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향 / 남정언 / 수필과비평 제224호 2020.6.

[남정언1]

수필과비평 제224호. 2020. 6.

잔향 / 남정언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아이야~ 벗님네야~ 어서 가자~ 배 띄워라~”

   파도가 넘실대는 물 위에 희망의 배를 띄운다. 앉아서 기다리며 서럽게 울고만 있을 수 없으니 함께 우리 배를 타고 나가자고 하는 노랫말이다. 호흡이 길다. 느리게 뽑아내는 목소리에 한이 서려 있다. 어지간한 숨으로 국악가요를 부르기가 쉽지 않다고 하는데 그녀는 시청자의 단전에 힘을 넣게 만든다.

  배는 서서히 물길 따라 나간다. 하염없이 소리가 이어지니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후반부는 민요 가락처럼 흥겹다. 희망가 느낌이 드는 동살풀이 장단이다. 노래를 마치자 방청객들은 멈추었던 숨을 내쉰다. 심사위원으로 나온 어느 작곡가는 노래가 끝났는데 물소리가 들리는 듯 전율이 느껴진다며 극찬한다.

  ‘보이스 퀸’은 지난 연말연시에 방송한 예능 프로그램이다. 우리나라 주부만 출연 가능한데 목소리의 여왕을 뽑는다. 수천 명이 지원해서 치열한 예심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참가자는 퀸 메이커 열 명의 심사 위원에게 최소 7개 이상 크라운을 받아야만 다음 단계로 올라간다. ‘주부’ 직함을 가진 그녀들은 시댁과 친정의 대소사를 챙기고 육아와 살림이 우선이었지만, 꿈을 다시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최근 대중음악 대세는 트로트다. ‘미스트롯’이 트로트의 가인(歌人)을 탄생시켰다. 차세대 트로트 가수를 꿈꾸는 ‘미스터트롯’ 영웅들이 열풍을 이어가는 중이다. 이와는 달리 ‘보이스 퀸’은 트로트, 성악, 발라드, 민요, 재즈 등 음악의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오로지 주부로 살면서 노래하고 싶었던 끼를 누르며 살았던 한 편의 이야기는 휴먼드라마 같기만 하다.

경기민요로 ‘배 띄워라’를 열창한 그녀가 예선을 통과했다. “37세 주부 6년 차, 누구의 엄마”라던 그녀는 심사위원 모두에게 감동을 주며 크라운 열 개를 받았다. 노래는 부르는 이의 마음이 전달되어 듣는 이에게 감정이입이 되는 장점이 있다. 그녀의 노래 실력은 횟수가 거듭할수록 열정이 곱절로 더해져 하늘에 닿을 듯하다. 치열한 경쟁에서 모두가 다음 단계로 가는 것은 아니다. 탈락한 출연자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감사하다.”

  “마음껏 노래 부르고 나니 속이 후련하고 행복하다.”

  본선까지 직진하지 못하고 무대를 내려간 그녀는 정말 행복할까. 혹시 와일드카드로 마지막 기회에 다시 살아나고 싶은 희망을 품지 않을까.

  ‘보이스 퀸’을 시청하며 또 다른 특별한 출연자들을 떠 올린다. 그녀는 집안의 가장이다. 그녀는 유방암에 걸렸다. 남편의 외도로 이혼했다. 그녀는 가수의 꿈을 포기하고 예순이 넘은 할머니가 되었다. 그녀는 딴따라는 절대 안 된다는 아버지를 거역하지 못했다. 그녀는 결혼식을 마치고 바로 뛰어와 예선 대회를 치르는데 그 긍정의 에너지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보이스 퀸이 중반전을 넘었다. 울림을 만든 그녀들은 새로운 울림을 전달한다. 그녀는 독신 엄마이기에 살기 위해서 발라드를 부른단다. 또한 그녀는 폐암 선고를 받은 남편을 위로하며 트로트를 부른다. 그녀는 뮤지컬 가수였지만 육아로 단절된 후 우울증이 생겨 노래를 찾았다. 그녀는 재즈를 부르고, 그녀는 포효하는 로커다. 그녀는 R&B 창법의 고수이고 그녀는 성악 전공자다. 그녀는 한국으로 시집온 필리핀 새댁이다. 그녀가 판소리로 발라드를 부르니 ‘판라드’라는 새로운 장르의 이름이 생겨났다. 노래하며 춤추며 무대를 찢고 나와 노래의 여왕을 향하는 그녀들의 아름다운 결말을 고대한다. 평범한 며느리와 딸, 엄마로 불리면서 자신을 찾아가는 그녀에게 작은 기대를 건다. 이 변신이 삶의 고운 결로 이어져 앞길이 윤택해졌으면 좋으련만.

  ‘배 띄우라’ 열창했던 그녀가 결선에서 탈락한다. 거대한 강물을 노래로 보여 주었던 그녀는 경력 높은 무명 민요 가수였다. 결선에 오르지 못했다고 그녀의 꿈이 끝나는 건 아닐 터, 다만 버거운 삶을 지탱하면서 꿈을 펼치지 못한 아쉬움은 남을 것이다.

  노래와 무대가 관객이 호응하는 완성도에 대한 기대치가 갈수록 올라간다. 이제 심사위원 전부가 인정한 최후의 7인만 남았다. 그녀들은 각자 거침없이 새로운 노래를 시도하며 다음 무대를 모색한다.

  매주 목요일 밤마다 결선을 향한 목소리의 여왕이 남긴 물리적인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바로 뒤에 출연하는 더 강렬한 목소리에 묻혀버린다 해도 자기 운명을 사랑하며 생의 절정을 노래로 풀어낸다. 원곡을 한 키 더 올린 고음이 곧 사라질지도 모르지만, 음원으로 계속 다시 듣기를 하고 싶을 정도다.

  그녀들을 바라보던 눈빛이 달라졌다. 온 가족이 응원한다. 가수 아내를 위해 집안일과 육아를 대신한다며 너스레를 떠는 남편은 여유가 생겼고, 시부모는 며느리 덕에 동네 유명인사가 되었단다. TV 화면에 클로즈업된 딸을 바라보는 친정어머니의 주름진 얼굴엔 행복한 눈물이 흐른다. 주부가 행복해야 가정이, 가정이 행복해야 사회가 행복하다는 지극히 건전한 표어 하나를 건져 올린다.

  마지막 결선 무대다. 무작위 곡을 뽑아도 소화해 내는 그녀들의 목소리는 악기가 되었고 그녀들의 몸은 무대가 되어 즐긴다. 그녀들은 한 번도 인생에서 힘들지 않았고,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꿈을 이루어내고 있다. 그녀 스스로 존재 이유를 찾아 자신에게 모든 것을 선물하는 새로운 판도라가 되었다고 하겠다.

  황홀한 반전보다 꾸준한 성실을 갖추어야 보이스 퀸으로 탄생한다. 절실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녀들의 매력을 찾아 끝까지 응원한다. 삶의 애환이 담긴 목소리는 향기를 품은 울림이다. 그녀들의 목소리에 크게 취한다. 웅숭깊은 목소리로 여운을 남긴 대한민국 주부 수연, 엘라, 연화, 도희, 성은, 설옥, 미애, 연희, 야부제니린 그리고 영랑…. 고유명사로 남은 그녀들의 잔향(殘響)은 그녀들만의 그윽한 잔향(殘香)으로 기억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