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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지 : 경상북도 영주시와 안동시 그리고 예천군의 문수지맥 마루금 일대
산행날자 : 2017년 09월 29일 금요일 당일 산행
산행날씨 : 새벽에 약간의 한기를 느꼈지만 일출 후부터 맑고 쾌청한 가을 날씨에 조금은 무더위를 느꼈던 산행날씨
산행온도 : 영상 11도에서 영상 25도
산행인원 : 칠갑산 나 홀로
산행코스 : 지곡1리 버스정류장-선황재(금계 시멘트 포장도로)-401.9봉-이정표(봉서사 0.4 Km) 안부-금계굴(중앙선) 위-금계산(507.1봉, 정상석과 헬기장)-무명안부-369.8봉(큰두재봉?)-돌무덤 안부-
큰두무재(928번 2차선 포장도로)-시멘트 포장도로-능선진입-철도터널 위-389.7봉-무명안부-417.5 삼각점봉-412.4봉-60번 송전탑-비포장 임도-561.6봉(도산?)-길주의 지점-천등산 갈림삼거리-
501.2봉-천등산(576봉, 정상석과 삼각점)-천등산 갈림삼거리 복귀-밭 경작지-사과과수원-백현고개(2차선 포장도로)-497봉(백현산?)-조운산 갈림삼거리-조운산(634.5 묘지봉)-조망처-
조운산 갈림삼거리 복귀-전봇대2개-운곡고개(비포장 임도안부)-465 무명봉-493.9봉-비포장 임도안부-40번 송전탑-가선대부 묘지-비포장 임도안부-아카시아 고사목지대-485.1봉-
새터고개(무시골재, 1차선 포장도로) 이정표(메밀단지)-1차선 포장도로-제1주차장(정상까지 2.6 Km)-능선진입-바위지대-녹슨 철조망-(이전된 군부대 철조망 안에서 한바퀴 돌며 방황)-
사각정자-난가대-학가산문화환경연구소-산불감시초소에서 조망-녹슨 철조망 통과-시멘트 포장도로-KBS 학가산송신소 갈림삼거리-학서대 이정표-기도처-학가산 등산로안내도와
이정표(국사봉 0.5 Km, 난가대.학서대 0.8 Km, 신선바위 1.4 Km, 당재)-MBC 학가산 송신소-유선봉-바위로프구간-바위봉 전망-국사봉 삼거리 설명판과 이정표(당재 2.5 Km, 삼모봉 0.3 Km,
국사봉)-철계단-학가산(882봉, 정상석)-예천 학가산 갈림삼거리(등산로안내도와 안부 이정표-인굴.애련암, 당재)-능인굴-이정표(당재, 상사바위, 국사봉)-무인산불감시초소-학가산(예천 학가산,
882봉 정상석)-이정표(남영사지, 당재, 국사봉)-무명묘지2기-이정표(남영사지, 당재, 국사봉)-묘지2기-이정표(상사바위, 당재, 국사봉)-비포장 임도-사과과수원-당재 이정표(보문산 4.3 Km,
학가산 1.2 Km)와 안부 이정표(국사봉 2.5 Km, 느리티리 0.4 Km, 천주마을 1.4 Km)-비포장 임도-폐가-능선진입-임산물 재배지 철조망-623.5봉(묘지봉, 광산?)-원통재(삼거리 멘트 포장도로)-
사과과수원-시멘트 포장도로-능선진입-바위지대-502 무명바위봉-521 무명묘지와 바위봉-송이움막터-575.1 바위봉-570 참꽃봉-갈마령 거목안부-577.8 묘지봉-558.4봉-폐헬기장-
불난지역 시작-보문산(642.6봉, 삼각점과 산불감시초소 및 헬기장)-불난 고사목들-중대바위 갈림삼거리-중대바위-중대바위 갈림삼거리 이정표(문수지맥, 중대바위, 보문산)-448.5봉-
시멘트 포장도로와 비포장 임도 안부-묘지지대-밭 경작지-인삼포-오치고개(보문고개, 7번 2차선 포장도로) 이정표(506.9봉 1.5 Km, 보문산 2.3 Km)-안동권공 묘지-지독한 잡목지대-
506.9 삼각점봉-오백육고지 이정목-467 고사목봉-393.5봉-지독한 칡넝쿨 지대-백붕현(시멘트 포장도로)-문수지맥 산행종료-풍산읍 현애리 마을-산행종료
산행거리 : 이전한 군부대에서 방황하고 불난지역의 지독한 잡목지대에 싸우면서 힘들게 진행하여 31.51 Km (스마트 폰의 GPX 기준)
산행시간 : 이전한 군부대에서 방황도 하고 불난지역의 지독한 잡목지대와 싸우면서 힘들게 진행하여 13시간 43분 (05시 31분에서 19시 14분까지)
산행트랙 : 20170929 문수지맥 제3구간 선황재-백붕현[1].gpx
교통편 : - 애마와 택시를 이용 (안동 탈축제가 시작되어 택시 부르기에 상당히 어려움 껶었음)
- 갈때 : 애마를 이용해 지곡1리 버스정류장까지 이동
- 올때 : 백붕현에서 안동까지 트럭 히치 하이킹
안동에서 지곡1리 버스정류장까지 안동택시 이용(19,000.-)
- 숙박 : 안동시 안동온천 사우나에서 편안하게 하룻밤 휴식
문수지맥이란?
백두대간 옥돌봉(1244미터)서남쪽 280미터 지점에서 분기하여 서남진하며 낙동강 본류와 내성천을 가르며 문수산(1207.6미터), 갈방산(712미터), 만리산(791.6미터), 용두산(665미터), 복두산(509미터), 요성산(490미터), 박달산(580미터), 봉수산(569.6미터), 천등산(575.4미터), 조운산(635미터), 학가산(874미터), 보문산(641.7미터), 대봉산(210미터), 검무산(331.6미터), 나부산(330미터)을 일구고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이 낙동강 본류에 합수되는 삼강나루앞에서 그 맥을 대하는 도상거리 약114.5km 정도되는 산줄기이다.
이전된 군부대와 불난지약의 지독한 잡목들로 인해 상당히 어렵게 걸었지만 간간히 터지는 환상의 조망으로 즐겁게 걸었던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지도와 산행후기를 참고한 후 난해하고 어려운 마루금 잇기 산행을 무탈하게 완주하고 돌아왔기에 단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이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긴 추석 연휴가 시작되지만 돌아 오는 일요일과 월요일에는 비가 예보되어 있어 고민하다 하루 일찍 시간을 내 조금은 긴 거리이지만 2년 전 진행하다 중단된 문수지맥 나머지 구간을 다녀 오기로 하고 준비를 해 본다.
2년 전 초가을에 내려가 두 구간 동안 홀로 길게 걸어 선황재 일명 금계 콘크리트 임도에서 늦은 밤에 마무리하고 힘들게 올라 온 기억이 있어 이번에 다시 내려가 황금빛으로 변해 있는 회룡포를 구경하고 올라 올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램이지만 역시나 지독한 잡목과 잡풀들로 인해 계획된 산행이나 마무리하고 올라 올 수 있을지 확신은 없다.
그래도 일단 내려 가 진행을 해 보고 걸어 보다 중간에 진행이 어려울 것 같으면 중단하고 올라오자 마음 먹고 추진하니 조금은 마음이 편안하게 내려갈 수 있었다.
다만 첫 산행일인 금요일은 올해 들어 가장 춥다고 예보가 되어 있지만 햇살이 비추는 낮이 되면 다시 무더위에 고생될 것 같아 등산복 선택에 조금은 어려움을 느끼는 시간이다.
목요일 저녁에 산행 준비 후 잠시 잠을 청해 보지만 잠은 오지 않고 정신만 더욱 뚜렷해져 잠을 포기하고 산행 후기를 읽다 보니 날이 바뀌어 금요일 새벽이 지나고 가족들이 잠든 시간에 조용히 집을 빠져 나오니 새벽 2시를 넘기고 있다.
생각보다 막히지 않는 도로를 타고 정상 속도로 달려 2년 전 고생한 선황재로 가 보니 시멘트 포장도로가 이어져 있지만 주차할 장소도 없고 산중에 주차를 할 수가 없어 다시 큰 도로가 지나는 지곡1리 마을 앞 버스 정류장 옆 공터에 애마를 주차시키고 어둠속에 산행 준비를 하니 새벽 5시를 넘겨 동내 할머니가 불빛도 없이 혼자 밭으로 향하고 있어 이 어두운 시간에 일이나 할 수 있겠느냐며 질문을 하니 밭에 도착을 하면 금새 날이 밝아 일을 할 수 있다며 이 한밤중에 무슨 산행을 하냐며 오히려 이 산객을 걱정하는 눈치이다.
잠시 인사 나누고 산행 준비 후 지곡1리 버스 정류장을 출발하는 시간이 새벽 5시 30여분을 지나고 있는데 이제 계절이 바뀌며 하루 해도 제법 짧아졌다는 느낌으로 걸어 본다.
생각보다 춥지 않은 기온으로 상쾌하게 출발을 하여 길게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오르니 금새 문수지맥 마루금에 시멘트 옹벽이 설치되어 있는 금계임도 즉 선황재에 도착을 하고 어둠속에 2년 전 힘들게 내려왔던 기억을 더듬어 본다.
그곳에서 좌측 능선으로 올라 고속도로처럼 나 있는 등로를 따라 조금은 빠르게 진행을 하니 어렵지 않게 금계산 정상부에 도착을 하는데 기온이 많이 내려갔는지 아직도 이마에선 땀방울이 나질 않는다.
잠시 그곳에서 주위 풍경을 살펴보니 드디어 동쪽 저 멀리 나즈막한 산줄기 사이로 하얀 운해가 깔려있고 그 뒤 저 멀리 낙동정맥 마루금의 백암산 남쪽으로 맹동산과 명동산 자락 위쪽으로 찬란한 아침 햇살이 떠 오르고 있다.
늘 짙은 안개와 미세먼지 그리고 구름으로 인해 제대로 된 일출 한번 만나기 어려웠는데 근래에는 오르는 날마다 늘 이런 황홀한 일출을 만나게 되니 그것도 또한 복이 아닐까 생각도 해보며 그 아름다운 햇살을 온 몸으로 받아보는 시간이다.
새터고개 일명 무시골재에서 이어지는 포장도로를 타고 학가산 정상으로 올랐으면 좋았을 것을 굳이 좌측 능선으로 들어 산행 중 가장 최악의 이전된 군부대 철조망에 갇혀 그 이전된 군부대 철조망을 따라 한바퀴 돌아 와 너무나 힘들게 2중으로 설치된 녹슨 철조망의 개구멍을 통해 그 군부대를 탈출하여 학가산 정상부로 오르니 지금까지의 고생에 대한 보상이라도 해 주듯 그곳에 환상의 조망이 펼쳐져 있다.
제일 먼저 북쪽으로 보이는 예천 학가산 정상부 우측으로 끝없이 펼쳐진 풍경을 살펴보니 좌측 저 멀리 자구지맥 끝자락에 분기되는 도솔봉이 보이고 그 우측으로 소백산 비로봉과 연봉들이 죽 이어지고 있다.
그 우측으로 자개지맥과 분기봉 그리고 백두대간의 옥돌봉과 문수산으로 이어지는 문수지맥이 보이고 그 우측 넘어로 태백산도 가물거리지만 그곳은 너무 멀기에 알듯 말듯 멀어져 있다.
그 앞으로는 영주시내가 펼쳐져 있고 그 좌측으로 문수지맥 끝자락에서 다시 만나야 할 내성천도 보이고 있어 그저 탄성만 나오는 풍경들이다.
보문산 오르막 등로부터 선답자들이 악몽 같았다고 했던 불난 지역의 지독한 잡목과 잡풀들이 사람 키 보다도 더 크게 자라며 등로도 보이지 않는데 그 바닥에는 불에 탄 거대한 고사목들이 제멋대로 쓰러져 더욱 진행 속도를 줄이고 있다.
그래도 힘들게 내려가니 아름다운 중대바위가 보이고 그곳으로 올라 남아 있는 과일로 허기를 달래며 진행 방향을 살펴보니 이제부터 올라야 할 340봉과 오치고개 지나 506.9봉이 우뚝 솟아 있어 아직도 진행해야 할 거리가 만만치 않게 남아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 506.9봉 뒷쪽으로 내일까지 걸어야 할 문수지맥 마루금이 끝없이 이어지며 그 끝자락이 보일듯 다가오지만 이 지독한 잡목과 잡풀을 헤치며 걸어 가야한다는 사실이 두 다리를 무겁게 만들고 있다.
