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대군과 어린 단종
경북 영주시에 있는 순흥 고을은 우리나라 최초로 성리학을 도입한 고려 말 대학자 안향(安珦:1243~1306)을 배출한 선비의 고장이자 충절의 고장이다. 려말과 조선 초기만 해도 수많은 학자를 배출, 그 명성이 대단했지만 수백년 역사의 뒤안 길로 사라져야 했던 비운의 고을이기도 하다.
선비의 고을에서 충절의 고을로 한동안 역사 속에 사라져야만 했던 순흥고을...
반역과 피로 얼룩진 조선조 정치사의 서막을 예고하는 일대사건이 일어났으니 바로 금성대군의 단종복위 운동이었다.
세종의 아들 수양대군은 어린 조카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불만을 품고 추종자들과 함께 김종서 등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어린 조카 단종이 즉위하자 금성대군과 함께 단종 앞에 나가 충실하게 보필할 것을 약속했던 수양대군이었다.
수양대군의 불같은 성격을 알고 있던 금성대군은 내심 염려하던 대로 수양대군이 반란을 일으키자 단종을 더욱 보호해주겠다고 결심을 굳히며 끓어오르는 형에 대한 울분을 삭이고 있었다.
이러한 금성대군의 속내를 눈치 챈 수양대군은 자신의 정적인 안평대군과 마찬가지로 금성대군에게도 죄를 되집어 씌어 삭령에 유배를 보냈다.
1455년 수양대군은 단종을 협박해 상왕으로 앉히고 자신이 정식으로 왕위에 올랐다.
왕위 찬탈에 반대하는 성삼문 등의 사육신 사건이 터지자 세조는 단종이 궁궐에 머물면 역모가 계속될 것이라고 판단, 단종을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봉하고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유배를 보냈다.
또한 금성대군도 삭령 유배지에서 서울에서 더 멀리 떨어진 경상도 순흥으로 다시 유배를 보냈다.
영월 청령포에 유배온 어린 단종은 장마로 인해 청령포가 동강에 잠기자 영월 현청인 광풍헌으로 옮겼다.
단종은 광풍헌 자규루에 올라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읊었다.
달밝은 밤 두견새 울 제
시름 못잊어 루 머리에 기대어라
네 울은 슬프니 내 듣기 괴롭다
네 소리 없었던들 내 시름 없을 것을
세상에 근심많은 이들에게 이르노니
부디 자규루에 오르지 마오
피끝마을이 된 순흥고을
영월에서 단종이 이렇듯 시를 읊으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유배생활을 하고 있을 때 순흥에 귀양살이하던 금성대군은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대쪽같은 지방 선비들을 모아 단종 복위운동에 뜻을 모으고 있었다.
순흥에서 소백산맥 고치령을 넘으면 바로 영월이었다.
지도상을 보아도 순흥, 고치령, 의풍, 영월은 거의 일직선상에 놓여이어 순흥도호부에서 영월로 가는 최단거리 지름길이었다.
또한 순흥도호부가 설치되어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순흥부사가 가담했으니 성공할 확률이 높았던 것이다.
그 당시 팔도 민심은 어린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에게 그 다지 호의적이지 않았고, 단종에게 쏠려 있을 때였다.
이런 민심을 등에 업고 단종만 이쪽 진영으로 모시고 복위를 선포하면 능히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금성대군은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기천(基川) 현감의 고변으로 들통이 나고 말았다.
조선왕조실록 세조실록 정축지변에 보면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이유(금성대군)가 순흥에 안치된 뒤부터 다른 뜻이 있어 기관(記官) 중재(仲才)와 품관 안순손, 김유성, 안처강, 안호우와 군사 황치, 신극장과 향리(鄕吏) 김근, 안당, 김각 등에 뇌물을 주어 중재의 아들 호인(好仁)을 시켜 옛 종 정유재와 그의 무리인 범상, 석정, 석구리, 범이 및 풍산 관노 이동을 불러 군사를 일으킬 것을 공모......"
영주 순흥에서 영월 창령포까지의 밀회는 이렇게 끝이 나고 말았다.
세조는 안동부사에게 명을 내려 순흥도호부를 불사르고 금성대군과 이보흠 등 모의에 가담한 사람들은 사사 또는 처형되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순흥일대 30리 안 고을 백성들은 모조리 무자비하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들이 흘린 피가 죽계천을 따라 흐르다 끝나는 곳이 바로 영주시 안정면 동촌리 (피끝마을)이다.
그로 인해 순흥고을은 폐부가 되었다가 숙종9년 (1683년) 다시 순흥부로 복원이 되었다.
또한 순절의사들이 신원(伸寃)되자 동왕 (1693년) 부사 정중창이 금성대군이 안치 당했던 자리에 처음으로 단을 쌓고 동왕(1719년) 부사 이명희가 삼단으로 고쳐 쌓았다.
그 후 영조 18년(1742년) 경상감사 심성희가 서쪽으로 3~40보 옮겨 정비를 하고 순의비(殉義碑)를 세우고 관리사를 징 매년 봄 가을로 향사를 지냈다.
세월을 멈춘 충절의 넋
단종을 살려두고는 복위운동이 그치지 않으리라 생각한 세조와 권신들은 단종을 죽이기로 작정을 했다.
금부도사 왕방연에게 사약을 내려 영월로 보냈다.
왕명을 받은 왕방연은 영월 땅에 도착해 눈물을 흘리며 단종에게 사약을 건넸다.
일설에는 왕방연이 차마 사약을 건네지 못하고 집행을 주저하자 공생(관청 심부름꾼) 복득이 다가가 단종의 뒤에서 활 시위로 목을 졸랐다고 전해오기도 한다.
단종이 숨을 거두자 시신을 동강에 버렸다.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시신을 거둘 엄두를 못내고 있을 때 영월 호장(戶長)이었던 아전 엄흥도가 밤에 몰래 시신을 거두어 산 속으로 도망을 가다 노루가 튀어나와 달아나는 곳에 눈이 녹아있음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시신을 묻은 후 온 가족을 데리고 종적을 감추었다고 한다.
단종의 죽음을 확인한 왕방연은 청령포가 바라보이는 강가 언덕에 멈추어섰다.
아무리 왕명이라 해도 사약을 건네준 자신이 무척 원망스러웠고 어린 단종의 마지막 모습이 마음에 걸리었다.
왕방연은 무심히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피를 토하듯 탄식했다.
천리나 머나먼 길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풀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서 울어 밤길 예놋다
서울로 돌아온 왕방연은 관직을 그만 두고 봉화산 아래 중랑천 가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단종을 영월로 호송한 것도 자신이었고 사약을 건네 준 것도 자신이었다.
아무리 정권이 바뀌었어도 그래도 한 때 모시던 왕에게 호송과 사약의 임무를 행사했으니 죄스러운 마음이 어찌 없으랴.
왕방연은 단종을 호송하며 죄인에게 물 한 모금 주지 말라는 어명을 이행하느라 목말라 하는 단종에게 물한 모금 주지 못했던 것이 평생 한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는 단종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배나무를 키우기 시작했다.
이른 봄 바람결에 흩날리는 배꽃에 단종의 넋이 들어있다고 여긴 왕방연은 단종이 승하한 시월 달이 오면 수확한 배를 바구니 가득히 담아 놓고 영월을 향해 절을 했다고 한다.
평생 죄인으로 살았던 왕방연은 자신이 죽으면 영월 가는 길목에 묻어 주고 주변에 배나무를 많이 심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 후 왕방연이 심은 배나무가 사방으로 번식해 신내동 일대가 배밭으로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