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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혹은 광기의 아름다움
-도예가 고현 조기정 論
강 경 호
1.
내가 고현 조기정(古現 曺基正)을 처음 만난 것은 미술대학 다닐 때인 1970년대 중반쯤일 것이다. 20대 초반에 그의 작업장인 월산동 어디께로 기억된다. 그때 그의 문하생들인지 누군지는 모르지만 젊은 사람들 몇몇이서 상감을 위해 도자기표면에 그림을 새기고 있었다. 그 후 지금은 사라진 구 광주관광호텔 앞을 지날 때마다 1층에 마련된 그의 전시장 진열장 안에 놓여진 청자 몇 점을 보곤 했던 내가 그를 떠올릴 수 있는 파편적인 기억들이다. 그 파편화된 기억 속에는 그가 고려청자를 재현했다는 등 도예계의 명인이란 인식이 내 의식의 한 켠에 자리잡고 있다.
그를 만나는 일은 즐거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30여년 아득한 시간의 벽을 뚫고 광주시 월산동이 아닌 송정리 부근 어디께로, 광산구 연산동 ‘고현도요’를 찾아 나섰다. 7,8여 년 전부터 건강이 안 좋아 잠시 쉬고 있다는 풍문을 들었는지라 그의 건강을 염려하며 그에게 가는 길은 30여년 시간의 간극을 뚫고 가기에는 간단치 않았다.
이래저래 겨우 찾은 그의 집 앞에서 나를 맞는 그의 신색(身色)은 비교적 건강하였으나 어느새 백발의 노인이 되어 있었다. 내 기억의 창고는 까마득한 그의 젊은날의 인상을 지우고 이제 보다 구체화된 그의 이미지를 입력시키기 시작하였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전에 그가 보여준 그에 관한 취재 기사들을 보았다. 막상 그에 대해 무얼 쓸 것인가를 생각하다가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유명세만큼 그는 많은 논객들의 취재대상이 되어 그의 연구실적과 삶에 대해 충분히 조명받았기 때문에 과연 내가 무엇을 쓸 것인가, 그것이 걱정되었다. 이미 남들이 기사화시킨 것들을 앵무새처럼 복사한다는 것도 식상하고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 글은 지난한 그의 삶을 관통하는 정신이 무엇인지를 살피고 오늘의 우리에게 남긴 그의 성과에 대해 진실로 바치는 따스한 헌사가 될 것이다.
2.
그의 이력을 보면 그는 1937년 6월 22일 광주에서 태어나 전남대학교 법대를 졸업하였다. 당시나 지금이나 선망하는 직업 중의 하나가 법대를 나와 고시를 패스하여 검・판사나 변호사를 하는 일이다. 그의 집안에서도 그에 대한 그런 기대를 가졌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친구들과 함께 <자원조사연구회>라는 것을 발족시켜 거기의 책임자가 되었다. 부족한 지하자원을 어떻게 개발하여 활용할 수 있겠느냐 하는 생각의 결과이다. 당시는 4・19혁명이 막 지나간 어수선한 시대로 나라의 살림살이는 물론 일반 국민들의 삶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그런 시대적 환경이었다. 어느 논객의 말대로 우국지사 같은 청년의 생각이었다. 지천에 널려있는 흙이건, 나무건 그대로 내버려 두면 아무 짝에도 쓸 데가 없지만 연구하면 훌륭한 자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청년 조기정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바로 그런 젊은이들의 힘이 모여 우리나라 산업을 발전시키는 에너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잠깐 살펴본 것처럼 학교를 졸업하고 세상에 첫발을 내딛은 조기정 선생은 일반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는 사뭇 동떨어진 의식을 가진 청년이었다. 출세(出世)를 하였으나 출세를 향한 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의 길은 식빵 한두 개와 담요 한 장을 넣은 배낭을 짊어진 채 내딛는 무등산, 지리산, 월출산, 내장산 또는 노령산맥의 험난한 길이었다. 이것으로써 그의 세상에로의 첫걸음은 당시로서는 참으로 무모하기 짝이 없는 미친 짓거리였다. 그것을 객기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집념어린 광기(狂氣)라고 해야 하나? 그러나 그의 열정은 계산되지 않은 순수한 도전이었기에 아름답다 하겠다.
