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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 피하는 자의 평안
시편 11편 1- 7
1.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2. 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
3.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4.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5.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6. 악인에게 그물을 던지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그들의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7.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영국의 종교 개혁자 리들리는 메리여왕 1세의 즉위와 함께 화체론적 성찬을 부정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런던탑에 투옥되었다가 뒤에 옥스퍼드에서 레티미와 함께 화형(火刑)되었는데, 그 전날 밤의 일입니다. 그의 동생은 찾아와서 그 밤동안 위로하며 같이 지내자고 했습니다. 그때 리들리는 그것을 거절하면서 말했습니다.
"나는 오늘 밤 평안히 자고 내일 순교하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왜 그는 그렇게 평안하게 죽을 수 있을까요? 그것은 주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빌3:7-8) 예수 믿는 사람은 환난이나 죽음을 두렵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본시는 다윗이 마치 화살을 맞아 죽게된 연약한 한 마리 새와 같은 절대절명의 상황 속에도 인간적인 나약함으로 좌절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감으로 위기를 극복한 것을 노래한 지혜의 시입니다. 이 시의 배경은 시골 출신 목동, 다윗이 출세를 해서 사울왕의 사위가 되었고, 또 모든 민심이 다윗에게 쏠리기 시작했습니다.
(사울은 천천!, 다윗은 만만!)이라는 노래 소리에 사울왕은 동요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그는 하나님이 부리시는 악한 영에 의해서 다윗을 향한 시기와 질투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향해 단창을 두 번이나 던졌을 때인 그 때 다윗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다윗에게 고향으로 피신할 것을 말했습니다. 결국 다윗은 사무엘의 고향 라마로 피신했습니다.(시19:18)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다윗을 향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할 때 그는 이 시를 지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삼상18;7~11-삼상19;9~10)
요나단 뿐 아니라 다윗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 위기를 피하라고 했을 때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요, 나는 믿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의 뿔이요 나를 지키시는 산성입니다. 천만 인이 나를 둘러싸고 나를 위협해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편안히 잠을 잘 수가 있습니다.(시3;3~6)
다윗은 시편 11편을 통해서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믿음의 두 가지 표지를 보여줍니다.
첫째는 구원자 하나님
위기 때마다 사람을 의존하는 신앙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 말해줍니다. 그러면서 진정으로 자기를 구원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라는 것을 확고히 믿는 믿음을 가진 신앙입니다.
둘째는 감찰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에게 환난을 주신다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있을 것이라는 신앙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악인을 심판하시고 의인의 손을 들어준다는 신실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감찰하십니다.
1. 구원자 하나님.
어떤 집사가 세상을 떠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대는 항상 선했나?”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자기가 살아온 과정을 돌이켜보니 그렇지 않은 집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아닙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또 물으셨습니다. “그대는 항상 의로왔는가?” 역시 아니었습니다. “아닙니다” “그대는 항상 깨끗했는가?” 역시 그렇지도 않습니다. “아닙니다” 간신히 대답을 하고 어떤 벌이 내려질 것인가 숨을 죽이고 있는데 갑자기 환한 빛이 전신을 감싸는 것이었습니다. 놀라서 눈을 드니 예수 그리스도가 곁에 서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집사를 껴안고 보좌를 올려다보면서 “아버지, 이 사람은 항상 선하지도 못했고 의롭지도 못했고 깨끗하지도 못했으나 세상에서 이 사람은 항상 저의 편에 있었으니, 지금 이 곳에서는 제가 이 사람 편에 서겠습니다”하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잠언 8장에서는 지혜가 태초에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골 1:15). 예수님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신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그 창조주되신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의롭게 하셨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30)
하나님은 진정한 우리 신자들의 소망입니다. 사람이 어려움을 당할 때에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준 지적 이성적 기능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죽음과의 한판 승부라면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요,
