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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지 : 전라남도 고흥군의 고흥지맥 마루금 일대
산행날자 : 2017년 12월 01일 (금요일 당일 산행)
산행날씨 : 중부지방에 한파주의보가 발령된 올 들어 가장 추웠던 산행날씨
산행온도 : 영하 04도에서 영상 07도
산행인원 : 칠갑산 나 홀로
산행코스 : 당재(855번 2차선 포장도로)-214 전망바위-230.4봉-일복레미콘 채석장-232 간벌지대-널부러진 간벌목지대-295 전망바위-306 전망바위-옥녀봉과 신선봉 갈림삼거리(321.7봉)-296 바위우회등로-
386.5 삼각점봉-307 무명봉-전망바위-봉남재(비포장임도)-338.1봉-무명안부-375 무명봉-377 무명봉-335 바위봉-전망바위-324 전망바위-384 전망바위-408봉-378 무명 참나무봉-바위너덜길-
바위암봉 전망-운암산(484.3봉, 삼각점) 이정표(병풍바위 1.5 Km)-369.6봉-정상능선삼거리 이정판(임도 1.5 Km, 정상 0.5 Km)-운암산정상 1.4 Km 이정판-병풍바위 이정표와 벤취쉼터1-병풍바위 간식-
중섯재삼거리(비포장임도, 운동기구와 사각정자) 이정표(수도암, 송산, 산림욕장 2.5 Km, 중흥 3.7 Km)-운암산 1.1 이정목-운암산 1.2 이정목-산림욕장 이정표(산림욕장정상 0.3 Km, 중섯재 1.5 Km)-
239 무명봉(사각탁자와 벤취 쉼터들, 여유있는 걸음걸이와 치유가 시작되는 곳 이정판)-이정표(원형돌탐 시작점 1.3 Km와 사진찍기 좋은 곳 50m, 고흥문화회관 1.9 Km)와 벤취쉼터2-전망바위-
길주의(갈림삼거리에서 우측 잡목 방향)-무명묘지1-182봉-176 무명봉-무명묘지1-길주의(이전된묘지 위 소나무 묘목있는 곳에서 우측)-운곡재(2차선 포장도로)-146 무명봉-편백나무 군락지-143.3봉-
소나무 등로-무명묘지1-126 무명봉(널부러진 간벌목)-송곡재(송곡육교, 2차선 포장도로 갈림삼거리, 15번 4차선 포장도로 통과, 민주인사추모비와 사각정자, 이동통신탑)-비포장 임도-철계단-
밀양박씨묘지-감나무 과수원-비포장임도와 밭 경작지-무명묘지들-126 간벌 후 편백나무 조림지-162.7봉-널부러진 간벌목지대-주월산 갈림삼거리(비포장 임도)-이정표(행정리 2.01 Km, 옥상마을 1.19 Km,
송곡마을 0.81 Km)-시멘트 포장도로 이정표(주월산정상 291m, 옥상마을 1.2 Km, 송곡마을 1.0 Km)-시멘트 계단-이동통신탑 SK 고흥기지국-주월산정상(291미터, 삼각점, 산불감시초소와 돌탑들)-주월산
갈림삼거리 복귀-행정리 갈림삼거리 이정표(주월산정상 0.57 Km, 행정리 1.55 Km)-218 무명봉-대곡재(222봉, 벙커)-군 훈련시설물(적은 항상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218 무명봉(캐비넷과 녹슨 철조망)-
바위암릉-229.9봉-광산김씨 묘지2-수덕재(2차선 포장도로 갈림삼거리)-폐가와 밭 경작지-151.4봉-한양조공 묘지들-187 무명봉-준.희님 응원판-동백나무 숲-270.8봉-바위암릉길-수덕산(300.9미터)-
성터흔적-일몰-이정표(고흥읍 0.3 Km, 수덕산정상 0.4 Km)-화적재(운곡사와 수돗물, 2차선 포장도로)-밭경작지-송전탑-시멘트 포장도로-능선진입-무명묘지1-간벌된 편백나무 군락지-무명묘지2-
191.7봉-228 바위봉-시멘트 포장도로-221 무명봉-228.4봉-비포장임도-바위너덜지대-비포장임도-경고판-오무산(356.4미터, 삼각점)-비포장임도-무명묘지1-자갈너덜길-송전탑-비포장임도-
녹슨 철조망 등로-시멘트 포장도로-비포장임도-127.3봉-무명묘지1-110 고사목봉-은성산업 태양광 녹색철조망-무명묘지들-시멘트 포장도로-먹국재(77번 2차선 포장도로와 27번 4차선 포장도로)-산행종료
산행거리 : 약 23.80 Km (스마트 폰의 GPX 기준)
산행시간 : 지독한 잡목과 가시나무 등로를 따라 사라진 마루금을 찾으며 온 몸에 생채기를 내고 진행하여 13간 28분 (07시 25분부터 20시 53분까지)
산행트랙 : 20171201 고흥지맥제3구간 당재-먹국재.gpx
교통편 : 대중교통과 택시 이용
갈때-서울 센트럴시티 호남선에서 11월 30일 밤 11시 50분 발 순천행 심야우등 고속버스로 순천까지 이동 (33,100.-원)
순천종합버스터미널에서 새벽 5시 50분 발 녹동행 버스로 과역버스터미널까지 이동 (5,100.-원)
과역버스터미널에서 점암면 택시로 당재까지 이동 (8,000.-) - 과역택시는 아침에 거의 탈 수 없으니 점암면 택시 이용 권장
올때-먹국재 SK LPG가스 주유소에서 고흥택시로 명동찜질방까지 이동(2,000.-원/회차 택시 이용)
숙박-고흥읍 명동찜질방에서 숙박(10,000.-원/담요추가)
고흥지맥이란 ???
고흥지맥은 호남정맥의 존재산(712봉) 남쪽 2 Km에 있는 적지봉(571봉)에서 분기하여 남동진하며 태봉(325.2봉), 가마봉(258봉), 장군봉(412.7봉), 삼봉(107.3봉), 혼백산(183봉), 천봉산(193.1봉), 소대방산(165봉), 운암산(484.2봉), 반월산(291.0봉), 수덕산(301봉), 오무산(356.3봉), 벼락산(431봉), 천등산(553.5봉), 우마장산(342.8봉), 유주산(416.6봉) 등을 일구고 지죽대교 앞 고흥반도 남단 남해바다에서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약90.9 Km 되는 산줄기로 말한다.
고흥반도를 남북으로 온전하게 종단하는 특수성을 고려하여 산이름이 아닌 지역이름을 따 고흥지맥이라 칭한다.
아름답고 멋진 남해바다를 조망하며 즐겼지만 지독한 잡목과 가시넝쿨로 인해 온 몸이 난도질 당하며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던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지도와 산행후기를 참고한 후 난해하고 어려운 마루금 잇기 산행을 무탈하게 완주하고 돌아왔기에 단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이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마루금에 충실하게 걷고 그 걸었던 산행 흔적을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정리한다.
이번주에는 원래 강원도 산친구들과 함께 영월지맥 마지막 구간을 다녀오기로 하였는데 겨울 문턱에 서니 모두들 바쁜일들이 생겨 또 다시 2주가 연기되어 12월 셋째주에나 가능하게 되었기에 영월지맥 마무리도 참으로 어렵게 진행되고 있다.
갑자기 이틀간의 여유가 생겨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 지난 해 초 두 구간을 마무리하고 남겨 뒀던 고흥지맥을 마무리하기로 하니 내려가고 올라오는 교통편이 걱정되는 거리인데 더욱이 내려가 이틀간 산행을 끝마치고 올라오려고 계획하니 배낭의 무게와 부피가 커져 고민만 앞서는 시간이다.
금요일 하루 시간을 빼 목요일 밤 11시 50분 순천행 버스를 이용해 다녀 오기로 하고 대중교통 편과 숙박 그리고 등로 등을 확인하다 보니 과연 이틀간 남아 있는 구간을 무탈하게 완주 후 올라 올 수나 있을지 걱정과 고민이 커져만 가지만 일단 내려가 부딪쳐 보고 도저히 마무리하기가 어려울 것 같으면 문수지맥처럼 짧은 거리를 남겨 두고 올라 와 다음에 여행 겸 산행을 겸해 다시 한번 더 내려가기로 하고 출발을 해 본다.
평일이라 많이 비어있는 고속버스를 타고 순천에 도착하니 새벽 3시 30여분이 지나가고 잠시 순천공용버스터미널 내 온풍기를 켜고 추위를 이기며 기다렸다 새벽 5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에 터미널 근처 김밥집에서 떡 라면 한그릇으로 아침을 해결한 후 5시 50분 발 녹동행 버스로 과역버스터미널에 도착을 하니 6시 30여분을 지나고 있다.
하지만 어제 저녁에 예약한 택시 기사와 또 다른 택시 두곳으로 전화를 해 보지만 연락이 되지 않아 40여분을 기다린 끝에 어렵게 손님을 태우고 이곳 과역버스터미널로 들어 온 점암면택시를 잡아 산행 들머리인 당재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처음부터 점암면 택시를 불러 갔으면 40여분을 소비하지 않고 조금 이른 시간에 산행을 시작할 수 있었는데 아쉬움이 남는 과연택시였다.
이번 구간이 잡목과 가시넝쿨로 인해 어려운 고흥지맥 산행중에서도 가장 힘들다는 구간이기에 시간 계산을 잘했는데 예기치 못한 택시에 발목이 잡혀 오늘 하루 산행이 걱정과 고민을 앞세워 시작하는 아쉬운 시간이었다.
택시 문제로 예상보다 약 40여분 늦게 산행을 출발하다 보니 괜시리 마음만 바쁜데 산행을 시작하자마자 눈 앞에 펼쳐진 거대한 일복레미콘 공장의 채석장 때문에 한바탕 곤욕을 치루고 난 이후에나 제대로 된 산행을 시작해 보지만 역시나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 잡목과 가시덩쿨로 인해 산행 속도는 전혀 나질 않고 온 몸에 강렬한 생채기만 늘어나며 적은 땀방울에도 따가운 고통이 밀려 와 진행에 상당한 어려움을 느낀다.
그래도 꾸준하게 걸어 408봉을 넘고 바위직벽을 올라 운암산 가기 전 전망바위에서 지나온 마루금과 앞으로 걸어 진행을 해야 할 등로를 확인해 보니 환상의 풍경과 조망이 그나마 잠시 웃을을 선사해 주고 있다.
좌측 보이지 않는 운암산을 내려가면 바로 앞으로 보이는 능선을 타고 우측으로 크게 돌아 고흥읍을 좌측에 두고 빙 돌아 저 뒤 높아 보이는 조계산 우측을 통해 제일 뒷쪽의 드높은 천등산으로 이어지는 고흥지맥 마루금이 환상을 보래하며 이 산객을 부르고 있다.
오늘은 보이지 않는 우측 먹국재에서 마무리하고 저 높은 조계산 갈림삼거리와 천등산은 내일 올라야 할 곳이기에 가슴속 깊이 그 풍경 모두를 소중하게 담아 보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너무나 힘들게 진행을 하다보니 시간당 채 2 Km의 속도도 나질 않아 걱정만 앞서는 순간이다.
그래도 한발 두발 꾸준하게 걸어 진행을 해 드디어 바위암릉이 연속으로 이어지는 수덕산 전위봉에 도착을 하니 등로 우측으로 드넓은 평야지대를 지나 득량도가 있는 득량만이 아름답게 내려다 보이고 그 넘어 저 멀리 장흥쪽 사자지맥 산줄기와 그 아래 억새와 기암괴석으로 유명한 천관산 자락 옆으로 짧았던 오늘 하루 해가 서서히 저물어 가기 시작한다.
산행을 하면서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만났던 기억이 너무나 오래되어 가물거리는데 오늘 다시 그 잊고 살았던 기억을 되살리는 일몰에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한동안 찬바람이 불어 오는 바위암봉 정상에서 움직이지도 못한 채 아름다운 해넘이를 바라보는 마음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고 있다.
언젠가는 올라야 할 사자지맥 산줄기이기에 해가 넘어가는 부분도 잘 기억을 해보려 노력해 보지만 막상 그곳에 올라 오늘의 기억을 찾아 낼 수 있을지 확신은 할 수 없지만 그런 추억 하나 더 만들고 있음에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다시 바쁜 발걸음을 옮겨 본다.
아침부터 택시로 인해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무탈하게 산행 들머리인 당재에 도착을 하니 마음이 놓이면서도 늦은 출발로 인해 바쁜 시간이기도 하였다.
이곳 당재는 2015년 12월 30일날 다녀갔으니 거의 2년이 다 되어 찾게 되었지만 그때 모습 그대로 남아 있어 반갑기 그지 없다.
