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매일 기획특집
이재창 시인, 남도문학 현장을 가다 (21) - 극작가 함수남
인간성 회복과 따뜻한 이웃들의 이야기 그려
토속적 질박성이 인간애로 여과돼 감동 선사
청소년 감성, 미감색채 뿌린 소중한 씨알처럼
훈훈한 정 살아있는 강렬한 휴머니즘 돋보여
2003. 09.10(수) 00:27
이재창기자 jclee@kjdaily.com
극작가 함수남(62, 고려고 교장)씨의 문학은 인간성 회복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그는 살아가면서 서로 훈훈한 정을 주고 받는 따뜻한 사회를 꿈꾼다. 이기적이지 않고, 편협하지 않고, 웬만한 일에 성내지 않으며, 이웃의 아픔을 어루만져 줄 줄 알고, 같이 슬퍼해주고 위로해 줄줄 아는 품이 넓은 사람들이 사는 그런 사회가 되기를 꿈꾼다. 그래서 그의 작품 소재들은 그가 살고 있는 평범한 삶을 통해 따뜻한 인간애를 느끼고 맛볼 수 있는 작품들이 주류를 이룬다.
그는 인간성 상실이야 말로 자기 파멸의 지름길임을 강조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의 주제는 언제나 뚜렷하다. 자식에게 버림받는 부모의 이야기, 물질만능주의에 부서져 가는 어느 가정 이야기, 소외 받고 천대 받는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 등을 그려왔다.
희곡은 가장 훌륭한 詩이며 詩는 인생의 심성과 정신의 표현으로 삭막한 광야에 홀로 피어있는 한송이 찬란한 꽃이다. 최근 많은 희곡이 창작되고 있으나 그 대부분이 상업성을 추종하는 대중의 감각에 영합하는 것이거나, 시대성이라는 시류에 흘러 서구 희곡을 그대로 모작하는 형식이 범람하고 있어서 사실상 진장한 희곡은 손가락으로 꼽아도 부족한 상태다. 이러한 현실에서 함수남씨처럼 묵묵히 작가의 진실을 내밀히 축적하고, 오늘의 성가가 아닌 내일의 가치를 위해 창작생활에 전념하는 작가가 있다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또한 그의 문학적 특성은 토속적 질박함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인간성 또한 그러하거니와 그의 본성에서 생성된 토속적 질박성은 인간애로 여과되어서 하나의 감명으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에는 청소년에게 감동을 주고 그들의 감성에 미감의 색채를 뿌려줌으로써 내일의 인간화에 도움이 되는 희곡이 많지 않지만 그의 작품은 황토색 짙은 토속성과 그것을 기반으로 뿌리박은 인간애의 발로는 우리의 청소년에게 보여줄 소중한 씨알이 되고 있다.
‘아빠의 城’에서 엄마와 주미와의 관계, 그것이 혈연적 관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인간의 이해와 애정으로 발전시킨 점이나, ‘바다여 가슴을 열어다오’에서 보여준 토속신앙을 극복한 휴머니즘의 발양은 이 시대 우리가 소중히 간직할 진실이기 때문이다.
‘울어라 새여’에서 보여준 언어의 서정미는 ‘늪地帶’‘껍질들’에서 구축한 단단한 구성력과 더불어 알찬 역량을 가늠케 한다. 특히 ‘울어라 새여’에 나타난 회화의 서정미는 호남 특유의 질박한 인간본성과 서정성이 혼합한 세계에서 생성된 미감으로 최근 한국 극계에 쇠락해 가는 언어의 미학을 회복하는데 중요한 몫을 하고 있다. 그는 희곡의 본질을 잘 터득하고 있어서 회화의 세련미를 위해 언어를 조련하고 탁마함으로써 서정미라는 하나의 가치를 획득하고 있다.
그는 최근에 펴낸 4번째 희곡집 ‘그 섬에 가고 싶다’의 서문에서 “요즘 사회는 눈이 핑 돌 정도로 변화가 심하다.…이렇듯 모든 것이 급하게 변해 가지만 내 글의 주제는 언제나 인간성 회복에 바탕을 두고 있다. 내가 계속 글을 쓰는 한 이 주제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고 적고 있다. 인간성 회복이야말로 삶의 근간이며 문학작품이 지향해야 할 영원한 길이라는 그의 문학정신과 교육자적 신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책에는 91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선정한 우수작품으로 뽑힌 ‘결혼작전’을 비롯해 93년 아동문학평론 가을호에 실린 ‘옛날 옛적에’, 장막 희곡으로 97년 월간문학에 발표한 ‘매품삽니다’, 99년 전남문학대표작 선집에 수록된 ‘그 섬에 가고 싶다’, 2002년 미발표 신작 ‘어느 신의 고백’ 등이 실려있다.
