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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실참실수實參實修
1) 선정禪定과 지혜智慧의 명암明暗
사마타(奢摩他, śamatha)와 위빠사나(비파사나毘婆舍那, vipaśyanā)는 근본불교, 소승불교 등에서 가르치는 대표적인 두 가지 명상법이다. 사마타는 산스크리트어(Sanskrit語, 범어梵語)로 ‘평정’ 또는 ‘고요’를 의미하는데, 혼란스러운 생각이나 감정 등을 가라앉히는 명상법이다. 반면 위빠사나는 ‘통찰’ 또는 ‘지혜’를 뜻하며 사물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는 명상 수행법이다.
사마타는 마음을 고요하게 하여 집중력을 기르는 데 중점을 두고, 위빠사나는 그 집중력을 바탕으로 사물의 진실을 통찰하는 데 주된 목적이 있다. 일반적으로 사마타 수행을 통해 삼매三昧(samadhi)에 이르고, 다음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지혜智慧(般若, prajñā)를 증득하여 열반涅槃(nirvāna)에 이르게 되는 구조이다. 그러므로 이 둘은 기본적으로 서로 다른 수행 방법이기도 하면서 서로 보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에 오면 사마타와 위빠사나는 지관止觀이 된다. 지관은 지(止, śamatha)와 관(觀, vipaśyanā)의 합성어로, 수隋의 천태지의(天台智顗, 538~597)가 체계화한 수행법이다. 정신을 집중하여 어지럽게 일어나는 생각을 멈추고(止), 있는 그대로의 진실한 모습, 실상實相을 관찰(觀)하는 수행법이다. 천태는『수습지관좌선법요修習止觀坐禪法要』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같은 여래의 선정과 삼매는 무엇을 통해서 증득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지관을 수행함으로써만 성취된다. 지는 선정이고 관은 지혜이다. 정혜를 원융하게 이루고 지관을 평등하게 수행하여 고요와 관조가 둘이 아니고[적조불이(寂照不二)] 지혜광명과 마음의 고요가 하나의 자체[명정일체(明靜一體)]라야만 여래의 지관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어느 한쪽에 치우친 수행폐단이 없게 된다.
옛날 큰스님은 말하기를 “마음이 고요한 가운데 뚜렷하면 옳고[적적성성시(寂寂惺惺是)] 고요한 가운데 아무런 생각이 없다면 틀린 것이다[적적무기비(寂寂無記非)]”라고 하였다.
이처럼 마음이 뚜렷한 쪽으로만 치우치면 관 수행만 있고 지수행이 없게 되므로[유관무지(有觀無止)] 지혜만 있고 선정은 없게 되며, 반대로 고요한 쪽으로만 치우치면 지수행만 있고 관수행은 없게 되어[유지무관(有止無觀)] 선정만 있고 지혜는 없게 된다.
그러므로 어느 한쪽에 치우친 수행을 한다면 끝내 선정과 지혜에 있어서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침 없는 중도불성의 이치를 보지 못하게 된다. 때문에 반드시 마음이 항상 고요한 가운데 항상 뚜렷해야만 한다.[상적적이상성성(常寂寂而常惺惺)]
(천태지의 저/송찬우 역 『지관수행:수습지관좌선법요(修習止觀坐禪法要) 강의』제7장 선근발상(善根發相).)
지는 선정禪定이고 관은 지혜智慧라고 정의하면서 정혜定慧를 원융하게 이루고 지관止觀을 평등하게 수행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 수행을 통해 정靜이 얻어지고, ‘관’ 수행을 통해 혜慧가 일어난다고 하겠다. 그래서 지관을 정혜定慧라고도 하는데, 계정혜戒定慧 삼학三学 중 마음을 한곳에 머물게 하는 선정禪定과 현상 및 본체를 관조하는 지혜智慧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지止의 사마타 수행은 선정을, 관觀의 위빠사나 수행은 지혜를 가져온다고 하겠는데, 선정과 지혜에 있어서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침 없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지관止觀을 수행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정려靜慮가 한결같고 정혜定慧가 평등해진다. 분별심을 그치고 삼매에 들어 모든 분별작용이 사라지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 것이다.
선종禪宗의 제6조이자 남종선南宗禪의 시조 육조 혜능(慧能, 638~713)은 ‘정혜일체定慧一體’를 말하였다. 마음을 고요히 하여 삼매에 드는 선정과 사물의 이치나 상황을 제대로 깨닫고 현명하게 대처하는 지혜는 둘이 아니라는 말이다.
혜능대사가 말씀하셨다.
“선지식들아, 보리반야(菩提般若)의 지혜는 세상 사람들이 본래부터 스스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 다만 마음이 미혹하기 때문에 능히 스스로 깨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큰 선지식의 지도를 구하여 자기의 성품을 보아라.
선지식들아, 깨치게 되면 곧 지혜를 이루느니라.
선지식들아, 나의 이 법문은 정(定)과 혜(慧)로써 근본을 삼나니, 첫째로 미혹하여 혜와 정이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정과 혜는 몸이 하나여서 둘이 아니니라. 곧 정은 이 혜의 몸이요 혜는 곧 정의 씀이니(卽定是惠體 卽惠是定用), 곧 혜가 작용할 때 정이 혜에 있고 곧 정이 작용할 때 혜가 정에 있느니라.
선지식들아, 이 뜻은 곧 정·혜를 함께 함이니라(定惠等). 도를 배우는 사람은 짐짓 정을 먼저 하여 혜를 낸다거나 혜를 먼저 하여 정을 낸다고 해서 정과 혜가 각각 다르다고 말하지 말라. 이런 소견을 내는 이는 법(法)에 두 모양(相)이 있는 것이다. 입으로는 착함을 말하면서 마음이 착하지 않으면 혜와 정을 함께 함이 아니요, 마음과 입이 함께 착하여 안팎이 한가지면 정·혜가 곧 함께 함이니라.”
(중략)
“선지식들아, 정과 혜는 무엇과 같은가? 등불과 그 빛과 같으니라. 등불이 있으면 곧 빛이 있고 등불이 없으면 곧 빛이 없으므로 등불은 빛의 몸(體)이요 빛은 등불의 작용(用)이다. 이름은 비록 둘이지만 몸은 둘이 아니다. 이 정·혜의 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敦煌本 六祖檀經 7. 定慧 - 정과 혜『육조단경 돈황본』퇴옹성철 편역 119~125.)
정과 혜는 등불과 등불의 빛과 같아서 등불이 있으면 빛이 있고 등불이 없으면 빛도 없다. 그러므로 등불은 곧 빛의 몸(體)이요 빛은 곧 등불의 작용(用)이라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예로부터 선정과 지혜는 함께 닦아야 한다고 하였는데, 그에 대한 대표적인 선어禪語가 “정혜쌍수定慧雙修”다. 정혜쌍수定慧雙修란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는 함께 닦아야 한다(雙修)는 말이다.
정혜쌍수는 지관겸수止觀兼修라고도 하는데, 지와 관, 선정과 지혜는 서로 떨어질 수 없다는 뜻으로, 선정은 지혜의 바탕이 되고 지혜는 선정의 작용이 되기 때문이다. 육조 혜능을 비롯한 조사들도 그렇지만, 고려의 선승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1158~1210) 역시수행은 정定과 혜慧, 2문二門에 의지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정(定)은 본체이고 혜(慧)는 작용이다. 작용은 본체를 바탕으로 해서 있게 되므로 혜가 정을 떠나지 않고, 본체는 작용을 가져오게 하므로 정은 혜를 떠나지 않는다. 정은 곧 혜인 까닭에 허공처럼 텅 비어 고요하면서도 항상 거울처럼 맑아 영묘하게 알고, 혜는 곧 정이므로 영묘하게 알면서도 허공처럼 고요하다.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이다. 선정과 지혜를 다 같이 공부하여 만행(萬行)을 닦으면 어찌 헛되어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어리석은 선객(守默之痴禪)과 글만을 찾아 헤매는 미친 혜자(慧者)에 비유하리오.”
