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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움과 비움, 그리고 관조적 미학
― 김주현 시인의 시세계
문학평론가 리 헌 석
(사)대전예술단체총연합회 회장
1. 시인의 숲으로 들어서기
김주현 시인은 1963년 충청남도 부여에서 출생하고 성장하였다. 젊은 시절에 꿈꾸던 시인의 길을 닦으면서, 때로는 무직으로 푸대접을 받는 서러움을 맛보기도 하고, 때로는 시에 미친 사람처럼 술을 가까이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꿈꾸었던 소망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드디어 시인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1996년 첫 시집 『제기랄 편』을 발간하여 자신만의 서정을 독자들에게 선보였다. 이와 함께《열린문학》신인상을 수상하여 문단에 나서게 되었고, 또한 나라를 지키기 위한 직업을 갖게 되어 사명감이 충만한 작품도 창작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한국문인협회 부여지부 회원, 사비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해양경찰로 근무하고 있다.
그는 보람과 아픔이 공존했던 10여 년의 세월이 지나서야 독자와의 대면을 다시금 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가슴 저리도록 숨 쉬었던 작품들을 모아 두 번째 시집 『시간의 입』을 발간한다. 이는 문학 창작에 쏟은 시간과 혼신을 다하여 빚어낸 작품들을 언어로 보여준다는 의미를 지닌다.
꿈도
사랑도
먹지 않는
시간의 입에는
철없는 날
철없이 보내고
어설픈 날
어설피 보내라는 말이 있다
많은 예습과
많은 복습은
살아 있는 자의
몫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이웃집 아가의 탄생과
새색시의 건울음처럼
한때 겪었던 일들이
오늘도 이어지고 있다는 말이 있다
꿈도
사랑도
먹지 않는
시간의 입에는.
―「시간의 입」 전문
사람은 꿈과 사랑 속에서 살아간다. 사람들은 육체의 건강을 위하여 밥을 먹고 술을 먹고 차를 마시는 것과 같이, 내면의 양식으로 자신에 대한 관심, 그리고 서로 나누는 사랑, 고난 속에서도 피어나는 희망으로 살아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철없는 시절을 보내고, 어설픈 몸짓으로 세상을 살아내는 것이 일반적 양상이다.
그러나 시간은 이러한 것들을 모두 포괄하는 특성을 지닌다. 어느 것도 시간 속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연속적으로 진행되는 시간 안에서 삶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은 개인과 사회의 역사를 만든다. 시간은 <이웃집 아가의 탄생과/ 새색시의 건울음>까지 품어 안으며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다. 이것이 시간의 속성이다.
김주현 시인의 작품을 기행하며 이와 같은 성향을 발견하고, 그만의 독자적인 서정 세계를 간략하게 정리하고자 한다. 사람의 내면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성을 지니는 것이지만, 독자 나름의 기준에 의하여 몇몇 흐름으로 분석하고 정리하기로 한다.
2. 직분의 미학
그는 해양경찰이다. 우리 국토를 둘러싸고 있는 3면의 바다를 지켜서, 나라를 반석 위에 세우는 것이 그에게 맡겨진 임무이다. 그의 하루 일과는 바다에서 시작하여 바다에서 마감하기 때문에 바다에 대한 생각이 남다르다. 바다와 일체감을 보이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간격을 실감하면서 친교의 대상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그는 「창문 앞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저 푸른 하늘과/ 저 푸른 바다와/ 저 푸른 산을 바라보는 창문 앞에서/ 나와 커튼은 앞치마처럼 붙어 있지만/ 저 푸른 하늘과/ 저 푸른 바다와/ 저 푸른 산을/ 바라볼 수 있는 거리만큼/ 떨어져 있다>고 말한다. 즉 창문이라는 매체를 통하여 하늘과 바다와 산을 대상으로 인식하기도 하고 서정의 실체로 만나기도 한다.
새벽 2시는
아득히 잠 깨우는
요강 귀신이 왔다 가고
그러다 문득 신령스런 외침이 있어
귓밥을 만져보면
설날 하루 전의 부엌 아궁이처럼
끊이지 않고 타들어 오는 바닷물이 잡히고
잡혀 버린 바닷물을 놓아 달라고
해변은 끓는다
쩔쩔쩔 끓는다.
