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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남해안의 여러 곳을 돌며 왜구와 치열한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던 기억이 생생한 신립이었다. 그때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왜구의 대다수는 단순한 부랑자나 굶주림에 쫓기다 해적이 되어 칼을 휘두르게 된 자들이 부지기수였으나, 개중에는 죄를 지어 쫓겨났거나 전쟁에서 패하여 갈 곳이 없거나 이름을 드러내지 못한 하급무사들이 일부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어떻게 되었던 이미 정식으로 무술 훈련을 몸에 익힌 자들이었다. 이미 싸움을 충분하리만치 경험해 본 자들이었다. 이런 부류들을 낭인, 혹은 향사라 불렀다. 비가 오면 무사는 나막신을 신을 수 있었지만, 이들은 맨발로 걸어야만 했다. 게다가 무사가 있는 자리에는 그들은 함께 앉을 수도 없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그들은 점점 도회지를 떠나게 되었고, 마침내 한적하다 못해 외진 대마도(쓰시마)까지 흘러오게 되었으며, 왜구(해적)의 무리에 끼게 되면서 저들을 이끄는 선봉이 되었던 것이다. 칼을 마구 휘두르며 그간의 울분을 풀었고, 약탈한 물품들로 비록 좁은 대마도 안에서였지만 나름의 풍요로운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의 가세로 왜구의 전투력은 급격하게 향상되었고, 그들의 횡포는 더더욱 커져서 마침내 조선과 멀리 명나라 조정까지 두려움에 떨게 하였던 것이다.
하여 조선조정은 이들을 토벌하고자 신립을 파견하였던 것이다. 전면전을 벌이면서 신립은 이미 몇 차례 이들 낭인들과 일대일 대결을 벌인 적이 있었다. 비록 전투 중이었지만 왜국의 무사와 조선의 무장이 정식 무술을 겨루었다는 뜻이다.
낭인들은 날이 좁고 긴 매우 가벼운 칼을 쓰고 있었다. 칼을 뽑는데 조차 어떤 수순이 있어보였다. 정형화된 도식처럼 느껴졌지만 그들의 칼솜씨는 화려했다. 상대를 베어 쓰러트리는데 있어 어떤 미학을 찾고 있는 듯 했다. 상대를 제압하되 어떤 수순을 거쳐 멋을 한껏 부려야만 진정한 승리라 생각하는 듯 했다.
하지만 신립 자신의 이제껏 몸에 밴 칼솜씨는 저들에 비해 지극히 단순했다. 그저 단순하게 칼집에서 검을 빼서는 이리저리 휘둘러 내려치고, 아주 작은 적의 허점이라도 발견하면 주저 없이 찔러가는 것이 전부였다. 칼을 뽑아든 만큼 어떻게 하든 신속하게 적을 제압해 버리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저 단순하고 소박하고 명쾌하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놈들은 베지만 우리는 찌른다.’
문득 왜구들이 전면전에 앞세운다는 조총에 대해서도 생각이 났다.
신립은 이미 조총을 보았었고, 조총이 사용된 전투를 치러본 경험도 있었고 자신이 직접 그 조총의 위력을 시험해 보기도 하였었다.
여진 오랑캐 이탕개를 토벌하러 갔을 때의 일이었다. 오랑캐들이 명나라를 통해 들여 온 조총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불과 십여 자루도 안 되는 숫자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처음엔 천둥소리 같은 뇌성벽력에 일부 병사들이 잠시 당황한 것이 사실이었지만, 아군이 가지고 있는 최상의 무기인 편전에 비하면 굉음 소리만 요란했을 뿐, 어느 하나 편전에 비해 나은 것이 없어 보였다. 오랑캐를 무찌르고 나서 노획한 조총을 포로를 시켜 시험해 보았으나, 실로 조잡하고 사용하는데 있어 절차와 시간이 매우 번거로운 것이 도무지 효율성이 없어 보였다. 비라도 내리게 되면 그야말로 무용지물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때에 비해 지금 쳐들어 온 왜구들이 잘 훈련시킨 새로운 조총부대를 전면에 내세워 엄청난 위력의 전투력을 과시하고 있다고 하나, 제대로 훈련된 정예 기마대를 앞세워 빠르게 내달리는 마상에서 편전을 날리고 저들을 진중으로 육박해 들어가 칼을 휘둘러댄다면 결코 제압하지 못할 왜구의 군세는 절대 아닐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전투에 있어서도 절대 다를 것이 없다. 저들의 칼솜씨처럼 공격성. 잔인성. 단칼에 베어버리겠다는 단호함으로 화려하게 전투에 뛰어들겠지만, 날을 잘 세운 검으로 단숨에 저들의 허점을 찔러간다면 승리는 당연히 우리의 몫이 아니겠는가. 전투는 술(術)이 아니다. 전투는 바로 쾌(快)이다. 단순하고 빠른 것이야말로 바로 전투의 생명이다.’
