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 죽음과 삶의 문턱에서 희망을
참가자(단체) 성명 :김봉춘
2016년 7월 18일 오전 6시 30분 군산으로의 출장이 있던 날 아침, 출장 준비를 하던 중 화장실에서 갑자기 온 몸의 중심이 무너지고 쓰러져 일어날 수가 없었다. 순간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작년 성탄절에 ‘알로이시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와 견진 받았던 일과 레지오 활동에서의 잔상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부모님의 관심 속에 하느님의 자식으로 새로 태어나 신앙을 키우며 레지오 단원들과 함께했던 시간들...... 그리고 잠시 후 사이렌 소리와 함께 119 구급차가 와서 나를 싣고 병원으로 가던 중 뇌출혈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눈을 뜨고 나니 중환자실에서 아내가 눈물을 흘리며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제일 먼저 나의 눈에 들어왔다. 이후 면회시간에 성당의 구역식구와 레지오 단원 그리고 가까운 가족과 지인들이 찾아와 기도와 함께 힘을 주었지만, 나의 머릿속은 온통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온 몸이 뜨거웠고 가려웠다. 간호사들이 마비된 내 몸의 신경을 살리기 위해 발가락 사이에 볼펜을 끼어 돌릴 때 느꼈던 끔찍한 고통과 귓가에 맴도는 주변 환자들의 신음소리에 ‘하느님 이대로 죽어 하느님 앞으로 데려가십시오.’라고 소리쳐 보았다. 하지만 힘들어하는 아내와 가족들의 모습을 보며 내 생명은 나의 것이 아닌 온전히 하느님의 것이니 하느님께서 알아서 하실 텐데 내가 왜 이리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성부와 성자의 이름으로 아멘!”하는 소리와 신부님이 뿌리는 성수와 함께 보랏빛 잔상 뒤에 서계신 예수님의 “너는 살아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아있으니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잘 이겨 내야한다. 내가 뒤에 있지 않느냐?”라는 말씀이 또렷이 들리는 듯 했다.
얼마 후 하느님의 은총으로 다행히 인지손상이 적어 언어와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몸의 왼쪽이 모두 마비되어 모든 것을 아내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태로 일반병실로 옮겨졌다. 뇌출혈이란 질병으로 한 순간에 굳어버린 나의 몸을 보며 너무도 우울하고 슬펐지만, 하던 일을 모두 접고 오직 나의 간병에만 전념하는 아내를 위해서도 힘을 내야 했다. 아내는 자신의 몸도 안 좋은 상태여서 당시 체중도 많이 나가고 축 처진 나의 몸을 감당하기 힘들었을 텐데 어디에서 그런 초인적인 힘이 나왔는지...... 대소변을 받아내는 것은 물론이고, 치료 시 침대에서 휠체어로 하루에도 몇 번씩 나의 몸을 옮기며 지칠 대로 지쳐갔지만 잘 이겨나갔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런 아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그냥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얼마 후 대학병원에서의 입원생활을 끝내고 재활을 위한 전문병원으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거동이 불편하거나 인지기능이 약해져 혼자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 일명‘기저귀방’이라고 불리던 병실에 입원하여 본격적인 재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온몸이 덥고 가려워서 잠 못 이루며 괴로워하던 첫날밤, 옆에 누워있는 환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으로서 가족의 책임감이 묻어난 간절한 그의 기도는 나의 마음을 울렸다. 다음날 그의 보호자는 지난 밤 이야기를 하며 그가 교통사고로 뇌를 다치기 전 카톨릭 신자였고, 지금은 워낙 정신이 오락가락한 분이니 별로 신경 쓸 일이 아니라며 짜증 섞인 말투로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속담도 있는데 보호자가 환자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하느님 어찌하면 좋겠습니까?’하고 외쳤다. 이후에도 그 환자는 보호자와 티격태격하며 치료를 더디게 하는듯한 모습을 보여 안타까웠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더욱 안타까웠던 건 아픈 환자에게 따뜻한 말한 마디 건넬 여유조차 남아 있지 않을 만큼 너무도 지쳐버린 보호자의 모습이었고 그렇게 기력을 잃어가며 무너져버리는 한 가정이었다.
