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어가며 >
서예 전반에 걸쳐 견문과 식견이 부족한 처지에서 이런 글을 쓰는 것이 어떨까하고 주저하다가
붓을 든 것은 '서당개 3년에 풍월 읊는다'는 속담도 있듯이 나름대로 그동안 보고 듣고
써본 경험을 토대로 미흡하나마 지금까지 알게된 사실을 정리해둘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다.
따라서 이 글에는 적지 않은 편견이나 오류가 있을 수 있어 관심있는 분들의 고견과
비판을 달게 받아 잘못된 내용은 고치거나 보완할 생각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인터넷 검색으로 해당 서예가의 작품을 찾아 올렸고 내용 글 중에는 일부 짜깁기를
한 것도 있으나 나름대로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출처를 명기하였다.
1. 김생(金生)에서 김정희(金正喜)까지
우리나라의 서예가로는 멀리 신라시대의 김생(金生 711~791)을 비롯하여 최치원 등 많은 명필들이
있었으나 남아 있는 자료는 많지 않다. 그 중에는 단연 김생이 돋보이는데 김생은 해동서성(海東書聖)
으로 불릴 정도로 그의 필치는 중국에 까지 알려졌으며 송나라의 한림대조(翰林待詔) 양구(楊球)와
이혁(李革)이 왕희지(王羲之)에 비길 만한 천하의 명필이라고 격찬했다고 하며
그 후로 중국 사신들은 김생의 필적을 매우 귀하게 여겨 얻어갔다고 전한다.
고려 중기에는 우리 나라의 서예사상에 큰 변화를 일으킨 대가가 나타났으니 그가 곧 탄연(坦然)이다.
그는 왕사와 국사를 지낼 정도로 학문과 덕이 높은 고승이었으나, 일반적으로 불법보다는 글씨의 명가로
이름이 높았다. 그의 글씨는 구양순체 일색이던 당시의 전통을 깨뜨리고 왕희지의 서풍에 기초를 둔
서법을 창출하였다. 그의 글씨로 전하는 것은 문수원비(文殊院碑)인데, 이 비는 현재 없어졌으나
탁본이 전하여지고 있다.
말기에는 신륵사보제존자석종비(神勒寺普濟尊者石鐘碑, 보물 제229호)를 쓴 한수(韓脩)와
회암사선각왕사비(檜巖寺禪覺王師碑, 보물 제387호)를 예서로 쓴 권주(權鑄)는 모두 대가들이다.
이후 조선조에 들어오면 전기에는 안평대군, 중기에 한석봉(1543~1605),
후기에는 이광사(1705~1777) 등을 거쳐 추사 김정희(1786~1856)에 이르게 된다.
石峯 한호(韓濩)의 서법은 조선 초기부터 성행하던 조맹부(趙孟頫)의 서체인 송설체(松雪體)를
따르지 않고 왕희지의 안본(贋本)을 임모(臨摹)해서 배운 것이나 안진경체의 영향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원첩(原帖)과 거리가 있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진당인(晉唐人)의 높고 굳센 기운이
결핍되었다고 한다. 또 사자관으로 오랫동안 있어 틀에 맞추려는 듯한 글씨를 만들게 되어 서품(書品)이
낮고 격조와 운치가 결여되어 외형의 미만을 다듬는 데 그쳤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글씨의 짜임새가 좋고 필력(筆力)도 있어 일세를 풍미했고, 그로부터 국가의 문서를 다루는
사자관의 특유한 서체(寫字官體:干祿體)가 생길 정도로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김정희(金正喜)는〈완당집 阮堂集〉에서 "석봉첩(石峯帖)은 매우 좋은 것이 있는가 하면
극히 속된 것도 있다"고 평했다.
다음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는 진서·초서·전서·예서에 두루 뛰어났고 원교체(圓嶠體)라는
독특한 필체를 이룩했다. 그림에도 뛰어나 산수·인물·초충(草蟲)을 잘 그렸고 소박한 문인 취향의
화풍을 이루었다. 특히 이광사는 그 시대에는 보기 드문 전서체의 작품도 남겼다.
|
▲이광사가 쓴 두보시, 35.2×23.2㎝, 18세기(왼쪽). 한호가 쓴 두보시,
‘한석봉증유여장서첩’ 中(보물 제1078호), 감지에 금니, 25.5×20㎝, 조선 16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
조선 후기 최고의 서예가인 김정희(金正喜:1786~1856)는 소년시절부터 북학파의 대표적 학자인
박제가(朴齊家)에게 학문을 배우면서 청대(淸代)의 학예일치사상(學藝一致思想)과 금석학 등 새로운 사조에
눈을 뜨게 되었고, 1809년 베이징[北京]에 가서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 등을 통해 금석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서예 원류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다.