하지만 오늘이 평일인 금요일이다 보니 남쪽으로 일복레미콘과 채석장에서는 새벽 일찍부터 작업을 하고 있는지 기계음이 요란하게 들려오고 있다.
당재는 고흥군 점암면 모룡리에서 천학리로 연결되는 855번 지방도가 지나는 곳으로 고개 좌측 천학리 방향에는 엄청나게 큰 채석장이 있고 우측에는 주유소가 있다.
모룡리는 전라남도 고흥군 점암면에 있는 마을로서 지시곡들, 앞들, 성기들 등이 넓게 펼쳐진 농촌지역으로 자연마을로는 상촌, 용산, 회계, 모동이 있다.
용산마을은 마을 뒤에 용산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고 회계마을은 마을 입구에 바위로 만든 다리가 있어 바구다리라고 부르던 것을 시냇가의 맑은 물이 마을을 곱게 둘러싸고 흐른다는 뜻의 회계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천학리는 전라남도 고흥군 점암면에 위치한 마을로서 팔영산 밑에 자리잡은 농촌마을이며 자연마을로는 구천, 가학이 있는데 구천마을은 마을 서쪽에 거북이 형의 샘이 많아 항상 맑은 물이 흐르고 있어 구천 또는 귀천이라 하였으며 일제시대 귀천을 한자로 표기하기 어려워 간편하게 구천으로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가학마을은 옛날 풍수가 이 마을을 지나면서 뒷산의 지형이 학과 같다 하였으며 마을 양쪽 산이 학이 멍애를 메고 나르는 형태라 하여 그때부터 마을 이름을 가학이라 칭하였으며 구천마을에는 일제시대에 한 해가 들면 면민들이 기우제를 지냈다는 매봉이 있다.
이곳 당재에서 일복레미콘 방향을 바라보며 도로 우측으로 보이는 높은 콘크리트 옹벽을 타고 오르며 오늘 하루도 무탈하게 계획된 산행을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며 마음으로 빌어보며 긴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이 아침 7시 25분을 넘기고 있다.
2년전 당재로 내려오며 널부러진 간벌목들로 인해 너무나 고생을 했던 기억이 나 살펴보니 지나 온 구간이라 그런지 평범하게 다가와 홀로 피식 웃어보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콘크리트 옹벽을 오르니 초반부터 가파른 된비알 오르막 등로에 낙엽이 두껍게 깔려 있어 두발자국 오르면 한발자국 미끄러지기 일쑤인 어려운 오르막을 힘들게 치고 오르니 거대한 바위벽이 앞을 가로막아 옆으로 우회하며 올라 뒤돌아 보니 몇번의 추억을 남겼던 고흥의 팔영산 자락으로 아침 햇살이 솟아오르고 있지만 드꺼운 구름으로 인해 산고의 고통을 느끼고 있다.
지난 구간 고흥지맥 제2구간 산행을 하면서도 계속 바라보며 걸었던 팔영산인데 오늘도 저 팔영산을 기준점으로 주위 풍경과 조망을 살펴보며 그 이름들을 불러보게 될 것이다.
지맥 산행이 마무리되면 여유를 가지고 다시 찾아 보게 될 팔영산이기에 그 그리움만 가슴속에 묻어 두고 다시 가파른 오르막 등로를 타고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잠시 더 걸어 오르니 참나무 가지 사이로 아침 일출이 시작되고 사진 몇장 남기고 다시 오르니 누군가 전망바위 위에 나즈막한 돌탑 하나를 쌓아 놨기에 조심하며 작은 돌 하나를 더 올리며 무탈한 산행을 빌어 본다.
그 전망바위를 지나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 점암면 마을이 그림처럼 내려다 보이는데 그 좌측으로 옥녀봉과 신선봉을 찾아 보지만 소나무 가지에 막혀 산들은 보이지 않는다.
점암면은 전라남도 고흥군의 중앙부 동쪽에 위치한 면으로 북서쪽은 일부가 득량만과 연결되어 있고 동쪽에는 순천만이 있으며 면 전체에 관개를 위한 소규모 저수지가 많이 분포하는데, 북서쪽의 점암저수지의 규모가 크다.
호구총수의 동리를 살펴볼 때 조선 시대에도 점암면에 해당하는 지역이었고 여지도서에 의하면 민호 790호와 남자 2,213명 그리고 여자 2,299명이었다. 지명은 바위가 산재하는 지리적 환경에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있다.
현재 면 소재지인 천학리를 비롯하여 11개 법정리를 관할하고 있으며 이들 중에서 여호리는 여도에서 유래하였는데 호구총수, 구한국행정구역일람에는 여도리로 조선지지자료에는 여도포가 기록되어 있다.
여호리는 1914년에 생겨났는데 이곳에는 수군만호가 거주하였던 여도진이 있었다.
1872년지방지도에 의하면 그 여도진성은 성곽을 둘렀는데 남쪽과 서쪽에 문루가 있고 여도진성은 1491년(성종 22)에 축성되었으며 진성의 둘레는 1,100자이다.
성안에는 네 개의 공공시설이 그려져 있는데 이름은 기재되어 있지 않았고 청구도에는 병사 1,200명, 곡물 2,100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점암면 마을 뒷쪽으로는 2년 전 힘들게 걸어 진행을 했던 고흥지맥 제2구간의 산줄기가 병풍처럼 점암면을 빙 둘러 싸고 있는 듯 이어져 있다.
이제 주능선을 따라 좌측으로 걸어가니 등로 좌측으로 일복레미콘 공장의 기계음이 굉음을 울리며 들려오고 그곳을 살펴보니 잠시 후 올라야 할 거대한 절개지가 계단식 논을 연상시키며 올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저 절개지 우측 능선을 타고 올라 가운데 제일 높은 봉에서 우측으로 돌아가는 등로를 버리고 좌측 보이지 않는 산줄기를 타고 남쪽으로 진행을 해야 할 마루금이 가깝게 보이지만 그곳으로 진행하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많은 땀방울과 노력이 필요한지 걱정만 한가득이다.
잠시 후 부처손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바위암봉을 지나 잡목 등로를 따르니 국토지리원 지도에 표기된 230.4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겨 본다.
그곳에서 등로 좌측을 살펴보니 가파른 절개지 아래 천길 낭떨어지가 펼쳐져 있고 그 아래 보이는 자동차가 성냥갑처럼 작게 보이는 모습에 직접 내려가는 것이 불가능 할 것 같아 우측 능선을 타고 길게 우회하기로 한 후 정상 등로를 벗어나 좌측이 아닌 직진의 등로를 따라 걸어 내려가 본다.
하지만 너무 길게 돌아 가기에 채석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포크레인 두대의 기사와 약간의 마찰을 각오하고 좌측으로 돌아 채석장 절개지에 설치된 그물망을 타고 조심하며 걸어 내려가니 포크레인 기사가 놀랐다는 표정으로 어떻게 어디에서 왔는지 물어 온다.
등산을 하다 길을 잃어 잘못 채석장으로 내려왔다며 절개지 우측 능선을 타고 올라갈 수 있느냐며 물어보니 약간은 역정을 내며 우측으로 나 있는 넓은 비포장 임도를 타고 우측 능선을 돌아 오르면 쉽게 오를 수 있을 것 같다며 알려주는데 아마도 이 산객처럼 이곳으로 들어 온 등산객들을 많이 만나 본 듯 보였다.
더 이상 실랑이를 할 수 없어 알았다며 인사하고 우측 비포장 임도를 타고 걸어가니 좌측으로 절개지 우측 능선이 보이고 그곳으로 오르는데 방금 전 만났던 포크레인 기사는 능선으로 가려 보이지 않아 큰 마찰 없이 무탈하게 그 절개지 우측 능선을 타고 주능선으로 올라 본다.
잠시 오르다 등로 좌측 아래를 살펴보니 거대한 설비들이 굉음을 내며 돌아가고 방금 전 포크레인이 파 낸 돌들을 갈아 레미콘을 만들기 바쁜 삶의 현장이었다.
산 하나가 통째로 날아가는 것은 안타깝고 아쉽지만 먹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이기에 어쩔 수 없어 이해는 되지만 사용 후 잘 복구해 자연 그대로의 모습에 가깝게 복원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잠시 더 오르다 등로 좌측을 살펴보니 방금 전 어렵게 통과한 채석장 절개지가 보이고 그 건너편으로 이곳과 동일한 계단식 농지와 비슷한 모습의 절개지가 이 산객의 작은 모습을 압도하고 있다.
잠시 후 최근에 간벌된 듯한 나무들이 널부러진 등로를 만나 어렵게 진행을 하니 생각보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불어 와 두 볼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참으로 어렵게 그 널부러진 간벌목 지대를 지나니 등로 좌측으로 천학리 마을이 그림처럼 내려다 보이고 그 우측으로 산매산이 올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그 넘어 저 멀리 해창만 넘어 마복산이 우뚝 솟아 있는데 오래 전 팔영산 산행을 하면서 언제 시간 내 한번 오르고 싶다고 생각했던 산이기도 하다.
그렇게 멋진 조망과 풍경을 살펴보며 진행을 하니 등로는 여전히 간벌된 벌목들이 널부러져 있어 산행을 하는 입장에서는 차라리 간벌이 되지 않은 일반 잡목 등로가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는 시간이다.
산행 초반부터 채석장과 간벌된 나무들로 인해 오늘 산행이 쉽지 않음을 직감하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그렇게 잠시 더 걸어 진행을 하니 295 전망바위가 나타나고 그곳으로 올라 뒤돌아 보니 방금 전 너무나 힘들게 넘어 온 일복레미콘과 채석장 그리고 그 앞뒤로 이어진 고흥지맥 마루금이 시원하게 조망되고 그 우측 저 멀리에는 여전히 아름다운 고흥의 팔영산이 조금씩 멀어지는 아쉬움을 인사로 대신하고 있다.
잠시 쉬면서 흐르는 땀방울을 닦고 지나온 방향을 살펴보니 당재에서 가파르게 올라 온 등로가 보이고 그 등로를 따라 주능선에 도착 후 일복 채석방 방향으로 이어지는 고흥지맥 마루금이 확실하게 드러나 있다.
저 능선에서 절개지 방향이 아닌 좌측 능선을 타고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다 뒤돌아 올라 가 바로 앞으로 보이는 절개지 좌측 하단부를 통해 내려 온 산줄기와 채석장을 지나 솟아 오른 232봉 간벌목들이 널부러져 있던 능선도 아름답게 다가 와 있다.
남동쪽으로는 지나 온 고흥지맥의 나즈막한 산줄기 넘어 저 멀리 오늘 아침에 두꺼운 구름을 뚫고 환한 햇살이 떠 올랐던 고흥 팔영산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팔영산은 2009년 5월 초에 옆지기와 전라남도를 여행 중 잠시 들려 올랐는데 가랑비가 내리다 그치며 환상의 운무가 흘러 다녔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는 곳으로 그 때 옆지기는 산행 대신 능가사에서 쑥을 뜯으며 또 다른 추억을 남겼던 곳이기도 하다.
팔영산은 전라남도 고흥군 점암면에 있는 산이며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높이는 608미터에 총 면적은 9.881 Km2로서 1998년 7월 30일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고흥군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중앙의 성주봉을 비롯해 유영봉, 팔응봉, 월출봉, 천주봉 등 8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어 산세가 험하고 기암 괴석이 많은 산이며 정상에 오르면 멀리 대마도까지 볼 수 있고 눈앞에 펼쳐지는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의 절경이 일품이다.
팔영산의 본디 이름은 팔전산이었다가 중국 위왕의 세숫물에 8개의 봉우리가 비쳐 그 산세를 중국에까지 떨쳤다는 전설이 전해지면서부터 팔영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예전에 화엄사, 송광사, 대흥사와 함께 호남 4대 사찰로 꼽히던 능가사를 비롯하여 경관이 빼어난 신선대와 강산폭포 등 명소가 많으며 남동쪽 능선 계곡에 팔영산자연휴양림이 잘 조성되어 있다.
북서쪽 기슭에 있는 능가사는 1천 5백여 년 전 아도가 세워 처음엔 보현사라 했던 것을 정현이 인도의 명산을 능가한다하여 능가사라 이름을 바꿨다고 하는데 능가사에는 13세기 말에 조각했다는 사천왕상과 범종(전남유형문화재 69 그리고 능가사적비(전남유형문화재 70)가 있다.
능가사 주변에는 용의 눈이 아홉개 들어 있다는 구룡정이 있으며 팔영산 가까이에 용바위, 남열해수욕장, 유청신피난굴, 여호 바다 및 강산호 낚시터 등이 있다.