병원생활이 점점 익숙해지면서 아내는 재활치료시간에 물리치료사와 재활치료사가 했던 운동법을 유심히 관찰 한 후 치료 후 병실에서 괴로울 만큼 나에게 운동을 시켰다. 그 노력이 통했는지 대부모님이 병문안을 오셔서 병자를 위한 기도를 할 때 무언가 하느님의 기운을 느꼈다고 하였다. 그런데 며칠 후 나에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올라갔던 팔이 내려오고 휠체어로 이동해서 대소변을 화장실에서 해결할 수 있을 정도의 몸으로 돌아온 것이다. 대부모님의 말씀에 의하면 나를 위하여 구역 식구들이 매일 모여 9일 작정 기도는 물론 새벽에 나를 위한 미사를 하셨다고 한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를 위하여 기도를 해주신 신부님, 수녀님을 비롯하여 모든 형제자매님 저도 빠른 시일 내에 건강을 회복하여 어려운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봉사하겠습니다.” 그 후 더욱 열심히 치료시간에 집중하려고 노력했고, 치료시간 외에도 아침·저녁으로 꾸준히 운동했다. 이러한 계속된 노력과 나와 아내가 소속된 평화의 모후와 사랑의 어머니 레지오 단원들의 꾸준한 기도 덕분에 조금씩 걸을 수 있었다. 걷게 된 후에는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며 어느 정도 지팡이를 짚고 안정적이게 걷게 되었다.
2017년 4월 15일, 9개월간의 병원생활을 마치고 퇴원 날이 다가왔다. 아직은 다리재활이 좀 더 필요한 상황이지만 외래진료를 시작하기 위한 첫 시작을 위해 퇴원을 결심했다. 몇 개월 동안이었지만 죽음의 문턱에서 함께 희망을 만들어나갔던 여러 사람들이 너무도 선명히 떠올랐다. 누구보다 나의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해 주었던 환우들, 거동이 불편해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도움을 주셨던 주변의 보호자·간병인분들, 가끔 운동하기 싫다고 어리광 피우고 심술 부렸지만 누구보다 나를 따뜻한 위로를 해주었던 형님들, 나보다 작은 체구로 성심성의껏 재활치료에 힘써준 여러 선생님 등등 그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떠나는 순간 함께했던 병동식구들의 눈물을 보며, 마음이 뭉클해졌다. 퇴원하는 길 바깥 차창을 바라보면서 그동안 병실 겪은 아팠지만 따뜻했던 순간, 희망을 보았지만 답답함이 가슴 속을 짓누르던 순간들을 기억하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아픈 시간동안 겪었던 나의 경험, 생각을 바탕으로 아직도 병실에서 뇌질환으로 힘겹게 싸우고 있는 환우들을 위해 무언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이런 고민하는 내 자신조차 몸이 불편한 상황에서 가당치도 않은 생각은 하는 건 아닐지...... 하지만 입원 초창기에는 반실불구였던 나보다 상태가 좋았지만 내가 퇴원할 때쯤 나보다 상태가 좋지 않았던 환우들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뇌질환 환자에게는 빠른 회복을 위해 일상운동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보호자가 아닌 고용된 간병인들은 단순히 밥 먹이고, 씻기고, 이동만 도울 뿐 일상운동에 적극 도움을 주지 않는다. 과연 진정한 환자를 위한 간병인의 의무가 무엇일까? 그것만이 아닐 텐데...... 이런 여러 현황과 체계들의 문제점을 자꾸 생각하게 되는 시점부터 퇴원 후에도 잘 치료하고 극복하여 나는 장애인을 위한 일들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나마 나는 다행이도 아내가 하던 일을 모두 접고 오직 나만을 위한 헌신적인 사랑으로 간병한 덕분에 다른 사람보다 비교적 회복이 빨랐다. 앞으로 아내에게 어떻게 갚아야 할지? 그것은 아마도 내가 건강한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 신앙생활고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그것도 부족하기만 한 것 같은데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느님! 저의 부족함을 채워주십시오. 그것은 지나친 나의 욕심은 아닐 테지요.