옹방강 일파의 서론(書論)에 입각하여 처음에는 동기창체(董其昌體) 등을 익히다가 서법의 근원을
한대 예서체에 두고 이것을 해서와 행서에 응용하여 청조의 서예가들도 염원했던 이상적인
추사체(秋史體)를 이룩했다. 졸박(拙朴)한 이 서체는 종횡의 굵고 가는 획들의 대조가 몹시 심하고
또한 힘차면서도 거칠어서 마치 유희적(遊戱的)인 선화(禪畵)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또한 필획들이 제각기 개성 있게 배열되어 매우 독특한 구성미를 자아낸다.
이러한 추사체는 그의 문인화풍의 근간을 이루었을 뿐 아니라
신헌(申櫶)·이하응(李昰應) 등의 추사파 서화가들에 의해 일세를 풍미했다.
|
|
|
대팽두부(大烹豆腐) <129.5×31.9cm>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고회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 손자.
|
중국의 서예가들도 추사체는 중국에도 없는 독창적인 서체로 인정하여 최근 정보로는 추사를 서성(書聖)
이라고 극찬하여 등석여(鄧石如), 조지겸(趙之謙), 오창석(吳昌錫) 등과 같은 반열에 올린다고 한다.
(중국의 전문 서예지 <중국서법中國書法/Chinese Calligraphy> 2006년 6월호)
여기서 참고가 될까하여 얼마 전 한국의 서예관련 전문가들이 실시한 평가를 아래에 옮겨다 싣는다.
"한국 최고의 서예를 꼽는 데 총 9명의 전문가들 모두 추사의 글씨를“가장 탁월한 작품"으로 평가했다.
隸書에 바탕을 두고 각 서체의 조형미를 융합한 데서 “돌의 거친 질감과 견고함, 강함을 느낄 수 있다”
라는 평이다. 특히 추사체의 조형미와 글씨는 한국과 중국을 아우르는 역대의 서예사 속에서
“모든 이상적 요소를 통합해 표출해낸 완성체”라며 추천되었다.
왕희지의 해서체를 위시해 중국의 옛 비석 글씨를 연구, 재구성해 東國眞體라는 서풍을 이뤄낸 것으로
평가되는 이광사의 글씨 또한 5명의 추천을 받았다. 특히 그의 작품 가운데서 두보시가 최고로 꼽히고 있는데,
“一陰一陽하는 자연의 도에 바탕했기에 의기가 횡출하고 변화가 무궁하게 되었으며,
화려함을 함축하고 그 근골을 힘있게 했다”는 평가다. ‘석봉체’라 불리우는 한호의 글씨 역시
“강한 필획으로 굳세고 개성적인 서체를 보여주며, 조선 고유의 색감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특히 그의 초서는 강함과 아름다움이 잘 어우러져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 외에 김생의 전유암산가서, 허목의 애민우국, 양평대군의 몽유도원도 발문,
안평대군의 소원화개첩, 최치원의 쌍계사진감선사비,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탄연 문수원기,
신위 시고 등도 ‘훌륭한 글씨’로 거론되었다."
(추천해주신 분들: 박도화 문화재청, 박은순 덕성여대, 이내옥 부여박물관장, 이원복 광주박물관장,
이태호 명지대, 정병모 경주대, 조선미 성균관대, 한정희 홍익대, 홍선표 이화여대 교수, 이상 총 9명)
ㅡ이은혜 기자 thirteen@kyosu.net
2. 해방후의 서예가들
1945년 8.15 해방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우리나라 서예가들을 기술하려면 아무래도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으로 부터 출발하여야 할 것이다.
소전 손재형(1903~1981)은 1903년 전남 진도군 진도읍 교동리 향저에서 옥전(玉田) 손병익(孫秉翼)의
손(孫)이자 영환(寧煥)의 유복자로 출생하였는데, 추사 이래의 대가로 추앙받을 정도로 서예계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기면서 한자 문화의 정수인 서예를 오늘날에 이어 온 서예계의 거목이라고 해야겠다.
