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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동리 일박 곽재구
귤동리 일박
아흐레 강진강 지나
장검 같은 도암만 걸어갈 때
겨울 바람은 차고
옷깃을 세운 마음은 더욱 춥다
황건 두른 의적 천만이 진을 친 듯
바다갈대의 두런거림은 끝이 없고
후두둑 바다 오리들이 날아가는 하늘에서
그날의 창검 부딪는 소리 들린다
적폐의 땅 풍찬노숙의 길을
그 역시 맨발로 살 찢기며 걸어왔을까
스러져가는 국운, 해소 기침을 쿨럭이며
바라본 산천에 찍힌 소금 빛깔의
허름한 불빛 부릅뜬 눈 초근목피
어느덧 귤동 삼거리 주막에 이르면
얼굴 탄 주모는 생굴 안주에 막걸리를 내오고
그래 한잔 들게나 다산
혼자 중얼거리다 문득 바라본
벽 위에 빛 바랜 지명수배자 전단 하나
가까이 보면 낯익은 얼굴 몇 있을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하나 더듬어가는데
누군가 거기 맨 나중에
덧붙여 적은 뜨거운 인적사항 하나
정다산(丁茶山) 1762년 경기 광주산
깡마른 얼굴 날카로운 눈빛을 지님
전직 암행어사 목민관
기민시 애절양 등의 애민을 빙자한
유언비어 날포로 민심을 흉흉케 한
자생적 공산주의자 및 천주학 수괴
바람은 차고 바람 새에
톱날 같은 눈발 섞여 치는데
일박 사천 원 뜨겁게 군불이 지펴진
주막방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다
사람을 사랑하고 시대를 사랑하고
스스로의 양심과 지식을 사랑하여
끝내는 쇠사슬에 묶이고 찢긴
누군가의 신음소리가 문풍지에 부딪혔다.
사평역에서, 문학과지성사, 1983
그리운 남쪽 곽재구
그리운 남쪽
그곳은 어디인가
바라보면 산모퉁이
눈물처럼 진달래꽃 피어나던 곳은
우리가 매듭 굵은 손을 모아
여어이 여어이 부르면
여어이 여어이 눈물 섞인 구름으로
피 맺힌 울음들이 되살아나는 그곳은
돌아보면 날 저물어 어둠이 깊어
홀로 누워 슬픔이 되는 그리운 땅에
오늘은 누가 정 깊은
저 뜨거운 목마름을 던지는지
아느냐 젊은 시인이여
눈 뜨고 훤히 보는 백일의
이땅의 어디에도
가을바람 불면 가을바람 소리로
봄바람 일면 푸른 봄바람 소리로
강냉이 풋고추
눈 속의 겨울 애벌레와도 같은
죽지 않는 이땅의 서러운 힘들이
저 숨죽인 그리움의 밀물 소리로
우리 쓰러진 가슴 위에 피어나고 있음을.
사평역에서, 창작과비평사, 1983
김밥 곽재구
김밥
□ 1
김밥을 먹는다
비 오는 광주 미 문화원 골목
한 무리의 전경대원들이
선 채로 혹은 구부려 앉은 채로
빗물에 적신 김밥을 먹는다
철문이 굳게 닫힌 문화원 건물에는
어둠보다 먼저 등불이 켜지고
그 등불 아래 문화원의 하급 관리들이
커피를 마시며 불온한 광주의 저녁 공기와
불온한 식민지의 민주화를 이야기할 것이다
한가롭게 잡담을 하며 AFKN을 보며
독수리 문장이 박힌 흔들의자에 앉아
측은한 눈빛으로 철문 밖
수비병들의 젖은 식사 시간을 바라볼 것이다
그 중의 한 삼등 서기관은 지적할지 모른다
이방인의 자유와 이방인의 평화를 위해
보초를 서는 어리석은 민족을 지금 우리는 보고 있다고
화살 하나로 대포에 맞선 아메리카 인디언이
기병대의 보초를 선 역사가 아메리카에는 없었노라고
□ 2
김밥을 먹는다
피곤에 전 방석모와 방패
한쪽으로 치워놓고
우리들의 형제 우리들의 친구들이
빗속에서 눈물의 밥을 먹는다
누구를 위한 허무의 만찬인가
초대한 일도 초대받은 일도 없는
불가사의한 이방의 이념을 위해
거리에서는 시위대와 사복 체포조의
쫓고 쫓기는 발자국 소리 어지럽고
무전기에서는 아메리카의 안녕을 확인하기 위한
모국어의 치욕이 되풀이된다
