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강씨(晋州姜氏)
강이식.강감찬.강민첨.장군
조선시대에 문과(文科)급제자 만 223명 배출 문무(文武) 겸비한 전통의 명벌(名閥)
시.서.화 에 뛰어난 강세황 문하에서 불세출의 화가 김홍도 나와
우리나라 강씨(姜氏) 본관은 문헌상으로는 114본이 전하나, 조선씨족통보에는 시조가 분명한 것이 진주[晋州]. 금천[衿川]. 안동[安東]. 배천[白川]. 해미[海美]. 동복[同福]. 광주[光州] 등 7본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강씨[姜氏]는 모두가 진주강씨에서 분적하였다고 하며, 진주강씨로 단일화 하고 있다. 강씨(姜氏)는 박사공파(博士公派), 소감공파(少監公派), 관서공파(關西公派), 은열공파(殷烈公派), 인헌공파(仁憲公派) 등 5파로 대별(大別)하고 있다.
인헌공파는 파조(派祖)인 강감찬(姜邯贊)의 출생지가 금천[경기도 시흥]이라 하여, 금천강씨(衿川姜氏)라고도 한다.
이러한 강씨(姜氏)는 영남의 고도(古都) 진주(진양)지방에서 하씨(河氏). 정씨(鄭氏)와 더불어 진양3성(三姓)으로 일컬어져 왔으며, 전통적인 영남의 명문으로 손꼽힌다.
강씨(姜氏)는 2000년 인구조사에서는 강릉강씨, 경주강씨, 광주(光州)강씨, 곡성강씨, 금천강씨(衿川姜氏), 김해강씨, 나주강씨, 남양강씨, 대전강씨, 동래강씨, 동복강씨, 밀양강씨, 배천강씨(白川姜氏), 법전강씨(法田姜氏), 보주강씨(寶州姜氏), 보천강씨, 봉일강씨(鳳壹姜氏), 부산강씨, 불갑강씨(佛甲姜氏), 성주강씨, 수산강씨, 수원강씨, 순흥강씨, 시흥강씨, 안동강씨, 원주강씨, 여천강씨, 연길강씨, 인동강씨, 전주강씨, 제주강씨, 진주강씨, 진양강씨, 충주강씨, 평양강씨, 해미강씨 등으로 나타났으나 대부분 세거지명이다.
우리나라 강씨(姜氏)는 서기 500년대에 을지문덕과 함께 활약한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병마를 지휘하던 최고군직 현재의 합참의장) 강이식(姜以式)장군을 시조로 받든다.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와 <진주강씨중앙종회>의 자료에 의하면, 597년(영양왕 8)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후 국력을 과시하면서 고구려를 침략 할 야욕으로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모욕적인 국서(國書:외교문서)를 보내오자, 영양왕이 대신들을 모아 놓고 회신할 내용을 의논할 때 강이식 장군이 "이같은 무례한 문서에는 붓으로 답 할것이 아니라, 칼로 답하는 것이 마땅하다."며 전쟁 할 것을 강력히 주장한다.
영양왕이 기꺼이 받아들여 강장군을 병마원수(兵馬元帥:전쟁시에 군을 통솔하던 군인의 가장 높은 계급인 주장 主將)로 삼아, 고구려와 수나라 사이에 전쟁의 시발이 된다. 이때 강이식(姜以式)은 병마원수(兵馬元帥:전쟁시에 군을 통솔하던 가장 높은 계급)를 맡아 정병 5만명을 이끌고 전투에 참가하였는데, 이듬해 대병력을 이끌고 요서(遼西)로 나아가 요서총관(遼西摠管:총관은 군대를 통솔하던 벼슬 뒤에 도독(都督)으로 고침) 위충과 접전하다 임유관으로 거짓 후퇴하였다. 이에 수나라에 도제(文帝)는 한왕(漢王) 양양(楊諒)을 행군대총관으로 삼아 30만 대군을 임유관으로 보내고, 주나후(周羅喉)를 수군총관(水軍摠管)으로 삼아 바다로 출행시키면서 평양으로 출전한다고 성언(聲言)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양양의 군대에게 군량을 대주려는 속셈임을 간파한 강이식원수는 수군(水軍)으로 바다에 나아가 주나후의 군량선을 격파하고 군중(軍中)에게는 벽루(壁壘: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채)를 지키라고 명하여 출행하지 않았다. 결국 기아와 질병으로 사기가 저하 된 수나라 군사에게 총공격을 감행하여 큰 전과를 거두게 되었다. 이것이 고구려와 수나라 사이에 일어난 제1차 전쟁이다.