그래도 이제는 그 끝자락이 보일 듯 다가오니 조금은 마음의 위안을 삼아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새벽 찬공기를 마시며 어렵게 도착한 산행 들머리인 지곡1리 버스 정류장 옆 공터에 애마를 주차 시키고 산행 준비를 하면서 저녁 마지막 버스를 타고 이곳으로 무탈하게 돌아 올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서는 시간이다.
이전한 군부대를 통해 학가산 정상부 도착과 불난 지역의 잡목이 어떻게 자라 있을지 모르기에 산행 속도에 대한 확신이 없어 조금은 불안하지만 버스를 탈 수 없다면 어쩔 수 없이 택시를 타야 하지만 오늘부터 이곳 안동에서 탈 축제가 시작되어 그것이 문제가 될 듯 하다.
이곳 지곡리는 경상북도 영주시 평은면에 있는 마을로서 왕머리마을은 고려 제 31대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안동으로 가는 길에 이곳에서 머물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용암산이 위치하며 하천이 마을을 끼고 남북으로 흐르며 자연마을로는 지신동, 삼밭골, 새장골, 새마을 등이 있다.
삼밭골은 마을 앞에 있는 넓은 밭에 농사를 지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새마을은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헤드렌턴 불빛을 친구 삼아 지곡1리 버스 정류장을 출발하는 시간이 정확히 새벽 5시 30분을 넘어가고 있는데 하루 해가 짧아 졌는지 아직도 한밤중 어둠속 세상이다.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선황재 방향으로 계속 걸어 올라가니 지곡리 마을의 견공들이 이방인의 출현에 짖어대기 시작하여 주민들에게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다.
비닐하우스와 민가들을 지나 계속 오르니 서서히 여명이 밝아 오기 시작하고 그 불빛에 이끌려 뒤돌아 보니 저 멀리 첩첩 산중 산그리메가 이어진 동쪽 하늘 위로 붉은 기운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아직 이곳 해발고도가 낮고 어둠이 짙어 저 멀리 보이는 산군들을 분간하기는 어려워 보이지만 방향만은 가까운 용암지맥 지나 저 멀리 낙동정맥의 마루금 위가 아닐까 추측을 해 보는 시간이다.
그렇게 한동안 더 걸어 오르니 등줄기와 이마에서 약간의 땀방울이 배어 나올 쯤 정확히 2년 전 하산 후 다시 찾은 금계 임도인 선황재에 도착을 해 시멘트 옹벽을 살펴 본다.
그때도 이곳에 도착하였을 때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려 헤드렌턴의 불빛을 받아 어렵게 사진 한장 남겼던 기억이 떠올라 피식 웃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곳 금계동은 경상북도 영주시 평은면 강동리에 있는 마을인데 강동리는 구릉성 평지에 자리한 마을로 들이 넓게 펼쳐져 있어 논농사가 주로 이루어지며 작은 하천이 마을을 감싸 흐른다.
강성동, 동막동, 금계동 등을 병합하면서 강성과 동막의 이름을 따 강동리라 하였는데 자연마을로는 강성, 점촌, 신촌, 성안, 왕머리마을 등이 있다.
강성마을은 내성천 가가 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점촌마을은 강동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옹기점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신촌마을은 점촌 서북쪽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칭해진 이름이고 성안마을은 전에 이곳에 성이 있었다 하여 불리게 된 이름이다.
아쉽지만 어둠속에 다시 사진 한장 남기고 진행 방향의 좌측 능선으로 오르며 길고도 먼 문수지맥 제3구간 산행을 시작해 본다.
오룩스 맥을 확인해 보니 지곡1리 버스정류장에서 이곳 선황재까지 정확히 1.9 Km 거리를 채 15분도 걸리지 않게 걸어 올라 와 이제 좌측 능선으로 오르니 약간의 잡목들이 보이지만 생각보다 좋은 등로를 따라 완만하게 걸어 올라 본다.
잠시 오르니 잘 벌초가 되어 있는 묘지 한기를 지나 금새 커다란 소나무들과 활엽수들이 혼재되어 있는 지도상 401.9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기고 출발한다.
다시 이어지는 오솔길 같은 뚜렷한 등로를 타고 잠시 더 걸어 진행을 하니 등로는 이제 고도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주능선을 따라 평이하게 이어지고 있다.
그렇게 잠시 더 걸어가니 완만하게 내려가 안부를 지나는데 그 안부 좌측으로 봉서사까지 400미터 거리라는 이정표 하나가 서 있다.
봉서사는 경상북도 안동시 북후면 옹천리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6교구 본사 고운사의 말사로서 봉서사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영주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625~702)이 종이로 봉황을 만들어 도력으로 날렸는데 봉황이 이곳에 내려 앉아 알을 품었다 하여 봉서사라 이름 지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보광전은 1863년 중수 하였으며 포란루는 대정 7년 2월 7일 기둥을 세우고 17일 상량하였다 라는 상량문의 기록으로 보아 1918년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제 날이 밝아 오며 헤드렌턴 불빛 없이도 진행에 큰 어려움이 없기에 헤드렌턴을 배낭에 넣고 여유롭게 걸어 보는 시간이다.
이제부터 넓은 비포장 임도같은 뚜렷한 등로를 따르니 등로 옆으로 벤취 쉼터도 보이고 잠시 후 바위들도 보이기 시작한다.
다시 완만하게 내려가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다시 완만하게 오르니 넓은 헬기장으로 이워진 금계산 정상에 도착을 하는데 마침 동쪽 하늘에선 시간 맞춰 밝은 하루 해가 찬란하게 떠 오르기 시작한다.
금계산(506미터)에 관한 자료를 찾아 보지만 찾을 수 없었는데 어느 선답자의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여 용인해 보면 서쪽에 닭만한 금덩이가 묻혔다는 전설이 있으며 왜정 때 일본 사람들이 금점을 많이 했다는 글이 보인다.
셀카 놀이를 하면서 사진 한장 남기고 잠시 동쪽 저 멀리 낙동정맥 마루금 위로 떠오르는 일출을 감상해 본다.
늘 만나는 일출이지만 이렇게 홀로 마루금에 올라 만나는 일출은 특별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안동시 동쪽으로 있을 안동호와 임하호의 영향 때문인지 용암지맥과 덕산지맥 사이로 하얀 운해가 가득 깔려 있고 그 넘어 저 멀리 낙동정맥 상 맹동산과 명동산 부근의 산줄기 위로 황홀한 아침해가 떠 오르고 있다.
홀로 보기 너무 아쉽고 아까운 풍경이기에 많은 사진을 남기며 한동안 쉬면서 간식으로 아침 허기도 달래고 출발하기로 한다.
잠시 정상석 옆으로 보이는 사각탁자에 올라 간식으로 아침을 대신하고 다시 배낭을 메고 출발하니 진행 방향의 소나무 가지 사이로 저 멀리 좌측의 조운산과 우측으로 인공 구조물들이 보이는 학가산이 막 떠 오른 아침 햇살을 받아 찬란히 빛나고 있다.
잠시 발걸음 멈춰 사진 몇 장 남기고 다시 출발하니 벌초가 되어 있는 무명 묘지 한기를 지나 소나무 등로를 따라 완만하게 내려 가 본다.
계속 이어지는 소나무 등로를 따라 완만하게 내려가니 제법 그럴듯한 안부를 통과하는데 지도에는 아무 표식도 없는 무명 안부이다.
안부를 지나 계속 걸어 진행을 하니 금새 소나무가 자라고 있는 369.8봉에 도착을 하는데 나뭇가지에는 서래야 박건석님이 큰두재봉이란 종이코팅지를 붙여 놔 찾아 보지만 그 어디에도 큰두재봉이란 봉우리를 찾지 못해 아쉽기만 하다.
맥 잇기 산행을 하다보면 많은 종이코팅지를 만나게 되는데 수고한 것에 비해 늘 아쉬움이 남는 것은 정확한 위치와 장소 표기가 불명확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369.8봉을 지나 잠시 더 걸어 진행을 하니 또 다른 덜무덤이 있는 안부가 나타나는데 이곳 역시 지도에는 아무 표기가 없는 무명안부인데 등로 한쪽으로는 파란 그물망도 보인다.
안부를 지나 진행하니 커다란 원형 인공 구조물 2개가 보이고 곧이어 1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큰두무재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겨 본다.
큰두무재는 경상북도 안동시의 북후면 옹천리에 있는 있는 고개로서 928번 지방도가 이 고개를 통과하며 예전에 안동과 봉화 그리고 영주를 왕래할 때 주로 다녔던 고개이다.
조선시대 때 이 고개를 넘기 직전에 옹천역이 있었는데 옹천역은 세종실록지리지에도 기록되어 있는 오래된 조선시대의 역원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두모현은 부의 북쪽 35리에 있다 라는 기사가 나오는데 두모현은 안동도회좌통지도 안동를 비롯하여 여러 옛 지도에 빠짐없이 등장한다.
또 조선지지자료에는 옹천동의 두무현이 한글 명칭 드뭇제와 함께 기록되어 있으며 두모현, 두무현, 드뭇제 모두 지금의 명칭 큰두무재와 관련이 깊은 지명이다.
다만 큰두무재에서 접두사 큰-을 붙인 것은 연 이은 두 개의 고개 중 더 길고 높은 고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2년 전 문수지맥 제2구간 산행을 마무리 할 때도 원래 계획은 이곳까지 였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길어져 결국 이곳 큰두무재까지 오지 못하고 선황재에서 마무리를 했던 아픈 기억이 있어 주위를 다시 한번 더 둘러 본다.
큰두무재에 있는 1차선 포장도로를 건너 좌측으로 보이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조금 걸어 올라가니 철문이 있는 곳으로 통과를 하는데 등로는 그 철문을 지나자 마자 우측 능선으로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설치된 철조망과 지독한 잡목들로 인해 능선으로 올라 갈 방법이 없어 조금 더 걸어 올라가니 노란 통이 있는 곳 우측으로 철조망이 끝이나며 희미한 흔적이 있어 그곳으로 오르니 등로는 한동안 우회하며 빙 돌아 오르게 되어 있는 듯 보인다.
이곳에서는 큰두무재의 1차선 포장도로에서 직접 능선으로 오르며 진행을 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 제일 가깝게 진행하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도 해 본다.
가파른 오르막 등로를 따라 힘들게 오르니 열차가 지나는 터널 위 소나무 등로를 만나 사진 한장 남기고 계속 올라 본다.
사초가 자라고 있는 무명 묘지 한기를 지나 멋진 소나무 등로를 따르니 봉우리 같지 않은 느선상에 389.7봉이 나타나고 그곳에서도 사진 한장 더 남기며 포인트를 확인한다.
약간의 잡목들이 성가시게 하지만 다른 지맥 등로에 비하면 진행에 큰 어려움은 없지만 가끔 나타나는 산초 가시가 신경을 쓰게 만들고 있다.
다시 만나는 무명 안부를 지나니 다시 뚜렷한 등로가 나타나고 잠시 그 등로를 따라 걸어 진행을 하니 금새 삼각점이 박혀 있는 417.4봉에 도착을 해 추억 한장 남겨 본다.
다만 삼돌이님이 제작해 걸어 놓은 산패에는 높이가 417.4미터라 적어 놨는데 국토지리원 지도에는 이곳 높이를 417.5미터라 표기되어 있어 어느 높이가 맞는지 아쉽기만 하다.
삼각점봉을 지나 걸어가니 잡목이 제거된 뚜렷한 등로가 나타나고 그 등로를 타고 진행을 하니 또 다른 안부를 통과한다.
안부를 지나 완만하게 걸어 오르니 벌목된 나뭇가지들과 그 밑둥이 널부러져 있는 봉우리에 도착을 하는데 정상에는 아무 표식도 없어 지도를 살펴보니 이 봉우리는 412.4미터 봉이었다.
생각보다 등로 상태가 양호해 계획했던 산행속도보다 무척 빠르게 진행되고 있어 문수지맥 마지막 합수점에서 회룡포를 만나고 서울로 복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꿔 보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간벌된 나무 등걸이 있는 봉우리를 지나 걸어 내려가니 간벌된 나뭇가지들이 널부러져 있어 잠시 주의가 필요한 구간을 통과하고 잠시 후 커다란 활엽수 한그루가 서 있는 나즈막한 안부를 넘는다.
