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밤마을은 유래부터 흥미롭다. 이 마을의 시작은 950년경 남양 홍씨에게서 갈려 나온 부림 홍씨의 시조 홍란이란 선비가 입향하면서 시작된다. 여양 진씨, 전주 이씨, 예천 임씨, 영천 최씨, 고성 이씨 등이 부림 홍씨 일족과 어울려 살고 있다. 마을은 본래 심야(深夜) 또는 대야(大夜)라고 불리던 곳이다. 대낮에도 밤처럼 어두운 심심산골 오지여서 붙여진 이름이 아니겠는가 하는 추측을 하게 한다. 하지만, 1390년경 부림 홍씨 14대손인 홍로 선생이 마을 이름에 밤 야(夜)자가 들어간 것이 역학적으로 좋지 않다고 해서 대율(大栗)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그후 대율의 이두 표현법인 한밤으로 불리게 됐다.
이 마을은 팔공산을 지붕처럼 이고 있다. 산 정상에서 시작된 작은 물줄기는 한밤마을 위에서 남천과 동산천으로 갈리게 된다. 물줄기 양 갈래의 중앙에 마을이 있는 셈이다. 이로 인해 비가 오면 팔공산에서 돌들이 수없이 흘러내렸다. 마을 앞 하천으로 굴러온 돌들을 차곡차곡 쌓아 담을 만들었다. 척박한 땅을 밭으로 일구고, 집터를 닦으면서 나온 돌도 담이 되었다. 그렇게 수백년 마을이 제자리를 잡아가는 동안 돌담은 높아지고 길어졌다. 돌담길이 많은 제주도를 연상시킨다고 해서 한밤마을은 ‘육지 속의 제주도’로 불리기도 한다. 한밤마을 돌담은 사시사철 옷을 갈아입는다. 푸른 이끼가 기어오르고, 노란 산수유와 들풀들이 담에 기대어 꽃을 피운다. 가을에는 붉은 산수유 열매와 노란 감이 담을 타고 넘어온다.
한밤마을의 여정은 아름드리 소나무 140여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는 성안숲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송림은 2006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전국 10대 마을숲’ 중 하나로 지정한 곳이다. 임진왜란 때는 홍천뢰 장군의 훈련장으로 사용된 장소이기도 하다. 홍천뢰 장군의 기념비와 진동단, 효자비각 등이 숲 안에 있다.
성안숲을 지나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 총연장 4㎞가 넘는 돌담길이 나온다. 한밤마을의 중심에는 대청이 자리 잡고 있다. 대청은 원래 사찰의 대종각이었다가 오랜 기간 마을의 교육기관인 학사로 쓰였다고 한다. 지금은 동네 사랑방 구실을 하고 있다. 여행객이 쉬어가고 여름밤엔 음악회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대청과 이어진 한쪽에는 남촌고택이 있다. 옛 안주인의 이름을 따 ‘상매댁’이라 불리기도 한 이 집 안에는 300년이 넘은 덩치 큰 잣나무 두 그루가 세월의 무게를 이겨내고 오롯이 서 있다. 그래서 고택 안에는 잣나무 백(柏)자를 써서 붙여진 ‘쌍백당’이라는 건물이 있다. 한밤마을에는 100년 이상 된 한옥이 20채가 있는데 남촌고택은 이 가운데서도 가장 크고 오래된 집이다. 조선 후기인 1836년 지어진 것으로 가옥 일부는 광복 후 허물어지고 지금은 대문채와 사랑채, 안채, 사당 등이 남아 있다. 이 집은 대학병원에 다니다 퇴직한 부림 홍씨 29대손인 홍석규(56)씨가 지키고 있다.
2) 한밤마을에는 서기 1100년 이전, 고려 중엽에 재상을 지낸 부림홍씨 시조 홍난(洪鸞)이 현재 양산서원 근처의 갖골(枝谷)에 정착하면서 부림홍씨의 본향이 되었다.
1392년 여말선초에 정몽주의 문인으로 문하사인(門下舍人)을 지낸 경재(敬齋) 홍로(洪魯ㆍ1366~1392)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을 이유로 낙향하면서 한밤마을은 동성반촌(同姓班村)으로 발전하여 부림홍씨(缶林洪氏)의 집성촌이 됐고 영천최씨(永川崔氏)와 전주이씨(全州李氏) 등과 함께 어울러 살고 있다.
홍로(洪魯)는 마을의 옛 이름이 대식(大食), 대야(大夜)라 했던 것을 대율(大栗), 즉 한밤으로 고쳤다고 한다.
대식(大食)은 한밥, 대야(大夜)는 밤이 길다는 의미의 한밤으로 의미는 같지만 한자를 달리 표기하던 것을 대율(大栗)로 통일하였다.
대구에서 한달음에 달려와서 한티재에 올라서니 동쪽으로 오도봉과 비로봉, 그리고 천왕봉을 비롯한 팔공산 정상부가 우뚝하고, 팔공산 종주능선에서 이어진 산줄기가 한밤분지의 서쪽과 동쪽에서 에워싸고 있어 팔공산의 맑은 정기가 한밤마을로 절로 모이는 형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