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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의 식생활 ‧ 1 외 4편
- 여자
박지웅
안개 속에서 머리 감은 사람의 영혼은 육체를 찾다가
끝내 무덤을 뒤지게 된다
안개의 식생활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안개를 아는 것은 냉장고를 여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다만 그가 꼼꼼한 우울의 설계자라는 것과
연령을 알 수 없는 백색의 철학자라는 것
손바닥도 손등도 없이 부르는 어렴풋한 안내자라는 것
안개 낀 날, 어깨에 기대는 것은 위험하다
누군가에게 어깨를 빌려주는 것은 더 위험하다
그것들이 어깨에 있으므로
창백한 의자에 앉아 백색의 입술로 안개는 속삭인다
너는 우리를 보았구나
홀린 처녀가 깃털처럼 가벼운 아이를 얻었을 때
안아든 아이는 축축하고 비어 있었다
산 것과 죽은 것이 관계하여 얻은 아들이었다
그날로 여자는 저편의 벽에 몸을 던졌다
가끔 안개가 아이를 찾아와 젖을 물렸으니
어떤 우울은 진화하여 안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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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민박
흑산도 바람은 호탕하다 처음에는 섬이 베푸는 호의로 받아들였다 웬걸 통성명이 끝나자 바람은 멱살부터 그러잡았다 구겨진 옷깃을 추스르며 나는 낡은 민박집으로 들어가 짐을 풀었다
봄태풍이라 했다 그가 거느린 바람의 문장들은 분신술에 능했다 함석지붕 위로 지나갈 때는 염소 떼로 몸을 바꾸어 우당탕 뛰어다녔다
섬은 바람을 흥청망청 쓰고 있었다 바람으로 호의호식하고 있었다 이러다가 세상의 바람이 거덜 날 거야 나는 섬의 안방에서 잠을 설치며 심란했다 그날 밤, 민박집은 고래에 들이박힌 듯 기우뚱거리며 해안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꿈을 꾸었다, 나는 뱃머리에 서서 고래의 눈에 겨누고 있었다 작살을 비스듬히 쥐고 그가 달빛을 올려다볼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작살에 체중을 실어 던졌을 때 고래는 물속에 수많은 얼굴을 빠뜨리며 가라앉았다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파도가 바람의 얼굴을 모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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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너머라는 말은
어깨너머라는 말은 얼마나 부드러운가
아무 힘 들이지 않고 문질러보는 어깨너머라는 말
누구도 쫓아내지 않고 쫓겨나지 않는 아주 넓은 말
매달리지도 붙들지도 않고 그저 끔벅끔벅 앉아 있다
훌훌 날아가도 누구 하나 모르는 깃털 같은 말
먼먼 구름의 어깨너머 달마냥 은근한 말
어깨너머라는 말은 얼마나 은은한가
봄이 흰 눈썹으로 벚나무 어깨에 앉아 있는 말
유모차를 보드랍게 밀며 한 걸음 한 걸음
저승에 내려놓는 노인 걸음만치 느린 말
앞선 개울물 어깨너머 뒤따라 흐르는 물결의 말
풀들이 바람 따라 서로 어깨너머 춤추듯
편하게 섬기다 때로 하품처럼 떠나면 그뿐인 말
들이닥칠 일도 매섭게 마주칠 일도 없이
어깨너머는 그저 다가가 천천히 익히는 말
뒤에서 어슬렁거리다가 아주 닮아가는 말
따르지 않아도 마음결에 먼저 빚어지는 말
세상일이 다 어깨를 물려주고 받아들이는 일 아닌가
산이 산의 어깨너머로 새 한 마리 넘겨주듯
꽃이 꽃에게 제자리 내어주듯
등 내어주고 서로에게 금 긋지 않는 말
여기가 저기에게 뿌리내리는 말
이곳이 저곳에 내려앉는 가벼운 새의 말
또박또박 내리는 여름 빗방울에게 어깨 내주듯
얼마나 글썽이는 말인가 어깨너머라는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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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야구단
봄은 언제나 홈런이다
담장 밖으로 넘어가니까
목련의 외야에 떨어진
하얀 공을 주워들고
팬들은 덩달아 두 팔 치켜들고
집으로 달려간다
홈런이다!
