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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계사를 배울 때 기원전 5,000년부터 4,000년경부터 황하의 중하류 유역에서 농경문명이 일어났는데, 그것을 세계 4대문명 가운데 하나인 황하문명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어째서 황하일대가 동북 아시아 최고(最古)의 문명 발상지가 되었는가에 대해서 물어본다면, '그것은 좀 생각해봐야 한다'고 얼버무리는 사람도 있다.
고대문명의 발상지는 하나같이 강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우리가 오리엔트 문명이라 부르는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이 각각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그리고 나일강을 중심으로 일어났다면 동양에서는 인더스강을 중심으로 인도문명이 그리고 황하강을 중심으로 중국문명이 일어났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일찍이 왕정이 자리잡고 비교적 통일된 체제를 유지하였던 고대정권은 하나같이 강의 범람으로부터 백성을 지켜주는 재난해결사로서의 군주가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여러 민족의 흥망성쇠가 되풀이된 반면에 나일강의 홍수와 범람이 최대의 관심사가 되었던 이집트는 역사적 지속성을 유지하면서 고왕국 중왕국신왕국 시대로 이어졌다. 이것을 중국사에 비추어 생각한다면 황하강의 범람은 일찍이 심황오제(三皇五帝)의 신화로 시작되는 중국의 역사발전으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말이다. 지금도 장쩌민 주석이 지도하는 중국의 최대과제가 정치적으로는 개혁과 개방, 그리고 자본주의 시장경제 도입일지는 모르지만,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이어지는 홍수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아무리 경제발전을 해봐야 수마가 휩쓸고 지나가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기 때문이다. 지난 번에 TV를 보니 중국의 인민해방군이 홍수피해를 막기 위해서 대규모로 투입되는 장면을 보고 그때를 생각해 보았다.
삼황오제의 신화
고대 중국의 건국신화에는 황제(黃帝) 이전에 천황씨(天皇氏)지황씨(地皇氏)인황씨(人皇氏) 또는 복희씨(伏犧氏)신농씨(神農氏)수인씨(燧人氏)라는 삼황(三皇)이 있었다. 그들은 역할을 분담하여 중국문명의 기초를 닦았는데 예를 들어 신농씨(神農氏)는 농경을 발명하였고 수인씨(燧人氏)는 불을 발명하였고 복희씨(伏犧氏)는 수렵을 발명하였다.
이렇게 당시의 중국인들은 소수의 지배집단의 지도로 황하강의 수리(水利)를 최대한으로 이용하면서 문명을 일구어 나갔다. 즉 황하강 유역은 서쪽 내륙 사막지대로부터 편서풍을 타고 운반된 미립자가 퇴적된 아주 기름진 땅이었다. 비록 매년 봄만 되면 어김없이 중국대륙으로부터 누런 유해성 흙먼지가 한반도에 날아 들지만 말이다.
황제(黃帝) 다음으로 소호, 전욱, 제곡, 요, 순으로 이어지는 다섯 명의 임금이 중국을 다스렸는데, 이를 오제(五帝)라 한다. 사기(史記)에서는 소호를 빼고 그 자리에 황제(黃帝)를 넣기도 하는데, 오제 가운데 특히 마지막 두 임금 요(堯)와 순(舜)의 치세에는 태평성대가 이어졌다. 인(仁)을 바탕으로 하는 유교적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생각했던 공자가 '요(堯) 순(舜)의 시대'를 국가의 이상적인 모델로 삼은 것은 왕가의 혈통을 따지지 않고 요 임금이 순(舜)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며 순 임금 역시 우(禹) 임금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는데 이러한 선양이 이루어 진 것은 모두 그들의 치수사업에 비중을 크게 두었기 때문이다.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왕조의 세습이 이루어질 정도로 왕권이 강화되지 않은, 다시 말해서 원시국가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극단적인 예에 지나지 않지만 고대 신라에서는 화백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임금을 뽑았으나 무열왕에 이르러 왕권이 강화되자 아들인 문무왕에게 왕위를 물려줌으로써 이후 왕이 세습이 이루어졌던 것을 생각해보면 얼른 이해가 갈 것이다. 그리고 왕권강화의 배경으로는 삼한일통(三韓一統)이라는 정치 이데올로기와 이를 달성하기 위한 전쟁이 큰 몫을 하였지만 말이다.
이러한 왕위선양의 미덕에 관한 삼국지의 기사(記事)는 촉한의 황제 유비가 서기 223년에 오(吳)의 정벌에 실패하여 백제성 영안궁에서 숨을 거둘 때 임종을 지켜보던 제갈공명에게 이르기를 아들 유선(劉禪)이 황제의 재목이 못되거든 스스로 제위에 오르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어떻게 유선을 제치고 공명이 황제가 될 수 있었겠는가?
최초의 왕조 하나라
이와 같이 470여년을 지속해 온 최초의 고대국가 '하나라'도 기원전 1,500년경에 제17대 걸왕(桀王)을 끝으로 사직이 무너졌는데, 그들과 경쟁관계에 있었던 상족(商族)에 의해서 멸망을 당했으니 이것이 바로 은왕조(殷王朝)의 시작이다. 말희에게 흠뻑 빠져 '주지육림(酒池肉林)'의 설화를 남긴 걸왕은 은나라의 주왕(紂王)과 더불어 폭군의 대명사(桀紂)가 되었으며 이러한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여 중국을 물론 우리나라도 금상을 폐할 때 내세우는 명분으로 삼았다. 예를 들어 조선조의 두 차례의 반정, 즉 중종반정과 인조반정에서 쿠데타 세력들은 각각 연산군과 광해군을 폭정을 일삼은 걸주(桀紂)에 비유하였다.
은나라(殷)
기원전 16세기 경에 시작된 은왕조는 상족(商族)에 의해서 시작되었으므로 '상나라'라고도 한다. 명실공히 은왕조는 중국의 역사시대를 열었으니 갑골문자의 발명이 바로 그것이다. 즉, 농업과 군사문제를 비롯한 국가의 중대사를 신탁(神託)에 의해서 왕이 결정하는 소위 '신권정치시대'를 열었으며 그때 사용된 것이 바로 갑골문자였다.
갑골문자는 중국 최고의 상형문자이며 한자(漢字)의 조상이다. 국가 중대사를 모두 신탁에 의해서 결정을 내렸고 그것을 기록한 것이 갑골문인데, 은왕조의 다큐멘터리가 갑골문에 모두 기록하였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갑골문에 의하면 당시 산동반도(山東半島)에 자리잡고 있었던 강씨족(羌氏族) 포로 300여명을 한꺼번에 제물로 바쳤고 하는데 이는 은나라의 국세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은나라 시대의 GNP는 무척 낮았다. 왜냐하면 비록 청동기 시대였으나 일반 농민들은 아직 석기시대를 졸업하지 못하고 청동기는 일부 지배계급과 상류층의 전유물이었기 때문에 석기로 농사를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은나라 말기에도 하나라의 걸왕(桀王)과 마찬가지로 주왕(紂王)은 달기에게 흠뻑 빠져 나랏일을 멀리하고 폭정을 일삼았다. 이러한 현상에 고무된 서쪽의 주족(周族)은 기원전 10세기경에 들고 일어나 은왕조를 멸망시켰다.
그 과정에서 위수(渭水)에서 낚시줄을 드리우고 때를 기다리고 있던 여상(呂尙)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문왕에게 발탁되어 '목야(牧野)의 전투'에서 커다란 공을 세움으로써 주왕조(周王朝) 시대를 여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주의 문왕이 얼마나 기뻤는지 '선왕 태공(太公)이래로 기다리고 있었던 현자'라는 뜻으로 '태공망(太公望)'이라는 호칭을 주었다.
기원전 1121년 마침내 주나라의 무왕은 부왕(문왕)의 유지를 받들어 피폐해진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세움으로써 이제 중국은 '중원(中原)'과 '중화(中華)'라는 큰 틀을 형성하는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주나라(周)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주왕조의 특징은 '중원'과 '중화'라는 큰 틀을 형성하였다는 데에 있는데, 하나의 역사적 사실을 놓고 어째서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분석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주나라의 봉건제는 장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중세유럽의 그것과 다르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유럽에서는 각 제후들이 봉토(封土)를 받을 때 왕에 대한 충성을 전제로 하는 계약적인 봉건제(feudalism), 즉 댓가성 봉토라고 생각하면 되지만, 주나라의 경우는 혈연적 씨족제에 기초한 중국 특유의 독자적인 것이다.