객기거나 광기거나 그의 열정은 그의 호기심과 더불어 조금 이상하다 싶은 흙이면 파보고, 돌멩이는 깨보고 싸서 담았다. 그러다가 사금파리들이 수북하게 깔린 옛 가마터를 발견하였다. 먹고 살기도 바쁜 그 시절엔 어느 누구도 밥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내버려진 가마터에 대해 관심을 갖은 사람이 없었다. 청년 조기정은 무등산 중턱이거나 담양・장흥・강진은 물론 전라북도 부안에서 버려진 가마터를 보면서 한반도 남단에 가마터가 많은 것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그가 평생 도공의 길을 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분명한 하나의 길을 보았다. 오래전에 사라진 옛 가마의 주인들이 걸었던 길을 가고자 하였다.
600여 년 전 이 땅에서 구워내던 고려의 하늘, 그러나 지금은 깨어진 고려의 하늘과 사납지 않으면서도 완만하게 산등성이 위로 흐르는 고려의 아름다운 선들을 재현하고자 하였다. 처음엔 끊어진 전통을 잇는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출발하였지만 우리의 핏속에 흐르는 쑥과 마늘 같은 어떤 정신을 다시금 복원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생각을 그의 의식의 밑바닥에서 자리하기 시작하였다.
목표가 정해진 이후 그의 생각의 중심에는 온통 청자 재현을 위한 연구로 가득했다.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는 순간은 물론 꿈속에서 조차 고려의 청자파편들이 나뒹굴 정도였다. 산속을 뒤지다가 이상한 색깔의 바위가 나오면 그 맥이 어디로 가는지를 확인하고 그것을 채취해 배낭에 넣었다. 그렇게 수집한 흙과 돌을 선배 요업자들에게 묻고 책을 뒤적였다. 뿐만 아니라 가마에 넣고 실험을 하였다. 그 결과 돌이나 흙에 대한 개요를 파악하게 되고 고려 청자에 대해 나름대로의 식견이 생기게 되었다. 더불어 도자기에 쓰는 흙과 돌가루의 성질들도 완전히 터득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각기 다른 흙을 배합하기도 하고, 돌가루들도 서로 배합하여 가마에 넣어 보기도 한다. 지칠줄 모르는 그의 열정은 어느새 흙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하기에 이른다. 눈으로 보며, 손으로 만지면서 흙을 느끼게 된 것이다. 마치 농부가 따스한 눈길로 흙을 바라보듯이 그는 흙이 숨쉬는 것은 물론 흙의 성미까지 느낄 수 있게 된다. 한마디로 흙에 미쳐버린 것이다.
가이아(Gaia)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흙)의 여신이다. 맨 처음 하늘과 대지가 열리고 햇빛과 바람, 그리고 물과 식물이 생겨난 것처럼 흙, 즉 가이아는 세상 살아있는 것들의 어머니이다. 끊임없이 살아있는 것들이나 죽어있는 것들에게 마치 어머니가 젖먹이에게 젖을 물리듯 흙은 생명의 원천이 되고 있다. 다시 말해 어떠한 생명도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는 진리를 거역하지 못한다. 이처럼 대지(흙)의 여신 가이아와 조기정과의 만남은 진실로 아득한 그리움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조기정은 흙을 통해 생명이 잉태되듯이 흙을 하나의 목숨으로 생성하고자 하였다. 그것에 이르는 길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600여 년 전에 깨어진 생명들을 부활시키는 열쇠는 당연히 유약이었다. 유약을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맑고 투명하고 때로 순박한 고려인들의 마음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 그는 유약을 개발하고자 온전한 정신이 아니었다. 어떤 흙과 어떤 돌가루가 어떤 비율로 만나면 어떤 색깔이 나오는지를 알기 위해 무수히 실험을 했다. 그 결과 그 비밀을 손금 들여다보듯 훤히 알게 되는데, 규석이나 석회석은 가마 속에서 1천7백도쯤 되어야 겨우 녹으려고 하고, 그것에다가 조개껍질 가루를 조금 섞어주면 금방 녹아버림을 알아내게 되었다. 또한 보통 도자기를 구워내는 1천2백50도에서도 녹고, 그보다 1백도쯤 부족한 온도에서도 녹는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녹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온도에서 구우면 어떤 색깔이 나오느냐였다. 그것들을 알아내는 일은 오직 숱한 연구와 실험 뿐이었다.
