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0장은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선택하시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1~4절을 보겠습니다.
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셔서, 그들에게 악한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악한 귀신을 내쫓고 온갖 질병과 모든 허약함을 고쳐 주게 하셨다.
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부르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과
3 빌립과 바돌로매와 도마와 세리 마태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와
4 가나안 사람 시몬과, 예수를 넘겨 준 가룟 사람 유다이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선택하셔서 병을 고치는 능력과 귀신을 내쫓는 권능까지 주셨답니다. 그러나 복음서에 제자들이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쳐주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돌아가신 후의 일을 기록한 사도행전에 그런 기적 이야기가 가끔 등장할 뿐입니다.
열두 사도의 명단을 제시하는 본문의 기록이 예수님의 제자가 열둘뿐이었다거나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늘 함께 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주 동행한 제자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이렇게 세 명이었고, 70제자가 언급된 기록도 있습니다. 복음서에 열두 제자의 명단이 기록된 이유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의식한 것이라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이어지는 본문 5~6절을 보겠습니다.
5 예수께서 이들 열둘을 내보내실 때에, 그들에게 이렇게 명하셨다. "이방 사람의 길로도 가지 말고, 또 사마리아 사람의 도시에도 들어가지 말고
6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 떼에게로 가거라.
이 본문은 산상수훈에 이은 두 번째 설교입니다. 설교의 주제는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가져야 할 자세와 앞으로 그들이 받게 될 박해에 대해 예고하시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파송하시면서 이방 사람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의 도시에도 들어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의 잃은 양 떼에게로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복음서의 다른 기록에 보면 예수께서 이방인을 품어주시는 부분이 많이 나오는데 본문은 그런 기록들과는 대립되는 모습입니다. 학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대체로 다음 세 가지로 해석합니다.
첫째, 마태복음이 유대인을 염두에 두고 쓴 책이라는 점이 반영된 결과라고 보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둘째, 복음의 궁극적인 목적은 세계화에 있지만 우선은 유대인부터 시작해서 점진적으로 이방세계까지 확장되도록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담긴 기록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셋째, 이방인에 대한 태도가 아직 배타적이었던 초기 제자들의 입장이 반영된 기록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이어지는 본문에서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전할 때는 아무 것도 소유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십니다. 돈도 갖고 다니지 말고, 여유분의 옷과 신발도 챙기지 말고 꼭 필요한 옷과 신발만 신은 채, 먹는 문제도 주민들의 후원에 의존하라고 본문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일상의 문제는 하늘에 맡기고 오직 복음전파에만 전념하라는 뜻이겠습니다. 이어지는 본문 16절을 보겠습니다.
16 "보아라, 내가 너희를 내보내는 것이 마치 양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하게 되어라.
악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악을 이기는 지혜가 필요하지만 순수함을 잃지는 말아야 한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이어지는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재판정에 불려가기도 할 것이고 매를 맞기도 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그때가 되면 형제가 형제를 죽음에 넘겨주고, 아버지가 자식을 또한 그렇게 하고, 자식이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서 부모를 죽이기까지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실제 예수님 시대에 제자들이 겪게 될 일이 아니라, 서기 66~70년 사이에 벌어진 유대 독립전쟁 때의 대재난을 예수님과 결부지어 기록한 것이라고 대부분의 현대 신학자들은 해석합니다. 계속되는 재난에 대한 예고 가운데 29~31절의 본문을 보겠습니다.
29 참새 두 마리가 한 냥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라도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30 아버지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 놓고 계신다.
