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산장
박 영서
지리산의 부름에 8월의 뜨거운 열기도 아랑곳 않고 산으로 떠난다. 황석산장은 지리산으로 가는 길목에 황석산을 등지고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다. 산장으로 들어서며 잘 꾸며지고 정돈된 정원은 산장 주인의 손길이 느껴진다. 주인보다 먼저 도착한 우리 일행은 넓게 펼쳐진 광활한 산과 짙푸른 숲의 비경에 빠져든다.
여기서 한 선생님을 만난다. 그는 대전의 모 고등학교에 재직 중이며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한 시간쯤 지난 시간에 산장주인을 마주하고 인사를 나눈 후 손님접대로 준비해온 돼지뒷다리를 구우며 와인 한 잔으로 분위기에 젖는다.
저녁부터 태풍과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를 맞추기나 하듯이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과 소낙비가 억수같이 쏟아진다. 지글지글 구워지는 돼지뒷다리구이와 소낙비에 만취한다. 깊은 밤 세차게 때리는 비바람소리는 표효하는 짐승의 울음인지 지리산의 울음인지 분간이 어렵다. 천둥과 번개를 안고 8월의 황석산장에 쏟아지는 비바람 속에 시간을 잃어버린 장승처럼 우두커니 서있는 나를 본다. 비 내리는 유리창 저편으로 바라보이는 나는 쓸쓸하다 못해 고독하다. 오래된 고독은 세차게 퍼붓는 소낙비로 흘러내리고 이 선생의 지리산 역사이야기에 밤이 깊어 간다.
가야는 천년의 시간을 건너서 나에게 오고 나는 천 년을 거슬러 그에게로 간다. 김종직 길에 대한 역사와 마치 1500여 년 전의 살아있는 지리산 영랑대가 눈앞에서 그림처럼 펼쳐진다. 김종직 길은 1472년 추석전날 점필재 김종직 함양군수가 지리산 유랑에 나섰던 길이다. 이 선생님은 『김종직의 유두류 록』을 수백 번을 읽고 지리산 김종직 길을 150여회 이상 탐방을 했다고 한다. 김종직 길에는 화석화된 수많은 역사의 진실이 켜켜이 쌓여있다. 가야나 신라의 화랑이 만들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해발1100미터 고지의 돌길이다. 주변에 흩어져있는 야철지와 숯 가마터는 물론이고 크고 작은 논밭의 흔적도 남아 있으며 낭도 3천명이 올랐다는 영랑대는 아직도 건재하다고 한다.
천 년 전의 역사가 눈앞에 한 폭의 풍경처럼 살아서 돌아오고 이 모두가 우리 선조의 삶이고 우리의 역사이기에 호기심은 더욱 고조된다. ‘마암’ 이라는 지명은 말이 지나가는 곳이라는 뜻을 간직하고 천년을 홀로 굳건히 지키고 있고 일곱 군데의 절터가 남아 있다고 전해진다. 또 당시에 나라의 안위와 번영을 기원하는 무당의 천신제를 지냈던 흔적이 오롯이 남아있으며 천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오늘도 누구를 기다리는지 애달픈 역사의 현장이다. 천 년 전 가야의 슬프고도 아픈 역사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천둥과 번개는 우리를 삼킬 듯 했다, 천둥은 붉게 울었고 번개는 흰 맨발을 굴리면서 8월의 깊고 푸른 밤바다를 건너가고 있었다.
태고 적에서 가야로 가야에서 신라와 조선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김종직의 지리산 길은 우리의 역사를 오롯이 간직한 역사보물 창고이다. 잘 간직하여 후대에게 물려주어야 할 문화이며 그것은 우리의 몫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피난하듯 산으로 오르고 올랐으나 결국은 신라에 항복하고 말았다는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장소는 영랑대 부근의 절터로 남아 있는 곳이라고 한다.
전설 같은 가야국과 신라 화랑의 역사에 대해서도 이어졌다. 하봉 중봉 두류봉으로 중봉의 바로 가까운 곳인 화랑이 올랐다는 영랑대에 가보고 싶다. 신라의 화랑들은 지리산의 넓은 품으로 소환되고 천년의 시공간을 휘돌아 눈물처럼 내리는 비는 마당에 다소곳이 놓여 있는 맷돌위에 동그라미를 그린다. 패망한 가야국의 역사와 신라 화랑은 어느 누가 그들의 이름을 따뜻하게 불러주겠는가. 천년의 세월이 푸르게 흘러간 뒤, 또 다시 천년의 시간이 흘러갈 것이다. 김종직 길을 돌아보며 탐방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그 곳 역사의 숨결을 좀 더 가까이서 느껴보고 싶다. 역사의 진실 앞에서 지리산이라는 엄청난 대자연의 품속에서 나는 어디쯤에 있는가. 윤회의 깊은 산맥를 아득히 건너가며 어제의 죽음과 오늘의 삶이 한 몸으로 겹친다.
산장주인은 대학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는 농과대학 교수이다. 주말이면 산장을 찾아 자연과의 소통으로 현실에서 쌓인 피로와 마음의 치유를 받는다고 한다. 산과 숲과 소통하는 자신만의 독특한 소통방법이 있다고 말하며 멋쩍은 웃음을 짓는다. 자연을 대하는 정신적, 물리적 거리의 태도와 자세에 대한 나름의 사유를 들을 수 있었다. 산장주인의 자연을 향한 사랑과 그 심미적 활동과 자연에게 나를 내어주는 따뜻함을 배우고 실천해 보고도 싶다. 선생은 겨울이면 동물들의 먹이를 놓아 주기도 하고 추운 겨울 기온이 내려가 나무들이 얼지 않게 싸매고 돌보기도 하는 자연보호 활동을 하기도 한다. 숲과 하나가 된다는 선생의 말을 들으며 자연과 숲을 대하는 나의 자세는 어떠한가에 대한 성찰적 물음을 제시해본다. 숲과 나무와 자연과의 대화와 동물들 곤충들과도 소통 법에 대하여 배우고 싶다. 문득 나도 지리산에서 살면 대자연과의 그 물리적 거리를 좁힐 수는 있을까라는 생각이 잠시 스친다.
깊은 밤 천둥소리와 함께 쏟아지는 비바람 속에서 모두들 아무런 말없이 빗줄기만 바라본다. 세차게 때리는 비바람은 마치 내안에서 깊이 내재해 있는 아픔과 상처들이 씻겨나가는 것 같은 개운함마저 느껴진다. 시공간을 넘나들며 지리산 천년의 역사와 함께 황석산장의 밤은 깊어만 간다. 이렇게 깊은 밤 산속에서도 사람 냄새가 나고 인간의 이야기는 잠들지 않는다.
문학약력
등단: 2019년11월 『에세이스트』 신인상 등단.
에세이스트 작가회 회원
마산문협회원
진등재문학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