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서 수집한 괘내리(괘법동),사상역,감전동 주변 옛사진


괘내, 감전 주변 항공사진 1947년

사상역 아래마을과 동감전(감동)마을, 뒤편에 엄광산 1962 (사상역앞 회산에서 촬영)

괘내마을 1962

서감전(서편)마을, 장인도 마을 60년대 (창날쪽에서 촬영), 오른편에 굴뚝높은 공장은 풍영화성임

낙동강둑위 감전 수문에서 창날(동괘)쪽으로 '70년대

감전동사무소(서감전) '80년대

감전동사무소(서감전)옆 화단 '80년대

사상역앞 회산위에서 1952 뒤편에 사상역이 보입니다.

사상역앞 회산위에서 1969, 뒤편 철길 오른쪽이 사상역입니다.

철도 사상역 '80년대

철도 사상역 광장 (회산 허문 자리)'80년대

철도 사상역 '80년대

철도 사상역 '80년대
*** 아래글은 사상초등학교50회 권금산님의 글로 사상구청 문화지에 연재되었던 글입니다. ****
권금산님은 사상구 괘법동 "벼락부자집 앞이 고향"이며 학장초등학교로 치면 18회에 해당됩니다.
아 내고향 부산沙上!<19>괘내리.감전동편
사상 驛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거의 변한 모습이 없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현재 있는 자리에 그대로 위치하고 있다. .
사상 古 문서의 기록에 의하면...
“사상驛은 1921년 11월 1일에 준공을 하였으나 해방 후의 혼란기에 공비들의 방화로 전소되고 현재의 역사는 뒤에 다시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물론, 세월이 변함에 따라 약간의 개, 보축은 있었겠지만... 당시의 모습 그대로 잘 보존된 역전의 모습이다(다만, 새마을호나 KTX가 정차하지 못해 아쉽기는 하지만!...).
70년대 이후...
사상공단이 형성되면서, 한때 “부산역을 사상역으로 이전한다!”는 계획이 있었지만... ‘유신정권’이 무너지면서 변경되어버렸다.
사상 古 문서에 의하면...
“‘사상驛’전 앞의 ‘괘내리’마을이 아주 먼 옛날에는 ‘사상 지역의 중심지’였었다고 한다.
지리학적으로 고찰하여 보면...
고대의 ‘괘내’ 부락은 다른 지역에 비해 약간 고지대로서 해안 촌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지금의 사상터미널 부근으로 낙동강물이 이곳 마을 깊숙까지 들어왔었다.
그래서 <사상 고문서>에 보면... “창진(倉津)”또는 “창날포‘라고 하였다고 한다.”
지리적으로도 조금 높은 이 사상역 앞 부근 ‘괘내리’에 ‘사상면사무소’가 있었다가 동래부사 영송행사(迎送行使)로 인해 ‘모라동’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그리고, 근세에 들어오면서는 1909년에 이곳 ‘괘내리’에 [명진 학교]가 설립되었다(현재의 사상역 앞 부근 못 옆). 이 학교가 오늘날의 [사상초등학교]로서 현재는 ‘덕포동’에 위치하고 있지만, [명진 학교]가 지방 유지들에 의해서 ‘사립학교’로 출발하여 일제 때 [사상공립 보통학교]가 된 후 까지도 ‘괘법동’에 소재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후 1914년에는 ‘괘내리’와 ‘창법리’가 합쳐져 처음으로 ‘괘법동(卦法洞)’이 탄생 되었다고 한다. ”
‘사상驛’전 앞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속칭 “뽀뿌라마치(町)”!...
사상 古 문서에 의하면...
“수해방지를 위한 ‘토종 포플러’가 많았었는데 샛강 수로를 통하여 이곳까지 배가 들어왔었다고 한다.
동래부사 이경일(李敬一, 1787~1788) 박재명(朴齋明, 1931~1933) 재임 시 낙동강(샛강)을 쌓을 때 감동 동천에 584명 서천에 241명의 부역군을 동원하여 둑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또한 둑 가운데 수문(水門)을 설치하였고 언제 심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포플러(바람나무)를 심어 수백그루의 긴 포플러 숲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리고, 1902년 8월 초량에서 구포까지 ‘경부선 철로 부설공사’가 시작되면서 이 공사에 일하는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감동 마을에서 서편(西便)마을로 들어가는 입구 서천(西川) 북서쪽 둑 위에 주막집 두 집이 생겨졌다.
1902년 당시... 이 곳 뿐만 아니라 괘내마을 ‘掛乃고개’ 주례 냉정마을 ‘냉정고개‘ 모라마을에도 주막이 생겼다고 한다.
하루 종일 중노동에 시달리다가 밤이 되면 팔도에서 온 노동자들은 이곳을 찾아서 막걸리 술잔에 향수를 달래었었다.
그 후에 ‘사상 신작로(국도 2차선)’가 개설되고 주막 옆으로는 콘크리트 다리가 서천(西川)위에 설치되고 1921년 11월에 사상驛이 생겨지면서 주막 앞을 내왕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었다. 특히, 이곳은 ‘괘법동’으로 들어가는 도로의 경사가 심해서 고개를 넘어오는 자전거와 우차(牛車)등이 이곳에서 어쩔 수 없이 쉬어갔기 때문에 장사가 잘 되었다고 한다.
어느 해 이곳을 찾은 일본사람이 서천(西川)둑에 포플러나무가 많은 것을 보고 이곳을 “포플러마치(町)”라고 한 것이 그 후 사람들 사이에 이곳을 “포플러마치(뽀뿌라마치)”라고 회자되기 시작하였다고 전해진다.
이후에는 괘내고개에 있던 주점들이 이곳으로 이사를 오고, 한국전쟁 때는 ‘미군 고사포부대’가 팔경대 회산(지금의 사상역 앞 부근 산)으로 옮겨오니 포플러마치 주점 주위로는 양공주들이 서성거렸었고, 1968년 ‘사상공업지역’이 조성되면서 부터는 공장 종업원을 상대로 주점거리가 유흥가로 변모했던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당국의 철저한 단속으로 과거의 부정적 이미지가 차츰 사라져 주택지로 바뀌어졌다.”
여기“뽀뿌라마치”의 도로를 중심해서, 편의상(?) 동쪽으로는 동감(東甘田)! 서쪽으로는 서감(西甘田)!이라고 불렀었다.
특이한 점은(?)...
다른 지역은 현재의 ‘사상路’ 도로의 그 위치에서 당시 왕복2차선에서 왕복4차선으로 확장 개통을 했었는데, 이곳 감전동 뽀뿌라마치”지역은 도로 확장공사를 하면서 현재의 직선도로로 고쳐진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 이야기 하자면...
당시에는 자연적 지형인 산줄기를 따라서 구불구불하게 나 있었던 신작로(국도 왕복2차선)를 ‘확장공사’를 하면서 현재의 일직선으로 고쳐서 공사를 한 것이다.
당시의 도로는 “신흥 상공사”(높은 굴뚝으로 유명했었음, 지금의 사상터미널 로타리 부근? 자동차 정비소)앞으로 해서 현재의 ‘외한은행‘앞 도로를 통하여 ’세화정형외과의원‘과 ’감전 교회‘옆으로 해서 좌회전하여 현재의 ‘사상路’ 로 진입하던 것을, 지금 현재의 도로로 고쳐 ‘확장공사’를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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