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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원미발표 소설
28. 주역 택풍대과 강의에서
그래서 제가 아는 분도 부산서 전화가 왔어. 선생님 부산에 통원서당이 없습니까? 그런데 하루에 손님이 줄을 서가지고 매기고 있는데 운은 좋아 하고 있는 소리가 눈칫밥으로 지금 먹고 살고 있고 좀 배우기는 했지만 진짜 근본을 모르는 소리를 어떨 때는 했는데도 그 얘기가 맞다 이거요. 자기도 참 신기할 정도로 잘하고 있어. 선생님 이러다가 큰일이 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미 현실적 의미는 다 채워 논 사람이요. 손님은 와있고 물건만 잘 만들면 될 판인데 서울 가서 공부 좀 하겠습니다. 아 왜 여기까지 뭐 하러 오십니까? 거기 제가 가르치는 곳을 가르쳐 드릴 테니까 거기 가십시오. 아닙니다. 저는 만약에 거기서 배웠다가는 부산에서 쫓겨납니다. 그래가지고 서울로 올라와서 하숙집 하나 얻어놓고 일 년을 공부하다가 둔세무민하다 간 사람이 있어. 그게 그거요 어려워요.
그래가지고 그 양반이 일 년 여기 왔다가 여기와도 안경 쓰고 (아는 사람 만날까 봐) 일 년 있다 가니까 저쪽에서 아니 도사님 산에 가서 도 닦고 오셨냐? 종적조차 없다가 요즈음은 칠팔년 전에 제주도로 가 가지고 작년까지 귤을 두 박스 씩 보내고
(처음 하는 말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하는 말로 야구 모자와 선 그라스를 쓰고 다녔다는 버전도 있습니다)
주역 중천건에서
그래서 인부지불온이라도 불역군자다. 내가 많은 것을 알아도 남이 알지 못하더라도 내 스스로 기뻐하고 만족하는 것이 군자가 아닌 가. 그것이요. 쓰면 써도 좋고 그 대신 쓰되 과하진 마라. 익서 무서운 거요. 과하면 후회밖에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자기의 본분 자기의 그릇을 정확히 알아야지.
지천태에서
논어 첫 문구에 인불지이불온이라도 불역군자호 인부지 사람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내 스스로 만족된 내면을 갖고 있는 자가 진짜 군자다. 거기에서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 군자다.
중택태에서
논어 첫 구절이 인부지 불온이라도 불역군자라 진정한 기쁨 그것이 뭐냐? 그것을 보여준 것이 태괘 육십사괘에서 안정, 기쁨을 보여주는 것이 태괘다.
주역 강의에서 “ 체득이라는 것은 머리만 하는 것이 아니요. 지식과 육신의 합치현상을 말합니다. 처음에는 무슨 공부를 해도 머리로만 해. 머리로만 해. 이게 지자의 간교함이요. 언행 불일치현상이 일어납니다. 말로만 하면서 몸은 행동은 안 해버려. 이것이 팍 젖어야 체가 되지.”
노자 도덕경 강의에서
“ 6장 논어를 읽어도 삶을 살아본 사람이 읽은 것하고 젊은 사람이 읽은 것하고 명리를 배우고 읽은 것하고 또 도가를 보고 읽은 것 하고 천지 차이다. ”
38장 “ 논어를 열 번 읽어도 공자를 몰라요. 제가 그것을 느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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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를 열 번 읽어도 공자를 모른답니다. 강목년이 논어를 읽지 않았으면서 읽은 체 하느라 인부지 불온이란 구절을 외어서 활용을 한 겁니다. 솔직히 강목년의 한문 실력으로는 논어를 읽을 수 있는 실력이 안 됩니다. 읽을 수 없으니 당연 해석을 할 수 없지요.
