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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禮安(宣城)金氏 인터넷 宗親會 원문보기 글쓴이: 김석규
新안동 김씨 상계도 시조 金宣平.........................................得雨
得雨-革 -三近-係權 -學祖國師 -永詮-珽 -弘 -永勻 -永錘-球 -永銖-瑛 -生洛-奎報-樑-光燧-重鎰 (풍산 소산파) -箕報-克 -希孟-壆 -啓光 -垕 (풍산현애 이거) -兌-震遠-壽夏 -星報 -璠 -生海-大孝-尙憲-光燦-壽增 (서울장동파) -壽興 -壽恒-昌集-濟謙 -元孝-尙寯 -克孝-尙容 -女 金義貞(풍산김씨 상계) -珣 -生河 -生溟-麟祥-鳴遠 (예안 서촌파)
-係行-克仁 (길안 묵계파) -克義 -克禮-00-00-夢虎-中淸-柱宇 (봉화 명호 이거) -克智 (길안 묵계파) -克信 -女 朴訥 -女 柳子溫(서애 증조부) -三益 -三友-孟龜-用礪-時佐-緝 -士得 -女 權軫(좌정승)- 女 裵素-女 權雍-女 柳沼(서애 고조부) -女 孫仁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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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청풍계에 터를 잡은 김영의 후손들은 과환에 나가 현달한 이도 있었지만 돌아와 고향 소산을 지켰다. 김영의 아들 金生洛은 별좌이고, 손자 창균 金箕報는 농암 李賢輔의 손서가 되어 퇴계문인으로, 金星報는 무과에 급제 원주 목사가 되었다.
金瑛의 증손 金克은 한강 鄭逑의 문인이며, 5대손 南涯 김학(金壆)은 우복 鄭經世의 문인으로, 남애 김학의 차자 鳩齋 金啓光(1621-1675)은 청음 김상헌의 문인으로 문과에 급제, 풍기군수가 되었다. 11대손 김양근(1734-1799)과 김정근도 문과에 급제하는 등 金瑛의 후손에서도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南涯 김학의 동생 北涯 김후(金垕)는 소산에서 풍산 현애리로 이거하였는데 독립운동가 金始顯(1883-1965)은 北涯의 후손이다.
한편 金瑛의 동생 金珣의 후손에는 퇴계문인으로 처향을 따라 예안 서촌으로 이거한 訥齋 金生溟이 마곡서원에 배향되었으며, 김순의 증손 金麟祥은 임란때 柳宗介와 함께 의병을 모아 봉화 소천전투에서 전사하여 旌閭되었고, 金生溟의 손자 金鳴遠과 金震遠은 문과에 급제, 각각 하동현감과 經歷을 지냈다.
길안 묵계로 이거한 보백당 김계행에게도 아들 5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金克仁은 영릉참봉이며, 둘째 金克義와 셋째 金克禮는 생원이고, 다섯째 金克信은 무과에 급제 문천군수가 되었다.
사위 朴訥은 찰방인데 외손자 5형제(朴巨麟, 朴亨麟, 朴洪麟, 朴鵬麟, 朴從麟)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고, 둘째 사위 柳子溫(서애의 증조부)은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寶白堂의 셋째 아들 金克禮는 봉화 명호로 이거하였는데 그의 손자 金廷準이 1540년에 문과에 급제 학유가 되고, 현손 芶全 金中淸(1567-1629)이 1610년에 문과에 급제, 승지에 올랐으며, 구전의 아들 金柱宇(1598-1644)도 1624년에 문과에 급제, 지평이 되었다.
