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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 인물 ┛♥ 스크랩 신숙주
윤대화 추천 0 조회 20 12.09.28 15:5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신숙주                       申淑舟

 

 

 

 

 

 

 

 

 

 신숙주(申淑舟. 1417~1475)는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화려한 경력과 중요한 업적을 이룬 조선 전기의 대표적 명신(名臣)이다. 그러나 ' 숙주나물 '이라는 표현이 상징하듯이, 그는 절개(節介)를 저버리고 영달(榮達)을 선택한 변절자(變節者)의 한 표상으로 지목되어 상대적으로 폄하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모든 사람이 가장 관심을 갖는 일의 하나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두고 내리는 이런저런 평가일것이다. 작은 사실, 그것도 정확하지 않은 풍문(風聞)에 기대어 발설되고 어느새 널리 퍼져있는 비방(誹謗)을 들을 때, 그 당사자는 절망하거나 분노하게 마련이다. 이런 현상은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에게 영원히 남아있을 운명일 것이다. 거의 모든 인간사에 적용되는 말이겠지만, 그래서 정확한 사실에 입각한 신중한 판단과 섬세한 표현은 어떤 사람에 관련된 평가에 특히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의 중요한 전기(轉機)는 다른 사람과의 만남에서 비롯된다. 신숙주도 그러했다. 그에게 가장 큰 전기를 제공한 사람은 얼마 후 세조(世祖)로 등극하는 수양대군(首陽大君. 1417~1468)이었다. 두 사람은 나이가 동갑이었다.

 

 

 

 

                                                신숙주와 수양대군의 만남

 

 

 

 

그 전에도 서로 알고 교류가 있었겠지만, 운명(運命)이라고 말한 만큼 친밀도와 중요성이 급증한 계기는 신숙주가 35세 때인 1452년(문종 2)이었다. 그때 수양대군은 사은사(謝恩使)로 중국에 파견되기 직전이었다. 그 사행(使行)은 야심이 큰 수양대군을 중앙에서 일정하게 격리(隔離)시키려는 좌천(左遷)의 의미가 큰 조처이었다. 다시 말하면 수양대군에게는 어떤 결단이 필요한 중대한 시점이었던 것이다.

 

그 뒤 세조(世祖)가 되는 수양대군과 그의 가장 핵심적인 신하가 되는 신숙주의 만남을 '실록"은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8월 10일 수양대군은 정수충(鄭守忠)이라는 인물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신숙주가 집앞을 지나갔다. 수양대군은 ' 신 수찬(申 修撰) '이라고 그를 불렀고 집으로 초대하여 술을 마셨다. 그때 신숙주는 수찬(修撰)이 아니라 직제학(直提學)이었지만, 수양대군이 그렇게 불렀다는 사실은 그 전부터 신숙주를 알고 있었다는 방증이다.

 

 

술잔을 기울이며 두 사람은 의미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수양대군은 ' 옛 친구를 어째서 찾지 않는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지 오래였다. 사람이 다른 일에는 목숨을 아끼더라도 사직(사직)을 위해서는 죽을 수 있어야 한다 '고 말하였고, 이에 신숙주는 ' 장부가 아녀자의 손 안에서 죽는다면 ' 집에서 세상 일을 모르는 것'이라고 말할 만합니다 '고 화답하였다. 수양대군은 즉시 말했다. ' 그렇다면 나와 함께 중국으로 갑시다 ' ... 단종 즉위년 8월 10일

 

 

이 짧은 대화는, 수양대군과 한명회(韓明澮)의 만남과 함께 개인(個人)의 운명뿐 아니라 조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결정적인 사건이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뒤 서장관(書壯官)으로 수행한 사행(使行)에서 수양대군과 신숙주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당연히 흉금을 터놓고 국가의 대사를 논의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강구했던 '구국의 방안'들은 한 해 뒤인 1453년 10월10일 계유정난(癸酉政亂)으로 구체화되었다.        

 

 

 

 

                                                        숙주나물

 

 

 

 

원래 녹두나물이 숙주나물로 변한다.  신숙주의 이름을 빌린 것이다. 쉽게 상하고, 변질된다고 하여...  또는 만두속에 그 나물을 넣어 짓이겨야 하는 것을 비유하여 신숙주를 비난하는 백성의 소리이었다.  신숙주는 유교도덕(道學)이 엄격하였던 조선 시대의 상징적인 변절자이었다. 