‘결혼작전’은 아들의 결혼을 반대하는 노모와 예비며느리의 신경전을 통해 핏줄의 질긴 정을 위트있게 그리고 있다.
‘매품삽니다’는 옛날 부자들이 자신의 매를 다른 사람에게 돈을 주고 대신 맞게 하기 위해 그 품을 팔던 ‘매품’을 소재로 관과 민, 가진자와 못가진 자의 관계를 회화적으로 그려 현대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고 있다. 옛날 가난한 사람들이 어떻게 돈 많은 사람들에게 착취당했던가로 시작해서 벼슬아치의 횡포가 얼마나 심했던가를 보여주는, 기가 막히게 오늘의 현실을 잘 풍자한 희극이다. 대개 희극은 극 구성이 엉성해 지기 쉽다. 그래야만 웃음이 쉽사리 유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우리의 마당극이 안고 있는 희극성을 용의주도하게 활용하면서도 고도의 치밀한 구성력을 보이고 있어 그의 걸작으로도 손색이 없다.
또 ‘그 섬에 가고 싶다’에서는 이혼남, 증시폭락으로 하루아침에 사기꾼으로 몰린 증권사 대리, 대졸실업자, 운락녀 등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와 대사를 통해 고통받는 서민들의 모습과 그 속에서도 결코 희망을 잃지 말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밖에 희곡의 본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탄탄한 구성력과 언어의 조탁, 서정성, 세련된 회화미, 희극성이 잘 갖춰져 희곡의 텍스트로 읽혀질 만 하다.
그간 그의 작품세계를 들여다보면 전반적으로 인간구제를 지향하고 있다. 가진 자와 못가진 자, 물질문명과 자연, 도시와 농촌, 천대와 존중, 억압과 해방, 패륜과 인륜 등 대척적인 관계를 설정해 그 지향점을 인간성 회귀에 두고 강렬한 휴머니즘을 추구하고 있다.
그는 앞으로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해 지금까지의 안일한 틀에서 벗어나 부단히 노력해야 겠다는 다짐을 하곤 한다. 또 젊은 날의 번뜩이는 재치는 없더라도 삶을 관조하는 넉넉함과 푸근함과 따뜻함이 독자에게 전해질 수 있는 그런 글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한다.
그는 현대의 TV이나 다른 언론매체의 영향으로 지방 특유의 고유한 사투리가 많이 사라져 가는 것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본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 또 내가 지금까지 몸담고 살아온 우리 고장의 정감이 뚝뚝 묻어나고 감칠맛이 배어나는 그런 언어로 그를 쓰고 싶다고 고백한다. 절묘한 언어적 뉘앙스를 살려 향토적인 냄새가 물신 풍기는 작품, 향토적인 정감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을 쓰기를 원한다.
연극반 지도 맡으며 희곡창작 시작
수많은 대본 창작…불혹에 월간문학으로 등단
극작가 함수남씨는 1941년 4월 15일 전남 나주시 산포면 덕례리 정자교 강가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조선대 부속고등학교 시절, 국어교사이던 박홍원 시인을 만나 문학에 열병이 들어 시를 열심히 썼고, 교지 ‘탑’에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더욱 힘을 얻어 문학에 정진하고자 한 것은 시인 김현승교수가 재직하고 있는 조선대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하면서 부터다.
그는 대학에 진학하면서 대학신문 기자가 되었고, 2학년 때는 편집장 겸 주간으로 신문제작에 온 힘을 쏟았다. 그러다 보니 졸업무렵까지 문학수업에는 등한시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대학졸업 후 ROTC 장교로 전방에 배치돼 근무한 뒤 제대해 모교인 조대부고 교사로 발령 받았다. 여기서부터 그의 인생은 새로운 길을 걷게 된다. 그가 대학재학시절의 신문편집 경험을 살려 교지 발간과 문예반, 그리고 연극반 지도를 맡게 되면서 희곡을 창작하게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 당시 이 지역에선 학생연극이 활발했었는데, 막상 연극반 지도를 맡은 그는 연극대본을 구하기가 어려워 애를 태우곤 했다. 그때 그는 차라리 자신이 써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중학교때 연극대본을 써본 경험이 있다는 것 하나로 이런 생각을 하게된 것이다.