중국은 최초의 통일국가였던 진나라 이후로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바탕으로 하였지만 지방호족들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정책을 써왔다. 이것이 나중에 후한말 원소(袁紹)를 비롯한 '군웅할거(群雄割據)'로 이어졌으며 역대 중국정권의 최대의 현안문제는 '지방호족 다독거리기'였다. 물론 봉건제는 아니었으나 1911년 10월 10일 신해혁명을 시발점으로 1912년 1월1일 쑨원(孫文)을 임시 대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이 탄생되었으나 개혁의 발목을 잡고 있었던 집단이 바로 지방호족과 군벌들이었다.
기원전 1121년 주나라의 무왕은 태공(太公) 이래의 숙원이었던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의 새 주인이 되었으나 새로운 영토를 통치함에 있어서 여러가지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영역의 확대는 필연적으로 인적자원의 확보가 전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던 주나라 왕실은 자기네 주족 이외의 여러 씨족들이 여전히 건재하고 있는데다가 비록 나라는 망했어도 은왕조의 귀족세력들을 다독거릴 필요가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그들을 모두 잡아다 처형하지 않는 한, 언제 국권회복운동을 일으킬지 몰랐으며 그들과의 제휴는 불가피하였다. 마치 퇴출된 기업의 정상적 경영까지는 어느 정도 그 기업의 임직원의 도움없이는 회복이 어려운 것과 같았다. 도움이 필요해서 물어보면 '알아서 잘들 해보슈'하면서 수수방관한다면 업무파악에 상당한 애를 먹기 마련이다.
이반된 민심을 수습하지 않는 한, 정상적인 국가경영이 어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주나라의 무왕은 은의 왕자인 녹부(祿父)에게 옛 영토를 다스리게 하고 제사도 허용하는 등 은왕조의 관례를 인정하는 회유책을 씀으로써 옛 은나라 백성들을 안심시키는 대신, 그가 엉뚱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자기 동생들을 감시자로 내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주나라 봉건제도의 시작이며 정치적으로 본다면 은왕조의 신권정치를 대신한 봉건제의 출발이었다.
또한 주나라 왕실은 임금자리에서 제외된 왕족들과 각 지방의 유력자에게도 봉토를 주면서 공납과 군역을 부과하였는데 주나라의 봉건제도는 주공의 시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주공은 갑자기 사망한 무왕의 뒤를 이어 어린 조카가 왕위에 오르자 그의 후견인 겸 섭정을 맡아 지방세력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봉건제도를 정착시켰던 것인데, 그는 제후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고 자치에 맡겼으며 정기적으로 충성도를 점검하기 위해서 제후들로 하여금 주왕실에 인사를 올리게 하였다. 봉토를 할당받은 제후들이 모처럼 왕실을 방문하는데 어찌 빈손으로 올 수 있겠는가? 제후들은 각자 자기 고장의 특산품 등을 수레 밑창이 꺼지도록 실고 왔는데, 이것이 바로 조공의 기원이다.
주나라의 쇠퇴
천하대세(天下大勢)가 합구필분(合久必分) 분구필합(分久必合)이라, 이제 본격적으로 흥망성쇠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통일된 지가 오래면 반드시 분열이 생기는 법인가? 아니면 마치 영원한 왕조는 존재하지 않는가?
기원전 8세기부터 3세기에 이르는 사이에 중원은 다시 혼란의 도가니에 빠지게 되었는데, 이는 후한(後漢)이 망하고 위촉오 삼국 시대 이후의 위(魏)에서 사마염의 진(晋)으로 대륙의 지배권이 넘어가는 과정에서의 극도의 혼란과 이후 남조와 북조계열의 국가들이 서로 혈투를 벌이는 사상 최대의 대혼란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주나라 쇠퇴에 이은 춘추전국시대의 혼란과 한나라 붕괴 이후 위진 남북조시대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강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던 정권의 붕괴는 어김없이 오랜 세월동안 전란에 휩쓸린다는 사실인데, 여기서도 어김없이 지방 호족들의 정치적 야심이 작용하였다. 비록 같은 경우라고 볼 수는 없지만 당나라 이후 송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까지의 각 지방의 절도사들이 실력을 겨룬 혼란도 마찬가지였다.
이 시대는 힘이 있는 제후가 서로 천하의 패권을 다투는 '춘추오패(春秋五覇)'와 '전국칠웅(戰國七雄)'의 군웅할거 시대였으며 전란의 시대를 통해서 중국은 제자백가(諸子百家)라고 하는 사상의 융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때 서쪽 저편에서는 그리스의 고전철학이 융성하여 서양철학의 기본골격이 형성되고 있었다.
참고로춘추(春秋)라는 말은 공자가 편찬한 사기(史記) '春秋(춘추)'에서 따온 말이며, 전국(戰國)은 그 시기에 활동했던 정치사상가의 책략이 기록된 '戰國策(전국책)'에서 후세의 사가들에 의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주나라의 봉건제도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중심형성을 가져다 주었는데, 다시 말해서 주나라의 천자(天子)는 하늘의 뜻에 따라 천하를 다스리며 제후들은 주나라 왕실을 '천자의 나라'로 섬겨야 하는 종법질서 속에서 각기 봉토를 다스림을 뜻하는 중화사상(中華思想)을 말한다. 이러한 중화사상은 나아가서 주나라 왕실을 받들고 오랑캐를 물리친다고 하는 '존왕양이(尊王攘夷)'라고 하는 중국의 전통적 사상으로 발전하였는데, 다시 말해서 중국민족은 그들 나름대로 '중화사상'과 '존왕양이'라는 가치기준, 즉 잣대를 만들어 놓고 마치 그리스신화의 '프로크루스테스'처럼 키가 침대보다 짧을 경우에는 몸을 잡아당겨 침대에 맞도록 하고, 반대로 길 경우에는 나머지 부분을 잘라버리는 자세로 주변 이민족들을 대했던 것이다. 이 무렵 '최초의 서양인'이라고 일컬어지는 그리스에서는 기원전 8세기 무렵에 호메로스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으며 호메로스는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를 통해서 그리스 우월적 대서사시를 썼던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주왕조의 지배는 약 250년 동안 지속되면서 은나라 시대와는 달리 석기시대를 완전히 졸업하고 본격적인 청동기 시대에 접어들었는데, 이 말은 단순히 도구의 재료가 돌이냐, 아니면 청동기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문명의 발전속도, 그리고 경제발전 속도에 가속이 붙기 시작함으로써 비로소 명실상부한 국가의 틀을 갖추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은나라 시대에는 경제성장율이 거의 무성장 속의 성장인데다가 만약 자연재해라도 일어나면 마이너스 성장을 하였으나, 이제는 금속기가 더 이상 희소가치를 가질 수 없게 되어 일반 서민들도 청동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말은 서민들이 거의 대부분이 종사하는 농업의 획기적인 발전과 농산물을 유통시키기 위한 상업, 그리고 그것을 유통시키기 위한 물류, 청동을 이용한 생활용품의 생산으로 기초적인 산업발전으로 이어졌다. 다시 말해서 본격적인 청동기 사용으로 주왕조 시대에 중국최초의 이노베이션이 도입되었다는 말이다.
경제와 문화가 발달하면서 차츰 국력도 강해졌는데, 이러한 현상은 제후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주나라의 GNP는 제후국의 그것과 합쳐진 것이기 때문에 제후국의 이탈은 주나라의 쇠퇴로 이어지게 되었다. 각지의 제후들은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나라와 충분히 맞설 수 있는 내부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감히 주나라 왕실에 대해서 맞서겠다고 나선 간 큰 제후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 간의 크기를 겨루어 보자고 나서는 제후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은나라 이래로 끊임없이 싸움을 벌였던 바깥 지역의 이민족들이 주나라 중기가 지나자 중원을 넘보면서 쳐들어왔다. 주나라가 튼튼한데 어찌 이민족이 침입한다는 말인가? 중화사상에 쩔은 그들의 표현대로 아무리 무식하고 난폭한 오랑캐라 할 지라도 무모한 전쟁을 일으킬 족속은 없다. 중국인들은 느슨해진 주나라 변방에 둥지를 틀기 시작한 이민족들을 춘추 전국 시대에 그들의 방위에 따라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 특히 우리 먼 조상들을 동쪽 오랑캐(東夷)라고 불렀다.
더욱이 설상가상으로 주나라의 제12 대 유왕(幽王)은 돌이킬 수 없는 실정(失政)을 저질렀는데, 그의 실정은 제후들로 하여금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못하는 결정적인 오점을 남겼는데, 그는 하나라의 걸왕(桀王), 은나라의 주왕(紂王)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포사'라는 여인에게 흠뻑 빠져 정사(政事)는 등한시하고 오로지 정사(情事)에만 몰두하여 천자로서의 체통에 흠집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웃겨 보려고 봉화(烽火)를 쓸데없이 올리는 등, 국가 경보통신망을 가지고 장난을 쳤다.