                                          

 

 

 

 

 

                              

 

 

                                                                                                                            先王(세종.문종)의 간절한 유언을 배신하고, 조카인 단종을 폐위하려는 수양대군의 움직임을 방관하거나 도와주며, 후일에는 단종의 죽음을 강력히 世祖에게 요구하여 단종의 죽음에 큰 역할을 자청한다.

 

 

 

 

 

 

 

 

 

世宗과 文宗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집현전 유학자...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관하여 절친한 친구사이인 ..성삼문과 신숙주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성삼문은 천하의 충신이고, 신숙주는 천하의 변절자이었다.

 

 

 

 

 

                                                                     신숙주(좌)와 성삼문(우) 

 

 

 

 

 

 

 

 

 

 

수양대군(首陽大君)은 왕권(王權)을 차지하기 위하여 한명회(韓明澮)의 꾀를 이용하였고, 국정 운영의 동반자로 신숙주를 선택하였다. 신숙주는 분명 정치가는 아니고, 요즘 표현으로 천재(天才) 관료이었음은 분명하다.

 

 

 

 

 

 

 

 

 

 

 

무엇을 선택하는 결단보다는,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는....... 아니면 조선 오백년 내내 대립을 빚어왔던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갈등구조에서 이해한다면,, 한명회, 신숙주가 수양대군을 이용하였을지도 모른다.  수양대군이 김종서, 황보인 등 원로 功臣을 제거하는 것에는 성삼문도 찬성하여 훈장도 받았으므로...  성삼문 등 집현전 젊은 유학자들이 주장한 것은  왕권의 강화가 아니었다. 유학자 중심의 도학정치를 꿈꾸어 왔지만, 일부 중신들에게만 권력이 집중되었으므로 그들의 제거에는 찬성하는 것이다.

 

 

 

 

 

 

  

 

 

역사의 평가는 후세 사람들에 의하여 재 평가되거나, 현실에 비추어 재조명(再照明)을 받을 수 있다. 숙주나물로 폄하될 만큼 변절자로 평가받은 신숙주의 능력과 그가 이루어낸 여러 업적들을 재평가해보는 것은 분명 의미있는 일 일것이다.

 

 

 

 

 

 

 

 

 

                                               성삼문과 신숙주

 

 

 

 

 

신숙주는 말하였다... 세종의 위업을 살리려 나는 살았고, 세종의 유훈(遺訓)을 지키려 그(성삼문)는 죽었다.....라고.. 신숙주는 살아서 6명의 왕을 모시며 여러 업적을 쌓으며 정상의 자리에 있었고, 성삼문은  죽음의 길을 선택한다.  신숙주는 살아 능력을 발휘하고 죽어서 변절자의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되었고, 성삼문은 사육신으로 일찍 죽고, 죽은 뒤 충신으로 추앙받는 극과 극의 입장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선택의 기로(岐路)는 언제나 그리고 현대를 살아가는 지금도 여전하다. 실리(實利)냐? 명분(名分)이냐? 의 선택으로 문제를 접근할 수도 있겠고... 공(功)은 공대로 인정하고, 과(過)는 과 그대로 인정하자..고 절충적으로 판단할 수도 있다. 박정희정권의 재평가 처럼...어느 선택이 옳았는가 ? 나도 잘 모르겠다. 어려운 문제이다. 특히 이제 나이들어 조금은  혼란스럽다.

 

 

 

 

 

 

 

 

 

 

 

世宗의 뒤를 이은 文宗이 2년만에 일찍 죽자, 단종이 12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다. 이때 사은사(謝恩使)로 수양대군이 明나라로 떠나는데, 신숙주가 동행한다.  수양대군 일행은 공식적인 일정이 끝나자 연경(燕京, 현재의 북경)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영락제(永樂帝)가 묻혀있는 장능(長陵)을 찾아 간다. 

 

 

영락제는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네째 아들로, 부왕이 죽고 그의 조카인 혜제(惠帝)가 왕위에 오르자 그를 죽이고 스스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영락제는 평소 " 나의 패륜은 세월이 흐르면 잊혀지겠지만, 나의 위업은 역사에 오래도록 기록될 것 "이라고 말했다. 과연 그는 명나라 300년의 기틀을 훌륭히 마련하였다.  

