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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Review (2008. 3월)
이 순 구
봄은 좋은 계절임에 틀림없다. '보다'의 '봄'처럼 만물의 모든 것들을 가까이서 살펴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겨우내 움츠리고 준비한 많은 것들이 새롭게 출발하고 암울한 마음이 빛에 의해 생기를 더한다. 풍경과 꽃을 좋아하는 작가들은 그러한 풍경을 찾아 화구를 펼만한 좋은 시간이기도 하다.
미술계는 지난겨울에도 꾸준히 움직이고 있었다. 다만 이 지역에서 전시회가 좀 적었던 것은 외형상의 결과와 이 지역 작가들이 다른 곳에서의 전시회를 준비한 까닭이다. 서울위주의 전시회 편중은 여전하고 외국전시가 전에 비해 비중 있게 자리를 차지한다. 아트페어와 입주 작가제도 등이 활발한 타 지역에 비해 관심을 크게 가진 전시 관계자가 부재한 탓이지만 그 원인은 개인 화랑의 경제적 이유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이에 운영의 묘를 살리지 못하고 겨우내 비워둔 전시장들을 보며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많은 작가들이 여전히 열심을 내어 분주히 움직인다.
1.사실과 재현
사물을 보고 모방하여 표현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오래전 그림들도 자연의 형상들을 '연상 작용'에 의한 발상이나 이상화된 형태들을 만들려 노력하였다. 20세기에는 사진기를 이용했고 종래에는 다시 눈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거친다. 형상적인 사실만이 사실이 아니다. 사물과 관계하는 과정에서의 사실이 있다. 이를 '리얼리티reality'라 부르지만 그림에서의 '재현mimesis'은 사실을 닮았을 뿐 '리얼리티'는 없다. 평면의 시각예술들은 모두 이 속성에 속한다. 인화지가 그렇고 영상을 비추는 스크린과 모니터와 캔버스의 평면이 그렇다. 그들은 표면일 뿐 '사실'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하지만 이 시각이란 것은 매번 착시의 과정을 만들고 우리의 뇌 속에 '마치 ~인 것처럼' 우리를 속인다. 이것이 평면의 매력 중 한가지이다.
'마치 사실인 것처럼' 보이는 평면의 형상들은 눈속임 외에도 착시를 할 수 있게 하는 또 한 요소가 있다. 시각과 연결된 우리의 두뇌와 이를 흡수하고 표현하는 '마음'이란 것이다. 마음은 감정과 표현욕구 등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영역이다. 이 영역에 의한 시각의 편애심이 '착각'을 하는 요인을 커다랗게 작용한다. 이 영역은 사람에 따라 달리하며 그 단계도 여러 층으로 나누어진다. 그래서 바라보는 감성은 제 각기인 것이다.
입체 물은 이와는 다르다. 까만 돌로 검은 구두를 깎아놓으면 실재로 쓸 수 없지만 "구두"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입체작품에서는 현실의 물체보다 크거나 작게 만들어 관람자의 시선에 띄게 한다. 매번 그것은 작가의 역할이다. 과거 조상彫像들에는 색체가 입혀졌었다. 따라서 좀 더 시각적으로 현실적 사실과 흡사하게 만들어 그들의 품위를 유지한다. 반면 사찰 입구의 사천왕상에 채색한 색체들은 인간세상을 뛰어넘는 판타지의 색체이다. 현실적인 '사실' 보다는 두려움이 앞서게 하는 것, 그래야 인류와 범 세계를 지켜야하는 위엄이 생긴다.