이러한 때 문화원의
한 삼등서기관은 강변할 것이다
위대한 합중국 상원이 12:7의 현명한 표차로
그레그의 대사 임명안을 가결한 것은
질서와 안정을 위한 한국의 선택과 일치한 것이라고
그레그와 CIA는 동방의 이 작은 오지에
아메리카의 영광을 재현할 것이라고
빗속의 수비병들을 바라보며 흡족하게 이야기할 것이다
□ 3
무엇을 지키고 섰는가
젊은 형제여 그대의 고향은
감자꽃 피는 강원도 산골 어디거나
물빛 착한 섬진강 화개나루 어디
황토밭머리 도라지밭을 일구던
그대의 어머니는 코리언
뒷산 솔숲 갈퀴나무 한 짐으로
천년 보리밥 구들 지피던
그대의 아버지 또한 코리언
그러므로 그대의 조국은
아메리카가 아닌 코리아
그대의 사랑과 추억 또한
아메리카가 아닌 코리아
한 덩이 김밥으로 허기를 채우고
바라보는 산천 또한 아메리카가 아닌 코리아
□ 4
어둠이 온다
수천 수만 수십 만 색색의 만장을 들고
허기진 광주 허기진 한국의 골목 골목마다
군용 매트리스를 깐 어둠이 온다
사랑이여
사랑이라 부르지 않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그날의 이름이여
우리가 우리의 가슴에 총검을 꽂고
우리가 우리의 이웃에 기총소사를 하고
우리가 우리의 형제를 암매장한
그을리고 피멍든 그 미친 증오의 날들이여
거리에서는 그날의 절망과 같은
누군가의 외마디 비명 소리 흩어지는데
껴안으려면 불과 몇십 리 반쪽의 조국은 멀고
아메리카의 음험한 철문에 몸을 기댄 채
자꾸만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젊은 형제여
자꾸만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불구의 조국이여.
서울 세노야, 문학과지성사, 1990
누런 똥 곽재구
누런 똥
풋고추 열무쌈 불땀나게 먹고
누런 똥 싼다
돌각담 틈새 비집고 들어온 바람
애호박 꽃망울 흔드는데
이쁘구나 힘주어 누런 똥 싸다보면
해지는 섬진강 보인다
사는 일 바라거니 이만 같거라
땀나고 꽃피고 새 거름 되거라.
* 평사리: 하동군 악양면 섬진강변 마을. 앵두나무와 돌각담과 모밀꽃밭이 아름다움. TV극 「토지」의 촬영 무대가 됐음.
사평역에서, 문학과지성사, 1983
대인동 2 곽재구
대인동 2
바람이 심한 날은
전당포 앞 먼지 낀 포플러나무 잎새에서
떠나 간 토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오백 원 더 주세요 작은 잎이 속삭였다
그 이상은 안 돼 잘 생각해 준 거야 굵은 잎이 대답했다
바람이 심하게 불어왔다
세상에서 제일 큰 밥통에서 꼬르륵 머슴새가 울었다
삼백 원만 더 주세요 작은 잎이 매어 달렸다
안 돼 다른 데서 알아봐 굵은 잎이 세게 뿌리쳤다
이백 원만 백 원만 안 된다면 안 돼
토미의 작은 잎들이 불쑥 자라 가지가 되었다
토미의 작은 가지들이 불쑥불쑥 자라 굵은 가지가 되었다
우두둑 부러진 토미의 가지들이 몽둥이가 되어
전당포 안은 삽시간에 개새끼 씹새끼 피가 튀어오르고
벽시계가 부숴지고 금반지가 흩어지고
깨진 대갈통보다 먼저 흩어진
반지 위에 팔을 껴안던 전당포 주인
싸이렌이 울리고 백차가 오고 구둣발과 짓밟힘이 오고
구치소의 토미를 위해 우리들은 일당 백 원을 떼었다
한 번도 대결하여 이겨본 일이 없는 왕사마귀
우리들은 시원하였다 푸른 눈 갈색 얼굴 토미
그 토미가 아버지의 땅으로 떠나던 날
우리들보다 먼저 토미가 울음을 터뜨리고
가슴을 쥐어박으며 땅을 치며
우리는 함께 붙들고 뒹굴었다
누가 어머니인지도 모른 채 토미는 떠나가고
똑같은 얼굴 똑같은 슬픔으로
다시 저무는 우리들의 땅
햇살이 부신 날은
전당포 앞 무성한 포플러나무 잎새에서
반짝 웃는 토미의 옆 얼굴이 보였다.