그렇지만 신안동 김씨는 南人이 주도하는 안동지방에서는 ‘왕따’를 당하는 집안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 후기 안동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남인이 지배했다. 퇴계 선생의 문하가 모두 남인이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노론이던 소산의 안동 김씨들은 안동 사람들과 따로 놀 수 밖에 없었다. 당색이 달랐기 때문이다. 서울의 권력은 壯金들이 잡고 있었지만, 고향인 안동에 와서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물론 서울과 연계돼 있었기 때문에 소산의 김씨들이 중앙과 연줄이 닿는 실세이긴 했지만 안동 전체 분위기에서는 ‘왕따’ 를 당하는 상황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소산의 김씨들이 서원을 건립하려다가 실패한 사건이다. 영조 즉위 4년 만인 1728년에 이인좌의 난, 즉 무신란(戊申亂)이 발생했고 여기에 영남의 남인 집안이 상당수 개입했다. 경상우도에서 발생한 무신란을 진압한 후 조정에서는 경상좌도인 안동 일대의 민심 동향을 예의 주시했다. 이 무렵 소산의 김씨들은 안동 시내에 청음 김상헌을 기념하는 학동서원을 세우기 위해 공사에 들어갔다. 거의 완공되어 기왓장까지 올라간 상태에서 안동의 유림이 ‘이를 허락할 수 없다’고 완강하게 반대했다. 안동 일대의 거의 모든 유림이 반대의견을 표시했다. 마침내 영남 유림이 합세해 서원의 기둥에다 밧줄을 묶고 말을 동원해 끌어당겼다. 이는 안동 김씨와 영남 유림의 자존심을 건 한판 대결이었다. 결국 ‘壯金’쪽에서 서원을 세우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정조 때 풍산 서미리에 재건하여 西磵祠라 사액까지 되었으나 고종때 철폐되었다.
김선평(金宣平) 901(신라 효공왕 5, 신유 ~ ?
고려 개국 공신(功臣).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시조. 926년(경애왕 3) 고창성주(古昌城主)가 되었다.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신라를 침공하여 왕을 죽이고 왕비를 능욕하는 등 만행을 저지른데 분개하고 있던 중, 929년(태조 12) 고창을 침략한 견훤이 고려 태조와 와룡(臥龍) 병산(屛山)에서 싸우게 되자 권행(權幸)․장길(張吉) 등과 함께 태조를 도와 후백제의 견훤을 대파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삼한벽상아부공신삼중대광태사(三韓壁上亞父功臣三重大匡太師)의 봉작을 받게 되고, 이에 고창군은 안동부(安東府)로 승격되었다. ■참고문헌 : 永嘉誌․安東金氏譜
김삼근(金三近) ? ~ 1465(세조 11. 을유)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호는 사은(謝隱). 안동김씨(安東金氏) 소산(素山) 입향조 혁(革)의 자. 1419(세종 1) 생원시에 합격하고, 음보로 비안현감(比安縣監)을 역임했다. ■참고문헌 : 安東市史․安東金氏譜
김계권(金係權) 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풍산(豊山) 출생. 비안현감(比安縣監) 삼근(三近)의 장자. 이조판서(吏曹判書) 권맹손(權孟孫)의 사위. 계행(係行)의 형. 음보(蔭補)로 사환(仕宦)에 나가 직장(直長)․주부(主簿)를 거쳐 한성판관(漢城判官)을 역임했다. 계권은 학조(學祖)․영전(永銓)․영균(永勻)․영추(永錘)․영수(永銖)의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현달했으며, 특히 영수의 후손에서 김상용(金尙容)․김상헌(金尙憲) 등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참고문헌 : 安東鄕校誌․安東金氏譜
김계행(金係行) 1431(세종 13, 신해) ~ 1517(중종 12, 정축)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안동. 자는 취사(取斯). 호는 보백당(寶白堂). 시호는 정헌(定獻). 비안현감(比安縣監) 삼근(三近)의 자. 1447년(세종 29) 생원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김종직(金宗直)과 교유하였다. 성주(星州)․충주(忠州)에서 사학교수(四學敎授)를 지냈고, 1480년(성종 11)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고령현감(高靈縣監)․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을 거쳐, 대사성(大司成)․대사간(大司諫)․대사헌(大司憲)․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등 삼사(三司)의 요직을 두루 지내며 간쟁업무(諫爭業務)에 힘썼다. 