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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리도 복없는 황제, 궁예
철원은 겨울에 가야 제맛이다
춥다춥다해도 철원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추운 축에 드는 동네이니 날짜만 잘(?) 맞추면 제대로 된 추위를 맛볼 수 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철새들이다
겨울 철원에 가야만 볼 수 있는 새들은 특별하니까
출발할 때 아이들에게 말을 해두었다
오늘하고 내일 돌아보면 궁예가 참 지지리도 복이 없는 황제라는 생각이 들것이라고.
하지만 풍성하게 아이들은 내린 눈에 더 관심을 갖는다
가르치려 드는 사람에게는 내 말 안 듣고 눈장난이나 하는 아이들이 얄미울지 몰라도 나에게는 그것도 공부하는 과정이다
무슨 공부든지 재미가 절반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공부를 늘 반에서 중간에서 맴돌았나?
철원읍에 들어서면서 태봉이라는 간판을 찾아보라고 했다.
이제는 철원사람들이 궁예 역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다고,
그래서 태봉제라는 축제도 한다고,
그래서 태봉이라는 나라를 간판으로 많이 쓰는 것 같다고,
적어도 철원에서 만큼은 궁예나라를 정신나간 사람이 저지른 미친짓 정도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고,
철원에서는 궁예가 명예를 많이 회복한 것 같다
태봉마트 태봉부동산 등등을 아이들이 찾아냈다
그리고 군탄리를 지나면서 마을이름에 얽힌 유래를 알려주었다
왕건이 이끄는 반란군과 궁예가 이끄는 황제군대가 벌인 전쟁에서 패한 황제군대가 더 이상 희망이 없어지자
궁예는 흩어져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그때 군인들이 더 이상 나라를 지켜 낼수 없게 되었음을 한탄했다고 하여 동네 이름이 군탄리가 되었다고 한다
첫번째로 갈 곳인 도피안사에 갔다
피안에 도달했다고 도피안사라고 한다
궁예가 철조비로자나불상을 조성했다고 전하는 곳,
그때 철원사람 천오백명이 시주를 했다는 곳
그래서 궁예가 황제가 되는 절차를 밟아갔다는 곳
하지만 그 어디에도 기록은 없다
사람들 입으로만 전해질 뿐이다
비로자나불상 뒤에 새겨진 명문에도 궁예와 관련된 말은 없다
단지 일제강점기때까지만 해도 원주지방에 철로 만든 불상이 많았다는 것,
궁예가 세달사에서 나와 양길 밑에서 힘을 키우던 석남사가 원주 치악산에 있었다는 것,
그러니 비로자나불이 궁예와 분명 관계가 있을 것이라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대웅전 앞에 서 있는 석탑은 탑몸이 전형적인 신라탑인데 반해 기단은 팔각형이다
사각형인 신라탑에서 변형된 것이다
신라후기이거나 고려초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그리고 고석정 유원지에서 안보관광지 들어가는 절차를 밟았다.
고석정만 구경하려면 주차비만 내고 안보관광지를 구경하려면 입장료를 내면 되는 것으로 바뀌었다
수속도 2층에서 받더니 이젠 1층에서 했다.
건물입구에 두루미와 재두루미 박제가 있다.
아이들이 탄성을 질렀다
생각보다 두루미가 크다고
나중에 가다보면 진짜 두루미가 있을 거라고 볼 수 있다고
어쩌면 두루미들이 우리를 구경하는 걸 볼 수도 있을 거라고 했다.
정말 어떤때는 내가 두루미를 구경하는지 수십마리 두루미가 우리를 구경하는지 헛갈릴 때가 있다.
겨울에는 두시가 마지막 입장시간이다
주차장 정문에 모두 모여서 안내차를 따라 민통선 안으로 들어갔다
역시 새들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하늘에 독수리 떼가 빙빙 돌고 있었다 진짜 독수리가,
다섯 마리니까 독수리 5형제
같이 간 선생님도 처음 본단다
길가 전봇대에 날아와 앉는 좀 큰새.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황조롱이거나 매 종류였다.