사평역에서, 문학과지성사, 1983
대인동 3 곽재구
대인동 3
재건학교 김 선생님이 입대하던 날
아리랑 한 보루를 사다 드렸다
우리에게 처음으로 사람의 사랑으로 다가와서
처음으로 사랑의 그림자에 귀를 기울이게 한
야간 천막학교 김 선생님
15촉 흐린 불빛 아래 거적을 깔고
우리들은 처음으로 쓰레기가 아닌
희망과 사랑의 언어들을 익혔다
처음으로 쓰레기가 아닌
우리들의 지난 날과 내일을 기억했다
마음의 긴 장대 끝에 깍지를 끼우고
선생님이 따주는 고향집의 익은 감과 별들이
우리들의 가슴에 들어와서 뜨겁고 선선한 그늘이 되었다
돌림으로 이질을 앓던 그해 여름
골목 안 창녀 몇이 거적에 쌓여 나갔고
함께 공부하던 배암장사 곱추 딸도
자갈밭에 묻혔다
떠나가는 모든 것은 결국 아름다움일까
소집영장을 받고 선생님이 떠나던 날
선생님은 낮은 산맥으로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고
선생님이 떠난 천막학교를 우리는 때려부수지 않았다
해 지는 시간이면
우리는 다시 천막학교로 모여들고
어느 늦은 여름밤
선생님을 닮은 땅강아지 한 마리가
우리들의 머리 위로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맴을 돌다 사라졌다.
사평역에서, 창작과비평사, 1983
대인동 4 곽재구
대인동 4
역전 목포 신발가게 진열장에는
옥색 고무신 한 켤레 빛나고 있었지
자줏빛 콩꽃이나 감자꽃 무늬와도 같은
조그만 꽃송이들이 고무신 가득 흩어져 있었지
등이 굽은 하역인부들이 굽은 길을 절며 가고
지분 바른 창녀들이 귀대병의 허리춤에 매달리는 동안
용산으로 가는 저녁열차에 불이 켜지고 있었지
왜 떠나는지 왜 남는지 모른 채
봇짐을 꾸린 사람들이 황급히 개찰을 하고
저녁 바람이 불어오던 호남선 별 많은 밤
어머니는 용산행 열차에 몸을 던졌지
대낮에도 술에 취한 어른들은 원산집
긴자꾸 어린 갈보 이야기를 하고
저탄장의 조개탄을 훔쳐 팥죽과 바꾸면서
죽통에 들들 끓던 울먹거림을 보았지
기차는 가고 저녁바람은 불고
군산 여인숙 삼봉판에 깽판이라도 놓을까
역전에 서성거릴 뜨내기 촌놈이라고 두들겨 패놓을까
쳐다본 밤하늘에 어머니의 옥색 고무신
한 켤레 빛나고 있었지.
사평역에서, 문학과지성사, 1983
대인동 부르스 곽재구
대인동 부르스
추석달이 밝은데
비인 거리에 너는 그림자를 띄웠느냐
콜타르 먹인 전신주 아래
다리 꼬고 턱 받치고 꼭 그렇게
눈물 나는 모습으로 서서 너는 다시
이 거리의 슬픔으로 가을 달맞이꽃이 되려느냐
부평에서 반월에서 구로동에서
이름도 얼굴도 때묻은 젖 큰 가시내들은
고향이라고 명절이라고 다들 밀려오는데
전세버스의 차창마다 깨꽃 같은 그리움은 피었는데
네가 설 땅이 꼭 한 곳뿐이라고
너는 그 전주 아래 슬픔의 뿌리를 내리고 굳었느냐
그 무슨 한맺힌 기다림의 씨앗이라도 뿌렸느냐
어색하게 스타킹을 신고 원피스를 입고
사과 광주리 설탕 한 포 입어보지 못한
어머니의 겨울내복을 사 들고
아버지의 소주와 동생의 운동화와 그림물감을 사 들고
저렇듯 돌아오는 때절은
가시내의 웃음소리가 그리웁지 않느냐
추석 달빛은 찬데
대인동 골목마다 찬 달빛은 출렁이는데
굳어 버린 너의 몸 위에 누가
창녀라고 낙인을 찍겠느냐
누가 한 오리 저주의 그림자를 드리우겠느냐
가까운 고향도 눈에 두고 갈 수 없어서
마음만은 언제나 고향 식구들 생각이 뜨거워서
홀로 들이켠 수면제 가슴 젖어오는데
추석 달빛은 차고 어머니는 웃고
너는 뜬 두 눈으로 달맞이꽃으로
대인동 골목마다 죽어서 살아 있는 눈물이 되었구나.
