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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문즉답 12
2020. 8. 20
인간 세상을 보면 답답한 것도 많고 되었다가 안되기도 하는데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면 너무나 신기하게 우리 생각과 전혀 다른 일이다. 날마다 우리가 새롭게 보이는 것도 이미 이루어진 것이니까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늘 새롭지만 하나님께는 항상 같다. 우리가 발견하기를 빨리 발견하기도 하고 늦게 발견하기도 하는 차이뿐이다. 그러니까 하시는 일이 너무 신기하고 놀랍다.
나도 얼마 전까지 ‘요한계시록 마지막이 이루어질까, 과연 어린양이 통치하는 세계가 가능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아마 이에 대해서 물어보면 모른다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다. 안다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런 문제다.
그런데 갑자기 어린양이라도 통치하는 세계는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음 안에서 한 자리에 몸인 사람들을 보면 어린양이라도 통치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어쩌면 통치가 필요없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고 앞으로도 이루어져서 완성될 나라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이 완전하게 쓰여진 책이라고 알게 되었다.
우리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명확하게 모든 것을 알 때 하나님의 일은 사람의 생각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것 같다.
김진광
목사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심각한 신체장애를 갖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활동적인 운동은 거의 하지 못합니다. 저도 늘 감사를 하며 살아가려고 노력하지만 가끔은 하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괴롭고 외롭습니다 이 아픈 마음은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 건가요? 좀 알려주십시요. 제가 철이 덜 든 걸까요? 말씀이 들렸으면 해서 질문 작성했습니다.
이현래 목사
오늘이 진광이 스무 번째 생일인데 어린 나이에 어려운 신체장애를 가지고 살면서 감사를 하며 살아가려고 노력한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눈물겹다.
스무 살 때 나는 산속 깊은 암자에 일 년간 있었다. 불교 때문이 아니라 몸의 수양을 위해서였다. 그때 주지 스님은 연세가 칠십쯤 되셨다. 하루는 내가 “스님, 칠십 년이라는 많은 세상을 사셨는데 오래 사셨다는 생각이 없습니까?”라고 물었더니 왜 묻느냐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이십 년을 살았고 적지 않은 세월인데 뒤돌아보니 엊그제 같습니다. 혹시 스님처럼 오래 살면 인생을 오래 살았다는 생각이 들까 해서 물어보았습니다.”라고 했더니 웃으시면서 “그야 매 일반이야.”라고 하셨다. 칠십을 먹어도 똑같다는 말이었다. 그때 느껴지기를 ‘오래 살고 못살고의 문제가 아니라 삶은 질적인 문제구나.’라고 알았다. 어린 마음에 ‘시간과 영원은 다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감사하고 사는 것이 좋다. 하지만 감사한다고 해서 꼭 좋은 것이 아니다. 진실하게 사는 것이 더 좋다. 내가 “감사합니다.” 한다고 하나님이 아시고 불평한다 해서 모르시는 것이 아니다.
욥기에 보면 별 말을 다 나온다. 욥은 “나를 왜 세상에 내놓았습니까. 차라리 낳지 않았으면 좋을 것 왜 낳게 만드셨습니까.”라며 원망하고 너무 괴로우니까 종일 기와장으로 자기 몸을 긁었다고 한다. 가려운 것처럼 괴로운 것도 없다. 옛날에 어느 대학교수 한 분이 우리 교회에 왔었다. 그는 욥의 괴로움을 친히 맛보고 있다고 했다. 아토피 때문에 긁느라고 볼 일을 못볼 정도라면서 그런 말을 했다.
그런 것을 극복하려고 사람들은 노력한다. 하지만 극복하는 것이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는 그렇게라도 해서 이겨보려고 노력하지만 그것은 이길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해도 가려운 것이 가렵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니까 이겨보려는 것 자체가 모순인 것 같다.
괴로우면 괴롭다 하는 것이 낫지 괴로운데도 불구하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한다고 하나님이 아시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해서 하나님이 모르시겠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괴로우면 ‘여기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생각은 하지만 억지로 감사해야겠다는 생각은 안해 보았다. 그런데 내가 말 안해도 하나님이 아시는 것 같다.
삶은 질적인 문제다. 시간적인 문제도 아니고 좋고 나쁜 문제도 아니고 질적인 문제다. 나에게 주어진 기간 동안에 얼마나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질적인 문제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진실한 것이라는 말이다.
지금도 하나님은 잃어버린 사람을 찾고 있는데 사람들은 ‘하나님은 이러저러한 사람을 찾고 있을 것이다.’라고 미리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이 되려고 애를 쓰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찾는 사람은 전혀 다른 사람이다. 흠이 있든 없든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표현하기 위해서 창조하신 그 사람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람을 몰랐다. 그런 사람을 본 일이 없었다. 창세 이래로 그 사람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 우리는 그 사람을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 안에서 보니까 ‘하나님은 이 사람을 찾고 계셨구나. 하나님이 찾고 있는 사람이 이 사람이구나.’라고 발견하게 되었다.