그 무렵 사람들은 그를 일러 ‘청자에 미친 사람’이라고 말을 했다. 자신도 그렇게 생각을 하였다. 미치지 않고는 무엇이든지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숱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때로는 절망을 하며 방황하기도 하였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옛 조상들의 도요지를 더듬기 시작하였다. 청자 사금파리를 깨뜨려보기도 하고, 가마 근처의 흙들을 파다가 버무려서 구워보기도 하였다. 옛 도공들의 생각과 숨결을 들여다보기 위한 다양한 시도였다. 옛 사람들의 생각과 숨결을 느끼지 않고서는 청자 재현은 물론 그와 비슷한 것 근처도 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노력의 첫 번째 결실로 그는 1963년에 옛 도공들이 썼던 청자 유약을 찾아내기에 이른다. 어느 도요지에서 신라토기와 고려청자가 한꺼번에 출토된 것이 그 실마리를 푸는 단서를 제공하기에 이른 것이다. 즉 신라토기와 고려청자가 동시에 출토되었다는 것은 신라토기에서 고려청자로 발전했다는 증거가 되는 일이다. ‘토기에서 어떻게 청자로 발전하였을까?’ 이 화두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다보니 옛 도공들의 시행착오적인 제작과정도 알게 된다. 그 발전과정을 조사 연구 실험을 하다가 기막힌 결과를 얻어 내었던 것이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 된다.
도요지에서 청자 유약의 원료로 짐작이 가는 것을 주워 그걸 갈아가지고 초벌구이를 한 파편에 입혔다. 그리고 그것을 가마에 넣었는데 나중에 보니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다음날 새벽 무렵 다시 그 시커먼 것을 바라보는데 웬걸 간밤에는 시커멓게 보이던 것이 푸른 기운을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파르스름한 청자빛깔이었던 것이다.
그후 그는 우리의 조상들이 청자를 만들어낸 과정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옛 조상들이 토기에다 조개껍질을 받치고 구워내었는데, 그 조개껍질은 고막껍질이다. 그런데 그 토기를 쭈그러지고 오그라질 정도의 고온으로 굽자 포개구이를 하면서 토기가 서로 붙지 않도록 사이사이에 끼워 엎은 그 고막껍질이 녹아버렸다. 녹자 유약이 되어버린 것이다. 선조들의 시행착오가 고려청자의 유약을 개발해 낸 셈이다. 이처럼 우연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러나 조기정이 고려청자의 유약을 찾아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조개껍질 속에서 나타나는 비색(秘色)을 보며 바닷가나 강가에 패총이 많은 것과 이와 더불어 강진 등 유명한 도요지가 바닷가와 강가에 있다는 사실에 대해 그냥 지나치지 않고 연구한 그의 집념의 결과이다.
이렇듯 우여곡절의 시행착오는 마침내 조개껍질 가루를 발라 이렇게 또는 저렇게 구워본 결과 고려청자의 빛깔을 되찾았다는 평가를 받기에 이른다. 그때 국립박물관의 최순우 선생이 “앞으로 십년은 더 갈고 닦아라. 도예가가 되기 전에 도공이 되어라. 세기에 단 한 사람 태어날까 말까 한 토예가가 되어라.”라고 들려준 말을 조기정은 마음 깊이 간직하며 최순우 선생께 누가 되지 않는 수많은 고려청자가 간직하고 있는 여러 가지 신비스러운 색과 조형성을 훌륭하게 다시금 살펴낸다.