지눌知訥의 첫 번째 가르침은 돈오점수頓悟漸修요, 두 번째 가르침이 정혜쌍수定慧雙修다. 첫째, 돈오점수는 자신이 바로 부처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오랫동안 몸에 배어 있던 습관의 찌꺼기가 한꺼번에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선정과 지혜로 끊임없이 닦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선정의 상태(定)와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지혜(慧)는 함께 닦아야 한다는 것이 정혜쌍수다.
“진리에 들어가는 천 가지 문이 있다지만 모두 선정과 지혜 아님이 없다”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1158~1210),『수심결修心訣』)
원효(元曉, 617~686) 대사도 ‘지관이행止觀二行’이라 하여, 지止와 관觀을 함께 닦는 ‘지관쌍운止觀雙運’을 강조하였다. 지止와 관觀은 새의 두 날개,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서 반드시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와 관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보리菩提의 도에 들어갈 수 없으므로, 선정과 지혜, 지와 관은 서로 어우러져야 한다는 말이다.
원효의 수행론에서 중요한 것은 止觀二行이다. 그는 “止觀雙運 萬行斯備”라고 했다. 모든 밖의 境界相을 생각하면 마음이 산란하게 된다. 밖의 생각을 잊으면 고요하게 된다. 止란 밖의 모든 境界相을 멈추어 산란한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止만을 닦는다면 마음이 가라앉아 게을러지고 여러 善을 구하지 않고 大悲를 멀리 떠나게 된다. 이 때문에 觀을 닦아야 한다. 관이란 대상을 관조하여 因緣生滅相을 분별하는 것이다. (金相鉉,「원효성사의 실천행」.)
밖의 경계境界에 걸리면 마음은 산란하게 되는데, 지止로서 산란한 마음을 안정시켜도 마음이 가라앉아 게을러지므로(無記昏沈) 동시에 관觀을 닦아야 한다는 말이다. 요즘 위빠사나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사마타의 작용을 간과하기도 하는데, 위빠사나가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사마타 수행 또한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초기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無禪不智 선정이 없으면 지혜롭지 못하고
無智不禪 지혜가 없으면 선정도 닦을 수 없다.
道從禪智 도 닦는 이는 반야의 지혜를 좇아
得至泥洹 열반에 이르게 되느니라.
그러나 이러한 오랜 수행 전통은 조사선祖師禪을 넘어 간화선看話禪에 오면 그 기조基調가 점차 바뀌게 된다. 마음을 한곳에 머물게 하는 선정보다는 화두話頭를 의심하고 화두의 진의를 궁구窮究하는 지혜의 과정이 더욱 더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마음을 고요히 하여 삼매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사물의 이치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그때그때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도를 찾아내는 것이 수행 목표가 되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선정의 과정도 중요하겠지만 선정보다는 지혜에 방점傍點이 찍히게 된 것이다.
2) 지혜智慧의 관문關門, 화두話頭
간화선看話禪은 ‘화두話頭를 간看한다’는 뜻이다. 중국의 선禪수행 전통의 하나로 특정 화두話頭를 집중적으로 탐구하며 깨달음을 얻는 수행 방식이다. 여기서 화두는 간화선 수행의 중심 도구로, 수행자가 깊이 숙고하고 탐구해야 할 일종의 문제나 혹은 질문이다. 수행자는 화두를 통해 ‘크나큰 의심’의 상태에 들어가는데, 화두를 반복적으로 탐구하고 끊임없이 집중하여 궁극적 진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화두의 답을 찾아 화두의심에 집중하며 며칠 낮 며칠 밤을 바른 자세로 앉아 있다 보면, 풀리지 않는 의심과 갑갑함은 서서히 나의 온몸을 조여 오면서 나를 숨 막히게 압박하는 장벽이 되는데, 간화선에서는 이 장벽을 ‘은산철벽(銀山鐵壁)’이라고 부른다. 은산철벽은 어떻게 해서 만들어지는 것인가?
근 · 경의 전제에서 벗어나 근 · 경을 형성하는 심층 아뢰야식에서 눈 뜨기 위해서는 근으로부터 풀려나야 한다. 그러나 이미 의근, 즉 두뇌신경회로에 갇혀 있는 우리 의식이 어떻게 그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가? 이 탈출을 도와주는 것이 바로 화두이다. 화두는 두뇌신경회로를 따르는 사유를 모순과 자가당착으로 몰고 가서 우리를 더 이상 그 회로 안에 편안히 머무를 수 없게 만든다. 우리 안에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만유불성’을 믿다가 ‘개에도 불성이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 ‘무’를 들으면, 그 ‘무’자는 내 안 에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화두가 된다. 부처를 거룩한 존재로 믿고 살아오다가 ‘무엇이 부처인가?’라는 물음에 ‘똥막대기’라는 답을 들으면, ‘똥막대기’는 나의 두뇌신경회로를 교란 시키는 화두가 된다. ‘무엇이 손가락을 튕기게 하는가?’ 나의 본래면목을 묻는 이 물음은 나의 마음을 뒤흔들어 두뇌신경회로를 교란시킨다. 교란은 자연스런 회로의 연결에 잠시 혼선을 빚는 것이다.
의심을 통해 두뇌신경회로가 교란되는 순간 우리는 찰나적으로 회로의 끊김, 회로 바깥으로 통하는 빈틈을 보게 된다. 빈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 섬광처럼 스치고 지나가는데, 화두 의심에 집중한다는 것은 바로 그 빈틈을 붙잡고 놓지 않는 것이다. 의심으로 포착한 빈틈을 붙잡고 그 틈을 벌려 거길 통과해야만 두뇌신경회로 바깥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 그래야 의식이 의근 바깥으로, 꽃이 꽃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 (한자경(이화여대) Ja-Kyoung Han (Ehwa Woman's Univ.)「간화선의 유식학적 이해, An Understanding of Ganhwa Seon from the Perspective of the Consciousness-Only School」) 제3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간화선과 불교교학, Ganhwa Seon in the History of Buddhist Thought> Day 1, 2012.6.23~24, 동국대학교 국제선센터, 불교학술원 종학연구소, pp. 145~146.)
조주趙州가 말한 화두 <無>와 마주친 제자는 혼란에 빠진다. 듣도 보도 못한 은산철벽銀山鐵壁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조주趙州의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동산洞山의 마삼근麻三斤, 운문雲門의 호떡[糊餠] 등등 무의미한 말 그대로 은산철벽이자 조사의 관문關門, 조사관祖師關이 되는 것이다. 수행자는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막아선 은산철벽을 뚫어야 한다[祖師禪].
그러려면 기존의 사고방식을 벗어나 더 넓은 사고의 광장으로 나와야 한다. 그럼 어떻게 두뇌신경회로에 갇혀 있는 우리 의식을 깨워 광장으로 끌어낼 수 있는가? 그 무기가 바로 우리를 혼란에 빠뜨린 장본인인 화두이다. 화두는 은산철벽을 촉발觸發하였을 뿐 아니라 그것을 무너뜨리는 도구도 되는 것이다. 트리거trigger이자 동시에 포탄砲彈이 되는 것이다.