언제 다시 한번 더 오르고 싶은 팔영산이지만 그 때에는 마복산과 함께 오를 수 있기를 바래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멋진 조망을 즐기고 천천히 진행을 하니 작은 바위 하나와 잡목들이 무성한 306 무명봉에 도착을 해 거친 숨을 내쉬어 본다.
지나온 방향의 마루금과 그 마루금 옆으로 내려다 보이는 점암면 마을을 살펴보고 이제는 진행 방향을 살펴보니 321.7봉과 좌측 저 멀리 386.5 삼각점봉으로 이어지는 고흥지맥 마루금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그 뒤 저 멀리 운암산이라 생각되는 산봉우리가 얼굴을 내밀며 조심해 오라고 말을 해 주는 듯 다가 와 있어 인사 한번 나누고 걸어 진행을 한다.
지나 온 방향과 진행해야 할 방향 그리고 팔영산을 살펴보고 다시 천천히 진행을 하니 눈 앞에 거대한 바위 암릉이 펼쳐져 있는데 뾰족하게 갈라져 있는 바위들이라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울퉁불퉁 발 끝에 전해지는 불안감을 지우며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다시 잡목이 우거진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오르니 키 작은 소나무 몇그루가 보이는 321.7봉에 도착을 하는데 이곳은 우측으로 신선봉과 옥녀봉으로 갈 수 있는 갈림삼거리이다.
이곳 역시 주위 조망이 좋아 잠시 더 멋진 풍경을 둘러 본 후 진행 방향으로 솟아 있는 봉우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겨 본다.
다시 바위가 덮혀있는 등로를 타고 걸어 내려가니 그 바위 위에는 바위손들이 빼곡하게 보이는데 한여름에는 이 바위손들로 장관을 이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걸어 진행을 해 본다.
그렇게 바위벽을 걸어 내려가 평이한 등로를 타고 잡목과 잡풀들이 보이는 곳을 지나니 등로는 잠시 평이한 마루금으로 변하며 속도를 내 본다.
등로가 이 정도만 되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빠르게 진행을 하니 갑자기 눈 앞에 커다란 296봉 바위가 나타나고 좌측으로 우회해 통과하니 낙엽깔린 완만한 오르막 등로가 이어지고 있다.
그렇게 진행하다 뒤돌아 보니 방금 전 지나 온 채석장과 봉우리들 그리고 우측 저 멀리 팔영산이 멀어지며 오늘 하루 좋은 산행이 되라고 응원을 보내고 있어 손 한번 흔들고 걸어 진행을 이어가 본다.
그렇게 빠르게 걸어 오르니 국토지리원 지도상 386.5미터이지만 신선님이 388.5미터봉이라 적은 이정판이 붙어 있는 삼각점봉에 도착을 해 번호 인식이 불가능한 삼각점을 사진에 담아 본다.
그 이정판 아래에는 몇장의 선답자들 띠지가 걸려 있어 확인을 해 보니 맥 잇기 산행을 하면서 자주 만났던 산행 대가들의 띠지들이 대부분이다.
하기야 이런 곳까지 일반 등산객들이 왔을리 만무하니 대부분 맥 잇기 산행을 즐기고 있는 띠지들이 맞을 듯 싶다.
그 삼각점봉을 지나 진행을 하니 등로는 생각보다 넓고 잡목도 잠시 사라져 일반 평이한 등로를 걷듯 즐겨 보는 시간이지만 서울에서 출발할 때 날씨가 추워 겨울 옷들을 조금 더 챙기고 두번을 갈아 입을 옷을 준비하다 보니 생각보다 무겁고 부피가 커진 배낭이 조금은 부담으로 다가오는 시간이다.
많은 낙엽이 수북히 쌓여 있는 사면 등로를 타고 빠르게 걸어가니 다시 바위암릉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조심하며 걸어 통과를 하니 큰 소나무 한그루가 보이는 307 무명봉에 도착을 해 이제는 좌측으로 크게 휘돌아 진행을 해 본다.
그 소나무봉을 지나 나타나는 전망바위에서 진행해야 할 방향과 우측을 살펴보니 득량만이 가깝게 다가와 있고 그 넘어 보성쪽 호남정맥과 사자지맥 산줄기들도 존재감을 드러내며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고 있다.
주위 조망과 풍경을 가슴에 담고 다시 빠르게 걸어보려 노력해 보지만 잡목들로 인해 속도는 전혀 나질 않는다.
그 전망바위를 내려 와 낙엽 쌓인 나즈막한 무명 안부를 통과하고 조금 더 걸어 진행을 하니 비포장 임도와 만나는데 봉남재 또는 연봉재라 불리는 고갯마루이다.
봉남재(연봉재)는 고흥군 점암면 연봉리와 포두면 송산리를 이어주는 고개로서 두 이름 모두 고갯마루 아래에 있는 연봉리와 그 연봉리의 자연마을 중 한곳인 봉남마을에서 유래된 듯 싶다.
연봉리는 전라남도 고흥군 점암면에 있는 리로서 점암면의 서북부에 있으며 점암 저수지를 사이에 두고 과역면과 접하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봉남, 봉북, 연등이 있는데 봉남마을은 동쪽에 신성봉, 남쪽에 황무봉과 천마봉 및 봉명산 등이 있어 마을 이름을 봉명동이라 하였다가 후에 국도변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봉남이란 지명으로 바꾸었다.
봉북마을은 원래 마을 주변에 팽나무 등이 숲을 이루고 있다 하여 썹밭멀(숲이 많은 곳)이라고 불렀고 나중에 국도의 북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봉북이란 지명이 생겼으며 연등마을은 이전부터 마을 가운데에 연못이 있었다 하여 마을 이름을 못동 또는 지등이라 하였는데 그 후 뒷산 관지봉의 형국이 등잔형으로 마을을 내려다 보고 있다 하여 연등이라 부르게 되었다.
봉남재 일명 연봉재 임도를 가로질러 잡목들이 무성한 능선으로 오르니 그 잡목들로 인해 진행이 거의 불가능한 등로로 변하고 있어 많은 시간 보내며 힘들게 오르고 잠시 후 작은 바위들과 잡목들이 정상을 지키고 있는 338.1봉을 너무나 힘들게 올라 선다.
잡목들로 인해 조망도 없기에 그곳 338.1봉을 지나 걸어 진행을 하니 잠시 후 잡목들이 사라지며 진행 방향의 등로가 아름답게 다가 온다.
등로 우측으로는 여전히 득량만과 보성쪽 산줄기들이 희미하게나마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다시 완만하게 내려가 낙엽이 수북히 쌓여있는 무명안부를 지나고 지독한 잡목 등로를 헤치며 어렵게 오르니 활엽수들이 낙엽을 떨군 채 한겨울 준비를 하고 있는 375 무명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더 남겨 본다.
무명봉에서 사진 한장 남기고 다시 출발하니 잡목의 저항이 서서히 시작되고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진행을 하니 부피가 커진 배낭이 잡목 사이에 걸려 자꾸만 발목을 잡고 늘어진다.
그래도 가야하는 길이기에 힘도 쓰고 몸을 구부려도 보면서 걸어 진행을 하니 소나무 한그루가 서 있는 377 무명봉에 도착을 해 잠시 배낭에 걸려있는 낙엽과 나뭇가지들을 치우고 출발해 본다.
등로 우측으로 상신제와 금오제를 내려다 보고 그 뒤로 펼쳐진 득량만을 바라보며 걸어가니 커다란 바위가 보이는 335 무명봉을 지나 다시 지독한 잡목지대로 들어 선다.
그 잡목지대를 어렵게 빠져 나오니 전망바위가 나타나고 그 위에 올라 살펴보니 등로 우측으로 신안리의 상신제와 그 뒤로 연봉제2저수지 그리고 그 좌측 넘어로 득량만의 파란 물결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오래 전 옆지기와 남도 여행을 하면서 멋진 추억을 남겼던 득량만이지만 그 이후로 전혀 만나지 못했던 곳이기에 이렇게나마 바라볼 수 있음에 감사한 마음으로 다시 출발하니 약간의 잡목들이 방해를 하지만 크게 신경을 쓸 정도는 아니기에 조금 빠르게 걸어 보지만 역시나 다른 지맥 등로처럼 그런 발걸음은 거의 불가능한 등로이다.
이제 속도전은 불가능 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무탈하게 완주하는데 목적을 두고 걸어가니 눈 앞에 다시 거대한 바위암봉이 나타나고 뾰족하게 솟아 난 바위들을 따라 조심하며 오르니 지나 온 방향의 마루금과 팔영산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고 가야 할 방향의 고흥지맥 마루금도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등로 좌우측으로 보이는 푸른 바다와 수없이 솟았다 내려 앉은 이름모를 산줄기들이 눈을 즐겁게 만들고 있지만 진행하는 등로가 어려워 걱정과 고민도 시작되는 시간이 되었다.
조망과 풍경을 즐기고 내려가니 희미한 좁은 등로가 잡목 사이로 나 있고 커다란 배낭을 메고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 보니 하늘기둥님이 이정판에 408봉이라 적어 놓은 봉우리에 도착을 하는데 국토지리원 지도에는 403.9봉으로 표기된 봉우리이다.
잡목들로 인해 조망과 풍경이 전혀 없기에 사진 한장 남기고 다시 출발하는 시간이 벌써 오전 11시 30여분을 넘기고 이어 계획된 시간에 먹국재까지 진행한다는 것이 불가능 하다는 것을 깨닭기 시작하는 시간이 되었다.
이왕 시간적으로 제 시간에 도착이 불가능 하다고 판단이 되니 여유롭게 즐기며 많은 풍경과 조망 사진이라도 남기며 조금 더 세심한 독도를 해 가며 걸어 보기로 한다.
좁은 미로같은 잡목 등로를 뚫고 어렵게 진행을 하니 옷가지를 파고드는 나뭇가지들로 인해 온 몸은 벌써 많은 생채기로 인해 육두문자가 튀어 나오는 시간이다.
다시 만나는 커다란 바위암릉은 우측으로 우회하고 잠시 후 많은 참나무들이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378 무명봉을 통과해 보는데 특이한 것은 없는 봉우리이다.
그 무명봉을 지나 진행을 하니 참나무들 사이로 바위 너덜길이 펼쳐져 있어 조심스럽게 오르고 잠시 후 만나는 바위암릉을 타고 기어 오르니 멋진 조망과 풍경이 펼쳐져 있어 잠시 쉬어가는 시간이다.
등로 뒷쪽인 동쪽으로 오늘 걸어 진행해 온 고흥지맥 마루금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고 채석장으로 내려 앉았던 산세가 다시 올랐다 당재로 내려가고 그 뒤 우측 저 멀리 팔영산이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며 길라잡이를 해 주고 있다.
등로 우측으로는 여전히 득량만의 파란 바닷물이 아름답고 그 득량만 넘어 보성과 장흥쪽 호남정맥 마루금이 희미하게 옛 추억을 떠 올리게 만들고 있다.
이제 남서쪽을 살펴보니 지금부터 걸어 진행해야 할 고흥지맥 마루금이 저 멀리 펼쳐져 있는데 내일 걸어야 할 조계산 갈림분기점과 그 뒤로 우뚝 솟아 있는 천등산이 어서오라 손짓을 하는 듯 다가와 있다.
그 산줄기 중간에는 오늘 밤 하루 묵어야 할 고흥읍의 회색도시가 내려다 보이는데 고흥지맥 마루금은 그 고흥 땅 좌측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우측 보이지 않는 산줄기를 돌고 돌아 고흥을 좌측에 두고 길에 휘어져 가야 하기에 거리감이 상당함을 느껴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잠시 후 고흥을 좌측에 두고 우츠그로 길게 휘돌아 가는 고흥지맥 마루금도 다시 한번 확인을 하고 등로 우측 앞으로 보이는 거대한 건물을 살펴보는데 지도를 확인해 보니 수도암인데 그 수도암 위쪽으로도 거대한 건물이 보이는데 아마도 군부대인 듯 지도에 표기도 없는 건물이다.
그 수도암 아래쪽으로는 운대제가 드넓게 펼쳐져 있는데 파란 물이 저수지 한가득 채우고 있다.
고흥 수도암은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로 전라남도 고흥군의 운암산(옛 이름은 모악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으며 절이 언제 창건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주장이 있다.
1983년 절에서 만든 사적기에는 통일신라시대 흥덕왕(재위 826∼836) 때 영헌스님이 창건한 중흥사에서 비롯되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1699년(숙종 25) 혜현스님이 남긴 (흥양 모악산 중흥사 수도암 불량기)에 의하면 영허대사가 중흥사를 창건하고 수도승을 위해 수도암을 지었다고 되어 있으며 또 1083년(고려 순종 1) 도희스님이 창건했고 1370년(고려 공민왕 19) 영허대사가 중수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 3~4차례의 중수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수도암은 1517년(중종 12) 화주인 인봉별좌가 나한전인 무루전(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156호)을 건립하였고 1617년(광해군 9) 언호와 원오 스님이 무루전을 중수하였으며 1860년(철종 11) 아미타 삼존탱화와 칠성탱화를 조성하여 봉안하였다.