사평역에서, 문학과지성사, 1983
도문 장터 곽재구
도문 장터
눈 내리는 도문 닷새 장터에서
도라지 파는 민기수씨와 틀국수 시켰네
간도의 바람 차고 험해도
초면인 우리 두 사람 동무처럼 따뜻했네
장터 거리에 개성 자전차포 차린
민진수씨는 그의 친형
두만강물이 푸르지 않는 것은
찢겨져 사는 겨레 때문이라네
헤어져 사는 것도 절통한데
욕지갱이 삿대질 이젠 그만두라네
함께 앉은 나무의자 흔들려 삐꺽이고
함께 비운 수수술병 늘어나는데
길모퉁이만 돌아서면 바로 두만강 다리
거기서부터 칠천만 우리 고통 시작된다네.
사평역에서, 문학과지성사, 1983
바닥에서도 아름답게 곽재구
바닥에서도 아름답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날은 올 수 있을까
미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은 채
그리워진 서로의 마음 위해
물먹은 풀꽃 한 송이
방싯 꽂아 줄 수 있을까
칡꽃이 지는 섬진강 어디거나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한강변 어디거나
흩어져 사는 사람들의 모래알이 아름다워
뜨거워진 마음으로 이 땅 위에
사랑의 입술을 찍을 날들은
햇살을 햇살이라고 말하며
희망을 희망이라고 속삭이며
마음의 정겨움도 무시로 나누어
다시 사랑의 언어로 서로의 가슴에 뜬
무지개 꽃무지를 볼 수 있을까
미쟁이 토수 배관공 약장수
간호원 선생님 회사원 박사 안내양
술꾼 의사 토끼 나팔꽃 지명수배자의 아내
창녀 포졸 대통령이 함께 뽀뽀를 하며
서로 삿대질을 하며
야 임마 너 너무 아름다워
너 너무 사랑스러워 박치기를 하며
한 송이의 꽃으로 무지개로 종소리로
우리 눈뜨고 보는 하늘에 피어날 수 있을까.
사평역에서, 문학과지성사, 1983
부여 곽재구
부여
저 산 언덕을 넘어서면
보일 것이다
꽃잎에 덮인 옛 마을의 슬픔과
강물에 씻기운 옛 사람의 울부짖음
덧없는 한 세상이 끝이 나고
풋풋한 봄바람이 백제 가시내의
살냄새를 뿌릴 것이다
여기서부터 네 말을 내려라
쩌렁대는 하마비 몇 구절이
맨발로 오는 네 발부리에 채일 것이며
마을의 옛 이름이 적힌 기왓장
몇 조각이 아직 잠들지 못하고
천년 들길을 헤매일 것이다
윗것이 아래것을 베고는
결코 일어설 수 없는 그날의 역사가
봉화대의 끓는 기름가마처럼
산봉우리의 아지랑이로 피어오를 것이다
아무도 육백육십일년의 봄 전쟁을
본 사람은 없지만 또한 아무도
그 싸움을 잊은 사람은 없으리라
맨발로 이 들판을 걸으면
보리밭 가득 겁탈당한
백제 가시내의 숨소리가 배어 있고
낄낄대는 소정방의 웃음소리가 배어 있고
한 뿌리 신라와 백제가
한 뿌리 남한과 북한이
천년도 넘게 싸워온 부끄러운 지난 날이
강물 속에 거꾸로 처박힌다.
사평역에서, 창작과비평사, 1983
사평역에서 곽재구
사평역(沙平驛)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히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 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 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사평역에서, 문학과지성사, 1983
얼음장 아래 고인 연분홍 눈물 곽재구
얼음장 아래 고인 연분홍 눈물
얼음장 아래
연분홍 꽃 눈물 고였네
떠나가 오지 않는 친구야
맑은 자갈 세모래 틈새
배 터진 송사리 한 마리 얼어 죽고
강변 자운영 꽃밭은 시들었네
목소리 카랑했던 친구야
이 세상 제일 고운 오월 꽃 굴헝 속
자운영 꽃잎만한 목비 하나 떨구었네
가만히 귀 대고 들어보면
아직은 누군가 살아 있는지
배 터진 송사리 얼음장 아래
맑은 슬픔 단풍잎 하나 둘 셋.
