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초등학교 교사 자격 증"
나는 66년도에 정들었던 나의고향 나주! 아니 어린시절 뛰어놀고 맛재고개를 풀에 걸리고 땀을 뻘뻘흘리며 넘어다니며 나주로 학교를 다니던 정들었든 고향과,60환갑이 훨씬넘은 부모님곁을 뒤로하고 차비도없이 무임승차를 하여 서울로 상경하였다.다행히 서울에 둘째누나가 살고계셨다.평상시에도 하나밖에없은 너를 가르켜야 겠다고 누나께서는 늘 말씀하셨다 .나는 그둘째누나와매형을 의지하고 서울로 상경하여 공부좀해 보겠다고 하는 나름대로 일념이였다. 올라오던해에 서울에서 대학에시험을 보았으나 농촌학교에서의 실력은 서울에서는 내놓을수 없는 실력이었다.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책을 손에서 거의 떨어지지 않을정도 책을 가까히하였고,또한 도서관생활이 나의 서울생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정도이다.그래 나중에 1년후에 대학에 들어가게되어 공부를 하였는데 용돈이나 학비도않되는 과외생활도 해보았다.이미나는 그때부터 초등학교 아동들을 가르켜 보았다.그후 부모님께서는 연세도많으시고,철도없는 아들을 의지하고 서울에서 같이생활을 같이하게 되었다.그때 궁여지책으로 먹고 살어야 하는 직업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에 인천교육대학 에서 단기교육을 시켜 초등교사로 내보내는 제도가 있었다.나는1970년가을에 내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시험을 보았다.그때 어머니께서는 나주에 다녀 오셔가지고 병환이 나서 이듬에 내가 인천교육대학교에 교육중에 작고 하셨다.그래서 초등학교교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늘 어머니를 생각하고 가난했던 어린시절을 회상하게 된다. 에피쇼드의 이야기가 하나있었다.2004년6월 정들었던서울시공무원30년 가까히 했던 직장에서,아니 여기서 처자식 먹고 살고,자녀들 대학까지 잘가르켰든 직장을 퇴직하여야 한다니,참 앞이캄캄 하던시기에 전라남도 아니 나의고향 에서 해남모 초등학교에서 교감이 나에게 연락이 오지않겠는가! 우리학교에 오셔서 도와달라는 이야기이다. 퇴직하자마자 나는고향곡성 고달초등학교 에서 3개월간 인생에 서처음으로 아동들을 가르켜 보았다.어떤 친구들은 어떻게 코흘리게 애들을 상대하느냐고 하지만 나는 애들을 가르치는것이 그렇게 즐거울수가 없다.나는 해보지 못한미지의 세계가, 아니 어린아이들의 세계가 어떤세계일까 궁금하기 짝이없다 .지금도 섬진강이 유유히흘러내리는 고달면의 조그마한 농촌학교에서 생활했던 기억이 추억으로 남고 ,오늘도 그학교에서 가르쳤던 창곤이라고 하는 학생이 나한테 전화왔다.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다.나는 그학교 학생들에게 책2박스 약100권 가까운 책을 보내준적이 있다. 고달면의고달초등학교는 총아동수가 70명이내이다 80년 가까히 오랜역사를 지닌 학교가 아동수가 줄어들어 폐교위기에 있는 고향농촌의 현실을 생각할때 가슴한편으로 미어짐을 느끼곤한다. 어떤아이들은 할아버지할머니가 기르는 학생이 더러있다.이유인즉부모가 생활이 어려워서 그런학생들도 있다.참안타깝기 짝이없다.한국의 현실이 도시에서는 도시대로어렵고 농촌은 농촌대로 어렵다.우리가 흔히 말하는 도시와 농촌의 균형발전은 찾아볼수없고,소수의 가진자와권력을 쥔자의 소용돌이속에 사회는 혼란스럽고 정치는 자기갈길을 못가고 있는 한국의 현실이 가슴아프기만 할뿐이다.가진자는 베풀고 권력의 향방은 민(民)을 향해서 가야되는 것인데 어디로가고있는지! 도회지는 도회지대로 빌딩은 들어서고 휘황찬란한 밤은 계속되지만 그가운데도 밥3끼를해결못하고 굶주리는 사회현상! 도회지의 역작용으로만 발전하여 도회지의 앞미래가 걱정이 되지만 도회지의 앞미래가 걱정이되는 현실...... 올바로 가기를 바라면서.........