조선 후기에 수도암은 미륵신앙 도량이었으며 일제강점기 이후 여러 차례 전각을 중수한 바 있으며 현재 수도암은 대웅전, 무루전, 범종각, 산신각, 칠성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시 눈 앞에 펼쳐진 바위암릉을 타고 올라 등로 우측인 득량만 방향을 살펴보니 득량만의 푸른 바다 넘어 장흥쪽 호남정맥과 사지지맥이 이 산객을 다시 부르며 조만간 내려가야 할 산줄기를 찾아 보기 바쁜 시간이다.
득량만은 전라남도 고흥군의 고흥반도 북서쪽에 있는 만으로 조선지형도에 의하면 본래는 장흥반도와 고흥반도 사이에 있는 지금의 보성만 전체를 아우르는 만이었으나 보성만이라는 이름이 생겨나고 그 구획이 설정되면서 득량만은 고흥군과 보성군 및 장흥군으로 둘러싸여 있는 보성만의 후미 부분만을 일컫게 되었다.
만 깊숙한 곳에는 고흥군 남양면의 우도와 무인도인 각도섬, 하구룡도, 중구룡도, 상구룡도가 있고 주변 해안에는 간석지가 널리 펼쳐져 있으며 고흥군 대서면 남정리와 보성군 조성면 예당리에는 득량만방조제가 건설되어 넓은 간척평야가 조성되었다.
지명은 득량도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되며 관련 지명으로 보성군 득량면, 득량천, 득량역, 득량호가 있다.
그렇게 한동안 그 전망바위와 암릉에서 멋진 풍경과 조망을 즐기고 다시 출발하니 등로는 여전히 칼바위 능선으로 이어지고 있어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바위들이 모두 칼 끝처럼 뾰족하게 솟아 있어 잘못 부상이라도 당하면 오늘 내일 산행이 물거품이 되기에 속도 보다는 안전을 최우선으로 걸어 보는 시간이다.
그렇게 잠시 더 걸어 완만하게 오르니 등로 가운데에 삼각점 하나가 박혀 있는데 삼각점 표기만 보일 뿐 그 아래 부분은 흙과 낙엽으로 덮혀있어 아무것도 인식이 불가능하다.
사진 한장 남기고 조금 더 걸어 오르니 등로 옆에서 식사를 즐기시는 중년 부부를 만나 깜짝 놀라 인사를 드리고 잠시 후 병풍바위 1.5 Km라는 이정표가 서 있는 484..3미터의 운암산 정상에 도착을 해 마침 병풍바위 쪽에서 올라 오는 연세 지긋한 등산객 부부에게 부탁해 증명 사진 한장 어렵게 남겨 본다.
운암산(운람산, 484.3미터)은 전라남도 고흥군 포두면 송산리에 있는 산으로 해발고도는 487미터이고 두원면과 포두면의 경계에 있다.
산이 높이 솟아 구름같은 기운이 산을 감싸고 있다 하여 운암산이라 부르며 포근한 느낌을 주는 어머니 품같은 산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골짜기에는 많은 전설들이 있으며 정상 부근의 빼어난 봉우리들이 줄지어 서있는 모습과 산길 옆 저수지의 에메랄드 빛 초록색의 향연과 깊은 계곡들 그리고 수목들이 가슴 벅찬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옛 흥양지에는 흥양현 북쪽 15리에 이 산이 있고 산에는 죽사, 은석사, 중흥사가 이어져 내려왔었으며 용은사라는 말사도 있었다고 한다.
금석병용시대의 동검과 동추 등이 발굴된 이 산에 현재는 수도암만이 있고 산꼭대기에는 기우제를 지내는 제단이 있다.
조선말기 총리대신을 지낸 김홍집이 흥양현감으로 재임시 이곳 운암산에 올라 기우제를 올린 사실이 기우제문과 함께 전하며 또한 운곡마을 저수지 위편에 운대도요지가 소재해 있어 문화재탐방도 겸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한다.
고산자 김정호 선생의 대동여지도에는 운암산으로 표시되어 있고 고흥 향토기록에는 이 산을 일명 모악산으로도 부른다고 하였다.
운암산을 오르면서 너무나 아름다운 조망을 즐겼는데 막상 운암산 정상에 오르니 이곳은 잡목들로 막혀 조망과 풍경이 전혀 보이지 않아 조금은 아쉬움 속에 직진의 등로를 버리고 우측으로 90도 꺽어 내려가야 하는 병풍바위 1.5 Km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어 내려가 본다.
운암산은 고흥 주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산인지 병풍바위까지는 넓은 비포장 임도같은 수준의 등로가 잘 나 있어 지금까지의 등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걸어 내려가 본다.
생각보다 많은 낙엽들이 쌓여 있지만 많은 등산객들이 밟아서 그런지 생각보다 미끄럽지도 않아 지금까지 까 먹은 시간을 벌충이라도 하듯 빠르게 걸어 내려가니 봉우리가 아닌 평이한 등로 위에 369.6 봉우리 표시가 되어 있어 사진 한장 남기고 다시 출발한다.
그 369.6 봉우리 표시가 되어 있는 장소를 지나 계속 빠르게 걸어 내려가니 군부대에서 사용될 것만 같은 화강암에 숫자가 적혀 있는 돌 조각들을 만나고 잠시 후 정상능선삼거리 안내판이 보이는데 직진의 고흥지맥 마루금과는 상관없이 등로 우측으로 수도암 앞 임도로 내려가는 방향만 표기를 해 둔 이정판이다.
그 이정판을 지나 계속 직진의 등로를 따르니 약간의 돌 너덜길을 지나 한동안 평이한 등로가 이어지고 잠시 후 운암산정상까지 1.4 Km 거리라는 이정판이 반겨준다.
다시 한동안 고도를 낮춰 걸어가니 병풍바위라는 글자가 새겨있는 이정목과 벤취쉼터가 보이는 병풍바위에 도착을 하니 등로 좌측으로 바위 위 넓은 공터가 보여 그곳으로 들어 가 준비한 간식으로 간단한 점심을 먹고 출발하기로 한다.
병풍바위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을 해 보지만 정확한 위치는 확인이 불가능 한데 아마도 이 산객이 머물고 있는 이 바위가 다른 병풍바위처럼 대부분 멀리서 보면 병풍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이곳 고흥의 병풍바위도 같은 의미로 해석이 되지만 바위 위에 오르니 확인할 길은 없지만 조망은 멋지게 펼쳐져 있어 몇장의 사진을 남긴 후 출발한다.
병풍바위에서 동쪽을 올려다 보니 운암산 정상에서 직진 방향으로 나 있는 등로를 타고 걸어가면 만날 수 있는 해발고도 448미터인 깃대봉이 우뚝 솟아 있고 그 깃대봉 우측 아래로는 상포리마을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어 자료를 찾아 본다.
상포리는 전라남도 고흥군 포두면에 있는 리로서 해창만 바닷가의 입구에 있다.
자연마을로는 평촌, 중흥, 자연동이 있는데 평촌은 벌판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이름 붙여졌고 중흥은 약 500여 년 전 마을 뒷쪽 두원면 운암산 중턱에 중흥사라는 큰 절이 있었기 때문에 그 절의 이름을 따서 마을이름을 지은 것이라 한다.
자연동은 옛날 이 곳에 자연제라는 큰 서당이 유명하여 자연동이라 불려왔으며 본래 이곳은 조선조 때 고흥 지방의 광물의 일종인 자연동이 채광된 곳으로 추측되며 후에 지금의 자연동으로 한자가 고쳐졌다.
이 산객이 어릴적 살았던 시골 동네와 닮아 있어 더욱 정감이 가고 그리워 하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이런 풍경을 보면 왜 그리 마음이 푸근해지는지 모르겠다.
병풍바위에서 간단한 점심을 먹고 조망을 즐긴 후 정상 등로로 나와 빠르게 걸어 내려가니 짧은 바위너덜길이 나타나고 곧이어 시멘트 포장도로가 지나는 중섯재삼거리 이정판이 서 있는 중섯재에 도착을 하는데 우측으로는 수도암으로 좌측으로는 송산으로 갈 수 있다는 이정판도 서 있다.
시멘트 포장도로 건너편에는 넓은 공터에 운동기구들이 설치되어 있고 한쪽에는 사각정자도 보이는데 등로는 그 정자 좌측 능선 방향으로 나 있다.
중섯재는 전라남도 고흥군 포두면 상포리 남쪽에 있는 중흥마을에서 올라 온 임도가 북쪽 두원면 운대리 수도암으로 넘어가는 중간 고개로서 왜 중섯재인지에 대한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중섯재가 있는 상포리 중흥마을을 찾아보니 원래 상포리 지역에 해당된 마을로서 약500여년전 마을 뒷쪽 두원면 운암산 중터에 중흥사라는 큰절이 있어 절이름을 따서 마을이름을 중흥이라 이름하여 1956년 리동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자연마을로 독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시멘트 포장도로를 건너 잠시 내려온 마루금을 뒤돌아 보니 시멘트포장도로와 비포장 임도가 휘돌아 가는 가운데로 마루금이 나 있고 그 뒤 저 멀리 방금 전 내려 온 운암산 정상부가 빼꼼히 올려다 보인다.
사진 몇장 남기고 좋은 등로이기에 조금 빨리 사각정자 옆 능선 등로를 타고 빠르게 걸어 진행을 하니 등로는 환상적으로 열려있다.
지금까지 까먹은 시간을 벌충이라도 하듯 빠르게 걸어 전진하니 운암산정상에서 2.2 Km 진행되어 왔다는 작은 이정판을 지나 꿈길같은 마루금을 걸어 본다.
그렇게 잠시 더 걸어가니 현위치 운암산 1.1이라는 이정목이 서 있고 부드러운 좋은 등로를 따라 빠르게 걸어 내려가니 곧이어 현위치 운암산 1.2라는 이정목이 다시 반겨 준다.
여전히 부드러운 등로를 타고 빠르게 전진하니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있는 무명 안부를 지나 산림욕장이라는 이정표 앞 갈림삼거리에 도착을 해 직진의 넓은 비포장 임도를 버리고 우측으로 크게 꺽어 올라가야 하는 비포장 임도를 따라 오르막 등로로 이어지고 있다.
지도를 살펴보니 현위치 1.2지점을 지나 좌측의 좋은 등로를 버리고 직진의 잡목이 우거진 능선 등로를 따라야 하는데 잡목의 저항이 심해 약간 돌아 가더라도 이 좋은 등로를 따라 약간 우회하며 진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중섯재에서 1.5 Km 진행되어 온 거리이고 산림욕장 정상까지는 300미터 남아 있다는 방향과 거리 표시가 반가운 이정표이다.
우측으로 크게 꺽어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이곳 역시 고흥 주민들이 많이 찾는지 등로는 넓은 비포장 임도 수준으로 잘 나 있다.
조금씩 가파라지는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등줄기에서 땀방울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고 그렇게 편백나무를 조림해 놓은 오르막 등로를 따라 가쁘게 오르니 좁은 공터에 사각테이블과 많은 벤취 쉼터들이 설치되어 있는 곳에 도착을 한다.
해발고도 239미터의 공터에서 잠시 사진 한장 남기고 이제는 정상 마루금을 만나 좌측으로 크게 휘어지는 마루금을 따라 여유롭게 걸어 보는 시간이다.
고흥군 보건소에서 설치한 여유있는 걸음걸이 치유가 시작되는 곳이란 안내판을 지나 여전히 키 작은 편백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뚜렷한 등로를 타고 걸어 전진하니 지맥 산행과는 관계 없는 이정표가 보이고 다시 벤취 쉼터2개를 만나는데 그곳을 지나자마자 등로는 좌측 직진의 뚜렷한 내리막 등로를 버리고 우측의 잡목들이 우거진 마루금을 찾아 어렵게 진행을 해야 하는 길주의 구간이다.
잡목을 헤치며 우측 능선으로 들어가니 커다란 바위암릉이 기다리고 조심하며 통과하니 또 다른 바위를 우회하여 지독한 잡목과의 한판 승부가 펼쳐지기 시작한다.
가시에 찔리고 가는 잡목 가지에 뺨때기를 맞으며 큰 소리로 고통을 호소해 보지만 자기가 좋아 밤잠 설치며 내려 와 이 오지 탐험을 하듯 걷고 있으니 누구에게 하ㅣ소연도 할 수 없어 그저 묵묵히 견디고 전지할 수 밖에 없다.