이러한 내용은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서곽잡록(西郭雜錄)과 대동운해(大東韻海)에 실린 사실을 신채호가 인용한 것이다. 그 후 수문제는 고구려를 두려워하여 강화를 맺고, 상품교역을 재개하여 십수년이 지난 뒤 수문제의 아들 수양제가 113만 대군을 이끌고 612년(영양왕 23)고구려를 재침공하자 강 장군이 수륙양군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전쟁이 났을때 군무를 통할하던 무관으로 병권을 도맡은 장수)가 되어 왕제 건무(뒤에 보장왕으로 해군참모총장격)는 해안을 맡고 을지문덕(육군참모총장 격)이 육지를 맡아 이에 대항하였다.
한편 수양제는 별동대 30만 5천명을 압록강 서쪽에 집결시켰으며 을지문덕은 거짓으로 패한 척하고 적을 평양성 북쪽 30리 까지 유인하자, 그때서야 속은 것을 알게 된 수양제는 회군하다가 살수(지금의 청천강)에서 대패하였다. 이로 인해 수나라가 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시조 강이식(姜以式) 장군의 묘는 만주 심양현 원수림(元帥林)에 있으며 봉길선 원수림 역전에 "병마원수강공지총"이란 큰 비가 있었다고 하나 중국 문화혁명 당시 소멸되었고 현재 묘역은 밭으로 개간되어 묘지에는 돌조각과 거북좌대만 남아있다.
진주강씨 문중의 기록에 보면 통일신라 헌강왕 때 태중대부(太中大夫)로 판내의령(判內議令:종1품)으로 재임 중이던 강진(姜縉)이 진양후(晉陽侯)로 봉해져 이때부터 강씨(姜氏)는 본관을 진주(晉州:진양,진산晉山)로 정함에 따라 관향(得貫)으로 자리하게 된다. 이후 천여년이 지난 현재까지 진주강씨는 우리나라 성씨(姓氏)중 유일하게 갈라지지 않고, 천파일본(千派一本)으로 지속하고 있음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진주강씨 중흥시조인 국자박사(國子博士:국자감의 정7품) 강계용(姜啓庸)은 1274년(고려 원종 15) 통신사 서장관(書狀官:일본으로 가던 사신을 수행하여 기록을 맡던 임시 벼슬)으로 일본을 다녀왔으며, 손자 강사첨(姜師瞻)의 5세손 중 첫째 아들 강회백(姜淮伯)의 후손을 통정공파(通亭公派),둘째아들 강회중(姜淮仲)의 후손을 통계공파(通溪公派)로 구분하는데, 이들의 후손에서 가장 많은 인물이 나왔다. 통정공파의 강회백은 고려 말에 대사헌(大司憲: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종2품 검찰총장)을 지내고, 조선개국 후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재상급이 맡은 군사 및 민사를 모두 관장하며 외침이 있을때 작전을 지휘함, 고려말에 설치되었으며 1389년(공양왕1)도절제사로 고침)에 올랐으며 성리학에도 밝았다. 그의 아들 강석덕(姜碩德)은 세종의 둘째 부인 영빈강씨의 아버지로 개성유수(留守:2품 지방장관)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돈녕의 친목을 꾀하던 돈령부의 벼슬) 등을 지냈으며 글씨에 능했다. 강석덕의 아들 강희안(姜希顔), 강희맹(姜希孟)형제는 통정공파(通政公派)의 대표적 인물이다. 강희안은 세종 23년 문과(文科:문관을 뽑아 쓰던 과거로 초시.복시.전시로 나뉘었음)에 급제하고 집현전직제학(集賢殿:집현전은 경연과 서연을 맡아보면서 학문을 연구하였음 직제학(直提學)은 종3품)에 올라 정인지. 성삼문 등과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다. 후에 단종 복위에 연루되었으나 "현사(賢士)이니 죽이지 말고 중용하라"는 성삼문의 변호로 화를 면하고, 뒤에 호조참의(參議;정3품차관보)를 지냈다. 그는 시.서.화 삼절(詩書畵三絶)이라 불려질 정도로 당대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연산군때 우의정(右議政:정1품 정승)을 지낸 강구손(姜龜孫)은 그의 아들이고 세조 때 영의정(領議政:정1품 정승)을 지낸 강맹경(姜孟卿)은 강희안의 4촌형이다.