잠시 좌측 봉우리를 두고 우측 사면 등로를 따르니 60번 송전탑을 만나고 다시 고속도로 같은 등로를 따라 룰루랄라 걸어 보는 시간이다.
그렇게 잠시 더 걸어 가 갈림삼거리도 만나고 계속 이어지는 꿈결같은 등로를 따르니 등로 좌측으로 북후면과 서후면 마을들이 환상으로 펼쳐져 있다.
잠시 가던 발걸음 멈추고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북후면과 서후면 마을과 들판을 사진에 담고 가슴속에 그 아름다운 풍경을 담아도 본다.
등로 우측으로는 북후면에 솟아 있는 불로봉도 바라보며 그렇게 다시 걸어 진행을 하니 등로는 다시 조금 더 넓어지며 비포장 임도같이 이어지고 있다.
그렇게 넓은 비포장 임도를 따라 빠르게 걸어가니 561.6봉에 도착을 하는데 이곳에도 어김없이 수고만 하고 있는 선답자 한분이 도산이라는 종이코팅지를 걸어 놨다.
그 561.6봉을 지나 다시 나타나는 등로 좌측의 조망을 즐기며 걸어가니 이제 마루금은 직진의 넓은 비포장 임도를 버리고 우측 잡목들이 우거진 좁은 등로를 따라 진행을 해야 하는 길주의 지점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기고 희미한 등로를 찾아 맥 산행을 이어가 본다.
잘 알고 있는 산악회 띠지들이 걸려있는 희미한 등로를 찾아 잡목을 헤치며 내려가니 등로는 금새 다시 뚜렷해지고 잠시 후 송이채취 구역으로 절대 출입을 금지한다는 플랭카드가 걸려있는 천등산 갈림삼거리에 도착을 한다.
문수지맥 마루금은 거의 직진 방향으로 진행을 해야 되지만 언제 다시 이곳에 와 천등산을 올라 볼 기회가 있을 것 같지 않아 거리는 조금 부담이 되지만 배낭을 벗어 놓고 좌측 등로를 타고 잠시 빠르게 천등산을 다녀 오기로 한다.
좌측 등로를 따라 잠시 내려가니 무명 묘지 한기가 보이고 그곳 근처에 배낭을 숨겨 두고 스틱과 카메라 그리고 핸드폰만 가지고 아주 빠르게 천등산 방향으로 걸어가 본다.
생각보다 등로는 뚜렷하게 잘 나 있어 진행에 전혀 문제가 없었으며 잠시 후 봉우리 같지 않은 501.2봉을 지나 등로 우측 잡목 사이로 조금씩 보이는 학가산과 조운산을 살펴보며 걸어가니 생각보다 일찍 정상석과 삼각점이 박혀 있는 해발고도 576미터의 천등산 정상에 도착을 해 추억 한장 남겨본다.
천등산(576미터)는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태장2리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576미터이며 안동시의 진산인 학가산 (882미터)과 마주보고 있는 산으로 안동시에서 서북쪽으로 16 Km 떨어져 있다.
예전에는 대망산이라 불렀는데 신라 문무왕 때 천상의 선녀가 바위굴에서 도를 닦고 있던 능인대사의 도력에 감복하여 하늘에서 등불을 내려 굴 안을 환하게 밝혀주었다는 전설에 연유하여 천등산으로 바뀌었다.
그다지 높지 않지만 숲이 울창하고 산세가 부드럽고 아름다우며 풍수지리상 명당이 많은 곳으로도 알려져 왔으며 정상에서는 서쪽으로 학가산이 북쪽으로 소백산 연봉이 그리고 남동쪽으로 낙동간이 보인다.
정상 아래에 의상이 젊었을 때 수도한 천등굴이 있었다고 하는데 폐쇄되었고 정상에서 5분 정도 내려가면 길이 8미터에 천장 높이 약 4 미터인 화강암 동굴이 있는데 안에는 어린 동자를 거느리고 호랑이를 탄 산신상과 산삼을 든 산신상이 있다.
의상의 10대 제자 중 한 사람인 능인이 수도했다는 천등굴, 신라 고찰인 개목사, 홍건적을 막기 위해서 만든 개목산성,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 있는 봉정사, 가뭄이 심할 때 기우제를 지내던 용샘 등이 대표적이다.
산행은 봉정사 주차장에서 시작하여 영산암을 거쳐 정상에 이른 후 능선길을 따라 개목사에 도착하는 코스가 주를 이루며 시간도 3시간이면 충분하여 가족산행에 알맞은데 학가산까지 연계하여 산행하기도 한다.
남쪽 기슭에 통일신라시대에 창건한 봉정사가 있는데 국보 제15호인 극락전, 보물 제55호인 대웅전, 보물 제449호인 고금당과 고려시대의 3층석탑(경북유형문화재 182) 등이 있다.
의상이 창건한 개목사도 이 산에 있는데 개목사 원통전은 보물 제242호이다.
천등산은 개목산으로도 부르는데 조선 초기 명재상 맹사성이 안동에 소경이 많이 나는 까닭은 천등산의 기운 때문이라면서 산 이름을 개목산으로, 동쪽에 있던 흥국사 절 이름을 개목사로 고쳐 부르게 한 뒤 소경이 나지 않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개목산 봉수에 대한 기록이 세종실록지리지를 비롯한 여러 옛 문헌에 자주 등장한다.
이곳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1989)과 귀여운 아기동자의 성장영화인 동승(2002)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계곡에는 퇴계 이황이 봉정사에 묵을 때 자주 나가 쉬었다는 명옥대(경북문화재자료 174)가 있다.
몇장의 사진을 남기고 주위를 둘러 보지만 역시나 잡목들로 둘러쌓인 정상에서의 조망은 거의 없어 곧바로 다시 천등산 갈림삼거리로 뒤돌아 와 배낭을 찾아 둘러메고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다시 잡목이 약간씩 보이는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금새 하늘이 열리면서 밭 경작지가 나타나는데 밭에는 잡풀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 이미 묵은 밭이 되어 버렸다.
그 밭 좌측 가장자리를 타고 조심스럽게 걸어 내려가니 바로 앞에 사과과수원 지나 백현고개를 지나는 도로가 내려다 보이고 그곳 지나 저 멀리 올라야 할 조운산이 제법 가파른 뾰족봉의 모습으로 어서오라 환영을 하고 있다.
어렵게 그 묵은 밭에 자라고 있는 잡풀들을 헤치며 내려가니 등로는 비포장 임도로 바뀌고 곧이어 시멘트 포장도로와 만나는데 도로 좌우측으로는 붉게 익어가는 사과가 주렁주렁 열려있는 사과과수원을 통과한다.
주인장이 있으면 사과 하나 얻어 먹고 싶은데 주인장이 없으니 눈 요기만 하고 통과하는데 낙과된 사과가 보여 두어개 주워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백현고개로 내려가 본다.
백현고개가 지나는 이곳 백현은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에 있는 재품리의 자연마을로서 북쪽에 흰 운모석이 나는 광산이 있어서 운모를 실어 나르다가 흘려서 고개가 하얗게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옛날에는 구헤티라고도 하였다.
백현마을 위에 있는 고개라서 백현고개라 불리게 되었다.
백현고개 위 2차선 포장도로에서는 도로를 따라 좌측으로 조금 내려가 우측 능선 방향으로 콘크리트 옹벽과 낙석 방지 시설물이 끝나는 지점에서 능선으로 들어가며 산행을 이어가 본다.
능선으로 올라가니 다시 잘 관리되고 있는 무명 묘지 한기를 통과하고 잠시 후 소나무 가지 사이로 이제부터 올라야 할 조운산이 뾰족하게 올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잠시 멋진 소나무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오르니 등로는 다시 넓은 수레길 같이 뚜렷해지고 잠시 후 그 수렛길을 버리고 우측 능선으로 올라가니 갑자기 등로 옆 소나무에 높이 497미터의 백현산이란 종이코팅지가 붙어 있지만 신뢰가 전혀 가지 않는 표지기이기에 사진 한장 남기고 다시 출발한다.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봉우리 같지 않은 능선상에 백현산은 또 어디에서 왔는지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분은 그분 나름대로 확신이 있는듯 하여 안타까운 시간이다.
백현산이란 종이코팅지가 걸려있는 497봉을 통과하여 계속 이어지는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등로는 점점 더 가파라지기 시작하고 등줄기와 이마에선 이제 굵은 땀방울이 흘러 등로를 적시기 시작하고 있다.
그렇게 잠시 더 두 다리에 힘을 주며 걸어 오르니 드디어 등로 우측으로 조운산 가는 갈림삼거리에 도착을 해 배낭 벗어 놓고 시원한 물 한모금 마신 후 조금의 고민도 없이 우측 조운산 방향으로 가파르게 올라가 본다.
생각보다 거리는 길지 않지만 뾰족봉을 오르는 오르막 등로는 제법 가쁜 숨을 몰아쉬게 만들고 있다.
등로 좌측으로는 붉은 노끈이 이어져 있어 출입을 금지하고 약간의 바위지대를 넘어 오르니 금새 입산금지라는 플랭카드와 조운산이란 산패가 걸려있는 조운산정상부에 도착을 하지만 제대로 된 정상석 하나 없이 그 우측 옆으로 보이는 무명 묘지 하나가 전부이다.
플랭카드를 살펴보니 오를 때 봤던 등로 좌측으로는 송이와 능이 버섯이 자라고 있는 산으로서 주인장이 송이 움막까지 짓고 출입자를 관리하고 있는 듯 보였다.
조운산(634.5미터)는 경상북도 안동시의 북후면 월전리에 있는 산으로 해발고도는 635미터이며 북쪽으로는 월전리 갈미봉으로, 남쪽으로는 자품리 천등산으로 이어진다.
산행인들에게는 문수지맥에 속한 산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문수지맥은 백두대간의 소백산에서 가지 쳐서 나온 산줄기가 봉화문수산을 거쳐 안동의 파리봉, 요성산, 조운산 등으로 이어지고 다시 학가산, 대봉산, 검무산을 거쳐 예천 지버면 연화산으로 뻗어가는 지맥으로 설명되고 있다.
여지도서의 예안에 조골산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조골산은 본부 북쪽 40리에 있고 기우단이 있으며 동쪽의 예안 영지산(지금의 도산면 분천리 영지산)에서 산줄기가 이어졌고 남쪽의 본부 학가산에서 산줄기가 멈춘다 라는 기사가 있다.
안동도회좌통지도의 안동에 조골산 주위로 학가산, 천등산, 봉정사, 두모현(지금의 두무재)이 묘사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에도 북후면 월전동 조골산 기록이 나오지만 조선지형도에는 지금의 이름인 조운산으로 표시되어 있다.
지금의 이름은 이 지도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이며 지도를 제작하면서 잘못 표기한 것인지 혹은 좋지 않은 의미 때문에 의도적으로 바꾼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사진 몇장 남기고 다시 곧바로 올랐던 등로를 따라 뒤돌아 내려가 본다.
특별히 볼 거리도 없기에 사진 몇 장 남기고 곧바로 조운산 정상에서 내려가니 등로 우측으로 소나무 군락지가 보이고 그곳 저 아래에는 송이 움막도 보이는데 그 움막 내려가기 전 우측으로 약간의 조망처가 보여 잠시 그곳으로 가 살펴본다.
남서쪽으로 경상북도 안동시 북후면 신전리 마을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고 그곳 마을 넘어로 길게 이어지는 문수지맥 마루금이 우측 인공 구조물을 이고 있는 학가산 정상부로 달려가고 있는 풍경도 보이기 시작한다.
신전리는 경상북도 안동시 북후면에 있는 리로서 천등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어 고도가 높은 편이며 당곡지와 고지못 등이 있는 산촌 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섶밭(신전), 구섶밭(구신전), 마우실(마곡), 북적골(북절골,북사곡,이동), 새마(신촌), 운골(운곡,군골,궁골) 등이 있는데 신전은 본래 섶이 많으므로 섶밭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된 것이고 구섶밭은 신전에서 제일 오래된 마을이다.
마우실은 삼이 잘 된다고 하고 북적골은 학가산 북쪽이 되는데 예전에 북절이 있었다고 하며 운골은 지대가 높아서 구름이 닿는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문화유적으로 운학묘가 있다.