 

 

그러한 영락제의 능에 나란히 절을 하면서 수양대군과 신숙주가 무엇을 생각했을까를 짐작해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서울에 돌아와 바로 개성의 궁궐지기인 한명회를 만난다. 그들이 속셈은 이미 분명하였던 것이다. 영락제는 수양대군의 모델이었다. 나이가 동갑인 그들은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후일 강희맹(姜希孟)이 지은 신숙주의 행장일대기(行壯一代記)에는 다음의 기록이 있다.

 

 

 

수양대군이 신숙주에게 자기에게 돌아 설 것을 요구했고, 신숙주는 여덟 아들의 목숨을 위해 수양대군을 따르겠다고 말 한 내용... 그리고 수양이 정난(政難)을 일으켰는데, 신숙주는 마침 陵(세종의 능)을 수리하느라고  밖에 있었지만, 그 밀모(密謀)에 일찍부터 참여하였다....라고..

 

 

 

 

 

 

 

 

 

 

 

 

 

신숙주는 약화된 왕권보다는 굳건한 왕권의 바탕 위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세종의 위업을 잇겠다고 변명하지만...그는 아주 현실적인 정치인일 뿐이다. 당시의 유학자들은 신권(臣權)의 정치를 지향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전횡을 일삼았던 김종서, 황보인을 죽이는 수양대군에 성삼문조차 협조하지 않았던가.... 성삼문등이 협조한 이유는?

 

   

 

성삼문 등 젊은 유학자들이 꿈꾸는 정치는 신하 중심의 정치이었지, 일부 소수의 元老들에 의한  권력 독점은 아니었다. 文宗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김종서,황보인 등 고명대신들은 왕권을 무시하고, 황표정사(黃標政事)를 통한 권력의 전횡이었다.  황표정사란 나이 어린  왕을 보필하기 위하여, 임금의 재가를 받을 문건이 있으면 의정부에서 먼저 의결한 후, 원로대신들이 노란 점(황표.黃標)을 표시하였는데...이를 통하여 이들은 권력을 독점하였던 것이다.

 

 

 

신숙주는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降封)된 이후, 앞장 서서 어린 단종과 단종의 복위를 계획하였던

금성대군(수양대군의 동생)을 죽이자고 간청하여, 수양이 마침내 사약을 내리게 된다. 그의 명분은 이러한 사실로 퇴색하고, 자기가 죽인...죽은 단종의 부인을 자기 첩으로 달라고 수양대군에게  청하는 사실로 그의 인격은 파탄되었다. 그의 능력과는 별개로........

 

 

 

 

 

 

  

 

 

 

 

그러나 신숙주는 세종의 위업을 계승하기 위하여 수양대군을 선택하였다 하지만...그 것은 당시의 논리일 뿐이다. 수양대군이나 신숙주의 업적이 개별적으로는  정당한 평가를 받더라도...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행위와 그 후의 여러 정치행위들은 오히려 세종의 크나큰 업적을 훼손시키고 있고, 현재에도 한국사회에  병폐를 남겨 놓고 있는 것이다. 수양대군은 왕위에 오른 후 자신을 도운 사람들에게 그 지위, 토지 그리고 과거시험 없이도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특권 등을 부여한다. 그 것도 代를 이어 세습적으로.... 

 

 

 

 

 

 

 

 

 

 

 

 

세종대왕의 큰 업적에는 물론 한글창제가 포함되어야 하지만, 합리적인 국정운영시스템을 구축, 확립한 것이 더 의미 깊을 수도 있다. 세종은 왕권과 신권(臣權)의 조화를 통하여 국가를 운영하였고, 그것을 제도적으로 시스템化하였다. 왕도, 신하도 누구도 권력을 독점할 수 없었고, 집현전 등을 통하여 항상 새로운 피를 수혈하였다. 왕 스스로 신하들에게 구속된다. 왕의 권위를 해치치 않는 범위에서....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른 후 소위 기득권 세력이 발생하며, 그들의 기득권은 세습되고, 절대적으로 부패한다. 세종이 확립한 민주적인 국정 운영시스템은 여기서 단절되고, 조선 5백년을 짓누르는 당쟁정치의 시발이 되고 만다. 끝없는 王權과 臣權의 싸움...신하들간의 권력 투쟁... 기득권 유지와 그를 반대하는 세력간의 충돌.... 그러면서 조선은 멸망의 길을 재촉하게 된다.

 

 

 

 

 

 

신숙주는 과연 세종의 위업을 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한글 창제의 功은 이미 세종 치하에서 이룩해 놓은 것을.... 