그러니 저것은 꽃이 아니다
나무에 피어난 꽃은 정말
정말, 꽃이 아니다
나무배트 바깥으로 넘어간 하얀 공이다
가끔 불운이 따랐고
실책에 이어 실점도 했지만
보아라, 봄은 전력이 막강한 팀이다
봄은 집념이 강한 팀이다
9회말 투아웃에 목련은 온다
한 번도 봄이 목련을 포기하는 것을 본 적 없다
타자 목련이 들어서면
경기는 반드시 뒤집힌다
목련은 언제나 홈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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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장례식
떨어진 빗방울들이 육신을 모으고 있다
흩어진 손톱들을 찾아 주섬주섬 손가락마다 붙이고
연잎에 떨어진 눈망울을 공들여 끼워넣는다
눈을 가진다는 것은 눈물을 보일 수 있다는 것
이제 비는 눈을 뜨고 처음으로 비를 바라본다
세상의 모든 가족은 유족이니
우리 슬픔에 언제나 젖과 꿀이 흐르는 까닭을 알리라
눈물을 보였을까, 꽃향기 배였을까
그것들이 뻐근하게 맺히면서 갈비뼈를 이루자
비는 곧장 개울로 흘러가 오랫동안 무릎을 다듬었다
그러고 몸을 일으키자 마침내 풍경이 펼쳐졌다
봄이었다, 빗방울들이 나지막이 땅을 두드려
오래전 숨진 꽃들의 뼈를 맞추어 일으키고 있었다
노래들, 지구와 똑같은 무게로 존재하는 꽃들
날 저물도록 제 가슴을 꽃 위에 쓸어내리는 비들
저 비들은 희망보다 오래되었으니 오래 사느니
이 땅의 모든 무덤에서 비의 유적을 발견하리라
그렇게 날이 개자 비는 다시 손톱을 빼고
무릎을 꿇어 갈비뼈를 하나씩 땅에 묻었다
연잎 위에 눈빛 하나 올려두고 떠났다
박지웅
2004년 시와사상 신인상, 2005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2006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예진흥기금 수혜, 2014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에 선정되었다. 시집으로『너의 반은 꽃이다』,『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빈 손가락에 나비가 앉았다』가 있다. 제11회 지리산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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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해설>
나비, 그 아름다운 비문 非文
고봉준
1
‘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 박지웅의 두 번째 시집 제목인 이 짧은 문장에 그의 시에 대한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그의 문장들에선 언제나 짙은 상실의 흔적이 느껴진다. 그것은 “나는 문 없는 자 / 나는 주소 없는 자 / 나는 탯줄 없는 자”(「나를 스치는 자」)처럼 존재감을 확신하지 못하는 불행한 존재를 뒤따르는 빛의 이면, “어쩌면 그날 / 내게 죽음을 보는 곁눈이 생겼는지 모른다”(「올가미」)처럼 ‘죽음’이라는 절대적 사건에 관통당한 존재에게서 감지되는 특유의 느낌이다. “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라는 문장은 먼저 우리를 ‘구름’과 ‘집’의 세계로 데려간다. ‘구름’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벼랑에서 죽은 길들은 구름이 된다”(「세상의 모든 새는 헛소문이다」)라는 진술에 등장하는 끊어진 길 같은 것일까? 그렇다면 ‘집’이란 또 무엇일까? 그것은 “내가 / 행복했던 곳으로 가주세요”(「택시」)라고 말할 때의 원초적 공간을 가리키는 것일까, 아니면 재개발로 파괴되어 “천 개의 빈집”과 “천 개의 관”(「천 개의 빈집」)으로 전락한 ‘북아현동’ 혹은 “산동네에 버섯처럼 붙어 있는 집들”(「그늘의 가구」) 같은 비루한 현실의 공간일까? 하지만 저 제목의 세계로 들어가는 열쇠는 ‘사이’이니, 구름과 집 사이를 걸어온, 아니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걸어야만 했던, 한 사내의 내면에 공명하는 일이 필요할 듯하다.
‘사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구름’과 ‘집’이 가리키는 모든 세계, 가령 움직이는 것(구름)과 움직이지 않는 것(집), 천상적인 것(구름)과 지상적인 것(집), 이상적인 것(구름)과 현실적인 것(집)의 ‘사이[間]’이다. 박지웅의 시는 두 세계 가운데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는, 두 세계 모두에서 추방당한 가난한 영혼의 기록이다. 그러므로 ‘사이’란 공간이 아니라 상태, 구체적으로는 세계와 불화하는 인간의 실존적 상태에 부여된 이름이다. “새와 바람이 그린 지도를 손가락으로 / 가만히 따라가면 하늘이 어느덧 가까”(「라일락 전세」)운 세계와 “필요한 것은 지구가 아니라 방 두 칸”(「나비도 무겁다」)인 세계 사이의 시차(時差)는 얼마나 까마득한가. 박지웅 시의 화자들은 “내가 / 행복했던 곳”(「택시」)으로 돌아가려는 귀소(歸巢)의 열망을 지닌 낭만주의자이며, 그 원초적인 시간을 근거로 지금-이곳의 지배적인 가치에 맞서는 전투적 낭만주의자이며, 그럼에도 “가라앉지 않는 말”(「소금쟁이」)의 가치를 신뢰하는 미학적 낭만주의자이다. 알다시피 낭만주의자적 자아의 형상은 지상의 천사, 특히 추락한 천사이다. 그는 지상과 천상이라는 두 세계에 걸쳐 있지만 사실은 그 어느 곳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저주받은 천사이다. 그는 천사이기에 타락할 수 없고, 타락한 세계에 거주하고 있기에 천사라고 불릴 수 없다. 그의 목소리는 이 유예된 삶의 시간을 증언한다. 이 상실의 치욕적인 시간을 견디는 소설의 세계와 달리 박지웅의 시는 이상적 세계로의 귀환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현재를 영원히 결핍의 시간으로 만든다. 그 결핍 속에서 이 세계를 지배하는 가치들은 한낱 추문이 된다.