진행방향을 잠시 살펴 본 후 남동쪽을 살펴보니 그곳에도 멋진 풍경들이 펼쳐져 있다.
학가산을 살펴본 후 남동쪽으로 눈을 돌리니 방금 전 올랐다 내려 온 천등산이 빼꼼히 보이고 그 우측으로 길게 이어진 능선을 따라 상산이 보인다.
그리고 그 가운데로는 이제부터 내려가 걸어야 할 문수지맥 마루금이 낮아지며 운곡고개를 지나는 모습도 보인다.
잠시 더 그곳에 머물며 아름다운 풍경과 조망을 즐긴 후 사진에 담고 저 아래 보이는 송이 움막을 살펴보니 그곳에는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은 보이지 않아 사진 한장 남기고 다시 정상 등로로 복귀해 배낭이 있는 조운산 갈림삼거리로 복귀를 한다.
조운산 갈림삼거리로 복귀를 해 잠시 휴식을 취하며 간식과 과일로 허기를 달래고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내리막 등로를 따라 내려가 본다.
약간의 잡목 지대를 지나니 뚜렷한 활엽수 등로가 나타나고 다시 낙엽소과 혼재되어 있는 마루금을 타고 빠르게 걸어 진행을 하니 갑자기 등로에 두개의 전봇대가 보이는데 이제 그 기능을 다했는지 전선은 늘어져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다.
그렇게 조금 더 걸어 내려가니 넓은 비포장 임도가 지나는 운곡고개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기고 출발한다.
운곡고개는 경상북도 안동시 북후면에 있는 신전리의 자연마을 가운데 한곳으로 운곡(운골,군골,궁골)은 지대가 높아서 구름이 닿는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문화유적으로 운학묘가 있다.
운곡고개를 지나 완만하게 오르니 잡목들이 보이고 그 잡목지대를 지나니 거대한 참나무 한그루가 보이는 465 무명봉에 도착을 한다.
참나무봉을 지나 사초가 자라고 있는 무명 묘지 한기를 통과하니 또 다른 무묭 묘지 한기를 다시 만난다.
그 무명 묘지를 지나니 멋진 소나무 등로가 열려있는데 몸과 마음이 힐링되는 듯한 그런 등로이다.
아무 생각없이 그저 무심으로 그 소나무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나즈막한 봉우리로 올라서고 지도를 살펴보니 이곳이 바로 493.9봉이다.
소나무가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493.9봉을 지나 출발하니 등로는 여전히 황홀한 소나무 등로가 계속 이어지고 있어 발걸음도 가볍게 빠르게 진행을 해 본다.
그렇게 잠시 더 멋진 등로를 따르니 등로는 다시 비포장 임도와 만나 그 임도를 타고 우측으로 걸어 본다.
임도를 지나 능선으로 오르니 금새 40번 송전탑을 만나고 그 송전탑을 통과해 소나무 등로를 따르니 그 동안 보이지 않던 바위지대도 짧게 나타난다.
그 바위지대를 지나니 가선대부 묘지가 나타나는데 조선시대 종2품의 직책으로 요즈음 직책으로는 차관보쯤 되니 생각보다 괜찮은 직책인데 살아있을 때의 권력에 비해 묘자를 보니 인생무상을 느끼게 하는 시간이다.
가선대부 묘지를 지나 무명 안부를 통과하니 등로 우측으로 아카시아 거목들이 눈에 들어 오는데 살펴보니 오래 전 아카시아 나무들을 식재한 듯 보이는 군락지이다.
이제는 수령이 다해 수종을 바꿀 시기가 넘은 듯 한데 아직도 저렇게 거목인 아카시아 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잇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다시 약간의 잡목들이 조금은 거추장스럽게 다가오는 완만히 이어지는 오르 막 등로를 따르니 커다란 참나무 두가지가 자라고 있는 485.1봉에 도착을 해 포인트를 확인하고 다시 출발한다.
그 485.1봉을 지나 진행을 하니 낙엽 진 아카시아 나무 사이로 이제부터 올라야 할 학가산 정상부가 빤히 올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약간의 잡목지대를 헤치고 내려가니 금새 1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새터고개 일명 무시골재에 도착을 하는데 도로 우측으로는 메밀단지라는 이정표가 서 있는 또 다른 시멘트 포장도로가 신전리 새터마을 방향으로 나 있다.
새터고개(무시골재)는안동시 북후면 석탑리의 자연마을 중 하나로서 새터는 석탑암 남쪽에 새로 생긴 마을이다
이곳 새터고개가 있는 곳은 신전리이지만 예전에는 석탑리였던 마을로서 석탑리는 북후면 소재지인 옹천리에서 지방도를 따라 10 Km 되는 거리에 위치하며 북후면에서는 가장 많은 숫자인 7개(감나무골, 새터, 청골, 구억들, 압령골, 개랄, 구둠실)의 자연마을을 가지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하여 추곡리와 신전리의 일부를 병합하고 영주시 문수면 조제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석탑리를 이뤄졌는데 석탑리라는 지명은 석탑사 앞에 자연석을 가지고 쌓아 올린 탑이 있다고 해서 붙여졌다. 석탑사는 학가산의 북쪽 자락인 연화봉 아래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 사찰 주위는 연꽃과 같이 생긴 봉우리가 절을 감싸고 있고 연꽃의 중심부인 연밥자리에 석탑사를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연꽃은 원래 물 속에서 꽃을 피우고 물의 영양분을 받아서 성장하므로 석탑사의 풍수조건은 이러한 연꽃의 생장조건을 잘 갖춘 곳에 세웠다고 전한다.
석탑사로 들어가는 입구에 자연석으로 축조된 석탑이 웅장한 규모로 자리잡고 있는데 언제 누구에 의하여 축조하였는지는 기록이 전하지 않아서 알 수는 없지만 능인대덕과 관련된 전설만 전하고 있다.
이제 한동안 이 1차선 포장도로를 따라 학가산 정상으로 오르면 되는데 괜시리 중간에 좌측 능선으로 들었다가 이전한 군부대 내 2중 철조망에 갇혀 한동안 방황하며 많은 시간 허비하고 너무나 힘들게 개구멍을 통해 다시 이 시멘트 포장도로로 내려 와 맥 잇기 산행을 어렵게 이어가 본다.
포장도로 우측의 메밀단지 방향으로 나 있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살펴본 후 진행 방향을 보니 저 멀리 인공 구조물을 머리에 이고 있는 학가산이 빤히 올려다 보인다.
가을의 꽃 구절초가 도로 양쪽으로 화사하게 피어 있어 사진 몇장 남기고 계속 도로를 따르니 이동통신탑도 통과한다.
다시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르니 도로 좌측으로 제1주차장이란 안내판에 정상까지 2.6 Km 거리라는 표기가 눈에 들어 오기 시작한다.
잠시 뒤 좌측 능선 방향으로 전봇대가 보이는 곳에서 칡넝쿨을 뚫고 능선으로 들어가며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는데 이곳에서도 좌측 능선을 고집하지 말고 계속 이어지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난가대로 진행을 햇으면 좋앗을 것을 괜시리 좌측 능선으로 올라 시간만 많이 까먹고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체력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좌측 능선 방향으로 들어가며 지독한 칡넝쿨을 넘으니 벌초가 된 묘지들을 만나고 그 묘지 뒤로 올라 간다.
잠시 후 바위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다양한 바위들과 굴들을 지나 어렵게 오르니 무명 묘지 한기를 통과한 후 소나무 군락지를 따라 조금은 가파르게 올라 본다.
흐릿한 등로를 타고 많은 땀방울을 흘리며 오르니 짧은 자갈너덜길도 지나 녹슨 군부대 철조망을 만나는데 이곳에서 그 철조망을 따라 우측으로 걸어가다 좌측 철조망 위를 보니 예전에 군 막사로 사용했던 듯한 건물들이 빤이 올려다 보이고 사진 한장 남긴 후 게속 그 철조망을 따라 길게 돌아 통과한다.
너무나 힘들게 그 철조망 지대를 지나니 다시 시멘트 포장도로와 만나 그 도로를 따라 좌측으로 오른다.
잠시 올라 우측 능선을 따라 오르니 다시 시멘트 포장도로와 만나는데 우측으로는 옛날 사용하던 군부대의 정문이라 생각되는 콘크리트 벽 2개가 문 양쪽으로 서 있고 그 안으로 들어가니 사람 키 보다 더 자란 잡풀속으로 군막사처럼 생긴 건물들이 보인다.
그곳을 올라 지독한 칡넝쿨을 뚫고 전진하니 시멘트 계단이 나타나고 그 계단을 타고 오르니 철난간과 수로가 함께 보이는 등로로 이어진다.
그 등로를 따르니 정상부에 도착을 하지만 철조망에 갇혀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고 그 철조망을 따라 좌측으로 길게 돌아 이동을 하니 방금 전 헤어졌던 철조망 부근으로 다시 내려간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철조망으로 인해 이곳에서 방황을 하면서 어렵게 철조망 개구멍을 찾아 칡넝쿨을 뚫고 진행하고 두번째 2중 찰조망을 넘기 위해 다시 한동안 방황한 후 너무나 어렵게 그 두번째 철조망까지 통과하니 바로 앞으로 사각정자와 난가대 그리고 그 옆으로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조망처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살펴보니 처음 철조망을 지나 만났던 첫번째 시멘트 포장도로에서 우측 능선으로 오르지 말고 계속 그 포장도로를 따랐으면 금새 만날 수 있는 난가대였다.
바위로 된 난가대 좌측으로는 학가산문화환경연구소라는 건물이 보이는데 찾아 보니 개인이 학가산의 생태 보존과 환경보호를 위해 건물을 세우고 연구를 하고 있는 건물로 소개가 되고 있다.
난가대는 송암 권호문(1532~1587) 선생이 지은 이름으로 난가란 뜻은 바둑이나 음악 등에 심취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것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로 이 대에 오르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즐거움이 있음을 의미하며 난가대는 안동시와 영주시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퇴계 이황의 제자인 송암 권호문 선생이 이름을 지은 3봉(국사봉, 유선봉, 삼모봉)과 3대(난가대, 학서대, 어풍대)를 볼 수 있으며 고려 공민왕이 홍건족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몽진하였을 때 쌓은 것이라고 전해오는 학가산성이 있다.
참고로 송암 권호문 선생은 퇴계 이황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일대를 풍미 했던 서애와 학봉 및 백담등과 교분이 두터웠고 학문과 덕망이 높았던 문인이며 선비였다.
평생 벼슬길을 거부하고 자연을 벗하며 살았다 하여 스승 퇴계는 그를 소쇄산림지풍이 있다는 인물평을 남겼다. 송암은 청성산 아래의 무민제에서 학가산을 드나들며 학가산의 3봉과 3대의 이름을 지었고 일생동안 학가산 사랑에 힘 쓴 인물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학가산문화환경연구소 건물을 향해 소리를 질러 보지만 메아리만 뒤돌아 오고 사람은 보이지 않아 식수 보충을 하려던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난가대와 학가산문화환경연구소를 살펴본 후 그 앞으로 보이는 산불감시초소 옆 전망대로 오르니 지나 온 문수지맥 마루금이 아름답게 펼쳐져 잇어 몇장의 사진에 담아 본다.
오늘 진행했던 조운산이 좌측으로 솟아 잇고 그 우측 뒷쪽인 사진 정중앙 방향으로 천등산이 보이고 그 우측으로 이어진 성산 줄기가 환상이다.
그 산줄기 지나 저 멀리 끝자락에는 희미하지만 낙동정맥의 명동산 부근도 보이고 있어 오늘 날씨가 얼마나 좋은지 다시 한번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있다.
결국 이전된 학가산 군부대 철조망 안에서 철조망 따라 잡목을 헤치며 한바퀴를 돌고 난 후 난가대가 있는 시멘트 포장도로로 나와 잠시 조망을 즐긴 후 다시 옛날 군부대 출입문 콘크리트 기둥 안으로 들어가 잡풀속에 숨어 있는 작은 건물이 있는 우측 직진의 등로를 버리고 좌측 잡풀 등로를 따르니 잠시 올라 철조망 개구멍이 나타나고 그곳을 통해 첫번째 철조망을 통과한 후 우측 아래로 내려가 바위 옆 개구멍을 통해 두번째 철조망을 어렵게 통과한 후 잡목과 바위가 뒤엉켜 있는 길을 만들어 조금 더 걸어 가니 드디어 학가산 정상부로 오를 수 있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만나는데 도로 좌측으로 낙석주의 간판이 보이는 곳이다.