우거진 잡목 가지위에 내려 앉은 낙엽과 썩은 나뭇가지들이 이 산객이 지날때마다 머리와 배낭쪽으로 솟아지며 배낭과 등판 사이에 껴 몇 번이나 배낭 내려 그 나뭇가지와 낙엽들을 쓸어 내고 진행하기를 반복하는 시간이다.
두 디라엔 피멍이 들기 시작하고 손등에도 붉은 실선이 수도 없이 그어지는 상황에서 잠시 후 키 작은 소나무 암반지역에 도착을 해 쉬어가고 곧이어 무명묘지를 지나 잡목과 소나무가 뒤엉켜 있는 봉우리 같지 않은 182봉에 도착을 해 진행 방향을 살펴보지만 잡목들로 인해 조망 하나 구경하기 쉽지 안하 포기한다.
잠시 후 커다란 고사목 한그루를 만나 등로 우측을 살펴보니 방금 전 올랐다 내려 온 운암산 정상부가 소나무 가지 사이로 올려다 보이고 그 산줄기 아래 거대한 하늘색 건물과 그 바로 밑에 보이는 수도암이 시원하게 조망되기 시작한다.
사진 몇장 남기고 다시 지독한 잡목들을 헤치며 걸어 전진하니 최근에 신산경표 상의 162 전지맥을 완주하신 산너울님의 띠지가 걸려있는 176 무명봉에 도착을 해 큰 한숨을 내쉬어 본다.
너무나 힘들게 진행되는 산행이기에 벌써 두 다리에 전해지는 무게감이 상당히 무겁게 다가오는 시간이기도 하다.
산줄기를 따라서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산너울님의 띠지를 보면서 처음에는 도솔지맥 산행을 하면서 만났던 춘천의 산너울님이라고 생각을 하였는데 춘천의 산너울님은 아직 전 지맥 산행에 시간이 걸리고 대부분 비박 장비를 갖춰 산행을 하기에 띠지도 많이 걸지 않아 궁금했는데 최근 홀대모에서 이 띠지의 주인공이 바로 신산경표 상 162 전지맥을 완주한 종주의 영웅임을 알게 되어 반갑게 인사를 건네고 출발한다.
잠시 소나무와 잡목이 혼재된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무명묘지 한기를 만나고 곧이어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운곡재에 도착을 해 배낭과 옷가지 속에 파고들어 있는 낙엽과 나뭇가지들을 제거해 본다.
운곡재(2차선 포장도로)는 전라남도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의 운곡마을에서 고흥읍 남계리를 이어주는 고개인데 운대리의 이름과 그 운대리의 자연마을 중 한곳인 운곡마을 아름을 따 운대재 또는 운곡재로 불리는 듯 보인다.
이 운곡재가 있는 운대리를 찾아 보니 운대리는 전라남도 고흥군 두원면에 있는 리로서 농사가 주로 이루어지는 지역으로 고흥지역에는 어디라 할 것 없이 고인돌이 많이 퍼져 있는데 특히 이 운대리에 많은 고인돌이 있다.
자연마을로는 금오, 중대, 석촌, 상대, 운곡 등이 있는데 상대마을의 지명은 운대리의 위쪽 높은 곳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것이고 석촌마을은 마을 앞에 조그만 산이 많아 이름 붙여졌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옹기를 만들어 팔던 곳으로 마을 앞에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마을 뒤에는 작은 굴, 큰 굴이 있어 사기그릇 조각들이 많아 사기시 또는 사구시 흔적이 있는 곳이며 대표 문화재로는 지방기념물 제80호인 운대리 도요지와 지방문화재자료 제156호인 수도암 무루전이 있다.
낙엽과 나뭇가지들을 털어 내고 도로를 건너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절개지 중앙으로 올라 좌측 능선으로 붙으니 생각보다 잡목의 저항이 심하지 않아 다행이다.
소나무가 보이는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따라 오르니 선답자들의 산행 띠지들이 걸려 있는 146 무명봉에 도착을 하고 그곳에서 등로는 좌측으로 크게 휘어져 진행이 되고 있다.
소나무와 가시나무가 빼곡한 등로를 헤집고 전진하니 잠시 편백나무가 쉬어가라 안내를 해 주고 그것도 잠시 더욱 지독한 잡목지대가 기다리며 오늘 하루 산행의 진을 빼 놓고 만다.
하얀 페인트가 칠해진 소나무들 사이로 지독한 잡목들이 우거지고 그 우거진 잡목 위로 썩은 나뭇가지들이 떨어져 쌓이면서 진행에 상당한 방해를 주고 있어 산행속도는 의미가 없는 시간이 되어간다.
멋진 소나무들이 보이지만 그 소나무 사이로 자라고 있는 지독한 잡목과 가시나무들이 벌써 이 산객의 두 다리를 나도질 해 따갑고 쓰라려 산행을 이어가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그렇게 다리에 신경을 쓰다보니 어느새 가시가 손등을 굵고 지나가며 붉은 핏줄을 만들고 있어 다시 장갑 하나를 꺼내 끼고 진행을 하지만 별 효과는 없는 듯 하다.
다만 얼굴에만 상처가 나지 않토록 조심하며 걸어가니 무명 묘지 한기를 지나 소나무 가지들이 말라 죽어 널부러져 있는 143.3봉을 넘어 어렵게 진행을 해 보는 시간이다.
산행후기를 정리하는 오늘 이 시간 손등을 살펴보니 양 손등 위 모두가 검은 딱지들로 덕지덕지 그날의 흔적을 남기고 있어 괜시리 몸서리가 쳐질 정도이다.
그 143.3봉을 지나 널부러진 간벌목 사이를 비집고 걸어 전진하니 관리가 전혀 되지 않은 묘지를 통과하고 지독한 잡목과 잡풀들이 앞을 가로막는 등로를 헤집고 어렵게 내려가니 드디어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송곡육교에 도착을 해 몸에 붙어 있는 낙엽과 나뭇가지들을 제거하고 도로를 타고 좌측으로 진행을 하면서 송곡육교를 통과한다.
그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송곡육교 아래에는 새로 뚫린 15번 4차선 도로가 지나고 있어 살펴보니 생각보다 많은 차량들이 빠르게 달리고 있어 사진 몇장 남겨 본다.
송곡재(송곡육교, 4차선 도로 위 2차선 육교)는 전라남도 고흥군 고흥읍 남계리의 송곡마을과 두원면 용반리를 이어주는 고개로서 바로 그 송곡마을에서 이름을따 온 듯 보이는데 송곡마을은 마을이 고개 부근에 위치하여 그전에 소나무가 무성하였으므로 송곡이라 부르며 옛 문헌에는 송현(솔고개)으로 표시 되어 있다.
송곡재가 있는 남계리는 전라남도 고흥군 고흥읍에 있는 리로서 고흥 군청이 있는 중심가이며 남쪽으로는 봉황산이 있고 복대천과 고흥천이 만나고 있다.
자연마을로는 송곡, 학림, 신계, 원동, 남계, 봉남, 봉계가 있는데 송곡은 고개 근처에 마을이 있으며 소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학림은 마을에 학교가 있고 마을 모퉁이에 대나무밭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고 신계는 새로 생긴 마을이란 뜻이고 원동은 조선시대에 옛 관리들의 숙박소가 있어 원골이라고 불리다가 원동이 된 것이다.
남계는 본래 남계라고 불리던 고흥천 가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고 봉남은 봉황산 아래 있는 마을이라 봉황산의 봉과 남계리의 남을 따 붙인 이름이며 봉계는 봉황산의 봉과 남계리의 계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송곡육교를 넘으니 도로 우측으로 사각정자와 무인이동통신탑이 보이고 한쪽 옆으로는 민주인사추모비가 서 있는데 왜 이런곳에 이런 추모비가 서 있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우측으로 이어지는 2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조금 더 걸어가다 도로 좌측 능선 방향으로 나 있는 등로를 타고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보는 시간이다.
능선으로 오르니 넓은 비포장 임도같은 등로가 열려있어 편안하게 걸어 오르고 잠시 후 철계단이 보이는데 왜 이런 계단이 이곳에 설치가 되어 있는지 의아해진다.
그 철계단을 타고 걸어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 잘 관리되고 있는 밀양박씨 묘지가 나타나는데 아마도 이 밀양박씨 후손들이 묘지를 다녀가기 위해 계단을 설치한 것이 아닐까 추측을 해 보는데 만약 그렇다면 대단한 후손들이란 생각이다.
잠시 더 올라 지나 온 등로쪽을 살펴보니 송곡재 지나 좌측 저 멀리 15번 4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형성된 용반리마을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용반리는 전라남도 고흥군 두원면에 있는 리로서 농촌지역이며 자연마을로는 지등, 금성, 동촌마을 등이 있다. 지등마을은 예부터 마을 등너머로 옥녀봉 못(현 안양제)에 비추어지므로 못 지자를 따서 마을명을 지등이라 하였고 금성마을은 마을 서북쪽에 있는 두리봉 지맥으로 이루어진 마을 뒷산 구절봉이 마을을 옹하고 있는데 산세가 소가 누워있는 형국이므로 이 구절산재를 쇠재라 하여 마을명도 쇠재라 불러오다가, 당초의 쇠재를 쇠 금과 잿 성의 뜻으로 바꾸어 금성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동촌마을은 용반리 동쪽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다시 둔덕을 넘으니 무명묘지 두어기가 나타나고 그묘지를 지나 진행을 하니 등로는 감나무 과수원 가장자리로 이어지고 있다.
감나무 과수원을 지나 소나무와 억새가 피어있는 호젓한 등로를 타고 빠르게 걸어 내려가니 밭 경작지가 펼쳐져 있는 시멘트포장도로와 비포장임도가 경계를 이루고 있는 도로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기고 진행 방향을 살펴 본다.
등로는 바로 눈 앞에 펼쳐진 비날로 덮혀있는 밭 경작지 가장자리를 따라 능선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이곳도 아마 양파 모종을 심기 위해 비닐을 덮어 놓은 곳은 아닐까 추측을 하면서 진행을 해 본다.
밭 가장자리를 타고 걸어 올라 능선으로 들어가니 간벌 후 편백나무들을 식재한 등로가 나타나는데 시간이 제법 지났는지 팔뚝만한 굵기의 편백나무와 함께 잡목들이 자라면서 진행에 상당한 어려움을 가중 시킨다.
잠시 후 잘 관리되고 있는 묘지 몇기가 있는 곳을 지나 식재된 편백나무들을 바라보며 오르니 등로는 조금씩 잡목들의 세상으로 변하더니 금새 등로조차 찾기가 어려운 상황이 되어 버린다.
이리저리 잡목을 뚫고 오르니 동백나무가 보이는 162.7봉에 도착을 하고 사진 한장 남기고 곧바로 출발하니 이제는 간벌된 나뭇가지들이 등로에 널부러져 있어 갈길 바쁜 이 산객의 발목을 붙잡고 한없이 늘어지고 있다.
너무나 힘겹게 그 잡목과 널부러진 간벌목 사이를 헤집고 오르니 약각의 조망이 터지고 그곳에서 잠시 뒤돌아 보니 저 멀리 운암산에서 걸어 내려와 이곳으로 진행된 고흥지맥 마루금이 한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등로 우측 뒷편으로는 15번 4차선 포장도로와 용반리마을 그리고 그 좌측으로 득량만이 아름답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다시 힘을 내 잡목을 뚫고 많은 생채기를 내면서 오르니 갑자기 넓은 비포장 임도에 도착을 하는데 지도를 살펴보니 좌측으로 멀지 않은 곳에 등로에서 벗어 나 있는 주월산이 보인다.
이곳은 바로 그 주월산 갈림삼거리로서 그리 멀지 않기에 주월산 정상을 잠시 다녀 오기로 한다.
넓은 비포장 임도를 타고 좌측으로 걸어 오르니 행정리와 옥상마을 그리고 송곡마을 하산 이정표가 서 있고 잠시 후 좌측에서 올라오는 시멘트 포장도로와 만나는데 그 시멘트 포장도로는 아마도 주월산 정상을 지키고 있는 SK 고흥 기지국을 오르기 위한 도로처럼 보인다.
주월산정상까지 291미터 남아 있다는 이정표를 지나 길게 이어지는 시멘트 계단을 오르니 드디어 SK 고흥기지국 앞 철조망에 도착을 하고 그 철좡 좌측 도로를 타고 오르니 금새 산불감시초소와 몇개의 작은 돌탑들이 보이는 주월산 정상에 도착을 하는데 이곳이 주월산임을 알리는 그 어떤 표식더 없어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다.