제후들이 변란이 일어난줄 알고 군대를 몰고 화급하게 달려 왔을 때, 유왕과 포사는 그 모습을 보고 깔깔 거렸으니 얼마나 황당하고 한심했을까?.... 아마 천자만 아니었으면 인간적으로 한 대 쥐어박고 싶었을 것이다. 더욱이 유왕은 포사의 농간에 빠져 왕비인 신후(申后)를 폐하고 그 자리에 그녀를 앉혔으며 포사가 낳은 아들을 태자로 봉하려고 하자, 태자책봉을 반대하는 반발세력이 북쪽의 이민족인 견융(犬戎)을 끌어들여 주 왕실을 전복시켰다. 기원전 770년 결국 유왕은 전사하고 수도인 호경(鎬京)이 함락되었다. 말희는 하나라를, 달기는 은나라를, 그리고 포사는 주나라를 말아먹은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던 것이다.
주나라는 이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유왕을 패사시키고 수도인 호경(鎬京) 점령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으나 견융(犬戎)은 정치에 별 관심이 없었는지 군대를 철수하여 자기네 땅으로 되돌아 갔다. 정작 어리둥절한 쪽은 주나라의 변방 제후들이었다. 그들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아무리 내부적인 여건이 성숙되었다고 하더라도 '내가 한번 주나라 왕실을 대신하여 나서보겠다'는 폭탄선언을 할 만큼 대담한 제후가 없었다. 만약 어느 누가 그러한 발언을 하였다면 '존왕양이(尊王攘夷)'의 근간을 뒤흔드는 만고의 역적이 되어 그나마 제후세계에서 왕따를 당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제후들은 주나라의 새로운 군주로 평왕을 내세우고 여전히 변함없는 충성을 다짐하면서 도읍을 호경의 동쪽 낙읍(洛邑, 洛陽)으로 옮겼는데, 동천(東遷)을 기준으로 동주시대(東周時代)가 열린 것이다.
유왕의 전사와 도읍의 천도로 주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이제 천자(天子)도 사람 나름이라는 생각이 서서히 제후들 사이에서 머리를 들기 시작하여 각지의 제후들이 중국의 패권을 놓고 다투게 되었는데, 역사에서는 주나라의 '동천'부터 진나라의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기까지의 550년간을 통털어 춘추전국시대라 한다.
춘추전국시대
제후들은 서로 존왕양이(尊王攘夷) 사상이 깊게 뿌리를 내린 중국사회에서 그래도 민심을 잃지 않으려고 이름 뿐인 주나라 왕실을 보호하겠다고 나섰다. 모두 '왕실과 종묘사직을 위한다'는 속이 다 들여다 보이는 명분을 내세웠던 것이다. 계속 주나라에 조공도 바치고 제후들도 왕에 대한 충성을 확인시켰다. 깍듯이 군신간의 예의를 갖추면서 비록 형식적인 것이지만 주나라 왕실을 통해서 각 제후국의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많은 제후국 가운데 <빅 5>가 있었는데, 그들을 바로 '춘추5패(春秋五覇)'라고 하며 제(齊)를 비롯하여 진(晋), 초(楚), 오(吳), 월(越)을 일컫는 말이다. 처음에는 정(鄭)나라가 잠깐 세력을 떨쳤으나 본격적인 패자의 시대는 제(齊)나라가 중원을 장악하면서부터이다. 특히 제나라의 경우에는 환공(桓公;재위 BC 685~643)이 북적(北狄)과 초(楚)의 침입을 물리침으로써 주나라 왕실과 다른 제후국들은 그들의 가장 든든한 보호자이며 제후국의 수장으로서 기득권을 인정하였고 환공도 주나라를 도모하지 않고 천자에 대해서 깍듯이 신하의 예를 갖추어 섬겼다.
하지만 막상 권력을 손에 쥐면 목에 힘이 들어가고 오만해지는 것일까? 어느날 환공이 천자의 고유권한인 봉선(封禪)을 거행하려고 하자 주나라 왕실은 잔뜩 겁을 먹었다. 봉선이란 천자가 하늘과 산천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하며 환공이 이를 행하겠다는 말은 내가 실질적인 천자라는 이야기, 즉 모반(謀反)을 뜻하였기 때문에 제후들은 환공에 대해서 등을 돌리고 말았다. 마치 대통령 중심제 국가에서 연두교서를 국무총리가 대신하겠다고 나서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왕따를 당한 제나라의 위상은 급속히 저하되고 진의 문공(文公;BC636~628)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는데 그 역시 제환공과 마찬가지로 제후들의 수장으로서 환공의 실덕(失德)을 교훈삼고 더 한층 강화된 '존왕양이'를 내걸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중국사에서 유명한 제나라의 환공과 진나라의 문공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자.
우선 제나라는 '목야(牧野)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개국일등공신된 태공망 여상(강태공)에게 분봉된 제후국이었고, 진은 주나라의 성왕(成王)이 자기 당숙에게 분봉한 제후국이었다. 이 말은 다시 말해서 제나라는 공신의 나라인지라 주나라 왕실에 대한 충성도는 아무래도 같은 왕실 계열의 진나라보다는 뒤떨어졌다는 말이다. 전자(前者)가 만약 대업을 도모했다면 주나라 왕실의 단절로 이어지겠지만, 후자(後者), 즉 진나라가 그렇게 했다면 방계 혈통의 주나라 왕실은 그대로 보존되는 것이다.
그러나 춘추시대 후반기에 들어와 진나라의 세력도 쇠퇴하여 권력의 중심이 사라지고 초(楚)오(吳)월(越) 세 나라가 전면에 등장하여 삼파전의 양상을 띄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세 나라가 제(齊)와 진(晋)에 비해서 주나라 왕실에 대한 충성도가 낮았다는데에 있었다. 다시 말해서 주나라 왕실의 눈치도 살피지 않고 마음놓고 중원의 패권을 다툴 수 있었는데 특히 초나라는 이미 제환공 시대부터 남방의 넓은 영토를 기반으로 세력을 키워서 중원을 위협하였으므로 진의 문공에 대한 최대의 적은 다름아닌 초나라였다. 즉 초나라는 진의 쇠퇴 이후에 등장하게 될 준비된 세력이었다. 초나라의 장왕(莊王)은 진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여러 제후국을 복속시켜 중원의 패권을 장악함으로써 기존의 '존왕양이 사상'은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초나라도 다시 남방의 오(吳)와 월(越)에게 뒷덜미를 물렸는데, 이때 오나라의 합려(闔閭)는 병법의 대가인 손무(孫武)를 중용함으로써 역사의 전면에 나설 수 있었다. 이후 오와 월은 패권을 주고 받으면서 춘추시대의 마지막 50여년간을 장식하였다. 이때의 유행어가 오늘날에도 쓰여지고 있는 '오월동주(吳越同舟)', 와신상담(臥薪嘗膽)'이다. 중국의 패권은 마치 핑퐁처럼 오의 합려(闔閭) 월의 구천(句踐) 오의 부차(夫差) 다시 월의 구천(句踐)으로 이어졌지만 이 두나라 모두 죽쑤어 개주듯 초에게 멸망당했다.
전국시대
전국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존왕양이'의 퇴색이다. 즉 춘추시대 말기부터 이미 '~공', '~공'이 살그머니 '~왕', '~왕'으로 호칭이 바뀌게 되었다. 전에는 '왕 대우 제후'였다면 이제는 '대우'라는 딱지를 떼고 '왕'을 칭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유의한다면 필자의 말을 이해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전국시대 제후국들의 대외관계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주었는데, 각 제후들은 '국민주권영토'이라는 국가의 삼요소가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제후들 모두가 왕을 칭하면서 표방하면서 주나라 왕실에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주나라의 왕도 왕이요, 나도 명색이 왕인데 충성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렇다고 누가 주왕실을 챙겨주어 왕중의 왕으로 모시겠는가? 상하관계가 두리뭉실해졌다. 이때부터는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신하가 왕위를 찬탈하는 하극상의 풍조가 만연되었다.
