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나이에 요절한 가수 김현식의 유작으로서
지금까지도 폭발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그의 대표 곡이라 할 수 있다.
허스키한 보이스와 음악에 대한 강한 열정으로 신촌블루스 시절부터
큰 사랑을 받았던 그이기에 떠난 빈 자리가 크게 느껴질 때가 많다.
지금도 그의 곡인 "비처럼 음악처럼"이나 "골목 길",
"추억 만들기" 등은 널리 애창되고 사랑받고 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이 허언은 아닌 듯하다.
예전에 고등학교 다닐 적에, 주위에서 음악 듣기를 좋아하던 사람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뉘었던 것 같다.
한 부류는 송골매, 부활, 들국화쪽에 가까운 음악을 좋아하던 부류,
다른 부류는 신촌블루스나 김현식을 좋아하던 부류,
다른 부류는 이문세로 대표되던 발라드를 좋아하던 부류.
개인적으로는 솔로 여자가수들의 음악을 좋아했고 또 발라드를 좋아하던 쪽이라
신촌블루스나 부활, 들국화의 음악을 가까이 하고 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김현식 생전에는 거의 그의 음악을 듣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김현식 사후 발표된 유작 앨범에 수록된 이 곡은 참 좋아했고,
그래서인지 신촌블루스 시절의 그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르고
그의 생전의 곡들을 읊조리게 된 것 같다.
가수 고(故) 김현식의 아들 김완제(28)가 2010년 4월
아버지 노래 '내 사랑 내 곁에'로 가수 선언을 했다.
김현식이 남긴 ‘내 사랑 내 곁에’는
병원에 있다가 탈출했다가를 반복하면서 동료들의 근심 속에서 가녹음된 노래다.
그가 눈을 감자 어느새 동네 꼬마들까지 흥얼거릴 수 있는 1990년의 노래가 되었다.
노래가 수록된 6집은 순식간에 100만 장이 넘게 나갔고,
골든디스크는 ‘내 사랑 내 곁에’에 대상을 안겼다.
과연 세상이 함께 아파하고 탄식할 만한 노래였다.
‘내 사랑 내 곁에’는 가수의 사연과 완벽한 일치를 이루고 있었다.
더없이 서정적인 선율과 공허한 가사를, 그는 당장 죽어버릴 것처럼
누구보다도 절박하게 울부짖으며 실어 나른 보컬리스트였다.
노래를 만든 오태호도 부상했다. ‘내 사랑 내 곁에’는
당시 신촌블루스에서 기타를 연주하던 오태호가
본격적으로 스튜디오를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만든 노래로,
김현식은 나중에 작곡가 이력을 쌓게 되는
오태호의 싹을 처음으로 발견한 인물이다.
연습 삼아 자작곡을 홀로 연주하고 있는 오태호에게
다가간 김현식은 곡을 달라 요구하고 승낙을 얻는다.
그리고 작곡가의 손을 떠난 노래를 성치 않은 몸으로 녹음했는데,
가녹음 버전을 들어본 후 오태호는
편곡과 보컬 모두에 만족하지만 작은 오류를 발견하게 된다.
‘시간은 멀어 집으로 향해 가는데’ 대목이 원래는
‘시간은 멀어짐으로 향해 가는데’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원히 수정되지 못했다.
아무도 손을 댈 수 없는 노래를 남기고, 그는 갔다.
병원에서 탈출해 녹음한 곡들이 미완으로 남자
그의 지우들이 완성시킨 앨범으로 백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고
'내사랑 내곁에'를 전국민이 알 수 있는 가요로 남게했다.
완벽하게 마친 상태가 아니라서
떠난 자의 인생이 더 명확하게 보이는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내 사랑 내 곁에’를 들을 때면
눈 앞에서 휘청거리며 노래하는 김현식을 바라보는 것만 같다.
도입부의 처연한 바이올린 연주가 끝나면,
이윽고 지나간 생을 돌아보며 후회하는 절절한 목소리가 터져나온다.
많이 사랑받았지만 그 사랑을 영영 받아들이지 못한 삐딱한 남자,
언제나 열정과 열망이 가득했지만 그만큼 많은 좌절과 절망과
씨름하면서 살아온 불행한 사내의 회한이다.
자신을 돌보지 않으며 비틀거리던 그는 끝내 몸을 안길 곳을 찾지 못했다.
저 먼 곳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이제는 알지 않을까.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 노래를 사랑했다는 것을,
그리고 남기고 간 이 노래가 신화적인 유작으로 남았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