강희안의 동생 강희맹 또한 당대의 문장가이자 서화가로, 세조의 총애를 받아 세자빈객(世子賓客;세자시강원의 정2품)이 되고, 병조판서(兵曹判書;정2품 국방장관) 이조판서(判書;정2품 장관) 등을 거쳐 좌찬성(左贊成:의정부의 종1품)에 올랐다.
통계공파에서는 선조때 우의정(右議政:정1품 정승)을 지낸 강사상(姜士尙)과 역시 선조 때 평난공신(平難功臣)에 오르고, 이조. 병조판서(判書:정2품 장관)를 거쳐 중추원판사(中樞院判事:왕명을 출납하던 중추원의 1품)를 지낸 진흥군(眞興君) 강신(姜紳)과 왕자사부(王子師傅:정1품)를 거쳐 임진왜란 때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오르고, 진창군(晋昌君)에 봉해진 강인(姜絪)형제가 뛰어났다.
정묘호란의 주역으로 불리는 강홍립(姜弘立)도 강신의 아들이다.
특히 강인의 후손은 고종때 와서 강준흠(姜浚欽), 강시영(姜時永), 강문형(姜文馨), 강난형(姜蘭馨) 강우형(姜友馨), 강국형(國馨)등 판서급(判書級:정2품 장관) 인물을 배출해서 명성을 떨쳤다. 이 밖에 인조때 화포술(火砲術)을 전한 강홍중(姜弘重)이 진주강씨가 배출한 인물들이다.
은열공파(殷烈公派)의 중흥시조 강민첨(姜民瞻)은 인헌공파의 파조 강감찬과 더불어 귀주대첩의 전공으로 고려사에 크게 무훈을 떨친 명장이다. 은열공파에서는 강백년(姜栢年), 강현, 강세황(姜世晃)의 3대(代)와 강노(姜老)가 유명하다.
강백년은 조선 현종때 관찰사(觀察使:종2품 감사)를 거쳐 예조판서(禮曹判書:정2품 장관), 좌찬성(左贊成:의정부의 종1품)에 이르렀으며, 뒤에 영의정(領議政:정1품 정승)에 추증(追贈:공이 많은 벼슬아치가 죽은 뒤에 나라에서 그의 관위를 높여 주던 일)되고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문명(文名)이 높았다.
강백년의 아들 강현은 예조판서(禮曹判書:정2품 장관).형조판서(刑曹判書:정2품 법무장관)를 거쳐 대제학(大提學: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문형)에 이르러 유명했으며, 좌찬성(左贊成:의정부의 종1품)에 올랐다.
강현의 아들 강세황은 6조의 참판(參判:종2품차관)을 역임하고 한성판윤(判尹:정2품서울시장)을 지냈으며 시.서.화(詩書畵)로 유명하였다. 특히 강세황의 문하에서 불세출의 화가 김홍도가 나온다. 강노는 강세황의 증손자로 철종 때 대사간(大司諫:왕에게 간언을 하던 사간원의 정3품). 병조판서(정2품 국방장관)를 거쳐 좌의정(左議政:정1품 정승)에 이르렀다.
강민첨(姜民瞻:?~1021)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고려의 명장
강민첨장군의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그는 목종(穆宗)때 문과에 급제하고 1012년(현종3)에 안찰사(按察使:절도사)로서 영일(迎日) 등지에 쳐들어온 동여진(東女眞)을 격퇴하였다. 1018년(현종9)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으로 쳐들어오자 강감찬(姜邯贊)의 부장(副將)으로 출전하여 흥화진(興化鎭)에서 이들을 격파하였으며 거란군이 바로 개경(開京)으로 쳐들어가자 이를 추격하여 자산(慈山)에서 크게 이겼다. 그 공으로 응양위상장군. 주국. 우산기상시(鷹揚衛上將軍:상장군은 정3품 중앙군 최고지휘관.柱國:주국은 두번째 훈호.右散騎常侍:우산기상시는 중서문하성의 정3품)가 되고 추성치리익대공신(推誠致理翊戴功臣)에 책록되었다. 이듬해 병부상서(兵部尙書:정3품 국방장관)을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왕명을 출납하던 중추부의 2품)에 올랐고 사후에 태자태부(太子太傅:정1품)에 추증되었다.