 

 

그렇다면 죽음으로 유훈을 지킨 성삼문은?  그는 죽음으로 충신이 되었지만, 조선 역사의 물길을 바꾸지는 못하였고, 세종의 업적을 지키지 못 한다. 그의 죽음은 그 것으로 끝이었다.

 

 

 

 

 

 

 

 

 

 

 

 

 

 

 

                                            잘못된 역사 교육

 

 

 

 

 

단종복위 운동이 사전에 발각되어, 고문 끝에 성삼문이 죽고, 신숙주가 집에 돌아오자, 그의 부인 윤(尹)씨는 신숙주에게 동지들을 배반하고 혼자 살아 돌아 왔다고 힐책하며, 부끄러워 하여, 다락방에 올라가 목을 메어 자살했다는 얘기가 있다. 

 

 

 이광수의 소설 "단종애사" 그리고 TV 드라마에서 그렇게 묘사하였지만, 전연 사실이 아니다. 그 녀는 신숙주가 중국에 사신으로 간 사이, 갑작스런 병으로 죽었으며, 그 죽음은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기 몇달 전 일이었다.

 

 

 세조는 쌀,콩 50섬과 종이 70권,석회 50섬 등을하사하고 신숙주의 매부인 조효문에게 신숙주가 없으니 대신 호상을 맡도록 명령하면서 일이 진행될 때마다 보고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리고 아버지 신숙주를 따라 중국에 갔던 그의 아들 "신주"도 어머니의 사망 소식과 오랜 여행의 피로로 인하여 병사(病死)하고 만다. 아들 신주는 한명회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이러한 정략결혼으로 세조시대에 한명회와 신숙주의 전성시대가  벌어지게 되었던 것...

 

 

 

                                      신숙주 부인 부끄러워 자살 ???

 

 

 

 

이렇게 역사를 왜곡해도 되는 것인지....그저 충의(忠義)만을 강조하는 가치관, 역사관, 교육관...

 

 

 

 

 

 

 

 

 

 

 

 

 

                                       신숙주의 변명 ... 집안 내력

 

 

 

 

신숙주의 행동을 이야기할 때, 그의 할아버지 신포시(申包翅)의 행적도 아울러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신포시는 고려말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올랐으나,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그에 항거해 고려의 신하들과 개성 인근의 두문동에 들어간다. 두문동(杜門洞)은 고려왕조에 충절을 바치고자 하였던 고려 충신들의 주거촌(住居村)이었다.  

 

 

신포시는 두문동으로 들어 갔으나 끝까지 잔류하여 죽지 않고, 빠져나와 이성계에 투항하여 다시 조선의 관직에 오른다. 이성계는 이들을 회유하려 하였으나 끝내 투항하지 않으니 ( 杜門不出의 유래가 된다) 모두 불살라 죽였다. 이를 두문 72현 (杜門 72 賢)이라 부른다.  원래 황희까지 73賢이었으나, 가장 나이 어렸던 황희는 그들의 합의에 의하여 미리 나왔고, 그래서 72賢이 된다.

 

 

 

신포시와 그의 손자 신숙주의 행로(行路)....너무 닮았다. 신숙주는 어린 단종을 보살펴 달라는 文宗의 유훈을 받은 고명대신(顧命大臣... 王의 유언을 듣는 신하 중의 신하)이었다.   이 것도 집안 내력이고 가풍(家風)일런지 모르겠다.......살아서 나라에 충성하고, 백성을 위해 일하고 싶다....신씨 가문의 가훈(家訓)이나 아닐지???

 

 

 

 

 

 

 

 

 

 

 

 

 

 

                                          신숙주, 단종의 왕비를 탐하다 ?

 

 

 

 

 

단종의 왕비인 정순왕후는 뛰어난 미모의 소유자이었다.  단종이 왕위에서 ?겨나,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고...왕비는 관노(官奴)로 신분이 바뀐다.  신숙주는 세조에게 간청한다. 자기의 첩으로 달라고..... 남편인 단종의 죽음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신숙주는 그의 부인을 자신의 첩으로 만들려하다 실패한다...   

 

정순왕후는 15세에 왕비가 되어 18세에 단종과 사별하고, 그 후 깨끗한 삶을 살며,  단종부터 중종까지 7명의 왕을 거친 후 82세의 나이로 사망하여 지금 사릉에 묻혀있다.이러한 기록은 승자(勝者)의 기록인 세조실록에는 언급이 없다. 다만 야사(野史)와 패자(敗者)의 기록인 단종실록에 언급되어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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