이 사람은 우리가 바랐던 그 사람이 아니다. 엊그제 누가 교역자 모임에서 “이 사람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다. 사모하고 기다리던 사람이 아니라 가장 싫어한 사람, 말도 하기 싫은 사람이다.”라고 하면서 교회에서 그 사람 말이 나올 때 너무 싫었다고 했다. 이러니저러니 말이 많은 것은 싫다는 뜻이다. “나는 저 사람 같은 사람은 싫다. 내 운명이 저렇다면 싫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셨다 해도 싫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사람이 있었어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이사야 53장은 이 사람을 묘사한 시라고 하는데 볼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고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어서 우리가 다 그를 싫어했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들었어도 몰랐다. 문둥병 환자가 보면 ‘아이고, 저런 사람인가보다.’라고 할지 몰라도 우리는 하나님이 찾는 사람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사람을 보고 뭐가 좋다고 난리인가?”라고 하는 것이다. 좋으면 다 와서 가져가지 않겠는가. 그래서 예수의 좋은 점, 바람직한 점은 다른 사람들이 다 가져가고 없다. 우리 차지는 없다. 내 차지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다 버리고 간 이 사람,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하나님 아들을 자랑하고 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었는데 하나님 아들이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래도 나는 이런 사람을, 제일 싫은 사람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이 아멘한다는 것은 기적이다. 나도 기적이지만 여러분도 기적이다.
왜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 하신 과일을 먹었을까, 얼마나 좋아서 먹었을까? 잘 몰랐는데 나는 이 사람, 제일 싫은 사람을 보고 나서 ‘이것 때문이구나.’라고 알게 되었다. 이 사람을 탈피해 보려고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마귀는 “이것을 먹으면 네가 신과 같이 된다.”고 했다. 신이 되면 죽지 않는다. 신이 되면 십자가에 못박혀서 내려올 수 없는 지경에 이르지 않는다. 그래서 신이 되려고 한 것이다. 그러니 누가 말리겠는가.
죽음 앞에 서 보니까 ‘여기서 안죽는 길만 있다면 무엇을 못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분은 그렇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이번에 순교자가 귀한 분들이라고 알게 되었다. 죽음을 내놓고 “죽여도 좋다.”고 한 것이니 얼마나 귀한가.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래서 ‘자리가 있다면 가장 귀하고 높은 자리에 순교자들이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이번에 처음 했다.
잘 생각해 보자. 그것이 우리 눈에 보기 좋은 것인가? 절대로 좋은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가 그것이다. “내 마음이 심히 민망하여 죽게 되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십시요.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다. 이것은 순교자의 죽음이 아니다. 순교는 죽을 줄 알고 자원한 것이다.
어떤 삶이 진정으로 좋은 질의 삶인가? 이것은 세상에서 찾을 수 없다. 예수 안에 있는 삶, 하나님 아들이지만 사람이니까 죽을 수밖에 없었던 그 삶, 사람이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그 삶이 진정으로 좋은 질의 삶이다.
예수님도 그렇게 되기를 원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뭔가 이보다 다른 삶을 원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결과는 그렇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셨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면 나는 무엇이 가능할까? 나는 아무것도 가능한 것이 없다. ‘이것이 내 몫이구나.’라고 할 뿐이지 “좋다.”고 할 수도 없고 가능한 것도 아니다. 나로서는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 삶을 받아들이고 보면 너무나 귀한 삶이고 진실이라고 알게 된다.
이 바깥에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이 진실이 아니다. 거짓이다. 어떻게 하면 벗어날까 하는 삶이지 진실이 아니다.
우리는 ‘진실은 이런 것이다. 저런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런 것은 다 소용없다. 진실은 이것뿐이다. ‘하나님 아들이지만 사람이기 때문에 죽었다.’ 이것만이 진실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무너지고 우주가 꺼진다 해도 이것은 사실이다.
이 사실이 반석이다. 이 반석 위에 집을 지으면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다. 누구도 건드릴 수 없다. 음부의 세력도 이기지 못한다. 그러므로 질적인 문제는 예수 안에 있는 그 삶이다. 질적인 문제를 보면 ‘그분은 영원한 삶을 살았구나.’ 하게 된다.
그러니까 진광이도 억지로 감사하려고 하지 말고 생긴대로 살면 된다. 노력하면서 괴로워하지 말자. 노력하지 않고 괴롭지 않은 것이 낫지 이런 상황에서 무엇을 노력하고 또 그것을 괴롭다고 하겠는가. 이것도 어쩌면 이미 율법이 사람 속에 들어와서 ‘이럴지라도 감사하고 살아야 되지, 이럴지라도 노력해야 되지.’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다 해서 난동부리라는 말이 아니다. 감사할 때도 있고 못할 때도 있다. 그런데 질적인 문제로 들어오면 판이 달라진다. 이럴 때 감사하고 저럴 때 불평했던 것이 바뀐다. 우리는 이것을 보면서 사는 것이다.