주월산(소이산, 291미터)은 전라남도 고흥군의 고흥읍 남계리에 위치한 산으로 해발고도는 291미터로서 여지도서에 소이산은 운암산에서 뻗어 나오고 관아의 북쪽 3리에 있으며 고을의 으뜸이 되는 산줄기를 이루는데 다른 이름으로 주월산이라고도 부른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소이산은 현의 북쪽 3리에 있는 진산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고흥읍의 진산이었으며 소이산의 별칭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해동지도, 1872년지방지도에는 주월산으로 조선지형도에는 주월봉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동여도에는 소이산 그리고 해동여지도와 청구도에는 간둔산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고지도에서 보았을 때 모두 읍치의 바로 북쪽에 묘사되어 있는 점을 고려하면 같은 산임을 짐작하게 한다.
지명은 옛날에 큰 홍수가 발생하였을 때 그 물이 산을 넘어왔다는 전설에서 유래했다고 하며 관련 지명으로 배너밋재가 있다.
삼각점과 주위 풍경만 사진에 담고 곧바로 올라갔던 등로를 타고 주월산 갈림삼거리 방향으로 뒤돌아 내려가 본다.
주얼산을 다녀 와 다시 배낭 둘러메고 이제는 좌측 마루금을 따라 걸어 내려가니 진행 방향으로 마루금이 살짝 얼굴을 보여준다.
약간의 잡목들이 보이지만 여전히 뚜렷한 등로를 타고 빠르게 내려가니 오랫만에 멋진 소나무 등로를 만나 잠시 힐링하는 시간도 가져 본다.
그렇게 룰루랄라 무명안부를 지나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행벙리 하산 이정표가 서 있는데 행정리까지는 1.55 Km 거리표시가 눈에 들어 온다.
행정리는 전라남도 고흥군 고흥읍에 있는 리로서 서쪽으로는 바다에 가까우나 주변에 산지가 있어 해발고도가 약간 높은 편이며 복대천 등 몇몇 하천이 시작되는 부근이다.
자연마을에는 교촌이 있는데 교촌은 과겅에 향교가 있었으므로 붙은 이름이며 향교가 있던 마을은 대부분 교촌이란 이름을 갖게 되며 행정리에 있는 고흥향교 안에는 약 400년 된 은행나무가 있다.
행정리 갈림삼거리를 지나니 그 좋던 등로는 사라지고 지독한 잡목 등로가 다시 나타나기 시작하며 갈길 바쁜 산객의 발목을 꼭 붙잡고 놔주질 않는다.
약간의 바위지대를 지나 지독한 잡목과 가시나무들을 헤치며 진행하다 가시에 찔리고 잡목에 맞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곡소리가 절로 나오는 시간이다.
그렇게 한동안 어렵게 진행을 하니 벙커가 있는 222미터의 대곡재에 도착을 하는데 고개는 대부분 안부쪽에 있는데 이곳 대곡재는 능선상에 있어 헷깔리게 만든다.
대곡재는 고흥군 고흥읍 행정리 교촌마을과 두원면 신송리 반송마을을 연결하는 옛 고개길이다.
대곡재가 걸쳐있는 행정리는 방금 전 행정리 갈림삼거리에서 설명이 되었기에 신송리에 대한 자료를 찾아 보니 신송리는 전라남도 고흥군 두원면에 있는 리로서 운암산의 원지류인 천황산세의 끝에 뻗어 안태봉이 솟아 있는 서남쪽에 있다.
자연마을로는 서신, 반송, 동신, 외신이 있는데 서신마을은 신송리의 서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반송마을은 예전에 소반등이라 불리던 것이 바뀐 지명이며 동신마을은 신송리의 동쪽에 있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
주요 문화재로는 지방기념물 제58호인 무열사가 있으며 무열사는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에 전공을 세운 무장 진무성장군을 추모하기 위하여 호남 유림의 발의와 영남 유림의 협찬으로 고종 19년(1882)에 이전에 있던 용강사를 계승하여 건립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정확한 의미의 대곡재를 확인할 수 없어 아쉽기만 하다.
군 벙커가 있는 대곡재를 지나 조금 더 내려가니 군부대 훈련용 콘크리트 안내벽이 나타나는데 그곳에는 적은 항상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라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잡목의 저항이 약간 약해진 등로를 타고 빠르게 걸어 전진하니 등로 좌측으로 고흥읍내가 조망되기 시작하고 등로 우측으로도 신송리롸 용산리 방향의 아름다운 마을들과 들판이 내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다시 진행 방향의 마루금도 확인하며 걸어 진행을 하니 갑자기 눈 앞에 녹슨 캐비넷과 용도를 알 수 없는 철 체반 2개가 녹슨 철조망 속에 갇혀있는 219미터봉에 도착을 해 의아하기만 하다.
아마도 군부대 훈련용처럼 보이지만 그 용도는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곳 녹슨 캐비넷이 있는 219봉에서 등로 좌측을 살펴보니 몇번 머물렀고 오늘 밤에도 하룻밤 더 머물러야 할 고흥읍내가 빤히 내려다 보인다.
고흥읍은 전라남도 고흥군의 중앙부에 위치한 읍으로 서쪽에는 고흥호가 있으며 그 연안에는 고흥만 간척지가 매우 널리 펼쳐져 있다.
해동지도(흥양)와 1872년지방지도에 의하면 흥양현 읍내면 지역임을 알 수 있고 1872년지방지도에 의하면 읍내면은 성곽을 두르고 있었는데 남과 북 및 서쪽에 문루가 있었으며 남문과 서문 가까이에는 수구와 홍교도 설치되어 있었고 성 안에는 객사를 비롯하여 화약고, 감옥 등 20여 개의 공공시설이 입지하고 있었다.
여지도서에 기록된 읍내면의 규모는 민호 970호와 남자 1,902명 및 여자 1,893명이었고 1914년에 읍내면은 동면의 일부를 포함하여 고흥면으로 바뀌었으며 호구총수에 동리 지명이 상세히 수록되어 있다. 1979년 읍으로 승격하여, 현재는 9개 법정리를 관할하고 있다.
법정리는 조선 시대의 여러 동리가 합쳐져서 만들어졌는데 명칭은 대개 지명을 조합하지 않고 한 마을의 이름을 대표로 내세워 사용하고 있다.
서문리는 읍성 서쪽에 위치한 데서 유래하였고 행정리의 교촌 마을은 고흥향교에서 유래하였으며 이 향교는 1441년 흥양현이 생기면서 서문 밖에 세워졌으나 정유재란 때 소실되어 1695년에 지금의 자리에 중건한 것이다.
호형리는 마을의 지형이 호랑이가 마을을 둘러싸고 앉아있는 모습이라는 풍수지리의 형국론에서 유래하였다.
오늘밤 하루 더 머물고 나면 언제 다시 고흥과 인연을 맺을 수 있을지 기약도 할 수 없기에 그 기리움이 커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의미를 알 수 없는 녹슨 철 개비넷봉을 지나 걸어 전진하니 바위암릉이 기다리고 조심하며 그 암릉을 타고 걸어가니 등로 우측으로 득량만 지나 장흥쪽 호남정맥과 사자지맥 마루금이 이 산객을 다시 부르기 시작한다.
이제 앞으로 진행 방향의 마루금도 살펴보고 조심하며 그 암릉을 지나니 다시 등로 좌측으로 고흥읍내가 조금 더 가깝게 다가 와 있다.
마음 같아서는 이곳에서 산행을 중단하고 고흥읍내로 들어가 따뜻한 구들목에 앉아 탁배기 한잔 마시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 다시 힘을 내 본다.
다시 나타나는 잡목을 헤치고 전진하니 소나무들이 보이는 229.9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기고 곧바로 출발한다.
잠시 잡목이 사라지고 멋진 소나무 등로가 열려 힐링하는 시간도 가져보며 빠르게 진행하니 그것을 시샘이라도 하듯 다시 거친 잡목들이 등로를 가득 채우고 이 산객이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사정없이 뺨때기를 때리며 발목을 잡고 늘어 진다.
너무나 힘들게 그 잡목지대를 벗어나니 광산김공 묘지2기가 나타나고 그곳을 지나 완만하게 내려가니 가끔 차량들이 통행하는 소음이 들리기 시작한다.
묘지로 이어지는 넓은 비포장 임도같은 등로를 타고 빠르게 걸어 내려가니 커다란 느티나무와 갈림삼거리가 있는 851번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수덕재에 도착을 한다.
수덕재(84미터)는 고흥군 고흥읍에서 두원면으로 넘어가는 851번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고개로서 고개 바로 아래 고흥읍 행정리에 수덕마을이 있어 수덕재라는 이름이 붙은 듯 보인다.
수덕마을이 있는 행정리는 전라남도 고흥군 고흥읍에 있는 리로서 서쪽으로는 바다에 가까우나 주변에 산지가 있어 해발고도가 약간 높은 편이고 복대천 등 몇몇 하천이 시작되는 부근이다.
자연마을에는 교촌이 있는데 교촌은 과거에 향교가 있었으므로 붙은 이름이고 그 향교가 있던 마을은 대부분 교촌이란 이름을 갖게 되며 행정리에 있는 고흥향교 안에는 약 400년 된 은행나무가 있다.
사진 한장 남기고 곧바로 도로를 건너 갈대가 하늘거리는 넓은 비포장 임도를 타고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수덕재를 지나 넓은 비포장 임도를 타고 걸어 오르니 하얀 억새가 하늘거리고 등로 좌측으로는 폐가가 된 민가들이 보이는데 우측으로는 아직도 사람들이 살고 잇는 듯한 민가도 나타난다.
그 사이로 나 있는 등로를 따라 억새가 피어 있는 뚜렷한 마을 소로를 걸어 오르니 다시 잡목 능선이 앞에 나타나고 그곳에서 잠시 지나 온 방향을 뒤돌아 보니 방금 전 올라 온 수덕재 지나 잡목으로 고생한 나즈막한 산줄기가 저 멀리 서산으로 기울어져 가는 햇살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사진 몇장 남기고 잡목 등로를 타고 능선으로 오르니 잡목과 바위가 혼재되어 있고 소나무 가지에는 빛바랜 띠지 한장이 걸여 있는 151.4봉에 도착을 한다.
그 봉우리에서 좌측으로 크게 꺽어 평이하게 등로는 이어지고 잠시 후 유실수가 심어져 있는 곳 위에 많은 묘지들이 보이는 곳으로 진행이 되고 있다.
그 한양조공 묘지들을 지나 다시 잡목이 우거진 능선으로 오르니 더욱 우거진 잡목과 가시나무 그리고 푸르른 잎을 유지하고 있는 동백나무들이 앞을 가로막고 길을 전혀 터주지 않는다.
온 몸에 다시 많은 생채기를 만들고 등짝에 가시가 박혔는지 따가움을 견디기 어려운 그 살인적인 잡목지대를 어렵게 뚫고 진행을 하니 드디어 소나무 한그루가 서 있는 187 무명봉에 도착을 하는데 이곳 역시 정상적인 등로로 진행이 불가능해 좌측으로 우회하며 진행을 하였는데도 그 등로마저 이토록 지독한 살인적인 잡목지대로 뒤덮혀 있다.
잠시 정상부의 좁은 공터에서 배낭을 내려 쌓여있는 낙엽과 나뭇가지 그리고 가시들을 제거한 후 다시 그 배낭을 둘러메고 출발하니 이곳 역시 여전히 키 작은 소나무가 죽어 있고 그 옆으로 잡목과 청다래 덩쿨들이 우거져 있어 한걸음 앞으로 진행이 어려운 등로를 만나 진퇴양난이다.
다시 그 지독한 잡목을 뚫고 어렵게 걸어 진행을 하니 커다란 소나무에 준.희님의 응원판이 걸려있어 힘을 얻고 출발하니 여전히 잡목이 거세지만 지금보다는 조금 수월한 잡목 등로로 이어지고 있다.
응원판을 지나 커다란 소나무 한그루가 서 있는 192 무명봉을 넘어 이제 동백나무가 빼곡하게 자라고 있는 등로를 만나 걸어 본다.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 좌측으로는 파란 잎이 그대로 남아 있는 발목만큼 굵은 동백나무 군락지를 두고 꾸준하게 오르니 참나무 한그루에서 세가닥의 줄기가 함께 자라고 있는 270.8봉에 도착을 해 다시 배낭에 붙어 있는 낙엽과 나뭇가지들을 제거하고 출발을 해 본다.
조금만 잡목지대를 통과하면 그 잡목 위에 떨어졌던 낙엽들과 나뭇가지들이 배낭과 이 산객의 등짝 중간에 쌓여 등줄기가 심한 고통으로 걸어갈 수가 없을 정도이다.