단 한 순간의 판단이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올 수 있는 강력한 시험 앞에서 신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지혜는 그동안 자신이 경험되어지고 얻어진 지식을 바탕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기를 극복 할 수 있는 힘은 위기가 닥쳐오기 전의 나의 삶과 아주 연관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도하지 않는 신자들이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지 않고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신자들이 이단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가슴과 의지만 키운 신앙인들이 자주 시험당해서 신비와 기복으로 빠지고, 행위에 만족감을 느끼며 신앙생활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위험의 크기 정도가 크던지 작던지 매 순간 위기 가운데 보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 악착같이 범죄하고, 타락한 가운데서도 돈을 모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권력을 잡겠다는 것은 노후에 평안한 삶을 누려보겠다는 발상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운명이 하루살이만도 못하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 인생은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이기지못하고 죽어나가는 상황을 보아오면서도 자신에게만은 절대 그런 일이 없을 걸로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곤 타인의 죽음을 애석해 하지만 삼일만 지나면 그들은 여전히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신자들의 신념입니다
그러나 신자들의 삶은 달라야 합니다. 날마다 기도하며 파리 목숨 같은 자신에게 은총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벌레만도 못한 인간임을 자백하고 늘 사단과의 싸움에서 긴장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신자들의 삶입니다. 신자들이 긴장할 때 그 때가 가장 편안할 때입니다. 그때는 바로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에게 삶에 긴장이 없으면 곧바로 타락하게 됩니다. 우리는 에덴동산에서 이것을 경험했습니다. 또 아브라함과 사라부부의 잘못된 판단으로 이스마엘이 탄생되는 과정을 통해서도 보았고. 아주 긴장이 풀어진 소돔과 고모라성의 롯의 일가를 통해서 생생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편안하다" 하면서부터 우리 인생이 파멸의 조짐이 보인다고 말합니다. 어린 다윗이 출세를 해서 이제는 세상의 존경을 받는 군대 장관이 되었고 왕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정말 이제부터는 그는 권력과 인기를 누리며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그가 성령의 기름부음이 없이 그 자신이 홀로서기를 해서 그런 위치까지 올라갔다고 생각한다면 다윗의 인생은 뻔 한 것입니다. 타락할 수밖에 없는 다윗은 아슬아슬하게 사단의 유혹을 거절하고 자신에게 불어 닥친 이 거절할 수없는 절망적인 위기를 바로 직시했습니다. 이렇게 다윗에게 지금의 위기를 바라볼 수 있고 판단하게 하신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만일 다윗이 기도하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면, 이 위기는 자신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주변의 친구들의 조언을 듣고 그대로 행동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성령에게 감동된 그 때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는 언제나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기도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읽은 시편 11편을 그가 지었다는 것으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시편은 한마디로 기도 시입니다. 하나님께 붙들림 받은 자들이 기록한 위대한 신앙고백서입니다. 이러한 기도시가 저와 여러분의 삶을 주관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먼 훗날 우리 자손들이 우리가 고뇌하면서 기록한 삶에 흔적들을 통해서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본문 1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
공중에 높이 나는 새는 좀처럼 잡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새는 너무나 높이 날아 다니므로 새총을 쏠 수도 없고 그물을 쳐서 잡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영리하고 날쌘 새도 먹이를 찾아 내려오다가 포수의 손에 걸려서 죽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깊은 물 속의 물고기도 좀처럼 잡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물고기도 죽습니다. 향기로운 미끼를 찾아 올라오다가 낚시에 걸려 죽는 것입니다. 사람도 매한가지입니다. 명성이 높은 사람이 하루아침에 몰락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눈앞의 사사로운 이익에 매달려서, 아니면 아첨하는 사람에게 현혹되어, 아니면 의식주에 너무 급급해서, 아니면 자기의 잔재주에 너무 매달려서 모르는 사이에 망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만큼 약하고 어리석은 존재가 인간입니다.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한없이 초라한 자신을 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이 가련하게 떨고 있는 듯한 모습에 실망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돌아갈 수 있는 안식처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을 통해서만이 연약한 우리의 생이 더욱 강건하게 되고 영화롭게 되는 것입니다.
