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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경표](1769년 경 발간된 것으로 추정됨, 저자 미상)는 우리나라의 산줄기를 족보 방식의 도표로 만든 책이다.
[산경표]에 부분적 오류나 혼선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산경표]를 보면 두 가지 제작 원칙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지형적 원리에 충실한다.
둘째, 10대 강을 구획하는 산줄기를 큰 산줄기로 삼는다.
[산경표]에 나타나는 산줄기 이름은 대간 1개, 정간 1개, 정맥 13개, 해서 아래 총 15개이다.
- (백두대간, 장백정간, 청북정맥, 청남정맥, 해서정맥, 임진북예성남정맥, 한북정맥, 낙동정맥, 한남금북정맥, 한남정맥, 금북정맥, 금남호남정맥, 금남정맥, 호남정맥, 낙남정맥)
위 15개 산줄기들은 우리나라의 큰 강 10개를 구획하는 산줄기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처럼 산경표가 산줄기 분류의 기준으로 삼은 우리나라의 큰 강 10개는 아래와 같다.
- (압록강, 한강, 두만강, 낙동강, 대동강, 금강, 청천강, 임진강, 섬진강, 예성강)
[산경표]식 산줄기 분류는 10대 강을 구획하는 산줄기들을 주요 산줄기로 삼아 각각에 10대 강의 명칭에서 따오는 고유명사로 `정맥`이라는 격을 주어 산줄기 분류의 골격을 완성하였다.
이 경우 겹침 산줄기 부분에 따른 몇 가지 논란거리를 남겼다. 즉, 산줄기는 물줄기를 구획하는 경계가 되는 산자분수령(山自分水領) 원칙에 위배되거나 2개의 정맥 사이에 10대강을 포함하지 않는 문제점 등이 그것이다.
또한, 정맥은 10대 강을 구획하는 것이므로 원칙적으로 주행이 하구를 향해야 하고, 바다 바로 앞에서 끝맺음을 해야 한다. 그러나 [산경표]에는 이러한 원칙이 지켜지지 않은 것들이 있다.
예를들어 금남정맥은 금강 하구로 향하지 않고 금강의 지류인 논산천 북쪽을 감고 돌다가 합수지점에서, 다시 말해 내륙에서 끝난다. 서해로 향하는 정맥의 경우 바다까지 나아가기는 하나 역시 하구를 향하지는 않는다. 이것들은 부분적으로 산줄기의 세력, 생활권, 혹은 상징성을 반영한 절충으로 보인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금남정맥의 끝은 백제의 옛 고도 부여를 향하고, 한남정맥은 한양의 북한산을 향하였으며 낙남정맥의 끝은 가야의 옛 수도 김해를 향하는 식이다.
[박성태선생의 신산경표에서 발췌]
이제 남낙정맥이 끝을 맺는 분산 금관가야, 가야국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자.
김해김씨의 시조 수로왕과 김해허씨의 시조 허황후 사이의 가야국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자.
<가야(加耶)의 정치, 경제>
http://blog.daum.net/gaundekr/15793936
가야(伽倻:加耶, 伽耶)·가라(加羅)·가량(加良)·가락(駕洛)이라고도 한다.
기원 전후 시기에 경상도 해안지역에 철기문화가 보급되면서 여러 정치세력들이 소국 단위로 통합되기 시작했다. 3세기경 상호연맹관계를 형성하게 되면서 변한소국 연맹체가 성립되었다.
전기 가야연맹은 구야국을 중심으로 김해·낙동강 하구·경상남도 해안 일대에 분포했다. 친신라와 친백제 세력이 공존했는데, 5세기 초 고구려가 백제계를 정벌함으로써 고구려의 후원을 받는 신라에 예속되었다.
후기 가야연맹은 구심점이 경상도 내륙지역이었으며 고령지역의 대가야국을 중심으로 보다 진전된 통합력과 정치력을 발휘했다. 신라와 제휴하여 가야연맹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6세기 초 백제에게 패배한 후 급격히 쇠퇴했다. 소국들이 잇따라 신라에 복속되었고 562년 신라에 의한 대가야국 정벌로 멸망했다.
<김수로왕의 탄생설화>
김수로왕의 탄생과 결혼은 대부분 알고 계시는 너무도 유명한 설화입니다.