이를테면 청자 음각 연화절지문 매병(국보 252호)처럼 어깨의 팽창곡선이 부드럽고 몸통으로 이어지는 곡선의 변곡점이 점차 중앙부로 상승하여 전체적으로 S자 곡선을 연상케하는 청자를 재현한다. 이런 류의 작품은 단정하고 당당함을 갖춘 귀족의 품위와 자태가 돋보인다. 또한 청자 소문병처럼 고려적인 특성을 드러내는, 화사하지는 않지만 은은한 광택으로 색상이 맑고 투명해서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것 같은 작품들을 빚어낸다. 이런 류의 작품들은 어느 것에도 치우치지 않고 중요의 귀티를 나타내어 고려사람들의 품격을 그대로 반영한 작품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조기정은 고려청자의 다양한 아름다움을 빚어낸 결과 오히려 고려청자를 능가하는 신기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조기정은 고려청자의 빛과 색 그리고 조형성을 완벽하게 재현해 내었다는 것 하나만 가지고도 그의 이름은 눈부시다. 그러나 그의 미적 욕구는 고려청자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른바 민예자기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해 오늘날 우리나라 도예계에 파급시켰다. 주로 문인화가들의 문인화와 자신의 도예작품을 접목시켰는데, 어느 누구든지 자신의 그림이나 휘호를 도예작품 속에 새롭게 살려낼 수 있다는 측면에서 청자보다 일반 대중들에게 한 발자국 다가서게 한 공로가 크다.
다른 한편으로 조기정은 그가 재현한 청자에 천기석(天氣石)을 접목시켜 청자를 보다 실용화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천기석이란 천기석 분말을 도자기 전면 또는 내・외 일부에 고열로 녹여 붙이거나 1,250℃ 이상의 고온에서 녹여 도자기 유약 또는 유약편(片)과 덩어리로 된 유리질 상태를 말한다. 이것이 인체에 유익하게 방출되는 원적외선 방사(遠赤外線放射) 최첨단신소재의 기본 원료물체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천기석 찻잔에 차를 따라 마시면 역한 냄새와 독소를 제거하는 등 인체에 매우 이로운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조기정을 생각할 때 앞에서 밝힌 것처럼 600여 년 만에 청자를 재현한 과정과 이후 청자발전에 공을 들인 점을 그의 가장 눈부신 생의 전리품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그 전리품을 얻기 위해 어느새 청춘은 어디론가 달아나버리고 이제 늬엿늬엿 은발의 계절을 맞고 있는 그의 머리칼과 아직도 소년처럼 호기심어린 눈매와 깊은 사색에 잠긴 듯한 그의 자태가 아름답다고 말해주고 싶다.
조기정의 삶과 예술은 오직 청자를 향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가능하게 한 에너지는 집념어린 광기와 미적욕구, 그리고 우리 것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30여 년 만의 만남을 그는 나를 기억해 내지 못했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거의 아침나절부터 오후까지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하루였다.
그의 집을 떠나며 그의 호가 고현(古現)이라는 것과 그의 전시실 한켠에 수북이 진열된 중국과 우리나라의 청자파편들과의 오랜 내밀한 대화와 사색의 시간이 그를 옥죄는 아름다운 형벌을 내렸을 것이고, 그는 그 아름다운 감옥에서 거의 일생을 탕진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가 얻은 죄목은 무형문화재로 죽어도 죽지 않는 영원한 이름으로 남을 것이다.
강경호 미술평론집
영혼과 형식
2009년 11월 10일 인쇄
2009년 11월 14일 발행
지은이 | 강 경 호
펴낸이 | 강 경 호
인쇄・기획 | 도서출판 시와사람
등 록 | 1994년 6월 10일 제 05-01-0155호
주 소 | 광주시 동구 금동 8-1번지
전 화 | (062)224-5319, 227-5319
팩 스 | (062)225-5319
E-mail | jcapoet@hanmail.net
ISBN 978-89-5665-262-7 03810
값 1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