1절에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여기서 ‘새’는 아주 작은 새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네 산."은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발길 닿는 대로 가는 것을 말합니다. 목적지가 없이 떠돌아야 하는 이런 경우에 불안과 공포에 빠지는 것이 신자들의 기본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믿음은 그것을 조롱하고 굳은 신념으로 "나는 오직 하나님만 믿는다, 그러니까 내가 피할 곳은 오직 주님의 날개 아래이다."라고 선포 할 수 있는 것은 그와 하나님과의 평소의 관계에서 나온 소신의 발로입니다. 17살에 그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사무엘 선지자로 부터 극비리에 기름부음을 받았던 사건과 그가 수도 예루살렘 궁전으로 취직이 되었고, 급기야는 골리앗을 무너뜨리는 사건을 통해서 사울왕의 사위가 되는 과정 등의 모든 일들 앞에 그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다윗의 신앙을 너무 높이 평가한 것입니다. 이 때까지 다윗은 그 자신의 의지와 감정과 지식에 의해서 그 모든 일을 행동한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감동에 의해 그의 모든 것이 행동되어져 왔던 것입니다. 결코 그 자신의 노력이라든지, 그 자신의 총명함으로 다윗이 이스라엘의 중심인물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같은 신자들도 안심할 수 있고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날마다 성령의 감동으로 충만해진다면 이 세상을 다윗처럼 살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신자들이 꼭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진리의 기둥위에 우리의 터를 세우는 것입니다.
본문 2절을 읽겠습니다.
“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
여기서 활과 화살은 각각 악인의 음모와 공격 행위를 비유한 것입니다. 즉 본 절은 악인이 활을 당겨 곧바로 과녁을 명중시키기 위하여 겨냥하고 있듯이 위협하고 있다는 뜻으로 다윗이 처한 절대위기의 급박한 상황을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악인이 의인을 해치기 위해서 굉장한 노력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악인이 그들을 쏘려 한다고 했습니다. 밝은 데서가 아닙니다. 어두운 데서 쏘려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에게서 발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 절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한 사건(삼상19:9-17)이 있었으나 그 환난 앞에 의연한 다윗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벌벌 떨거나 우왕좌왕하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의연하게 대처하는 다윗을 본받읍시다. 다 같이 따라서 합시다.
"환난 앞에 두려워하지 말라. 떨지 말라. 하나님이 너를 지키신다."
“악인이 의인을 엿보아 살해할 기회를 찾으나 여호와는 그를 악인의 손에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재판 때에도 정죄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37: 32- 33)
본문 3절을 보겠습니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여기 "터"는 삶의 진정한 기준이 되어야 하는 진리와 정의 또는 규율과 기강이란 뜻입니다. 국가의 존재 및 번영을 유지해 갈 수 있는 국가의 기초적인 질서와 법률을 뜻하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 이런 기준들이 있습니까?
본 절은 다윗과 그 친구들의 탄식이라고 합니다. 법과 정의가 통하지 않으며 다만 권력을 쥔 자와 그에게 아부하는 자들만이 판을 치는 터가 무너진 혼란한 상황에서 과연 어떤 자세로 사는 것이 바른 성도의 삶인가를 묻게 됩니다. 극도로 두렵고 힘들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기본적 신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극도로 두렵고 힘들 때 가져야 할 기본적 신앙이 무엇입니까? 이런 기준들이 다윗을 다윗 되게 했고, 우리 신자들을 신자 되게 하는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삶에서의 체험이나 신비적으로 느껴지는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우리 신자들이 항상 깨어서 기도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입니다.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예레미야 29:7)
성도 여러분, 세상의 터는 무너집니다. 권력의 터도 무너집니다. 재물의 터도 무너집니다. 상업의 터도 무너집니다. 인간 사이의 신의의 터도 무너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위에 소망의 터를 닦은 사람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아니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 10)
2, 감찰 하시는 하나님.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신학생 3명이 영화를 보고 밤늦게 기숙사 담을 넘다가 학장에게 붙잡혔습니다. 학장은 엄격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학장은 신학생들을 운동장에 집합시켰습니다. 신학생들은 어두운 운동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벌벌 떨었습니다. 학장이 아주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인지 아느냐?” 신학생들이 대답했습니다.