독수리나 매 같은 맹금류가 있다는 것은 먹이 사슬이 형성되었다는 증거이다
겨울 생태계가 살아있는 철원이다
그리고 들판에 노니는 두루미도 보았다
제 2땅굴에 갈때마다 의문이 든다
내 키가 183인데 굴이 낮아서 정상적으로는 못걷는다
안전모를 써도 천장에 튀어나오는 돌들 때문에 머리를 부딪힌다
그런데 안내하는 사람은 한 시간에 몇 만명이 통과하고 장비도 갈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몇 만명은 광산에서 쓰는 레일차로 가는 것 아니면 불가능할것같다
군사장비도 그 정도로는 통과 불가다
탱크는 고사하고 차도 못간다 가장 작은 승용차도 겨우다
총든 군인이나 겨우 지나갈 이런 땅굴을 뭣하러 팠을까
총만든 군인 보내서 뭘 어쩔라고?
들키지 않았더라면 더 넓혀서 탱크도 지나가게 하려고 했을까?
그랬다면 처음부터 넓게 뚫지?
우매한 내 머리로는 이해가 잘 안 간다
작년 겨울엔 월정역 옆에 철의 삼각지 전망대로 갔는데 이번엔 새로 지은 곳으로 갔다
주차장에 내리니 모로레일을 타란다
그런데 입장료가 너무 비쌌다
걸어서 올라가도 충분한 거리건만 약간 실망이다
한 번은 재미삼아 타 보겠는데 몇 분 되지도 않을 거리를 모노레일까지 탄다는 것은 좀 그렇다
하지만 산꼭대기에 지은 전망대라 그런지 풍천원 들판이 훤히 다 내려다 보였다.
철의 삼각지 전망대는 나무에 가려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는데
남북으로 4킬로미터 동서로 3킬로미터 사각형으로 만든 태봉국 황궁터가 한 눈에 다 내려다 보였다.
토성이었으니 성벽 윤곽이나 건물 흔적은 하나도 없지만 저 들판에 황궁이 있었겠구나 짐작이 갔다
그런데 일제는 그 황궁터 위로 경원선 철로를 놓았다
황궁터에는 일제강점기에 국보로 지정한 석등도 있었다는데
일제가 저지른 만행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황궁위로 철로를 놓는 만행까지...
진짜 나쁜 사람들이다
그러나 황궁 남쪽벽은 남방한계선에 북쪽 벽은 북방한계선에 막혀 있다 남쪽에서도 북쪽에서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북쪽에서는 북방한계선을 휴전선 가까이 많이 당겼다고는 해도 황궁 일부만 북방한계선 밖일테니 발굴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조사를 할 수 없는 곳.
궁예 역사는 분단이라는 역사에게 다시 한 번 침탈 당하고 만 것이다
남북 4킬로미터 동서 3킬로미터면 둘레 길이가 14킬로미터다
결코 작은 성이 아니다
그것도 산에 기대지 않고 온전히 들판에 지은 사각형 성이다
그만큼 궁예는 자신있었던 것이다
백제와 신라는 물론이고 잃어버린 고구려 땅을 되찾아서 건설할 대제국 황궁이었다
적이 쳐들오면 산으로 도망치기 쉬운 째째한 구조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안에서 일어난 반란군에게는 너무도 약한 성이었다
다음엔 그림 잘그리는 분을 모시고 가서 태봉국 황궁을 그려달라고 해야겠다
나오는 길은 옛날 철원 시가지를 지난다
폭격맞아 부서진 농산물 검사소, 부서진 금융조합, 부서진 얼음창고. 부서진 제사공장, 부서진 병원, 부서진 경찰서, 부서지고 지뢰밭이 된 초등학교 부서진 침례교회 부서지고 뼈대만 덩그러니 남은 노동당사
철원이 정말 잘 살았던 동네가 분명한 증거가 바로 얼음 창고다
여름에 얼음을 사서 먹을 정도였으니 당연히 부자동네가 아닌가
철원역에 근무하는 사람이 서울역보다 수가 더 많았다고 하니 철원이 얼마나 큰 도시였는지 짐작이 간다
한 해가 풍년이면 7년을 먹는다는 곳이 철원이었다.
하지만 전쟁은 이곳을 폐허로 만들고 말았다.
전쟁. 내가 겪어보지는 않았지만 이 곳에 오면 전쟁이 참 아프다
노동당사는 러시아식 공법으로 지은 건물이다
철근 콘크리트 골조가 아니라 벽돌로만 쌓은 것으로 계단이나 현관 기둥에만 철근이 보인다
해방조국에서 친일파와 민족만역자들을 처단한 장소였다
이곳에 들어오면 온갖 모진 대접을 받았다고 하는데 잡범은 경찰서로 갔을테니 여기에 어떤 사람들이 왔을지 쉽게 짐작이 간다
남한은 토지 개혁을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했다
결국 있는 놈들끼리 해먹은 돈 잔치였다
하지만 북한은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했다
일제때 민족을 팔고 민중을 빨아 모은 땅을 국가가 모두 빼앗아 공정하게 그냥 나눠준것이다
진짜 개혁이다
그러니 북한 사람들이 김일성 정권을 지지하는 것은 당연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토지 개혁을 한다면
모든 재산을 다 국가가 몰수해서 공평하게 나누어 준다면 싫다고 할 사람이 많을까 좋다고 할 사람이 많을까?