2
시집 『빈 손가락에 나비가 앉았다』에는 낭만주의의 세 가지 자아가 등장한다. 이것은 각각 이상적 낭만주의, 전투적 낭만주의, 미학적 낭만주의에 대응되는데, 이들을 관통하는 공통점은 분리 또는 결핍 의식이다. 박지웅 시에서 삶의 유예된 시간은 이상적인 세계, 그가 강제적으로 분리되었다고 생각하는 원초적 지점과의 ‘거리’에 의해 발생한다. 이 ‘거리’는 “내가 / 행복했던 곳”(「택시」)과 자본에 지배되는 지금-이곳 사이의 공간적 간극이기도 하고, 지금보다는 생生이 훨씬 단순했던 유년 시절과 고단한 생활인으로 살아가는 지금 사이의 시간적 간극이기도 하며, 모든 것이 조화로운 이상적 상태와 자본에 지배되는 소비사회 사이의 가치의 간극이기도 하다. 시간, 공간, 가치, 그 어느 것을 중심에 두고 읽어도 박지웅의 시에서 지금-이곳, 즉 현실 세계는 ‘결핍’ 상태이다. 박지웅의 시는 이 ‘결핍’을 문학적 동력으로 삼는데, 가계家系를 중심으로 그곳-유년과 지금-성년의 세계를 대비할 때 그의 낭만주의는 이상적인 것이 되고, 생태적 질서와 자본의 도시를 대비할 때 그의 시는 비판적인 것이 된다. 그리고 사물/세계와의 만남에서 촉발되는 새로운 발견, 혹은 예술적 창작 일반에 대한 자의식을 드러낼 때 미학적인 것이 된다. 그의 시 세계는 이들 세 개의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건축물이다.
눈발에 찍힌 손바닥이 늑대 발자국이다
나는 발 빠르게 손을 감춘다
손가락이 없으면 주먹도 없다 주먹이 없으니 팔을 뻗을 이유가 없다 한 팔로 싸우고 한 팔로 울었다 한 팔로 사랑을 붙들었다
내가 바란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두 주먹 꼭 쥐고 이별해보는 것, 해바라기 꽃마다 뺨을 재어보는 것, 손가락 걸고 연포 바다를 걷는 것, 꽃물 든 손톱을 아껴서 깎는 것, 철봉에 매달려 흔들리는 것, 배트맨을 외치며 정의로운 소년으로 자라는 것
내 손가락은 너무 맑아서 보이지 않는다, 내 손가락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여기서 시는 끝이다, 앞발을 쿡쿡 찍으며 늑대의 발로 썼다
아래는 일기의 한 대목이다
옷소매로 앞발을 감춘 백일 사진을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태웠다 뒤뜰로 가 간장 단지를 열고 손을 넣어보았다 손가락이 떠다니고 있었다, 고추였다, 뼈 없는
어미 자궁에 네 발의 총알로 박혀 있을 손가락들, 어미의 검은 우주를 떠돌고 있을 나의 소행성들, 언젠가는 무화과나무 위를 지나갈 것이다
손가락들이 유성처럼,
— 「늑대의 발을 가졌다」 전문
화자에게는 ‘손가락’이 없다. ‘손가락’이 없기 때문에 눈밭에 찍힌 그의 손바닥은 “늑대 발자국”을 닮았다. ‘손가락’이 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왜 화자에게는 ‘손가락’이 없을까? 그는 현존하지 않는 손가락이 “어미 자궁에 네 발의 총알로 박혀 있”다고 진술한다. ‘손가락’이 없으니 ‘손’은 ‘발’이 되고, ‘나’도 ‘늑대’가 된다. 이 변신 이야기는 흥미롭다. 이 시에서 손가락의 유무는 늑대와 인간을 가르는 문턱이다. 즉, 늑대이기 때문에 손가락이 없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이 없기 때문에 늑대인 것이다. 손가락이 없다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는 의미인데, 이때의 인간과 늑대의 구분은 생물학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상징적인 의미에서의 ‘결핍’이며, 따라서 ‘손가락’은 인간이라면 마땅히 소유하고 있어야 할 최소 조건 같은 것이다. ‘손가락’이 없기 때문에 ‘주먹’도 없고, ‘주먹’이 없으니 “팔을 뻗을 이유”도 없으며, 때문에 “한 팔로 싸우고 한 팔로 울었다 한 팔로 사랑을 붙들었다”처럼 불완전한 방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화자는 자신의 현재적 삶을 불완전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이 “어미 자궁에 네 발의 총알로 박혀 있을 손가락들”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시적 진술을 과학적으로 실증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여기에서 시인이 말하려는 것은 현재적 삶의 불완전함, 즉 현존이 결핍 상태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완전한 상태란 어떤 것일까? “내가 바란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라는 진술로 시작되는 3연의 내용이 완전한 상태를 가리킨다. 그것은 한 소년이 성장하면서 경험했음직한 평범하고 정상적인 삶의 궤적이니 화자는 자신의 성장 과정이 그러한 정상적이고 평범한 상태에 미치지 못했다고 고백하고 있는 셈이다. 추측컨대 이 시의 마지막 연의 내용은 심각한 결핍감을 껴안고 성장기를 지나온 화자가 유년의 어느 순간에 느꼈던 상처와 그것의 치유에 대한 기대를 기록한 것이리라.