연산군 때 대사간(大司諫)에 있으면서 척신(戚臣)들의 비위를 논박하였으나, 시정될 가망이 없음을 알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안동 풍산(豊山)에 은거하였다. 거택 옆에 작은 정자를 짓고 ‘보백당(寶白堂)’이라 이름하고 학생들을 모아 가르쳐서 ‘보백선생(寶白先生)’이라 불렸다. 무오(戊午)․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투옥되었으나, 큰 화는 면하고 풍산에 낙향하여 살다가, 67세에 길안(吉安) 묵계(黙溪)에 만휴정(晩休亭)을 짓고 이거했다. 청백리(淸白吏)로 뽑혔고, 1859년(철종 10)에 이조판서 홍문관 예문관 양관대제학(吏曹判書弘文館禮文館兩館大提學)에 추증되었으며 길안(吉安) 묵계서원(黙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 國朝榜目․安東鄕土誌(宋志香 著)
학조대사(學祖大師)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승려. 본관 안동(安東). 호는 등곡(燈谷)․황악산인(黃岳山人). 한성판관(漢城判官) 계권(係權)의 장자. 세조 때 여러 고승들과 함께 불경을 한글로 번역․간행하고 1464년(세조 10) 속리산(俗離山) 복천암(福泉庵)에서 왕을 모시고 신미(信眉)․학열(學悅) 등과 함께 대법회를 열었다. 1467년 왕명으로 금강산 유점사(楡岾寺) 중창에 착수하고, 1487년(성종 18) 정희왕후(貞熹王后)의 뜻을 받들어 해인사 『대장경(大藏經)』 판당(板堂)을 중창하였으며, 1500년(연산군 6) 신비(愼妃)의 명으로 해인사의 『대장경』 3부를 간인(刊印)하고 그 발문(跋文)을 지었다. 『남명집(南明集)』을 언해하고 1520년(중종 15)에는 왕명으로 다시 해인사 『대장경』1부를 간인하였다. 그가 국역한 불전(佛典)은 『지장경언해(地藏經諺解)』『금강경삼가해언해(金剛經三家解諺解)』『천수경언해(千手經諺解』『증도가남명계송(證道歌南明繼頌)』등 여러 권이 있다. 만년에 속리산(俗離山) 복천암(福泉庵)에서 입적하였다. 부도(浮屠)도 복천암에 있다. 학가산(鶴駕山) 애련암(愛蓮庵)에도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참고문헌 : 世祖實錄․朝鮮佛敎通史
김영전(金永銓) 1439(세종 21, 병인) ~ 1522(중종 17, 임오)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한성판관(漢城判官) 계권(係權)의 차자. 용궁(龍宮)․비안(比安)․지례(知禮)의 현감(縣監)을 역임하고, 성종조에 좌리원종훈(佐理原從勳)에 책록되어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 安東市史․安東金氏譜
김영추(金永錘) 1443(세종 25, 계해) ~ ?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자는 자형(子衡). 계권(係權)의 제4자. 1464년(세조 10) 생원시에 합격하고, 1473년(성종 4) 문과에 급제했다. 관은 경주판관(慶州判官)․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합천부사(陜川府使)․밀양부사(密陽府使)․수원대도호부사(水原大都護府使)를 역임했다. ■참고문헌 : 安東鄕土誌․安東金氏譜
김영수(金永銖) 1446(세종 28, 병인) ~ 1502(연산군 8, 임술)
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 안동(安東). 자는 적옹(積翁). 한성판관(漢城判官) 계권(係權)의 제5자로 한양에서 출생했으나, 13세에 부친을 잃고 어머니와 고향 소산(素山)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무예에 출중하여 음보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제수되어 옥사(獄事)를 잘 다스려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이 되고, 이어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나갔다. 그 뒤 의금부경력(義禁府經歷),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중추원도사(中樞院都事)․선공감첨정(繕工監僉正)․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통례원봉례(通禮院奉禮)․영천군수(永川郡守) 등을 역임하였으며, 금교도찰방(金郊道察訪)으로 나갔다가 임소(任所)에서 죽었다. 사어(射御)는 물론 위기(圍棋)․음률(音律)도 잘하였으며, 특히 글씨에도 뛰어났다. ■참고문헌 : 國朝人物考․永嘉誌