논어 서설 즉 논어집주의 머리말에 해당하는 글입니다. 마지막 부분에 정자의 말이 있습니다. (전호근 선생의 강의입니다)
“ 여독론어如讀論語에 미독시未讀時도 시차등인是此等人이며 독료후讀了後에도 우지시차등인又只是此等人이면 편시불증독便是不曾讀이니라
이를 테면 독논어讀論語에 논어를 읽을 때에 미독시未讀時 아직 논어를 읽지 않았을 때 시차등인是此等人 이와 같은 등급의 사람이고 독료후讀了後에도 읽기를 끝마친 뒤에도 또 단지 시차등인是此等人 이정도의 사람이라면 변시便是 바로 부증독不曾讀 일찍이 읽지 않은 것이다.
논어를 읽기 전이나 읽은 뒤에도 똑 같다. 논어를 읽었는데도 논어의 내용이 자신의 삶속에서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그러면 논어를 읽지 않는 거나 다를 바 없다. 이런 의미입니다. “
논어를 읽기 전과 논어를 읽고 나서 똑 같으면 논어를 읽지 않는 것과 같다고 정이천이 말을 했습니다. 논어를 읽었으면 정자의 말을 인용해야 하는데 논어를 읽지 않고서 읽은 체 하다 보니 논어를 열 번 읽어도 공자를 모른답니다. 물론 이천 오백여년전에 산 공자를 안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논어에 담김 공자의 가르침이라고 해야겠지요. 지가 안 읽어서 모른 것이고 그래서 훌륭한 선생의 강의를 듣는 거요. 사서를 줄줄 외우는 분의 강의를 듣는 겁니다. 강목년처럼 모르면서 아는 체 하는 사람이 아닌 공부를 한 사람.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래서 학위가 필요한 겁니다.
논어를 알면 남을 의식하는 이런 허접한 소설을 쓰지 않는 다는 말입니다.
공자가 강목년처럼 입만 살아서 떠드는 친구들을 염려해서 인부지 불온뿐 아니라 비슷한 말로 논어에 수차례 합니다. 강목년의 말처럼 체득을 한 수준이면 남들을 의식하지 않아야지요. 憲問32章 불환인지부기지不患人之不己知요 환기불능야患其不能也니라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근심 걱정하지 말고 내 능력이 없는 것을 걱정을 해라고 했으니 열심히 공부를 해야지요. 그런데 공부보다는 이런 허접한 말로 공부를 한 것처럼 여기게 속이고 있는 겁니다.
본론으로 가면 조금만 더 다듬으면 완성도가 높은 소설이 되는데 팔릴지는 모르겠습니다. 소설이 아니라면 거짓말 사기강의로 실력이 있다고 자랑할 수 없어 고단수로 돌려서 하는 겁니다. 학문에 뜻이 없는 친구들이 잔머리 쓰는 것과 똑같습니까?
통원서당에서 공부를 하는 것이 대학이나 대학원처럼 시험을 보고 들어가는 곳입니까? 그냥 돈 내고 강의 들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10여년 전인데 통원서당이 너무도 유명해서 부산에서 서울로 강목년 강의 빈 시간이나 휴식시간을 계산을 해서 전화를 했다는 건데 정상적인 사람으로는 안 보입니다. 왜 이렇게 통원강의에 인용된 사람들은 정상적인 사람들이 아니고 정신병원에서 치료불가 판정을 받고 귀향조치를 받은 분들만 등장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십여년이 지난 지금 부산에서 사주에 종사하는 분들은 통원 강목년의 이름이 너무 유명해서 알고 있을까요? 요새 핸드폰이 있으니 바로 확인을 해 보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전화를 해보았더니 아는 사람이 있기는 한 건지.
소설이 좀 심한 것은 아는 사람 마주칠까봐 안경(선 그라스에 야구 모자를 쓰고 다녔다는 버전도 잇습니다)을 쓰고 배웠고 부산에 있다 제주도로 갔다는 것. 이렇게 자신의 실력이 흘러 넘쳐서 전국에서 배우기 위해 온다고 강조를 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럼 이것이 처음인가?