“가뭄날 천둥 번개와 함께 잠시 내린 소나기의
반가움처럼 저의 기도는 마른 영혼을 적셔
반짝이는 촉촉한 싱그러움이게 하소서
주님! 제가 당신을 부를 때마다
저에게 빗물처럼 내려주시는 주님의
은총을 저는 믿나이다.“
어느 날 책상에 있던 아내의 절박함을 담은 메모 한 장을 읽고 아무도 모르게 얼마나 슬피 울었는지..........................................
나는 장애4급 판정받은 장애인이다. 아직 다리 한 쪽을 절뚝거리지만, 두 손을 쓸 수 있고 부자연스럽지만 자유롭게 걸을 수도 있으며, 일자리와 건강한 가족도 있지 않나? 다른 정상적인 사람보다 잘 할 수 있는 것들이 이렇게 많은데 여기서 포기하고 희망을 접으며 안 돼지. 그래서 퇴원 후 더욱 열심히 살았다. 아침 일어나자마자 1시간여에 걸쳐 병원에서 했던 가벼운 운동을 하루를 시작했고, 아파트 단지에 있는 헬스장에서 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주말이 되면 외래진료를 받은 후, 퇴원했던 환우들과 다시 만나 치료에 대한 정보를 나누고 가까운 산을 오르며, 몸 상태를 최대한 끌어올렸다. 지난 4월 23일에는 직장동료들과 나의 60세를 기념하며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 내가 쓰러진 직후 후배가 ‘애코파크’라는 새로운 회사를 만들고, 내가 퇴원해서 함께 일을 도와주기를 기다리며, 입원시기인 금년 1월부터 급여를 지급해 주었고 현재는 같이 일하고 있다. 힘든 시기 나의 손을 잡아주고, 인생 후반전을 시작하게 도와준 ‘에코파크’동료들은 매주 2회씩 출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서서히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도전의 기회를 주었다. 이 또한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총이 아닐까? 그래서 항상 감사하고 고마운 이들의 사업번창을 기도하며, 누구보다 회사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최근에는 지역사회 복지 차원에서 개설된 송도 보건생활지소 재활센터에서 같은 장애로 고생하는 친구들과 함께 재활하며, 장애인 복지에 대한 관심이 커져갔다. 그러던 중 후배 회사인 에코파크 인천대학 가족회사 등록을 계기로 2017년 하반기 인천대학교 정책 대학원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 올 9월부터 체계적으로 공부를 시작하여 카톨릭 교회에서 가르치는 몸으로 실천하는 신앙을 꿈꾸며 더 많은 봉사를 위해 재활 또한 소홀히 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노력하겠습니다.
뇌출혈로 쓰러지기 전으로 돌아가 자신을 반성하고, 59세가 되어서 한 신앙생활이 너무 늦지 않았나 자책하였고, 건강했던 시절 불편한 다리로 비틀거리며 걷던 친구들을 바라보며 나만은 저렇게 되지 않겠지 하는 안이함과 장애인에 대한 편견 등이 나에게 하느님께서 시험에 들게 하지 않았나 생각하며, 그나마 나에게 인생후반전에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느님께 주님의 기도를 바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주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마지막으로 제가 우연히 알게 된 6.25 한국전쟁 시 전쟁고아를 돌보는 등 많은 헌신적 봉사를 하셨던 “슈월츠 알로이시오” 신부님을 닮고자 2015년 성탄절에 “알로이시오”라는 세례명으로 새로 태어난 만큼 “하느님께서 저의 생명을 남겨주셔 나에게 뇌병변 장애라는 고통과 시험 속에서 새로운 소명”을 주신 만큼 앞으로 살아가는데 그 소명을 실천하고자 장애인 복지와 일자리를 위한 일들을 죽음과 삶의 문턱에서 일어난 “김봉춘 알로이시오”가 이루어 나가는 희망과 꿈을 꾸어 봅니다.
첫댓글 오랫만이오 그동안 소식이 없어 궁금했는데 소식을 접하고 보니 무슨 말을 해야될지 건강 관리 잘 하고 언젠가 만날기회가 있어면 하고 기다려 봅니다 옛날에 알든 김 종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