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3차(여원재-복성이재)
1. 일시 : 2006. 8. 12(토)
2. 도상거리 : 21.5km
- 여원재-5.5-고남산-5.0-매요리-3.3-사치재-2.9-새맥이재-1.4-시
리봉-3.4-복성이재
3. 주요지점별 운행시간(14시간 소요)
- 여원재(06:00)-고남산(08:40)-매요리(10:40)-점심(10:40-12:00)-사치재(13:30)-낮잠
(13:30-14:30)-복성이뒷재(20:00)
4. 동행 : 영선, 성관
김형
그야말로 복더위입니다. 거리를 걸으면 땀이 주르르 흐르네요. 차라리 시원한 사무실이 최고의 피서지네요
광복절 연휴를 이용하여 백두대간 3차를 계획했습니다. 3박4일 일정으로 여원재에서 시작하여 덕유산 삿갓골재까지 가기로 했죠.
그런데 걱정입니다. 며칠전부터 발바닥에 물집이 생겨 이를 터뜨리니 신경을 건드리고 발이 부어오르네요. 매일 얼음찜질하고 해도 차도가 없네요. 진작 병원을 찾았으면 되었을 것을 어찌어찌 낫겠지 해서 무관심속에 방치한 결과가 이렇게 될 줄이야....
내 몸뚱아리를 이처럼 소중히 다룬 적은 처음이네요. 얼음으로 어르고 달래고 하면서 말입니다. 구두를 대신하여 등산화를 신으니 어느정도 푹신하여 아픔은 덜하지만 걱정은 말이 아닙니다.
8. 11일 영등포역에서 저녁 6시 57분 무궁화호를 타고 남원으로 향했습니다. 한숨자고 일어나니 기차밖으로는 큰 보름달이 둥둥 떠있데요. 출발한지 4시간 지나면 오수를 지나 남원입니다.
오수는 오수의 견(犬)으로 유명한 곳이죠. 초등학교 국어책에도 나왔었지요. 지금은 나오는지 모르지만,
남원역에 내려 택시를 타고 남원시에서 1박을 한다음 뒷날 이른 새벽에 일어나 해장국 마시고 여원재에 택시로 도착하니 06시 쯤입니다.
남원방향으로 10여미터 가면 들머리가 나오고 안내표지목이 서있죠.
지난번 마친 구간이라 눈에 익습니다. 장동마을 정류장에는 대간을 오르시는 분이 비박을 한 후 아침을 먹고 있었습니다. 간단히 목례하고 대장정을 시작했지요
조그마한 뒷산을 오르면 바로 발아래 마을이 펼쳐집니다. 이른 새벽 콩밭을 매는 아주머니가 있어서 인사를 건네고 마을로 내려섭니다.
들과 산의 의미를 잘 말해주는 지형입니다. 콘크리트 도로따라 오르다 능선을 향합니다. 한 아저씨가 아침운동 겸 뒷산 산행을 하고 있더군요. 인사를 건네니 이른 아침 출발했다며 어디까지 가느냐고 묻습니다.
날씨가 너무덥습니다. 아침이지만 벌써 땀은 입은 옷을 흥건히 적십니다. 낑낑대고 2시간 반 정도를 걸으니 고남산 통신탑이 보입니다. 고남산 정상에 서면 조망이 훤합니다. 조선창업 공신자 정도전이 붙여준 권포리(權布理)도 선명합니다.
정상에서 막걸리로 시원히 정상주 한잔하는데 등산객 한분이 올라옵니다. 가벼운 배낭차림으로 빠른 걸음을 걸어서 왔다고 하더군요
고남산은 태조봉 또는 제왕봉으로 불렸다 합니다. 그 연유는 고려말 황산대첩 때 이성계가 이 산에서 제를 지내고 승리를 기원했다는 데서 유래 했다 합니다. 전망이 너무 좋은 걸로 봐서 여기서 지세를 살핀것 같더군요
이 당시 정도전이 여기에서 이 산의 기운으로 널리 권세를 펼치소서 했는데 지금도 이 산자락 마을이 권포리(權布理)라 불린다 합니다.
고남산 내리면 송신소가는 콘크리트 도로입니다. 리본이 두세개 걸린 첫 번째 모래함에서 내렸죠. 정상에서 만난 분이 앞장서서 아무 의심도 없이 갔는데, 이 분이 대간길이 아니라며 다시 백업합니다.
십여분 알바를 해서 다시 원위치로 와서 위에 있는 두 번째 모래함으로 가니 리번이 무성합니다.
아픈발을 절뚝거리며 매요리에 도착했습니다. 성관형님이 매요리 보건진료소에 가서 응급조치를 취하고 가자며 문을 두두렸으나 인기척이 없더군요
매요리 휴게소에서 라면을 끓여 점심을 해치웠죠
인터넷에서 본 매요리 휴게소 할머니는 정이 많다고 들었는데 얼마나 많은 대간꾼들이 지나면서 민폐를 끼쳤는지 물도 아껴쓰라며 야박하기만 하데요
시원한 지하수로 등목을 하고 발을 씻고 휴식을 취했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모두가 장비챙기고 와서 밥해먹고 상점 물건은 사지 않고 돈 안드는 물이나 소비하고 고스란히 비용만 할머니께 전가하니 그럴만도 하겠습디다. 미안해서 사과 하나를 건네고 막걸리도 두어병 사먹었지요.
