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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집 스크랩 아까시
둥굴레 추천 0 조회 8 07.04.16 18:0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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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카시아는 아까시나무의 잘못 쓰인 말이므로 수정해야


서울 근교의 어디를 가나 아까시나무를 쉽게 볼 수 있다. 사람들이 사는 마을 근처에서 흔히 눈에 띄기 때문에 온 산을 뒤덮고 있는 줄 알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아까시나무가 자라는 곳은 길가, 밭둑 같이 사람들의 생활공간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그러다 보니 아까시나무가 전국을 뒤덮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동구 밖 과수원 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 과수원 길이라는 동요 속에서는 아까시를 아카시아로 잘못 부르고 있다. 아까시나무와 아카시아는 같은 콩과식물이지만 그 속(屬)은 완전히 다르다. 아까시나무는 북아메리카 원산의 낙엽교목이다. 원산지에서는 키가 20~30m나 자라고 가슴 높이 지름이 2m나 되는 것도 있다고 한다.

아까시나무는 참으로 고마운 나무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값진 나무임에 틀림없다. 우선 아까시나무의 이름부터 살펴보자. 학명 로비니아 쉐도우 아카시아(Robinia pseudo-acacia)는 16세기 스페인의 로빈 대령이 이 식물을 유럽에 전했으므로 식물학자 린네가 그의 이름을 따 속명을 로비니아(Robinia)라 했다. 뒤의 종소명 쉐도우 아카시아(pseudo-acacia)는 아카시아를 닮았다는 뜻이다. 즉 로빈 대령이 갖고 온 아카시아 비슷한 나무라는 뜻이다.

아까시란 가시가 있다는 뜻으로 붙여진 로비니아(Rhobinia)를 일컫는 우리말이고, 아카시아(Acacia)는 열대성 관목을 지칭하는 라틴어 속명이다.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까시나무를 아카시아로 적은 것은 분명 잘못된 표기이다. 아카시아는 열대성이기 때문에 우리 나라의 경우 밖에서는 살 수 없다. 온실에서나 가꿀 수 있을 뿐이다. 또 일부 백과사전에서는 아까시나무를 아카시라고 적고 있는데 이것도 잘못되었다.

수많은 문학 작품에서도 아까시나무를 아카시아로 적고 대중가요에서도 대부분 아카시아로 노래하고 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서조차 아까시나무를 아카시아로 가르치는 것은 정말 문제이다. 로비니아를 아카시아로 하면 진짜 아카시아는 뭐라고 적을 것인가?

□ 가장 먼저 식재한 곳은 경인 철도변의 절개지

아까시나무를 우리 나라에 도입하여 처음 식재한 곳은 경인 철도변과 용산의 육군본부 자리이다. 1910년 결술국치가 있은 얼마 후 독일 총 영사 크루거가 아까시나무 묘목을 들고 초대 총독인 테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를 찾아갔다. 당시 노량진과 제물포간의 경인 철도 변에 심을 수종에 대해 테라우치가 자문을 구했기 때문이다. 크루거는 중국 산동성의 독일령 청도(靑島)에 자국에서 옮겨와 심은 아까시나무가 잘 자란다고 했다.

테라우치는 중국으로부터 수만 그루의 아까시나무 묘목을 들여왔다. 경인 철도변에 식재한 것을 본 당시의 프랑스인 불어교사 에밀 마텔은 번식력을 걱정하여 산지에는 심지 말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총독부 당국자는 전국의 헐벗은 산에 아까시나무를 심어 화목으로 쓰도록 한 것이 대량식재하게 된 동기이다.

아까시나무로 황무지를 녹화한 예는 많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테네시강 유역의 황무지에 아까시나무를 심어 푸른 숲으로 가꾸는데 성공했다. 프랑스 동부의 산악지대, 독일 서부지역에도 아까시나무를 심어 푸른 숲을 만들었다. 숲이 우거진 뒤로 물이 풍부해 졌고 황무지에 목장을 만들어 수많은 젖소를 치고 있다. 지금은 젓과 꿀이 흐르는 낙원으로 바뀐 셈이다.

아까시나무는 꽃이 아름다워 관상수로 심어도 좋다. 중국의 대련시(大蓮市)에 가면 아름드리 가로수가 모두 아까시나무라는 데 놀라게 된다. 공원에도 거대한 아까시나무가 자란다. 우리 나라에서는 일부 지방에서 가로수로 아까시나무를 심은 적이 있으나 지금은 모두 사라졌다. 서울시청에서 명동으로 넘어가는 소공동 중간 쯤에는 건물 앞 조경수로 늙은 아까시나무가 심어져 있다. 해마다 꽃이 피어 그윽한 향기로 도시인의 찌든 마음을 씻어 준다.