(1) 나는 열 개, 볼링 핀처럼 나는 열 개, 볼링공은 굴러 오고 나는 팔다리도 없이 하얗게 서서 웃지(「스트라이크」)
(2) 먹고 먹히는 어른들의 세계는 단순해요 / 죽음의 발육이 시작되는 아귀의 동굴에서 우리는 먹으러 왔어요, 비틀거리며 서로 배 속으로 들어가요(「좀비극장」)
(3) 그는 쥐로 있다 혹은 새로 있다, 이것이면서 저것인 채 망설이다 종결된 생명의 시각지대 / 그는 궁금한 곳마다 혀를 집어넣는다 그리고 깨달은 바, 가장 비참한 것은 희망보다 오래 사는 것(「박쥐와 사각지대」)
(4) 해골가족은 애태울 일도 속 썩을 일도 없다 / 창자도 쓸개도 내놓은 덕분에 이만큼 산다(「타인의 세계」)
(5) 밥벌레들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요 / 쌀의 자갈길을 지나 와글와글 쌀의 능선을 넘어 / 퇴직금도 없이 쫓겨나는 저 좆만 한 아비들을 보세요(「먹이의 세계」)
상실한 손가락이 “어미 자궁”에 박혀 있는 한, 엄마는, 엄마로 상징되는 세계는 시인에게 영원한 안식처가 된다. “엄마는 쥐구멍이었다 / 나 살다가 궁지에 몰리면 / 언제나 줄달음치는 곳”(「우리 엄마」) 하지만 불행하게도 시인은 현재 엄마의 세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다. 그리하여 완전무결한 ‘쥐구멍’에서 분리된 시인의 화자들은 현실에서 존재감에 심각한 위협을 느낄 때마다 비인非人의 형상이 된다. (1)에서 화자는 열 개의 ‘볼링 핀’이다. 여기에서 ‘볼링 핀’은 “피 한 방울 없이 죽어 나자빠지는 나는 육체가 아니라 형체, 나는 나의 모형들이지”처럼 육체에 미치지 못한 물질, 때문에 외부의 힘(‘볼링공’)에 의해 쉽고 가볍게 쓰러질 수밖에 없는 절대적인 수동적 존재를 가리킨다. ‘물질’은 실존의 법칙이 아니라 물리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2)의 화자는 ‘좀비’이다. 여기에서 좀비는 ‘유쾌한 사후세계’에 속한다. 화자가 자신을 ‘좀비’라고 지칭하는 까닭은 “먹고 먹히는 어른들의 세계는 단순해요”처럼 화자가 현실을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계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1)과 (2)에서 자신을 비인非人이라고 소개하는 화자의 목소리는 심각하지 않고 명랑하다. 이것은 세계를 풍자하고 조롱하려는 의도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인데, ‘죽음’이 “감염된 슬픔”을 명랑하게 만든다는 진술은 결국 생生이 ‘슬픔의 시간’임을 말해준다. (3)에서 화자는 ‘박쥐’로 등장한다. “그는 쥐로 있다 혹은 새로 있다, 이것이면서 저것인 채 망설이다 종결된 생명의 사각지대”라는 진술은 ‘박쥐’라는 존재의 정체성 그 자체이다. 그리고 “가장 비참한 것은 희망보다 오래 사는 것”과 “그는 다만 맛있는 피를 믿을 뿐이다”라는 진술은 희망에 대한 어떤 기대도 접어버린 허무주의적 태도, 그러므로 ‘신’을 포함한 일체의 가치 대신 오직 ‘맛있는 피’라는 물질적인 것에만 집중하고 살아가는 현대적인 삶의 태도를 비판한 것이다. 시인에게 희망은 “전염병”이나 “파렴치한 희망의 가면”(「라일락을 쏟았다」) 같은 것이다. 첫 시집에서 시인은 “다시는 희망과 동침하지 않는다”(「다시는 희망과 동침하지 않는다」)라고 명시적으로 밝힌 적이 있다.
(4)에서 시인은 ‘타인의 세계’ 즉 어떤 가족을 “해골가족”으로 변신시킨다. ‘해골’이란 인간이 아닌, 또는 ‘죽음’ 이후의 삶을 의미한다. 하지만 “해골가족은 애태울 일도 속 썩을 일도 없다 / 창자도 쓸개도 내놓은 덕분에 이만큼 산다”라는 진술에서 드러나듯이 여기에서도 화자의 목소리는 반어적으로 명랑하다. 그것은 차라리 죽음 이후의 삶이 그 이전의 삶보다 좋은 게 아니냐는 반문을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5)에서 가족 구성원은 ‘밥벌레’, ‘쌀벌레’로 등장한다. 이 시에서 “퇴직금도 없이 쫓겨나는 저 좆만 한 아비들”이나 “한 톨밖에 안 되는 그림자” 같은 진술이 함축하고 있는 것은 존재감의 상실이다. 우리는 (5)에 등장하는 ‘아비’와 달리 “이 집안에는 밥벌레가 너무 많아요”라는 농담을 듣고 “쌀벌레 같은 눈물을 흘리다 / 킥킥거”릴 수 없다. 재미있는 비유라고 손바닥을 부딪칠 수도 없다. 인간의 존재감은 타자의 시선의 승인을 거침으로써 발생한다. 이것은 존재감의 상실이나 그로 인한 자기 학대가 사회적인 맥락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뜻한다. 박지웅의 시에서 이러한 존재감의 결핍은 종종 현실 세계의 무가치, 즉 디스토피아적인 현실감을 드러내는 통로가 된다.