―「원산도에서」 전문
시인은 원산도에서 마음의 열병을 앓았던 때가 있는 듯하다. 부엌 아궁이처럼 타들어 오는 신열로 인해, 그는 현실을 벗어나고자하는 신령스런 울림에 휩쓸렸나 보다. 이와 같은 울림의 실체는 정작 ‘바닷물의 아픔’이 아니고, 시인 ‘자신의 아픔’에 다름 아니다.
이와 같이 시인은 바다와 서정적 동일체를 이루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입증하기도 한다. 「바다 건너기」에서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진 돌부리에 발바닥이 베이고/ 노을 같은 피를 흘려도/ 그리운 눈물로 수평선을 만져보던 사람은/ 바다를 사랑하기에 바다에 또 왔다고 말해도 좋으리라>고 말한다. 사랑하는 마음과 피를 흘리는 아픔을 두루 갖춘 대상으로 바다를 인식한다. 그리하여 시인은 바다가 내는 <반기는 소리>에 <미움>마저 씻을 줄 아는 경지에 이른다.
그러나 그 아픔 또한 바다를 통하여 극복할 대상이기도 하다. 밀물과 썰물의 자연 현상을 관찰하던 그는 「원산도에서」 <떠나는 너는/ 빠져 나가는 너는/ 어쩌다 갯벌을 남기고 가니/ 거품 같은 파도가 좋다면서/ 이 모든 갯벌의 발자국 지우고/ 성급히 가고 있니>라고 묻는다. 썰물이 갯벌의 발자국을 지우듯이 자신 역시 지워버리고 싶은 과거가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저에게 단속되었던 사람이여
용서해 주십시오
저에게 적발되어 울었을 사람이여
용서해 주십시오
살기 위해 거칠어진 손 내밀던 당신 보며
저는 죄짓는 마음으로 검거했습니다
우리 둘만 아는 사실이라면 덮어두고자 했습니다
제 마음 편치 않습니다
삼가 머리 숙여 절합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사람에게」 전문
바다를 지키는 해양 경찰은 수많은 배들을 지도하고 단속하는 것이 중요한 의무라 하겠다. 이에 따라 법을 어긴 배들을 단속하게 되고, 그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사정을 들어보면 정말 딱한 감정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을 억제하고 본연의 의무를 다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는 단속의 대상을 향하여 미안한 마음으로 용서를 구한다. 법질서에 의하면 용서받을 일이 아닐 수도 있으나, 내면의 순수를 지향하는 시인의 입장에서는 미안한 일이기 때문이다.
배를 타고 다니면서 나라를 지키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에게 배는 무생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과 동일한 인격체로 인식된다. 타고 다니던 배를 수리공에게 맡긴 그는 <영해를 말없이 지켜온 거룩한 배입니다/ 파묻히는 파도 속에서/ 저는 낙망했지만/ 그 사람만큼은 절대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이 사랑한 배>를 강조한다. 그리하여 「수리공에게 2」에서는 <당신마저/ 우리들의 배를 기계로 보아준다면/ 우리들은 누구>냐고 뼈아픈 자문(自問)으로 괴로워한다.
좀 더 발전하면, 「묶인 배」에서 안타까운 정서의 소용돌이를 펼친다. <도크에 올려진 한 척의 배를 보셨습니까?/ 몸으로 뱃길을 만들고 몸으로 뱃길을 지우던 항적은/ 허공중에 매어 있>다고 탄식한다. 동시에 배의 속성이나 사람의 속성이 같은 것임을 밝힌다. <배와 사람은 움직임이 목적입니다/ 기왕이면 착했으면 합니다>라고 설파하여 인간적 내면을 고백한다.
3. 사랑의 미학
서정의 근원은 자신도 모르게 용솟음치는 향수(鄕愁)라 하겠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 추억 속의 인물에 대한 그리움, 막연한 그리움 등이 언어로 직조되어 문학 작품으로 태어난다. 김주연 시인 역시 고향에 대한 인식과 가족에 대한 사랑이 작품 속에 자신만의 언어로 투영되어 있다. 아련한 그리움과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이 작품 속에서 아름다운 노래를 짓는다.