은산철벽은 지난 업과 습이 쌓아놓은 업장의 벽, 나를 전철 안에, 꽃을 꽃 안에 가두려는 아집의 벽이다. 늘 있어왔던 벽인데 그 안에 머무를 때는 의식되지 않다가, 막상 뚫고 지나가려 하니 부딪히게 되는 벽, 의식의 통과를 막는 철벽이다. 쌓아놓은 업장이 두터울수록 심신을 옥죄는 압박감도 더 강하고, 업장이 다양한 만큼 드러나는 철벽의 모습과 수난의 방식도 다양하다. 수행자들은 자신을 압박해 오는 이 은산철벽을 자신의 업장이라고 느끼는데, 실제로 수행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은산철벽의 다양한 모습은 결국 그것이 각자의 과거 업과 습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은산철벽은 온몸을 터질 듯 조여 오기도 하고, 체한 듯 속을 꽉 틀어막기도 한다. 또는 죽은 듯 손발을 차갑게 냉각시키기도 하고, 머리를 터질 듯 아프게 만들기도 한다. (한자경(이화여대) Ja-Kyoung Han (Ehwa Woman's Univ.)「간화선의 유식학적 이해, An Understanding of Ganhwa Seon from the Perspective of the Consciousness-Only School」) 제3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간화선과 불교교학, Ganhwa Seon in the History of Buddhist Thought> Day 1, 2012.6.23~24, 동국대학교 국제선센터, 불교학술원 종학연구소, pp. 146~147.)
화두는 기존의 사고과정思考過程를 뒤흔들어 두뇌신경회로를 교란시키며 혼돈混沌을 유발誘發한다. 이렇게 해도 얻을 수 없고, 저렇게 해도 얻을 수 없는, 그리고 상식적常識的으로는 절대로 이해되지 않는 질문 혹은 대답 앞에서, 제자의 분별의식은 혼란混亂을 야기하며 극심하게 부하負荷가 걸린다. 그리고 결국 정지한다. 그러나 그것은 실로 의식의 정지 상태는 아니다. 오히려 모든 의식이 그 문제를 풀기위해 최고조로 가동되며 더욱 뚜렷해진 각성상태覺醒狀態가 된다.
그것은 어떤 각성의 상태이기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 거기에서 깊은 의심이 떠오른다. 선어는 의식의 분별작용을 철저하게 타파하는 동시에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의심은, 의식의 다른 어떤 기능보다도 더 강력하게 의식을 긴장시키는 힘이 있기 때문에, 무의식으로 침몰하거나 분별망상으로 빠지지 않은 채, 마음의 집중상태를 유지시킨다. 그러므로 그것은 단순한 선정의 상태와 달리 의식의 중단을 의미하지 않는다. (명법,『선종과 송대 사대부의 예술정신』 pp. 127~128.)
의심으로 충만 된 각성상태는 오롯이 깨어 있는 상태다. 무의식이나 분별망상에 빠지지 않은, 내부 및 외부의 모든 현상 을 알아채기 위해 모든 두뇌 회로가 풀가동되고 있는 상태다. 이는 마음을 안정시키고 휴식을 취하거나, 마음을 집중하고 고요히 앉아있는 정좌수행正坐修行과는 구별된다고 하겠다.
의식작용의 중단은, 순간적인 평화와 휴식을 줄 수 있을지 몰라도, 자기의식의 한계를 철저하게 뚫고 나갈 수는 없다. 그러나 의심은 의식으로서 의식의 부정을 행하기 때문에, 선정에서 나온 후에도 의식은 대상과 주관으로 양분되지 않으며, 일상생활의 모든 행위, 즉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黙動靜 가운데 완전한 정신집중을 수행할 수 있다. 이렇게 의식의 완전한 각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조사선>은 정좌수행과 구별된다. (명법,『선종과 송대 사대부의 예술정신』 pp. 127~128.)
‘선은 순간순간 거울처럼 맑은 마음을 유지’하여야 한다. 그리고 자기의식의 완전한 각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참선 수행은 삼매와 관련이 없다. 순간적으로 그것을 경험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앉아있는 무기無記는 순간적인 평화와 휴식은 줄지 몰라도 깨달음에 이르는 데에는 미흡하다는 것이다. 고요함 속에서도 오감은 완전히 깨어있어 모든 것을 뚜렷하게 관하는 상태(常寂寂而常惺惺), 의식작용의 중단 없이 각성상태를 유지하는 것, 그것이 간화선看話禪 수행의 요체要諦인 것이다.
3) 묵조默照냐 간화看話냐, 혹은 위빠사나?
스즈키 다이세츠(Suzuki Daisetsu, 鈴木大拙, 1870~1966)는 선禪 관련 저술들을 많이 남겼는데, 그 중『Living by Zen (1950)』에서 공안선公案禪을 인도유가행파(Yogacara)의 보살도菩薩道와 비교 분석하고 있다. 그는 사마타(奢摩他, śamatha)와 위빠사나(毘婆舍那, vipaśyanā) 수행을 두 개의 도道라고 지칭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술記述하고 있다.
이 두 개의 道(courses)는 선불교의 역사를 관통하고 있다. 다행히 조화해서 병행할 때도 있고, 한쪽이 다른 쪽보다 강조될 때도 있다. 弘忍(602-675)의 시대에는 두 개의 도가 두 파에 의해 대표되었다. 즉 한쪽은 선의 禪定(dhyana) 또는 samatha의 면에 중점을 두고, 다른 쪽은 智慧(prajna) 또는 vipasyana가 선에 있어서 본질적이라고 주장했다. 이 분열은 慧能(638-713)의 때에 위기에 도달했다. (Suzuki 1950: 149) (아케미 이와모토 Akemi Iwamoto (스즈키 박물관, D.T. Suzuki Museum)「公案禪과 印度瑜伽行波의 菩薩道 스즈키 다이세츠의 公案禪 해석을 단서로 해서, Kōan Zen and the Bodhisattva Path of Yogācāra in India - D.T. Suzuki’s Interpretation of Kōan Zen」, 토론 : Eiji Suhara (University of Pittsburgh). 제3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간화선과 불교교학, Ganhwa Seon in the History of Buddhist Thought> Day 1, 2012.6.23~24, 동국대학교 국제선센터, 불교학술원 종학연구소, p. 170.)
선불교 역사에 있어 두 파는 그 유명한 신수神秀와 혜능慧能 계열을 가리킨다. 이 책에서 그는 신수의 선이 선정에 중점을 둔 반면 혜능은 지혜에 중점을 두었다고 하면서 ‘선의 본질은 지혜이지 선정은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혜능이 선의 정신을 대표하고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선종 초기부터 지혜를 선의 본질로 보았고 선정보다 우위에 두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수행자는 단순히 사마타의 고요한 측면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지혜를 활용해야 하기 때문’(이지 수하라 Eiji Suhara (피츠버그 대학, University of Pittsburgh)「公案禪과 印度瑜伽行波의 菩薩道 스즈키 다이세츠의 公案禪 해석을 단서로 해서」에 대한 논평, 제3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간화선과 불교교학, Ganhwa Seon in the History of Buddhist Thought> Day 1, 2012.6.23~24, 동국대학교 국제선센터, 불교학술원 종학연구소, p. 216.)이다.
이 지점이 훗날 간화냐 묵조냐의 논쟁의 시발점이기도 한데, 간화와 묵조에 대한 논쟁은 이미 앞에서 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다만 간화선이 혜慧를 강조하는 데 비해 묵조선은 정定을 주主로 삼았다는 말인데(김호귀, 동국대 강사, [불교쟁론] 20. 看話禪과 默照禪), 다만 주목할 것은 강조하는 지점이 다르다고 해도 수행 그 저변에는 항상 선정과 지혜가 기본 함수函數로 깔려 있다는 것은 주지周知의 사실이다. 위에서 살폈지만 사실 혜능도 기본 가르침은 정혜일체定慧一體에 두고 있다.
인도로부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행은 정과 혜를 순차적으로 또는 동시에 닦아야 한다는 것을 기정사실旣定事實로 하고 있다. 강조하는 부분이 증폭되어 그 차이가 눈에 보일 수도 있지만 큰 틀에서 보면 그리 큰 차이는 아니라는 뜻이다. 약간의 차이가 감지感知되는 수준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 논쟁이 실재 수행 현장으로 옮겨지면 상황은 바뀐다. 이론과 실재는 다를 뿐 아니라 현실은 말처럼 그리 단순치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선방은 선불장이라 한다. 부처 뽑는 고시원이다.