3
박지웅에게 결핍은 ‘예술/창작’의 기원이기도 한다. 시집의 초입에 등장하는 「심금 心琴」을 살펴보자. 이 시에서 ‘결핍’은 “한 팔을 잃은 연주자”의 형상, 그러니까 신체적인 문제로 가시화된다. 연주자는 팔을 잃어버려 연주를 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잃어버린 팔을 되찾기 위해 “꿈의 꿈속까지 들어가 뒤졌다”(「심금 心琴」). 왜냐하면 “만질 수 없는 것을 만지고 싶을 때 / 기댈 곳이 꿈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꿈에서 발견하는 것은 ‘썩은 팔’, ‘죽은 팔’처럼 무용(無用)한 것뿐이다. 이는 ‘꿈’이라는 판타지를 통해 실존적 결핍이 온전히 치유될 수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 숨을 불어 넣자 가늘게 소리가 눈을 떴다 / 연주자는 없는 팔로 악기를 들었다 / 불행 없이는 울리지 않는 악기가 있다”라는 마지막 진술은, ‘심금(心琴’)이 무형의 악기라는 발상에서 나온 것임에는 분명하지만, ‘잃어버린 팔’에 대한 간절함, 그 ‘불행’에서 예술이 시작을 사유하고 있다. 이것은 ‘불행’과 ‘결핍’이 예술의 기원이라는 주장으로 읽을 수 있다. ‘심금(心琴)’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모아 만든 “만질 수 없는 것”, 즉 비가시적인 불가능의 악기이니, 그것은 멀쩡한 두 팔, 즉 “불행” 없이는 울리지 않는다. 이때의 “말할 수 없는 것”이란, 예컨대 “슬픔은 혀가 없다 / 실은 두 갈래로 갈라진 찢긴 마음뿐이다”(「슬픔은 혀가 없다」)라고 말할 때처럼 ‘혀-없음’ 때문에 생기는 침묵 같은 것이다. 그것은 ‘묵비권’이 아니라 ‘혀’, 즉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마음’에 가까운 것이니, 시인에게 그것은 “불행”으로 연주할 수 있는 것이다.
신이 내게 발행한 화폐는 슬픔뿐이다
수많은 가게를 돌아다녔지만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누군들 상처를 받고 싶겠는가
당신은 몇 번 위조한 흰 꽃을 내 머리에 뿌렸다
불분명한 흐린 목소리로 나는 시를 읊는다
당신이 내 목에 흰 벽을 바르고 젖은 지붕을 얹었는가
목구멍에서 시가 아니라 백골이 된 구름이 올라온다
나는 어쩌다 슬픔을 독차지하는 일자리를 얻었나
내가 그곳에서 열심히 일했다
그림자들을 더 고용해 슬픔에 구애했다
시는 쓰디쓴 생에 내는 술값이겠거니, 내가 쓰리라 했다
내가 당신의 맨 앞자리에 앉아 슬픔을 필기할 때
당신은 구름과 목련의 폐가가 있는 산마루를 가리켰다
발목에서 뒷덜미까지 아무것도 남지 않은 저 멸문을 써라
제 전부를 망치는 곳으로 가는 구름의 이름으로
군더더기 없는 멸망을 지나 푸르러지는 목련의 이름으로
나는 푼돈처럼 주머니 속에 넣어둔 시를 꺼내 읽는다
누가 이 슬픔의 관객이 되겠는가
— 「구름과 목련의 폐가를 낭송하다」 전문
박지웅의 시에는 ‘결핍’만큼이나 ‘슬픔’이 많다. 또한 사물과의 우연한 만남 이상으로 이별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그는 ‘이별’이라는 사건 속에서 항상 ‘슬픔’의 주인공 역할을 맡는다. 그리고 이 슬픔과 이별의 감정이 삶을 위태롭게 만들 때, 박지웅의 시는 역설적으로 목소리를 풍자적으로 변조한다. 박지웅의 시에서는 풍자도 슬픔의 일종이다. 그에게 세상은 “살아서 빠져나갈 수 있다면 그것은 애초부터 삶이 아니었으리라 알면서도 속고 또다시 눈 뜨고 꿈꾸는 것이 삶이라면 삶은 정말 나쁜 버릇이다”(「야설」)라는 진술처럼 ‘길’이 없는 미궁과 같은 곳이다. 그는 ‘현실’보다 ‘꿈’을 더 신뢰하기 때문에 낭만주의자이다. “꿈은 나의 생가, 내가 머무르고 자란 진실한 모국 / 나의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一層”(「꿈에 단골집 하나 있다」). 인용 시에서 화자는 ‘슬픔’을 신이 발행한 화폐, 그러니까 운명으로 인식한다. 물론 “누군들 상처를 받고 싶겠는가”라는 화자의 말처럼 이 ‘슬픔’의 운명은 그가 원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운명’이란 의지가 도달하지 못하는 곳에서 결정되는 것, 화자는 ‘당신=신’으로부터 “슬픔을 독차지하는 일자리”를 얻어서 열심히 시를 썼다. 운명이 그를 시인으로 호명했고, 그 또한 운명의 호명에 응답함으로써 “가까스로 시를 지키고 있다”(「출전」). 그런데 ‘당신=신’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슬픔의 방위(方位)는 “구름과 목련의 폐가가 있는 산마루”, “발목에서 뒷덜미까지 아무것도 남지 않은 저 멸문”을 향하고 있다. 우리는 저 멸문을 당한 산마루의 폐가, 구름과 목련이 있는 그곳의 구체적인 지명을 알지 못한다. 다만 박지웅의 시에서 도시는 “악몽에서 악몽으로 환승하는 지하도”(「서큐버스」)라는 표현처럼 악마적인 세계로 그려지는 반면, 희미하게나마 생태적인 흔적이 남아 있는 공간은 긍정적인 세계로 의미화된다는 사실을 지적해두는 것으로 충분할 듯하다.