그는 고향인 충남 부여와 관련한 작품을 창작하거나, 해양 경찰로 근무하고 있는 서해안의 여러 곳을 작품의 소재로 삼는다. 충남 부여군 구룡면 논티리에 있는 고개를 소재로 한 작품 역시 그러한 범주에 속한다. 「논티고개를 넘으면서 1」에서 <논티고개를 넘으면서/ 논티고개에게 말을 걸었더니/ 논티고개는 이렇게 대답하여 주었다// 부모님 살아 계신 곳이 고향이라고/ 그대 또한 고향이 되어 가는 것이라고/ 고향은 그런 곳>이라고 노래한다.
이러한 귀향(歸鄕) 의식은 현실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가을의 말」에서 그는 <이제는 가야겠네/ 있는 그대로의 몸으로 떠돌다가/ 반겨주는 빈 집으로 들어가야겠>다고 시작하면서, <해 넘어가면/ 어둠에 잠기는 마을에서/ 나는 살고 있>다고 맺는다. 즉 살고 싶은 곳으로서의 이상향이 바로 현재 살고 있는 곳이라는 자각이 노래를 만든다.
내일을 알 수 없어
바보가 된 사내
그가 살고 있는 오늘은
장마 아흐레
눅눅스런 지겨움은
군불 지핀 아랫목에 자는데
와이퍼처럼 느긋이 저 비 쓸고
텅 빈 길 따라가 볼까?
주소 없는 사내는
비 어둠에 쌓이는데…
―「어떤 사내」
그는 <내일을 알 수 없어/ 바보가 된 사내>로 자신을 인식한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은 장마가 아흐레나 지속되어 눅눅한 세상으로 비유되어 있다. 즉 시에서 서정적 자아는 <주소 없는 사내>로 인식되어 <텅 빈 길>이나 따라가야 할 고달프고 안타까운 상황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상실의식(喪失意識)은 꽃이나 나무에서도 반영된다. 「喪失, 따뜻하리라」에서 그는 <그 잎새/ 그 꽃잎/ 잃을 만큼 잃고서는/ 조금씩 키가 큰/ 목련나무도 있>었다고 실토한다. <허구한 날은 사라지더니/ 허구한 날은 돌아왔>다면서 상실의 윤회를 그려내어 절절함을 더한다. 봄꽃을 볼 때와 가을 하늘을 보면서도 유사한 서정에 잠긴다. 「가을하늘」을 보면서 시인은 <햇살을/ 찔끔찔끔 떠먹고 있는 물새가/ 햇살을/ 야곰야곰 파먹고 있는 대추벌레가/ 가을>을 본다. 이러한 관찰을 통하여 그의 허무의식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연계되기도 한다.
취한 눈으로 무덤을 보고
나는 엎드리네
꿈꾸고 있을 낙원
가시고 있을 천당
모두 다 이루시라고
나는 엎드리네
잔디에 엉킨 이슬은
이마를 짚어 보네
차디찬 손길
따습기만 하네.
―「저녁 무덤」 전문
시인은 사랑하는 대상, 아버지나 어머니의 묘를 찾아 엎드려 운다. 차가운 이슬도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는 자신에게 쏟아 부은 사랑의 정감으로 보인다. 취한 눈으로 저녁에 찾은 사랑하는 사람의 묘는 시인에게 감내하기 힘든 서정의 홍수를 생성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 서정적 절정을 극복하고 애이불비(哀而不悲)의 시심으로 작품을 빚는다.
작고하였기 때문에 만날 수 없는 부모님을 그는 꿈에서 상봉한다. 「꿈결」에서나마 만날 수 있는 부모님이어서 그는 잠시라도 행복할 수가 있다. <벌초하며/ 성묘하며/ 아버지 어머니 만나 보지만/ 아버지 어머니/ 하늘에서 내려오실 집은/ 꿈결/ 내 작은 꿈결>임을 노래한다.
부모라는 면에서는, 선친(先親)과 선자(先慈)에 대한 사랑이 동질적인 것이겠지만, 김주현 시인에게 있어서는, 선자(先慈)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절실하게 드러난다. 「하행」에서 그는 <이런/ 어머니와 나의 열 달은/ 얼마나 뜨거웠던 사이란 말인가>라면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특화한다. 또한 「기일」에서도 <섬 너머 노을은/ 돌아가신 어머님 그립게 한다>고 실토한다. 그는 섬 너머에 있는 노을을 보면서도 어머니를 회상할 정도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절절하다.