그런데 우리는 선방에 몇 년 보냈나를 계급장처럼 자랑한다.
‘내가 고시원에서 30년 보냈다’ 그러면 그 놈은 미친놈이다. 자기도 집구석도 사회도 망한다.
(벽송선원 선원장, 월암 스님, [야단법석]선방 30년이 무슨 자랑거리인가,
불교닷컴, 2009년 11월 24일.)
선방에 무작정 앉아만 있는 것은 에너지 낭비다. 그 끝없는 권태로움으로 인하여 그나마 가지고 있던 흥미마저 잃어버리기 십상十常이다. 그나마 직업이 스님인 수행자들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재가자의 입장이라면 더욱 더 그러하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직업스님처럼 화두에 집중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선방에서 수행하는 스님들은 또 어떠한가? 물론 성철 스님이나 숭산, 법전 등등 화두 몇 개로 깨달았다는 스님들도 있지만 그러나 그렇지 못한 수좌首座들이 태반이다.
간화선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보다 정확한 선학적인 근거가 필요하며 동시에 이 바탕 위에서 화두 의심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타파해야 한다. 간화선은 앉아있음만으로 선을 삼는 묵조선에 대한 반성에서부터 제기되었음에도, 간화의 정신에 입각한 동정일여(動靜一如)의 수행방법보다는 단지 오래 앉아있는 것만으로 수행을 삼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는 묵조사선의 무리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한국의 간화선이 만약 선정주의에 치우친다면 올바른 지견(知見)을 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정혜쌍수의 수행전통에도 위배된다고 볼 수 있다. (수불 스님 Master Subul (修弗禪師, 안국선원 선원장),「간화선 수행의 대중화, Making Ganhwa Seon Accessible to the General Public」,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International Conference on Ganwha Seon Day 2, <간화선, 세계를 비추다 Ganhwa Seon, Illuminating the World.>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Dongguk Institute for Buddhist Studies Researchp. p. 21.)
유명한 선원에 선방 수좌라고 해도 계속 화두에 집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간간이 스승과 문답을 한다고 해도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면 우왕좌왕하게 되기는 마찬가지이다. 대부분 선방에 가부좌를 틀고 무작정 앉아 있는 것을 수행이라고 하는데, 이는 임제종 간화선 수행 방식과는 동떨어져 있다. 언감생심焉敢生心, 묵조니 간화니 따질 계제階梯도 아니다.
만일 ‘이뭣고’ 혹은 ‘송장 끌고 다니는 것이 뭣고’ 하는 생각을 일으켜 그 생각을 염념상속(念念相續)해서 끊어지지 않게 의심한다면, 그것은 간화선을 모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송장 끌고 다니는 것이 뭐냐’ 하는 사고를 일으켜서, 그것을 억지로라도 이어 나가려고 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문제만 외우는 꼴이다. 문제만 외우고 있다면, 실제적인 의심이 진행되지 않는다. 문제는 처음에 한 번 제기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후에는 문제는 내버려두고 오로지 답만 찾아야 한다. (수불스님, Master Subul (동국대학교 국제선센터 선원장, Head Teacher of International Seon Center, Dongguk Univ.)「한국불교의 활로, 간화선에 있다, Ganhwa Seon, the Most Effective Buddhist Practice」, 제3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간화선과 불교교학, Ganhwa Seon in the History of Buddhist Thought> Day 1, 2012.6.23~24, 동국대학교 국제선센터, 불교학술원 종학연구소, p. 35.)
더욱 큰 문제는 무작정 앉아 있다 보니 시간이 지나면서 뭔가 달라지기는 달라지는 데, 그것이 무엇인지 모를 수도 있다. 그리고 선지식에 의한 점검이 적절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올바르게 가고 있는지 모를 수도 있다. 오랜 세월 수행하여 무엇인가를 얻었다고 해도, 화두라는 것이 그렇게 앉아서 세월을 보내고 할 일이 없어질 때까지 해야 이루어지는 것인가?
승랍僧臘이 충분히 된 스님이다.
“선방에 앉아 있으면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할 것이 없어지면
(몇 년이 소요될지 모르지만) 그때 가서 화두가 잡힌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화두라는 것을 볼 일 다 보고 해야 하는 것?
한편 선지식의 점검 없이 오래 앉아 있다 보면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발생한다. 수많은 조사들이 지적했듯이 화두의 경계를 잘못 오해한다거나, 무사안일의 무기無記에 빠진다거나, 어떤 선적 체험을 견성으로 믿어 착각하기도 한다. 또, 수행하면서 일어나는 변화들을 그때그때 선지식에게 물어보지 않으면 삿된 길로 빠져들기도 한다. 자신뿐 아니라 주위사람들에게도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참구 중에 눈앞에 밝은 빛이나 형상이 나타나기도 하고, 갑자기 전혀 알 수 없었던 공안이 이해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것은 모두 경계이므로 학인은 경계를 가져 깨달음으로 오인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이런 병통도 옆에 선지식을 모시고 공부하고 있다면 문제될 것이 없겠지만, 만일 혼자 수행하다가 이런 경계를 만나게 되면 반드시 선지식을 만나 뵙고 점검을 받아야 한다. 답을 찾다가 활구의심이 익어지면 화두를 굳이 들려하지 않아도 들려지고, 내려놓으려고 해도 놓아지지 않게 된다. (수불 스님 Master Subul (修弗禪師, 안국선원 선원장),「간화선 수행의 대중화, Making Ganhwa Seon Accessible to the General Public」,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International Conference on Ganwha Seon Day 2, <간화선, 세계를 비추다 Ganhwa Seon, Illuminating the World.>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Dongguk Institute for Buddhist Studies Researchp. p. 19.)
선방에서는 화두를 든다고 하는데, 화두를 들고만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것인지, 무엇이 옳은 것인지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디까지가 옳은 경계인지 조차 모호하다. 기준이 없으니 혼란만 가중 될 뿐이다. 인도 다람살라로 수많은 한국 승려들이 몰려가는 것이나, 남방에 가서 위빠사나 수행법을 배우고 와서 그것이 전통 있는 최고의 수행법인양 가르치는 스님들이 다수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쪽은 커리큘럼[curriculum]이 있어 가는 길이 명확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도 한 방법이기는 하겠지만, 그 폐해 또한 막심하다고 하겠다. 한국 조계종이 중국 선종인 임제종을 이었다고 하면서, 이미 비슷한 과정을 거쳐 수백 년 간 탁마를 거쳐 완성된 임제종 간화선법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아 남의 것만 기웃거리고 있는 것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초기불교주의자들은 위빠사나만이 붓다가 공인한 유일한 수행법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선종을 ‘조도祖道’, 즉 조사들의 가르침이라고 부르며 그것은 불교가 아니라고까지 한다. 그렇다면 불과 30년 전만해도 우리와 같은 시공간에 살며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경봉이나 구산, 성철과 같은 선사들은 거짓말쟁이요 사기꾼이란 말인가? 때로는 인자하게 때로는 불같은 사자후로 수많은 사람들을 웃기기도 하고 울리기도 하며 20세기 한국불교를 지탱해 온 경허, 혜월, 용성, 만공, 한암, 만암, 만해, 혜암, 효봉, 고봉, 춘성, 전강, 동산, 금오, 청담, 향곡, 백봉 등등 기라성 같은 선사들은 또 무엇인가? 그들은 단지 시대가 필요로 한 피에로였단 말인가? (방경일 지음,『초기불교 vs 선불교』p. 292.)
4) 이독공독以毒攻毒, 화두의 필요성
오랜만에 소탈한 수행자의 모습에 매료되어 읽은 책이 있다. 법광法光 스님이 쓴『선객』이란 책이다. 그 중「화두」라는 제목의 글에서 스님이 수행 중 다시 화두를 받게 되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 놓았다.