□ 황무지를 녹화할 수 있는 유망한 경제수

아까시나무는 콩과식물이다. 잎은 녹비효과가 뛰어나 토양을 빨리 기름지게 한다. 그러나 이 나무 밑에서는 초본식물이 자라지 못한다. 지나치게 잎이 무성하여 햇빛이 지면까지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초기의 우리 나라 조림에 있어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수종이 바로 아까시나무였다.

헐벗은 산, 그것도 산성토양이 섞인 암벽지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수종을 찾던 중 아까시나무가 선택되었다. 초기에는 일인들에 의해 대량 번식돼 전국각지에 심어졌다. 광복 후 지난 80년대까지만 해도 10대 조림 수종에 들어 있을 정도로 중요한 나무였다. 당시에 심어진 아까시나무는 초본 류도 자라지 못하는 척박한 땅을 점차 비옥한 토양으로 바꿔나갔다.

얼마 전 태백산 금대봉 식물 탐사 길에 그 곳 광산지대를 지날 때였다. 당시에는 광산에서 버린 폐석 더미를 녹화하는 일이 큰 문제였다. 석탄을 캘 때 나오는 폐석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그대로 두면 장마기에 산사태의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어떤 나무를 심어야 살 수 있을까 궁리하고 있었다.

태백시에서는 근류균을 갖고 있는 물오리나무를 심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폐석의 자갈더미에서 물오리나무 묘목이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아까시나무를 심으라고 태백시에 건의를 한 적이 있다. 담당자의 회신은 외래 수종이어서 주민들의 거부감이 적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2~3년 뒤에 그 곳을 찾았을 때는 물오리나무는 예상대로 모두 말라죽고 아래쪽 물기가 있는 곳에만 몇 그루가 겨우 목숨을 유지하고 있었다. 완전히 실패한 조림 사업이었다. 그 후 다시 아까시나무 조림이 시작되어 연차적으로 식재한 결과 지금은 잘 자라 땅을 비옥하게 만들었음은 물론이다. 이제는 아까시나무를 베고 다른 나무를 심어도 살 수 있을 것이다.

아까시나무는 콩과식물의 특성을 잘 간직하고 있는 낙엽교목이다. 뿌리에 기생하는 근류균이 질소를 고정하므로 유기질이 적은 곳에서도 살아가는 나무이다. 황무지나 다를 바 없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떨어진 잎이 땅을 비옥하게 한다. 그 후 아까시나무를 자른 곳에 경제수를 심어 원래의 푸른 산으로 뒤돌려 놓을 수 있는 것이다.


□ 잎은 단백질 함량이 높은 양질의 가축사료


아까시나무는 번식력이 강한 나무이다. 씨가 익으면 꼬투리가 말리면서 뒤틀려 그 속에 든 씨를 멀리 퉁겨 보낸다. 또 어떤 것은 꼬투리 째 떨어져 바람을 타고 빙글빙글 돌면서 멀리 날아간다.

딱딱한 씨는 발아력이 좋은 편은 못되나 양지에 떨어진 것은 싹이 터 한 해에 거의 2~3m까지 자란다. 또 지하경은 옆으로 기면서 뻗어가다 개활지를 만나면 금방 어린줄기로 솟아오르고 이어 큰 나무로 자란다. 그 때문에 시골에서는 산소에 돋아나는 나무로 가장 골치를 썩이는 나무가 바로 아까시나무이다. 뽑아도 쉽게 뽑히지 않고 끊어지면 남은 부위에서 다시 싹이 돋기 때문에 없애기에 여간 힘든 나무가 아니다.

아직도 시골 사람들은 왜놈들이 나라를 망치려고 몹쓸 가시나무를 심었다고 믿고 있다. 더욱이 묘지를 죽은 이의 유택으로 믿고 있는 우리의 전통 사상과 얽혀 묘지 근처에 심어진 아까시나무 뿌리가 관을 뚫고 들어간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아니다. 아까시나무는 뿌리를 깊이 내리지 않고 옆으로 얕게 뻗어나가는 나무이다. 묘지에서 아까시나무가 잘 자라는 것은 그 자리에 볕이 충분히 비취기 때문이다.

아까시나무는 도입식물이지만 이제는 우리 땅에 귀화한 자생식물이다. 잎은 단백질 함량이 높아서 양질의 가축 사료로 쓸 수 있다. 지난 60년대 산림청에서는 세계 최초로 가시 없는 아까시나무를 작출해 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가치를 이해하지 못해 종을 보존하지 못했지만 미국에서는 한국의 가시 없는 아까시나무를 대량 번식하여 사료로 쓰고 있다.

