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동학농민운동 기출문제 (2006.14번) 문항 관련해서 궁금한 점이 있어서 질문드립니다. 1. (다) 부분 순서 설명해주시면서 서양까지 배척한다고 나오면 동학농민운동 이전으로 생각하라고 말씀해주셨는데 이때 올려주신 보론에 동학농민군 4대강령 사료를 보면 3번에 “축멸양왜”라고 여기도 서양이 들어가있는 거 같아서요.. 2. (마)의 내용을 실현하기위한 기구에서 교정청이라고 하면 아예 틀리는 말일까용..? 3. 2012년 1차 21번문항에서 나오는 요구들 같은 경우는 고부봉기시기에 요구한 것들인가요?? 또 이후에 전운사와 균전사 갑오개혁시기에 둘다 폐지하게 된 게 맞을까요..??
3. 2012년 1차 21번문항에서 나오는 요구들 같은 경우는 고부봉기시기에 요구한 것들인가요?? 또 이후에 전운사와 균전사 갑오개혁시기에 둘다 폐지하게 된 게 맞을까요..?? - 이들에 대한 불만과 폐지 요구는 고부 농민 봉기 이전(사발통문 단계)부터 이미 존재하였으나, 조직적이고 공식적인 개혁 요구로 분출된 것은 백산 집회 이후 제1차 봉기 과정에서 더욱 명확해졌다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 고부 농민 봉기 및 준비 단계 (1893년 11월 ~ 1894년 1월) 전운사와 균전사의 폐단은 고부 봉기의 직접적인 배경 중 하나였습니다. 배경: 당시 쌀과 곡식의 집산지였던 고부는 전운사와 균전사의 부정과 부패가 특히 심하였습니다. 사발통문(1893. 11.): 고부 봉기 전 작성된 사발통문에는 이미 "전운사(轉運司)를 혁파할 것"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즉, 농민들은 봉기 이전부터 이 기구들을 수탈의 핵심으로 지목하고 있었습니다.
2. 백산 집회 및 제1차 봉기 단계 (1894년 3월 ~ ) 고부 봉기가 안핵사 이용태의 탄압으로 인해 전국적인 농민 전쟁으로 확대되면서, 요구 사항은 더욱 체계화되었습니다. 공식화: 고부라는 지역적 한계를 벗어나 '호남창의대장소'를 설치하고 지휘 체계를 갖추면서, 전운사와 균전사의 혁파는 농민군의 핵심적인 정치·경제적 개혁 강령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당~
cf) 둘 다 갑오개혁 때 폐지된것 맞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의 요구를 수용한것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ㅎㅎㅎ네!! 감사합니다!!! 하나만 더 질문 드리겠습니다,,,, ! 09 1차 22 문항 (다) 사료에서 난의 우두머리가 돈을 거두는 일을 금지하라고 하고 이어서 농민들이 요즘 향회의 독촉으로 힘들다 이러는데 그렇다면 이 시기의 향회 = 민란 주도층으로 구성 인가요..?? ㅜ 임술농민봉기 민란주도층이 향회 장악하고 결국 향회를 통해 농민들 괴롭혔다 (?)라는 소리를 하고 싶은 건가 싶어서요..!
네 맞습니다. 다만, 지배층의 시각에서 비판적으로 서술된 글이라 지방민이 자치적으로 장악한 일부 지역의 향회를 부정적으로 묘사한것이지요.
19세기에 이르러 상당 수 지역에서 잔반, 농민 계층이 향회 조직을 장악하고 통문을 돌려 의견을 모으고, 수령이나 감사에게 공식적인 소장을 제출하는 등 힙법적인 절차를 추구하는 경우가 많았음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임술농민봉기는 단순히 우발적인 폭동이 아니라, 지방 자치적으로 민중의 역량이 점차 성장해 가고 있었던것의 결과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향회는 부당한 안건이 생기면 통문을 돌리고 회의를 소집하여 이를 토의하여 의견을 결집한 다음 수령에게 소(訴)를 내고 그래도 안 되면 감사에게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즉 향회는 일단 사안의 부당성이 나타나면 적법적인 절차에 따라 항의하는 형식을 밟아나갔던 것이다. 이것은 임술민란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앞에서 임술민란이 우발적으로 일어났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향회의 활동은 민중들이 무조건 무력으로만 사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수령들의 탐학을 견제하려는 노력을 간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합법적인 청원 운동이 수령이나 감사의 거부로 좌절될 때, 민중들은 비로소 무력 봉기라는 최후의 수단을 선택하게 되었다. 따라서 임술민란은 결코 우발적인 폭동이 아니라, 합법적인 투쟁의 연장선상에서 폭발한 조직적인 항거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첫댓글 안녕하세요~
좋은 질문 갑사합니다^^
1. 1. (다) 부분 순서 설명해주시면서 서양까지 배척한다고 나오면 동학농민운동 이전으로 생각하라고 말씀해주셨는데 이때 올려주신 보론에 동학농민군 4대강령 사료를 보면 3번에 “축멸양왜”라고 여기도 서양이 들어가있는 거 같아서요..