초(楚)가 오(吳)와 월(越)을 멸망시킴으로써 중원이 평정되나 했더니 이번에는 초와 원수지간이었던 진(晋)이 '못살겠다 갈아보자'하면서 뛰쳐 나옴으로써 '전국시대(戰國時代)'의 막이 올랐다. 진나라는 다시 치열한 세력다툼 끝에 한(韓), 위(魏), 조(趙) 세 나라로 분열되어 전국칠웅(戰國七雄)이 할거하는 시대가 되었다. 주나라 왕실에서 본다면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이 사방에서 벌떼같이 일어나 천하가 소란'했을 것이다.
전국칠웅은 한(韓), 위(魏), 조(趙)와 연(燕), 제(齊), 진(秦), 초(楚)인데, 이들은 같은 시대에 공존하면서 서로 경쟁하기도 하고 제휴도 하는 다양한 국제관계 속에서 진(秦)과 초(楚)를 양대축으로 하여 각국이 이합집산하였다. 너무 잦은 '헤쳐 모여'에 백성들은 넌저리가 났다. 그리고 전국(戰國)이라는 말이 의미하듯 너무 잦은 전면전을 치루다보니 전술상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는데 이때는 이미 철기시대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무기가 변하였고 전쟁은 더욱 잔인한 양상을 띄게 되었다. 이때 손무(孫武)의 5대손인 손빈이 할아버지의 병법과 자신의 병법을 집대성하여 손자병법을 저술하여 효과적인 전쟁수행을 위한 지침서로 삼았다.
전국시대는 그야말로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였기 때문에 전쟁의 승패는 물론, 정세를 자기 쪽으로 유리하게 돌려놓기 위해서 치열한 외교전을 벌이게 되었다. 바로 그 외교전이란 상대국을 찾아가 자신에게 협조하면 어떤 이득이 있는지를 설득해야 하는 과정에서 서로 자기편으로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기 위한 권모술수와 각종 술책이 동원되었는데, 새로운 전문직으로서 수많은 책략가들이 등장하였다. 즉 그들은 각 나라를 다니면서 자신의 주군을 대신해서 상호간의 제휴가 가져다 주는 이득을 홍보하는 정치외교 설계사가 되었다. 마치 보험설계사 처럼 말이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소진(蘇秦)과 장의(張儀)였는데 그들은 모두 귀곡자(鬼谷子)의 문하생이었으나 소진은 합종책(合從策)을 주장한 반면에 장의는 연횡책(連橫策)을 내세웠다. 합종책이란 진(秦)을 제외한 동쪽의 여섯 나라, 즉 연(燕)조(趙)한(韓)위(魏)제(齊)초(楚)가 동맹하여 서쪽의 진나라에 대항하자는 논리이고, 연횡책이란 합종책에 맞서기 위한 진의 책략으로 여섯나라가 진과 평화공존할 것을 주장한 것인데, '합종연횡(合從連橫)'이라는 한자숙어는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이야기할 때 자주 쓰이는 말로 등장하게 되었다. 사실 고사성어나 한자숙어도 그 당시의 유행어에 다름아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하나도 없다. 중국이나 서양에서 나온 말은 격언이고 고사성어요, 우리나라 것은 무조건 유행어라고 가벼이 여기는 것도 문제가 있다.
한편 전국시대에는 병법과 책략만 발달된 것만은 아니었다. 전국칠웅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따라 신분이나 출신에 구애받음이 없이 유능한 인재를 영입하여 자국의 경영에 도움이 되고자 하였고, 이에 많은 현자들이 등장함으로써 사상계의 전성기인 '제자백가시대'가 열렸고, 춘추전국시대에 이루어진 농업혁명은 산업과 사회 각 분야에 강력한 시너지 효과를 가져다 주었으며 각국은 발달된 도시를 중심으로 활발한 무역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특히 제반 산업을 유통시키는 상업은 이미 춘추시대 제나라의 환공이 중국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 그의 책사였던 관중(管中)이 중상주의 정책을 부국강병책으로 시행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사상의 발달'을 가져왔는데, 춘추시대부터 시작하여 전국시대를 거치는 동안 수많은 사상가들이 활동하였고 자신이 품고 있었던 정지적 소신을 펼치고자 '책략가'로서 출사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등장하고 발전한 여러 사상을 '제자백가(諸子百家)'라 한다. 그렇다면 이 시기의 산업발달과 제자백가가 큰 관련이 있다는 말인데, 그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해보겠다.
쉽게 말해서 중국인들은 철을 이용하여 무기를 만들었고 지속적인 전투수행을 위해서는 군량미가 절대적이었으므로 농업의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올 수 있었고 철제 농기구를 사용함으로써 농업분야에서 생산성 향상을 가져올 수 있었다. 특히 전쟁터에 많은 사람들이 빠져 나감으로써 노동집약산업에서 소(牛)를 이용한 농경으로 변환되어 비약적인 수확량 증대를 가져왔다. 청동기의 주나라 시대, 그리고 춘추시대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본격적인 철의 시대가 도래함으로써 중국은 두번째의 이노베이션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때의 1차산업 분야의 발전과 무기와 농기구의 생산을 담당하는 2차산업, 그리고 그것을 필요한 곳에 유통시키는 3차산업으로서의 상업의 발전을 가져왔으며 상업상 거래행위의 매개체로 청동화폐가 등장하였다.
중국은 전국시대를 거치는 동안 주왕조의 봉건제 등 낡은 질서가 무너지고 개인의 토지소유도 가능해졌다. 전국칠웅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따라 자국의 영토내에 군(郡)과 현(縣)을 설치하고 괸리를 파견하여 토지와 백성을 다스리게 하였다. 중국은 일곱 개로 나뉘어진 상태에서 중앙집권적인 군주의 직접통치가 이루어지게 된 이 제도를 군현제(郡縣制)라 한다.
오랜 전란을 극복하고 중국을 통일한 나라는 국력은 물론, 술책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던 진(秦)이었고 그 인물이 2,100여년에 걸친 중국 황제사를 열였던 시황제였다.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시황제
전국칠웅 가운데 가장 후진국이었던 진(秦)은 '존왕양이'의 이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나라였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제후국에서 출발한 나라가 아니라, 서쪽 변방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국력을 키워 중국의 지배자가 되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중앙집권을 바탕으로 강력한 통치를 할 수 있었다.
당시 중화적인 개념으로 따지면 춘추시대의 남방의 초나라도 오랑캐요, 전국시대의 진나라도 오랑캐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진나라가 강한 국력을 바탕으로 중국을 통일하였을까? 일찍이 진나라의 효공(孝公:재위 BC 361~333)은 아버지 헌공(獻公)의 뒤를 계승하여 21세에 진나라의 군주가 되어 후일 진나라가 중원을 통일할 수 있는 기틀을 다져 놓았고, 위나라에서 푸대접을 받던 책사 상앙(商앙)을 발탁하여 국정 전반에 대한 개혁을 단행하였다. 상앙은 자신을 알아주는 효공을 위해서 견마지로를 다하였는데, 진의 부국강병을 위해서 기원전 359 璲 350년 두 차례에 걸쳐서 대개혁(변법)을 통해서 나라 전체의 제도를 정비하는 한편, 도량형을 통일하였다.
상앙의 개혁은 진나라가 일약 일등국가로 발돋음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고 국력을 바탕으로 전국시대 중기부터는 중원을 도모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힘이 있으니 두려울 것이 없었다. 합종책이건 연횡책이건 모두 진나라에 있어서 구질구질한 절차일 뿐이었다. 원교근공(遠交近攻), 즉 진나라는 먼 나라와는 친선을 맺고 가까운 나라는 친다는 전략을 세우고 가까이 있는 나라부터 야금야금 먹어들어갔다. 이렇게 한위조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강적인 초와 패권을 다툰 싸움까지 승리함으로써 진나라의 군대는 천하무적이 되었고 마침내 마지막 남은 연(燕)과 제(齊)도 진의 말발굽에 유린되고 말았다.
기원전 221년 중국통일을 위업을 달성한 진나라 왕은 전례없이 확대된 중국의 전체 영역에 걸맞는 자신에 대한 호칭을 왕의 제곱에 해당하는 임금 '황(皇)', 임금 '제(帝)'를 합하여 황제(皇帝)라 칭했는데, 이로써 그는 황제의 시조 다시 말해서 시황제(始皇帝)가 되었다(시황제 정(政)에서 시작하여 1911년 10월 10일 신해혁명으로 폐위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宣統帝) 아이신조로 푸이(부의;愛新覺羅溥儀,)에 이르는 2,100여년간에 걸친 역대 중국 황제사의 기원이 됨).