그의 고향에서는 50년대 후반까지 정월보름이면 마을연희가 성행했었다. 그는 마을연희때 연극을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신영극장에서 공연된 ‘검은 장갑’이라는 연극을 두 번 관람하고 집에 돌아와 엉터리 대본을 만들어 마을에서 연극을 공연했고, 큰 박수를 받았다. 그 어줍잖은 경험이 연극대본을 쓰게 했고, 오늘날 희곡작가로 활동하기 된 토양이 됐다.
이렇게 해서 1968년 제13회 전국학생연극제에 ‘돌아온 사람들’이란 작품이 조대부고 참가작품으로 공연돼 우수상을 수상했으며, 이 작품으로 당시 최고 권위를 자랑하던 진주개천예술제에 참가해 최고상인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6.25사변을 배경으로, 한 가정의 비극적인 상황을 감격적인 분위기로 반전시켜 막을 내리게 한 것이다.
이처럼 상을 받은 것에 고무돼 연극반 활동은 더욱 활발해 졌고, 또 이듬해에도 두 번째로 쓴 작품 ‘어떤 友情’이란 작품으로 진주개천예술제에 참가 단체종합 우승 및 작품창작상까지 받았다. 여기에 힘을 얻어 다음해 무대에 오를 작품 ‘熱風地帶’를 창작, 전국 학생연극제 우수상과 동국대 주최 전국학생연극제 장려상과 연극지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앞의 두 작품은 활자화 되지 못했고, ‘열풍지대’만이 동국대 연극학보에 게재돼, 그는 이 작품을 쳐녀작으로 꼽곤 한다.
이처럼 그의 습작시절은 연극반 지도교사로써 연극경연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연극대본을 썼다. 그런데 이것이 지금의 희곡작가로서의 기본을 닦는 탄탄한 습작과정이었던 셈이다. 이때 연극반 학생으로 활동했던 제자들 가운데 이상용 이기열 김종진 등은 우리나라 중진연극배우로 활동중이며, 정철 박윤모 등은 연극학과 교수로 후진양성에 전념하고 있다.
그가 본격적으로 문단에 얼굴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1970년 전남문인협회에 가입하면서 부터다. 그때만 해도 이 지역에 희곡작가가 두셋에 불과한 때로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이때 그는 문협회원이 되면서 언젠가는 꼭 후세에 남는 작품을 써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된다.
그후 그는 학교를 옮기게 되고 옮긴 학교에서 3학년 대입진학지도 주임을 맡으면서 다소 문학과는 멀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희곡에 대한 불씨가 여전히 살아있었다.
이때 동국대 연극영화과 교수며 희곡작가인 김홍우씨를 10년만에 광주에서 우연히 만나 그의 문학성이 다시 깨어난 것이다. 김교수는 그의 작품 수준이면 충분히 중앙문단에서도 통할 수 있는데 지방에 묻혀 있는 걸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후 그는 글을 쓸 바엔 떳떳하게 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 1982년 월간문학 신인작품상에 ‘늪地帶’가 당선됐으며, 아동문예 신인상에 동극 ‘할머니의 생일’이 당선돼 불혹의 나이에 정식으로 문단에 얼굴을 내보였다.
이처럼 그의 희곡 작품은 방안에서 머리로 쓴 글들이 아니라 직접 무대에서 공연하기 위한 현장문학 작품이었다.
그가 무대에 올린 작품을 보면 68년 ‘돌아온 사람들’, 69년 ‘어떤 우정’, 70년 ‘熱風地帶’, 83년 ‘울어라 새여’, 88년 ‘바다여 가슴을 열어다오’, 89년 ‘니래를 펴게 해주세요’, 93년 ‘鐘의 沈黙’‘별빛 속에 서다’, 94년 ‘뉘라서 저 하늘을’, 97년 ‘오, 바다여 바다여’ 등이 있다.
저서로 희곡집 ‘늪地帶’‘아빠의 城’‘黃土재’‘그 섬에 가고 싶다’가 있으며, 공저인 어린이 동극집이 있다. 또한 소설집 ‘분이의 빈 공책’을 출간했다. 84년에 제4회 한국동극문학상, 85년 제5회 한국희곡문학상, 86년 제4회 전국연극제 전남예선 희곡상, 91년 제8회 東圃문학상, 92년 제5회 광주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그는 대학졸업후 조대부고, 인성고, 송원고 교사를 거쳐 문성고, 고려고 교감에 이어 현재 고려고 교장으로 재직중이다.
글 ; 이재창 문화부장겸 편집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