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용대의 등산칼럼>
알파인 클럽
알파인 클럽(Alpine Club)은 보통은 산악회(山岳會)를 뜻하지만, 좁은 의미로는 세계최초의 산악회인 “영국 산악회”를 가리킨다. 'alpine'이란 말은 ‘알프스 산의’ 또는 ‘높은 산의’란 의미로 쓰이며 'alpine club'이라고 하면 적어도 눈과 얼음이 덮인 알프스와 같은 고산에서 등산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조직이라 할 수 있다.
우리주변에는 산악회라는 이름을 붙인 수많은 조직이 난립하고 있다. 과장된 표현을 하자면 산악인의 숫자만큼 흔해빠진 것이 산악회다. 한국최대의 산악단체인 대한산악연맹 산하의 가맹 산악회 숫자만 해도 5000개라고 한다. 사람 둘만 모여도 산악회요 세 사람만 모여도 산악회다. 심지어는 서로의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하루정도 모여서 등산을 끝내고 미련 없이 헤어지는 인터넷동호인들 모임조차도 산악회라는 이름을 즐겨 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포털사이트 다음(Daum)이나 네이버(Naver)의 카페를 이용하는 산악단체만 해도 10만을 상회한다고 한다. 선거운동의 일환으로 정치권에서 대중동원 수단으로 활용하는 조직의 이름도 산악회다. 또 특정대상의 산에 손님을 모아 돈을 받고 등산안내를 하는 안내등산도 산악회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심지어는 동네 뒷산 약수터에서 모이는 사람끼리도 산악회라는 이름을 붙여 친목활동을 한다. 현실이 이렇다보니 지금 우리나라는 산악회 전성시대를 맞고 있는 셈이다. 등산인구 1800만에 산악회만 10만이 넘는 불가사의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우리사회에는 취미가 같은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동호회성격의 크고 작은 모임이 많다. 축구동호회. 골프 동호회. 자전거동호회 등 이런 모임들은 들고 나가기가 자유롭지만 전통과 골격이 제대로 갖추어진 산악회는 한 번 발을 내디디면 덫에 걸린 짐승처럼 빠져나오기가 힘들다. 특히 보다 전문적이고 기술적인 등반을 추구하며 생명의 줄을 함께 묶고 위험을 극복하며 극한의 모험을 추구하는 성격의 모임일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이들이 한 번 인연의 끈을 묶으면 일생동안 관계를 지속하는 특징을 가진다.
산악회라는 이름이 역사의 무대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세기 중반에 처음 생긴 영국의 “알파인 클럽(The Alpine Club)”을 꼽을 수 있다. 영국 사람들은 알프스에서 활동한 그들의 고산경험을 알리고 토론 할 대중적인 포럼의 필요성을 느껴 산악회를 만든다.
영국에서 세계최초로 창립된 알파인클럽은 1857년12월 22일에 창립하였으며, 154년이라는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영국은 산악회 명칭에 ‘영국’이라는 국명(國名)을 넣지 않고 “The Alpine Club”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렇게 한 이유는 “등산은 곧 영국이며 알파인 클럽은 영국 고유의 것이다“라는 등산 종주국(宗主國)다운 그들 나름의 자부심 때문이다. 여러 국가의 산악회이름을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미국은American Alpine Club. 스위스는 Schweizen Alpen Club. 일본은Japan Alpine Club. 한국은 Corean Alpine Club 또는 Korea Alpine Federation이라고 국가이름을 넣어 부르고 있다. 이처럼 영국 산악회만을 빼고는 세계 주요 등산국가 모두가 국명을 넣어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알파인클럽은 초기부터 등반업적을 인정받은 사람들에게만 문호를 개방했고, 회원 모두가 대학을 졸업한 중산층 출신들로 폐쇄적인 운영을 했다. 회원들 대부분이 알프스 토박이 가이드에 의지하여 정상정복에 성공했지만 초창기 회원들은 그 시대 최고의 등반가 집단이었다.
