)과 모든 의장물(儀丈物)을 보내온 것인데 인문(印文)은 아홉번 꺽어 쓴 전자 (篆子)로 도독(都督)이라고 쓰여있다.
령패 (令牌)
도독 (都督)이 휘하 각 자령(將令)에게 긴급한 군령(軍令)을 전하거나 나포령을 내릴때 측근의 비장 에게 이 령패을 지참시겼던 것으로 앞면에는 령을 새기고 뒷면에는 대장을 새겼다.
참도 (斬刀)
상방검 (尙方劍)으로서 연합함대산하전장병 (聯合艦隊傘下全將兵)을 호령(號令)하고 군법시행시 (軍法施行時)에 지휘도 (指揮刀)로 사용하였다.
귀도 (鬼刀)
도독이 좌우에 영교 2명이 어깨에 메고 서서 도독의 신변을 보호 하였다.
사제문 (賜祭文)
사제(賜祭)란 임금이 죽은 신하에게 제사를 내려주는 것이다. 정조 19년 (1795) 11월에 충무공 전서를 펴내면서 충렬사에 1점을 봉안하게 하고 통제사 이득제 (제147대)에게 명하여 영조 필사품도 함께 장소를 알맛게 진열하고 술과 고기를 위폐앞에 모신 다음 투구와 갑옷을 입은체로 잔을 올리고 제사를 하라하신 정조임금의 제사제문이다.
독전기 (督戰旗)
적 과 접전시에 연합군으 독전하던 기 로서 중앙에 비단을 오려 붙인 글자는 범군임적불용명자처참 (凡軍臨敵不用命者處斬) 이라 쓰여 있다.
깨달음
깨달음은 갑자기 온다.
어느 순간, 그동안 지니고 있던
생각을 버리고 전혀 다른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바람직한 삶을 만들어가는 과정도
깨달음을 얻는 것과 비슷하다.
- 리처드 J. 라이더 / 데이비드 A. 샤피로의
《인생의 절반쯤 왔을 때 깨닫게 되는 것들》중에서 -
* 깨달음은 갑자기 온다?
그렇지 않습니다. 갑자기 오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것은 마치 물이 끓는 이치와 같습니다. 물은
99도 온도에 이르기까지는 아무 일도 없는 듯
잠잠하다가 1도 더 높여 100도가 되었을 때
비로소 '갑자기' 끓게 됩니다. 깨달음은
99도까지 삶을 숙성시킨 사람에게
어느 순간 갑자기 주어지는
선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