물 한 방울 없이 새로운 종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탕, 탕 망치로 나비를 만든다 청동을 때려 그 안에 나비를 불러내는 것이다
청동은 꿈틀거리며 더 깊이 청동 속으로 파고들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망치는 다만 두드려 깨울 뿐이다 수없는 뼈들이 몸속에서 수없이 엎치락뒤치락한 뒤에야 하나의 생은 완전히 소멸하는 것
청동을 붙들고 있던 청동의 손아귀를 두드려 편다 청동이 되기까지 걸어온 모든 발자국과 청동이 딛고 있는 땅을 무너뜨린다
그러자면 먼저 그 몸속을 훤히 읽을 줄 알아야 한다 단단한 저편에 묻힌 심장이 따뜻해질 때까지, 금속의 몸을 벗고 더없이 가벼워져 꽃에 앉을 수 있을 때까지 청동의 뼈 마디마디를 곱게 으깨고 들어가야 한다
탕, 탕
짐승처럼 출렁이던 무거운 소리까지 모두 불러내면 사지를 비틀던 차가운 육체에 서서히 온기가 돌고 청동이 떠받치고 있던 청동의 얼굴도 잠잠하게 가라앉는다
그렇게 오랫동안 두드리면 청동은 펼쳐지고 그 깊숙한 데서 바람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금속 안에 퍼지던 맥박이 마침내 심장을 깨우는 것이다
비로소 아 비로소 한 줌의 청동도 남아 있지 않은 곳에서 한 올 한 올 핏줄이 새로 몸을 짜는 것이다 그 푸른 청동의 무덤 위에 나비 하나 유연하게 내려앉는 것이다
— 「망치와 나비」 전문
시 쓰기에 대한 자의식은 박지웅의 시 세계를 구성하는 기둥 가운데 하나이다. 이 자의식은 두 가지 방식으로 드러난다. 그 하나는 “일찍이 나는 / 백지보다 깊은 산을, 백지보다 먼 바다를 / 보지 못했다”(「종이 위로 한 달이 지나갔다」), “당신이 내 입술을 만지자 셀 수 없는 글씨들이 태어났다”(「그 사람을 내가 산 적 있다」), “오래도록 첫 줄을 쓰지 못했다”(「습작」)처럼 ‘글쓰기-행위’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까스로 시를 지키고 있다”(「출전」)처럼 ‘시인-존재’에 대한 것이다. 「망치와 나비」 역시 예술 창작에 대한 일반론적 사유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할 작품이다. 박지웅의 세 권의 시집에서 ‘나비’는 다양한 의미로 변주되면서 개인적 상징의 하나로 기능한다. 시인은 그것을 자연적 대상으로서의 ‘나비’에서 비닐봉지의 ‘나비매듭’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변용하면서 소위 ‘나비의 시학’을 펼쳐왔다. 인용 시에 등장하는 ‘나비’ 또한 그 계보에 속하는데, 여기서의 ‘나비’는 청동을 두들겨 만든 청동 나비, 즉 금속이다. 이 시의 시적 상황은 “탕, 탕 망치로 나비를 만든다 청동을 때려 그 안에 나비를 불러내는 것이다”라는 진술에 모두 설명되어 있다. 망치로 청동을 때리는 것, 시인은 그 행위를 “하나의 생은 완전히 소멸하는 것”처럼 죽음의 과정으로 인식한다. 소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청동이 되기까지 걸어온 모든 발자국과 청동이 딛고 있는 땅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청동이 지닌 자연적 속성을 모두 제거함으로써 청동이 더 이상 청동으로 존재하지 않는 상태, 시인은 그것을 소멸이라고 쓴다. 하지만 이 ‘소멸’은 환원 불가능한 죽음이 아니다. 그것은 파괴적인 죽음과 달리 새로운 생명으로 순환한다. 시인은 예술 작품으로서의 ‘나비’가 탄생하는 과정을 “두드려 깨울 뿐이다”, “단단한 저편에 묻힌 심장이 따뜻해질 때까지”, “금속 안에 퍼지던 맥박이 마침내 심장을 깨우는 것이다”처럼 견고한 금속에 갇혀 있던 생명이 되살아나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그리하여 “한 줌의 청동도 남아 있지 않은 곳”에서야 비로소 “나비 하나 유연하게 내려앉는 것”이다. 시인에게 예술 작품의 창작 과정이란 이처럼 죽음을 통과하여 시작되는 생명, 사물의 자연적 물성物性에 갇혀 있는 대상을 깨우는 부정의 연속적인 과정이다. 이러한 사유에 따르면 예술이란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무 無 안에 깃들어 있는 유(有)를 “불러내는 것”이다.