진광이가 지금 노력을 해서 “감사합니다. 나는 괴롭지 않습니다.”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거짓말이다. 진실이 아니다. 그러니 금방 흐트러져 버리는 것이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면 그 집은 무너질 것 아닌가.
욥기를 읽어보면 욥이 감사하다가 저주하다가 원망하기를 계속 하고 있다. 알고 보면 그것이 진실한 말이다. 그러나 결론은 어디로 돌아가는가. “내신 이도 여호와시고 거둬가신 이도 여호와시니 내가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마지막에는 그렇게 돌아간다. 그러니까 억지로 하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억지로 살지 말자. 있는 대로, 본대로 살자. 무엇을 볼 것인가? 하나님 아들이지만 십자가에 못박혀 내려오지 못한 이 사람을 보고 살자. 이 사람이 진실이다.
그 결과는 어찌될지 나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는 삶은 그런 삶이다. 내가 미리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다.’라고 정해놓고 사는 삶이 아니다. 하나님 아들이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이 사람을 보고 사는 그 사람을 찾으신다.
잘 들어야 한다. 나는 억지로 살지 못한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나는 금식기도에 참여하지 못해서 밀려났다. 나는 죽어도 못하니 밀려나도 할 수 없지 어쩌겠는가. 나도 한번 해 보고 싶었지만 속이 아파서 하루도 금식을 못한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하나님께서 “야, 그것도 못해. 그러면 떨어져.”라고 하시면 할 수 없지 어쩌겠는가.
진광아, 다시 말하는데 삶은 질적인 문제다. 질이라 해서 꼭 감사만 해야 하고 불평을 하면 안되는 것이 아니다. 감사를 해도 질이 좋은 감사가 있고 불평을 해도 질이 좋은 불평이 있다.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신다. 그러니까 문제는 이 사람을 아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 하지 말고 하나님 아들이지만 사람이니까 죽은 사람, 이 진실을 보고 살기를 바란다.
나도 지금 그렇게 살고 있다. 나는 물론 나이가 많으니까 죽을 날이 가깝지만 젊어도 마찬가지다. 젊어도 똑같다. 나이가 들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나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보고 사는 것이 아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더욱 더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사실대로, 내게 있는 대로 살아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알아서 해 주시지 않겠는가. 필요하면 해 주시지 않겠는가.
진광이에게 좋은 선물을 주고 싶다. 가장 좋은 선물은 그리스도다. 누구에게도 다 이 선물을 주고 싶다. 어제도 어떤 분이 왔다 갔다. 자기 이야기를 할 것이 너무 많은 사람이다. 그런데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있을 시간이 없어서 내 말을 했다. 나는 이 말이 아니면 할 말이 없다.
진실한 사람은 예수다. 제일 질 높은 삶을 산 사람도 예수고 완전한 삶을 산 사람도 예수다. 그런데 그 모양은 어떤가. 하나님 아들인데 못내려오고 죽은 모양이다.
답이 되었으면 좋겠다.
김해식
바울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고 했다. 그러려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동일화 되어야 하고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야 하고,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십자가에 못박힌 생활을 해야 한다. 과연 그렇게 해야만 그분의 신성한 생명이 표현 될 수 있는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예수, 한 사람 안에서 나를 발견한다는 말과 우리도 그리스도와 같이 십자가에 못박힌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 같은 말로 들리지 않는데 어떤 차이가 있는지?
이현래 목사
바울은 무엇인가를 맛보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했지 맛도 안보고 이런 말을 했겠는가. 맛을 보았으니 더 맛보고 싶다는 말이다.
고기는 먹어 본 놈이 먹는다는 말이 있다. 고기를 안먹어본 사람은 고기 생각이 안난다. 한번이라도 먹어본 사람이 고기 생각이 나지 안먹어 본 사람은 그런 생각을 할 수 없다. 먹어 본 것이라야 맛있는지 아닌지 알지 안먹어 보고 어떻게 알겠는가. 바울은 아마 부활의 권능과 능력을 맛본 것 같다. 그러니 더 알고 싶다고 한 것이다. 무엇이든지 그러하다. 좋은 것을 맛보면 더 하고 싶고 더 알고 싶고 더 갖고 싶다.