아홉 명의 부족장이 백성을 다스리고 있던 시절, 경상남도 김해에 있는 '구지봉'에 온 나라 사람들이 모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구지가(龜旨歌)>를 합창했습니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밀지 않으면
구워서 먹을 테다
수백 명이 모여 노래를 하고 춤을 추자 하늘로부터 끈이 내려왔는데, 그 끈에는 붉은 천에 쌓인 황금의 상자가 달려 있었습니다. 상자를 열어 보니 황금알 6개가 담겨 있었습니다.
며칠 후에 그 알에서 귀여운 아기들이 나왔는데 제일 먼저 나온 아이가 수로왕이요, 나머지 다섯 명도 각각 왕이 되었으니 이 분들이 6가야의 시조입니다. 수로왕은 키가 9척이요, 8자 눈썹에, 얼굴은 용과 같이 생겼다고 합니다.
<허황옥의 등장과 혼인>
김수로왕은 현지 9간의 딸과의 결합을 거절하고 외부에서 온 허황옥(許皇玉)과 혼인을 김해 가야 건국 7년(48년 7월27일)에 성사시킨다.
이는 김수로왕이 비공식적인 특사 파견을 통해 결혼 제의를 하여 가야국에 출현할 허황옥과의 은밀히 혼인을 준비하여 추진 한것 같아 보인다. 이는 허황옥이 김수로왕에게 말한 "금년 5월에 부모님의 꿈에 상제가 나타나 당신과의 결혼을 명령했다"는 꿈 이야기에서 잘 알 수 있다.
김수로왕은 신하 유천간에게 신부가 될 왕후가 바다에서 올 것이니 앞바다 망산도에 가서 기다리라고 명하였다. 과연 허황옥 일행을 태운 붉은 돛을 달고 붉은 기를 휘날리는 배가 갑자기 바다 서남쪽에서 북쪽 망산도를 향해 오는 것을 보고 이들을 육지로 잘 맞이하였다.
이는 김수로왕이 허황옥 측에 특사를 보내어 허 황옥이 언제 쯤 가야에 도착할 것인가를 김수로왕이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다.
즉 신하를 사전에 보낸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결혼 전부터 두 집단 간에 은밀한 소통이 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허황옥 등 20여 명 일행은 다시 배를 타고 올라가 별포 나루터에 배를 대고 상륙한다.
수로왕은 신하들을 보내어 배에 탄 사람들을 모셔오게 했습니다. 그러나 배 안에 타고 있던 아름다운 공주는 “나는 너희들을 모르기 때문에 경솔히 따라 갈 수 없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 후 산신령에 대한 제사의식을 벌이더니 입고 있던 비단 바지를 벗어 제단에 바쳤다. 이는 김수로왕과의 결혼을 위한 통과의례로 즉 미혼녀 생활을 청산하는 것으로 보인다.
가야국 건국 이후 6년간의 공백 이후 드디어 왕후 자리가 채워진 것인데 허 황옥은 자신을 아유타(阿踰陁)국의 공주이고 성은 허(許)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16세라고 소개하였다. 여기서 아유타국은 금관가야 고사에 따르면 서역의 허국 혹은 남천축국이라고 나오는데 아마도 수메르나 중앙아시아 지역이거나 인도라는 결론이 나온다.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인 허황옥이라고 합니다.
본국에 있을 때 부모님들께서 꿈에서 상제님을 보았는데 상제께서 ‘가락국왕 수로는 하늘에서 내려보내 왕위에 오르게 했으나,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공주를 보내라’ 라고 하셔서 저를 가락국으로 떠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배를 따고 떠났는데, 수신(水神)이 노해 갈 수 없게 되어 다시 돌아가 석탑을 배에 싣고 무사히 여기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아유타국의 실체>
인도지역에서 아유타(정복할 수 없는 땅)와 발음이 비슷한 야요디아(Ayodhya)란 지명이 북부 우타르프라데시 주에 있다. 아리안족 국가인 코살라왕국의 도시로서 BC 6C까지 번영을 구가하다가 BC 4C 경에 마가다 왕국에게 흡수되었다.
다시 BC 1C 경에 중앙아시아 쿠산족의 침략을 받은 아요디아의 특권층은 외지로 떠나게 된다.
아유타국에서 가야까지 오는데 2~3개월이 걸리므로 허황옥이 5월에 꿈을 꾸고 떠나 7월에 김해에 도착했다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이 유망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유타국의 실체를 알려면 쌍어 문(두 마리 물고기로 된 무늬)의 존재를 파악해야 한다. 경남 김해시 서상동에 소재한 김수로왕릉 앞에 있는 납릉심 문의 현판에는 두 마리 물고기가 서로 마주보는 쌍어문 무늬가 나타난다.