그는 1924년(당시 22세)부터 1931년까지 매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고 제 1회 조선서도전에서
특선하는 등 나이 30전후에 특선을 마치고 곧 이어 국내 규모의 심사위원을 맡아 국전이 시작되면서
계속해서 9회나 단 한번 심사에 참여하지 않은 때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아홉차례 심사위원을
지낸 뒤에는 두차례에 걸쳐 국전 고문을 지냈고 국전 심사위원장 한번, 국전 운영위원장 두 번,
예총회장 두 번,대한민국예술원회원(’54~’81) 등을 지내 그가 활동하던 40년간 선전이나 국전에
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은 때가 없었을 정도 화려한 경력을 과시하였다.
그가 한 공적 중 특기할만한 몇가지를 든다면 먼저 해방후 그동안 일본에서 통용되는 서도(書道)라는
용어 대신 서예(書藝)로 할 것을 제창하여 관철시켰고 그뒤로 국내에 통용하게 된 사실을 들 수 있다.
그래서 중국의 서법(書法), 일본의 서도에 비견하여 우리나라에는 서예라는 용어가 정착된 것이다.
또 한가지는 추사의 '세한도'를 대동아전쟁으로 혼란한 기간 중에 일본 동경으로 가서 당시의 소장자
후지츠카(藤塚) 전 경성대 교수를 3개월에 걸친 끈질긴 설득 끝에 '세한도'를 찾아온 공적이다.
물론 그는 나중에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정계에 진출하면서 더러 오점도 남겼지만
그의 문하에는 원곡(原谷) 김기승(金基昇), 학남(鶴南) 정환섭(鄭桓燮), 경암(景岩) 김상필(金相筆),
서봉(西峰) 김사달(金思達), 장전(長田) 하남호(河南鎬), 평보(平步) 서희환(徐喜煥),
금봉(金峰) 박행보(朴幸甫), 우죽(友竹) 양진니(楊鎭尼) 등 한국 서예계의 기둥이 된 기라성 같은
제자들을 길러낸 점도 특기할만하다고 하겠다.
자획과 구성에 무리가 없고 문기가 넘치는 그의 글씨는 보는 이의 저항감을 전혀 일으키지 않는데
특색이 있으며, 수차에 걸쳐 중국에 다녀와 전서(篆書)체를 토대로 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를
확립하여 이른바 '소전체(素筌體)'라 불리는 서체를 만들어 내었고, 글씨뿐만 아니라 그림(畵)에도
놀라운 실력을 발휘하여 문인화에도 걸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의 제자 중에는 원곡 김기승은 별반 나이 차이가 없었지만 학남(鶴南) 정환섭(鄭桓燮).
산정(山丁) 서세옥(徐世沃) 등은 당시 서울대 미대 재학생으로 나중에 학남 정환섭(1930~ )
문하에서는 초민(艸民) 박용설(1947~ 서울대 사대 출신) 등의 서예가가 배출되었고,
서세옥(1929~ )은 수묵화법을 응용하여 동양화 추상 분야를 개척하여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소전 손재형과 함께 검여(劍如) 유희강(柳熙綱 ,1911-1976)도 훌륭한 서예가였다.
소전이 예파(藝派) 서예가를 대표한다면 검여는 그 대칭 점에 섰던 법파(法派) 서예가의
대표격이라 하겠다. 법파도 예파와 마찬가지로 추사의 <법고창신>의 정신을 이어가려 하였으나,
창신에 앞서 보다 든든한 법고의 고전적 바탕과 기량을 먼저 갖추어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검여 유희강은 1938년~1946년 중국에 머물며 베이징의 동방문화학회와 상해미술연구소에서
서양화와 서예, 금석학 등을 배웠다. 광복 후 그는 고향 인천으로 돌아와 서예가로 다시 태어난다.
검여는 1953년 제2회 국전에 서양화 <염念>과 서예 <고시古詩>를 처음으로 출품하여
양 부문에 입선하고, 이어 1954년 제3회 국전에도 서양화와 서예 작품을 동시에 출품하였으나,
서예 작품 <독서운생벽讀書雲生壁>만이 입선하였다. 이후 검여는 서예에만 매진한다.