새로운 전투에 대한 기대가 그의 가슴을 마구 요동치게 하고 있었다.
조선 제일의 무장 신립은 어느새 붉게 충혈 된 눈을 들어 용상의 임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8
“나리. 배가 건너오고 있습니다. 이제 머지않아 마지막 배가 건너갈 것입니다. 저희 상단의 양행수가 지금 도착하는 배에서 내리게 되면 이번계책을 시작하는 것이 되겠으며, 마지막 배가 떠나면 곧 나리께서 주막으로 가셔야만 합니다.”
“자네의 짐작이 들어맞았기를 바랄뿐일세. 지금으로선 우리가 세작들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을뿐더러 방비를 할 시간도 전혀 없음일세. 여기서 어떤 단초라도 나와서 세작들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만 있다면 좋겠네.”
“소인이 부산진을 떠나 꼬박 나흘을 말을 달려 한양으로 올라오는 동안에 저희 상단이나 교류가 있는 상단을 통해 말을 바꾸어 얻어 타고 오는 과정에서도 어느 누구에게도 부산에서의 일을 입 밖에 내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어떤 파발이나 장계도 저 보다 빠를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단 한번.......... 여기 광나루를 건너 마침내 한양에 들게 된 것이지요. 곧 바로 마포나루로 갈까 하였으나 날이 저물고 있었고 마침 마지막 배가 오갈 무렵임을 평소 알았기에 일단 여기 광나루를 건너서 저희 상단과 교류가 있는 배편을 마련하여 서둘러 마포까지 한강을 거슬러 내려갈 요량이었습니다. 배편을 알아보고 있던 중에 바로 저기 눈앞에 보이는 주막에 저희 마포상단의 행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건어물과 젓갈을 싣고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 영춘과 평창 일대로 장사를 떠나는 중에 때가 갈수기 인지라 줄어든 수량으로 인해 골을 헤치며 뱃길을 열어줄 노련한 뱃사람 하나를 구하는 중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몹시 허기가 졌던 저는 국밥 한 그릇을 말아 허겁지겁 요기를 하면서 이번 장삿길을 멈추고 되돌아가기를 요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한번 상단이 장사 길을 떠나면 짧게는 두세 달에서 많게는 반년이나 일 년씩 걸리는 행차기에 나선 길을 되돌린다는 것이 그리 요원한 상황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여 저는 부득이 제가 지금 급하게 부산진에서 올라왔으며 그저 그 지역에 커다란 변고가 생겼다고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 이상의 세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습니다. 하여 곧바로 상단의 배를 되돌려 마포로 갔던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껏 겪은 일의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새벽에 저를 암습하려던 자들은 분명 제가 부산에서 서둘러 올라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저를 분명하게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하여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같은 사실을 누군가가 알 수 있는 길은......... 아마도 여기 이곳 주막에서 누군가가 엿들었거나, 이미 저 같은 사람을 살피고 있었다는 경우일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만난 행수라는 사람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인가?”
“새벽에 세작을 쫓아갔던 방행수가 그 분입니다. 이제껏 저희 상단을 지켜 오신 훌륭한 분입니다. 옳고 그른 것에 대해서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여기 주막이거나 이곳을 기웃거리는 사람이라는 말인데........”