시황제의 '통일국가'에 대한 강력한 의지는 오히려 진나라에 있어서 독(毒)이 되고 말았다. 그는 주나라의 봉건잔재를 일소한다는 차원에서 중앙에서 모든 것을 관장하기 편리하도록 도량형과 문자, 그리고 화폐를 정비통일시키고 중앙 행정기구를 설치하고 대륙을 전체 36군(郡)으로 나누고 지방관리를 직접 중앙에서 임명, 파견하였으며 군수, 군위, 군감이 각자의 관할지를 관장토록 하였다. 중앙에는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승상, 국방장관격인 태위, 검찰총장격인 어사대부로 구성되는 3공(三公)과 각 부서 장관에 해당하는 9경(九卿)을 두었다.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점은 도량형과 문자, 화폐의 통일은 기나긴 분열시대와 전란시대를 거치는 동안 각국의 교류가 활발하였기 때문에 별 무리없이 받아들여진데다가 통일로 인하여 중화(中華)라는 큰 틀에서 자연스럽게 흡수되었다는 사실이다.
또 한 가지, 삼국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또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중국민족의 재편성인데 진나라의 통일은 중국 민족사적으로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이 말은 춘추시대에 제나라나 진(晋)나라를 비롯한 오(吳)와 월(越) 등이 '남방 오랑캐'라고 일컬었던 초(楚)나라가 패권을 장악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중국에 편입되었고, 전국시대에는 서쪽의 변방에서 일어난 진나라가 대륙을 통일함으로써 서부지역의 이민족도 자연스럽게 중국이라는 중화권으로 흡수된 반면에, 북방 이민족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춘추전국시대' 遮 무대에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통일과정에서 배제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중국에 있어서 중원의 한족 문화권과 북방 유목민족 문화권으로 양분되어 기나긴 양 문화권간의 충돌과 마찰, 그리고 갈등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응당 그래야하고 말이다. 그런데 시황제는 무리수를 두었다. 그는 통일하고보니 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첫째 춘추전국시대를 통해서 무르익은 제자백가 사상이 마음에 걸렸다. 일찍이 진나라는 상앙을 발탁하여 법가사상을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삼아 철저한 사상통제를 함으로써 국민을 한 군데로 모을 수 있었지만, 전국을 통일하고 보니 사상적이념적으로 모자이크 국가로 변해있었고 지금까지 법가사상으로 무장되어 얌전하게 복종하고 있는 진나라 국민들도 물이 들 우려가 있었다. 잠깐 여기서 법가사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아보자. 진나라의 사직, 그리고 삼국 시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니 말이다.
법가(法家)를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권력 지향적'이라 할 수 있다. 즉 법가사상은 제자백가 가운데 가장 현실적이며 실천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왜냐하면 전국시대 중기의 정치적 경험을 바탕으로 형성된 사상이기 때문이다. 사실 법(法)이라는 개념은 춘추시대 정(鄭)나라가 중국 최초의 성문법을 제정한 이래 춘추시대부터 어느 정도 형성되어 있었으며, 진(晋)나라에서는 형법도 편찬하였다.
이러한 법가사상은 전국시대 말기 한비자(韓非子)에 의해서 집대성되었는데, 당시의 법가는 '군주의 통치질서는 왕도정치나 관용과 인(仁) 등이 아니라 권력과 지위에 기반을 두고 법대로 다스린다'는 논리였다.
이러한 현실적 법가사상은 위나라에서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한 상앙을 진나라의 효공이 발탁하여 도입하게 되었는데, 유가를 비롯한 다른 사상과는 달리 현실정치에 너무 깊이 파고 들어 군주의 무단통치를 합리화시킬 수 있었다. 앞에서 말한 상앙의 개혁도 그러한 토대에서 과감하게 이루어진, 중국의 마키아벨리즘(Machiavellismus)이었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안되면 되게 하라'는 임금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여 진나라는 통일의 기반이 되는 부국강병에 성공할 수 있었다.
시황제는 상황논리에 어두었다. 법가사상이 진나라가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기 위한 과도기에서 공헌은 했지만 그것을 전체 중국인에게 강요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예를 들어 어떤 장교가 중대장 시절에 중대원을 이끄는 방식과 사단장이 되어 부대를 지휘하는 방식이 달라야 하는데, 마치 부하들에게 강압적이며 말을 듣지 않을 때는 얼차려를 시켰더니 효과적이었다는 생각에 별을 두 개씩이나 단 장군이 시시콜콜 간섭하여 졸병에게 얼차려를 시키면 어찌 되겠는가? 어찌되긴, 말도 안되지!
시황제는 중국 전체에 맞지도 않는 강제수혈을 시키기 위해서 법가주의를 통치이념으로 삼고 이사(李斯)를 등용함으로써 사상의 일원화를 꾀하였다. 그러나군주의 덕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는 유학자들이 황제의 통치노선을 비판하자 이에 격노한 시황제와 이사는 460여명의 유학자들을 생매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실용서와 진기(秦記; 진나라 역사서)를 제외한 모든 책을 불살라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그것이 바로 '분서갱유(焚書坑儒)'이다.
시황제의 또 하나의 고민은 북방 이민족에 대한 정책이었는데, 특히 흉노족이 가장 마음에 걸렸다. 전국시대에 이미 제나라와 연나라, 그리고 조나라 등이 그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제각기 성을 쌓은 바가 있었으나, 이제는 전국을 통일함으로써 전체 중국의 대규모 사업, 즉 '만리장성'을 축조하기 위한 대역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정작 진나라 백성들은 흉노족보다는 강제노역이 더 무서웠다. 생각도 자기 마음대로 못하게 하는 시황제의 이러한 전제적 무단통치에 대해서 당시의 지식층들과 망국(亡國)의 한을 품고 있었던 제후들이 반발하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진나라에 있어서 가장 강적이었던 옛 초나라가 술렁이기 시작하였다.
시황제의 폭정을 단적으로 증명해주는 것은 살아서는 호화스럽게 지낼 아방궁을 짓게 하고 죽어서는 자신이 묻힐 무덤궁전, 즉 여산능을 건설하는 한편, 죽은 자신의 경호하고 시중을 들게 할 어마어마한 병마총(兵馬塚)을 만들게 하였다는 것이다. 비록 지금의 중국은 시황제 덕분에 만리장성과 병마총을 구경하러 오는 관광객을 상대로 짭잘한 관광수입을 올리고는 있지만 말이다.
시황제의 철권통치는 진나라 사직의 단명으로 이어졌다. 기원전 210년 시황제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강력한 독재자의 죽음이 가져다 준 빈틈이 너무 커서 후계의 계승이 순조롭지 못하였다. 환관 조고(趙高)는 승상 이사와 음모를 꾸며 시황제의 큰아들 부소(扶蘇)를 죽이고 막내아들 호해(胡亥; 재위 기원전 209~207)를 옹립하여 2대황제로 추대하고 실권을 장악하였는데, 조고는 시황제를 그대로 따라배운 데다가 자신만의 노하우를 추가하여 훨씬 잔혹한 정치를 펴면서 시황제 시대의 대신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고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하여 자신이 황제로 옹립한 호해마저 황제자리에서 내쫓았다.
필자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러한 만행을 모델로 한 것이 <삼국지>에서도 등장하지만 후한말의 '십상시의 난'이다. 중국의 환관은 황제의 바로 옆에서 시중을 드는 직책에 불과하지만 우리나라의 내관과는 달리 너무 권력지향적인 성격이 강하다. 역대 중국의 멸망사에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것이 '환관'과 '외척'과 '외적'인데, 대충 환관 때문에 나라가 어지러워지고 어린 황제가 등장하는 바람에 외척이 온통 나라를 말아 먹어 쇠약해진 그 틈을 타서 외적이 침입한다는 순서를 밟고 있다. 아무튼 '십상시의 난'을 계기로 동탁이 등장하고 제위를 노리는 역적 동탁을 친다는 명분으로 지방 제후들이 들고 일어났으며 조조가 중국사의 전면에 등장하여 처음에는 후한의 승상이 되어 천자를 틀어쥐고 패권을 거머쥐려고 했으며 천자를 협박하여 자신을 위왕으로 책봉케 하는 등, 권력의 야욕을 드러냈다.
중국 최초의 민란, 진승오광의 난
시황제는 중국을 통일하자마자 너무 야심에 찬 국가건설을 해온데다가 내가 아니면 진나라는 안된다는 생각에 찌든 사람이었으므로 후계자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불사의 약만 있으면 영원히 살면서 직접 중국을 다스릴텐데 후계자가 어째서 필요한가? 결국에는 제위계승도 조고와 이사의 농간으로 유린당하고, 게다가 환관 조고의 폭정은 백성들로 하여금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인내의 한계점에 이르게 하였다.