고고학자 김병모의 연구에 따르면 수로왕릉의 쌍어문은 가야와 신라지역 뿐만 아니라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된다고 한다. 그 외에도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몽골의 종교사원, 중국의 경우 사천성과 운남성 및 양자강 주변에서 발견된다고 한다.
이는 한반도 가야지방이 멀리는 중앙아시아 수메르로부터 인도를 거쳐 중국에까지 긴밀한 연관성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양 지역의 연결고리는 허황옥 집단이라고 보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인도의 고대 언어인 가야 혹은 가라라는 발음이 물고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쌍어문은 가야의 국호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김수로왕릉의 왼쪽 왕릉 비석에는 허황옥이 보주태후(普州太后) 허씨릉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앞서 김병모는 보주(충칭의 서쪽 위치)가 중국 사천성 안악현의 옛 이름으로 그곳에 허씨 집성촌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곳 서운향의 우물 앞에 암벽이 있고 거기에 쌍어 문이 그려져 있어 이를 허황옥의 흔적이라고 주장한다.
보주 서운향의 우물의 유래를 설명하는 글에서 후한 초(23년 시작)에 허씨의 딸 황옥이 용모가 아름답고 지혜가 남들보다 나았다는 표현이 나온다. 그래서 허황옥이 보주에 살았다는 확실한 증거라고 보았다.
그런데 후한서 광무제 본기를 보면 47년 보주를 포함한 사천 지역에서 중앙정부에 대항하는 소수민족의 민란이 일어났다. 이들이 강제로 진압된 뒤에 호북성 무한(武漢) 시로 이주 당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허황옥 집단도 포함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런 후 양자강을 따라 바다로 나와 건너서 김해까지 온 것으로 추정하는데 이 같은 경로마다 앞서 지적한 쌍어 문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위의 과정을 총체적으로 살펴보면 허황옥 조상은 멀리 중앙아시아 수메르에서 출발하여 인도 아유타에 거주하게 된다. 다시 거기를 떠나 중국 보주 및 무한을 거쳐 양자강을 따라 상해부근에 온 후에 바다를 건너 한반도 동남부 김해지역으로 진입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여기서 김수로왕의 세력과 허황옥 집단은 어떤 관계로 알게 되어 은밀한 혼인을 하게 되었는지 추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앞서 김수로왕의 세력은 후한에 의해서 멸망당한 신(新)나라 황실의 일족으로 보인다.
신나라가 망한 뒤에도 군사력을 유지하여 후한에 대한 반체제 세력 활동도 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허황옥 집단 역시 이동 경로로 보았을 때 후한에 대한 반체제 세력으로 추정되어 두 집단은 가야 건국 이전부터 상호 연대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김수로왕 세력이 한반도 가야로 온 후에 지역적으로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상호 긴밀한 연락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런고로 김수로왕과 허황옥의 결합은 후한 체제에 대항했던 반체제 집단의 상호결합이라는 상징적 성격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유궁터 - 김수로왕과 허공주 첫날밤 보낸 임시궁전>
‘소녀는 인도 아유타국에서 온 공주 허황옥이옵니다.’
가락국 시조대왕 김수로왕을 만나기 위해 2만5천리가 넘는 바닷길을 건너 가야땅에 도착한 허공주는 기다리고 있던 수로왕에게 다가가 다소곳이 고개 숙여 인사를 올렸다.
2,000여 년 전, 수로왕과 인도 공주의 사랑이 이루어진 김해시 장유3동 응달리 태정산 기슭. 허공주는 지금의 응달리 태정마을 어귀 유궁(惟宮 : 휘장을 친 임시 궁전)에 도착해 하늘이 정해준 배필 수로왕과 혼례를 치루고 이틀 밤을 함께 보낸 뒤 가락궁성으로 돌아갔다. 이 때가 서기 48년 8월 초하루이다.