겨우 모기와 한 판 한 뒤로는 몇 가지 일들이 이어졌다. 어느 정도 마음이 정리 된 듯하더니 ‘서울 부산 대구 대전 찍고!’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전국을 누볐다. 이어 온갖 불사佛事를 다 해 보았다. 총림 몇 곳은 지은 듯싶다. 게다가 도인이란 도인도 다 해보았다. 생각에 생각이 이어지는 것이 끝 가는 데를 모를 지경이었다. 그렇게 꼬박 한 달 쯤 되어 산철 결재가 끝나갈 무렵에 이르러 거짓말처럼 억지로 무엇을 생각하려 해도 더 이상 생각할 것이 없게 되었다. 그제서야 어렴풋이 와 닿는 것이 있었다. ‘이래서 화두가 있어야 하는구나!’ (법광法光 스님의 선방이야기『선객禪客』pp. 174~175.)
화두 없이 한철을 보내면서 생각이 없어지는 걸 경험하고, 노장 스님을 뵙고 다시 <無>자 화두를 받았는데, 몇 달 전과는 그 느낌이 달랐단다. 예전에도 화두를 받았었지만 들지 않고 있다가, 한 철이 지나서야 화두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똑같은 화두를 다시 받았는데, 화두 효과를 실감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더 이상 생각할 것이 없게 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보다 일찍 화두에 집중했으면 한 철 동안의 전국 유람은 하지 않아도 되었을까? 물론 그 차이를, 몇 달의 시간을, 혹은 수행 효과의 경중을 따지자는 것은 아니다.
간화선은 번뇌망상을 그대로 두고 공부하는 수행법이다. 번뇌망상을 가라앉히는 일반 명상법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번뇌망상을 일어나는 대로 내버려두고, 오직 화두에만 집중하게 한다. 화두 의심이 익어지면, 번뇌망상과 혼침 등 모든 방해를 이겨내고 결국 정신적인 장벽을 타파하게 된다. 화두 기운은 업력과 직접 싸우게 해주는 강력한 힘이다. (수불스님, Master Subul (동국대학교 국제선센터 선원장, Head Teacher of International Seon Center, Dongguk Univ.)「한국불교의 활로, 간화선에 있다, Ganhwa Seon, the Most Effective Buddhist Practice」, 제3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간화선과 불교교학, Ganhwa Seon in the History of Buddhist Thought> Day 1, 2012.6.23~24, 동국대학교 국제선센터, 불교학술원 종학연구소, p. 37.)
생각이 없어지는 경지까지 간 스님의 공력功力은 높이 산다. 짝짝! 왜냐하면 대부분의 수행자는 그 경지까지 가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생각이 없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대신 강력한 또 하나의 생각으로 끊임없이 일어나는 번뇌煩惱와 망념妄念들을 제어하는 장치가 화두이다. 이독공독以毒攻毒, 독毒으로 독毒을 공격한다, 이독제독以毒制毒, 독을 없애는 데 다른 독을 쓰는 것이다.
화두도 하나의 망상妄想이다. 강력한 망상으로 다른 망상을 치는 것이다. 번뇌 망상을 그대로 둔 채 또 하나의 커다란 망상을 일으켜 온갖 잡생각과 걱정거리들을 제거하는 수행법이 간화선인 것이다. 생각에 생각이 이어지는 망상의 바다에서 표류하다 어느 덧 또 하나의 생각인 화두의 나룻배를 잡아타게 되는 것이다. 생각으로 생각을 친다, 그것이 바로 간화선이다.
송대宋代에 와서 사람들의 근기가 점점 하열해지자 조사스님들이 그 증세에 맞는 약을 베풀게 되어 화두를 참구하는 방편법문을 열게 되었지만, 실은 화두도 망상의 하나일 뿐이다. 이것은 독으로써 독을 공격하는 것(以毒攻毒)이니, 자기가 참구하는 화두로써 잡념을 대적하여 꾸준히 밀고 나가면 점점 주관(能)과 객관(所)이 함께 없어지고, 나타나는 업과 흐르는 식(現業流識)은 끊어지며, 헛된 마음(투심偸心)이 다 소멸되는 때에 도달하여, 어떤 경계나 인연을 만나게 되면, 기관을 움직이는 손잡이를 건드리듯(촉저관렬觸著關捩), 홀연히 허공이 부서지고 대지가 가라앉으면서 자기의 본래 성품을 볼 것이다. (『참선요지參禪要旨』「서序」(월암月庵,『간화정로看話正路, 간화선을 말한다』pp. 247~248).)
이것이 화두의 필요성이요, 간화선의 출현 동기이기도 하다. 물론 더 이상 생각할 것이 없게 될 때까지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다가 깨달음을 맞이할 수도 있겠지만, 화두의 의심으로 번뇌 망상들을 잠재우며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 보다 더 효율적이고 앞선 방법이라는 것이다. 화두를 해결하려고 집중할 때 수행 의지를 더 오래 유지할 수도 있다.
산란심, 즉 번뇌 망상이 일어나더라도 무시하고 내버려 두라고 말해준다. 번뇌 망상을 없애고 공부하려 하지 말고, 같이 동행하되 화두에만 집중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문제와 더불어 의심되어진 그 갑갑함이 바로 활구의심인 것이다. 이렇게 잡들어진 화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놓쳐서는 안 된다는 점 주지시킨다.
지금 화두가 들려있는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 확신이 없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해준다. “알약을 먹으면 그대로 있나? 몸에 들어가면 녹아버린다. 약이 몸 밖으로 나간 게 아니라, 몸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화두 의심도 같은 이치다. 선지식이 문제를 던졌을 때 답을 모르니까, 그 문제가 온몸에 퍼져 의심화 된 것이다. 그러니 그 의심화 된 것을 계속 집중하고 추궁하라. 내면으로 돌이켜 자꾸 살펴서 한 덩어리가 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렇게 참구할 때, 어떤 역순경계가 나타나더라도 일어나는 대로 내버려두고 그럴수록 화두에 집중하라.”고 말한다. (수불 스님 Master Subul (修弗禪師, 안국선원 선원장),「간화선 수행의 대중화, Making Ganhwa Seon Accessible to the General Public」,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International Conference on Ganwha Seon Day 2, <간화선, 세계를 비추다 Ganhwa Seon, Illuminating the World.>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Dongguk Institute for Buddhist Studies Researchp. p. 18.)
그리고 이 과정을 보다 확실하게 수행하게 하는 방법이 입실점검이다. 정기적으로 스승을 만나 모든 과정을 점검 받는 것이다. 스승은 제자의 답을 듣고 제자의 상태를 점검하고 참구參究 방향을 잡아준다. 입실점검은 또 참선을 하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쏟아내는 장이기도 하다. 즉 그 사람이 살면서 배우고 익혀 습이 된 생각들이 참선 중에 떠오르는데, 그것을 뱉어내고, 뱉어내고, 또 뱉어내는 장이 입실점검인 것이다. 선도회 법사인 서명원 신부의 입실점검 이야기를 들어보자.
처음 입실한 그는 법사 앞에서
서양인 특유의 논리를 전개하며 20분간 쉬지 않고 머릿속에 얽혀 있던 생각들을 쏟아 냈다.
법사는 묵묵히 다 들어준 다음,
복잡한 머릿속을 매우 효과적으로 비울 수 있는 수식관數息觀 요령을 찬찬히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그 다음 주 모임에서는 10분간 쏟아냈고, 세 번째 모임에서는 5분간 쏟아냈고,
네 번째 모임에서는 드디어 30초 동안 쏟아내더니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다고 고백했다.