계속 이어지는 바위암릉과 잡목지대를 따라 참으로 힘든 산행을 이어가고 있다.
그래도 그렇게 한동안 진행하다 등로 우측을 보니 바로 발 아래로 드넓은 논 경작지가 펼쳐져 있고 그 넘어 득량만이 이어지고 그 득량만을 지나면 장흥쪽 호남정맥과 그 남쪽으로 해가 기울어져 가는 방향 아래 사자지맥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그렇게 조망을 즐기며 걸어 오르니 이제부터 본격적인 바위암릉 구간이 이어지고 그 암릉 구간은 수덕산 직전까지 이어지고 있다.
바위암릉이 이어지고 그 암릉 우측 낙엽 등로를 따라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이제부터 등로는 그 바위암릉 위를 통해 이어지도록 되어 있다.
그 바위암릉으로 올라 천천히 걸어 진행을 하니 등로 우측으로 드넓은 논 경작지와 득량만 그리고 장흥쪽 호남정맥의 사자산과 제암산 아래 사자지맥 마루금 위쪽으로 하루 해가 기울어져 가고 있다.
바위에 올라 조금 더 상세히 살펴보니 강렬하게 빛나며 하루를 마감하려는 일몰이 시작되는 곳은 바로 억새와 기암괴석으로 유명한 장흥의 천관산 자락이다.
한동안 그 일몰을 살펴보고 조금 더 걸어 진행하다 이제는 등로 좌측을 살펴보니 고흥읍이 바로 발 아래로 펼쳐져 있고 그 좌측 넘어 저 멀리 오늘 이 산객이 걸어 온 고흥지맥이 한눈에 보이기 시작하는데 가장 가까운 곳에 주월산과 그 뒤로 운암산 그리고 그 운암산 우측으로는 고흥지맥에서 벗어나 있는 깃대봉이 확연히 분간되는 시간이다.
그 뒤 저 멀리에는 톱날처럼 보이는 팔영산이 그 봉우리들만 운암산과 깃대봉 사이로 올려다 보이고 있어 또 다른 묘미로 다가오는 시간이기도 하다.
다시 바위암릉을 따라 걸어 진행하다 등로 우측을 살펴보니 득량만 넘어 저 멀리 호남정맥의 제암산과 일림산 자락이 보이고 그 좌측으로 장흥반도를 지나 흐르는 사자지맥이 다시 이 산객을 장흥으로 부르고 있다.
장흥의 천관산 자락 옆으로 기울러져 가는 일몰을 살펴보며 조금은 빠르게 걸어 진행을 하니 거대한 바위암릉지대를 지나 작은 감들이 가득 매달려있는 곳을 지나며 감 몇개를 따 먹지만 완전히 익지 않아 약간 떫다.
그 감나무 지대를 지나 오르니 금새 커다란 참나무에 정상판이 걸려 있는 300.9봉인 수덕산 정상에 도착을 한다.
수덕산(301미터, 산성흔적)은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 사덕리에 있는 산으로서 덕이 있는 좋은 산이 되라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처럼 보이는데 그 아래 사덕리의 수덕마을도 같은 뜻으로 이름이 붙은 듯 보인다.
수덕마을이 있는 사덕리는 전라남도 고흥군 도화면에 있는 리로서 남해바다에 접해 있는 해안 지역이며 사덕은 4개의 덕자가 든 마을이 합하여서 사덕이라 불리게 된 것으로서 반농 반어의 농촌이다.
마을에는 도화천이 흐르고 있으며 자연마을에는 덕흥, 덕촌, 덕방, 수덕, 하도가 있는데 덕흥, 덕촌, 덕방, 수덕은 덕이 있는 좋은 마을이 되라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고 하도는 마지막으로 사덕리에 편입된 마을로서 사덕리의 가장 아래쪽이며 남쪽 바다로 돌출한 마을이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제 바위암릉이 끝났는지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등로를 따라 걸어 내려가니 석축이 있었는지 돌담들이 흩어져 있고 그 돌담 위에 오르니 등로 우측 앞 저 멀리 장흥의 천관산 좌측 자락으로 오늘 하루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수덕산 지나 보이는 돌담 성터에 올라 등로 우측 앞을 살펴보니 오늘 아침에 두꺼운 구름을 뚫고 팔영산 자락으로 떠오르던 태양이 이제 하루를 함께 보내고 득량만 넘어 장흥의 천관산 자락으로 그 모습을 감추려 하고 있다.
얼마만에 다시 산상에서 만나는 일몰인지 기억도 가물거리는 시간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살아 있음을 느끼는 시간이니 견딜만 하지만 잡목과 가시나무에 깊은 생채기가 난 몸뚱아리는 쓰라리고 아품에 고통이 밀려오는 시간이다.
하지만 그 멋진 일몰도 잠시 아직도 가야 할 지맥 거리가 멀게만 남아 있기에 걱정이 앞서는 시간이기도 하다.
일몰을 구경하며 잠시 더 걸어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다시 아름다운 고흥읍이 내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그 고흥읍으로 가는 길목에 좁고 긴 논 경작지가 펼쳐져 있고 그 한가운데에 섬같은 나즈막한 산 하나가 눈길을 사로 잡는다.
그 고흥읍 넘어로는 병풍처럼 둘러친 내일 걸어 넘어야 할 조계산과 천등산 그리고 그 좌측 저 멀리 비봉산이 환상의 모습으로 펼쳐져 있어 바쁜 이 산객의 발걸음을 붙잡고 있다.
많은 사진 남기고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빠른 발걸음으로 그 수덕산을 내려가 본다.
진행하다 등로 앞 남쪽을 살펴보니 이제부터 걸어 넘어야 할 어무산이 올려다 보이는데 직선거리로는 아주 가깝게 다가와 있지만 우측으로 돌고 돌아 고흥읍을 좌측에 두고 돌아가야 하기에 그곳에 도착을 하려면 아직도 많은 시간이 더 필요할 듯 보인다.
그렇게 한동안 주위 풍경과 조망을 즐기며 조심해 내려가니 커다란 바위 두개가 보이고 그 옆으로는 지독한 잡목과 가시나무가 다시 발목을 붙잡고 갈 길 먼 이 산객의 발길을 막는다.
잡목과 가시나무로 난도질 당한 온 몸에 다시 생채기가 나면서 고통이 극심하게 밀려오는 시간이기도 하다.
너무나 어렵게 그 잡목과 가시나무 지대를 지나 걸어 내려가니 정상 등로는 다시 우측 잡목지대로 이어지지만 좌측으로 뚜렷한 등로가 보여 그 등로를 타고 화적재로 내려가기로 한다.
묘지 두기를 지나 뚜렷한 넓은 등로를 타고 빠르게 걸어 내려가니 고흥읍까지 300미터 그리고 수덕산에서 400미터 내려 왔다는 이정표를 만나고 잠시 후 100미터 더 내려간 지점에서 또 다른 이정표를 만나 사진 한장 남기고 내려가 본다.
고흥읍까지 100미터 남아 있다는 이정표를 지나니 드디어 수덕산 정상까지 700미터 거리라는 이정판이 서 있는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화적재에 도착을 해 도로를 타고 우측으로 올라 고갯마루에 설치된 약수터 옆 벤취 쉼터에서 배낭과 몸에 붙어 있는 낙엽과 나뭇가지들 그리고 가시들을 제거하고 시원한 약수 한사발 들이키는 조금은 정신이 맑아지는 시간이다.
이곳 화적재에 도착을 하는 시간이 오후 5시 42분을 넘어가는 시간으로 이제 주위 사물들도 잘 보이지 않는 어둠이 짙어지는 순간이라 잠시 고민에 빠져보는 시간이다.
오늘 이곳에서 중단하면 좋을 것 같은데 그러면 내일 나머지 구간을 마무리하고 귀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이 돼 다시 한번 더 내려 와야 할 것 같아 오늘 산행 후 특별히 할 일도 없기에 계획대로 먹국재까지 천천히 진행하기로 한다.
다만 산행 후 버스도 끊기는 시간이라 어떻게 고흥으로 나가 저녁을 먹을 수 잇을지 걱정이지만 거리가 그리 멀지 않으니 택시를 이용한다 해도 기본 요금인 4,000.-원이면 가능하기에 큰 부담은 없는 거리이다.
더 진행하기로 결정하고 주위를 살펴보니 도로 우측으로 운곡사가 보이고 그 도로 건너 산행 들머리 방향으로는 준.희님이 걸어 놓은 화적재라는 이정판이 어둠속에 반짝이고 있다.
화적재는 고흥읍 성촌리에서 호동리로 넘어가는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고개인데 왜 화적재인지에 관한 자료는 찾을 수 없었다.
화적재에서 헤드렌턴을 꺼내 이마에 차고 2차선 포장도로를 건너 보이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걸어 들어가자 마자 도로 우측으로 보이는 준.희님의 화적재라는 이정판이 보이는 곳 우측 밭 경작지쪽으로 걸어 오르니 높은 송전탑 하나가 보인다.
그 송전탑을 지나 다시 만나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우측으로 걸어 오르니 다시 등로는 시멘트 포장도로 우측으로 나 있는 비포방 임도 같은 등로를 타고 능선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다.
무명묘지 한기를 통과하고 조금 더 걸어 오르니 간벌된 나뭇가지들이 널부러져 있는 편백나무 군락지를 타고 완만하게 오르면서 이어지고 있다.
한동안 그런 편백나무 군락지를 타고 걸어 오르니 등로는 조금 더 가파르게 이어지고 곧이어 무명묘지 2기를 만나 통과한다.
묘지를 지나 잡목이 우거진 짧은 등로를 타고 오르니 등로는 다시 뚜렷한 넓은 등로로 이어지며 조금은 위안을 주고 있다.
그렇게 한동안 걸어 오르니 어둠은 점점 더 깊어만 가는지 불빛이 더욱 밝게 빛나고 있고 조금 더 걸어 진행을 하니 갈림삼거리가 나타나는데 이곳에서는 좌측 등로를 버리고 우측의 넓은 비포장 임도를 타고 진행을 해 본다.
조금 더 걸어 오르니 등로는 다시 편백나무와 동백나무 그리고 측백나무들이 우거진 등로로 변하면서 세가지 나무가 한그루 서 있는 191.7봉에 도착을 하는데 그곳에서 등로는 좌측으로 크게 꺽어 진행을 해야 하는 길주의 지점이다.
좌측으로 크게 꺽어 진행하니 지금까지 좋았던 등로는 사라지고 잡목과 측백나무들이 등로를 막아 진행에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마루금으로 변하고 있다.
다시 등줄기에 수많은 낙엽과 잘려진 나뭇가지들로 고통이 밀려오고 그 고통을 참으며 진행을 하니 커다란 바위 옆에 소나무 한그루가 힘겹게 살아가는 228 무명봉에 도착을 해 어둠속에 등줄기에 파고 들어 온 나뭇가지들을 제거하고 출발한다.
그렇게 지독한 잡목지대를 뚫고 걸어 전진하니 등로는 다시 뚜렷하게 이어지고 편안하고 빠르게 걸어 전진하니 또 다시 시멘트 포장도로를 만나 그 도로를 가로 질러 능선 방향으로 들어가니 뚜렷한 등로가 이어지고 있어 긴 한숨부터 내쉬어 본다.
이곳 시멘트 포장도로는 신촌고개(시멘트 포장도로)로서 이 고개는 고흥군 고흥읍 호동리에서 고소리 신촌마을로 넝어가는 고개로서 신씨가 입주하여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신촌마을 뒤에 있는 고개라서 붙은 이름처럼 보인다
신촌고개가 있는 고소리는 전라남도 고흥군 고흥읍에 있는 리로서 서쪽으로 바다와 가까이 닿아 있는 지역이다.
자연마을에는 유동, 사동, 중촌, 신촌이 있는데 유동은 옛날에 유씨가 입주하여 마을을 이루었으므로 붙은 이름이고 사동은 마을 앞 바닷가에 모래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중촌은 가운데 마을이라는 의미이고 신촌은 신씨가 입주하여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의미이다.
잠시 더 걸어 진행을 하니 어둠이 짙어지며 이마에 찬 헤드렌턴 불빛이 강렬하게 빛나는데 하늘에 떠 있는 달빛이 더욱 처량하게 이 산객을 내려다 보고 있어 잠시 상념에 젖은 마음으로 그 달빛을 담아 본다.
보름이 가까워졌는지 거의 원형에 가까운 달이 환하게 이 산객이 지나는 등로를 비춰주고 있지만 잡목과 편백나무들이 머리를 가려 그 밝은 달빛이 등로까지 전해지지는 않는 시간이다.