사평역에서, 문학과지성사, 1983
엄경희 곽재구
엄경희
미스 엄이라고 부르지 말아요
차라리 서정성을 생각하여
17번 다순이(茶順伊)라고 불러 주어요
춘천을 떠나온 지 칠년
지용의 호수보다 맑은 고향이에요
생각하기 싫어요 식구들의 얼굴
그러나 아버지의 탄광 이야기는 언제나 좋아요
한 주일의 채탄작업이 끝나면
아버지가 돌아오는 토요일의 황혼이 좋았어요
어머니와 함께 기도하던 성 교회의
일요일의 평화가 좋았어요
일곱 살 적 함백선 어느 작은 산역에서
아버지가 꺾어 주던 작고 흰 채송화를
아직 가슴에 새겨 두고 있어요
사랑하고 있어요 크고 검은
아버지의 손과 눈망울을
끝내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던 그 일요일
흰눈이 드문드문 날리던 그해 광산촌의
겨울을 사랑하고 있어요
더 이상 죄를 생각하기 싫어요
관광호텔 스카이라운지
피뢰침에 걸려 웅웅대는
저 스산한 죄의 바람소리가 싫어요
지난 가을 그 피뢰침에
목을 걸고 죽은 27번 금희의
벗은 알몸이 싫어요
가까이 와요 문과대학
철학과를 나온 엉터리 시인 친구
저 아래 깜박이는 도시의 죽은 눈빛을 보아요
오지 않는 예언자를 기다리며
번듯하게 누워 죽은 도시의 검고 흉한 관들이 싫어요
아무에게나 속고 쓰러지는
착한 별과 꽃들이 추워요
그러나 이제 누구에게나 사랑을 선언할 수 있어요
어둠이 어둠이라면
밝음이 밝음이라면
언제라도 좋아요 나를
이 옥상에서 밀어제껴 주세요
펄펄펄 펄펄펄 사랑이라고 평화라고 뉘우치며
하늘의 꽃으로 피어나겠어요.
사평역에서, 창작과비평사, 1983
임진강 살구꽃 곽재구
임진강 살구꽃
섬진강물에 피는 복사꽃처럼
임진강변에 지는 살구꽃처럼
우리 그리운 마음 꽃바람 흩날릴 수 있다면
사랑은 더욱 그리워 흙바람도 이는 것을
봄 산 넘어오는 햇살 말고
마음으로 넘어오는 그리움 말고
우리 함께 손잡고
꽃잎 뜨는 강물 지켜볼 수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아
아침 강물에 복사꽃 피었더니
가슴의 슬픈 첩첩사연
저물녘 살구꽃 몇 잎에 띄웠구나.
사평역에서, 문학과지성사, 1983
전장포 아리랑 곽재구
전장포 아리랑
아리랑 전장포 앞바다에
웬 눈물 방울 이리 많은지
각이도 송이도 지나 안마도 가면서
반짝이는 반짝이는 우리 나라 눈물 보았네
보았네 보았네 우리 나라 사랑 보았네
재원도 부남도 지나 낙월도 흐르면서
한 오천년 떠밀려 이 바다에 쫓기운
자그맣고 슬픈 우리 나라 사랑들 보았네
꼬막껍질 속 누운 초록 하늘
못나고 뒤엉긴 보리밭길 보았네
보았네 보았네 멸치 덤장 산마이 그물 너머
바람만 불어도 징징 울음 나고
손가락만 스쳐도 울음이 배어나올
서러운 우리나라 앉은뱅이 섬들 보았네
아리랑 전장포 앞바다에
웬 설움 이리 많은지
아리랑 아리랑 나리꽃 꺾어 섬그늘에 띄우면서.