- 아하! 그건, 사료가 잘 안떠오를 때 일종의 변칙술(?)로 말씀드린겁니다. 4대강령에도 축멸양왜라는 표현이 나오지요. 괜시리 헷갈리게 해드린것 같기도 해 송구합니다;;
2. (마)의 내용을 실현하기위한 기구에서 교정청이라고 하면 아예 틀리는 말일까용..?
- (마)의 '모든 행정에 협력할 것'이라는 문구는 주체가 농민이 되어야하므로 교정청도 가능 할 수 있겠지만, 집강소가 더 적합합니다.
3. 2012년 1차 21번문항에서 나오는 요구들 같은 경우는 고부봉기시기에 요구한 것들인가요?? 또 이후에 전운사와 균전사 갑오개혁시기에 둘다 폐지하게 된 게 맞을까요..??
- 이들에 대한 불만과 폐지 요구는 고부 농민 봉기 이전(사발통문 단계)부터 이미 존재하였으나, 조직적이고 공식적인 개혁 요구로 분출된 것은 백산 집회 이후 제1차 봉기 과정에서 더욱 명확해졌다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 고부 농민 봉기 및 준비 단계 (1893년 11월 ~ 1894년 1월)
전운사와 균전사의 폐단은 고부 봉기의 직접적인 배경 중 하나였습니다.
배경: 당시 쌀과 곡식의 집산지였던 고부는 전운사와 균전사의 부정과 부패가 특히 심하였습니다.
사발통문(1893. 11.): 고부 봉기 전 작성된 사발통문에는 이미 "전운사(轉運司)를 혁파할 것"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즉, 농민들은 봉기 이전부터 이 기구들을 수탈의 핵심으로 지목하고 있었습니다.
2. 백산 집회 및 제1차 봉기 단계 (1894년 3월 ~ )
고부 봉기가 안핵사 이용태의 탄압으로 인해 전국적인 농민 전쟁으로 확대되면서, 요구 사항은 더욱 체계화되었습니다.
공식화: 고부라는 지역적 한계를 벗어나 '호남창의대장소'를 설치하고 지휘 체계를 갖추면서, 전운사와 균전사의 혁파는 농민군의 핵심적인 정치·경제적 개혁 강령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당~
cf) 둘 다 갑오개혁 때 폐지된것 맞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의 요구를 수용한것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ㅎㅎㅎ네!! 감사합니다!!! 하나만 더 질문 드리겠습니다,,,, ! 09 1차 22 문항 (다) 사료에서 난의 우두머리가 돈을 거두는 일을 금지하라고 하고 이어서 농민들이 요즘 향회의 독촉으로 힘들다 이러는데 그렇다면 이 시기의 향회 = 민란 주도층으로 구성 인가요..?? ㅜ
임술농민봉기 민란주도층이 향회 장악하고 결국 향회를 통해 농민들 괴롭혔다 (?)라는 소리를 하고 싶은 건가 싶어서요..!
네 맞습니다. 다만, 지배층의 시각에서 비판적으로 서술된 글이라 지방민이 자치적으로 장악한 일부 지역의 향회를 부정적으로 묘사한것이지요.
19세기에 이르러 상당 수 지역에서 잔반, 농민 계층이 향회 조직을 장악하고 통문을 돌려 의견을 모으고, 수령이나 감사에게 공식적인 소장을 제출하는 등 힙법적인 절차를 추구하는 경우가 많았음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임술농민봉기는 단순히 우발적인 폭동이 아니라, 지방 자치적으로 민중의 역량이 점차 성장해 가고 있었던것의 결과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cf) 물론 이러한 주장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도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을 담은 책인 『반역의 한국사』의 내용 일부를 소개해드립니다.
"향회는 부당한 안건이 생기면 통문을 돌리고 회의를 소집하여 이를 토의하여 의견을 결집한 다음 수령에게 소(訴)를 내고 그래도 안 되면 감사에게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즉 향회는 일단 사안의 부당성이 나타나면 적법적인 절차에 따라 항의하는 형식을 밟아나갔던 것이다. 이것은 임술민란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앞에서 임술민란이 우발적으로 일어났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향회의 활동은 민중들이 무조건 무력으로만 사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수령들의 탐학을 견제하려는 노력을 간과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합법적인 청원 운동이 수령이나 감사의 거부로 좌절될 때, 민중들은 비로소 무력 봉기라는 최후의 수단을 선택하게 되었다. 따라서 임술민란은 결코 우발적인 폭동이 아니라, 합법적인 투쟁의 연장선상에서 폭발한 조직적인 항거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아 네!!! 자세한 설명 감사드립니다!!!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