“광나루를 건너 온 양 행수가 말을 흘릴 것입니다. 그리고 나리께서 가셔서 분위기를 살피시면 될 것입니다. 한성부의 장 군관께서 여기 북쪽 언덕의 광진원(廣津院)으로 가셨습니다. 주막의 동향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을 곧 물색해서 오실 것입니다. 원에 머물고 있는 군사도 모두 동원 할 것입니다. 무엇인가 저들의 움직임이 포착될 때까지 저와 임 군관께서 언제든 뛰어들 준비를 갖추고 여기에서 계속 주시를 할 것입니다. 혹시 저들 중에 세작이 있는 것이라면 이미 저에 대해서는 알아볼 수 있다 싶어서 부득이 나리를 위험한 자리로 보내드리게 되었으니 부디 조심하시고, 무엇인가 알아냈다 싶으시면 곧바로 신호를 보내십시오. 소인이 달려가 나리를 보호 할 것입니다.”
“어허. 내 자네의 말은 모두 잘 알아들었네만....... 말끝마다 나리라 하지 좀 마시게. 아무리 좋게 보아도 자네랑 나랑 예닐곱 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 보이네만 어쩌자고 자꾸 그렇게 불편하게 부르시는가?”
스물여덟의 양함(梁諴)은 꼬박꼬박 나리라 부르는 이 젊은이의 호칭이 영 거북스러웠던 것이다. 자신을 봉삼(峰三)이라 소개한 이 남빛 잠삼 차림의 청년은 어딘가 모르게 마포상단의 한 장사꾼으로 보기에는 의젓하고 무엇인가 기품이 흐르고 있었다.
“소인이야 미천한 신분 이옵고.......... 얼마 전까지 함창 현감을 지내시다 새 임지로 부임하기 위해 한양에 오셨다 들었습니다. 좌상대감님과 권율 부사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자니, 나리께서 장차 큰일을 하실 장래가 아주 유망한 훌륭한 젊은 분이라 생각되었습니다. 하여 나리라 불러 드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음............... ”
저만치 산언덕 아래의 주막을 한동안 뚫어져라 살피던 양함은 시선을 거두어 이번에는 봉삼을 예리한 눈빛으로 살피고 있었다. 오랫동안 쳐다보는 그런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봉삼이 벌겋게 얼굴을 붉히며 입을 열었다.
“나...........리. 어쩌자고 소신을 그리 쳐다보시는 것이옵니까?”
“............. 대직약굴(大直若屈) 이라 했네. 자네는 이를 어찌 생각하는가?”
뜻하지 않은 질문에 순간 봉삼의 표정이 그대로 굳어졌다.
그러나 양함의 시선은 그런 봉삼의 표정에서 떠나지를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자신의 얼굴에 박힌 양함의 날카로운 시선을 봉삼도 이젠 결코 피하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 주위를 무겁게 내리누를 즈음 차분한 목소리로 봉삼이 입을 열었다.
“대의(大義)에 뜻을 둔 사람은 소절(小節)에 구애 받아서는 아니 될 것이며, 곧은 사람이라 할 그런 길을 걸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의리에도 대의가 있고 소의가 있으며, 용기에도 대용과 소용이 있을 뿐만 아니라, 곧은 절의에도 대절과 소절이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결국, 자기 일신의 이익과 영달을 위하여 행하는 것은 소의이며 소용이며 소절이고, 만천하의 대다수 백성을 위하고자 함은 대의요, 대용이며 대절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정작 아무리 그 말과 표현이 옳지 못한 명분을 그럴싸하게 포장한다 하여도, 그 속셈이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집착한 것이라 한다면......... 그것은 소절이라 하겠습니다.”