그렇지만 공연히 바울의 말에 휘말려 들어가면 안된다. 미국에 갔을 때 망고를 먹어 보고 와서 아무리 설명해도 형제들이 몰랐다. 나는 먹어 보았기 때문에 ‘그 향기, 그 맛이 달콤하던데…….’ 하고 어디 먹을 데가 없는가 해서 한 말인데 안먹어 본 사람은 내가 아무리 말해도 그런 갈망이 안생긴다. 바울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안된다.
복음은 하나님이 준비한 것이지 우리가 노력해서 만든 것이 아니다. 그래서 복음이라고 한다. 전도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미리 준비해 주신 것을 우리가 다시 가서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도의 미련한 것이라 했다. 전도는 미련한 것이다. 물이 흘러가는 것을 보고 사람들에게 가서 “물은 흘러갑니다. 이렇게 흘러갑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미련한 짓이 아닌가.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우리가 모르고 있으니까 모르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있는데 모르니까 알게 하는 것이지 새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어떻게 해 보라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해 볼 것은 다 해보지 않았는가. 다 해보고 하는 말이지 안해 본 사람이 하겠는가. 차이는 있지만 사람이 다 한번씩 해본 것이다. 좀더 적극적이고 열심이고 의지력이 강한 사람은 더 많이 해 보고 나 같은 사람은 조금만 해보고 안되겠다고 아는 것이지 전혀 해보지 않고 탁상공론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표현된 복음이 있으면 해봐야 되지 않겠는가. 먹어봐야 되지 않겠는가. 있다는데 왜 여러 말을 하고 있겠는가. 돈 내라는 것도 아니고 내가 먹어보았으니 먹어 보라는데 무엇이 염려가 되는가? 앞엣 사람이 먹어보고 좋다고 하면 나도 먹을 수 있지 무엇이 염려가 되는가. 유독 나만 잘나고 싶고 잘살고 싶어서, 속지 않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앞엣 사람이 속았는데 나도 속으면 어떤가. 내가 잘 아는 사람이 속았는데 나도 속으면 어떤가. 우리가 하루 이틀 안 것이 아니다. 여러분은 나를 잘 안다. 먼저 먹어본 사람이 좋다고 하면 먹어봐야 알지 안먹어보고 어떻게 알겠는가. 모든 일이 그러하다.
복음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이다. 심지어는 우리 죽음까지도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것이다. 죽음을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셨다고 누가 믿겠는가. ‘어쩌다 하나님이 실수했나 보다.’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제일 싫어하는 것인데 죽음을 왜 준비해 놓았겠는가. 더구나 하나님 아들도 죽는다면 안죽을 사람이 있겠는가. 이런 것을 왜 준비해 놓았을까? 우리는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보니까 ‘야, 이 죽음이라는 것도 이래서 필요하구나.’라고 알게 된 것이다. 우리는 왜 죽음이 있어야 하는지 모른다. 그런데 예수의 죽음을 보고 나니까 ‘죽음이 이래서 필요하구나.’라고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의 죽음을 자연스럽게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지 그 전에는 아무리 해도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 천당 간다면 모르지만 그것도 없어져 버리면 받아들일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려면 부활하셨다는 분 안에 일단 있어봐야 한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니까 우리가 부활은 몰라도 그의 죽으심은 알게 되지 않겠는가. 죽음은 우리가 싫어서 갖지 않으려는 것에 불과하지 모르는 것이 아니다. 죽음을 알기는 하지만 너무나 싫다. 그런 것이지 없어서 못보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부활했다는 분이 있다면 그분을 알아봐야 되지 부활이라는 것이 따로 있겠는가. 죽은 그 사람이 다시 산 것이 부활이다. 그러니까 예수같이 죽지 않고는 아무리 말해도 안되는 것이다. 그 사람이 부활한 것인데 그 사람이 아니고 어떻게 알겠는가.
올챙이가 처음에는 꼬리를 치며 다니다가 뒤로 앞다리가 나오고 뒷다리가 나오면서 꼬리가 없어진다. 개구리가 뛰어다니는 것을 체험하려면 개구리가 어떻게 바뀌는지 알아야 한다. 그래서 예수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십자가에 못박힌 생활을 안할 수 있으면 안하는 것이 좋다. 안할 수 있으면 안해도 된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 인생이다. 어쩔 수 없는 그것이 우리 인생이다. 내려오려고 해도 못내려오는 그것이 인생이다. 내가 하고 싶다고 하고 안하고 싶다고 안할 수 있으면 문제가 없다. 안하고 싶으면 안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피할 수 없는 길이다.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십자가에 못박힌 생활을 일부러 할 수는 없다. 진광이가 질문한 것처럼 일부러 감사할 수는 없다. 나도 일부러는 못한다. 그래서 옛날에 나는 그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나는 도저히 십자가를 스스로 질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니 될 수 있는 대로 안지게 해 주십시요. 그러나 할 수 없이 져야 할 형편이 된다면 억지로 끌고 가서 지우시고 거기서 죽게 된다고 해도 나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나를 그리 끌고 가시지 않았다. 나를 아시니 그렇게 하셨을 것이다. 내가 “아닙니다. 나는 죽기로 하겠습니다.”라고 했으면 순교자의 길을 갔겠지만 나는 순교자가 될 수 없다. 금식기도도 못하는데 순교자가 되겠는가. 하나님이 나를 알아서 나에게 합당할 길로 인도하셨다.
