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계서원(南溪書院)
남하동종파종중 34세 김헌원
오늘 경남 밀양 청도면 소재 남계서원(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29호, 경상남도 밀양시 청도면 두곡리 356번지)에서 향사가 있어 아침 일찍 고향 남하동으로 갔다. 족친들과 함께 고속도로를 달려 처음 참석하는 일이라 설레는 마음으로 서원에 도착하니 일족들이 반갑게 맞이하였다. 그 유례는 아래와 같다.
남계서원은 1704년(숙종 30년)에 고을의 유림들이 고려 중기에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영헌공 김지대(英憲公 金之岱)의 충효쌍수(忠孝雙修)를 기리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이름을 충효사(忠孝祠)라 하였고 강당을 쌍수당(雙修堂)이라 하였는데 이는 김지대가 그 아버지를 대신하여 종군하면서 충과 효를 함께 닦을 수 있었다(忠孝可雙修)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고종(高宗) 8년(1871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때 헐려 폐허가 되었고 1907년(순종1년)에 낡은 강당을 철거하고 새로 지었다. 1954년에 다시 강당을 철거하고 지금의 쌍수당을 지었다. 1986년부터 서원복원을 추진하여 1989년에 묘우(廟宇)를 완공하고 1990년에 김지대의 6세손 오산군(鰲山君) 한귀(漢貴)와 8세손 호강공 점(胡剛公 漸)을 배향(配享)하였다. 건물은 묘우(廟宇) 신문(神門) 강당인 쌍수당(雙修堂), 동제(東齊)인 원청제(元淸齊)와 서재인 강의제(岡毅齊). 정문인 崇德門 大報門 典祀廳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처 유림들이 도포(道袍)와 유복(儒服)을 입고 갓(冠)과 유건(儒巾)을 쓰고 계시어 일행과 함께 방에 들어가서 수인사를 하였다.
거의 정오가 되어 대제(大祭)와 향사(享祀)가 시작, 낭랑한 목소리로 창홀(唱忽)과 독축(讀祝)이 이어졌다. 초헌관(初獻官), 아헌관(亞獻官), 종헌관(終獻官), 분헌관(分獻官)으로 구분되어 있으나 집례(執禮)자가 대축(大祝), 알자(謁者), 찬인(贊引), 봉향(奉香), 봉노(奉爐), 사준(司遵), 봉작(奉爵), 찬창(贊唱), 장찬(掌饌), 진설(陳設), 감척기(監滌器), 감세미(監洗米), 감증반(監蒸飯) 등의 순서로 행하였다.
유생(儒生)들의 기본자세가 참으로 어렵다고 생각했다. 약 1시간 반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이후 친족들과 음복을 하고 담소를 나누었다
남호서원(南湖書院)은 현종3년 45대 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를 지낸 호(號) 금포공(錦浦公)을 배향. 금포공은 휘(諱) 시성(是聲)으로 건립년도가 정조대왕 10년(1786년 丙午)에 하양현(河陽縣) 남하동(南河洞)에 남호사(南湖祠)를 세워 위패를 봉안하였고, 철종6년(1855년乙卯)에 남호서원으로 승격시켰다. 금포공 삼괴정실기(錦浦公 三槐亭實記)에 남호상량문(南湖上樑文)과 남호봉안문(南湖奉安文)의 기록을 보면 고향 하양읍 남하리에 남호서원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원군 때 서원 훼철(고종8년 신미1871년)로 인해 지금까지 복원을 못하고 있는 것이 조상님께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후손들에게 숙제로 남겨야 할까. 지금 금포당(錦浦堂) 제실(齊室)이 있는 자리이다.
경북 영주시 가흥리의 오산서원(梧山書院)은 병산공(缾山公)을 배향. 건립연도가 순조8년(무진 1808년)이나, 훼철은 고종8년(신미 1871년)에 되었다.
이렇듯 청도 김씨 문중에는 3곳의 서원이 있었다.
이제 나이 들어서 보니 쓸쓸한 생각이 든다. 재원(財援)이 허락한다면 중론(衆論)을 모아서 또는 고증을 통해서 복원해보고 싶은 심정이다.
‘제향소고(祭享小考)’는 도호(島湖) 신상우(申相佑)씨에 의한 소책자 기록인데, 후대에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남계서원에 모셔져 있는 3위는 시조공 영헌공과 6세손 한귀 원정공(元貞公)(1362년 공민왕 임인8월 위 동경도 병마사(爲 東京道 兵馬使), 8세손 호강공 점(漸) 호조판서 평안도 관찰사(세종).