김영(金瑛) 1475(성종 6, 을미) ~ 1528(중종 23, 무자)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자는 영지(英之). 호는 삼당(三塘). 장령(掌令) 영수(永銖)의 자. 풍산(豊山) 출생. 1495년(연산군 1) 사마양시를 합격하고, 1506년(중종 1)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 이듬해 예문관대교(藝文館待敎)로 정충량(鄭忠樑)과 함께 무오사화(戊午史禍) 때에 화를 입은 사람들의 억울함을 상소하여 신원(伸寃)되게 하였다. 그 뒤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를 지내며 조광조(趙光祖) 등 사림(士林)들과 뜻을 같이하여 권신(權臣)들의 미움을 샀다. 1526년 좌승지(左承旨)․이조참의(吏曹參議)를 거쳐 1527년(중종 22)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가 되었다. 풍산(豊山) 역양서원(嶧陽書院)에 제향되었으며, 문집에 『삼당집(三塘集)』이 있다. ■참고문헌 : 嶠南誌․國朝榜目․安東鄕土誌(宋志香)
김번(金璠) 1479(성종 10, 기해) ~ 1544(중종 39, 갑진)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자는 문서(文瑞). 장령(掌令) 영수(永銖)의 자. 1498년(연산군 4) 진사시에 합격하고, 1513년(중종 8)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사관(史官)을 거쳐 1515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이 되고, 이듬해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올랐다. 대간(臺諫)으로부터 요승(妖僧) 학조(學祖)의 조카라 하여 탄핵을 받았으나, 왕의 신임이 두터워 화를 면하였다. 1518년 공조정랑(工曹正郞)을 지내고 평양서윤(平壤庶尹)으로 있을 때 관서지방에 전염병이 만연하자, 둔전책(屯田策)을 건의하고 군졸의 잡다한 세를 없애주어 백성의 주거(住居)를 편안하게 하였다. 1523년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이 되었으며, 세칭 안동김씨 장동파(安東金氏壯洞派)의 파조로 그 후손에서 김상용(金尙容)․김상헌(金尙憲) 등 많은 인물이 배출된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 향리 소산(素山)에서 만년을 보냈다. ■참고문헌 : 國朝人物考․安東鄕土誌(宋志香)
김상용(金尙容) 1561(명종 16, 신유) ~ 1637(인조 15, 정축)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자는 경택(景擇). 호는 선원(仙源)․풍계(楓溪). 시호는 문충(文忠). 장령(掌令) 영수(永銖)의 현손. 극효(克孝)의 자. 1582년(선조 15) 진사(進士)가 되고, 1590년 증광문과에 급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 병조좌랑(兵曹佐郞)․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 등을 역임하고, 권율(權慄)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호남 지방을 왕래하였으며, 1598년(선조 31)에 승지(承旨)가 되고, 그해 겨울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 나라에 다녀왔다. 대사성(大司成)․정주(定州)․상주(尙州)의 목사(牧使)를 역임하고, 광해군 때에 도승지(都承旨)에 올랐으며, 1623년 인조반정 후 집권당인 서인(西人)의 한 사람으로 돈령부판사(敦寧府判事)를 거쳐 예조(禮曹)․이조(吏曹)의 판서를 역임하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는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있었다. 1630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노령으로 관직을 사퇴하려고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1632년(인조 10)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1636년 병자호란 때 왕족을 시종하고 강화로 피난하였다가, 이듬해 강화성(江華城)이 함락되자 화약에 불을 질러 자결하였다. 시조(時調) 『오륜가(五倫歌)』(5편) 『훈계자손가(訓戒子孫歌)』(9편) 등이 있다. 강화(江華)의 충렬사(忠烈祠), 상주(尙州)의 서산서원(西山書院) 등 많은 서원에 제향되었다. 글씨도 뛰어나 『숭인전비(崇仁殿碑)의 전액(篆額)』『군수장인정비(郡守張麟禎碑)의 전액(篆額)』등이 있고, 저서에『선원유고(仙源遺稿)』『독례수초(讀禮隨抄)』가 있다. ■참고문헌 : 宣祖實錄․光海君日記․仁祖實錄․國朝人物考․海東名臣錄