“예, 우리 신학교 학장님입니다.” 다시 학장은 꾸중을 했습니다.
“너희들은 무단이탈, 월담, 늦은 귀교 등 세 가지 잘못을 했다. 그에 상응한 무거운 벌을 내릴 것이다.”
그때 신학생 중 하나가 묻습니다.
"그런데 학장님은 우리가 누구인지 아세요?” 학장은 대답했습니다.
“너희가 누군지 내가 어떻게 알겠느냐”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학생들은 “그럼 됐어요”라며 도망쳐 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시는 분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139: 1- 4)
하나님은 신자들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보시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환난의 때에 굳건한 믿음위에 우리들의 터를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터는 위기 가운데서 더 빛을 발합니다. 내안에 진리의 기둥 터가 존재한다면, 불같은 시련으로 나에게 다가오는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터가 온갖 세상 것들로 곽 들어차있다면 불같은 시험이 살짝 불어만 와도 그 안에 것들과 그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다 한순간에 타버리게 될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너무나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더 불쌍한 사람들은 교회 안에 들어와서 불신자들과 똑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진정으로 진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온통 성공하는 법, 건강하게 오래 사는 법, 인간관계를 잘하는 법, 온통 사람들이 쥐어짜낸 선악과의 법칙들로 그들의 터를 가득 채우려 합니다. 그리고 잘사는 나, 부자 되는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을 인정해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본문 4, 5 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사람의 눈동자는 엄청난 신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안과 의사들은 우리의 눈동자가 자동으로 조절된다고 말합니다. 가령 사람의 눈에 먼지나 모래와 같은 이물질이 들어오려고 하면 어느새 눈꺼풀이 감겨 눈동자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런 작용이 가능한 것은 눈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구조 때문입니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사람의 눈에는 자그마치 30만 개의 회로가 있고 1억만 개의 신경세포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작은 그 무엇이라도 눈에 들어오려고 하면 이것을 눈동자가 감지하고 눈꺼풀에게 지시하여 자동으로 감겨 보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열악한 환경과 위기 가운데서도 눈동자처럼 항상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하나님의 눈은 앉아서 천리를 본다는 신비의 눈보다도 더 뛰어납니다. 이 눈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일들을 보고 계십니다. 특별히 사람들의 행동만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 속 깊이 감추어진 숨은 동기까지도 다 헤아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악인에게 대하여는 엄정한 심판의 자료일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에게는 이처럼 위안이 되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어떻게 바라보고 계십니까? 4절의 "통촉하다"는 쪼개다,“ 라는 뜻으로 "쪼개듯이 날카롭게 꿰뚫어 보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감찰하다”는 금속을 시험해 보듯이 어떤 물건의 가장 깊숙한 본질까지 응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것을 아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속을 자기만 아는 줄 알고 일을 행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동자와 안목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하는 것이 신자들의 본분이라면 신자는 날마다 하나님이 지금 내 앞에서 나를 지켜보시고 계신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나의 겉모습은 진정한 내가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 들켜버릴 수밖에 없는 내안의 자아가 진정한 나의 모습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속을 들여다보고 계신 다면 우리들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와야 합니까? 내 생각까지도 나보다도 더 나를 잘 아시는 하나님께 우리의 행동은 무엇이겠습니까?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망대의 파수병이 적의 동태를 살피는 것과 같습니다. 적이 이상 징후나 공격태세가 보인다면 나팔을 불어 아군에게 알려서 대처하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악인의 동태를 감찰하시고 그 천사를 명하여 능히 대처하여 나를 지키십니다.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십니다. 하나님은 의인을 보살피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 성도들과 자기를 의지하는 자를 보살펴 주십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는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욥34:21)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잠15:3)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 (잠 20:27)
“의로우신 자는 악인의 집을 감찰하시고 악인을 환난에 던지시느니라”(잠21:12)
본문 6절을 보겠습니다.