시조인 영헌공(英憲公)의 시가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국환신지환(國患臣之患) 친우자소우(親憂子所憂)
대친여보국(代親如報國) 충효가쌍수(忠孝可雙修)
나라의 걱정은 신민(臣民)의 걱정이오
어버이의 근심은 아들이 근심할 바라.
어버이를 대신하여 나라에 갚을 것 같으면
충(忠)과 효(孝) 둘을 가히 닦으리라
불천위(不遷位)
우리 청도 김씨 가문에서 불천위로 모시는 선조가 두 분 계신다. 영주파에서 모시는 병산공 휘 난상(鸞祥 12세) 선조는 영주시 한절마을 종가에서 매년 음력 12월 24일(妃位 8월 5일) 子時에 제사를 모시고 있는데, 중종 때 문과에 급제, 을사사화로 남해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선조 때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대사성(大司成) 대사간에 올랐다.(1507년 중종2~1570년 선조3) 저서는 ‘병산유집’이 있으며 유적지는 경북 영주시 가흥동에 매양정(梅陽亭)과 묘소가 있다.
다른 한 선조는 남하종파에서 모시는 금포당 휘 시성(是聲24세)은 45대 삼도통제사를 지낸 분으로, 음9월 22일 오후10시에 경산시 하양읍 남하리 금포당(錦浦堂)에서 제사를 모셔오고 있다.
나라에 큰 공훈을 남기고 죽은 사람의 신주는 5대 봉사가 지난 뒤에도 묻지 않고 사당(祠堂)에 영구히 모시면서 제사를 지내는 신위를 불천위 또는 불천지위(不遷之位)라 한다. 국가에서 받는 국불천위(國不遷位)를 선조들은 가장 큰 영광으로 여겼다.
그밖에 근대 국가사회에 공헌한 인물들로는 고산자(古山子) 김정호 외 장․차관, 판사․검사, 장군, 교수, 연예인, 체육인 등 많이 있다.
김시성(金是聲)( 1602.4.20~1676.9.21)
호강공 김점의 장남인 김유손의 후손으로 24세. 자는 문헌(聞遠) 호는 금포(錦浦)이다. 손처눌(孫處訥)과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배웠다.
조선조 인조(仁祖) 14년(1636) 무과에 급제하여 주사랑이 되었다. 병자호란이 있은 후 청나라의 볼모가 되어 심양(瀋陽)에 가게 된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을 배림종하여 3년 동안 충의로 섬겼다. 후일 소현세자가 귀국하여 효종(孝宗)으로 즉위하자 1640년 황주판관(黃州判官)이 되었으며 1644년(인조 22) 용천부사(龍川府使)에 이어 이듬해는 강계부사(江界府使)가 되었다. 1648년 함경남도병사, 1649년 충무위 부호군, 1651년 경상좌도병사, 1652년 회령부사(會寧府使), 1655년 훈련원도정, 1656년 함경북도병사, 1657년 포도대장, 1662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3도의 수군(水軍)을 통솔하는 종2품의 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가 되었다. 그 후 금위좌별장, 춘천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의 관직에서 특이한 것은 주로 북방지역의 수령(守令)으로 재직하였다는 것이며 이것은 그가 무예(武藝)에 뛰어난 무신(武臣)으로 국토방위에 적합한 인물로 평가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그가 용천부사(龍川府使)로 재직 시 고을 주민을 해치는 호랑이 2마리를 활로 쏘아 단번에 잡았다는 일화에서도 잘 나타나있다.
저서로는 ‘금포실기(錦浦實紀)’가 있으며 유적지로 경북 경산시 하양읍 남하리에 금포당(錦浦堂)이 있다.
가선대부 삼도수군통제사 겸 경상도수군절도사 금포공시성숙종대왕 친필제문(嘉善大夫 三道水軍統制使 兼 慶尙道水軍節道使 錦浦公是聲 肅宗大王 親筆祭文)을 예조좌랑오도일공왕명(禮曹左郞吳道一公王命)으로 장지옥비하사불천위 봉행 대대손손봉위하명(葬地玉碑下事不遷位 奉行 大大孫孫鳳位下命)으로 영원하여라 .영원하여라.
돌아오는 길에 보니 작년 산사태로 시조공 묘소 밑 염수당(念修堂) 하당이 유실되어 보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대 종친회에서 복구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십시일반 협조하여 장마 전에 공사에 착수해야 할 것 같다.
2012. 3. 27.(음 3.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