알파인클럽은 창립 초기부터 막강한 재력과 레슬리 스티븐. 존볼. 존 틴들. 무어. 윔퍼. 머메리 등 쟁쟁한 인물들이 유럽 알프스 전 지역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황금기를 빛냈다. 이들은 등산 활동을 스포츠로 승격시킨 원조이기도하다.
윌슨의 베터호른 등정이후 10년간 지속된 황금시대 등반업적의 대부분이 알파인클럽회원과 토박이가이드의 협력아래 140개 처녀봉이 영국인들 주도아래 등정되었으니 유럽알프스는 그들의 놀이터나 다름없었으며, 알파인클럽은 자연 영국의 자부심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유럽의 처녀봉 대부분을 독점적으로 등정한 후 ‘유럽의 놀이터(Playground of Europe)’에서 ‘눈의 거처(Abode of Snow)’로 옮겨가는데도 일조를 하였다.
또한 알파인클럽은 1863년에 세계최초로 그들의 등반활동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알파인저널(The Alpine Journal)이란 간행물을 지속적으로 발간하고 있다. 이후 각국산악회가 저널을 발간하고 있다. 지금 외형만 그럴싸한 수많은 모임이 산악회라는 이름을 쓰고 있지만 회지(會誌) 한권 제대로 펴내지 못하는 단체가 많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기록문화의 바탕이 없는 산악회를 산악회라 할 수 있겠는가.
지금 정기간행물을 펴내는 몇몇 산악단체들을 살펴보면 우리산악계의 미래가 어둡지만은 않다. 대한산악연맹의<산악연감>과<Korean Alpine News>. 한국산악회의<한국산악>. 한국대학산악연맹의<엑셀시오>. 부산마운틴 포럼의 <마운틴 포럼>등의 지속적인 발간은 우리산악문화의 미래를 밝게 하고 있다.
알파인 클럽에 뒤이어 오스트리아 산악회(O"sterreicher Alpen Klub.)가 두 번째(1862년)로, 스위스 산악회가 세 번째(1863년)로 창립 된다. 뒤이어 같은 해에 이탈리아 산악회(Club Alpino Italino)가, 1869년에는 독일 산악회(Deutscher Alpenverein.), 1874년에는 프랑스(Club Alpin Fransais.) 등 유럽열강들이 차례로 산악회를 창립한다. 20세기 초 알프스 미등의 북벽에 새로운 길을 열어나가는 과정에는 이들 여러 나라 산악회들이 국가주의를 앞세워 선의의 경쟁을 벌인 결과다. 그대표적인 예가 마터호른. 아이거. 그랑드조라스 등이다.
1930년대 등산운동은 국가 간에 민족주의가 강하게 작용했던 시기다. 올림픽에 출전한 운동선수가 자국의 국위선양을 표방하고 그라운드에서 뛰었듯이 유럽산악인들은 자국민족의 우월성을 앞세워 초등경쟁에 뛰어들었으며 정상등정이 자기 성취이기 이전에 조국이 요구하는 과업을 수행하는 것으로 여겼다.
1950-64년 사이 히말라야 자이언트 14개봉을 놓고 세계의 열강들이 등정 경쟁을 벌일 때도 알프스 미등의 벽에서 일어났던 경쟁적인 양상을 그대로 반복한다. 당시 한 국가의 대표 급 산악회들은 국가의 재정지원을 바탕으로 히말라야를 무대로 활동했다. 대원들은 조국을 위해 영토 확장전쟁에 참전한 병사처럼 행동했고 고산등반은 군사작전처럼 행해졌다. 영국의 32년에 걸친 에베레스트 원정 사에서 볼 수 있듯이 원정팀의 대장들은 존 헌트대령. 찰스 브루스준장. 에드워드 노튼 중장과 같은 군지희관을 경험한 인물들이 지휘를 맡았다.