이러한 사랑은 바로 아내와 아들로 전이되어 나타난다. 시인에게 있어서 아내와 아들은 자신이 보살펴야 할 사랑의 대상으로 동질성을 띤다. 「아들의 백일 1」에서 그는 <손바닥이 훈훈했어/ 네 똥 싸는 소리를/ 손으로 들었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참 좋은 노래를 들려 주>어서 자신이 너무 고마웠다고 실토한다. 즉 자녀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아니면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을 오히려 고맙게 말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의 힘이며, 또한 김주현 시인이 갖고 있는 본질적 내면일 터이다.
4. 비움의 미학
사랑으로 채워진 세상을 꿈꾸며 생활하고 있는 시인이지만, 그의 문학적 기질은 원심력으로 작용한다. 그리하여 현실에서 피안의 세상을 꿈꾸게 되는데, 그의 지향은 바로 욕심을 비우는 삶이다. 세상의 욕망을 비우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고, 이러한 사실을 자연스럽게 깨닫는 것을 점오점수(漸悟漸修)라고 한다. 또한 한 순간에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을 돈오돈수(頓悟頓修)라고 한다.
김주현 시인의 깨달음은 양자의 중간쯤으로 보이지만, 후자에 더 가까워 보인다. 「밤나무」에서는 <그 분께서 심어놓은 밤나무/ 품안 가득 밤송이를 걸어놓고/ 밤알 하나 가질 수 없는 밤나무/ 재물도/ 저와 같다는 가을 낮의 잎새>를 보며 무욕(無慾)의 시심을 깨닫기 때문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묵언(黙言)으로 일관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말을 함으로써 오히려 가벼워지기도 한다.
그리하여 「혼신은 익었으니」에서 오랜 기간 참았던 금기(禁忌)를 깨고 <이제 말을 하려 한다/ 입 안 가득 토실한 가을빛을 물고/ 처음이자 마지막인/ 말을 하려 한다// 말을 하고 있다/ 후두둑/ 끝나버린 말// 말을 놓은/ 밤송이는/ 오직 평안할 따름이>라고 말한다. 이는 돈오돈수(頓悟頓修)의 경지와 맞닿아 있는 것 같다. 이런 과정을 거쳐 자정(自淨)의 불심을 일깨우기도 한다.
더 맛있게 하지 마십시오
그 정성 살가운 마음으로
밥 한 끼 주시면 됩니다
아껴온 참기름
아껴 오신 대로 한 방울 넣고
아껴온 고추장
아껴온 방식대로 한 숟갈 넣고
비름나물 묻혀 주시면 됩니다
어려워하지 마십시오
깊은 광속 백미 한 바가지
늦은 찬거리
스님은 바로 어머님이십니다
여름 낮 여름 밤의 고추밭처럼 참으시는
스님은 바로 어머님이십니다.
―「반가사유」 전문
세속에서 우대받는 거대한 사업보다, 이 작품에는 음식공양을 통하여 해탈의 경지에 이르려는 시심이 담겨 있다. 진수성찬보다도 <그 정성 살가운 마음>이 더 소중하다는 깨달음이 작품의 중심을 이룬다. 그 정성과 살가운 마음을 마주하면서 바로 어머니의 자애로움을 회상하게 되는데, 이것이 삶의 중요한 가치로 기능한다.
이와 같은 깨달음은 전나무 숲에 가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전나무 숲」은 <전나무가/ 모여 사는 터>라는 인식을 통하여 <나무도/ 숲도/ 하나인 몸>이라는 자각에 이른다. 그리하여 <누가 먼지이지 않고/ 누가 나중이지 않은/ 나무와 나무>의 평등사상을 확인하기에 이르고, 이 나무들이 <속세의 인연 벗고 들어와/ 이속의 꿈을 닦고 나서는/ 내소사 전나무 숲>이 되었음을 노래한다. 이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 발전할 수도 있는데, 이런 인식이 바로 김주현 시인을 시인답게 만드는 요소라 하겠다.
