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재미난 길, 소풍길,
산과 물소리와 함께 손잡고 가던 길
글을 쓰면서 ‘무엇을 쓸까?“ 에 대한 고민은 늘 있어 왔다. 어느 날 모임에서 최도규 형이 말했다. ”소재에 대한 생각이 잘 안 나니,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제목을 정해 함께 쓰자. 그래야 작품 수준이 늘어.“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좋은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 뒤로 김진광, 장영철, 김종영 선생은 열심히 쓰는 모양이었다. 최도규 형은 그 작품들을 회보처럼 만들어 16절 갱지에 복사하여 우리는 돌려보았다. 나는 생각 끝에 교사로 있던 날, 고향의 제자들과 함께 소풍을 갔던 ’소풍길‘을 제목으로 쓰기로 하였다.
아이들은 강소천 선생이 쓴 동요 ’소풍‘을 목청껏 노래 부르며 걸어갔다. 노래 속에 즐거움이 철철 넘쳐 흘렀다. 소풍 장소에 가서는 제일 많이 부는 노래는 이원수 선생이 작사한 ’고향의 봄‘ 노래였다. 당시 ’고향의 봄‘은 국민가요가 되다시피 하였다. 음치인 나도 ’고향의 봄‘ 노래를 부를 때에는 목청을 높이기도 하였다.
소풍
강소천 작사,
1.
단풍잎이 아름다운 산으로 가자
산새들이 노래하는 산으로 가자
맞은 편을 향하여 소리 지르면
메아리가 대답하는 산으로 가자
2.
들국화 향기로운 들로 나가자
갈대가 손짓하는 들로 나가자
금잔디에 누워서 하늘을 보면
벌레 소리 들려 오는 들로 나가자
깅소천은 동요 동시 뿐만 아니라 동화 창작도 많이 하였다. 그의 방 창문은 날이 새어도 불이 꺼지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만큼 창작 활동에 올인하였던 분이다. 1915년에 태어나 1963년에 돌아가셨으니 젊은 나이, 한창 글을 쓸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정말 어린이문학을 위해 산 훌륭한 분이었다. 아동문학가 중에서도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중의 한 분이다.
어린 시절 제일 운동회날과 소풍날 전날은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즐거움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소풍 날에는 비가 올까 봐 걱정이 되어 밤에 자다가도 밖에 나와 하늘을 보기도 하였다. 별이 총총하면 기분이 좋았다.
아이들을 데리고 소풍 가던 날의 즐거움을 동시로 형상화하여 5월에 『교육자료』지에 투고 하였다. 이 작품으로 네 번의 추천을 받으며 추천 완료를 하였다.
소풍길
남진원
이름 모르는 꽃들이
웃음을 물고 선
오솔길로
밤새도록 엮어내던
무지개꿈을
한 짐씩 지고 가는 아이들
일렁이는
노래소리
메아리로 번져
꽃사슴도
숨어
엿듣다 가고
풀잎에
기대 앉아
고개짓하는 바람
돌돌돌
개울물이
구름을 잡아타고
둥둥!
구름 속에
함빡 젖은 소풍길이
거꾸로 달린다.
- 1976년 7월호 [교육자료] 시 3회 추천 완료 작품.
너무 기뻐서 추천완료 소감은 최도규 형께 보내는 편지글과 학교 동료 선생님들에 대한 고마움으로 마무리하였다.
* 1976년 7월. 『교육자료』 추천 완료 소감
이 즐거움을 최도규 형님과
남진원
형님! 참말 고맙습니다.
눈 아닌 눈을 마음 아닌 마음을 항상 옆에서 열어주고 돌보아 주신 형님과 오직 이 기쁨을 같이하고 싶읍니다.
그리고 때로 용기를 주신 이창백 선생님, 장오기 선생님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주신 박순자 선생님 조규영님 또 엄성기 형의 동시집을 선사해 주신 박영춘 교감선생님 모두 고마울 뿐입니다. 아울러 손주녀석 뒷바라지 해 주시느라 애만 잡숫는 할머니께도 고마움을 표합니다.
끝으로 자상한 마음의 손길을 베풀어주신 임교순 회장님을 비롯한 강원아동문학회 회원들께 감사드리며 제 이 졸작을 천해 주신 박경용 선생님께 부끄러운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내 인생에서 피어난 재미난 소풍길이었다. 그리고 고향 마을과 아이들, 산과 나무들, 물소리와 함께 손잡고 가는 행복의 나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