염려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을 다 준비해 놓으셨다. 그 길로 인도하면 그 길에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해 놓았고 저 길로 인도하면 저 길에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해 놓으셨다. 우리가 염려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염려할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우리 생각으로 그러는 것뿐이지 무엇을 준비해야 되는지도 모른다. 등산을 가려면 어떤 장비가 필요한지 알겠지만 생전 안가본 데를 가는데 무엇을 준비하겠는가. 산으로 갈지, 바다로 갈지 모르는데 무엇을 준비하겠는가.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
성경에는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다섯 처녀가 떨어져 나갔다고 하지만 이것은 경고성 비유다. 그렇게 된다면 인류의 몇분의 일이나 구원을 받겠는가. 성경에 써 있다고 자기도 그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는가. 누가 멸망의 길을 택하라고 했는가.
아무도 멸망받지 않을 길을 내놓으셨으니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진실이면 그냥 따르면 된다. 따라가면 그에 따른 축복이 있고 평안이 있고 안식이 있다. 그것까지 염려할 필요가 없다. 복음은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것이다. 아멘.
송영소
기독교의 핵심이 부활인데 목사님은 부활을 모른다고 하셨다. 전 세계 기독교가 이천 년 동안 부활절을 기념해 왔는데 기독교의 부활 세계와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부활 세계는 어떻게 다른지?
이현래 목사
송영소 형제는 늘 어려운 말을 하는데 그것은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이 복음이 안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가지 방면에서 질문을 하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 아들이었다. 자기도 그렇게 말했고 남도 그렇게 말했다. 그는 하나님 아들이었다. 그래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내려와 보라.”고 했던 것이다. 멀쩡한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하겠는가. 내가 십자가에 달리면 그런 말을 하겠는가. 여러분이 나를 좋아하지만 내가 십자가에 달리면 “아이고, 내려와 보세요.”라고 하겠는가. 그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예수니까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이 다 하나님 아들이라고 믿고 있는데 내려왔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러나 못내려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가 버렸다. “못내려온 하나님 아들은 소용없다.” 하고 가 버린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아들이라는 개념이 서로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신 것과 사람들이 아는 하나님 아들은 전혀 개념이 달랐다.
그런데 이 사람은 내려오지 못하고 끝내 죽었다. 죽은 것을 보니까 그냥 멀쩡한 사람이다. 어제까지는 하나님 아들이었는데 오늘 보니까 그냥 사람이다.
이 사이에 진실하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예수님이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한 것도 맞고, 내려와 보라고 한 것도 맞고, 못내려온 것도 맞다. 틀린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진실이 밝혀진 것은 그냥 사람이라는 것이다. 다 맞는데 밝혀진 것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밖에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이것 외에 다른 것은 모른다. 우리 생각은 다 틀렸다. 그대로 맞지 않았으니 다 틀렸던 것이다. 그리고 딱 맞는 것은 ‘이 사람은 사람이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아무도 그를 사람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진실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사람을 찾으셨다는 것이다. 이렇다 저렇다 하는 사람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 원래 만드신 그 사람을 찾으신 것이다.
창세 이래로 하나님은 사람을 찾고 있다. 자기가 창조한 사람을 찾고 있다. 이 사람이 없으면 하나님은 아무것도 못한다. 그래서 이 사람을 찾고 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찾고 있다. 지금도 똑같다.
그런데 아담은 “내가 두려워서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아담은 얼굴이 없는 것이다. 사람은 원래의 얼굴이 없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봐도 그 얼굴을 알 수 없다. 모르니까, 본 일이 없으니까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대로 ‘하나님 아들은 이렇게 생겼을 것이다.’ 하거나 ‘저렇게 생겼을 것이다.’라고 상상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님도 나왔고 석가모니도 나왔다. 그런데 실상은 그 사람이 사람이다. 그냥 사람, 그것도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다. 너무나 비참하고 우리가 싫어했던 그 사람이다.
우리가 싫어했던 사람이 바로 저 사람이다. 완전히 뒤집어진 것이다. 내가 뒤집어진 것이 아니라 세상이 뒤집어진 것이다. 내가 그렇게도 싫어했던 사람, 인류가 다 싫어했던 사람이다. 아담은 이 사람이 싫어서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그 사람이 십자가에서 못내려오고 남아 있는 것이다. 우리가 싫어한 그 사람이다. 그런데 왜 이 사람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할까? 이것은 우리가 참여해 봐야 안다. 가만히 앉아서 이 사람을 어떻게 알겠는가. 멀리서 보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 사람 같이 되어봐야 알지 안그러면 어떻게 알겠는가. 개가 아닌데 개를 알겠는가. 개가 아니면 개를 모른다.