김상헌(金尙憲) 1570(선조 3, 경오) ~ 1652(효종 3, 임진)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안동.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석실산인(石室山人). 장령(掌令) 영수(永銖)의 현손. 극효(克孝)의 자로 백부 대효(大孝)에게 출계. 윤근수(尹根壽)의 문인. 1590년(선조 23) 진사시에 합격하고, 1596년 문과에 급제하고, 1608년 다시 문과중시 급제했다.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예조좌랑(禮曹佐郞)․이조좌랑(吏曹佐郞)․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등을 역임하였다. 1611년(광해군 3) 정인홍(鄭仁弘) 등이 상소를 올려 이황(李滉)과 이언적(李彦迪)을 비난하자, 승지(承旨)로 있으면서 정인홍을 비난하였다. 폐모론(廢母論)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보인데다, 광해군 말년에는 연이어 부모상을 맞아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인조반정 후 대사간(大司諫)․이조참의(吏曹參議)․도승지(都承旨)로 임명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진주사(陳奏使)로 명 나라에 가서 구원병을 청하였고, 돌아와서는 후금(後金)과의 화의를 끊을 것을 주장했고, 인조가 자신의 부친을 왕으로 추존하려는 이른바 추숭논의(追崇論議)가 일어나자 반대 낙향하였다. 1633년부터 2년 동안은 5차례나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으나, 강직한 언론활동을 벌이다가 출사와 사직을 반복하였다. 병자호란 때 이조판서(吏曹判書)로서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하여 선전후화론(先戰後和論)을 주장하다가 대세가 항복하는 쪽으로 굳어지자 최명길(崔鳴吉)이 작성한 항복문서를 찢고 통곡하였으며, 식음을 전폐하고 자결을 기도하다가 실패한 뒤 안동(安東) 학가산(鶴駕山) 서록(西麓) 서미동(西薇洞)에 은거했다. 이후 1641년 심양(瀋陽)에 끌려가 이후 4년여 동안 잡혀있었으나 강직한 기개로써 청인들에 끝까지 저항하였다. 1645년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하여 좌의정(左議政)․영돈령부사(領敦領府事)를 역임하고, 1649년 효종 즉위 뒤 대현(大賢)으로 추대받아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대표적인 척화신(斥和臣)으로서 추앙받았으며, 풍산(豊山) 서간사(西磵祠) 등 전국의 많은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청음집((淸陰集)』『야인담록(野人談錄)』『풍악문답(豊岳問答)』등이 있다. ■참고문헌 : 宣祖實錄․光海君日記․仁祖實錄․海東名臣錄․國朝人物考
김중청(金中淸) 1567(선조 원년, 정묘) ~1629(인조 7, 기사)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자는 이화(而和). 호는 만퇴헌(晩退軒)․구전(苟全). 봉화(奉化) 출생. 대사간(大司諫) 계행(係行)의 5대손.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 몽호(夢虎)의 자. 조목(趙穆)․박승임(朴承任)․정구(鄭逑)의 문인. 1610년(광해군 2)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1613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예조정랑(禮曹正郞) 등을 역임다. 이듬해에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 나라에 다녀왔으며, 1615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으로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는 이원익(李元翼)을 탄핵하라는 대북파 정인홍(鄭仁弘)의 부탁을 거절하여 파면되었다. 다시 복관되어 1616년 신안현감(新安縣監)으로 나갔으며, 1621년에는 승지(承旨)로서 선유사(宣諭使)가 되어 호남지방을 순행하였다. 그 뒤 산직(散職)에 머물러 있다가 1623년의 인조반정 뒤에는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문장에 뛰어났으며, 특히 역학(易學)에 밝았다. 경상도 봉화(奉化) 반천서원(槃泉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에『구전집(苟全集)』이 있다. ■참고문헌 : 光海君日記․國朝人物考․國朝榜目․奉化郡誌