그곳에서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좌측으로 걸어 올라가며 가장 어려운 이전된 학가산 군부대를 무탈하게 통과하는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보낸 후였다.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오르면서 살펴보니 도로 좌측으로는 절벽 바위가 보이고 우측으로는 신전리 방향의 나즈막한 들판이 황금빛으로 변하는 풍경이 눈에 들어 오기 시작한다.
그렇게 조금 더 걸어 오르니 갈림삼거리에 도착을 하는데 좌측으로는 KBS 한국방송공사 학가산 송신소 150미터라는 이정판이 그리고 우측으로는 학가산송신소 MBC 문화방송 500미터라는 이정판과 차량 통제용 바리게이트가 보인다.
그곳에서 우측 학가산송신소 MBC 문화방송 500미터 라는 이정판 방향으로 걸어 들어가며 학가산 정상부로 향한다.
그곳 갈림삼거리에서 좌측 KBS 한국방송공사 학가산송신소 150미터 방향으로 학서대라는 이정표가 보이는데 그곳으로는 갈 수가 없을 것 같아 포기하고 우측 학가산송신소 MBC 문화방송 방향으로 걸어 올라 본다.
학서대란 언제나 고고한 자태를 자랑하는 학이 살고 있는 높은 대를 말하는데 이 대의 이름은 송암 권호문(1532-1587)선생이 지었으며 학이 노닐고 있는 곳이니 사람은 거기에 오르지 않고 언제나 쳐다보기만 하는 곳을 의미한다.
학서대에서는 안동시와 영주시가 한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경관을 가지고 있었으나 방송 통신 기관들의 건설로 인하여 자연이 많이 훼손된 실정에 있다.
우측으로 나 있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르니 앞으로 올라야 할 학가산송신소 MBC 문화방송 안테나와 삼모봉쪽 거대한 송신 안테나가 올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잠시 더 걸어 오르니 도로 좌측 바위 안쪽으로 기도처라 생각되는 장소가 보여 잠시 둘러보니 석간수가 흘러 나오는데 그 석간수를 받아 놓은 통에는 약간의 기름띠가 보여 한모금 마시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다시 발길을 돌린다.
그 기도처를 지나 계속 걸어 올라가니 다시 갈림 삼거리가 나타나는데 그 갈림삼거리 가운데 능선 방향 전봇대 옆으로 좁은 시멘트 계단이 나 있고 그 옆에는 등산로라는 작은 안내판이 서 있다.
주위 풍경을 둘러보고 그 시멘트 계단을 타고 걸어 오르니 학가산 등산로안내도과 국사봉 0.5 Km 남아 있다는 이정표가 서 있는 갈림사거리에 도착을 한다.
그곳에서 우측 국사봉 0.5 Km라는 이정표 방향으로 걸어 올라 본다.
잠시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 학가산송신소 MBC 문화방송 건물이 나타나고 그곳 철조망 옆으로 가 사람을 불러 보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아 식수 보충을 포기하고 학가산 정상부를 향해 빠르게 올라 본다.
바위 아래 안전철봉과 로프구간을 따라 오르니 다시 철계단이 보이고 그 계단을 오르니 로프가 설치된 가파른 오르막 바위 구간을 지나 유선봉과 삼모봉 갈림삼거리에 도착을 한다.
우측 삼모봉으로는 오를 수 없어 그 앞에서 유선봉에 대한 설명판을 읽은 후 좌측 바위 위에 매달려 있는 로프를 타고 암봉으로 올라 본다.
삼모봉은 정상의 바위들이 날카로운 창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하여 송암 권호문선생이 지은 이름으로 삼모봉은 학가산의 제2봉으로 안동, 영주, 풍기와 동쪽으로 청량산과 일월산 그리고 북쪽으로는 백두대간인 소백 준령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로프를 잡고 바위 위로 오르니 방금 전 지나 온 삼모봉쪽 높은 안테나가 바로 지척으로 보이고 그 우측 아래로는 KBS와 MBC 학가산송신소의 높은 탑들이 이제 발 아래로 내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이곳 정상부가 바러ㅗ 유선봉이란 생각에 방금 전 읽어 봤던 유선봉에 대한 안내판을 생각해 본다.
유선봉은 국사봉과 삼모봉 사이에 있는 바위와 소나무가 잘 어우러진 아름다운 봉우리로서 유선이란 신선들이 흥겹게 놀고 있다는 뜻으로 송암 권호문 선생이 지은 이름이다.
유선봉은 학가산의 제3봉으로 사방으로 보이는 조망의 아름다움이 가히 일품인 곳이다.
바위 정상에 오르니 남쪽으로 안동시 서후면과 풍산면쪽 들판이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고 그 넘어 저 멀리 안동시와 안동호도 가깝게 내려다 보인다.
북동쪽 방향으로는 조만간 오르고 싶어 자료를 준비했던 청량산의 봉우리들이 보이고 그 뒷쪽으로 일월산이 얼굴만 내밀고 빼꼼히 내다 보고 있다.
북동쪽을 살펴보니 2년 전 시작한 문수지맥 마루금이 저 멀리 길게 이어져 온 풍경이 한눈에 들어 오고 그 우측인 동쪽 방향으로는 청량산의 봉우리들 사이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일월산이 보인다.
그 우측으로는 안동시와 안동시 우측으로 안동호와 임하호가 또 내려다 보인다.
생각보다 훨씬 아름답고 멋진 조망으로 인해 많은 시간 주위 풍경과 산그리메를 살펴보고 많은 시잔을 남겨 본다.
남동쪽으로는 안동시로 이어지는 북후면과 서후면 들판이 펼쳐져 있고 그 멀리 안동시의 회색빛 건물들이 남북으로 길게 늘어서 있는 풍경도 눈에 들어 온다.
그 안동시 주위로는 안동호가 보이고 그 안동시 우측으로는 임하호라 생각되는 호수가 보이는데 우측 끝자락에 붉은 황톳빛이 그대로 드러나 있기도 하다.
그 뒤로 보여야 할 낙동정맥 마루금은 박무로 인해 하늘금과 맞닿아 있어 더 이상 분간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서쪽으로는 이제 올라야 할 학가산 국사봉으로 오르는 철계단과 바위 정상이 보이고 그 풍경을 사진에 담은 후 유선봉을 조심하며 내려가니 국사봉 안내판과 설명판이 서 있어 잠시 읽어 본 후 등로 좌측으로 보이는 철계단을 타고 학가산 국사봉 정상으로 올라가 제일 먼저 보이는 정상석에서 추억 한장 남겨 본다.
국사봉(882미터, 학가산 국사봉)은 산 모양이 날아가는 학과 같다 하여 학가산이라는 이름을 가졌으며 이 국사봉은 학의 머리 혹은 학 위에 탄 신선의 모습이라고 알려져 있다.
국사봉은 학가산의 7개 봉우리 중 해발 882미터의 최고봉으로서 서학가산성의 중앙에 위치하여 장군의 지휘소로 쓰였고 정상의 우묵한 바위는 난공불락의 자연 보채 역할을 하였으며 나라(임금)에 제사를 올렸던 곳이기도 하다.
영가지 산천 조에는 학가산 국사봉의 아름다운 조망을 기록으로 남겼으며 실제로 국사봉에 올라가 보니 사방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어 조망이 뛰어난 전망대 처럼 보이는 정상이었다.
국사봉은 능인굴과 함께 신라시대 능인대사가 수행하던 불교 성지로 알려져 있고 학가산 사랑이 지극하였던 송암 권호문선생은 이 봉을 적성봉이라 고쳐 부르기도 하였으며 또한 국사봉은 2005년 경북도민 체전의 성화 채화지였다.
이곳 학가산 국사봉 정상에서의 풍경과 조망 역시 일망무제로 펼쳐져 있기에 한동안 시간을 보내며 많은 추억을 만들어 본다.
학가산 국사봉 정상에서 북쪽을 살펴보니 예천 학가산 정상부가 가깝게 보이고 그 우측으로 자개지맥 산줄기와 그 우측으로 오늘 이 산객이 진행하고 있는 문수지맥 마루금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그 뒷쪽으로는 백두대간의 소백산 구간이 길게 이어져 있고 그 우측 뒷로 태백산도 살짝 얼굴을 내밀고 있는데 박무가 없는 계절이었으면 좋았겠다 하는 아쉬움도 남는 시간이다.
그래도 이렇게 멋진 조망과 산그리메를 만나 많은 추억을 남길 수 있어 감사한 마음으로 둘러 본다.
동쪽 방향으로는 오늘 걸어 올라 온 문수지맥 마루금이 보이고 그 넘어 저 멀리 안동시와 그 주변의 호수들 그리고 저 멀리 청량산에서 우측으로 내려가며 낙동정맥 마루금도 보이는 듯 한데 약간의 박무로 인해 그 낙동정맥 마루금은 하늘금과 맞닿아 분간하기가 어렵다.
너무나 아름답고 멋진 수많은 산군들이 켭켭히 쌓여 끝도 없이 펼쳐져 있기에 한동안 다시 그 황홀한 풍경속에 빠져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남동쪽으로는 삼모봉과 학가산 송신소들이 내려다 보이고 그 뒤로 오늘 어렵게 진행하며 통과한 조운산과 천등산 줄기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고 그 천등산 우측으로는 성산 줄기도 보인다.
그 뒤로 끝없이 펼쳐져 있는 용암지맥과 덕산지맥이 가물거리고 저 멀리 하늘금과 맞닿아 있을 낙동정맥을 상상속으로 그려보니 그저 흐뭇한 미소가 절로 나오는 시간이기도 하다.
남서쪽 방향으로는 이제부터 걸어 진행을 해야 할 당재가 내려다 보이고 그 뒤로 이어지는 문수지맥 마루금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당재를 지나니 620봉이 올려다 보이고 그 우측으로 원통재 지나 보문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환상이다.
그 보문산 우측 뒤로 이어져야 할 문수지맥의 마루금은 바로 가까이에 있는 예천 학가산 줄기에 가려 보이지 않아 아쉽기만 하다.
그 문수지맥 뒤로는 희미하지만 낙동강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 낙동강 넘어로는 나즈막한 비산비야로 이어지고 있는 보현지맥이 조만간 다시 만나자고 약속을 종용하고 있다.
저 보현지맥의 삼표당에서 새벽 일출을 바라보며 이곳 학가산을 바라보던 추억을 기억하며 잠시 홀로 웃어도 보는 시간이다.
그렇게 많은 시간 그곳 학가산 국사봉 정상에서 일망무제로 펼쳐진 황홀한 조망과 풍경을 즐긴 후 갈길이 멀기에 다시 배낭 둘러메고 방금 전 올랐던 철 계단을 타고 내려와 다시 한번 국사봉 설명판을 읽어 본 후 진행 방향의 좌측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잠시 내려가니 우측으로 당재 방향이 그리고 좌측으로는 능인굴과 애련암으로 갈 수 있는 이정표가 보이고 그 한쪽으로는 학가산 등산로안내도가 서 있는 좁은 공터에 도착을 한다.
그곳에서 잠시 좌측으로 표기가 되어 있는 능인굴이 빤히 내려다 보이기에 다녀 오기로 한다.
그 공터에서 잠시 내려가니 등로 좌측 바위 속으로 굴이 보이고 그 옆으로 능인굴에 대한 설명판이 서 있어 읽어 보니 능인굴은 신라 신문왕 때 능인대사가 이곳에서 수행과 포교를 하였던 기거처인데 능인은 의상의 10대제자 중 한 사람으로서 학가산 남쪽 봉정사와 개목사의 창건주이며 천등산의 천등굴에 얽힌 전설과 석탑리의 석탑 설화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 승려이다.
능인은 국사봉 바로 아래인 이 굴에서 생활하며 수행과 포교에 힘써 학가산 주변에 아홉 개의 절을 이루어 오늘날까지 8방 9암자의 모델을 제시하고 있으니 가히 학가산의 개산조라 할 수 있다.
능인굴 안쪽에는 늘 마르지 않는 신비한 샘물이 솟아 등산객들의 갈증을 풀어주고 있다.
즉 능인은 사람으로서 의상의 제자이며 학가산에 있는 각 지명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었다.