송영소 형제는 다른 것은 다 내려놓고 확실한 것을 잡아야 한다. 누가 뭐라고 하든, 사람들이 어떻게 하고 있든 다 놓아두고 확실한 것을 잡아야 한다. 부활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물어 보면 부활을 믿는다고 해도 모르고 믿는다. 다 분명하지 않다. 그러니까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을 잡아야 한다. 이 사람이 좋든지 싫든지 하나님이 내놓으신 사람이니까 확실하기 이 사람을 잡으라는 말이다.
이 사람을 떠나서는 진실을 찾을 수 없다. 이 사람을 떠나면 우리는 어떻게든 잘 되어 보려고 가짜를 찾게 된다. 이 사람만이 진실이니까 이 사람을 잡아야 한다.
이것은 노력할 필요도 없다. 보면 있는 것이니까 뛰어갈 필요도 없고 달려갈 필요도 없고 준비할 필요도 없다. 그냥 있으니까 없는 것을 찾지 말고 있는 사람, 모르는 것을 알려고 하지 말고 있는 사람을 보면 된다.
바울이 뭐라고 했고 성경에 뭐라고 쓰여있든 간에 애매한 것은 그냥 놔두고 확실히 볼 수 있는 것을 봐야 한다. 너도 볼 수 있고 나도 볼 수 있는 것을 눈여겨봐야 한다. 장대에 달린 뱀을 보라고 달아놓은 것 아닌가. 그것을 봐야 뭐가 나오지 안보고 뭐가 나오겠는가. 단순한 것이니까 눈에 보이는 것만 보면 되는데 다른 것만 보면 어찌 되겠는가. 다른 것만 보고서 알겠는가.
학교에서 제일 답답한 학생이 선생님 말을 안듣고 다른 것만 보는 학생이다. 그런 학생은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말을 해도 안듣고 자기대로 하고 있으면 선생님은 답답하다. 선생은 자기가 아는 것을 가르쳐 주려고 하는데 학생이 정신이 다른 데 가 있으면 가르칠 수 없다. 안보는 사람에게 보여 줄 수 있겠는가.
그래서 확실하게 보도록 우리 앞에 전시되어 있는 것이다. 보지 않을 수 없도록 전시되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니까, 나 자신이니까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가 나 자신이다. 그러니까 이 사람과 거래해야 한다.
나도 오랫동안 예수와 거래했는데 예수를 몰랐다. 이렇게 명백하게 예수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만큼 애매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주 쉽게 오셨는데 우리가 너무 어렵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면 “예, 내가 신과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라고 해야 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나무 뒤에 숨어서 “나는 두려워 숨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왜 두려워서 숨었느냐?” 하시면 “당신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가 줘서 먹었습니다.”라고 한다. 남이 먹으라고 한다고 먹겠는가. 자기가 보니까 먹음직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서 먹었지 남이 먹으라고 해서 먹었겠는가.
그래서 “너는 종신토록 명함을 만드느라고 고생을 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래도 마지막에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라고 하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흙으로 돌아가면 가능성이 있다. 벽돌이 되어 버리면 아예 가능성이 없다.
모르는 것을 알려고 하지 말고 확실히 아는 것만 말하기 바란다. 나도 모르는 것은 모른다.
양승숙
부활이나 성령 같이 안보이는 것을 말하면 어렵다. 이천 년 전의 예수님도 성경에 있어서 알뿐이지 사실은 보이지 않는다. 목사님은 늘 아는 것만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시는 목사님이 진실해서 좋아하는데 지금 말씀하시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예수는 진실의 완성판인 것 같다.
나는 다른 예수는 잘 모르는데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을 지었다면 이 사람이라고 보였다. 그래서 속으로 ‘그리스도가 있다면 당신이고 하나님 아들이 있다면 당신이겠구나.’라고 고백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었으면 이렇게 영광스럽게 되라고 지으시지 않았겠는가. 살아있는 사람에게 이런 고백을 하고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인생으로서 가장 큰 축복이다.
문제는 이 말이 위험한 발언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면 이단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제 왜 이 말을 하는지 알겠다. 희한한 교주들이 나와서 사람에 대한 불신을 조장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진실은 거부할 수 없다. 내 앞에 있는 진실한 사람, 하나님을 표현하는 사람을 보고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입니다.”라고 하는데 왜 문제가 되는가?