사평역에서, 문학과지성사, 1983
조경님 곽재구
조경님
늦은 밤 남면 가는
시외버스 차창에서
고단한 네 하현의 눈썹을 보았구나
봉숭아 물든 손톱 너머로
고향집 마당 가득 푸른 하늘은 펼쳐 있고
가을걷이 끝난 들판 억새밭 위로
희게 웃는 식구들의 얼굴도 보이겠지
감잣대를 엮어 말리는 엄마 곁에서
동생들은 또 지난 여름 산사태를 생각할까
흙더미에 묻힌 아버지와 막내
자갈길에 버스는 자꾸 퉁겨 오르고
그때마다 깜박 깨어나는 네 졸음 속으로
덧없는 한 시대의 어둠과 슬픔은 밀려 가고
차창 밖 어둠 속에 꽃을 던지는
마을의 도라지꽃 불빛이 스스롭다
여느 밤 충장로 거리에 나서면
가시내들은 엉덩이를 부풀린
목 짧은 바지에 퍼머넨트 히히덕거리고
무슨 잭슨 플록이다 카라얀이다 요란하지만
경님아 그것들이 지닌 영혼은
밤 버스에 깜박깜박 조는
고단한 네 일상의 눈썹보다 아름답지 못하다
그것들이 떠들어대는 피아노 협주곡은
오라잇 하는 네 발차소리보다 정직하지 못하고
그것들이 떠드는 무슨 비구상파 그림들은
네 손톱 끝 연연한 고향하늘
봉숭아빛 꿈보다 깨끗하지 못하다
늦은 밤 버스는 논길인 듯 고향 꿈길인 듯
졸며 흔들흔들 떠나고
네 졸음 틈틈이
땀절은 동전 몇 개를 건네주고 내려서는
저 힘없는 사람들의 뒷등이 따스하다.
사평역에서, 문학과지성사, 1983
화개 장터 곽재구
화개 장터
탁수기씨는 화개 장터에서
반달낫 갈며 한 오십년 살았지
화개나루에 소금배 들고 복사꽃 피던 이팔청춘에
처음 쇳물 끓이고 풀무질 익혔지
된장 내음 땀내 적시는 저녁 나절이면
운천리 백사장에 누워 하늘의 별을 세었지
아니 아니 운천리 안열 부락 김초시네
둘째딸 생각으로 별이 보이지 않았지
작은 토담 타고 돌다 칡꽃 한 묶음 깨금발로 던지면
꽃내음보다 먼저 토방문이 열리고
그때 처음 사랑을 알았지
섬진강 푸른 강물과 지리산 산바람이
어는 산곡에서 속삭이다 함께 어둠에 드는지도 알았지
그 이쁜 전라도 가스나 동란 끝나고 죽었지
산사람 밥 한 솥 푸짐하게 해낸 죄로 강물되어 떠났지
탁수기씨 화개 장터에서
반달낫 갈며 한 오십년 살았지
고스레 고스레 거칠은 강바람에 소주 한잔 부으며
앞으로도 한 백년 운천리 백사장 별을 헤겠지.
사평역에서, 문학과지성사, 1983
화진포 곽재구
화진포
대전차장애물 징검다리처럼 코스모스 꽃길 위에 놓였습니다
만세교 지나 함흥 여관집 큰아들 기선이 아재
이곳 바다에서 사십년 동안 소주병 붙들고 울며 살았습니다
돈은 벌어서 뭐해 고향에 다 있는데 밤이나 낮이나
지나는 사람 붙잡고 소주 한잔씩 권했습니다
울다가 웃다가 헌 오징어처럼 파도에 떠밀려 죽었습니다
대전차장애물 구렁이처럼 코스모스 꽃길 휘감았습니다
너두 한잔 해라 이놈 얼룩무늬 콘크리트 장벽 향하여
고래고래 소주 한잔 따르던 기선이 아재 꽃길 속에 설핏 보았습니다.
사평역에서, 문학과지성사, 1983
희망을 위하여 곽재구
희망을 위하여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굳게 껴안은 두 팔을 놓지 않으리
너를 향하는 뜨거운 마음이
두터운 네 등 위에 내려앉는
겨울날의 송이눈처럼 너를 포근하게
감싸 껴안을 수 있다면
너를 생각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져
네 곁에 누울 수 없는 내 마음조차 더욱
편안하여 어머니의 무릎잠처럼
고요하게 나를 누일 수 있다면
그러나 결코 잠들지 않으리
두 눈을 뜨고 어둠 속을 질러오는
한세상의 슬픔을 보리
네게로 가는 마음의 길이 굽어져
오늘은 그 끝이 보이지 않더라도
네게로 가는 불빛 잃은 발걸음들이
어두워진 들판을 이리의 목소리로 울부짖을지라도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굳게 껴안은 두 손을 풀지 않으리.
사평역에서, 문학과지성사, 1983
첫댓글 좋은글 감사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