아마도 싫다고 할 사람 10퍼센트 좋다고 할사람 90퍼센트 일것이다
물론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흔드는 엄청난 혼란이 올 테니 실현 가능성은 없는 일이지만
직탕폭포는 언제봐도 신기하다
강이 뚝 끊어져 내려 앉은 직탕폭포를 만든 한탄강도 신기하다
화산이 폭발해서 생긴 섬인 제주도나 울릉도와는 달리 철원은 이미 산이 있던 곳에 화산이 폭발했기 때문에 넓게 펼쳐진 들판 가운데 산이 불룩불룩 솟은 모양이 되었다.
바람을 막아주는 산에 기대서 집을 짓고 살 수 있는 것이었다.
눈밭에서 하는 시체놀이는 철원에서 얻어가는 덤이다
옷이야 젖던지 말던지 마냥 신이 났다
아무도 피해 갈 수 없는 글쓰기 시간
이번 주제는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위해서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이다
이번에 처음 온 아이가 둘 이어서 걱정을 했는데
그 가운데 한 아이가 울었다.
그러자 옆에 다른 아이들이 이구동성으로 울어야 잘 쓴다고...
누군 지리산에서 울었고. 누군 통영갔을때 울었고, 누군 보길도에서 울었고,
그런데 울고 나면 그 다음부터 잘 쓰게 된다고...위로를 하는 것인지 격려를 하는 것인지...
언제나 그렇듯이 끝장을 보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끝까지 다 써야 잠을 자는.그래서 모두가 다 완성했다
쉽지 않지만 늘 그렇듯이 다들 완성했다.
아이가 쓰기 힘들어하면 나는 더 힘들다
나랑 공부해본 적이 없는 아이는 도와줄 방향을 정하는 데도 시간이 필요하니 머리가 아파진다
그래도 늘 그렇듯이 모두 세 바닥을 채워서 다 썼다
힘들게 공부했으니 좀 놀아야 잠자리가 즐겁다
그 가운데서도 역시 불꽃 놀이가 최고다
마을 안에 있는 숙소이거나 다름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는 곳이 아니면 불꽃놀이를 꼭 한다
다음 날 아침
기대 했던 대로 철원 날씨였다.
고석정 구경을 하고 오는 그 잠깐 사이인데도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상큼하고 매운 그래서 칼날같은 바람, 역시 겨울 철원이 주는 매력은 특별하다
파주골은 궁예가 왕건에게 패하여 도망갔다는 곳이다
원래는 패주골이었는데 파주골로 변했다고 한다
한 쪽은 깎아지른 절벽 한 쪽은 개천이다.
매복공격을 하기에 안성 맞춤이다
이곳에서 궁예는 왕건이 펼친 매복공격에 당했을 것이다
이 파주골만 봐도 궁예가 한 순간에 쫓겨나서 어이없이 죽은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항서밭골은 궁예가 왕건에게 항복하는 글을 바쳤다는 곳이다
산정호수 아래 지금은 정항동이라는 표석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곳이지만
항서를 바쳤다는 것은 정식으로 전쟁을 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명성산은 궁예가 마지막을 항전했던 곳이라고 한다
그러다가 궁예가 죽자 그가 타던 말이 슬피 울었다고 해서 울음산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산 이름이 한자로 '울명'자를 써서 명성산이 된 것이다.
나라가 망해서 궁예가 슬피울자 군사들이 따라울었다고 명성산이라고도하는데 어쨌든 명성산이라는 이름이 생긴 유래는 궁예와 태봉국이 관련되어 있다.
산정호수에서 일동으로 넘어가는 여우고개는 명성산에 진을 치고 있는 궁예군대를 왕건 군사들이 여우처럼 나타나 엿보았다고 생긴 이름이란다
겨울 산정호수에는 썰매도 빌려주고 스케이트도 빌려준다
그냥 지나갈 수 없다
궁예와 관련된 최남단 유적은 포천에 있는 반월산성이다
성까지 찻길이 있지만 눈이 와서 걸어 올라갔다.
눈길을 걸어가는 것도 제법 운치가 있다.