산악활동발전에 동력이 되어온 산악회는 산악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닌 곳인가. 처음 들어 올 때는 낮선 곳이지만 들어오고 난 후에는 형제 이상의 끈끈함으로 뭉쳐지는 조직이 산악회다. 이토록 정신적인 유대감이 돈독해지는 이유는 그들은 줄을 함께 묶고 위험을 공유하는 자일샤프트(Seilschaft)의 관계로 발전하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산악회는 성차별 없이 남. 여가 함께 활동을 하고 있지만 여성들만으로 조직된 산악회도 있다. 이런 조직은 금남(禁男)의 구역이다. 여성들은 여성 산악회도 가입할 수 있고 남자들이 있는 산악회에도 가입할 수 있을 만치 선택의 폭이 넓지만 어찌된 일인지 남성이 여성들의 모임에는 가입할 수 없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남성이 여성 산악회에 가입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으니 이건 분명 성차별로 볼 수밖에 없다. 성차별에 항거하여 만든 여성 산악회가 역설적으로 성차별에 앞장서고 있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오랜 시간동안 사회 여러 분야에서 그랬듯이 등반의 세계에서도 여성이 인정을 받지 못한 채 배척당한 힘든 시기를 거쳐야했다.
여성 산악회가 탄생한 역사적인배경을 살펴보면 그 동기가 성차별에 대한 반작용에서 출발했다. 선진산악국가인 영국과 스위스에서 그 예를 살펴볼 수 있다.
일찍이 영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 여권신장을 급속히 추진시켰고, 유럽대륙과는 다르게 영국여성들은 당시 스포츠를 활발하게 즐겼지만 여성등반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상황이었으며 여성은 알파인 클럽회원이 되지 못했다. 여자는 부엌을 벗어나면 안 된다는 식이었다. 결국 여성들은 남자들이 만든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1907년 영국숙녀산악회(The Ladies Alpine Club)를 탄생시킨다.
당시 페미니즘 작가로 활동한 버지니아 울프와 같은 유명작가의 자살배경에는 유서에서 언급했듯이 성차별이 원인이기도 했다. 능력 있는 한 여성을 죽음으로 떨어지게 할 만치 여성들이 발붙이기가 힘든 사회였다. 버지니아 울프는 산악문학의 명저 “유럽의 놀이터(Playground of Europe)’를 저술했고, 황금기 알프스의 처녀봉들을 초등정하고, 알파인클럽회장을 역임한 유명작가 레슬리 스티븐의 딸이었다. 아마 그녀가 아버지를 따라 등산을 했더라면 자살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1863년 세계에서 세 번째로 산악회를 만든 스위스 산악회도 1907년 여성을 회원으로 받지 않겠다는 결정까지 내려 결국 1918년 ‘스위스 여성 산악클럽’이 따로 만들어졌다. 스위스는 산악클럽이 비교적 일찍 만들어진 것에 비해 여성들이 투표권을 얻게 된 것은 1971년에 뒤늦게 이루어진 나라다.
9월은 오곡이 무르익는 풍요로운 결실의 계절 이다.
매년 9월 15일이면 한국의 두 거대산악회 대한산악연맹과 한국산악회가 ‘산악인의 날’과 ‘창립일’을 기리기 위한행사를 한다. 두 단체 모두 산악운동발전에 기여한 유공자를 격려하고 선후배회원들이 함께 자리를 하며 교분을 나눈다.
대한산악연맹에서 제정한 ‘산악인의 날’은 한국대가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1977년 9월 15일을 기념하기 위해 산악인의 날로 제정했다.
조국광복과 더불어 1945년 9월 15일에 창립된 한국산악회는 올해로 66주년을 맞는 뜻 깊은 기념일이다.
백년 이백년 후까지도 두 단체 모두가 전통과 결실을 기리는 이런 행사를 지속적으로 이어갔으면 한다.
첫댓글 우리 한국의 산악회도 좋은 저널을 발간하였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