박성순 전(롯데화랑. 2008.3.13-3.19)은 테라코타로 인간상들을 만들었다. 덤덤히 무리지어 서 있거나 앉아있는 군상들이 살짝 미소를 짓거나 무표정하다. 기실 우리의 일상은 특별히 행복하거나 슬퍼할 때를 제외하고 이런 표정이 아닌가한다. 좌상들은 현대에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무언가의 차례를 기다리는 듯 보이기도하고, 서있는 작품들은 전시장의 출구를 향해 개별적인 포즈로 관객을 주시하는 듯이 보이는 전시장의 구성이다. 차근차근 소조된 테라코타의 전형적인 색채로서 전 세대에 애국가가 울릴 때 취하던 동작의 군중을 연상 시킨다. 근엄해 보이는 전체 맥락 속에 움직이고자하는 개별성이 드러나 보이는 심리도 느껴진다. 조금씩 움직이는 동세의 인체들에서 작가의 시점을 읽어본다. 두덕두덕 진행된 작업의 경로에서 흙이 주는 양감의 무게와 구불구불 자연스레 만들어진 옷 주름의 섬세함이 자연스럽다. 적절히 구워낸 단단함의 표정들에는 미남미녀에 의한 정형의 인체가 아닌 이웃과 그 이웃에서 만나는 현대인으로서의 표정들이 어쩌면 보듬고 살펴야할 마음 한구석이 무언가에 짓눌린 우리의 자화상일 것이다. 그렇다고 세상을 풍자하거나 비판하려는 포즈로는 읽히지 않는다. 묵묵히 세대에 호흡하고 시대를 살아가는 민초들의 모습이 면면에 묻어난다. 때문에 어떤 면에서 작가가 세상을 호흡하는 시각이 미술계의 활성화된 이면을 조금 비켜서 있는지 모른다. 시대의 흐름에 첨단적으로 대응하지 않는 작가의 묵묵함이 시선에 띄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전시장의 윈도우에 설치된 <작업 모자>와 <면장갑>의 테라코타 작품이 눈에 띈다. 인물이 아닌 이 소품들은 그의 소지품이거나 작업할 때 사용함직한 대상들이다. 노곤한 노동력을 대신하듯 화랑 윈도우공간에 보인 두 작품에서 그의 작업과정의 힘겨운 부분이 읽혀지는 듯하다. 그림1 박성순, 전시장면, 롯데화랑, 2008 그림2 박성순, 전시장면, 롯데화랑,2008 인물 조각사를 보면 초기에 직립하고 있다가 한발을 앞으로 드러내 놓기까지의 시간이 오래 걸렸고, 많은 동세에 의한 화려하고 다양한 포즈들이 몇몇 세기를 장식하며, 근대 조각에 이르러 다시 발을 들여놓는 시대에 이른다. 어찌 보면 한발 앞으로 내딛었다 들여놓은 시간이 그 오랜 의식의 흐름일 것이다. 고대 이집트 조각에서 현대조각 사이에 지나온 시간은 많은 변화를 예상하며 긴 시간이라고 인식하지만 한 발자국의 걸음인 것만큼의 변화 정도가 아닐까. 현대의 급박한 합리적인 작품의 제작태도들을 볼 때 가끔 이러한 선대의 조각사를 생각하게 한다. 때문에 차근차근 자기 유형의 작업을 해나가는 작가들을 볼 때 반가움이 앞서는 이유이기도하다. 앞으로 작가 작품의 묵묵함이 세련된 누군가의 시선에 의해 더욱 아름다워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전시장을 나선다. 서재흥 전(소호갤러리. 2008.3.21-4.3)에는 서정적 재구성의 재현인 <물고기 사랑>이 전시되었다. 맑게 투영된 물속에 버들잎 형태를 닮은 주황색 물고기들의 사이가 좋다. 투명한 물은 청량감을 주며 주변에 위치한 크고 작은 돌, 그리고 투명함을 증명하는 낙엽과 낙엽의 그림자가 화면에 등장하는 주역들이다. 서재흥은 오래전부터 서정적 화면을 구성해왔다. 꽃바구니에서 정물에 이르기까지 화려한 면모의 한편에서는 단순화시키는 절재의 기교를 한껏 부리며 색채의 강약이 절정에 이르렀다. 자목련과 스타치스와 장미가 화사한 색채에 의해 살아나고 흐트러지는 화면구성이 계속되었다. 창작은 많은 시간동안 변화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작가들은 작품의 주제와 제작방법을 어찌 변화시켜야 되는지 항시 고민하는 과제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여러 여건에 의해 과거의 주제들이 별다른 영역을 점유하지 못하고 짧은 시간 안에 묻히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는 좀 더 나은 주제를 찾아 변화를 추구하는 작가에게 많이 일어난다. 서재흥의 <물고기 사랑>은 그의 말에 의하면 오래전 제작했던 그림들의 주제를 다시 꺼내 새로운 시점으로 다가선 주제이다. 늘 새로운 것을 찾아 고민하던 작가에게 오래전에 그렸던 주제의 재발견은 "한동안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오래된 책을 꺼내 든 느낌입니다. 늘 새로운 것을 찾고자 번민하던 시간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오래된 책은 내게 무엇인가 말하려 합니다."처럼 새롭게 다가온 것이다. "10년 전 <투영>과 <물고기사랑>을 그리던 그 시간으로의 타임머신"에 의해 되돌아가기까지의 재해석은 자연을 바라보는 완숙한 작가의 시선으로 생각된다. <물고기 사랑>은 대중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얼마 전 진행된 일반인들에 의한 추천 방식의 제1회 인터넷미술전에서 대상을 받은 것에서 알 수 있다. 여러 고민 끝에 참가했다는 경매방식의 오픈 미술전의 결과였다. 다시 그의 화면으로 돌아가자. 화면에는 사실적인 재현과 거기에 포함된 작가의 인위적인 구성방식에 의해 새롭게 형성된 이상향적인 내용이다. 