그 동안 소나 말, 양, 토끼, 염소 등 초식동물은 물론 돼지나 닭의 사료로도 써 왔다. 그러나 날카로운 가시 때문에 청정 사료로는 쓸 수 없었다. 줄기를 베어 말렸을 때 잎이 떨어지면 줄기를 걷어내고 남은 잎을 사료로 썼다. 그에 비해 가시 없는 아까시나무 줄기는 여름철에 가지 째 잘라서 분쇄기에 넣어 다른 사료와 섞어 가축에게 먹일 수 있다.

아메리카 대륙을 상징하는 식물 하면 먼저 세퀘이어나무가 생각날 것이다. 그에 못지 않게 아름다운 나무가 바로 아까시나무이다. 세계적으로 중요한 밀원식물이다. 유럽에서는 아까시나무의 밀원가치를 널리 인식하여 지금도 심고 있다. 특히 동구권 체코, 폴란드, 유고 연방 같은 나라에서는 대규모 아까시나무 숲을 조성하여 꿀을 생산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가. 잘 자란 아까시나무도 공연히 트집을 잡아 베어내고 있다. 설탕 한 톨 생산하지 못하는 나라에서 아까시나무 없으면 어디서 꿀을 얻겠는가. 우리 나라 꿀 생산량의 70%를 아까시나무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고 보면 아까시나무야말로 국민 건강을 책임지는 나무임에 틀림없다.


□ 아까시 목재는 결이 곱고 탄력이 있어 고급 공예재로


아까시나무 꿀은 향기가 좋고 맛이 순하다. 그래서 서양에서도 아까시나무 꿀을 상품으로 친다. 호주나 뉴질랜드 같은 나라는 워낙 많은 꿀을 생산하기 때문에 설탕보다 꿀의 값이 더 싸다고 한다. 최소한 이 나라에서는 가짜 꿀 시비는 없는 셈이다. 아까시나무는 꿀이 흐르는 나무라 하여 영어로 꿀벌나무(Bee tree)라 한다. 뒤틀린 꼬투리를 보고 검은 메뚜기(Black locust) 나무라 했다.

목재는 단단하고 질겨서 가구를 만들면 탄력이 좋아 잘 부러지지 않는다. 서부 개척시대에 아까시나무 목재로 마차를 만들었고 열차도 아까시나무 목재로 만들었다고 한다. 또 아까시나무 목재로 배를 만들었는데 오래도록 물에 잠겨 있어도 잘 썩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 지난 6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에 우마차가 다녔다. 그 때 우마차의 차체는 모두 아까시나무와 참나무 목재를 사용했다고 한다. 참나무는 단단하지만 무거워서 좋지 않았고 가볍고도 질긴 아까시나무 목재를 으뜸으로 꼽았다.


마포에서 제작된 우마차는 전국 각지에서 반입된 질 좋은 아까시나무 목재로 만들었다. 우리 나라의 경우 아까시나무를 목재자원으로 생산하는 것보다 밀원식물에서 가치를 찾으면 몇 배의 소득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아까시나무는 꽃을 먹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나무이다. 생으로 고추장이나 된장에 찍어 먹을 수 있고, 입맛에 따라 마요네즈나 토마토 케셳에 찍어 먹어도 좋다. 상추쌈에 곁들이면 맛과 멋 그리고 향을 동시에 취할 수 있다. 차를 끓이면 운치도 좋고 빛깔 고운 찻물에 싱싱한 꽃 두어 송이를 띄우면 한 쌍의 원앙이 연못에 노니는 것처럼 신비감마저 감돈다.


아까시나무 꽃을 쌀가루에 버무려 찌면 맛깔스런 백설기가 된다. 아까시나무 꽃밥에 아까시나무 물김치를 곁들이면 이보다 더 기막힌 요리가 있을까. 새로 돋아난 싹도 나물로 먹을 수 있다. 줄기를 된장이나 고추장 항아리에 박아두면 훌륭한 밑반찬 장아찌가 된다. 잎을 갈아 녹즙을 만들고 그 물에 밀가루를 반죽하여 국수나 빵을 만들어도 좋다. 이처럼 아까시나무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자원식물인 셈이다.