기원전 209년, 진나라 타도를 위한 무장봉기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주동자가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라 하여 일명 '진승오광의 난'이라 한다. 하남성 출신으로 둔전병을 지휘하던 하급 지휘관이었던 그들은 자신의 휘하에 있던 병사들을 이끌고 거병하였는데, 특히 진승은 대망을 품고 동료들에게 '연작이 어찌 홍곡의 뜻을 알리요?' 즉 '소인이 어찌 대인의 뜻을 알 수 있겠는가?'라는 명언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이 말은 史記 陳涉世家에 있으며 '涉'은 진승의 字이다).
이러한 진승과 오광의 거병은 숨을 죽이고 기회만을 엿보고 있던 옛 초나라를 비롯한 반진세력(反秦勢力)을 고무시겼는데, 그들이 황하 이남의 수십 개 성을 점령하자 처음에는 하급 지휘관이 군법을 위반하고 그 처벌이 두려워 반란을 일으킨 정도로만 생각했던 진나라 조정에 비상이 걸렸다. 진승은 처음에는 장군이라 칭하다가 나중에는 '진나라 타도'라는 대의명분을 전면에 내걸고 옛 강국이었던 초(楚)나라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국호를 '장초(張楚)'라 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나 그 이듬 해인 기원전 208년 반란군 토벌에 나선 진나라의 장군 장감(章邯)의 군대에게 패배함으로써 거병한지 6개월만에 진압되고 말았으나 이 사건은 진의 멸망과 항우와 유방의 천하쟁패의 신호탄이 되었다.
반진운동(反秦運動)
실패한 쿠데타! 그러나 그것은 다른 하나의 쿠데타를 성공시키고 말았던 성공한 쿠데타였다. 그것은 어째서 진승과 오광의 거병이 역사적 필연성을 가지고 있으며 다수의 백성들이 왜 민심이 떠난 정권을 상대로 국민 저항권을 행사했는지에 대한 당위성을 중국 전체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옛 초나라 세력들은 진승이 '진나라 타도'라는 대의명분을 내걸고 초(楚)나라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국호를 '장초(張楚)'라 한 사실에 크게 고무되어 있었는데, 장감의 군대가 집압에 성공하자, 이제 직접 팔을 걷고 나서 진나라 타도를 외치고 나서니 통일 이전 진(秦)을 제외한 6국세력들이 모두 옛 조국의 부활을 표방하면서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진나라의 실권을 쥐고 있었던 환관 조고는 더욱 강경하게 맞대응하면서 백성들을 더욱 탄압하는가 하면 자신이 멋대로 내세운 황제 호해를 제위에서 강제퇴출시켰다. 점점 조정은 돌이킬 수 없는 악수(惡手)를 두고 있었다. 민중들에게 반란(叛亂)이 아니라 의거(義擧)라는 성격으로 규정된 진승오광의 군대는 사실 오합지졸에 가까운 농민군이었다. 농민이 폭정에 들고 일어났다는 점에서는 삼국지의 도입부분에서 주요 테마가 되었던 후한말에 봉기한 황건군과 같지만, 종교적 색채를 가지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다르다. 우리나라 조선말기 동학농민혁명도 서양세력과 종교(西學>을 배격하고 '백성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의 이념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태평도>의 황건군과 성격이 비슷하다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진나라 타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었다. 비록 나라는 시황제에게 망했지만 옛 육국(六國)은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풍부한 실전경험이 축적되어 있었다. 기껏해봐야 나라가 망한지 십 여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나라도 있었으니 그리 늙지 않은 옛 병사들을 모을 수 있었다. 특히 초나라의 귀족출신이었던 항량(項梁)은 진승오광의 군대가 거병하자, 경포의 군대와 합세하여 진을 치기 위한 전선을 구축하고 자신을 무신군(武信君)이라 칭하였다. 이들 세력은 초나라 백성들의 전폭적 지지와 지원을 받으면서 크게 성장하였는데, 앞에서 이야기한 경포는 원래 영포(英布)였으나 진나라에 죄를 짓고 경형(묵형=문신형)을 받고 난 뒤로는 '경포'라 불려지게 되었다.
초나라의 군대가 진나라 장감(章邯)의 진압군에 패하고 항량이 전사하자, 그의 조카인 항우(項羽;기원전 232~202)가 전권을 이어받아 유방(劉邦)과 연합하여 거록(鉅鹿)에서 장감의 군대를 격파하고 진나라를 멸망시켰다. 항우는 팽성(彭城)에 도읍을 정하고 스스로 서초(西楚)의 패왕(覇王)이라 칭했으며, 거사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초나라의 의제(義帝)를 시해하고 말았다.
한편 환관 조고는 호해를 폐하고 그의 조카인 자영을 황제로 내세웠으나 오히려 그에게 죽임을 당했으며 3대 황제 자영은 민심이 이미 멀리 떠났음을 깨닫고 결국 유방에게 항복하고 말았으니 그때가 기원전 206년, 통일제국으로서의 진나라 사직은 3대 15년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한과 초의 천하쟁패
신하가 군주를 시해했다는 사실은 당시 중국사회에 있어서 커다란 충격을 가져왔다. 모두 '어찌 이런 일이'하면서 까무라졌다. 나라와 나라가 싸워서 그 나라의 군주를 죽인 것도 아니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 앞에 무릎을 조아리며 의제에 대해서 충성을 다짐했던 그(항우)가 어찌 그리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사건은 나중에 후한의 헌제(憲帝)를 폐하고 위(魏)의 황제가 된 조비(曹丕)가 형식적이나마 헌제의 신하였으나 제위를 찬탈하고 귀양가는 옛 군주를 죽임으로써 중국은 발칵 뒤집혔다. 제갈량은 단절된 한의 사직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유비를 제위에 오르게 하고 나중에 그의 아들 유선이 황제가 되자 중단없는 북벌, 즉 역적 위나라를 치지 않았던가? 위나라도 진(晋)의 사마염에게도 똑같은 꼴을 당하였다. 따라 배운 것이다.
그리고 사마염의 진나라는 어떠했던가? 제위찬탈과 시해는 기본코스였고 정치보복은 필수, 또는 경우에 따라서 선택과목일 정도였다(이로써 중국 민중들은 황실에 대한 충성심을 잃어가게 되었다. 어떤 왕조가 들어서든지 자신에게는 상관없는 일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정치인들이 아귀다툼의 이전투구를 벌이면 국민들은 정치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염증을 느끼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또한 항우의 의제 시해사건은 조선시대 사림세력의 등장과정에서 무오사화(戊午史禍; 연산군 4년,1498)의 빌미가 되었는데, 영월 땅에서 숙부인 수양대군(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단종역에 초나라의 의제를, 그리고 왕위를 찬탈하고 조카인 임금을 죽인 수양대군(세조)역에 항우를 빗대어 지은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그의 제자인 김일손이 사초에 올린데서 발단되었는데, 평소 김종직과 앙숙이었던 유자광의 농간에서 비롯된 사건이다.
이제 초패왕 항우에게 있어서 유방(劉邦)은 더 이상의 협조자가 아니었다. 유방은 원래 강소성(江蘇省)의 풍읍 출신이며 직업은 농민이었다. 소작농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부농(富農)도 아니었다. 그러한 그가 진나라의 폭정에 항거하여 처음 거병을 할 당시에는 그와 뜻을 같이 하는 농민들을 모아 군대를 조직하였는데, 오합지졸의 농민군을 이끌고 항우의 군대에 합류하여 진나라가 망할 때까지는 항우와 유방은 공동전선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이제 공동의 적인 진나라가 사라졌다. 유방은 의제를 시해한 항우에게 더 이상 동지로서의 미련이 없었으며 항우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장래를 위해서 유방은 반드시 없어져야 할 존재였다. 항우와 그의 참모진들은 유방이 비록 지금은 세력이 형편없는데다가 출신성분도 미천하지만 중국민중의 대다수가 유방을 지지한다는 데 무척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비록 무력은 딸렸으나 유방에게는 민심을 잡는 덕(德)이 있었다. 항우는 진나라의 성읍을 점령하면 그곳의 관리를 참하고 무시무시한 통치를 한 반면에, 유방은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는가' 하면서 어루만져 주었으니 민심이 유방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역사적 교훈은 20세기의 중국대륙에서 또 다시 재현되었으니 국공합작 당시 장제스(蔣介石)의 국민군과 마오쩌뚱(毛澤東)의 공산군(인민해방군)이 바로 그것이다. 미국의 지원까지 받았던 국민군은 군기가 문란하고 관리들이 부패하여 점령지의 주민들을 쥐어짠 반면에 인민해방군은 군기가 바로 서있었기 때문에 민심을 수습하는데 성공함으로써 국민당 정부를 타이완으로 쫓아내는데 성공하였다.