유궁터 전경
신방꾸민 유궁터
수로왕과 허공주가 처음 만나 사랑을 이루었다는 로맨스의 현장은 어디일까. 가야국 어느 왕의 태(胎)를 묻었다는 봉긋한 태봉 아래 당산나무가 늘어선 태정마을 언덕에는 억새와 잡초, 돌무더기만 뒤엉켜 있을 뿐 여기가 수로왕과 인도 공주의 국제결혼 현장이라는 옛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하늘의 계시에 따른 운명적인 만남인 이 국제결혼은 설화에 비춰진 현장들이 숱한 세월 속에 묻혀 현실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500년이 넘은 보호수를 비롯하여, 큰 느티나무가 듬성듬성 늘어서 있는 마을 옆 언덕이 바로 2,000여년의 역사를 지키고 있는 유궁터다.
500년이 넘은 느티나무 네 그루가 유궁터를 지키고 있다
지금은 각종 운동기구와 정자까지 세워져 마을의 작은 공원역할을 하고 있는 유궁터는 지난 2005년 경남문화연구원이 세운 안내판만이 그 옛날 수로왕과 허 공주의 국제결혼 현장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을 뿐이다.
유궁터에는 고목 형태의 당산나무가 있다. 당산나무는 마을 지킴이로서 신이 깃들어 있다고 여겨 모셔지는 신격화된 나무다. 이곳 태정마을의 옛사람들은 수로왕과 인도 허 공주가 첫날밤을 보낸 역사적인 현장에 당산나무인 느티나무를 심어 마을의 안녕을 바라지 않았을까.
<수로왕과의 사이에 열두 명의 자녀>
허 공주는 가락국 건국 7년째인 서기 48년 열여섯 살 때 한국으로 시집와 수로왕과의 사이에 열 명의 왕자와 두 명의 공주 등 열두 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들 가운데 장남은 가락국 2대 왕인 거등왕이 되었고 일곱 명의 왕자는 하동 칠불사에서 오랜 수도 끝에 부처가 되었다.
나머지 두 명의 왕자 가운데 거칠군(居漆君)은 왕성의 외곽 진례성(進禮城)의 성주가 되었고, 선견(仙見) 왕자는 묘견(妙見) 공주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으로 간 묘견 공주는 후일 히미코(卑彌呼)라는 이름으로 야마대국(邪馬臺國)의 여왕이 되었다. 이때 선견왕자는 히미코 여왕을 도와 나라를 다스렸다고 한다. 나머지 공주 한명은 신라 4대 석탈해왕(昔脫解王)의 며느리가 되었다.
허공주는 이 땅에 시집와서 141년을 산 뒤 수로왕 보다 10년 앞선 서기 189년 1백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허왕후는 김해허씨의 시조가 됐다.
<허공주 별포진에 배를 대고 가야에 첫발>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따르면 서기 48년 5월에 인도를 출발한 허공주는 7월 27일 가야에 도착해 지금의 진해 용원 앞바다에 있는 망산도를 지나 별포진(別浦津)에 배를 대고 가야에 첫발을 내딛었다고 한다.
이어 허 공주는 높은 언덕에 올라 잠시 쉬었다가 명월산의 능현(綾峴)에서 자기가 입고 왔던 비단바지를 벗어 산신령에게 폐백을 드렸다. 수로왕은 폐백을 마친 공주와 일행이 쉴 수 있도록 명월산에 만전(慢殿:임시장막)을 설치했다. 수로왕은 훗날 허공주가 쉬면서 하루를 묵은 이곳에 명월사(明月寺)를 세웠다고 한다.
허공주는 이튿날 장유치 고개를 넘어 수로왕이 기다리고 있는 행재소(行在所:왕이 일시 주재하는 행궁)로 다가가자 왕은 친히 공주를 맞이하여 함께 유궁에 들어갔다. 수로왕과 허공주는 마침내 합환(合歡)의 기쁨을 이루어 이틀 밤을 함께 보내고 8월 초하루 궁궐로 돌아갔다. 이것이 허공주의 신행길 과정이다.
가락국의 백성들은 후일 허공주가 이 땅에 첫발을 내디딘 것을 기념하여 처음 배를 댔던 별포진을 주포촌(主浦村)이라 하고 비단바지를 벗었던 고개를 비단고개(綾峴), 붉은 기(旗)가 들어왔던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 하였다.
유궁터에서 바라본 장유치 고개
<허공주가 갖고 온 혼수품>
허공주가 인도 아유타국에서 시집올 때 가지고 온 함(函) 속에는 어떤 혼수품이 들어 있었을까. 왕과 공주의 국제결혼이라 어마어마한 혼수품이 오갔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의외로 소박하고 단출했다.