능인굴을 다녀 와 이제는 다시 맥 잇기 산행의 정상 진행방향으로 진행하기 위해 당재 방향으로 걸어가니 금새 갈림 삼거리 이정표가 나타나는데 그곳에서 지도를 살펴보니 우측 상사바위 방향으로 예천의 학가산이 존재하기에 잠시 그곳의 학가산도 다녀 오기로 한다.
빠르게 오르니 무인산불감시 카메라가 서 있고 그곳을 지나 걸어가니 금새 높이 882미터의 학가산 국사봉이란 정상석이 보이는데 지도에는 높이가 869.6미터로 표기된 정상으로서 이곳 사람들은 이곳을 예천 학가산으로 부르고 있는 듯 보인다.
학가산(872미터)은 경상북도 안동시의 북후면 신전리에 있는 산으로 해발고도는 872미터이며 산 서쪽 사면은 예천군 보문면에 속하는데 이곳에 학사간 우래 자연휴양림이 있고 또 남쪽 사면은 서후면 자품리에 해당하며 이곳에 통일신라 때 의상이 창건한 광흥사가 있다.
안동시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동쪽으로 일월산, 서남쪽으로 팔공산, 멀리 북쪽으로 소백산맥을 볼 수 있는 등 영남 북부 지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학가산 남쪽에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왔을 때 쌓았다는 학가산성터가 남아 있고 예천군 보문면 산성리 지명은 그 흔적을 보여주는데 학가산성은 서후면 자품리에서 산성리로 이어지는 느르치 고개 마루에 있어 전략적 요충지를 지키는 성이라고 할 수 있다.
옛 문헌에는 느르치 고개를 산성현으로 표시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안동에 학가산은 하가산이라고도 하는데 본부의 서쪽 20리에 있다 라는 기사가 나오는데 상당히 오래전부터 지금의 명칭 그대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디지털안동문화대전에 영주에서는 선비봉으로 안동에서는 문둥이봉으로 예천에서는 인물봉으로 각각 부르기도 한다고 소개되어 있으며 일설에는 학이 앉았다 날아가는 형상 같아서 학가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또한 신정일의 새로 쓴 택리지에 보면 택리지에 안동에 있는 학가산(892미터)은 두 강 사이에 있으며 산세가 오관산 및 삼각산과 흡사하지만 돌 봉우리가 적은 것이 유감스럽다.
산 밑에 풍산 들이 있어서 어떤 사람은 도읍이 될 만하다 하나 이 세 곳의 산이 모두 위에서 말한 네 곳의 산보다 못하다 라고 기록한 학가산은 안동시 서후면과 복후면 그리고 예천군 보문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학이 나는 형세라고 한다.
이 산에는 공민왕이 쌓았다는 학가산성이 있으며 학가산 자락 석탑리에는 돌무더기로 쌓은 네모난 탑이 있고 이 탑에 내려오는 전설을 살펴보면 이곳에서 200리 떨어진 영주 부석사에 3000여 명의 승려가 있었는데 학가산에서 도를 닦던 능인대사가 그들이 먹을 공양밥을 훔쳐간다는 말을 듣고 그를 죽이기 위해 여기까지 돌을 들고 떼를 지어 몰려왔다고 한다.
그들을 이미 기다리고 있던 능인대사가 그들의 행동을 꾸짖자 비로소 깨달음을 얻은 승려들이 능인대사를 죽이고자 가지고 온 돌을 한자리에 쌓은 돌이 지금의 학가산 석탑이라고 한다.
그러나 영가지에는 이 산의 한 굴에 능인대사가 숨어 지내며 세속을 멀리하였는데 스님 1000여 명이 부석사에서 찾아왔으나 끝내 그를 만나지 못하자 각각 돌을 모아서 쌓은 탑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예천군 보문면 우래리의 가거리는 퇴계 이황이 이곳을 지나다가 산천이 아름다워 가히 살 만한 곳(산천가경 가거지지)이라고 했다 하여 가거리로 불린다고 한다.
이중환은 이어서 평야에 내려앉은 평지 돌출의 산으로 비록 큰 힘은 없으나 기이한 경치는 적어 놓을 만한 것이 많다 라고 기록하였다.
이전한 군부대로 인해 조금은 아쉬움도 남지만 환상적인 조망과 풍경을 둘러볼 수 있는 학가산이었기에 좋은 추억을 남기고 떠나지만 각 봉우리마다 제 각각인 높이로 인해 조금은 헷깔리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지자체에서 결정한 높이나 이름이 아닌 조금 더 정확한 역사적인 고증을 통한 봉우리 이름과 높이를 알려주면 조금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게 많은 시간 동안 학가산을 오르고 또한 정상에서 주위 풍경과 조망을 즐기며 진행하다 보니 문득 가야 할 거리가 만만치 않게 남아 있음을 인지하게 되어 이제부터는 정신 차리고 맥 잇기 산행에 조금 더 집중을 해 보는 시간이다.
무인산불감시 카메라를 지나 상사바위 갈림 삼거리로 뒤돌아 나와 당재 방향으로 걸어가니 잠시 후 다시 우측으로 남여사지 갈림 삼거리가 나타난다.
시간이 충분하면 산성터와 상사바위 그리고 남영사지도 들려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갈길이 멀기에 아쉬움만 남기고 빠르게 당재 방향으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빠르게 활엽수 등로를 따라 내려가 거대한 바위를 우회하며 지나고 잘 벌초가 되어 있는 묘지를 통과하니 우측으로 남영사지 가는 갈림삼거리 이정표가 다시 보인다.
남영사지 갈림삼거리 이정표를 지나 내려가니 등로는 다시 넓은 비포장 임도같은 등로가 뚜렷하게 열려 있다.
그 등로를 따라 조금 빠르게 걸어 내려가니 등로 우측으로 사과과수원이 보이고 그 과수원에는 붉게 익어가는 사과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그 아래 당재를 지나 이제부터 걸어 올라야 할 문수지맥 마루금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사과 과수원 옆 넓은 비포장 임도를 따라 내려가니 잘 관리되고 있는 묘지를 지나 갈림삼거리 시멘트 도로가 지나는 당재에 도착을 해 그곳에 서 있는 커다란 소나무 한그루와 각기 다른 이정표 2개를 사진에 담아 본다.
당재는 안동과 예천의 경게지에 있는 나즈막한 고개로서 큰 도로도 아니고 시멘트 포장이 된 작은 농로 길인데 안동과 예천을 알리는 이정표가 없다면 그냥 일반 시골의 작은 농로에 불과한 곳이다.
이곳 당재에서 학가산을 바라보면 상사바위와 병풍바위가 보이고 산의 능선들이 힘차게 뻗어 나가고 있는 모습도 보이는데 그 능선 중앙이 안동과 예천을 나누는 경계로 짐작된다.
이곳에서 시멘트 포장도로 위에 서 있는 이정표를 살펴보니 좌측으로는 천주마을이 그리고 우측으로는 느리티리 마을로 하산할 수 있는 거리표시와 함께 방향이 보이는 이정표가 서 있다.
당재에서 이정표와 주위 풍경을 사진에 담고 출발하다 잠시 뒤돌아 보니 방금 전 올랐다 내려 온 학가산이 올려다 보이는데 그 동안 잘 보이지 않던 상사바위가 한눈에 들어 오고 그 상사바위 우측으로는 병풍바위도 빤히 올려다 보인다.
이곳 학가산 상사바위는 암자 터 남쪽의 낭떠러지 절벽을 말하는데 높이 약 50미터로 암벽등반거리 100여미터를 갖춘 천연 절벽이라 암벽을 타는 등반객들만 장비를 갖추고 암벽을 즐기는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당재로 내려와서야 그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잇는데 그 상사바위 우측으로는 병풍바위도 보인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상사바위를 올려다 보니 오늘은 평일이라 그런지 바위 암벽을 즐기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학가산과의 이별을 하고 비포장 임도를 따라 직진 방향으로 빠르게 걸어 들어가니 저 멀리 폐민가 한채가 보이는데 임도 우측으로는 넓은 밭이 묵은 밭이 되어 잡풀들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 시골집 근처의 묵은 밭이 생각나 많이 아쉬운 시간이다.
그 폐가 직전 좌측으로 잡풀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곳을 헤치며 능선으로 오르니 다시 뚜렷한 등로가 나타나고 곧이어 소나무 등로를 지나 갑자기 철조망이 앞을 가로 막는다.
경고판을 읽어 보니 임산물재배지역으로 출입을 금지한다는 내용인데 아마도 송이가 주가 아닐까 생각도 해 보는데 오늘은 평일이라 그런지 마찰은 없을 듯 보인다.
그 철조망을 우측에 두고 한동안 진행을 해 보는 시간이다.
철조망을 따라 잠시 오르니 그 철조망은 우측으로 사라지고 평이하게 걸어 진행이 되고 있다.
잠시 후 무명 묘지 한기가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623.5봉에 도착을 하는데 박건석씨는 이곳을 광산이란 이름의 종이코팅지를 붙여 놨는데 그 출처가 의심스러운 이름이다.
그 묘지봉을 지나 약간의 잡목들이 방해를 하는 등로를 따르니 다시 벌초가 되어 있는 무명 묘지 한기를 통과하고 간벌된 마루금을 걷다 보니 관리가 되지 않고 있는 무명 묘지 한기를 다시 만난다.
다시 무명 안부를 지나고 입산금지 플랭카드를 통과하니 무명묘지와 짧은 밭 경작지를 지나 시멘트 포장도로가 있는 갈림삼거리인 원통재에 도착을 하는데 도로 우측으로는 다시 사과과수원도 보인다.
하지만 그곳 원통재가 왜 원통재인지 지명 이름을 살펴봐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데 자료도 보이는 것이 없어 아쉽기만 하다.
거목 한그루가 서 있는 삼거리를 지나 파란 물통을 좌측에 두고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오르니 삭과과수원의 사과들이 빨강으로 물들어 가며 수확하는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지나 온 학가산을 다시 한번 뒤돌아 보고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걸어 들어가다 도로가 우측으로 휘어지는 곳 좌측으로 전봇대가 보이는 지점 좌측 능선으로 오르며 정상적인 등로를 찾아 오르니 벌초가 되어 있는 묘지들을 지나 바위들이 나타나고 분봉이 사라진 듯한 무명묘지를 통과하니 또 다시 많은 바위들이 등로에 깔려 있는 곳을 지난다.
오랫만에 만나는 바위들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바위와 묘지가 함께 있는 521 무명봉에 도착을 하는데 높이가 높아지면서 묘지 관리에도 어려움이 있는 듯 보인다.
다시 나타나는 바위 암릉구간을 조심하며 통과하고 길게 이어진 너럭바위도 넘으니 관리가 되지 않는 무명 묘지 한기를 다시 지난다.
벌목된 나무들이 널부러져 있는 소나무 등로를 만나 어렵게 걸어가고 완만하게 오르니 갑자기 등로 좌측으로 텐트 한동이 설치되어 있는데 자리까지 말리고 있어 잠시 긴장을 해 보지만 송이 움막인데 지금은 지키는 사람이 없어 비어 있는 텐트이라 조금은 안도의 한숨을 내 쉬어 본다.
잘못한 것은 없지만 괜시리 주민들과 마찰을 일으키거나 의심을 받게 되면 후답자들이 통과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아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그 송이 움막용 텐트를 지나 진행하니 이제부터 한동안 등로를 따라 입산금지 경고판이 보이고 붉은 노끈으로 출입을 금지하는 표시를 해 두웠다.
다시 약간 가파라지는 오르막 소나무 등로를 따라 많은 땀을 흘리며 오르니 커다란 바위가 있는 575.1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겨 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바위에 올라 보지만 소나무들에 막혀 조망이 전혀 없기에 곧바로 내려 와 다시 펼쳐진 간벌된 나무들이 널부러져 있는 소나무 등로를 따라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바위봉을 지나 계속 이어지는 등로 좌측의 붉은 노끈으로 출입을 금지하는 표지와 경고판을 바라보며 갈어가니 등로에는 여전히 간벌된 나무들이 널부러져 있어 조심스럽다.
하지만 널부러져 있는 간벌목 등로는 금새 끝이 나고 다시 평이한 소나무 등로가 열리는데 곧이어 소나무 한그루에 박건석님이 이곳을 570미터 높이의 참꽃봉이란 종이코팅지를 붙여 놨는데 참꽃봉 역시 출처가 의심되는 이름과 높이이다.
