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령 옛길은 한양에서 삼남(충청·전라·경상도)으로 통하는 유일한 도보길이었다.
이곳을 지나 수원·안성을 거쳐 남쪽으로 갔으며, 반대로 과천에서 이 고개를 넘어
사당동·동작동·흑석동을 거쳐 노들나루(노량진)에서 한강을 건너 한양에 이르렀다.
남태령 옛길은 삼남(三南:충청, 전라, 경상)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중요한 관문으로서
과거 보러 한양가는 길 역할을 한 곳이다.
서울로 가는 고갯길, 남태령을 향하여 완만하게 오른다.
자동차 달리는 신작로가 생기면서 남태령 옛길은 사라졌다. 서울쪽은 완전히 없어졌다.
과천쪽에 짧은 거리나마 옛길이 남았다. 른쪽 2차선 도로가 바로 그 길이다.
물론 옛날엔 길도 이보다 좁고 흙길이었을 것이다. 그 흔적따라 걸어올라간다.
조선시대를 되짚어 생각한다.
과천에서 이 고개를 넘어 사당 동작 흑석동을 거쳐 노량나루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남태령은 지방의 물산이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고 과거시험을 보러 가는 길이기도 했다.
포장도로가 끝나고 좁은 오솔길이 나타난다. 이 숲길이 진짜 옛길이다.
남태령 옛길에 위치한 과천루에 서면 좌우로 청계산과 관악산이 감싸고 있는 과천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과천 팔경중 제5경 남령망루(南嶺望樓)는 ‘남태령 망루에서
바라보는 과천’을 말한다.
조선 후기의 학자 신경준은 “길에는 주인이 없다.
그 위를 가는 사람이 주인일 뿐이다” 라고 하였다.
이 고개의 본디 이름은 여우가 많이 출몰한다 하여 '여우고개'라 했다.
정조임금이 수원에 모신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원을 참배하러 갈 때 이 고개에서 쉬면서
이름을 물었다. 이때 과천현의 이방 변씨가 임금께 속된 이름을 아뢸 수 없어 임기응변으로
'남태령(南泰嶺)'이라 하였다. '남쪽으로 가면서 처음 맞는 큰 고개'라 뜻이었다.
이때부터 고개이름이 남태령이 됐다는 일화가 전한다.
또 다른 이름으론 '쉬네미 고개'라고도 했다고 한다. 고개에 출몰하는 산적들로부터 강탈을
당하지 않으려면 쉰 명이 모여서 관군의 호위를 받아 넘어야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관군들이 그냥 호위해 주는 게 아니라 보호명목으로 과다한 뇌물을 챙겨
이래저래 민간인들은 씁쓸한 수탈을 당해야 했다.
‘서울가려면 과천에서부터 긴다’는 설화가 있다.
조선시대 서울에서 큰 벼슬을 하던 안락공이란 사람이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과천에서
살게 되었다. 안락공은 많은 길손 중에서도 과거를 보러 가거나 벼슬을 얻을까 하고
서울로 올라가는 사람이 인사를 하지 않으면 못 지나가게 하였다.
“나를 도대체 어떻게 보는 거야, 무례한 놈이라고 왕에게 보고하고 말겠다.”
이렇게 말하는 안락공에게 길손들은 인사를 하였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서울에 가려는 사람들에게 과천을 지날 때 안락공에게
인사를 하지 않으면 혼이 난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길손들이 인사를 하려고 지체하니
자연 과천에서 머물러 있는 시간이 길어졌고, 그러다 보니 여관 겸 밥집인 술막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