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같은 지도자가 필요한 한국(#2)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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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가 황 남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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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시청하는 한국 TV 연속극이
오랜 해외생활에서 매말라가던 감성을 새롭게 자라나게 하고 있다. 9월 초부터 방송되고 있는 <불멸의 이순신>은 진한 감동속에 눈시울을 뜨겁게 하고, 가을의 걸작인 사색과 추억을 음미하며 오늘의 글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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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서울·1545년4월28일(음력3월8일)~1598년12월16일(음력11월19일))을 소개함은 그 줄거리만을 간추려도 5~6개월 이상은 소요되겠지만, 오늘도 지난호에 이어 충무공이 바다를
호령하는 명장으로서의 초석을 다진 발포만호로 재직할 당시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독자분의 질문에 답하고자 하며, 앞으로 2~3차례의 글을 통해 전라좌수사 및 삼도수군통제사로서의 역할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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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군 지휘관 발포만호
이순신 장군(이하 공)은 1576년(선조9) 32세의 나이로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종 8품으로 시작된 군직은 네 차례의 전근으로 종6품인
충청 봉사 권관(權官)을 거치면서 약 5년 동안의 육군생활을 하였다. 공(公)은 1580년(선조13년) 7월 흥양(興陽:고흥군 일원의 옛 지명)의 발포만호(鉢蒲萬戶)로 부임하면서 처음 일선의 진(鎭)을
통솔하는 수군 지휘관이 되었다. 발포진성은 1490년(성종20) 윤 9월에 축조된
성(城)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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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발포진에 도착하여 ‘바다를
지키는 일이 왜군을 물리치고 조선을 구할 수 있다’고 다짐하고, 휘하 수군들에게도 자주
깨우쳐 주었다. 공은 남다른 호국정신으로 만약을 대비한 진지구축과 군사훈련, 군선 수리, 총통개발, 군장비
점검과 전투식량 비축 등 철저한 준비에 심혈을 쏟았다. 부하들의 통솔은 때로는 신상필벌(信賞必罰:상벌을 분명하게 함)과
일벌백계(一罰百戒:무거운 벌로 다스림)로, 때로는 형제와 가족처럼 생사고락(生死苦樂)을 함께하는 전우애의 정신무장을 병행하였다. 이와 같은 이순신 장군의 병영철학은 싸움터로 나가야 할 수군들에게 큰 용기가 되었고, 공을 신뢰하고 따르는 끈끈한 인간관계를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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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포만호성과
굴강의 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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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의 파직
지난호에서 언급했듯이 공은 불의를 보면 반드시 잘잘못을 가리려 하는 곧은 성품이었다. 독자분들이 몹시 궁금해하는 공의 파직도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에서 비롯된다. 공이
발포만호로 재임 당시 상부(궁정)로부터 객사(벼슬아치가 묵던 집) 뜰에 서 있는 오동나무를 가야금 악기 재목으로
사용하기 위해 베어 올리라는 명령이 하달됐으나, 공은 “국가
소유의 재산인데 베어 올릴 수 없다”며 상부의 명을 거절했다. 공과 사를
분별하고자 하는 공의 정의로움으로 인해 발포만호로 부임한지 1년 6개월
여만인 1582년 1월에 파직을 당하였다. 충무공이 파직을 당한 후 마침내 오동나무는 베어져 나갔고, 그 자리는
현재 역사의 증거로 보존되고 있다고 한다.
오늘날의 한국 정치형태를 면밀히 고찰하면, 글로벌 사회를 바라보고 나아가야 할 시야가 좁아질대로 좁아졌고, 우리
사회의 초석이 돼야 할 정의나 순리는 찾아보기 어렵게 됐으며, 오로지 나만의 출세를 위해 불의에 눈감고 타협하며, 아첨하는 자들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됐으니, 점점 우물안의 개구리가 되어 선진국으로 가는 길은
아직도 요원(遙遠)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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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의 자필 <필사즉생, 필생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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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포의 충무공 발자취
이순신 장군이 발포만호로 근무했던 발포진성에는 당시 군선을 수리하고 판옥선을
제조했던 굴강, 성곽, 해전에서 쓰는 배를 안전하게 정박시켜두었던
흥양전선소(興陽戰船所) 등이 호국의 성지로써 얼과 역사를
보존하고 있다.
또한 공의 강직한 성품과 공(功)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그 비문(碑文)은, 1955년 이은상
시조시인이 쓴 <바라보라 언덕마다 끼치신 발자취를 앞바다 우는 물결 호령소리 들리시네 발포여 영광
있으라 임 계시던 곳이라> 라는 내용은 이순신 장군의 의기(意氣)와 충정(忠貞)이 엿보이며, 임진왜란이 끝난 416년 후인 지금, 당시 충무공이 부하 전사(戰士)들에게
남긴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명언은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물론, 국민들에게 정신개혁을 외치며,
1,600만여명의 관객을 동원한 충무공을 주제로 한 영화 <명량>과 재방송되고 있는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인기와 큰 관심 또한 오늘날 권위주의와 물질주의에 사로잡힌 우리들에게 애국·충정의 진정한 뜻을 깨우쳐 주고 있는 듯 하다. 다음호에서는 충무공의 전라좌수사직과 삼도수군통제사직 당시의 이야기와 임진왜란 등에 관해서 논필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