31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참새 한 마리가 죽고 사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 일어날 수 있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머리카락 수까지 알고 계실 정도로’ 참새와는 비교할 수 없이 귀한 존재이니 어떤 일이 일어나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현실세계에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세세하게 모든 사람을 보살피고 보호하시지 않는다는 것, 또는 보호하시지 못한다는 것을 어린아이가 아니라면 누구든지 경험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신앙적 희망과 현실의 괴리를 연결해주는 것이 바로 사후 심판론입니다. 억울하게 핍박받고 죽음을 당한 사람이 사후에 그의 모든 억울함에 대해 보상을 받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통치권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사후 천국론이 여전히 현대사회에서도 위력을 떨치는 이유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과학과 합리의 세계에서 이천년 전 사람들이 생각하고 기대했던 논리가 과연 합당한 것인지 냉철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천국은 장차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현대 신학자들이 해석하는 이유입니다.
이어지는 본문 가운데, 교회에 많은 혼선과 오해를 일으켰던 말씀을 보겠습니다. 34~39절입니다.
34 "너희는 내가 땅 위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35 나는 '아들이 제 아버지를, 딸이 제 어머니를, 며느리가 제 시어머니를 거슬러서 갈라서게' 하러 왔다.
36 '사람의 원수가 제 집안 식구'일 것이다.
37 나보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적합하지 않고, 나보다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내게 적합하지 않다.
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자신은 세상에 평화를 주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답니다. 이 말씀은 역사적으로 정확히 실현되었습니다. 기독교로 인해 벌어진 세상의 갈등과 싸움은 고대와 중세,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구 기독교 세계와 그 주변을 피로 물들였습니다. 교회의 뜻을 거스르는 집단에 대한 무자비한 재판과 학살, 이슬람과의 십자군 전쟁, 마녀사냥, 아메리카 원주민들에 대한 대규모 학살, 아직까지 이어지는 이슬람 문화권과의 갈등, 이 모든 갈등의 뿌리에 예수님에 대한 배타적인 교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으로 인한 갈등과 싸움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부모와 자식이 갈등을 겪고 심하게 다투기도 합니다. 서기 1세기에 시작된 예수님으로 인한 갈등이 21세기에 들어선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이비 종교단체들이 이 본문을 근거로 부모와 결별하더라도 교회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며 신자들을 자기 조직에 얽어매는 근거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기독교의 배타적인 교리를 수호하기 위해 가정까지 버리고, 부모와의 갈등도 마다하지 말며, 전쟁까지도 불사하라는 극단적인 메시지가 아닙니다.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는 본문의 표현은, 예수께서 자신으로 인한 갈등이 일어날 것을 예고하신 것이 아니라, 마태복음서가 쓰여진 서기 80년대에, 그로부터 십여 년 전 로마제국에 저항하여 일어났던 유대 독립전쟁 때의 처절하고 극단적인 상황을 예언의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라는 해석에 많은 현대 신학자들이 의견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전쟁이 일어나면 그런 극단적인 상황이 쉽게 자주 일어납니다. 성읍이 포위된 상황에서 수개월이 지나 음식이 떨어지면, 주민들은 먼저 기르던 가축을 잡아먹다가, 가축도 떨어지면 결국 사람까지 잡아먹었다는 기록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발견됩니다. 구약성서에도 그런 기록이 있습니다.
멀쩡한 젊은이들이 옆에서 전우들이 픽픽 쓰러지는 걸 보면 제정신을 잃고 양민을 학살하거나 부녀자를 성폭행하는 만행을 저지는 것 또한 어느 나라 어느 군대를 막론하고 전쟁 중에 늘상 벌어지는 일입니다. 우리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을 통해서 그런 사실을 다시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쟁은 그 자체로 악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어떤 문제건 전쟁으로 해결하고 싶어 하는 통치자를 인류가 용서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알렉산더나 카이사르, 징기스칸, 나폴레옹 같은 살인마들을 인류가 영웅시하는 풍조도 극복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람을 한두 명 죽이면 살인자가 되는데 수천수만을 죽이면 영웅이 된다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 전쟁을 선택하는 자는 영웅이 아니라 살인마일 뿐이라는 생각을 인류가 공유하지 않는 한, 지구마을에 전쟁은 끊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