‘나비’만이 아니다. “당신이 내 입술을 만지자 셀 수 없는 글씨들이 태어났다”(「그 사람을 내가 산 적 있다」)라고 말하는 것, “내 입술”을 통해 발화되는 수많은 글씨의 주인이 사실은 ‘당신’이라는 발상은 ‘창조’라는 단어의 느낌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그래서일까. 시인은 좀처럼 ‘창조’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나비를 ‘불러내고’, 나비가 ‘내려앉는다’고 쓴다. 또한 그는 “따뜻한 여러 마리 새들이 호록호록 태어나던 그 손”(「팥죽 한 그릇」)처럼 ‘태어난다’고 쓴다. 박지웅의 시에서 화자와 대상/세계의 관계는 지성주의적 의미에서의 ‘주체’와 ‘대상’의 관계는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바람이 노을을 만지자 나비들이 태어났다”(「그 사람을 내가 산 적 있다」)처럼 두 개체의 만남에서 발생하는 사건의 언어화에 가까우며, “봄은 언제나 홈런이다 / 담장 밖으로 넘어가니까”(「목련야구단」)처럼 유사성의 인식에서 시작되는 발견의 시학에 가깝다. 밀란 쿤데라가 『소설의 기술』에서 인용한 체코의 시인 얀 스카첼의 말(“시인은 시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시는 저 뒤쪽 어디에 있는 것 오래오래 전부터 그것은 거기 있었고 시인은 다만 그걸 찾아내는 것일 뿐.”)처럼 박지웅에게 시는 창조만은 아니다.
4
박지웅에게 ‘도시’는 “악몽의 환승역”(「서큐버스」)으로 상징되는 고단한 삶의 공간이면서 “희망에 다리를 벌렸다”(「라일락을 쏟았다」)처럼 자본주의적 욕망이 지배하는 타락한 세계이다. 이 거대 도시에서 시인은 “이 우주에 나는 도래하지 않은 위치다”(「나는 나는이라는 셀카를 찍는다」)처럼 존재감을 잃고 ‘먼지’의 일족으로 전락한다. 그에게 도시는 디스토피아적인 부정적 세계이다. 박지웅의 많은 시편들은 이 도시적 삶에서 기원하는 고단함과 존재감의 상실을 노래하는데, 흥미롭게도 그의 시에서 도시적 감각에 근접한 시인의 목소리가 낯선 것으로 변조되는 순간, 그러니까 시의 형질 자체가 바뀌는 순간들이 있다. 그것은 도시적인 문명의 언어가 생태적인 언어로 바뀌는 변곡점에서 나타나는데, 그 낯선 목소리는 절대적으로 부정적 세계를 벗어난 세계, 시인에게 가장 긍정적인 의미로 다가오는 세계를 우리에게 펼쳐 보인다. 현실을 디스토피아로 감각하는 존재의 내면에는 끝내 놓을 수 없는 유토피아에 대한 지향이 존재하는 법이다. 이 유토피아의 시적 시제(時制)는 세 가지이다.
동지 저녁, 어미는 손바닥 비벼 새알을 낳았다
그것을 쇠솥에 넣고 뭉근히 팥죽을 쑤었다
나무 주걱 뒤로 스르르 뱀 같은 것이 뒤따르며
새알을 물고 붉은 성간 星間 사이로 숨어들었다
솥 안에 처마 끝과 별과 그늘이 여닫히며 익어갔다
부뚜막 뒤를 간질이며 싸락눈 사락사락 나리고
나는 어미 곁에 나긋이 새알을 혓바닥에 품고
다시 이를 수 없는 따뜻하고 사소한 밤을 염려하였다
명주실 몰래 묶어놓을 데 없을까
뒤뜰 장독간 호리병처럼 서 있는 밤하늘을 보며
먼먼 전설에 귀를 세운 것이다
바람 드는 부엌문에 서서 공중을 두리번거리다
하얀 마침표 하나 눈동자에 떨어져 그만 놓쳐버린 집
어느 동짓날 팥죽 한 그릇 받고 사소한 것을 쓰느니
대문간이며 담장이며 낮은 기와로 번지던 붉은 실핏줄들
따뜻한 여러 마리 새들이 호록호록 태어나던 그 손
— 「팥죽 한 그릇」 전문
먼저 과거. 이 시는 과거의 경험을 재구성한 것이다. 과거 시제로 언어화한 유토피아, 시인은 오래전의 한때를 “다시 이를 수 없는 따뜻하고 사소한 밤”으로 회고한다. 추운 겨울날을 배경으로 한 이 풍경 안에서 ‘나’와 ‘어미’는 상상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것은 현실의 상징적인 질서, 예컨대 노동, 금전적인 욕망 등이 틈입하지 못하는 완전히 닫힌 세계이다. 이 아름답고 따뜻한 한때의 기억으로 인해 시인은 상징적인 현실을 온전한 의미의 ‘세계’로 수락하지 못한다. 이 세계에는 “사람을 먹고 자라는 상상의 동물”(「이승의 일」)이나 “말머리를 베고 말허리를 끊고 말꼬리를 잘라 / 이 말 저 말에 갖다 붙이는 식”(「로그인」)으로 번식하는 식물이 살지 않는다. 이 상상적 세계에서 ‘아이’와 ‘어미’의 거리는 “30cm”(「30cm」)이다. 한편 “별방리 밤하늘은 비옥해 당신과 도망가 살기 좋을까”라는 진술로 시작되는「별방리 오로라」의 시제는 미래이다. 이 시에서 화자는 ‘당신’과 도주하는 상상을 한다. 이 도주는 “햇볕 한 톨 빗방울 하나 / 다 거두어 곡식으로 키우는 양지들의 저녁”이나 “골짜기와 봉우리에 채비 마친 꽃들, / 밤하늘에 돛을 드리우는 별방리에서 우리”라는 구절이 암시하듯이 도시와 문명으로부터의 도주이고, 자연적·생태적인 세계로의 도주이다. 하지만 이상적 세계로 이주하는 꿈을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늘 슬프기 마련이다. 박지웅의 시의 주조(主調)라고 말할 수 있는 슬픔은 여기에서 기원한다.