이현래 목사
사람들의 말이 정형화 되어서 자기들이 생각대로 모양이 만들어져 버렸다. 그래서 그 모양대로 안된 것은 다 틀린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언어의 한계이기도 하고 장벽이기도 하다. 그 사람의 마음을 알아야 되는데 모르니까 표면적인 언어만 갖고 이러니저러니 하는 것이다.
무엇을 좋아하고 있는지, 무엇이 그렇게 필요한 것인지를 알아야 되지 그것을 모르고 언어만 갖고 하면 걸리지 않을 말이 없다. 바울의 말도 그러하다.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하였다. 말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다. 자기 마음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어차피 안되는데 사람들이 그렇게 언어로 고정화시켰으니까 이런 말도 나오고 저런 말도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라를 것을 알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알고 보면 예수는 남이 아니다. 나다. 우리 자신이다. 그러니까 내가 계속 자랑하는 것이다. 미국에 있는 어떤 사람을 계속 자랑하겠는가. 나는 내가 아는 사람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누군가. 나다. 너고 나다. 나나 너나 다 한 사람이다. 모든 사람이 한 사람이다. 나는 이 한 사람이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고 모든 사람이 다 ‘나는 너고 너는 나구나.’라고 알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 안에 가면 그렇게 된다.
바깥에서는 다르지만 안에 가 보면 너도 나도 다 똑같다. 그래서 문제가 없어지는 것이다. 너와 내가 구별이 안되고 다 한 사람이다.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다른 말로 해도 되는데 그것을 굳이 꼬집어서 말하려는 것이 문제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런 경우가 많았다. 그분 스스로 그렇다고 하셨지만 그렇지 않고 소문난 것도 많았다. 나도 될 수 있으면 그런 말을 안듣고 싶다. 듣기 싫다는데 뭐하러 일부러 하겠는가. 어쩔 수 없을 때나 하는 것이지 일부러 할 필요는 없다.
알고 보면 우리가 다 서로 안에 다 포함되는 것이다. 내가 예수를 말해도 내가 그 안에 있고 나를 말해도 그가 내 안에 있다. 이렇게 다 포함되어 있다. 다른 사람이 아니다. 남이 아니다.
그 날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할 수 없다. 어쩔 수 없다. 말로 도저히 안되니까 그렇게 하는 것인데 그것을 꼬집고 있다는 것 자체가 자기와 아무 상관이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생각하는 것처럼 하지만 자기는 예수와 아무 상관없다.
우리가 그 안으로 모두 포함될 때 다 하나다.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로 중매하려 함이라 하였다. 바깥에서는 중매장이와 처녀가 구별되지만 그 안에 가면 중매장이도 없다. 나는 그런 세계를 기다리고 있다. 모두가 하나인 세계, 만유가 그 안에 포함된 세계, 어린양이라도 통치할 수 있는 세계, 이 세계가 우리의 최종적인 목표다.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옛날에 문경에서 집회를 할 때 칠십 노인이 오셨다. 평생 목회를 하셨고 교계에서 덕망이 높은 분인데 충주 형제들을 보고 집회에 오셨던 것이다. 그런데 그 집회에서 어떤 사람이 “목사님은 그리스도입니다.”라고 하는 바람에 놀라서 가 버리셨다. 그때 속으로 ‘당신이 나를 알았더라면 좋을뻔했습니다. 내가 올라갈 수도 없고 내려갈 수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모르는 것이 비극입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 말을 한다 해서 그분이 듣겠는가. 결국 그분은 끝까지 참여를 못하고 가셨다. 걸릴 사람은 걸려야지 할 수 없다. 내가 다 할 수 있겠는가. 뒤로 가 보면 알 것 아니겠는가.
나를 보고 재단법인을 만들어서 사유화하려고 한다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그것을 내 아들에게 넘겨준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을 보면 알 텐데 풍설만 그렇게 나돌고 있는 것이다. 결국 다 알게 되지 않겠는가. 그런 말을 해 놓고 틀리면 어쩌겠는가. 딱한 일이다.
김경수
1. 목사님은 예전부터 늘 예수의 십자가만을 말씀해오셨습니다. 그 때의 십자가 말씀과 지금의 십자가에 내려오지 못한 말씀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2. 구속의 복음은 가난한 자에게 먼저 들린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안에 있는 나를 발견하는 것도 과정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나요?
이현래 목사
여러 사람의 질문인 것 같은데 나는 처음부터 이 말을 해 왔다. 아브라함은 백살에 아들을 낳았다. 그 전에는 믿음도 있고 신용도 있고, 의롭다 함을 받기도 한 사람인데 결국 낳은 것은 이스마엘이었다. 그래서 십삼 년 동안 멈춰져 있다가 구십구 세에 다시 하나님의 사자가 찾아와서 내년 이맘 때에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때 아브라함은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했고 사라는 장막 뒤에서 웃었다. 믿음도 떨어져 버리고 아무것도 없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삭을 받았다. 그것은 죽고 얻은 것이다. 자기는 죽고 이삭을 얻은 것이다.