1958년까지 계속 4회에 걸쳐 특선을 차지함으로써 1958년에는 추천 작가로 올라서게 되었고,
1959년에는 국전 심사위원으로 국전 초대 작가가 되었다.
검여 서예의 두드러진 특징은 <서예의 회화성>이다. 그는 육조풍의 행서를 중심으로 한
그의 글씨가 무르익어 가고 나름의 서체가 형성되어가자 그의 예술적 지향점과 목표를
추사체의 연구와 발전에 두게 된다. 그는 서법에 의한 필획니다 결구의 정확성을 추구하는 한편
1967년부터 1년 여 월전 장우성 화백과 교유하면서 사군자를 비롯한 동양화 기법을 습득하는 한편
추사의 서화 양면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검여는 스스로 별호를 소완재(蘇阮齋)라
칭하고 고담(枯淡)하고 기준(奇峻)하며 둔중(鈍重)한 서풍으로 추사를 넘고자 하였다.
그는 추사와 마찬가지로 위비(魏碑)를 중심한 북비의 비학파의 글씨를 수용 발전시켰으며,
마지막으로 추사를 비롯한 중국 명가들의 글씨를 두루 공부하였다.
육조 해서의 강한 골기와 갈필의 금석기가 회화적 조형감각이 결부된 검여의 글씨는
그 맥에 있어 추사체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추사가 사군자를 비롯 문인화에 빼어났던 점에
비추어 검여는 남종화와 서양화를 통하여 서예로 들어간 까닭에 그의 글씨도
장법과 포치의 조형성이 뛰어났다.
그러나 소전 이후 가장 빛나는 서예가는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 1921~2006)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일중은 어떤 면에서는 소전과 쌍벽을 이룰만한 서예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큰 영향력을 미쳤다.
그는 어릴 때부터 일본인과는 타협하지 않는 가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14세 될 때까지 학교를
들어가지 않았고 아버지의 지도 아래 한문과 서예 공부를 했다.
1938년 중동중학교 1학년 때(17세) 동아일보사 주최 전조선학생작품전에서 서예로 5개 부문을 통틀어
최고상을 수상하면서 세상에 알려졌고, 다음해 〈동아일보〉에 '궁체'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데뷔는 1941년경으로 본다. 1942년 일제의 눈을 피해〈우리 글씨 쓰는 법>이란 저서를
냈고, 그후 〈중등 글씨체〉·〈중학 서예〉·〈고등 서예〉 등을 출간하면서 서예활동을 전개했다.
애초부터 한글로부터 서체(書體)를 시작한 그는 고체(古體)를 현체(現體)로 쓰는 법의 개발에 몰두했는데
이는 서예가 비록 한자문화권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그로부터 벗어나야한다는 생각에서였다.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에 추천작가로 추대되었고, 1954년 화신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1958년 동방연서회 이사장을 역임했고 국전의 운영위원과 심사위원,
문교부 검인정 교과서 편찬위원을 지냈다. 그는 반세기에 걸쳐 주로 교육계와 저서를 통해 서예 교육에
전념해왔다. 1981년 회갑을 맞아 비문 등 모두 200여 점이 수록된 서집을 출간했다.
일중은 한글 서예를 쓰게 된 연유를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내가 한글 글씨를 쓰게 된 것은 두 가지 연유가 있었다. 먼저 내 일은 내가 해야겠다는 것이고
그 다음엔 우리 집에 전해오는 궁체가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말하기를, 글씨에 있어서
우리는 힘이 갑절 든다는 것이다. 중국 사람이라면 그들의 한문만 잘 쓰면 되지만은 우리는 그 외에
자국문자가 있으니 이것도 잘 쓰려면 두 글씨를 다 잘 써야 구비하여 쓴다고 보겠다.
그래서 이른바 국한병진주의(國漢倂進主義)를 내세우려고 한다.
……쓰다 보니 어떠한 체계를 세워야 공부하기에 편리한 것을 깨닫게 되어 약관의 나이로 모든 것이
미숙하지만 책을 하나 엮었다.『우리 글씨 쓰는 법』이란 책이었다."(『藝에 살다』)
"중국 사람이라면 그들의 한문만 잘 쓰면 되지만은 우리는 그 외에 자국문자가 있으니
이것도 잘 쓰려면 두 글씨를 다 잘 써야 구비하여 쓴다고 보겠다.