스승과의 입실점검을 통해 뱉어내고, 뱉어내어 더 뱉어 낼 것이 없을 때 습에서 비롯된 생각들은 사라지고 자연스레 화두에 대한 탐구가 이루어진다. 입실점검에서 쏟아낸 생각들은 다시 나를 맴돌지 않고 떠나간다. 화두에만 집중하게 되고 참구가 순일하게 이루어져 화두를 타파하고 마침내 궁극적인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입실점검을 통해 점검과 자극을 받으며 의심 없이 선지식이 갔던 길을 따라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쁜 현대인에게 짧은 시간에도 제대로 된 수행을 맛보게 하는 방법은 과연 없을까? 도대체 어떤 수행방법으로 그런 것을 다 소화할 수 있을까? 소납은 처음 가르쳤을 때의 실패를 밑거름 삼아 화두만 들고 마냥 앉아있게 하는 방법상의 한계를 스스로 맛보게 된 뒤, 공안 상에서 의심되어진 화두를 들게 하는 간화선 수행을 통해 상대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 핵심적 방법은 “단번에 의심하지 않을 수 없도록 활구화두를 들도록 해서, 답만 찾도록 집중시키는데 있다” 하겠다. 수행자가 혼자서 화두를 들 때 활구 의심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답은 찾지 않고 문제만을 외우고 있기 때문이다. 답을 찾는데 집중하다보면 몰람결에 활구의심이 활발발하게 살아날 것이다.
(중략)
수행자는 시종일관 답을 찾는데 혼신의 힘을 경주하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점은, “공안의 문제는 이미 제시되었는데, 왜 답을 찾는 일을 하지 않느냐?”이다. 예를 들면 “어째서 무라 했을까?” 혹은 “송장 끌고 다니는 놈이 뭣꼬?”를 생각 생각에 끊어지지 않게 하려고 공안, 즉 문제만을 자꾸 떠올리면서 되새김질하듯이 의심하는 사구(死句)를 가지고는 참구가 지속적으로 연결되지 않을 수밖에 없다고 할 것이다.
5) 화두와 입실점검入室點檢
고봉원묘(高峰原妙, 1238~1295) 선사는 간화선 수행을 하는데 꼭 필요한 세 가지, ‘삼요三要’를 지적해 놓았다. 삼요란 대신심大信心, 대분심大憤心, 그리고 대의심大疑心을 말하는데, 고봉원묘 선사가『선요禪要』에서 주장한 수행자가 갖춰야 할 세 가지 요소다. 이를 유지하며 수행하는데 있어 입실入室하여 점검點檢 받는 방법만한 것이 없다. 종달 이희익李喜益 노사님의 체험담을 인용한다.
입실하여 노사에게 절하고 받은 공안을 ‘無’字라고 하는데 입을 열자마자 찌르릉 방울을 흔든다. 경계에 이르지 못했으니 퇴장하라는 신호다. 주의나 힌트도 주지 않는다. 그러니 들어갔다가 곧 쫓겨 나온다. 이렇게 9월이 다가도록 반복했다. 어떤 때는 “이 밥통아!”하고 꾸짖기도 했다. 그러나 어떻게든 끝장을 봐야겠다고 덤벼들었다. 9월 한 달을 무어가 무언지 모르고 지나갔다.
(중략)
그러는 가운데 12월이 되었다. 12월 8일은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날이라고 1일부터 8일 새벽까지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한다고 한다. 이것이 납팔섭심臘八攝心이다. 이번 납팔섭심 때 깨치지 못하면 목숨을 내 놓는다고 대중들은 수군거렸다. 이 납팔섭심을 예로부터 ‘목숨걸이 좌선’이라고 일러왔다 한다. 나도 이번 섭심 중 ‘無’字를 꼭 해결해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중략)
12월이어서 날씨가 추웠으나 화기는 하나도 없고 게다가 참가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맨발이라야 했다. 중은 물론 재가신도로 남녀를 가리지 않고 양말이나 버선을 벗어야 했다. 이렇게 하루 이틀이 지나고 사흘째로 접어들었다. 그야말로 용맹정진이었다. 보통 때는 아침저녁 두 번만 입실했으나 납팔섭심에는 세 번이다.
환종 소리만 나면 나는 기를 쓰고 입실했다. 그러나 진전이 조금도 없다. 들어가면 아니라고만 하니 이제 할 말이 없게 되어 환종 소리가 나도 입실 않기로 작정했다. 입실을 포기한 것이다. 되든 말든 입실해야 결판이 나는데 입실을 포기했으니 결국 좌선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환종 소리에 따라 남들은 달려가 입실했으나 나는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직일直日(당내를 감독하는 사람)이 와서 경책警策(1m 반 길이로 끝이 약간 널찍한 작대기)으로 어깨를 치며 입실하라고 했다. 눈짓으로 입실을 재촉했다. 선방에서는 입을 열지 못하고 종이나 북이나 요령 등의 신호로 움직인다. 할 수 없이 자신 없는 입실을 했다.
노사는 다른 때와는 달리 매우 엄한 어조로 “이 밥통아!”하고 내쫓는다. 힘없이 나와서 자리에 앉았다. 또 직일이 다가와서 입실하라고 눈짓했다. 눈초리가 매우 날카롭다. 입실했으나 또 쫓겨났다. 이번에는 직일이 어깨를 경책으로 때리며 입실하라고 고함을 친다. 부득이 입실하면 노사는 역시 여의如意로 어깨를 때리고 발로 차고 했다. ‘여의’란 두어 자 되는 끝이 꼬부라진 단단한 나무대로, 노사가 입실을 받을 때 의례히 좌보 앞에 놓고 평시에도 쥐고 다니는 물건이다.
이거 야단났다. 이렇게 며칠 지나고 마지막 전날인 7일 밤이 되었다. 직일이 입실하라고 경책으로 등을 밀었다. 입실해서 할 말을 다 해도 아니라고 쫓아내니 또 뭐라고 한단 말인가. 그래서 경책으로 찔러도 일어나지 않고 밀어도 버티었다. 그랬더니 멱살을 잡아끌어 입실시킨다. 역시 노사는 내쫓는다. 또 직일이 멱살을 잡아 입실시킨다. 나는 법당 기둥을 잡아 쥐었다. 직일은 기둥을 잡은 손을 경책으로 때렸다. 이거 견딜 수가 있나. 경책으로 등을 밀어 입실을 시켰다. 이렇게 소란을 피웠다. 나는 내 정신이 없었으므로 소란스러웠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궁지에 몰아넣은 수단이었다. 禪은 궁지에 들어가서 궁해야 통하는 것이다. 우물도 계속 퍼내면 급기야 바닥이 나는 법이다. 이때가 궁한 때며 통한 때다. 물은 잡념망상을 가리킨 것이며 푼다는 것은 잡념망상을 제거한다는 뜻이다. 잡념망상 때문에 통치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禪이란 잡념망상을 제거하는 수련이다. (이희익李喜益 著,『人生의 階段』禪道會門人一同, 1984, pp. 32~34.)
필자의 경우 <날아가는 비행기를 멈춤>이란 화두를 입실 없이 5년 동안 참구하였다. 시시때때 화두를 들고는 있었지만, 어떻게 참구해야 하는지, 뭘 의심해야 옳은 것인지, 그리고 잘 하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다 이메일을 통한 입실점검을 통해 1년 만에 그 막연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 번 투과하고 나니 선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다음은 별로 막힘없이 순일하게 공부가 진행되었다. 빠르게 화두들을 투과해 나갈 수 있었다.
보조 지눌 선사는『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에서 대혜의『서장』을 인용 <無>자 화두참구 방법에 대한 ‘10가지 병통看話十種病’을 짚어 놓으셨다. 한편 수많은 선사들이 화두 <無>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들을 붙여 놓았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말이고 문자일 뿐이다. 아무리 잘 설명한다 해도 ‘원숭이가 물에 비친 달을 잡으려는 것(如猿捉影)’에 다름 아니다.
스님이 말씀하셨다.
"네가 공을 이해했다면 그것은 공이 아니다. 단지 말을 이해한 것이다.