이 야심한 어둠속에 저 달빛을 보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되고 또 어떤 사람들이 저 달빛을 공유하고 있을지 궁금해지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능선으로 들어가니 수북하게 쌓여 있는 마른 낙엽들이 더욱 큰 소리로 바스락 거리기 시작하고 조용하게 잠들기 시작한 자연속에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계속 이어지는 뚜렷한 등로를 따라 완만하게 오르니 큰 소나무 한그루와 바위 몇개가 혼재되어 있는 221 무명봉에 도착을 하는데 그곳에서도 배낭과 등판 사이에 많은 낙엽과 나뭇가지들이 쌓여 있는지 고통이 밀려 와 잠시 배낭 내려 그 나뭇가지들을 제거하고 출발한다.
그곳을 지나니 다시 측백나무들이 등로를 가로막아 진행에 어려움을 가중시키는데 그 측백나무를 통과하는 시간에도 역시 극심한 통증이 유발되고 있다.
측백나무 지대를 지나니 다시 잡목의 저항이 거칠어지기 시작하고 깊게 쌓여 있는 낙엽속에 어둠이 짙어지니 제대로 된 등로를 찾아 걸어 진행하기조차 쉽지 않은 시간이다.
잠시 후 바위들과 벗나무가 혼재되어 있는 무명봉을 넘어 천천히 걸어 전진하니 커다란 참나무 세그루가 서 있는 228.4봉에 도착을 해 사진 몇장 더 남겨 본다.
벌써 시간은 오후 7시를 넘어가는 시간이기에 조급하지 않게 천천히 안전하게 마무리할 수 있기만을 빌어 보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그 봉우리를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금새 비포장 임도를 만나고 잠시 그 비포장 임도를 따르다 우측 콘크리트 옹벽을 넘어 능선으로 오르면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잠시 오르니 등로는 바위 너덜길로 이어지고 그 너덜길을 따라 진행을 하니 키 작은 돌탑이 반겨 준다.
이제 지도를 살펴보니 오무산이 얼마 남지 않은 거리이지만 어둠속에 깊게 깔려 있는 낙엽속에 정상 등로를 찾아 진행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기에 조급하지 않게 천천히 걸어 진행을 이어가 본다.
너덜길을 넘어 오르니 다시 약간의 잡목들이 보이지만 진행에는 큰 어려움을 주지 않기에 편안하게 걸어 올라 본다.
하지만 그것더ㅗ 잠시 곧바로 지독한 잡목들이 앞을 가로막고 많은 먼지를 마시며 힘들게 통과하니 넓은 비포장 임도로 내려선다.
그 비포장 임도를 지나 능선으로 들어가니 주인이 무단 출입과 벌목을 금지한다는 경고판이 보이고 잠시 후 다시 비포장 임도를 만나 그 임도로 내려 선다.
그 비포장 임도를 지나 지그재그로 정상 등로를 어렵게 찾아 오르니 드디어 오늘 산행의 마지막 봉우리인 오무산 정상에 도착을 해 삼각점과 정상판을 사진에 담아 본다.
오무산(어무산, 356.5미터)은 고흥군 고흥읍 고소리와 등암리 및 풍양면 상림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는 산패 하나와 2등 삼각점 하나가 전부이다.
자료를 찾아 보니 오무산이란 지명유래는 커다란 자라가 헤엄을 치며 춤을 추었던 바다가 융기를 해서 높은 산봉우리를 세웠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이곳의 산세가 마치 자라가 춤을 추는 형국이라 하여 자라 오자와 춤출 무자를 써서 오무산이라 불렀다고 전해지기도 하는데 어느 지도에는 어무산이라 표기가 되어 있기도 한 산이다.
이제 시간을 보니 저녁 7시 37분을 넘어가는 시간인데 먹국재까지는 아직도 갈길이 멀기에 느긋하게 걸어 보는 시간이다.
오무산을 지나 천천히 걸어 내려가니 무명 안부를 지나고 곧이어 비포장 임도로 내려 선다.
비포장 임도를 지나 능선으로 들어 걸어가니 금새 무명 묘지 한기를 통과하고 곧이어 바위 너덜길이 짧게 이어지고 있다.
바위 너덜길을 타고 걸어가는데 바위가 작다보니 흔들리는 바위들도 잇고 그 위에 많은 낙엽들이 쌓여 있어 생각보다 조심스럽게 걸어 전진하니 금새 또 다른 송전탑을 통과하는데 어둠속이다 보니 번호를 확인하기는 불가능하다.
송전탑을 지나 파란 잎이 인상적인 동백나무 식재지를 걸어가니 시멘트 포장도로에 도착을 해 그 포장도로를 건너 다시 능선으로 진행이 되고 있다.
능선으로 들어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갑자기 등로 우측으로 녹슬었지만 제법 높은 철조망이 나타나고 그 철조망을 타고 걸어 진행하도록 되어 있다.
잠시 그 철조망을 타고 걸어 내려가니 등로는 그 철조망과 멀어졌다 가까워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그렇게 한동안 걸어 내려가니 다시 녹슨 철조망과 헤어져 시멘트 포장도로에 도착을 하는데 살펴보니 좌측으로는 시멘트트 포장도로가 그러나 우측으로는 비포장 임도가 교차하는 그 도로를 건너 다시 능선으로 오르며 진행이 이어지고 있다.
능선으로 오르니 초반에는 제법 뚜렷한 등로가 이어지더니 금새 지독한 잡목 능선으로 이어지며 마지막까지 이 산객의 진을 완전히 빼 놓고 말았다.
너무나 힘들게 그 잡목과 가시지대를 뚫고 전진하니 온 몸에선 고통이 극심하게 전해지며 아우성을 지르기 시작하고 그렇게 어렵게 걸어 오르니 잡목이 완전히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127.3봉에 도착을 한다.
아무리 바쁘지만 등줄기에 파고 든 나뭇가지로 인해 고통이 심하기에 다시 배낭 내려 놓고 나뭇가지들을 털어 낸 후 출발을 해 보는 시간이다.
잠시 걸어 내려가니 무명 묘지 한기를 통과하고 다시 나타나는 지독한 잡목지대를 어렵게 뚫고 걸어 내려가니 눈 앞에 갑자기 녹색 철망이 타나난다.
잠시 헷깔려 주의하며 지도를 살펴보니 그 녹색철조망을 우측에 두고 좌측으로 돌아가게끔 되어 있다.
좌측으로 돌아 내려가니 뚜렷한 등로가 보이고 곧이어 잘 정리된 몇기의 묘지들이 보이는 곳으로 내려 가 또 다시 녹색 처망과 만난다.
이제 그 녹색 철망을 따라 좌측으로 걸어 내려가니 이곳은 바로 은성산업에서 운영하는 태양광 발전소 단지였다.
잠시 후 만나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우측에 녹색 철망을 두고 걸어 내려가니 공장이 보이고 강아지 몇마리들이 울부짓는데 그 소리마저도 정겹게 들으며 곧이어 2차선 포징도로가 지나는 먹국재에 도착을 하는데 그 2차선 포장도로 앞으로는 27번과 77번의 4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곳이기도 하다.
먹국재(27번과 77번 구 2차선 포장도로와 신 4차선 포장도로)는 고흥군 고흥읍 등암리와 상림리를 이어주는 고갯마루로서 22번과 77번 포장도로가 함께 달리는 곳이기도 하다.
우측으로는 소록도와 녹동으로 이어지고 좌측으로는 고흥과 벌교를 이어주는 도로들이다.
이곳에 도착을 해 시간을 보니 저녁 8시 55분을 넘기고 있어 간단히 배낭을 정리하며 배낭속에 남겨진 낙엽과 나뭇가지까지 깨끗하게 털어 낸 후 일단 2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좌측의 고흥군 보건소 방향으로 걸어 내려가 본다.
잠시 걸어 내려가니 도로 좌측으로 태성스텐 이전안내판이 보이고 곧이어 고흥군 보건소 앞 보건소 버스정류장에 도착을 한다.
그곳에서 도로 건너편에 보이는 SK LPG 주유소로 들어가 직원에게 고흥가는 버스편을 확인해 보니 이미 버스가 끊겨 택시를 이용해야 될 것 같다는 안내를 해 준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그 주유소 앞 공터에서 최종적인 배낭을 정리하고 고흥읍에 있는 명동찜질방을 확인하며 시간으,ㄹ 보내는데 그 SK LPG 주유소에 가스를 주유하기 위해 온 고흥 택시 기사 한분이 주유소 직원에게 들었다며 버스비만 내고 고흥으로 돌아가자고 말을 건넨다.
너무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그 택시를 타고 1,000.-원에 고흥버스터미널까지 가기로 했는데 이왕 가는 것 명동찜질방까지 부탁을 하고 미안한 마음에 3,000.-원을 건네니 2,000.-원만 받고 그것도 고맙다며 가 버린다.
양심적인 택시 기사를 만나 기분 좋게 명동 찜질방으로 들어 가 샤워 후 식사가 가능한 식당을 찾아 보지만 근처에는 보이지 않아 버스 터미널 방향으로 가다 보이는 족발과 보쌈집으로 들어가 내장탕에 소맥 몇잔을 들이키니 이제서야 살 것 같다는 생각이다.
맛은 좋았는데 내장의 양이 적어 아쉽다는 인사를 건네고 다시 찜질방으로 뒤돌아 와 충전기와 모바일 폰을 충전시킨 후 곧바로 잠자리에 드니 시간은 벌써 저녁 11시를 넘기고 있다.
깊은 잠을 자고 일어 나 내일 하루 더 고흥지맥에 올라 무탈하게 마무리하고 올라 갈 수 있기를 바래보는 시간이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
첫댓글 길없는 길을 간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지요. 씻을려고 몸을 보면 온 몸에 생채기가.. 그렇다고 산객들이 밟지않은 길을 간다는 것이 다리에 힘이 많이 들어가기도 하지만 , 길이 아닌 경우가 많아서.. 수고하셨습니다. 그래도 보름달이 칠갑산님을 비춰주고 있네요. 마지막 마무리 잘 하시고요..^^
네 현상님,
이번 고흥지맥 산행은 특히 지독한 잡목과 가시나무로 인해 온 몸이 성한 곳이 없더군요
손과 발은 물론 등짝과 허벅지까지 잡목과 가시에 찔리고 생채기를 만들다 보니 고통이 심했고 특히나 잡목 위에 떨어진 낙엽과 나뭇가지들이 등짝과 배낭 사이로 떨어지며 등쪽에 많은 상처를 만들었더군요
그래도 그 고통을 참으며 무탈하게 마무리하고 올라오는 시간은 그저 꿈결 같았던 시간이었답니다
늘 성원해 주심에 감사 드림니다 현상님
가시밭길 천국 고흥지맥
사진을 보니 그때가 생각납니다...
그 험한길 마무리 하심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산너머님
그렇잖아도 무한도전 띠지와 이쁜척하쥐님 띠지가 많은 도움이 되었지요
생각보다 더 지독한 잡목과 가시로 인해 온 몸이 난도질 당해 아직도 아프고 큰 상처가 남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지맥 산행에 빠져 들게 되는가 봅니다
늘 열정적인 산행기 잘 보고 있답니다
건강하게 이어가시는 맥 잇기 산행도 즐기시는 시간 되시기 바람니다
2년만에 고흥지맥을 이어가시느라 감회로우셨겠습니다.
출발전 교통편의 아쉬움도 날머리에서 친절한 기사분을 만나 지워졌으리라 생각됩니다.
종일 잡목과 낙엽에 씨름하면서 3시간 넘는 야간산행도 감행하셨구요..
수고많으셨습니다.
이어지는 지맥 마무리 여정길 기대됩니다.^^
네 방장님
너무나 어렵고 힘들게 진행을 하였지만 좋은 분들을 만나 무탈하게 완주를 하고 올라 올 수 있었답니다
큰 상처를 남겼지만 완주 후 올라 와 산행기 정리하다 보니 그 고통은 모두 사라지고 고운 추억만 남았네요
이번주 토요일 모임에는 가능하면 참석해 얼굴 한번 뵐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남쪽 지방이라 아직 가을 같다는 느낌~
하늘은 맑고 바다는 푸르고
그런데 가시잡목길이 말썽이네요
수고많으셨습니다
네 기차산꾼님
최남단이다 보니 서울쪽 보다는 따뜻하고 찬공기도 조금은 덜한 느낌이었답니다
특히 동백나무들이 많아 푸르른 잎이 보이니 더욱 삭막한 한겨울 생각은 덜 났던 것 같았습니다
선답자들의 산행후기를 살펴보며 어느정도 잡목과 가시나무를 각오는 하고 갔지만
그정도 일줄은 정말 몰랐답니다
그래도 무탈하게 완주 후 올라 올 수 있어 다행이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