봉삼의 답변에 양함은 별로 놀라는 기색도 아니었다. 어찌 본다면 이미 그럴 줄 알고 있었다는 표정이었다. 무거운 침묵으로 봉삼을 쳐다보던 양함이 여전히 시선을 거두지 않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어찌하다 보니 이른 나이에 벼슬길에 올랐던 것은 사실이네. 하여 정치라는 것에 대해 무엇이라 말할 처지가 못 된다는 것을 나 스스로도 잘 알고 있네. 조정에 나아가 대신들이 모여서 과연 무엇을 어떻게 행하는 지에 대하여서도 나는 아직 잘 모른다네. 다시 말하자면 정치라는 것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말일세.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정치라는 것에 대해 모른다는 표현 또한 옳지 않다는 생각일세. 이 나라의 모든 백성은 이미 원하던 원치 않던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이미 정치의 한복판에 선 것이 아니겠는가? 자네나 나나 정치와 전혀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을 터............. 하지만 이 순간에 나는 분명.......... 조정이 돌아가는 꼴이.......... 정치판에 환멸을 느끼고 있네. 오늘 새벽에 자네와 나는 좌상대감이며 도승지며 권율부사며 백대붕 처사며 장세강 나리와 경응순 왜학통사들도 만나 보았네. 나는 그분들에게서 환멸을 느끼고 있는 정치판에 대한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네. 그렇다면 자네는 그분들을 어떻게 보았는지가 몹시 궁금하네.”
이번에도 봉삼은 무거운 침묵으로 한참의 시간을 보낸 후에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옛 성현께서 이르시길, 무릇 정치란 노(老)와 장(壯)과 청(靑)이 슬기롭게 조화를 이룰 때 참으로 아름다운 빛을 발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조화에 몇 가지 구태의연한 문제점들이 생겨나는 바, 그중 하나를 예로 든다면.......... 나이든 정치인들이 사회적인 갈등과 이해를 조정하는데 노련함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노정객이 되면 피할 수 없이 스스로의 아집과 편협성에 젖게 되어서 역동성과 다양성을 가진 새로운 생각의 젊은 정치가 자연스럽게 흘러드는 데에 있어 가장 큰 장애가 된다는 것입니다. 낙후와 침체와....... 마침내 고인 물은 썩는 경우와 같은 누를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여, 오늘 뵈었던 그 분들이라면............ 고인 물웅덩이에 상류에서 그나마 신선한 물을 끊임없이 공급하고 있는 중요한 분들이라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그 같은 답변을 미리 짐작하기라도 했던 듯, 양함은 무표정한 시선으로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던 양함이 한참을 기다리다가 고개를 돌리며 툭 하고 던지듯 한마디를 했다.
“자네. 반상인가?”
뜬금없이 갑자기 이것이 무슨 질문인가?
봉삼은 숨소리를 죽이며 자신의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어찌 양함이 물어오는 질문의 뜻을 모르겠는가? 봉삼은 주막으로 시선을 돌린 양함의 옆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아무런 답도 하지 않고 있었다.
“권 부사께서 지나는 말로 그러시더군. 자네의 낯이 어딘가 모르게 익다고......... 저자거리에서 마구 자란 행실이 결코 아니라고 말일세. 옆에서 김여물 장군이 내게 말씀하셨네. 자네를 보건데 틀림없는 반상일 것이라고. 어떤 이유에서건 드러내지 못하는 신분일 것이라고. 실은........ 나도 그렇게 느꼈네.............. 만덕 노인의 손자라는 것은 나도 믿네. 다만....... 만덕 노인이 거두기 전의 자네........... 아비와 어미에 대해 말하지 못할 이유가 있다면 그 점에 대해서는 더는 묻지 않겠네. 다만............ 자네 반상인가?”
‘자네 반상인가?’
‘자네 반상인가?’
‘반상?’
‘내가?’
‘반상이 무엇인가?’
‘지금 반상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나를 품에서 놓지 않았던 어미와 나에게 자상하게 글을 가르쳐 주던 아비.’
‘나를 매우 엄하게 닦달 하셨던 또 다른 아비와 나만 보면 늘 하염없이 눈물 흘리던 또 다른 어미.’
‘내가 양반인가?’
‘나는 만덕할아버지의 손자이니까 중인 신분이 아니었던가?’
‘아님 상놈?’
온갖 상념들이 뇌리를 흩고 지나가고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이내 또 다시 양함의 착잡한 표정과 공허한 음성이 폐부를 뚫고 들어왔다.
‘자네 반상인가?’
저도 모르게 두 뺨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 다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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