몇 해전 어느 교수가 한 일간지에서 아까시나무 망국론을 쓴 일이 있었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글이었다. 그 교수는 일반인이 생각하는 비뚤어진 상식으로 우리 국토에서 아까시나무를 모두 잘라내야 한다고 글을 썼다. 그 글을 본 몇몇 뜻 있는 학자들이 모여 한국아까시나무연구회라는 단체를 설립하였다. 나무 한가지를 연구하기 위한 학술단체로는 국내에서 최초로 설립된 것이다.

또 한국양봉협회에서는 아까시나무를 더 많이 심고 심어진 나무는 더 이상 베지 말아달라고 당국에 건의를 하기도 했다. 양질의 꿀을 생산하는 아까시나무야말로 가장 부가가치가 높은 나무인 까닭이다.


□ 아까시나무는 쓰임새 많은 미래의 생명자원

우리 땅에 있는 생명 자원을 잘 가꾸고 사랑하는 일도 중요하다. 자생식물은 이 땅의 환경에 적응하는 힘이 강해서 큰 힘을 기울이지 않아도 살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외래식물을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식물 국수주의가 아닐 수 없다. 우리 땅에 없는 식물자원이면 그 것이 어느 나라이건 가리지 말고 더 많은 생명 자원을 확보하는 것이 국익이다. 물론 황소개구리나 베스처럼 토착 생태계를 교란하는 생물 종의 방사는 위험한 일이다. 선진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세계의 식물 종을 수집해 왔다. 지금의 세태를 종자전쟁 시대라고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최근 들어 전국 각지에 심어진 아까시나무가 때아닌 수난을 받고 있다. 외래 수종인 아까시나무가 우리 자생 수종을 몰아내고 전국의 삼림을 고사시킨다는 것이다. 잘못 알려진 식물 지식 때문에 밭둑이며 도로 가에 심어진 나무까지 무차별 잘려나가고 있다. 쓸모 없는 아까시나무의 그늘 때문에 농작물이 피해를 입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라면 일리가 있다.

또 근교에서 자라는 아까시나무를 서울시에서는 불량수종라는 이름으로 모두 잘라내겠다고 발표했다. 과연 아까시나무는 이름처럼 아무 쓸모 없는 불량 수종일까.

앞에서도 아까시나무는 강한 볕을 좋아하는 양수라고 했다. 다른 나무가 자라지 못하는 바위틈에 간신히 뿌리를 내려 수십 년을 버텨온 고마운 나무이다. 서울 근교의 산지는 대부분 산성 토양이다. 바위틈에 조금 남은 마사토 사이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아까시나무를 죽여버리겠다는 것이다.

위험 천만한 일이다. 바위틈에서는 관목만이 살 수 있을 뿐 그 어떤 교목도 뿌리를 내리기 어렵다. 더구나 인공 조림으로 아까시나무 숲을 대신할 만한 수종이 있겠는가. 기존의 아까시나무를 잘라내고 그 자리에 상수리나무나 층층나무, 말채나무를 심겠다고 했다. 이런 수종은 한 마디로 어렵다.

물이 풍부하고 비옥한 땅에서 자라는 수종을 바위 위에 심겠다는 것이다. 어이가 없다. 더구나 거름기가 없는 마사토에서는 소나무마저도 살 수 없다. 아까시나무 만이 근류균을 통해 스스로 질소를 고정하기 때문에 삼청동 공원의 바위 위에서, 남산의 암봉에서, 그리고 관악, 도봉, 아차산에서도 매년 꽃을 피워 맑은 향을 퍼뜨리는 것이다.

밭둑이나 농지 주변의 아까시나무는 일부 농민들의 손에 의해 껍질을 벗긴 채 말라죽고 있다. 또 변두리 마을 뒷산에 서 있는 아까시나무는 체육시설 확충으로 야금야금 먹혀 들어가고 있고 텃밭을 일굴 때 방해가 된다고 하여 그루터기를 불태우고 있다.

아까시나무는 절대 불량수종이 아니다. 일본 사람들이 우리 땅을 망치려고 심은 것은 더욱 아니다. 아까시나무가 없었다면 헐벗은 우리 산야가 이처럼 풍요로운 숲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아까시나무에게 매일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빈터나 도로 절개지 같은 곳이 있다면 환경공해에도 강한 아까시나무를 심어 빠른 시일 내에 숲을 조성해야 한다.

북아메리카에서 들여온 귀화식물이지만 언제인가 이 땅에서 사라질 나무이다. 이 땅의 자생식물로 이루어진 숲이 무성해 지면 아까시나무는 그늘에 가려 저절로 죽어버리고 만다. 그 때까지는 잘 가꾸어 생활에 이용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무조건 미워 할 것이 아니라 개발하기에 따라 아주 요긴하게 쓸 수 있는 자원식물이 바로 아까시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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