청맥 발행의 ‘역술의 명인을 찾아서’ 51쪽을 보면 김성철이란 분이 93년 신설동 통원서당에서 사주를 배웠다는 글이 있다고 했더니 그 말을 끝나게도 전에 강목년이 지가 사주를 잘 가르쳤다고 장황하게 썰을 풀어 가는데 웃기는 짬뽕이구나 하면서 그 분은 지금 사주를 하지 않고 하락이수로 방향을 돌았다고 했더니 그래도 사주를 강의를 잘 했다는 겁니다. 사주를 잘 배웠으면 왜 하락이수로 방향을 돌았냐고 그리고 93년에 사주를 잘 가르쳤으면 2009년에는 날아 다녀야지요. 앞으로 민족정통학술원이 어떻게 될 것이라고 도표를 그려서 설명을 해야 하는 거요.
내가 잘 가르쳤다고 자랑을 까는 사람은 똘 아이인데 학문에 뜻이 없는 사람이다 보니 똘 아이 발언을 하는 겁니다. 저 시골에서 가르치는 선생도 내가 잘 가르친다고 하지 않고 아직 배움이 부족합니다. 그것이 공부를 하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실력이 없다보니 대 놓고 지 자랑을 하는 사람입니다.
만약 사실이라면 성 정도는 밝혀야지요. 프라이버시 때문에 안 밝히고 못 밝힌 척 하는데 실은 소설이어서 못 밝힌 겁니다. 제주가 핵심으로 계속 부산에서 한다면 누구고 어디서 하느냐고 물을 수 있으니 제주로 갔다고 한 것이고 진짜처럼 느끼게 하려고 귤을 두 박스씩 보냈다는데 여기서 실수를 한 거요. 귤을 먹었으면 한 박스에 몇 개 들어있고 지난 해 보냈던 귤의 맛과 크기를 비교하고 두 박스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학원에서 회원들과 함께 먹었는지 또는 집에 가져갔는지에 대한 말을 해야 진정성이 있는 겁니다. 소설의 짜임세가 많이 부족합니다.
마지막으로 결정적인 실수는 인사. 예가 없는 겁니다. 이 경우만 예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만 귤을 두 박스를 받았으면 값이 싸고 비싸고 맛이 있고 없고를 떠나 보통은 전화를 해서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라는 인사를 합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고맙다는 인사를 해본 적이 없어서 감사 인사를 했다는 말 자체를 생각 못한 겁니다. 한마디로 싹아지 없는 놈입니다. 무늬만 유학이다 보니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않았지요. 인사를 생활화한 사람이면 소설을 쓰면서도 인사 했다는 말을 하는데 인사에 대한 생각이 없는 사람이 소설을 쓰다 보니 인사 부분을 생략한 겁니다.
스승이 돌아가신 경우
지난 2009년 대학 강의 중에 시간을 때우려는지 갑자기 대학을 통원에게 가르쳐준 스승이 돌아가셨다면서 처음에는 60살이 넘었다고 하다 다시 80살이 넘어 수년전에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강의를 했는데 한학을 공부하신 분들은 어떤 선생에게 무엇을 배웠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참고로 전호근 선생은 논어는 김충호선생에게 배웠고 주역을 가르친 선생님의 이름도 밝혔습니다.
고전번역원의 동영상 강의를 하신 선생님을 보면
송기채(宋基采) : 1949년 전남 고흥에서 출생 향리 용강재에서 오천 박수렬선생으로부터 한문을 수학하고 봉산 안종선선생과 해사 박규현선생을 사사하였다.
성백효(成百曉) : 1945년 충남 예산에서 출생하여 부친 월산공으로부터 한문을 수학하고 월곡 황경연, 서암 김희진 두 선생을 사사하였다.
이렇게 자신의 스승의 이름과 호를 밝히고 있습니다만 통원 강목년의 유학과 도학은 부친의 이름과 호를 밝히지 못하고 부친의 제자에게서 배웠다는 대학의 스승에 대해서도 호와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활빈당파로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지 못하는 첩의 자식이여서 입니까? 아니면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 라는 댄사의 순정파여서입니까? 부친과 스승의 이름과 호를 밝혔을 때 오는 이익보다 숨겼을 때 오는 이익이 훨씬 더 커서일겁니다.