한국 김치를 먹어본 적이 있느냐? 김치 맛은 아주 맵다.
그러나 실제 먹어 보기 전까지는 그 '맵다' 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완전히 알 수 없다.
자, 그런 사람들에게 내가 김치 맛을 보여주지.
'악! 매워!'
(허문명 글, 숭산 큰 스님의 웃음과 삶과 가르침『삶의 나침반2』 열림원, p. 168.
수행에 대해 현란한 이론을 말하고 신박한 방법을 아무리 자세히 설명한다 해도, 입실점검을 통해 본인 스스로 직접 체득해 나가는 방법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끊임없이 화두 의심을 유지하게 하는 데도 입실점검보다 좋은 방법은 없다. 입실 때마다 화두에 대한 경계나 견해를 제시해야 하므로 원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화두에 대한 의심을 멈출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근기根機에 따라 힌트가 주어지기는 하지만, 입실점검을 통해 직접적이고 세부적인 지도를 받으며 화두를 투과해보면 저절로 알게 되고, 그 맛을 한 번 보면 막연함에서 벗어나게 된다. 화두는 이렇게 드는 것이라는 백 마디 말보다는 한번 투과해보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공부하는 법도 스스로 깨우치게 되고 흥미도 잃지 않게 된다. 그 의미도 희미해져 버렸지만, 단번에 확철대오廓徹大悟(?)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수많은 작은 깨달음들을 경험하며 반드시 큰 깨달음에 도달하게 된다.
화두 참구는 활쏘기와 같다. 과녁을 향해 화살을 날리고 날리며, 과녁에 얼마나 가까이 갔는지를 수련하면, 이전보다 더 정확히 화살을 날릴 수 있게 된다. 어떤 경계를 제시했을 때 그 경계에 대한 평가를 듣거나 혹은 그 경계가 아니라고 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가 수월해진다는 것이다. 잘못된 경계에 막혀 나아가지 못하고 막혀 있을 때 “그 경계는 버리라!”는 그 말 한마디에 망설임 없이 오롯이 다른 경계를 참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생각의 폭이 넓어지고 새로운 세계가 열리면서 선입견 없이 사물을 대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지혜의 발현發顯일 것이다.
부연하자면, 화두 하나를 오래 갖고 있는 경우, 자칫 잘못하면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 아니라, 화두를 외우고만 있거나 무기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화두에 의심을 하면서 앉아 있어야지, 무심히 선정에 들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앉아 있다 보면 건강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화두 타파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그리고 순간순간 깨어 있으려면 화두 하나를 입실점검 없이 무심히 들고 있는 것보다는, 입실점검을 해야 한다는 약간의 스트레스를 가지고 화두를 들고, 쥐어짜서라도 경계를 내어 그때그때 점검받는 것이 공부에는 도움이 된다. 그러다 화두가 타파되면 통쾌함과 상쾌함으로 보상받고 또 다른 익숙하지 않은 화두에 도전하는 조화로운 공부 방법이라고 하겠다. 임제종을 송대 가장 유력한 선종 종파로 성장시킨 검증된 방법이기도 하다.
선도회에서는 <無>자 화두를 3차에 걸쳐 점검한다. 굳이 정의하자면 ‘시작하는 사람들을 위한 화두들’에서는 ‘평등계’의 경계를 참구하고,『무문관』첫 번째 점검 시에는 ‘차별계’의 경계를 참구한다. 그리고『무문관』재독과정에서는 다음과 같이 ‘중도’의 경계를 참구한다.
1. 석가는 ‘일체중생실유불성’이라고 했으나 조주는 ‘구자무불성’이라 외쳤다. 누가 옳은가?
2. 조주는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 하는 물음에 왜 ‘무無’라고 답했을까?
3. 다시 ‘여러분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 하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무엇이라 답하겠는가?
4. 끝으로 역대 조사들이 각각 나름대로 ‘조주무자’에 대해 한 마디씩 했는데 이 경계들은 서로 다른 것인가 같은 것인가?
이렇게 철저히 투과하고 나니 조주의 마음을, 대혜 선사의 마음을 바로 체득하게 되었다.
태백산은 암컷인가 수컷인가. (南陽慧忠)
6) 화두 <無>와 그 외 화두들
정성본鄭性本 스님은 그의 책『무문관無門關』에서 화두 <無>와 그 외外 화두들에 대해 기술하였다. 제 1칙 조주 <無>는 번뇌 망념의 중생심에서 벗어나 불심을 체득하는 견성성불을 위한 공안이고, 제 2칙에서 48칙까지는 모범이 되는 사례와 판례들을 깊이 사유하여 정법의 안목을 갖추게 하는 공안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간화선의 수행체계는 조주의 무자화두 참구와 공안 공부라는 두 가지 골격으로 이루어진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조주의 <무>자 공안을 참구하여 번뇌 망념의 중생심에서 각자의 근원적인 본래심을 깨닫는 <무>자 공안을 참구하는 방편과 대승불교 경전과 선승들의 어록 등에 전하는 불교사상과 수많은 법문, 선문답 등의 다양한 사례와 판례를 깊이 사유(看)하여 정법의 안목을 체득하고 많은 지혜를 구족하는 공안공부를 병행하는 수행인 것이다. (무문혜개無門慧開, 정성본鄭性本 역주譯註,「무문관에 대하여 」『무문관無門關』 p. 361.)
화두 <無>가 번뇌 망상을 쉬게 하고 생각을 지워 각자의 본래심을 깨닫는 과정이라면, <無> 아닌 다른 화두들은 일상생활 속에 일어나는 모든 상황에 대처 할 수 있는 지혜를 길러 준다는 것이다. 즉, 정법의 안목을 갖추는 동시에, 지혜를 터득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는 것이다.
종달 노사님은 ‘공안을 보는 때 그것에 체당體當하여야 하는 것이지 이론으로서는 통치 못한다. 다시 말하면 공안의 줄거리의 중심점을 잡아서 그와 한 몸이 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화두 <無>의 이치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셨다.
사실상 1,700 공안의 중심점은 <무>하나로 통한다. 진리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1,700 공안을 내세웠을까. 그것은 우리들의 일상생활이 천 가지 만 가지 차별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희익李喜益 저著,『선禪과 과학科學』p. 62.)
물론 화두 <無> 하나를 투과했다고 소위 본래면목을 완전히 체득했다고 할 수는 없다. 필자의 경우 다른 화두들을 투과하는 과정들을 통해 모든 의심과 미심쩍은 부분들이 상쇄되는 것을 경험하였다.
세상의 모든 매사가 선각자들의 체험과 깨달음으로 제시한 생활의 지혜를 배우고 익혀서 우리들 각자의 실생활에 지혜롭게 편리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자동차의 운전을 배우고 익혀서 생활에 편리하게 이용하는 것이나, 컴퓨터, 전화기, 복사기 등등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새롭게 배우고 익혀 체득한 後得智로서 생활의 지혜를 구족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정성본, 정신문화연구원,「간화선의 본질과 수행구조」. )
법경 법사님은 ‘무문관은 첫 번째 <趙州無字>가 전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며 나머지 47칙은 모두 이 <趙州無字>를 철저히 투과했는지를 다시 점검하기 위해 있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화두 <無>는 체体, 근본이 되는 것이고 다른 화두들은 용用, 즉 그것의 활용인 것이다. 화두들은 서로 소통하면서 각자의 특징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한국불교에서는 고려시대 普照知訥과 慧諶등 修禪社의 定慧結社 이후로 간화선의 수행체계와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면서도 주로 無字 公案을 참구하는 선수행이 중심이 되고 있고, 주지나 조실이 語錄이나『벽암록』『무문관』등을 提唱하여 正法眼目을 갖추는 看經과 看話의 본질적인 公案공부는 등한시 되고 있다. 不立文字, 敎外別傳의 의미를 잘 못 이해한 正法의 眼目없는 禪師들이 경전이나 어록, 공안집을 제대로 후학들에게 가르치지도 못하고, 학인들이 경전이나 어록 등을 읽고 보는 것조차도 못하게 하여 불법의 본질과 정신을 모르는 불교인들을 만들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불법의 본질과 정신을 철저히 교육을 통해서 배우고 익히지 못한 불교인은 자기 자신이 불교인으로서 올바른 안목을 갖춘 수행을 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참된 불교의 정신과 가치관을 토대로 지혜로운 삶과 인격형성을 할 수 없으며, 또한 중생구제의 보살도를 실행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정성본, 정신문화연구원,「간화선의 본질과 수행구조」. )
필자의 경우 처음 화두 <無>를 참구할 때는 껄끄럽기도 하고 잘 들리지도 않는 멋없는 화두라고 생각했었는데, 모든 화두를 투과하고 나니 <無>만큼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없는 담백한 화두가 없었다. 화두 <無>의 진면목은 다른 화두들을 다 투과한 다음에야 드러나는 것이다. 왜 종달 노사님이 ‘간신히 趙州無字를 얻어 평생을 쓰고도 다 못 쓰고 가노라!’고 하셨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화두 <無>는 처음이자 마지막 화두였던 것이다.