항우는 유방을 제거하기 위해서 연회에 초대하였다. 그러나 항우를 둘러싼 참모진의 계략을 간파하고 있었던 번쾌의 기지와 지략으로 유방은 호랑이 입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홍문(鴻門)의 사건'이다. 이 사건은 대업을 앞두고 후환을 없애라는 참모들의 건의에 마음이 약해지려는 주군의 경계시키기 위한 유명한 고사가 되었다.
중국은 시황제 이후 두번째의 통일을 향하여 치닫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모든 면에서 비교우위에 섰던 항우의 초나라 군대가 우세하였다. 여기서도 항우는 자기가 어째서 민심을 잃게 되었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무력으로 밀어붙였을 뿐만 아니라, 초나라가 군사가 가는 곳에는 방화와 약탈, 그리고 부녀자 겁탈이 자행되었다. 갈수록 항우는 설 땅을 잃어가는 사면초가(四面楚歌) 신세가 되었다.
반면에 유방은 장량(張良)을 책사로 기용하고, 전략에는 한신(韓信), 정치와 행정분야에는 소하(蕭何)를 배치하면서부터 역전의 계기가 마련되었는데, 장량한신소하를 가리켜 한나라 창업의 삼걸이라고 한다. 특히 한신은 전략은 물론 직접 전투에도 참가하여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원래 한신은 항우에게 고용되어 하위직급을 맡고 있었으나 유방에게 발탁되어 자신의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삼국시대에는 대업의 뜻을 세운 주공에게 많은 책사들과 무장들이 모여들었는데, '영웅은 모름지기 자신을 알아주는 주인을 위해서 죽는다'가 마치 당시 강호(江湖)의 유행어처럼 되었다.
당대의 책략가가 모두 포진된 유방은 차츰 전세를 회복하고 초패왕 항우를 절망상태인 사면초가(四面楚歌)로 몰아 넣었다. '사면초가(四面楚歌)'란 한나라 군사들이 고도의 심리전(心理戰)을 구사하여 사기가 꺽인 초나라 병사에게 무서운 향수병을 퍼뜨린 것을 말한다. 그렇지 않아도 사기가 꺾여 풀이 죽은 초나라 병사에게 한나라 병사들이 구슬픈 피리반주에 맞추어 향수를 자극하는 노래를 불러댔으니 오죽했겠는가? 병사들은 병영을 이탈하기 시작하여 기원전 202년 해하(垓下)에 이른 항우는 충성스런 장수 몇 명밖에 남지않은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항우는 그곳에서 명이 다했음을 알고 애첩 우희(虞姬)와 애마 '추'와 작별하고 자결하고 말았다(우희와 애마도 모두 주인을 따라갔다). 이때 항우와 우희와의 이별은 유명한 중국의 경극 '패왕별희(覇王別姬)'의 주요 테마가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항우의 뒤를 따른 우희가 죽은 자리에서 붉은 색의 우미인꽃(虞美人草)이 피었다고 한다.
한고조 유방
기원전 202년 중국 역사상 두번째로 만조백관이 모인 가운데 황제의 즉위식이 거행되었는데 즉위식의 주인공은 바로 삼국지의 영웅 가운데 한 사람인 유비(劉備)의 조상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인데, 즉 유비는 전한 제6대 황제인 경제(景帝; 재위 기원전 157-144)의 아들인 중산정왕(중산정왕) 유승(劉勝)의 후예이다. 특히 경제는 32세에 문제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올라 황제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지방의 오(吳)초(楚)조(趙) 등의 세력을 억압하자 기원전 154년 오왕을 비롯한 일곱 명의 왕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를 '오초 칠국(吳楚七國)의 난'이라 한다. 그러나 경제는 이를 힘으로 밀어붙여 난을 진압함으로써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이룰 수 있었고, 화폐주조권을 독점 장악하고 농업을 장려하여 재정의 충실화를 이룸으로써 한무제 시대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다.
중국을 통일한 한고조 유방은 장안(長安)을 수도로 정하고 시황제가 다져 놓은 3공 9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진나라 시대의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평민출신이었던 고조는 시황제처럼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실행할 만한 카리스마가 없었기 때문에 중앙집권제와 옛 봉건제도를 합친 군현제를 실시하였는데, 이러한 절충식 행정제도를 '군국제(郡國制)'라 한다.
한고조의 이러한 통치 스타일은 나중에 후한말, 다시 말해서 삼국시대에 등장하는 지방 호족들의 발호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사실 한고조가 옛 시대의 잔재인 봉건제도를 다시 활용하고자 했던 이유는 공신들에게 대한 논공행상과 깊이 관련되어 있었는데 한고조에 있어서 최대의 현안문제는 공신을 어떻게 섭섭하지 않게 기술적으로 처리하느냐였다. 그 하나의 방편으로 지방(郡)에는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고, 공신들에게는 유씨 일가와 함께 봉토를 주면서 제후, 혹은 왕으로 봉하여 영지로 보내는 한편, 재위기간 동안에 자신에게는 물론, 태자에게도 짐이 될 공신들을 여러가지 구실을 붙여서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한나라 조정의 최대의 과제는 '제후관리'였다. 이 말은 제후들이 중앙정부의 느슨해진 감시를 틈타서 마치 독립국 행세하려 했기 때문이다. 워낙 땅덩어리가 넓은 중국대륙! 제갈공명은 초려로 자신을 찾아온 유비에게 중국최대의 골치거리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중국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통치하는 소위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설파하였다.
전한 시대와 한무제
중국의 역대 황제 가운데 걸출한 군주 가운데 한 사람인 한무제(漢武帝)는 54년의 재위기간 동안 제국을 통치하면서 명실상부한 제국으로 만들어 놓은 인물이다. 부황인 경제(景帝)의 뒤를 이어 제위를 계승한 그는 경제가 이루어 놓은 내실을 바탕으로 더욱 강화된 황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무제는 한고조와는 달리 공신도 없었고 정치적 카리스마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지방의 제후와 호족들을 누름으로써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할 수 있었다.
한무제는 훈구세력을 견제하는 방안으로 관리를 등용함에 있어서 과거제도를 시행하고 동중서(董仲舒)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학을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삼았으며, 대규모 치수사업을 시행하는 등 국가건설의 야망이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는 즉위하자 연호를 '건원(建元)'이라 하고 중국에 편입되지 않은 이민족에 대해서도 한나라의 연호를 쓰도록 강요하면서 이에 따르지 않는 주변국들을 하나 하나 복속시켰는데, 그의 이러한 대외정책으로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되었다. 그는 또한 역법(曆法)도 통일시킴으로써 주변의 복속국에게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중화사상으로 물들게 하여 종주권을 행사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한무제의 시대에 역사적으로 아주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가 편찬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중화적 사관으로 씌여졌지만 말이다.
한무제는 성숙된 대내적 토대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대외정책을 감행하였다. 한고조가 천하를 통일할 당시에 시황제가 최대의 위협으로 간주하고 있었던 흉노족을 비롯한 북방민족을 공략하기 지작하였다. 전국시대를 거치는 동안에 초(楚), 오(吳), 월(越)을 비롯한 남방의 이민족이 중국에 편입되었고, 서쪽 변방의 진(秦)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자연스럽게 '중화문화권'이 완성되었다. 하지만 유독 북방민족은 계속 '오랑캐'로 배척을 받았는데 사실 지리적으로는 오(吳), 월(越)보다 가까웠다.
그렇다면 어째서 북방민족들은 중화문화권에 속하기를 거부했을까? 이에 대한 가설로는 유목민족 특유의 생활방식과 그리고 터프한 기질로 인하여 한 곳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으며 산다는 것 자체를 꺼려했기 때문이었는데, 다시 말해서 같은 이민족이지만 남방민족들은 같은 농경민이므로 중원의 선진문화를 부러워하여 중화문화권에 속하기를 원했으나 북방민족들은 그것을 배척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한무제가 북방정책에 신경을 곤두세웠던 이유는 한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국가의 기틀을 잡아가고 있을 무렵에 흉노의 세력이 강성해져서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는 위기감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한고조가 중국을 통일할 당시에 흉노에는 '모두찬위(冒頓單于;BC ?~174)' 라는 걸출한 영웅이 나타나 흉노의 세력을 규합하여 동호(東胡)를 격파하고 월씨(月氏)를 멸망시켜 고비 이북의 투르크키르기즈 제민족을 지배하면서 동아시아에 유목민족 최초의 대국가를 건설함으로써 동아시아는 크게 두 개의 세력판도가 형성되었다. 이는 중원을 지배하는 농경사회의 대표자격인 한나라와 북방 유목민족과의 한판승부를 의미하게 되었는데, 흉노족들은 중국의 북방 변경지역을 끊임없이 침범하여 한나라 조정을 괴롭혔다.