평면위에 판독되는 대상은 그저 평면의 연장일 뿐인데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각의 현상은 맑음의 투명으로 착시현상을 일으킨다. 착시현상을 일으키게 하는 것은 조감법에 의한 시냇물 한 귀퉁이 그대로의 표현과 물을 뒷받침한 돌들의 크기와 물에 담겨진 돌 그림자의 두께에 의해 물속의 깊이를 주었다. 또한 물고기의 유연한 움직임과 그림자가 한 몫을 더한다. 그리고 주변구도의 전체를 보면 화면 아래 방향으로 트여있어 시선을 물의 흐름으로 모으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안정적인 심상을 불러일으킨다. 실상 가끔 나타나는 버들강아지 같은 소품들도 화면에 밀착되어있지만 화면의 윗부분에 자리하고 있어 감상자의 시선에 가장 먼저 닿아 물 표면과 바닥과의 거리를 느끼게 한다. 때로는 모래톱과 눈과 얼음이, 그리고 마른 들풀 몇 가닥이 이 역할을 한다. 평면의 이러한 공간은 이중 삼중의 투명한 유리가 간격을 두고 제시되는 것과 같은 층을 만드는 작용을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치환된 현대추상작품들도 종종 있는데 서재흥은 서정적인 이상향의 풍경식 소재를 통해 표현하는 것이다. 그의 그림은 사실적이지 않다. 그것은 이상향의 잘 만들어진, 사실을 뛰어넘는, 그러나 오랜 관찰과 노력에 의한 결과물임을 잘 안다. 학창시절 '뭉툭한 붓'으로 주변에서 놀랄 정도로 '섬세'하게 그려내던 <인물>들을 보아온 바가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할 수 있다. 한동안 "아름다움의 전형적인" 정물에서의 탈피가 10여 년 전의 그의 시각으로 돌아온 것이 반갑다. 그리고 맑은 이상향의 서정성이 많은 이들에게 가슴 깊은 울림을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림3 서재흥, 물고기 사랑Ⅵ, 물고기 사랑Ⅱ 유화,2008 2.재현의 심상풍경 심상은 누구에게나 있다. 다만 표현의 방향과 형식이 다를 뿐이다. 때로는 과감하고 직설적이며, 은유와 비유를 사용하기도 한다. 형상들도 알레고리와 데페이즈망 depaysement(轉置, 轉位法)의 방법이 동원되기도 한다. 데페이즈망은 우리 심상의 복잡하고 혼재된 영상 심리중의 하나로 자주 등장한다. 또는 대부분을 차지한다. 알레고리는 어법의 원형적 비유법으로 이 또한 개체적 형상과 연속적으로 연결된 형상이 주축을 이룬다. 일상적인 사물의 상으로 비유할 때 타인과의 소통이 직접적이며 빠르게 전달되는 특성으로 인해 성인들의 어록에 자주 나타난다. 이러한 형상들을 자연의 재현과 연계한다. 익히 들어온 '재현'은 플라톤의 이데아의 세계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신이 창조한 형태이며, 인간이 자신의 생활 안에서 지각하는 구체적인 사물들은 이 이상적인 형태가 그림자와 같이 어렴풋이 재현된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화가나 예술가들은 모방된 것을 다시 모방하는, 진리로부터 2단계나 떨어진 사람들인 것쯤으로 된다. 이에 비해 사실reality은 '자연이나 현실생활을 정확하고 자세하며 꾸밈없이 묘사하는 경향'으로 규정된다. 상상력에 따른 이상화(理想化)를 거부하고 밖으로 드러난 겉모습을 자세히 관찰한다. 그러나 회화로서의 옮겨가는 작업과정은 때로는 사실보다 더 사실로 형식과 내용의 차원에서 인위성이 가미된다. 이것이 회화의 속성이기도 하다. 따라서 미술사의 사실주의든 아니든 심상의 재현과 관계가 있으며 작가마다의 고유한 그 무엇이 드러나는 현상을 보이는 것이다. 최성두의 <상상과 몽상사이>전(이공갤러리. 2008.3.13-3.19)은 재현과 데페이즈망의 방법을 활용한다. 익히 초현실주의에서 보아온 방법들이지만 나무를 통한 그 느낌이 정성스럽다. 장시간의 작업여정과 오랜 방법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만의 해석방법으로 꾸준한 그림에는 여러 모색이 엿보인다. 변형된 물체 이전에 나뭇잎이 떨어진 겨울나무의 관찰에서 또 다른 형상을 떠올리게 한다. 이국적인 풍경이 있고, 어느 산에서나 볼 수 있는 초겨울의 풍경이 세심한 필치에 긴밀히 그려져 있다. 그곳에 작가의 상상과 심상의 요인들이 작용하고 구성되어 표현된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껍질 형태의 사과와 앵무의자, 그리고 군화에서 솟아난 플라타너스 나무, 하늘을 비행하는 말과 물고기들은 그림 속에 자주 등장하는 소제들이기에 이러한 형상들이 작가 자신의 고유한 이미지들일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림4 최성두, 이공갤러리, 2008
현정수의 수채화전(에스닷 갤러리.2008.3.19-4.1)은 오랜만에 보는 신선함으로 다가온다. 1991년 <먹으로 찍은 목판화>전 이후 여는 개인전이기도 하지만 그림의 접근방식이 다정하다. 현대에는 재료도 다양하지만 그 쓰임새도 유연하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수채화라는 특성을 캔버스 천으로 알려진 아사 천에 그렸다. 수용성 물감의 특성으로 인한 발묵發墨의 상황은 동양적인 회화를 연상시킨다. <강>,<길>,<봄>,<밤>,<눈> 등 제목에서 보듯 그의 소재는 야트막한 풍경들이다.