아드님이 중령이신데 진급하셨냐고 여쭈니 예편할 계획이랍니다. 그 말씀이 얼마나 씁쓸하고 떨떠름 하던지 대한민국 어머니의 표정처럼 느껴집니다. 즐거우나 슬프나 언제나 자식만을 걱정하는 마음처럼 말입니다.
밥힘을 보충하니 어느정도 힘이 나고 아픈발도 누그러 집니다. 하지만 더위는 여전히 쨍쨍거려 너무 피곤하게 하더군요. 유치삼거리를 지나 계속 오르락 내리락 길을 걸으니 사치재입니다.
백두대간에서 처음 만나는 고속도로죠. 88고속도로입니다. 지리산 휴게소도 있구요. 너무 더워 낮잠을 한 숨 자기로 했습니다. 고속도로를 쌩쌩 달리는 찻소리를 자장가 삼아 한 시간여 잤는데 꿀맛입니다.
88고속도로 지하도로를 지나 산불로 나무가 타버린 오르막을 오릅니다. 그늘도 없고 가파라서 너무 덥습니다. 그런가 하면 갈대들이 팔뚝을 슥슥 지나니 기분마저 짜증입니다.
어쩔수 없이 단숨에 올라 버립니다. 이 복더위에 나는 왜 이 길을 가는지 한심스러운 생각도 들더군요. 발의 통증은 계속되고 더위는 갈수록 더합니다. 발의 아픈 곳이 신경을 자꾸 건드려 머리까지 지끈거리더군요
쉬엄쉬엄 가지만 끝은 나오지 않습니다. 시간은 자꾸 가구요. 가다보니 날씨가 잔뜩 찌푸리고 소나기를 한줄기 퍼부울 기셉니다. 아닌게 아니라 시원한 소낙비가 퍼붓습니다. 옷을 흠뻑 적실만큼 내립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를 외칩니다. 비를 맞으며 걷습니다. 풀기에 물이먹어 계속 옷은 젖은 상태지만 기분은 상쾌합니다. 서서히 어둠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몸도 지쳐가구요. 물도 떨어졌습니다. 물도 3병씩 준비했지만 더위에 못이겨 다 마셔버렸습니다. 비온뒤라 그렇게 목은 마르지 않습니다.
백제 신라 쟁탈지 아막산성에 도착하니 성벽의 일부가 남아있습니다. 마을들이 펼쳐져서 거의 다 온듯한 기분입니다. 백제 무왕이 신라소유인 이 성을 공격하지만 대패하고 말았지요.
성은 허물어지고 빈터인데, 대간 길은 성벽 가운데로 나있습니다. 여기서 쉬노라니 먼저 도착한 영선형은 계속 어디냐고 전화로 묻습니다.
천문대가 보이지만 어느새 해는 완전히 기울고 어둠입니다. 랜턴을 켭니다. 시멘트 길이 나옵니다. 복성이뒷재입니다. 오늘 민박지 쩔쭉식당에 전화하니 복성이 뒷재를 잘 모릅니다.
1/50000 지도를 꺼내놓고 간신히 설명하니 어찌어찌 이해합니다. 차가없어 마을주민의 차를 보내겠다 합니다. 조금있으니 트럭이 도착, 피곤한 몸뚱이를 철쭉식당으로 옮겨줍니다.
시원한 캔맥주로 갈증을 해소합니다. 삼겹살로 저녁을 배불리 먹고 얼음물 같은 지하수로 목욕하고 하루를 마감합니다.
발이 너무 부어서 내일 산행을 할 수 있을 지 걱정을 하며 눈을 붙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니 발이 장난이 아닙니다. 너무 부어올라 도저히 걸을 수 없을 지경입니다.
동행하신 분들께 너무 미안했습니다. 산행을 포기하고 말았죠. 아침을 해먹고 남원에 가서 광한루나 구경하고 귀경하기로 했죠. 버스를 타기위해 아랫마을로 내려서니 흥부마을입니다. 복성이재는 복을 이루었다는 데서 연유한 것 같습니다.
마을 어귀마다 흥부전의 내용들을 표기해 놨습니다. 이런저런 사연으로 흥부가 부자가 된 사연이나 놀부의 얘기들을 곳곳마다 써놓고 관광지화 했더군요
부자가 살았다는 장자골, 놀부가 화초장을 지고 가다 쉬었다는 화초장 바위거리, 사실은 흥부가 여기서 순금을 주워 부자가 됐을 거라는 생금모퉁이, 놀부가 화초장을 지고 가다가 이름을 잊어 버리고 오래 생각했다는 장구목, 흥부가 어렵게 살 때 허기져 쓰러졌다는 허기재 등 마을의 웬만한 지명은 흥부와 연관이 있습니다.
인월장날이라 시내버스는 만원입니다. 전부 나이드신 어르신들입니다. 나이드신 분들이 더 나이드신 어르신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우리들의 농촌은 언제면 웃음을 펼 날이 올런지요.
남원시내에 도착 광한루로 가서 아름다운 정원을 구경한 후 이른 시간에 서울로 출발했죠. 고속도로 차가 막히지 않아 3시간 반만에 서울에 왔죠.
김형
이번 산행은 너무 더웠습니다. 발의 통증이 너무 컸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산행을 해서 나로인해 또다른 누군가에게 피해만 입히지 않았나 하는 반성과 교훈을 얻었습니다.
다음에 또 뵙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