또한 나는2005년 가을철에 고향강진에서 계산초등학교에서 초등학교5학년을 가르켰다.강진읍내에서좀떨어진 60명이 좀더되는 농촌학교에서 말이다.내가 하나의 인간을 가르키고 교육을 시킨다는것은 책임감이 중요하다는 것을 많이 생각해보았다. 나이만 어릴뿐이지,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은못된 어른들보낫다는 생각을 해보았다.나는 내가좋아하는 문화사적지 답사를 강진에서도 계속했다. 강진의 다산초당은 수차례 찾아간것같고 해남 윤선도 유물관과 종택도많이 찾아간것 같다내가 사적지도 찾는 이유중에 하나는 우리역사에서 훌륭한 선비들을 접해보고 그삶을 그리워해보고배워보고싶어서 늘 시간이 있으면역사는 흘렀지만 자취라도 더듬고 시간과 공간의 그시점으로 돌아가 인생을 생각해보고 한국의 현실을 조명도 해보고, 여러모로 생각해보면서 접근해보고있다
나는 늘 한국의 위정자 (爲政者) 들을 역사에서 바라볼수있는 깨끗한 선비사상을 가진 치자(治者)들과비교를 많이 해보았다.물론 내나름대로의 생각이지만,왜 위정자들은 자기가 아닌 타인 (民)을 보는데인색할까? 아니면 자리에연연하고 깨끗하지못할까.역사에서 깨끗한선비들은 임금이 와서 내곁에서 나를 도와주고 같이 일을 하자고 하여도 병을 핑계로 아니면 부모님을 핑계로 초야로 묻치고자하는 깨끗한 선비의정신을 찾아보지 못할까? 아니면 한국의 토양이 가춰 지지못해서 일까 ? 어느쪽일까?
역사에서 거슬러 올라가면 무수히많은 세력들이 권력과 부(富)의 취하는 방법과 잘못 사용으로 많은 눈물과 피를 보았는가,아니면 우리의 역사는 위에서 생각해본 깨끗한 치자(治者)들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발전해 왔고.우리가 살고있다고 생각도 해본다. 오늘의 이글은 나의 서울에 올라와서 지금까지 살아온 두서 없는 글이다.친구들의 많은 이해가 있기를 바란다 .끝으로 나는 나이를 먹었고 하지만 나를 필요로 하는시골의 아담한 농촌학교의 아동들과 순수하게 함께하면서 생활을 하고싶다.역시 이번 강진에서도 아동들에게도 책을 보내줬다.학생들이 2월10일 개학이라고 하는데 그때 내가 보낸책을 받아보게 될것이다그때는 나를 기억하게 될것이고 즐거워 할것이다.이제는 2세 아동들을 대할때마다 너희들은 올바르고 깨끗하게 우리의뒤를 이어서 살아야 할텐데,아니면 너희들은 우리와같이 고생을 덜하고 살아야할텐데..하면서 생각도해본다.여기서 잠깐 나의이야기로 돌아가야 할것같다. 부모님45세의 노산에 나를 나아서기르시다가 따뜻한 자식의 품안에서 대접도 못받고 이세상을 떠나셔서 지금은 나주고향선산의 양지바른 곳에 설야(雪野)에 계시는 부모님의 영전에삼가 명복을 빌고,서울에서 나를 키워주시고 부모님처럼의지하고 뒷바라지해 주었던 둘째누나,그리고 매형에게도 삼가 명복을 빕니다.이분들이 안계셨다면 오늘의 내가 과연 이세상에 존재했을까? 서울시 공무원이라도 했을까? 아니 초등학교 교단에나
셨을까? 나는 학교에서 잠시가르키고 기간이끝나면 아동들에게 나에게 편지를 쓸것을 부탁하여 그편지를 집으로 가지고 올라와서 종종 읽어본다.그내용에는 고생했다.사랑한다는 내용들이 있다.
아~ 이래서 고생은되지만 가르치는일은 보람이 있는 일이구나 하는느낌을 가져본다
이글은 나의 66년도의 서울상경에서부터 공무원퇴직 이후초등학교 교사경험기 2006년도까지이니 글양으로 따지면한페이지에 불과하지만 나의인생40년 세월의 기록이네.그래서 술한잔먹고 불러보는십팔번 노래가 "섬마을 선생님"이거든, 이러한 인생역경기를 초등학교 동창회 카페에나 올리지 어디다 올리겠나! 나는 이글을 쓰면서 , 인생40년을 더듬으면서,또한 지나온과거에 수없이 어려운시절 눈물도 흘렸보아왔지만 오늘도 몇번의 눈물을 흠쳤음을 나주초등학교48회 친구들에게 고백을 하며,이글을 쓰고있으며 친구들을위하여 이카페를 개설해준 나의친구 천수친구에게도 공공연하게 칭찬을 보냈는데 또한진심으로 고마음을 보내네.앞으로 좋은작품,이사회를 위해서좋은일 많이하고 친구들을 위해서도 좋은일 많이 해주기를 바라네.끝으로 우리나주초등학교48회 친구들 이카페를 통해 눈물흘렸던 인생역경기를 쓰기고하고.즐거웠던 이야기를 털어놓기도 하고,희로애락의 대화창구를 했으면하네.혹시 내이야기가 너무나의 개인적인이야기 개인주관으로 표현이 잘못되더라도 많은 이해를 해주기바라네.
2006년 병술년 친구들의 건승을 기원하네!
2006년 인생40년을 회상하면서 조용히 도봉산자락의 잔설을 바라보며 이글을씀
2006년1월20일 용상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