부친의 제자이면서 자신에게 대학을 가르친 스승이 돌아가셨으면 당연 조문을 갔다 왔다는 말을 해야 인간이지요. 조문을 갔다 왔다는 말이 없었습니다. 조문을 갔다 왔으면 장례식장이다. 또는 대학병원이었다. 지방이다. 서울이다. 그래서 강의를 며칠 못했다. 또는 밤에 잠간 인사만 하고 왔다. 장지는 선산이 있어서 매장을 하는데 뒤 처리를 위해 강의를 며칠 하지 못했다는 등 뒤 말이 있었을 겁니다. 조문을 가지 않아서 기억에 없다보니 뒤말이 없었던 겁니다. 강목년이 자주 하는 말인 밖에서는 이러한 사람을 일러 싹아지 없는 자식이고 개의 자식이라고 말들을 합니다. 왜 일부러 개의 자식이 되었을까요? 스승이 돌아가셨단 말을 하지 않았으면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아 또 혀가 배신을 때렸군요.
앞의 밀감 선물을 받은 경우와 스승이 돌아가신 경우를 보면 인간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삶을 사는 것을 널리 알려주면서 저는 사기 유학을 하는 사람입니다 라고 말을 한 겁니다. 스승이 돌아가셨는데도 조문을 가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 아닐까요?
그러한 인간이 강의 중간에 도덕선생과 윤리선생을 자주 하는데 침 강의를 듣는 사람에 대해서는 또 폄하를 합니다. 지들은 침강의만 듣다보니 그것이(침강의) 최고라고들 생각을 하겠지만 명리시간이나 되니까 도덕선생. 윤리선생을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강목년의 본 모습입니다.
강의를 듣는 사람에게 내가 강의를 잘해서 부산에서도 강의를 들으러 왔다는 말을 해야 되는 사람입니다. 강의를 업으로 하는 사람 중에 이런 소설을 써서 자신이 실력이 있다고 여기게 하는 사람으로 실력이 없다 보니까 이런 말을 주기적으로 하는 것이고 말을 하고 나야 소화가 되면서 며칠 평안을 이룰 수 있는 겁니다.
통원의 소설이 생각이 나서 추가합니다.
건강진단을 받은 얘기를 하면서 건강진단을 받아보라고 권유를 하면서 선생님을 몸만 오면 된다고 해서 받았고 위염이 나왔다면서 여러분들도 꼭 건강진단을 받아 보시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의문은 사주를 이십여년 강의를 했으면 신의 경지는 못 되도 신의 꼬붕 경지는 이미 되어야 하는것 아닙니까? 자신의 몸은 너무도 귀하고 소중해서 비록 남의 사주는 건강이 어떻다. 또는 앞으로 무슨 해에 어떤 병이 생길 수 있다는 등 말을 했지만 본인의 건강은 본인의 사주실력을 믿을 수가 없어서 현대 과학의 힘을 빌려서 확실하게 검증을 받아야 마음이 편한 거군요. 그럼 다른 사주쟁이들을 비난을 말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건강진단을 받게 해준 독지가가 누구라고 밝히지 않은 것은 프라이버시 때문인가요? 아니면 미발표 소설이어서입니까? 의사나 병원의 사무장이 통원서당의 회원일리는 없는디. 그럼 일이십만원의 경비를 대 주면서 선상님 건강진단을 받아보십시요. 한 것인데 통원의 덕이 흘러넘치고 존경심이 하늘에 닿아서 그렇게 했을까요? 그럼 누구라고 밝혀야지요. 이름을 밝히지 못한 사연은 무얼까요? 돈을 댄 사람이 강목년이어서 밝히지 못한 것 같은디. 만약 독지가가 있었다면 이것 역시 개의 자식이 되는 겁니다. 건강진단을 받게 해준 사람에게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을했어야 합니다.
이는 소설로 모처럼 큰 돈을 들여서 건강진단을 받은 것을 기회가 오니까 찬스로 활용을 한 겁니다. 이렇게 생활의 경험을 강의에서 찬스로 활용하는 것은 하늘로 부터 부여받은 감목년 만의 능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