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에서 가장 빠른 나라
대한민국 사람들 성격 급한 것은 세계에 알려져 있다. 외국여행을 하다보면 식당이나 상점 점원들이 우리를 바라보며 서툰 발음으로 “빨리 빨리?”라며 웃는 것을 경험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만 큼 한국인의 ‘빨리빨리’ 문화는 세계만방에 소문이 났다.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도 너나없이 ‘빨리 빨리’라는 단어는 배워 간다고 한다. 우리 한국인들은 스스로가 ‘빨리 빨리’ 문화에 빠져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우리 스스로가 얼마나 조급하고 서두르고 있는지를 잘 안다.
커피 자판기에 버튼을 누르고 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손을 갖다 대는 것이 한국인이다. 음식을 배달시켜 놓고 몇 번씩 독촉전화를 하는 것이 한국인이다.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고 주 메뉴가 나오기 전에 밑반찬을 먹기 시작하는 것이 한국인이다.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원하는 층수 버튼과 거의 동시에 문 닫힘 버튼을 누르는 것이 한국인이다. 이뿐 인가. 비행기가 착륙하면 기체가 트랩과 부킹하기도 전에 모두 일어나 짐을 챙기기도 하고, TV를 보면서 잠시만 재미가 없어도 수시로 리모컨을 눌러댄다.
가까운 이웃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그 급한 성격은 어디에서 기인된 것일까를 생각해봤지만 딱히 답은 없다. 우리는 중국인들을 지칭할 때 행동이 느리다고 하여 ‘만만디’라는 별칭을 사용한다. 우리와 가장 인접해 살고 있고 역사상 가장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을 그들이 그토록 느리고 여유가 있는데 우리는 어쩌면 그리도 급하고 쫓기듯 살아갈까. 한국인의 유전자 속에는 급하게 서두르고 기다릴 줄 모르는 DNA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몇몇 나라 몇몇 민족이 조급하다는 말을 여러 차례 들어봤지만 한국인에 비할 바는 아닌 듯싶다.
이토록 전 세계에 소문이 난 한국인의 ‘빨리 빨리 문화’는 많은 단점을 갖고 있는 반면 많은 장점도 갖고 있다. 대개는 단점만 부각이 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장점도 적지 않음을 알게 된다. 물론 기다릴 줄 알고, 참을 줄 아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기다림으로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조급해서 놓치는 경우도 많고, 기다리면 더 큰 성과를 낼 수 있는 것을 기다리지 못해 작은 성과로 만족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조급한 우리의 문화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경제성장을 일궈내는 밑거름이 됐고, 변화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한국인이 언제부터 이토록 ‘빨리빨리 문화’ 속에서 생활했는지는 알 수 없다. 적어도 내가 태어나서 지켜본 이후의 생활은 ‘빨리 빨리’가 통했다. 그 이전 언제부터 그런 문화가 정착됐는지는 알지 못하겠다. 유추컨대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근대 이후 심화됐을 것으로 본다. 양반문화가 일반적이던 조선시대에는 지금과 같은 ‘빨리 빨리’가 보편화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즉, 우리의 경제가 가파르게 성장하기 시작한 시점이 ‘빨리 빨리 문화’의 보편화 시점과 일치하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문화인류학자들 가운데 누군가가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한 책을 집필했다면 그 책을 꼭 읽어보고 싶다. 그만큼 ‘빨리 빨리 문화’에 대한 나의 궁금증은 크다. 더불어 실제로 ‘빨리 빨리 문화’가 우리 경제의 성장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의 여부는 큰 관심거리이다.
내가 태어나 지금껏 살아온 세월은 40년 하고도 몇 년이 보태졌다. 이 중 아무런 기억도 못하고 별다른 인지능력이 없던 아주 어린 시절 몇 년을 제외한다면 기억할 수 있는 기간의 범위가 40년 정도는 될 것 같다. 내가 겪은 40년은 한국사에 있어서 참으로 의미 있는 시간일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5000년 역사 동안 가장 융성한 때가 지금이고, 가장 풍요롭고,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최근 20~30년이기 때문이다. 40년 사는 동안 다른 나라 국민이 수백 년 동안에 걸쳐 겪었을 일을 겪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경제적인 부분 외에 정치적인 면에서도 이 시기에 엄청난 변화를 겪은 것도 사실이다.
전기의 혜택을 보기 시작한 세대이고, 배를 곯아보지 않은 첫 세대이기도 하지만 여전히 부족한 것이 많은 시대에 유소년기를 보냈다. 동네에 TV가 몇 대 없던 시절을 경험했고, 이웃면까지 10리나 20리 길을 예사로 걸어 다녔다. 중학생이 됐을 때는 동네서 제법 빨리 냉장고를 집에 들였다. 어려서 동네 아저씨들이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로 일 하러 나가는 것을 지켜봤고, 중학생 무렵에는 해외여행 자유화가 선언돼 여행 삼아 외국 나가는 사람들을 처음 봤다.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KAL기 폭파사건 등을 뉴스를 통해 들었던 아련한 기억이 있다. 눈과 귀가 막혀서 한동안 광주민주화운동이 폭도들의 반란이라고 알고 지내기도 했고, 올림픽과 월드컵이 이 땅에서 개최되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집을 떠나 고등학교에 다닐 때, 시골 집에 전화를 걸기 위해 방과 후에 자전거를 타고 3~4㎞ 떨어진 청주전신전화국에 가서 접수를 하고 한참 기다렸다가 통화를 할 수 있던 기억도 난다. 대학 입학 후 처음 공중전화 카드가 시판됐을 때 무척 편리하다고 생각했던 기억도 난다. 군 복무를 할 때 ‘삐삐’라고 불렸던 페이저가 출시돼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 직장생활을 할 때는 세계에서 4번째로 고속열차를 가진 나라가 됐다. 결혼을 해서 아이를 키우는 도중에는 삼성전자가 세계 1위 전자 기업이 됐고, 웬만한 대학생은 1~2년씩 외국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오는 것이 일반화 됐다.
도대체 이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 변화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한국에서 40년을 살았기에 다른 나라에서 100년에도 다 겪지 못할 일들을 압축해서 겪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의 40년에는 무슨 변화가 일어날지 예측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지금처럼 가파른 변화의 곡선이 그려질지, 변화가 무뎌질지, 그도 아니면 더욱 심한 변화가 다가올지 정말 상상이 안 된다. 하지만 한국인의 ‘빨리 빨리 문화’를 생각하면 다가올 변화는 더욱 빨라질 것이란 가설이 힘을 얻는다. 변화는 물질적인 곳에서만 오지는 않았다. 의식과 문화의 변화도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진행됐다. 다가올 이 엄청난 변화가 염려스럽기도 하고 기대도 된다.
우리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들은 한국인의 ‘빨리 빨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무척 신기하게 여긴다. 그러나 그들이 신기하게 여기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에겐 크게 중요하지 않다. 우린 이미 ‘빨리 빨리’에 익숙해 있어 느리면 답답해하고 적응하지 못한다. 우리는 서두르는 문화 때문에 오해도 많이 받았고, 손해도 많이 봤다. 하지만 손해 본 것보다는 덕을 본 것이 더 많다는 생각이 든다. 세계적으로 한국에 대해 갖는 이미지는 ‘빠르다’ ‘부지런하다’ ‘강하다’ ‘급하다’ 등등이다. 부지런했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고, 조급했기 때문에 서둘렀다. 우리는 빠르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먼저 나아갈 수 있다. ‘빨리 빨리’는 한국을 세계 1등 국가로 만드는데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