그래서 이른바 국한병진주의(國漢倂進主義)를 내세우려고 한다."(『藝에 살다』)
"서예의 근원과 필법의 정통이 한자에 있느니 만큼 이 글씨를 배우지 않고 서예를 말할 수 없는 것이며
국문은 우리의 고유문자이니 이 글씨를 우리가 배워 익히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藝에 살다』)
이렇게 일중은 궁체 작품활동과 더불어 국내 유명기념물의 글씨를 많이 써서 남기는 등 국내외에
그의 한글 궁체의 금석문이 많이 있다. 또 한편 한자 예서체 느낌의 판본체를 최초로 창안하여
보급하여 초중등 교과서의 모범체로 선정되기도 했다.
아래에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 학예사 이동국의 글을 인용한다.
"일중의 글씨는 한마디로 서예사에서 손꼽는 명서가들이 그래왔듯이 ‘옛 것에서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 이른바 ‘법고창신(法古創新)’의 귀감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가학(家學)을 바탕으로 현대 감각에 맞는
새로운 서체를 창안하고자 노력한 결과 안진경체로 필력을 얻고 장천비(張遷碑)와 예기비(禮器碑)
등의 한예(漢隸)를 조종으로 삼아 한글 고체의 필법인 전서체를 가미하여 소위 ‘일중체(一中體)’를
만들어 낸 것이 그 것이다.
이러한 일중의 예술은 그 형성 과정을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다섯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Ⅰ期 : 立志와 한글에의 관심(1934년 중동학교 입학 이후 1945년까지)
Ⅱ期 : 축적(蓄積)과 개발(開發)(1945년에서 1962년까지)
Ⅲ期 : 새로운 조형세계를 찾아서(1962년에서 1969년 일중묵연(一中墨緣) 설립까지)
Ⅳ期 : 예서(隸書)와 행초서(行草書)의 융합(融合)(1969년에서 1980년까지)
Ⅴ期 : 예술가로서 소요(逍遙)(1981년 이후 현재)
이 중에서 일중의 한글서예는 이미 Ⅰ기 때인 22세(1942년)부터 ‘우리 글씨 쓰는 법’을 저술한 것을
시작으로 일생을 두고 궁체 중심의 한글의 조형적 단조로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훈민정음(訓民正音) ,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 월인석보(月印釋譜) 등 한글 고판본의 글씨체를 토대로 하고,
한자의 전예 필법을 융합하여 ‘한글고체’를 제시하였다는 데에서 그 위대성이 있다.
그 대표작으로는 <枾葉山房八詠(시엽산방팔영, 1978년작)>,
<月印千江之曲(월인천강지곡, 1988년작)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일중의 한자 서예는 전술한 바와 같이 중국의 역대 비 , 첩을 동시에 소화하여
가장 고전적인 입장에서 전 , 예 , 해 , 행 , 초는 물론 국 , 한문 혼용 등의 각 체를 구사하였다는데
특장이 있다. 특히 전예의 획법이나 결구가 해 , 행 , 초에 구사되면서 이들의 필법과 조형이
융합된 파서체(破書體)는 일중 예술의 득의처(得意處)라 자리매김할 수 있는데,
새로운 조형세계를 찾아 나선 일중 예술의 Ⅲ기와 Ⅳ기에 해당하는 60년대 말기에 시작되어
7, 80년대에 꽃을 피웠다.
이러한 파서체는 <淸陰群玉所記(청음군옥소기, 1979년작)>,<守素明德開物成務(수소명덕개물성무,
1980년작)>, <寸陰是競(촌음시경, 1980년작), <弘慶寺碑詩(홍경사비시, 1980년작)>,
<歸舟(귀주, 1987년작)>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일중 특유의 원만(圓滿)하고 둥글둥글한
원필(圓筆)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방필(方筆)의 혼용으로 예법(隸法)을 가지고
행초(行草)를 구사하거나 결구(結構)를 만드는(또는 그 반대) 쪽으로 진행되었다. "
ㅡ2004. 11. (이동국 /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 학예사)
|
|
|
|
|
일중 김충현 선생의 작품 '정읍사'(1960). 한자와 한글의 다양한 서체를 하나의 작품에 융합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