570봉을 지나니 이제부터 조금 더 굵은 소나무 등로가 열리고 걸을 때 조심스럽던 간벌된 나무들도 사라져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널부러진 간벌목들이 보이고 조심스럽게 걸어 진행을 하니 분봉이 거의 사라져 관리가 되지 않는 무명 묘지 한기를 지난다.
약간의 잡목들이 보이는 소나무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커다란 참나무 한그루가 서 있는 안부에 도착을 하는데 주위에는 약간의 생활 쓰레기들이 보여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지도상 갈마령에 도착을 한다.
갈마령은 경상북도 안동시의 풍산읍 서미리 북쪽 끝에 있는 고개로서 보문산 동북쪽에 있으며 고개를 넘으면 예천군 보문면 수계리가 된다.
조선시대에 안동에서 예천으로 갈 때 이용되었던 고개의 하나로서 주된 길은 아니었으며 왕래가 잦았던 길은 학가산 아래 산성리 느르치를 통하는 길이었다.
따라서 옛 문헌에서 갈마령에 대한 기록은 찾기 힘들지만 조선지지자료에 서미동 갈마현이 기록되어 있으며 지금의 명칭과는 한자 표기가 다르다.
등로 좌우를 살펴보니 이제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는지 고개로서의 기능은 완전히 상실한 것처럼 보이는 갈마령이다.
갈마령을 지나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찟겨진 텐트 한동이 다시 보이는데 아마도 예전에 송이 움막으로 사용하다 시간이 지나 찟겨진 텐트처럼 보인다.
잠시 후 야생화가 피어 있는 무명 묘지봉을 지나고 소나무가 빼곡하게 자라고 있는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내려가니 다시 무명 안부에 도착을 한다.
안부를 지나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558.4봉을 넘는데 그 봉우리 넘어부터는 소나무 등로에서 참나무 등로로 수종이 변하고 있다.
생각보다 뚜렷한 활엽수 등로를 타고 조금은 빠르게 걸어 진행을 하니 조망도 없이 조금은 지루하다 생각이 들때 쯤 키 작은 소나무들이 등로를 가득 메우고 진행에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폐 헬기장에 도착을 한다.
등로 바닥을 살펴보니 보도블록들이 보이는데 오랫동안 방치되어 키 작은 소나무들과 잡목들이 우거져 이제는 헬기장으로서의 기능은 완전히 상실되어 버렸다.
그 폐헬기장을 지나 묘지 위에서 등로 좌측으로 열리는 조망을 살펴본 후 걸어 오르니 싸리나무가 등로를 가득 메우며 진행에 상당한 어려움을 주기 시작하더니 잠시 후 소나무 등로가 나타난다.
하지만 살펴보니 거대한 소나무들 밑둥에는 모두 그을린 흔적들이 보이고 그곳을 지나자마자 다시 잡목들이 우거져 등로가 전혀 보이지 않는데 그 보이지 않는 등로 아래에는 불이 났을 때 죽은 큰 나무들이 쓰러져 제멋대로 나뒹굴고 있어 진행에 상당한 어려움을 주고 속도를 현저하게 떨어 뜨리고 있다.
우거진 잡목 사이로는 이제 고사목이 되어 버린 불탄 거목들이 조금씩 하늘 높이 솟아 있어 산불이 얼마나 큰 재앙인지 직접 알려주고 있다.
지금까지 걸어 온 등로와는 완전히 다른 지독한 잡목과 고사목들이 나뒹구는 어려운 등로를 따라 많은 땀을 흘리며 온 몸에 생채기를 내며 오르니 드디어 넓은 헬기장 한쪽에 산불감시초소와 정상판 그리고 삼각점이 박혀 있는 642.6미터의 보문산 정상에 도착을 해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 본다.
보문산(642.6미터)은 경상북도 예천군의 보문면 수계리에 있는 산으로 해발고도는 642미터로서 태백산맥에서 갈라져 뻗어온 문수지맥에 위치하고 있다.
해동지도의 예천 등의 사료에 나타나며 이 산에는 보문사가 있는데 667년(신라 문무왕 7)에 의상대사가 세웠으며 1184년(고려 명종 14)에 보조국사가 중창한 사찰이다.
보문산이란 산 이름은 이 보문사와 관련이 있는 듯하나 어느 것의 이름이 먼저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대전의 보문산은 잘 알고 있지만 문수지맥 산행을 통해 안동의 보문산을 새롭게 알아보는 시간이다.
보문산 정상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지독한 잡목을 헤치고 조심하며 천천히 내려가니 등로 좌측으로 멋진 조망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고사목과 잡목 사이로 안동시가 빤히 내려다 보이고 그 뒤로 갈라지맥과 우측으로는 진행하고 있는 보현지맥 마루금도 나즈막하지만 끊어질 듯 이어지는 모습으로 다가 온다.
다시 불난 지역의 고사목들이 앙상하게 남아 있는 등로를 따르니 안동시 우측 남쪽으로 수많은 산줄기들이 황금빛 들녘과 어울리며 또 다른 풍경을 선사하고 있다.
진행하고 있는 보현지맥도 보이고 올라야 할 갈라지맥도 보이며 그 뒤 저 멀리 몇 년 전 올랐던 팔공기맥 산줄기도 드문 드문 보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한동안 등로 좌측으로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과 조망을 즐기며 잡목과 불난 흔적을 따라 가파르게 내려가니 잠시 잡목이 사라지고 등로는 더욱 가파르게 내려간다.
그렇게 잠시 더 걸어 조심하며 내려가니 눈 앞으로 거대한 암봉 하나가 다가오는데 살펴보니 이제부터 내려 가 올라야 할 중대바위이다.
그 중대바위 뒤로는 황금빛으로 변해가는 들녘과 사과과수원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 들판 넘어 야산에는 포크레인이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풍경도 눈에 들어 온다.
서미마을 뒷산인 보문산에는 우람한 중대바위가 있는데 일명 중대바우, 장군바우, 탕관바우라고도 부른다.
중대바위는 중대사라는 절 이름을 따 중대바위라 했으며 마치 투구를 쓴 장군이 수 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호령하는 모습과 흡사하다.
중대바위와 서미마을에 매료 되어 말년을 꼼짝 없이 머물게 했던 두 정승을 생각해 본다.
서애 류성룡(1542~1607)은 풍산류씨로 하회마을 입임고택 류중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임진왜란 때 영의정과 도체찰사로 활약하여 조선을 구한 명재상이었으나 삭탈관직 당하여 고향인 하회마을에 낙향하게 된다.
강 건너편 옥연정사 원락제에서 징비록(국보132호)을 저술하고 앞 뜰에 소나무를 심어 지친 심신을 달래며 말년을 보내려 하였으나 큰 홍수와 찾아오는 사람들이 번거로워 서미동으로 은거하였는데 마치 자신을 닮은 중대바위가 우뚝 솟아 있어 마음을 기대리라 생각하며 고향에서 약 15키로 정도로 멀지 않아 최적의 은거지로 삼았다.
중대바위 밑에 거처를 잡아 초가삼간 세 칸을 지어 농환재라 하였고 배꽃이 많아 이화동이라 불렀으나 안동부의 서쪽 아름다운 마을이라 하여 서미동이라 고쳐 부르고 여생을 지낸 마을이다.
그 후 벼슬에 다시 올랐으나 사양하였으며 풍원부원군에 봉해져 사제사와 불천위로 병산서원에 모셔져 있다
농환재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지만 구전에 의하면 중대바위 넘어 정터(정승이 살았던 터)가 남아있고 또 권씨가 살던 터 쪽이 농환재가 있었다고 추측은 하지만 권씨가 떠난 지 오래되어 아무도 알 수가 없으나 다만 중대바위가 투구를 쓴 째 세월을 이고 옛모습 그대로 마을을 굳건히 지키고 있으며 중대사의 절터 우물만 마을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그 후 40여 년 뒤 청음 김상헌이 은거로 다시 찾은 곳도 이곳 서미동인데 1637년 1월 30일 삼전도의 굴욕을 치뤄 나라 잃은 설움을 달래려 그는 소산마을 선대의 고향에 낙향한다
마을 이름이 금산이었으나 김가가 사는 곳을 금산이라 하면 너무 화려하고 사치스러워 모름지기 검소하다는 소산으로 바뀌어야 한다 하여 마을 이름을 고치고 청을 멀리 한다는 청원루를 지어 학문에 심취하다가 그도 말년에 서미동으로 은거했다.
서애가 이화동에서 아름답다고 하여 서미동으로 고쳐 불렀으나 청음은 서미동으로 이름 지어 보문산을 수양산으로 삼고 충절을 지킨 백의숙제를 닮으려 고사리 미자로 고쳐 불렀으며 초옥을 목석거 만석산방 이라 하고 서간사를 지어 후학을 양성하며 스스로 서간노인이라 했다.
청음은(1570~1652, 안동) 우의정 김상용의 아들이며 한양에서 출생하여 인조반정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굳은 절개를 지킨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도승지와 대제학을 지냈으며 영의정으로 추대되었다.
서간서원은 1786년 정조(10) 시대에 안동 7개 정자 중 사액으로 봉해 졌으며 이후 7대 후손인 김학순이 경진춘부사로 안동에 부임하여 청음의 정신을 오래 기리고 선양하기 위하여 강린당 옆 바위 위에 빗집을 지어 만석유허 백세청풍이라 바위에 글를 새겨 목석거 유허비를 세웠으나 인걸은 간 곳 없고 강린당만 남아 쓸쓸한 학당이 되었다.
이로써 서미마을은 임진왜란인 1592년(선조25년)과 병자호란인 1636년(인조14년) 시대의 아픔을 뼈저리게 온몸으로 감당했던 우국충절의 두 정승이 머문 곳이지만 정승이 머문 곳이라기 보다는 소박하고 작고 예쁜 마을로 칡덩굴과 망초꽃이 무성하다.
중대바위
서미의 뒷산 중턱에 탕건과 같이 생긴 커다란 바위가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중대사가 있었다고 하여 중대바우라 부르고 생긴 모양이 탕관과 같이 생겨 탕관바우라고도 불린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신성스럽게 받들어지는 골매기와 같은 신성물로서 실제 이 바위로 인하여 마을에 재앙이 없고 평안하다고 믿고 있다.
이 마을에는 예로부터 높은 관직에 진출한 사람이 많이 배출되었으며 오늘날에도 판사와 군수까지 나왔고 전쟁에 나간 동리 사람들이 전사자 한 명 없었다는 것은 중대바위의 영험 때문이라 믿고 있다.
다시 부러진 고사목들이 널부러져 있는 소나무 등로를 타고 가파르게 더 내려가니 다시 불에 타 죽은 고사목과 그 아래 새로 자라기 시작한 잡목들이 등로를 완전히 점령하고 길을 내주지 않는다.
참으로 어렵게 그 잡목들을 헤치며 내려가니 등로는 다시 널부러진 고사목들로 가득하다.
너무나 힘들게 그 잡목과 고사목 구간을 조심하며 내려가니 바로 눈 앞에 중대바위 오르는 길이 보이고 조심하며 그 길을 통해 바위 정상으로 올라 제일 먼저 방금 전 내려 온 문수지맧 방향과 그 우측으로 학가산을 살펴본다.
준비한 간식과 과일로 허기를 달래고 다시 일어나 이제는 진행 방향을 살펴보니 바로 앞으로 340봉과 잘룩한 오치고개를 지나 506.9봉이 우뚝 솟아 있는 모습도 눈에 들어 오기 시작한다.
그 뒤 우측 저 멀리 문수지맥 마지막 구간이 끝없는 산그리메를 그리며 다가와 있는 모습도 눈에 들어 오기 시작한다.
그 아름다운 풍경에 많은 사진을 담고 조금 더 시간을 보내며 땀을 말려보기도 하다.
중대바위 정상에서 남쪽을 살펴보니 풍산읍 서미리 들녘이 보이고 우측으로는 신양리의 신양저수지와 그 옆으로 중앙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이는데 중앙고속도로 위로는 많은 차량들이 제법 속도를 내며 달리고 있다.
그 뒤 저 멀리에는 나즈막하게 끊어질듯 이어지는 보현지맥 마루금이 길게 이어지며 조만간 그곳에 올라 오늘을 추억할 수 잇기를 기대도 해 본다.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과 조망이기에 조금 더 머물다 다시 배낭 둘러메고 그 중대바위를 내려와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다시 문수지맥 마루금을 타고 걸어 진행을 하니 지독한 잡목과 그 잡목 아래 널부러져 있는 고사목들이 발목을 잡으며 산행 속도를 현저히 떨어 뜨리고 있다.
