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42년 낙동강 하류에서 가락국(駕洛國)을 창건한 김수로왕은 인도 아유타국에서 온 허왕후와 결혼하여 10형제의 왕자를 낳았는데 그 중 이자(二子)에게 허씨를 사성(賜姓)했다. 이는 자기 성이 이어지기를 원하는 왕후의 간청 때문이었다고 가락국기는 전하고 있다. 그런데 가락국이 10대 구형왕에 이르러 신라에 병합되자 가락 왕실의 후예들과 그 유민들은 신라의 사민(徙民)정책에 의해 여러 지방으로 흩어져 갔다. 허씨 왕족 중에 김해에 계속 머물러 살게 된 후손을 김해허씨, 하양(河陽)에 옮겨 세거한 후손은 하양허씨, 공암(孔巖=양천:陽川)에 터를 잡은 자손을 양천허씨, 태인(泰仁)에 이주한 후예들은 태인허씨를 각각 관향으로 삼아 허씨는 4개의 본으로 분류하지만 모두 가락계의 후손이다.
양천허씨의 중시조는 허선문(許宣文)인데 그는 공암촌주(孔巖村主)였다. 고려 태조가 후백제의 견훤과 싸울 때 군량미를 보급하여 큰 공을 세우고 태조 왕건으로부터 공암촌주로 봉해지고 공암현을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아 관향을 공암으로 하였다. 공암이 양천의 옛 이름이므로 양천허씨라 한다. 양천허씨 신해보(辛亥譜)는 허선문을 김수로왕의 30세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양허씨 중시조는 허강안(許康安)으로 고려 때 하주(河州) 자사(刺史)가 되어 이곳에 터를 잡음으로서 관향을 하주라 했다. 하주는 경북 경산군에 있는 지명인데 후에 하양(河陽)으로 고쳐 부르게 되어 하양허씨로 됐다. 하양허씨 정사보(丁巳譜)에는 중시조 허강안은 보주태후의 33세 후손이라 기록하고 있다.
태인허씨의 중시조는 허사문(許士文)이다. 고려조에 시산군(詩山君)에 봉해졌다. 시산(詩山)은 태인의 옛 이름으로 허사문이 시산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관향을 태인으로 삼았다. 태인은 전북 정읍에 있는 지명으로 태산(泰山) 인의(仁義) 두 현을 합한 이름이다. 중시조 허사문은 양천허씨의 중시조 허선문과 형제라고 하나 문헌이 없어 고증할 길은 없다.
김해허씨의 중시조는 허염으로 고려 문종 때 출생하여 벼슬이 삼중대광에 오르고 가락군(駕洛君)에 봉해졌다. 김해허씨 세보에는 수로왕비인 보주태후 허씨의 35세 후손으로 되어 있는데 본관을 김해로 정한 것은 그때 시조 허담이 김해에 세거(世居)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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