비단옷과 금, 은, 그리고 주옥으로 만든 장신구 등 허 공주의 신변용품이 고작 이었다. 그러나 혼수품 중에는 특이하게도 옥합(玉盒)에 차(茶)의 씨앗도 들어있었다. 이것은 가야시대에 차의 전래를 유추할 수 있는 것으로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나타난 기록이다. 따라서 가야문화는 차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가야차는 구한말의 국학자 이능화(李能和)의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에도 인도차의 전래에 대해 다음과 말하고 있다.
「김해의 백월산에는 죽로차가 있다. 세상에서는 수로왕후인 허씨가 인도에서 가져온 차씨라고 전한다」(金海白月山有竹露茶 世傳首露王妃許氏 自印度持來之茶種)
이것이 사실이라면 삼국사기에 기록된 신라 흥덕왕 3년(서기 828)의 최초 우리나라 차 전래설보다 780년이나 앞선 것이다. 그렇다면 가락국의 왕도(王都)였던 김해에서 발견되고 있는 야생차나무는 지리산 차나무보다도 오래된 2,000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 최초가 된다.
백월산(453m)은 김해에서 그리 멀지않은 창원시 의창구 북면에 있는 산이다. 백월산에는 10여 년 전부터 경남문화연구원 회원들이 가야차 시배지 복원을 위해 해마다 산자락 곳곳에 차씨와 차나무를 심고 있다. 화양고개에서 백월산정 사이 등산로 곳곳에는 차나무가 제법 형태를 갖춰 가며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마시고 있는 차(茶)는 허공주가 인도에서 가락국 수로왕에게 시집올 때 혼수품으로 가지고 온 차씨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경남문화연구원이 세운 유궁터 안내판
<등대역할 한 망산도>
인도 아유타국 허공주의 배가 무사히 도착하도록 횃불을 올려 등대역할을 한 망산도(望山島). 망산도는 지금 창원시 진해구 웅동2동 용원마을 앞에 있는 작은 바위섬이라고 전해져 온다.
옛날에는 망산도가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 가운데에 있었으나 지금은 간척사업과 녹산공단, 신항만 조성으로 육지와 거의 맞닿아 있다. 소재지도 지난 2007년 행정구역 조정으로 경남에서 부산광역시 강서구 송정동 산188번지로 바뀌었다.
안내판 내용
용원마을 앞 바위섬인 망산도는 바위가 모두 거북등처럼 갈라진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다. 백일홍과 잡목으로 우거진 이 바위섬은 썰물 때는 물이 빠져 뭍과 연결되며 밀물 때는 바닷물에 둘러싸인다. 특이한 것은 망산도의 바위들은 모두 거북등처럼 갈라져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의 현장 망산도는 지금 시궁창이나 다름없다. 바다매립으로 풍치를 잃은 데다 온갖 쓰레기를 뒤집어쓴 채 매몰되어 있는 느낌이다. 그나마 간척사업 때 매몰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할 판이다.
<허공주의 신행길>
허공주가 가야땅에 도착해 수로왕이 기다리고 있던 유궁까지 1박 2일간의 신행길은 어떠했을까. 기록에 따라 지금의 지도와 대조해 보면 망산도를 지나 처음 배를 댔던 별포진이라는 옛 이름을 가진 가주마을에서 명월산에 만전을 설치했던 장소라는 흥국사, 그리고 장유치 고개를 넘어 유궁까지 하나의 선을 그어보면 대충 신행길이 나온다.
유궁터 입구의 동백꽃이 겨울 탐방객을 맞이한다
허 공주가 명월산 만전에서 하루를 묵었다는 장소에는 광복 후 흥국사라는 절이 들어섰다. 법당에는 인도 특유의 사왕(蛇王)인 무칠린다를 나타낸 불탑조각이 남아 있고 절 마당에는 수로왕이 왕후를 맞이한 곳이라는 ‘가락국태조왕영후유허비(駕洛國太祖王迎后遺墟碑)’가 서 있어 그 당시의 전설을 가늠할 뿐이다.
- 네이버에서 짜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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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잼나게 읽었습니다.ㅎ
감사합니다. 저희 대원중에 김해김씨도 있었지만 관향인 김해를 처음 방문해본다는 분도 계셨습니다.
저는 문화류씨입니다만 황해도 구월산 아래 문화현 시조할아버지 묘를 방문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요.
대신 충경공파 파시조어른이신 12세손 류자 량자 파시조할아버지가 남양주 덕소 시우리에 모셔져 그곳에서 매년 시향을 올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