안부를 지나 완만하게 오르니 잠시 잡목이 사라지지만 그 대신 화마가 휩쓸고 간 흔적이 소나무 밑둥에 그대로 남아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다.
등로 좌측으로는 계속 해 안동시와 풍산 들녘이 내려다 보이고 그 뒤로는 아스라히 하늘금에 맞닿아 있는 보현지맥이 아름답다.
그렇게 계속 주위 풍경을 바라보며 걸어 진행을 하니 불난 흔적이 남아 있는 소나무 한그루에 두가지가 자라고 있는 448.5봉에 도착을 해 잠시 긴 호흡을 해 본다.
다시 등로를 따라 걸어가다 등로 좌측을 내려다 보니 서미리와 신양리 들판이 보이고 신양저수지와 그 옆으로 중앙고속도로가 가깝게 다가와 있다.
잠시 후 멧돼지들이 목욕 후 몸을 문지른 흔적이 남아 있는 소나무와 불난 흔적이 남아 있는 등로를 따라 걸어가니 일시적으로 잡목이 사라지더니 소나무 밑둥에 불난 흔적이 가슴을 아프게 만들고 있다.
그곳을 지나니 예전에 불이 나 사라진 숲에 새롭게 자라고 있는 잡목들이 무성하게 자라면서 그곳을 통해 걸어가야 할 산객의 마음을 긴장시키고 있다.
지독한 잡목 지대 넘어 올라야 할 506.9봉이 서산으로 기울어져 가는 햇살에 또 다른 모습으로 이 산객의 가슴속으로 들어 오고 있는 시간이다.
또 다시 온 몸에 많은 생채기를 만들며 그 싸리나무 군락지를 헤치고 완만하게 내려가니 그 싸리나무 속에 숨어 있던 산초나무 가시가 지독한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
그래도 그 지독한 잡목속에 등로 좌측으로 내려다 보이는 황홀한 조망과 풍경이 그 심각한 고통을 감내하게 만들고 있기에 한발짝씩 발걸음을 옮겨 본다.
신양저수지가 바로 발 아래로 다가와 있고 그 우측으로 지나는 중앙고속도로를 달리는 차량의 소음도 들리기 시작한다.
그 뒤로 흐르는 보현지맥이 다시 산객의 발길을 붙잡으며 또 다른 추억을 만들고 있다.
참으로 지독한 잡목 구간을 어렵게 헤치며 빠져 나오니 반가운 넓은 비포장 임도를 만나는데 불행하게도(?) 그 비포장 임도를 건너 다시 능선으로 들어야 한다.
하지만 너무나 지독한 잡목들이 우거져 도저히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아 마루금 우측으로 보이는 묵은 밭 경작지 가장자리를 타고 내려가니 생각지도 못한 인삼포를 만난다.
그 인삼포 우측 가장자리를 따라 좌측으로 돌아 내려가니 드디어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며 높은 무선이동통신탑이 서 있는 오치고개에 도착을 해 긴 한숨을 내쉬어 본다.
오치고개 (보문고개)는 경상북도 예천군 보문면 오암동에 있는 자연마을인 오치마을 위에 있는 고개라서 붙여진 이름인데 오암리는 경상북도 예천군 보문면에 있는 리로서 마을이 산자락 밑에 자리잡고 있으며 행정구역 개편으로 여러 리가 병합되었는데 그 중 오칭리와 문암리의 이름을 따서 오암리라 하였다.
자연마을로는 문바우와 웃문바우가 있는데 문바우는 오암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서 마을 앞에 문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웃문바우는 문바우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특산물로는 단호박이 있다.
걱정했던 식수는 아직 조금 더 남아 있어 날머리까지 진행에는 큰 무리가 없을 듯 하여 물 한모금 더 마시고 곧바로 출발한다.
오치고개를 출발 해 비포장 임도를 따라 오르니 등로는 다시 벌초가 잘 되어 있는 안동권공 묘지를 지나 다시 불난 흔적이 남아 있는 소나무 등로를 만나 조금은 편안하게 걸어 본다.
오르다 잠시 뒤돌아 보니 방금 전 쉬었다 올라 온 오치고개와 이동통신탑 그리고 그 뒤 보문산으로 이어지는 문수지맥 마루금이 아름답게 펼쳐져 보이지만 그곳을 통과해 진행하며 너무나 고생을 하였기에 또 다른 추억으로 남겨진다.
등로 좌측으로는 잡목 사이로 여전히 중앙고속도로와 신양저수지가 내려다 보이고 그 뒤 저 멀리에는 안동시가 반짝이며 빛나고 있다.
앞으로 진행 할 방향으로 펼쳐진 지독한 잡목들을 살펴보니 그렇게 길지 않은 거리이지만 벌써 접근하기도 전에 질려 버린다.
진행하다 너무나 힘들어 자꾸만 뒤돌아 보니 지독한 잡목으로 너무나 힘들게 진행해 온 등로이지만 벌써 지나간 추억이 되어 너무나 아름다운 추억이 되어 간다.
다시 눈 앞에 펼쳐진 지독한 잡목을 헤치며 오르니 저 앞으로 506.9 삼각점봉이 올려다 보이는 곳 등로 좌측으로 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 있어 잠시 더 발걸음 멈추고 쉬어 가 본다.
하루 해는 서산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지만 눈이 부실 정도의 환ㅇ홀한 풍경을 버릴 수 없어 자꾸만 발걸음을 멈추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는 순간이기도 하다.
동쪽과 남쪽을 살펴본 후 이제는 남쪽을 살펴보니 저 멀리 낙동강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 낙동강 바로 뒷쪽으로 현재 진행중인 보현지맥의 나즈막한 산줄기가 확실하게 드러나 있다.
너무나 환상적인 풍경이기에 시간 가는줄도 모르게 이곳에서 다시 많은 시간 보내며 그 이름을 찾아 본다.
조만간 저 보현지맥에 들어 이곳을 살펴보며 오늘을 추억하게 되면 또 어떤 느낌으로 그 시간을 보낼 수 있을지 기대가 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주위 풍경과 조망을 즐긴 후 산객의 키보다 더 웃자란 억새와 잡목을 헤치고 오르니 금새 삼각점이 박혀있는 506.9봉 정상에 도착을 한다.
지도 상 대봉산은 내일 올라야 할 마루금에 있는데 갑자기 삼돌이님의 이정판에는 이곳을 대봉산이라 적어 놓고 높이를 506.9미터라 적어 놔 잠시 헷깔린다.
오늘 산행의 마지막 산 이름을 가지고 있는 봉우리이기에 어렵게 셀카 놀이를 하면서 사진 한장 남기다 보니 오늘 얼마나 힘들게 진행하며 내려 왔는지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있는 듯 하다.
이제 시간을 보니 오후 5시 50여분이 가까워지고 있어 오늘 산행은 계획했던 신득골고개가 아닌 백붕현까지만 진행하고 마무리를 하기로 한다.
대봉산이라 적혀 있는 506.9봉 정상을 출발하자마자 등로 옆에는 오백육고지라는 이정목이 보이는데 왜 그런 이정목을 이곳에 세웠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그곳을 지나 완만하게 이어지는 잡목 등로를 타고 천천히 걸어 진행을 하다 앞을 살펴보니 오늘 걸어야 할 마지막 봉우리인 394봉이 우측으로 보이고 그 아래쪽으로 백붕현이 가라 앉았다가 내일 하루종일 걸어 마무리를 하고 싶은 문수지맥 마지막 구간이 길게 이어지며 합수점으로 달려가는 풍경이 한눈에 들어 온다.
너무나 황홀한 풍경에 다시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란동안 그곳에 멈춘 후 많은 사진을 남기며 그 아름다운 풍경을 가슴속 깊이 남겨 보는 시간이다.
그 문수지맥 마지막 구간으로 흐르는 산줄기 우측으로는 예천쪽 산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그 뒤로 내성천도 내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그 내성천 위로는 오늘 하루 함께 시간을 보낸 가을해가 두꺼운 구름속으로 스며 들며 하늘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하고 그 뒤로 얼마 전 진행하다 마지막 구간만 남겨 둔 운달지맥 마루금이 추억을 들려주고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백두대간 마루금을 찾아 보니 운달산 뒷쪽으로 문경과 단양을 지나는 주흘산과 대미산 줄기도 살짝 보이기 시작한다.
앞으로 이어지는 내일 걸어야 할 문수지맥 마루금과 우측으로 석양빛에 물들어 가는 붉은 하늘 그리고 그 뒷쪽으로 보이는 문경쪽 산군들과 운달지맥 및 백두대간 마루금을 바라보며 걸어가는 시간은 정말로 꿈결같은 시간으로 남는다.
그렇게 걸어 고사목들이 널부러져 있는 467 무명봉을 넘어 빠르게 걸어가니 드디어 오늘 넘어야 할 마지막 393.5봉이 바로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다가와 있다.
심한 잡목의 저항이 있지만 개의치 않고 빠르게 걸어 진행을 하니 고사목들이 널부러져 있어 몇번인가 넘어질 뻔 한 상황도 만나지만 큰 어려움 없이 잡풀이 무성한 묘지가 있는 무명 안부를 지난다.
다시 빠륵 발걸음을 옮겨 완만하게 오르니 불난 흔적이 남아 있는 커다란 소나무가 서 있는 오늘 마지막 봉우리인 393.5봉에 도착을 해 마지막 봉우리에서 사진 한장 남겨 본다.
이제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며 빛이 모자라 사진 한장 남기기도 어려운 시간이라 마음만 급해진다.
마지막 393.5봉에서 좌측으로 크게 꺽어 내려가니 약간의 잡목들이 발목을 잡지만 큰 어려움 없이 진행이 되지만 마지막 백붕현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지독한 칡넝쿨 지대를 만나 한동안 그 칡넝쿨 속에 갇혀 개고생을 하고 좌측 묘지가 있는 방향으로 탈출을 해 너무나 어렵게 시멘트 포장도로가 지나는 백붕현에 도착을 해 오늘 산행을 마무리 한다.
백붕현(뱁재·백아현)은 현애리에서 예천군 호명면 황지리 백골로 연결되는 길목에 있는 재를 일컫는데 재가 험하고 깊어서 도적이 자주 출몰하기에 백 명이 모여야만 재를 넘기 위해 길을 재촉한다고 하여 백아현 또는 백붕현이라 한다.
예전에는 예천장에 가서 소를 팔고 여러 사람들이 모이지 않고는 이 재를 넘어 오지 못하였다고 한다.
짙은 어둠속에 그곳 백붕현에서 배낭을 정리하고 있는데 예천쪽에서 트럭 한대가 올라오고 무조건 손을 흔들며 그 트럭을 세운 후 사정 이야기를 하고 안동까지 가면 태워줄 수 있느냐며 물으니 마침 안동으로 나가는 길이라며 이 밤중에 홀로 이런 산골짝까지 와서 산행을 하느냐며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그렇게 마음씨 좋은 트럭 아저씨의 도움으로 짙은 어둠속에 백붕현에서 안동까지 무탈하게 나오고 인적이 뜸한 골목에서 얼굴과 손을 닦아 낸 후 택시를 불러 새벽에 애마를 주차한 지곡1리로 복귀하니 벌써 밤 8시가 넘어가고 있다.
무탈하게 애마를 회수하여 다시 문경으로 나가 안동역 옆 안동온천 사우나에서 샤워를 하고 그 바로 앞에 있는 순대국밥 집에서 시원한 맥주 한병과 순대국으로 허기를 달래니 이제서야 제대로 된 사물이 보이는 듯 하다.
다시 사우나로 들어 가 모바일 폰과 충전기를 충전시키고 곧바로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저녁 11시가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눕자마자 꿈나라로 여행을 떠난다.
내일 하루 더 이곳 안동과 예천에 머물며 가능하면 문수지맥 산행을 마무리하고 올라 갈 수 있기를 기대해 보지만 그것이 무리라고 생각하면 짧은 구간은 남겨 뒀다 추석 다음 날 대전에서 아침 일찍 내려 와 남아 있는 구간 산행을 깨끗히 마무리하고 회룡포를 여유있게 둘러보고 올라갈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