“악인에게 그물을 던지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그들의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본 절에서의 악인은 바로 우리 자신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셔야 할 자는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그 진노의 잔을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사역을 통해서 대신 마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은혜요, 복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윗의 고백처럼 내 터를 견고히 하고. 항상 주님의 날개 아래로 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1)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주님 앞에 우리의 죄인 됨을 고백합시다. 사람들을 속일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내 자신도 속일 수 있는 사단은 언제나 우리 주변에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피할 곳은 어디입니까? 내가 주께로 피합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세상의 문제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내 앞에 놓여있는 문제들을 놓고 기도합시다.
(2)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합시다. 남북통일이 평화롭게 이루어져서 북한 땅에도 자유와 복음이 전달되게 하시고 지금 농촌에는 구제역과 조류독감의 재해가 심각합니다. 하루속히 그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3) 오늘 하나님은 정직한 자를 좋아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정직한 영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거짓은 죄악입니다. 남을 속이는 것, 불의한 것, 정직하지 못한 것들 이제 주님 앞에 내려놓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 기도할 때 내안의 어둠이 물러가는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시다. 그래서 정결한 신부로 주님 앞에 서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4) 교회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예배를 위해서, 수요. 토요. 주일예배에 기름부음이 넘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모든 자들이 살아나는 역사가 있도록, 성도들의 부흥을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갈급한 영으로 기다리는, 부흥을 사모하는 성도들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5) 가정과 건강과 학교와 사업장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자녀들을 위해서, 이웃들과의 관계를 위해서, 거래처를 위해서, 믿음이 연약한 가족들을 위해서, 믿지 않는 불신자를 가족으로 불러주셨으니 그들에게 믿음의 씨앗을 심어주시기를 기도합시다.
하나님은 악한 자를 응징하십니다.
본문 7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성공하는 삶을 좋아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의로운 삶을 좋아하신다고 말했습니다.
왜 돈 많이 벌려고 합니까. 왜 성공하려고 아등바등합니까? 왜 예뻐지려 합니까?
그것은 나의 의로운 삶을 통해서 이 땅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 위함이라고 우리들은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신자들의 의는 이제까지 왜곡되어 왔습니다. 선교하고, 구제하고, 잘사는 모습과 성공한 지위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선교와 구제와 그분이 하시려는 모든 일들에 우리들의 힘을 빌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시는 것은 선교와 구제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선교와 구제에서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나의 영광이 드러난다면 나는 그 현장에서 빠져야 합니다.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은 우리들의 마음을 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이것은 신자들이 의로운 삶을 사는 방식입니다.
우리들의 의로움과 행위들이 하나님께 전이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이 진정한 의입니다.
유명한 나폴레옹 힐이라는 사람은 현대인에게는 7가지 불안과 공포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① 가난에 대한 공포 ② 실패에 대한 공포 ③ 질병에 대한 불안 ④ 사랑의 상실에 대한 공포 ⑤ 노쇠에 대한 공포 ⑥ 자유상실에 대한 두려움 ⑦ 죽음에 대한 공포라고 지적하였습니다.
우리의 이러한 갖가지 불안과 긴장과 초조는 우리의 삶의 피난처가 되시며, 인도자가 되시는 참 목자 하나님을 발견하기 전에는 결코 해결되지 아니합니다. 주님만이 우리에게 마음의 평안함과 안정을 주십니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시4:8)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42:5)
성도 여러분! 우리 힘으로 감당키 어려운 일을 당하신 분이 계십니까? 주님을 더욱 의지하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건지시고 반석위에 세워 주실 것입니다.
* 기도: 우리에게 기쁨과 평강을 주신 하나님! 주님이 나를 돌보아 주시니 감사와 찬양을 드릴 뿐입니다. 세상 속에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평강이 충만케 하여 주옵소서. 우리 가정과 교회를 언제나 보호하여 주시고 예수님이 주신 평안함 속에서 늘 살게 하옵소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두렵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니이다. 우리나라와 민족이 하나님으로 인해 강건하게 하소서. 그리고 항상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고 살게 하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