이삭은 눈이 어두워서 속아서 야곱을 축복했다. 이것도 같은 것이다. 내 마음대로 못한 것이다.
전부 판이 이러하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자기 마음대로 못하는 사람들, 제한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 판을 맨 먼저 열어 놓았는데 우리는 ‘이것이 십자가의 길이구나.’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다음 판이 필요하고 또 다음 판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한 번에 다 알지 못하고 차츰차츰 알게 된다. 한 판을 지나면 또 다른 것이 알아지고 또 한 판을 지나면 또 다른 것이 알아진다. 우리가 아는 것이 다 그러하다. 아이가 처음 태어나면 색을 구별하지 못하고 빨간색만 보인다고 한다. 그런데 차츰 커가면서 여러가지 색이 보인다. 우리가 처음부터 다 아는 것이 아니고 차츰 분명해져가는 것이다.
내 인생에서 이보다 더 분명하게 예수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래서 유일한 복음, 마지막 복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유일한 복음이라고 할 수 있느냐, 마지막 복음이라고 할 수 있느냐?”라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나에게는 그러하다.
더 유일한 것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있으면 이 복음은 뒤로 밀려나지 않겠는가. 더 유일한 복음이 있으면 더 좋지 않겠는가. 더 유일한 것이 있으면 내놓으면 되는데 내놓지도 못하면서 “그럴 수가 있느냐? 왜 마지막 복음이라고 하느냐?”라고 하면 되겠는가. 내놓지도 못하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방해만 하려는 것이 아닌가. 있으면 내놓으면 된다. 내놓으면 저절로 심판이 되고 또 한발짝 앞으로 나갈 것 아닌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있었던 계시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출애굽할 때의 계시가 다르다. 판이 다르다. 판은 늘 달라진다. 그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는 끝이 없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항상 그렇게 말하고 있으면 되겠는가.
오늘 나에게는 이것이 끝이다. 끝까지 봐야 되지 남겨놓고 보겠는가. 쌀을 남겨놓고 다음에 먹으려고 보리밥만 먹고 있겠는가. 쌀이 있으면 먹고 쌀이 떨어지면 보리밥을 먹으면 된다. 쌀보다 더 좋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먹으면 된다. 어렵게 생각할 일이 아닌데 너무 어렵게 만들어서 방해만 하고 있는 것이다. 안될 것은 아예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좋다.
전에 하던 말씀과 십자가에 내려오지 못한 말씀의 차이는 더욱 분명해졌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백살에 아들을 낳았다는 것과 하나님 아들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은 정도가 다르다. 아브라함 때는 사람들이 모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모른다 할 사람이 없게 된 것이다.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복음이 전파되면 맨 먼저 보는 사람도 있고 천천히 보는 사람도 있다. 왜 그런가? 급한 사람이 먼저 보는 것이 당연하다. 예수님 당시에도 급한 사람들이 왔지 여유있는 사람은 안왔다. 당연히 그렇지 않겠는가. 우리 상식에 없는 것이니까 급한 사람이 먼저 오는 것이다. 먹을 것이 없는 사람은 빵이든 밀가루든 먹는다.
그런데 좋은 쌀이 많이 있는 사람은 ‘이것을 먹어도 되는가 안되는가?’ 하게 된다. 그래서 복음은 가난한 자에게 먼저 전파된다는 것이 사실이다. 배부른 사람은 빨리 받아들이지 않고 남들이 다 먹고 난 다음에 천천히 받아들인다. 죽기 전에 받아들이면 다행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위대한 사람에게 알려진 것이 아니다. 나도 급하니까 이렇게 된 것이지 여유가 충분히 있었으면 이렇게 안되었을 것이다. 여유가 없고 죽음 앞에 서 있었으니 된 것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천천히 하려고 했을 것이다. 천천히 올 사람은 천천히 오면 되고 마음 놓고 있다가 올 사람은 마음놓고 있다가 와도 된다. 억지로 못하니까 마음대로 하면 된다.
공부도 처음부터 다 아는 것이 아니다. 하나 둘 알면 셋 알고 넷을 아는 것이지 처음부터 다 아는 것이 아니다. 에디슨이 전기를 발명했지만 전자를 알았겠는가. 그렇다고 전자를 발견한 사람이 더 위대하겠는가. 그렇지 않다. 아무리 전자를 발견했어도 에디슨이 없으면 전자를 발견할 수 없다. 과학은 그렇게 하니까 자꾸 자꾸 발전하는데 종교는 이상하게 막혀서 안된다. 이단이니 삼단이니 하고 있고 맞니 틀리니 하고 있으면 안된다.
확실한 경험을 위해서 우리가 모든 것을 알게 되기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