19세기 이후 힌두교의 전통 속에서 탄생한 성자들은 진아眞我를 찾으라고 역설하였다. 먼저 남인도 따밀 지역의 대표적인 힌두교 성자로 활동한 라마나 마하르시(1879~1950)가 있다. 그가 제시한 자아탐구라는 방법은 선종에서 제시한 화두와 비슷한 방법이라서 일부 불교도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그보다는 그가 제시한 진아라는 개념이 불교에서 주장하는 무아와 사실상 동일하다는 점이야말로 연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라마나 마하르시는 진아를 찾고 나면 진아는 무無임을 알게 된다고 주장했으나 그의 진아는 결국 붓다의 무아인 것이다.
북인도의 대표적인 힌두교 성자인 마하라지(1897~1981)는 진아라는 개념도 방해물에 불과하다며 곧바로 무無를 찾을 것을 주장했다. 필자가 보기에는 마하라지가 주장하는 ‘아我도 세계도 모두 없는 절대 무의 경지’는 바로 붓다가 주장한 제법무아의 경지인 것이다. (방경일 지음,『초기불교 vs 선불교』pp. 144~145.)
마하르시는 진아를 찾고 나면 진아는 무無임을 알게 된다고 하였고, 마하라지는 진아라는 개념도 방해물에 불과하다며 곧바로 무無를 찾을 것을 주장하였다는데, 그 개념이야 어찌 되었건 ‘아我도 세계도 모두 없는 절대 무의 경지’가 바로 화두 <無>인 것이다.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의 설법에서 시작된 무無가 화두 <無>로 완성되었다. 무無의 역사다.
화엄華嚴에서는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라고 하였다. 이는 가깝게는 손이나 귀, 발 등이 그 자체로 오롯이 인체의 축소판이라는 원리나,『홀로그램 우주』에서 이야기하는 ‘부분이 전체를 반영하고, 또한 전체가 부분을 반영한다’는 홀로그램 이론과도 통한다.
내가 30년 전 참선하기 전에는 산을 보면 산이었고 물을 보면 물이었다.
그런데 후에 훌륭한 스승을 만나 깨침에 들고 보니
산을 보아도 산이 아니었고 물을 보아도 물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이제 정말 깨침을 이루고 보니 전과 같이 산은 그대로 산이었고 물은 그대로 물이었다.
대중들이여! 이 세 가지의 견해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만약 이를 터득한 사람이 있다면 나와 같은 경지에 있다고 하겠다.
7) 화두는 단지 도구
많은 화두를 참구하고 투과하다 보면 화두에 대한 나름의 기본 개념도 생긴다. 화두의 구조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종국에 모든 화두를 다 풀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화두를 투과하여 본래면목을 깨달았다고 하여 모든 화두에 통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화두도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앞 장에서 살펴보았듯 같은 화두라도 선지식 사이에는 그 경지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화두는 다만 깨달음으로 가는 수단이지 깨달음 자체는 아니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화두의 견해를 통해 그 사람의 수행정도나 성향은 알 수 있을지 모르지만, 화두 경계를 가지고 깨달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재단裁斷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화두는 도구이지 깨달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화두의 경계를 아는 데에만 목적을 두고 화두 투과하는데 너무 집착할 것은 아니다. 그 보다는 그 과정을 더 중요시해야 한다. 화두를 의심하고 견해를 세우면서 사고의 폭을 넓히고 그러므로 서 기존에 자기를 얽매던 구조화된 관념이나 개념들을 깨고 모든 사물이나 사상事象들을 유연하게 보는 것이 중요하다.
간화선을 하면 모든 것을 화두 경계로 대결하고 해결하려는 화두 병에 걸리기 쉬운데 화두는 다만 깨닫기 위함이지 잘할 것은 아니다. 다만 깨달음의 척도가 된다는 것인데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화두에 집중하고 그것을 투과하는 과정 자체를 즐겨야 한다는 말이다.
화두를 참구하고 투과하면 실체가 없는 본래면목이 바로 드러나는 지는 확실치 않으나, 화두를 공부하다 보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이나 선입견 또는 편견 등이 해체되어 매사에 집착하지 않게 되는 것은 맞는 것 같다. 인식구조의 해체는 선종이 요구하는 여실지견如實知見, 즉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한다. 객관적인 대상도 그리고 자기 자신까지도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 것이다. 선적으로 말하면 모든 일에 생각 없이 무심히 보고 무심하게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모든 의심이 사라지고 종국에는 깨달음을 얻어 대자유인이 된다.
은산철벽으로 인한 심신의 고통이 끝없이 가중되더라도 오로지 화두의심에만 집중하여 철벽을 폭파시킬 기세로 끝까지 밀고 나가면, 어느 순간 드디어 철벽이 무너진다. 과거의 업장이 무너져 내리는 그 마지막 순간에 일어나는 현상 또한 다양하다. 몸에 심한 진동을 일으키는 사람도 있고, 쩌렁쩌렁 고함을 지르는 사람도 있고, 대성통곡을 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절정의 체험을 거치고 나면 앞서의 모든 억압이 단박에 해체되고 그간의 고통이 거짓말처럼 사라지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화두타파(話頭打破)’라고 한다. 화두가 타파되고 나면, 그때 온몸은 깃털처럼 가벼워지고 마음은 끝없는 환희에 젖는다.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일체의 분별을 뛰어넘어 온 우주와 하나 된 듯한 일체감과 평온함을 느끼면서 행복해한다. 이런 환희심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한자경(이화여대) Ja-Kyoung Han (Ehwa Woman's Univ.)「간화선의 유식학적 이해, An Understanding of Ganhwa Seon from the Perspective of the Consciousness-Only School」) 제3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간화선과 불교교학, Ganhwa Seon in the History of Buddhist Thought> Day 1, 2012.6.23~24, 동국대학교 국제선센터, 불교학술원 종학연구소, p. 147.)
8) 입실入室 지도指導
우리는 입실 점검을 하면서 본인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참구해서 보편적인 전형적인 경계에 이르는지 알게 된다. 몰랐던 자기 자신에 대해 여러 방면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 지도를 하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참구하고 어떻게 사고하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자기에 대해서 알게 되고 동시에 남에 대해서도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공부나 사회적인 접근 방법이 아닌 진실로 온 몸을 다해 뱉어 내는 것이기 때문에 학문적인 접근과는 많이 다르다. 물론 대부분 비슷한 측면도 있겠지만 그것도 점검의 풀(Pool)을 조망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으로 그 확신이 다르다. 의심 없는 거의 100%에 가까운 확신인 것이다.
중생이 조사가 되고 부처가 되어 불국토를 이루는 일이 그리 만만한 작업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