그는 서문을 대신한 글에서 "'당신 그림 그릴거야?' 아내가 묻다. '아빠 진짜야?' 아들 눈 모양새가 바뀌다."라고 가족의 물음새로 그간 작업과 거리가 있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작년 이맘때 읽었던 풍경이 거짓 없이 또 눈에 들어온"것은 항시 작업에 대한 염두로 머릿속 한쪽을 채우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러하기에 화방에서 차를 마시고 동네어귀를 배회하던 풍경들에서 "화려한 자태의 꽃도 아니고 정해진 나무도 아니고 옹달샘도 아니고 하늘도……"아닌 그 언젠가 보았음직한 심상의 풍경을 단칼에 그려낼 수 있었지 않았을까. 치열한 생존을 위한 그림그리기에서 살짝 발을 내리고 유유하며 자적하게 거리를 두고 탐미하는 방식이야말로 옛사람들의 그림 그리기 방식이 아니었을까. 이번 그의 그림에서 생각의 세련과 표현의 세련이 공존하는 것을 볼 수 있어 새삼 또 한 번 반갑다. 그 새벽길이, 안개 낀 강 풍경이 '다음 전시를 절망'하지 않고 계속 연 이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그림7 현정수 ,<강>, <눈>, 아사천에 수채, 2008
3월에는 많은 작가들의 전시가 있었다. 지난해 북경으로 입주 작가로 가 있던 윤종석의 베이징 아트사이드 갤러리(2008.2.23-3.27)에서 성황리에 진행된 개인전과, 한남대학교 재학 중인 한휘건의 안단테 갤러리(2008.3.2-3.13)에서의 젊은 작가전의 참여, 오원화랑에서 참여한 서울 아트페어의 부산전시(2008.3.6-3.10)에 참여한 이선희, 김종령, 갤러리 소호의 김경희전(2008.3.7-3.20), 서울 큐브스페이스 기획초대전(2008.3.5-3.11)을 연 박용선, 그리고 대전시 미술대전이 대전시립미술관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림을 대할 때 '잘 그린' 그림과 '정신을 투사한' 작품이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이 있다. 모두에게 장단점이 있다. 현실은 이미지가 혹세무민하는 경우가 많다. 혹은 그것이 이미지의 속성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가슴 한구석이 아려온다. "관계"는 더욱 혼란스럽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오는 관계를 좋은 의미로 생각을 몰고 가도, 어느새 틈 사이로 이율배반의 모순들이 꼬물꼬물 기어든다. 말들도 많다. 미술 판에도 과거와 같지 않게 설왕설래의 흔적들이 많이 드러난다. 어떤 것은 서글퍼지는 형국이다. 이러한 현상은 기실 자기 이득에 관한 것이리라. 어디 자기 이득을 추구하지 않는 삶이 있으랴만 타인에 대한 한 치 정도의 배려보다 상처를 후비고 지나가는 가학적인 손들이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자기만이 옳다'라는 발상에서부터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자기도취의 기만에 사로잡힌 부분도 그렇다. 그러나 어쩌랴 그림그리기가 재미있고, 그림 보는 것이 즐거운 사람들이 있다. 전문적 지식의 시선이든 식견을 갖지 못한 시선이든, 그들이 있고 작품이 있는 것이니, 사는 동안 가진 것보다 넘치지 않도록 중도의 마음을 수양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첫댓글 수채화하면,, 종이에만 그린다고 생각했었는데,, 아사천에두 그릴수있다는 점이 독특합니다^^ 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