김주우(金柱宇) 1598(선조 31, 무술) ~ 1644(인조 22, 갑신)
조선 중기의 문신․서예가. 본관 안동(安東). 자는 만고(萬古). 호는 이민(易眠). 봉화(奉化) 출생. 대사간(大司諫) 계행(係行)의 후손. 승지(承旨) 중청(中淸)의 자. 외조는 영양(永陽) 이영승(李永承).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1612년(광해군 4) 진사시에 합격하고, 1624년(인조 2)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제수받았다.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형조정랑(刑曹正郞)․충청도사(忠淸都事) 등을 역임했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 강도파천(江都播遷)에 따라가지 않았다고 탄핵을 받았다. 1632년 경성판관(京城判官)을 역임했으며, 서예에 뛰어나 13세에 진주(晋州) 촉석루(矗石樓)의 누액(樓額)을 썼다. 인조가 즉위하기 전부터 그 재질의 뛰어남을 알고 발탁하여 쓰고자 했으나 아버지와 숙부의 정치적 성향 때문에 하급직에 머무르고 말았다. ■참고문헌 : 國朝榜目․仁祖實錄․奉化郡誌
김계광(金啓光) 1621(광해군 13, 신유) ~ 1675(숙종 1, 을묘)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자는 경겸(景謙). 호는 구재(鳩齋).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영수(永銖)의 후손. 학(壆)의 자로 풍산(豊山) 소산(素山)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외조부 유우잠(柳友潛)에게 배웠고, 그 뒤 김상헌(金尙憲)․김응조(金應祖)에게 수학하였으며 경학(經學)과 성리학(性理學)에 밝았다. 1654년(효종 5) 사마양시에 합격하고, 1660년 증광문과 급제하여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를 시작으로 가주서(假注書)․봉상시직장(奉常寺直長)․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 겸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을 거쳐 풍기군수(豊基郡守)가 되었다. 풍기군수 시절 백성을 애휼(愛恤)하고 유학을 진흥시킨 치적이 있어 고을민이 거사비(去思碑)를 세워 그의 공덕을 칭송하였다. 저서에 『구재문집(鳩齋文集)』이 있다. ■참고문헌 : 國朝榜目․安東鄕土誌(宋志香)
김양근(金養根) 1734(영조 10, 갑인) ~ 1799(정조 23, 기미)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자는 선오(善吾). 호는 동야(東埜). 장령(掌令) 영수(永銖)의 후손. 생부는 제순(濟淳)으로 백부인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우순(宇淳)에게 입양되었다. 김양행(金亮行)․김행원(金行元)의 문인. 1763년(영조 39)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동년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병조낭관(兵曹郎官) 등을 역임하고, 1773년 시폐(時弊)를 논하는 상소를 올려 문제가 되자 낙향하였다가 이듬해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복직되었다. 1786년(정조 10) 선인(先人)의 선행을 그린 그림을 세자에게 바쳐 모범으로 살도록 하였으며, 뒤에 현풍(玄風)․음죽(陰竹)의 현감(縣監)을 거쳐 통정대부에 가자(加資)되어 형조참의(刑曹參議)가 되었으나 그 해 병으로 죽었다. 문집에 『동야집(東埜集)』이 있다. ■참고문헌 : 國朝榜目․安東金氏譜
첫댓글 裵素의 사위에 安從生도 있는데....
또 안종생의 아들 安彭命이 柳子溫을 가르쳐 生員에 입격케 하였으니 스승인데....
흔히 말하는 新안동김씨는 제가 여러차례에 걸쳐 자료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안동김씨 대동보도 제대로 살펴보지 않고 재미있게 기술한
몇몇사람들의 기술을 그대로 베끼고 있어 안타가운 마음을 금할 길 없습니다.
안동김씨의 상계는 여기에 나타낸 계보가 전체가 아닙니다. 이것은 단지 9개 파 가운데 한 갈래일 뿐입니다.
그리고 상경한 일파를 가지고 모든 것인양 기술하는 자세는 앞으로 지양하면 좋겠습니다.
본향 안동과 봉화, 영양, 청송, 예천, 영주, 의성 등지에 살면서 묵묵히 시조 제사 모시고 국가에 충성했던
8개 파 집안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고려하여 일개집안으로 모두를 평가하는 자세는 재고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