한고조는 '북방의 평정없이, 한나라의 안녕없다'는 판단에서 대규모 출병을 감행하였으나 모두찬위(冒頓單于)도 역시 이에 맞서 대규모 병력을 남하시켰다. 그때 한고조는 모두찬위의 책략에 빠져 강화를 맺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모두찬위는 한고조에 대해서 매년 조공을 보내면 더 이상 남하하지 않겠다고 하므로 별 수 없이 그들과 굴욕적인 외교관계를 맺게 되었다. 당시 흉노의 위세는 서쪽으로 파미르 지역에 까지 미치고 있었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한무제는 할아버지인 한고조가 당했던 치욕을 복수하기 위해서 위청(衛靑)과 곽거병(藿去病)에게 군대를 주면서 흉노족을 정벌하도록 명령하였다. 흉노족은 유목민 특유의 기질 때문에 내분을 겪고 있었는데 모두찬위(冒頓單于)와 같은 인물이 없었기 때문에 힘을 하나로 모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유목민들은 지도자의 첫번째 조건을 '힘이 있는 자'로 내세우기 때문에 서로 자기가 잘났다고 싸웠던 것이다. 황명을 받은 위청(衛靑)과 곽거병(藿去病)의 군대는 그들의 분열을 틈타 고비 사막을 넘어가서 흉노족을 몽골초원 바깥으로 몰아내는데 성공하였다.
중국 북방에서 밀려난 흉노는 서쪽으로 진출하게 되었고 이것이 세계사에서 말하는 '민족 대이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즉 서쪽으로 진출한 흉노의 일부는 소아시아와 발칸반도 북부지역을 타고 유럽 중부까지 진출하는 바람에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이어졌다는 말이다.
한무제는 흉노를 몰아낸 것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 정복사업을 강행하여 월남을 복속시키고, 한반도를 공략하여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4군(漢四郡)을 설치하였다. 흉노를 정벌하고보니 서역이 눈에 들어왔다. 무제는 장건(張騫)을 파견하여 서역에 관한 사정을 알아보게 하였는데 장건은 대월씨국(大月氏國), 즉 지금의 아프가니스탄까지 진출해서 파르티아(安息國)와 페르시아(波斯國) 등에 관한 자세한 정보를 가지고 돌아왔다. 우리가 실크로드, 즉 비단길이라 하는 것도 바로 이때 장건에 의해서 알려진 '서역가는 길'이며 나중에 당나라 시대 이후 '실크로드(비단길)'라 일컬어지게 되었다는 것도 알아두었으면 한다.
삼국지의 진입로, 후한(後漢)
무제(武帝)는 중국 역대 황제사에 있어서 수많은 치적을 이룩하였지만 그가 죽자 잇달아 어린 황제가 등극하였다. 어린 황제가 등극하였다는 이야기는 쉽게 말해서 왕 대비마마나 대왕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한다는 말이 아니던가? 이때부터 외척과 환관들이 전횡을 일삼아 국가의 기강이 심하게 흔들리게 되었다. 어린 나이에 등극하여 모후(母后)의 수렴청정을 경험한 군주들은 하나같이 장성해서도 마마보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소심한 성격에 결단력이 부족한 전한 제11대 황제 원제(元帝;기원전 75~33)는 나랏일을 처가일족, 즉 외척에게 넘겨버리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는데, 특히 외척 가운데 왕망(王莽)이라는 자는 원제 때에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대더니 성제(成帝)가 즉위하자 대사마 겸 대장군이 되어 국사를 농간하였다. 왕망은 실권자의 수준에 만족하지 않고 평제를 독살하고 겨우 두 살박이 어린애를 옹립하고 섭정을 맡았으나 이것도 만족하지 못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도 아예 '신(新)'이라 바꿔 버렸으니 서기 8년의 일이다.
제위를 찬탈하고 스스로 황제가 된 왕망(王莽)은 그때까지 감히 생각하지도 못한 획기적(?)인 일을 단행하였다. 소위 왕망전(王莽錢)이라는 주화를 주조하였고 중국의 모든 전답을 황제의 소유로 함으로써 지주들의 반발을 샀으나 이를 힘으로 누르고 노비를 사유물로 사고파는 행위를 금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상인의 활동을 억압하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장사한답시고 중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황제를 비난하는 입을 막아 버리기 위함이라지만 표면상으로는 상인들의 담합행위와 독과점을 방지하여 물가를 안정시킨다는 명분도 포함되어 있었다. 결론적으로 왕망의 개혁은 복고적이며 공상적이었다.
그리고 왕망은 우리나라와 별로 좋지 않은 인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흉노를 공략하려고 한 것까지는 자기네들 사정이니 뭐라고 탓할 필요는 없지만 괜히 고구려를 끌고 들어가려고 하였다. 그때 고구려의 유리왕이 이에 따르지 않고 '너희들이 우리에게 맡겨 놓은 군사라도 있느냐'하면서 '당신들의 일이니 당신들이 알아서 하라'면서 소위 유리왕 독트린을 발표하자, 왕망이 화가 나서 '높을 고(高)자, 고구려(高句麗) 좋아하네! 앞으로 너희같은 소인배의 나라를 하구려(下句麗)라고 부르겠다'고 하자 고구려도 배짱좋게 '정히 뜻이 그렇다면 그렇게 하구려'라고 응수하였다. 이때부터 중국 역사서에 고구려를 비하하는 하구려(下句麗)라는 단어가 곳곳에 등장하게 되었다.
이후 중국 역대왕조의 흥망사에는 외척과 환관의 반드시 등장한다(우리나라의 왕조사도 그렇지만). 환관은 최고 통치자를 바로 옆에서 보필하는 존재이므로 얼마든지 '인의 장막'을 칠 수 있으며 아무리 고관대작이라도 환관의 눈 밖에 나는 날에는 그 날이 그의 제사날이었다.
그러나 서기 25년 한 고조의 9대손인 유수(劉秀)가 그의 형과 함께 거병하여 왕망을 치고 유씨의 한왕조를 회복하였는데 그가 바로 후한의 광무제(光武帝)이다. 광무제는 수도를 뤄양(낙양;洛陽)으로 정하고 새로운 관료정치를 구축하기 위해서 유학을 더욱 장려하였으며 정치적으로는 지방의 호족세력과는 가급적 충돌을 피하는 황실-호족연합적 통치를 하였는데, 이것은 나중에 후한 조정에 커다란 짐을 안겨주게 되었다. 왜냐하면 중앙정부의 힘이 미치지 못할 정도로 커져버린 지방의 호족들이 본격적인 권력집단으로 성장하여 문벌귀족으로 발전함으로써 삼국지의 주요 테마가 되었던 군웅할거(群雄割據)의 뿌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실컷 경제가 지방세력을 억누르고 무제가 그 토대를 더욱 다진 강력한 중앙집권이 무너진 것이다.
광무제 역시 전한(前漢)의 무제와 마찬가지로 서역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는데, 그는 무제시대의 세력권을 회복시키고 계속 그 여세를 몰아 여러나라 복속시켜 그 위세는 파미르 지역 동서에 걸쳐 있었다. 서기 1세기 후반 광무제는 서역경영의 책임자로 반초(班超; 서기 32~102)를 임명하였는데, 반초가 서역으로 떠나면서 지금도 사람들이 즐겨 쓰는 아주 멋있는 유행어를 남겼다.
'호랑이 새끼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
역시 반초는 호랑이 새끼를 잡았다. 그때까지 중원에 알려지지 않았던 넓은 세계가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서역경영의 천재인 반초는 부하 감영(甘英)을 대진국(大秦國), 즉 당시의 로마제국에 파견하였지만 로마에 도착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서기 166년 대진국(大秦國) 황제 안돈(安頓)의 사신이 해로를 통해서 중국에 왔는데 안돈(安頓)이란 오현제의 한 사람인 로마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이다.
첫댓글 우와~~인기 짱이시네...역시 건조한 내집보다는 여기가 격이 맞네요^^근디 그만큼 고생을 더 하셔야 겠네요. ㅋㅋㅋ
그러게 말이요, 동그라미 님! 그쪽도 화끈하게 달구어 놓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