아무 것도 없는 빈 몸입니다
차곡차곡 담겨질 것을 생각하면
마냥 즐거운 빈 몸입니다
빈 몸입니다
알 수 없는 즐거움은 꺼지지 않아
날마다 배부른 빈 몸입니다.
―「항아리」 전문
그는 채워져 있는 항아리보다 앞으로 채워지기 위해 비워진 항아리를 선호한다. 결국은 채워져도 다시 비워지겠지만, 그래도 채워질 때를 기다리는 마음은 늘 넉넉하기 마련이다. 즉 비워져 있어도 <날마다 배부른> 몸이라는 자각으로 시인의 마음은 넉넉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노래」를 통하여 비움의 미학을 추구한다. <아 간직은 왜 하나!/ 몸결에 몸을 떨고/ 몸결에 몸을 풀어야지/ 어디다 쓰려고/ 틀어쥐고만 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세상에서 많은 것을 틀어쥐고 고심하는 사람들에게 비움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그의 소신이고 지향이다.
5. 시인의 숲에서 나오기
김주현 시인의 작품을 간략하게 분석하고 정리하였다. 그는 해양 경찰의 직분에 의하여 바다를 서정적 터전으로 인식하면서, 배에 대한 남다른 사랑을 작품으로 빚고 있다. 또한 그는 향수를 기저로 하는 서정의 미묘함을 작품으로 창작하고 있다. 그리고 세상의 욕심을 버리고자 하며, 채움보다 비움을 지향하는 시심을 지니고 있다.
그런 연유로 그는 「바람소리」를 들으면서도 ‘향기’를 찾아낼 수 있는 혜안(慧眼)을 지니고 있다. <바람은/ 눈도 없이/ 귀도 없이/ 꽃을 지나쳐 와/ 지나쳐 가면서도/ 바람은/ 향기의 몸이 된다>고 노래하여 아름답고 황홀한 경지에 이른다. 이는 바로 시인이 스스로 향기를 발산하는 꽃이고자 하며, 동시에 향기를 나르는 바람이고자 한다. 또한 스스로 <향기의 몸>이 되고자 함인데, 시를 통하여 예술의 향기를 생성하고자 함이다.
내가 저 꽃으로 태어나
저렇듯 하얗게 피어난다면
나는 아무한테나 꺾이기를 원한다
나는 아무한테나 보이기를 원한다
백성의 나라에서
백성의 문지기를 꿈꾸었는데
흰 옷 같은 무서리를 담뿍 먹은 오늘
자갈 무덤 두엄자리에 피어났는데
나는 아무한테나 밟혀, 적멸(寂滅)의 향내를
그의 발끝에 엎지르기를 원한다
나의 첫 번째 소원은
나의 두 번째 소원은
나의 세 번째 소원은
아무도 오지 않는 빈집에 무성한데
저 들녘 어느 곳 마다않는 생명처럼
나는 아무한테나 조용한 꽃이 되길 원한다.
―「백범과 들국화」 전문
백범 김구 선생께서 말씀하신 바 <나는 독립된 내 나라의 문지기가 되고 싶다>던 그 경구(警句)를 들국화에 의탁하여 빚어낸 이 작품은 그만큼 절절한 내면의 발현(發顯)이다. 우리나라의 해양을 지키는 직분에 비추어 볼 때 상찬할 만한 발상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조용한 꽃>이 되길 원하는 시심은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이러한 의지와 지향은 「대나무」에서도 그대로 투영되어 나타난다. <역경과 소망을 같이 푸르게 하는 마디/ 너는 떨어뜨리는 벼랑이 아니다/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우러름의 벼랑>이라는 구절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동시에 그는 언어로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시인으로서의 책무를 잊지 않는다. 「어조사」에서 그는 우리말을 아름답게 가꾸어야 할 시인의 자세를 분명하게 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결사반대가 아니었다/ 적정 체온을 지닌/ 그리하여 꽃처럼 뜨거워지다/ 바람처럼 차가워지는 토씨/ 혹은 열정>이라며, 시어의 조탁(彫琢)에 남다른 열정을 보인다.
이와 같은 열정으로 문학적 진실을 추구하고 있는 김주현 시인의 작품은 건강하고 충실하다. 앞으로도 이와 같이 정갈한 언어로 아름다운 시심을 빚어내리라는 믿음으로 촌평(寸評)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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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회장님의 평설은 감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