이 성에서 왕건이 이끄는 반란군과 궁예가 이끄는 황군이 싸웠다고 한다
그런데 파주골과 명성산은 이 곳보다 훨씬 북쪽이다
이곳에서 전열을 가다듬었거나 원병을 맞이하여 왕건을 밀고 올라 갔던 것이 아닐까 짐작을 해본다
반월산성 남쪽 기슭에 있는 궁예미륵은 궁예가 다시 재림하기를 바라는 백성들 마음이 담긴 것이라고 한다
구읍리 포천 향교 뒤에 버려지듯이 있는 이 미륵불은 내 키보다 많이 크지도 않다.
돌은 바스라져서 형체도 점점 없어져 가는데 눈위에 찍힌 발자국이 지금도 사람들이 찾아온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궁예가 건설하려고 했던 공평무사하고 만민평등한 세상은 궁예가 죽은 918년에서 천년도 더 지나서 이루어졌다
이미 천년 전에 누구나 재주만 있으면 출신을 가리지 않고 등용하고
썩어빠진 불교를 극복하고 미륵사상으로 세상을 다스리려고 했던 꿈은 기득권을 지키려는 호족들에 의해서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중국연호가 아닌 무태나 수덕만세를 비롯한 독자적인 연호를 썼고 고구려 땅을 회복하여 대제국을 건설하려는 포부도 물거품이 되었다
그리고 뒷 사람들은 그 황제에게 흠 잡을 것이 없으니 미치광이라고 했다
도적놈들에게 '야! 이 도적놈들아 도적질 하지말고 착하게 살아라' 하면 어느 도적놈이 좋아하겠는가
썩을 불교가 잘못되었고 백성을 착취하는 호족이 잘못되었다고 하니 그 잘못된 놈들이 뭉쳐서 바른 사람을 쫓아낸 것이다
그 반란이 얼마나 명분이 없었으면 사흘뒤에 환선길이. 보름뒤에 이흔암이, 9월에는 청주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명주군수 김순식은 왕씨성을 내리면서까지 회유 해야 했다.
그리고 왕건은 반란이 두려워 힘있는 호족딸들과 결혼까지 해야 했다
하지만 역사는 이겨서 살아남은 자가 쓰는 것이니 이겨서 왕이된 왕건에게 유리하게 써야 했다
특별한 잘못이 없는 궁예는 미치광이가 되었다
하긴 도적놈 소굴에 들어가서 '이 도적놈들아' 하는 사람이 보통사람은 분명 아니니까
철원을 다녀오면 궁예는 지금도 있다는 생각을 참 많이 한다
혹시 바른 말하는 사람이 미치광이 취급을 받는 경우는 없는지, 나는 내 이익을 위해서 정의를 배반하지 않는지 늘 돌아볼 일이다
신라왕자로 태어났으나 버림 받고
왕이 되었으나 미치광이라고 쫓겨난 왕
죽어서 역사에서도 대접받지 못하는 왕
그가 세운 황궁마저도 후손들 욕심때문에 망가져버린 왕
참 지지리도 복도 없는 왕 궁예다
첫댓글 매번 역사기행을 다녀온 지친아이들에게 "무엇을 보았니?" "무엇이 가장 기억에 남니?" 하고 물어보곤 하였답니다. 아이들은 많은 것을 기억해 내지 못하지만 서로 이야기 하면서 서로 자기이야기 끊었다고 싸웁니다. 분명 본것이 많기에 싸우겠죠..^^ 비하인드 스토리도 이야기 해주곤 하였는데.. 샘의 기행기는 정말 재미있네요... 역사기행을 같이 간 현장에 있는 듯.. 책으로 엮어도 되겠습니다. 연말에는 책으로 묶어 기행수료선물로 주어도 좋겠어요.. 존경합니다. 샘의 아이들에 대한 사랑,,, 2월기행 언제 가냐고 야단들입니다... 에고에고,,,,^^현지소윤 접수요!!
ㅎㅎ현지 소윤이가 서로 말 끊지 말라고 싸우는 모습이 눈에 선 하네요 ㅎㅎ귀여워 둘 자리 맡아 놓을게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민우 기억하시나요? 올해는 울 민우도 종종 부탁드리려고 합니다. 저도 같이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지만, 민우에게 선생님과 친해질 수 있는 기회를 빼앗을 것 같아, 그냥 참습니다. ㅠ 참,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무자년 새해에는 가까서 늘 기웃거리겠습니다. ㅎㅎ
네 푸른이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