어깨너머라는 말은 얼마나 부드러운가
아무 힘 들이지 않고 문질러보는 어깨너머라는 말
누구도 쫓아내지 않고 쫓겨나지 않는 아주 넓은 말
매달리지도 붙들지도 않고 그저 끔벅끔벅 앉아 있다
훌훌 날아가도 누구 하나 모르는 깃털 같은 말
먼먼 구름의 어깨너머 달마냥 은근한 말
어깨너머라는 말은 얼마나 은은한가
봄이 흰 눈썹으로 벚나무 어깨에 앉아 있는 말
유모차를 보드랍게 밀며 한 걸음 한 걸음
저승에 내려놓는 노인 걸음만치 느린 말
앞선 개울물 어깨너머 뒤따라 흐르는 물결의 말
풀들이 바람 따라 서로 어깨너머 춤추듯
편하게 섬기다 때로 하품처럼 떠나면 그뿐인 말
들이닥칠 일도 매섭게 마주칠 일도 없이
어깨너머는 그저 다가가 천천히 익히는 말
뒤에서 어슬렁거리다가 아주 닮아가는 말
따르지 않아도 마음결에 먼저 빚어지는 말
세상일이 다 어깨를 물려주고 받아들이는 일 아닌가
산이 산의 어깨너머로 새 한 마리 넘겨주듯
꽃이 꽃에게 제자리 내어주듯
등 내어주고 서로에게 금 긋지 않는 말
여기가 저기에게 뿌리내리는 말
이곳이 저곳에 내려앉는 가벼운 새의 말
또박또박 내리는 여름 빗방울에게 어깨 내어주듯
얼마나 글썽이는 말인가 어깨너머라는 말은
— 「어깨너머라는 말은」 전문
이 시는 도시적 삶의 불모성을 노래한 참혹한 서정과 다르다. 이번 시집에 실려 있는 한 구절(“이후의 세계란 그런 것이다 / 너머에 있는 꽃들의 말을 배웠으나 이 땅에서는 써볼 도리가 없고 알아먹을 귀도 없는 것이다”(「이후」))을 빌려서 표현하자면 이것은 ‘이후의 말’로 쓰인 시이고, 때문에 “제본할 수 없는 슬픔”(「그 영혼에 봄을 인쇄한 적 있다」)이 그렇듯이 논리를 벗어난 지점에서 발화된 것이다. “바람의 문장들”(「고래민박」)도 이와 같지 않을까. 과거와 현재, 그러니까 상상적인 관계에 대한 추억과 기대를 함축하고 있는 시들과 달리 이 시에서 세계의 긍정성은 ‘어깨너머’라는 ‘말’을 통해 도달된다. 일찍이 폴 발레리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쓴 시구들은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내가 부여한 의미는 오로지 내게만 해당할 뿐, 다른 이들에게도 동일한 느낌을 주는 것은 아니다. 모든 시가 작가의 생각과 일치하는 진정하고 유일한 단 하나의 의미만 갖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시의 본질에 반(反)하는 오류이며, 이런 오류는 치명적일 수도 있다.” 「매혹」이라는 시의 주석에 쓰인 이 진술은 시어가 단어에 마음을 빼앗긴 순간, 즉 매혹의 느낌에서 발화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시 인용 시를 보자. 이 시의 화자 역시 ‘어깨너머’라는 말에 매혹된 상태인 듯하다. 사실 이 시에서 화자가 들려주는 ‘어깨너머’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인 감각을 고스란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어깨너머’라는 단어가 사전적인 의미로 사용된 도구-언어가 아니라 화자의 주관과 감각, 그러니까 특정한 순간과 상황 속에서 감각되는 정서적인 표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보’나 ‘의미’의 차원에서 설명될 수 없는, 언어를 대하는 시의 고유한 특징이기도 하다. 시가 ‘소통’을 목표로 하지 않는 것은 거기에 쓰인 언어가 의미나 정보의 전달을 위해 동원된 수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의 언어가 원하는 것은 화자와 독자 사이의 교감 또는 공명이니, 이것은 정서적인 울림이지 논리적인 이해가 아니다. 그리하여 ‘어깨너머’에 대해 우리가 가늠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지 않은, 타인의 접근이나 개입에 열려 있는 어떤 상태를 연상시킨다는 정도이다. 동시에 “꽃이 꽃에게 제자리 내어주듯 / 등 내어주고 서로에게 금 긋지 않는 말”이라는 이 말이 화자에게는 이상적인 상태, 돌아갈 수 없는 과거나 도래의 가능성이 희박한 미래와 구분되는 현재에 속하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언어에 대한 이 섬세한 감각이 비문(非文)으로, 그것도 아름다운 비문으로 표현되는 것이 우리가 시詩라고 부르는 것이 아닐까. “문법 밖에서 율동하는 필체 / 나비는 아름다운 비문임을 깨닫는다”(「나비를 읽는 법」, 『구름과 집 사이를 걸었다』).
고봉준
200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현재 계간 <포지션>, <문학 선> 편집위원.
평론집 『반대자의 윤리』, 『다른 목소리들』, 『유령들』, 『비인칭적인 것』 등
첫댓글 잘 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