진주강씨(晉州姜氏)는 강희맹이 세종때 장원급제하는 등 장원급제자 10명을 포함,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문관을 뽑던 과거)에 223명,무과(武科:무관을 뽑아쓰던 과거로 시험은 병서와 무예)에 144명 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시험)에 512명,역과(譯科:중국어.몽고어.여진어.일본어에 능통한 사람을 역관으로 쓰기 위해 뽑던 과거)에 16명, 의과에 8명, 음양과(陰陽科:천문.지리.명과학에 밝은 사람을 뽑던 과거)에 3명, 주학에 1명 등 907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여 문무를 겸비한 인물을 배출시킨 전통의 명벌(名閥:문벌이 좋은 집안.명가)로 명성을 떨쳤다. 경남 진주시 옥봉동에 있는 강민첨 장군의 탄생지는 '경남기념물 제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인구조사에 의하면 진주강씨는 1985년에는 총 223,578가구 941,094명이었으며,2000년에는 300,724가구 966,710명이었다.
본관명 |
진주(晉州) |
성씨명 |
강씨(姜氏) |
본관소재지 |
경상남도(慶尙南道) 진주시(晉州市) |
본관이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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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명 |
강이식(姜以式) |
본관 연혁
진주(晉州)는 경상남도 남서쪽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삼한시대에 소국인 고순시국(古淳是國)이 있었던 곳이다. 백제 때는 거열성(居烈城)이었고, 신라 문무왕 때 신라의 거열주(居烈州)가 되었으며, 757년(신라 경덕왕 16) 9주 5소경제의 실시와 함께 강주도독부(康州都督府)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청주(菁州)로 개칭되었다. 고려 초에 강주(康州)로 환원되었다가, 983년(성종 2) 전국에 12목을 둘 때 진주목이 되었다. 995년(성종 14)에는 정해군(定海軍)이라 하고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산남도(山南道)에 속하게 하였다. 1012년에 안무사(按撫使)로 고쳤다가, 1018년(현종 9)에 진주목으로 복구되었다. 1310년(충선왕 2)에 진주로 강등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진주목으로 회복되었다.
1392년(태조 1)에 진양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가 되었다가 1402년(태종 2)에 진주목으로 환원되어 조선시대 동안 유지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진주부 진주군이 되었다가, 1896년에 13도제(道制) 실시로 경상남도 진주군이 되었다. 1931년에 진주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1939년 진주읍이 시로 승격하면서 나머지 지역이 진양군으로 개칭되었다가 1995년 진양군이 진주시에 통합되었다.
성씨의 역사
진주강씨는 고구려 때 도원수를 지낸 강이식(姜以式)을 시조로 삼는다. 강씨가 진주에 세거한 것은 8세 강우덕(姜友德)이 이거(移居)한 이후부터라고 한다. 그렇지만 고구려 멸망 이후 강씨 집안이 북방에서 남쪽인 진주로 남하한 것은 신라의 삼국 통일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통일신라시대에 강진(姜縉)이 진주 지역의 진양후(晉陽侯)로 봉해지면서 본관을 진주로 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외에 강우덕의 부친으로 고려 말 문하찬성사를 지낸 강시(姜蓍)의 아들이며 우왕의 사위였던 강회계(姜淮季)의 형인 강회백(姜淮伯)이 진양(晉陽)에 귀양 간 계기로 진주를 세거지로 삼았다는 설도 있다.
진주강씨의 시조인 강이식의 묘소는 만주 심양현(瀋陽縣) 원수림(元帥林)에 있다는 설이 있다. 이 설에 따르면, 봉길선(奉吉線) 원수림(元帥林) 역 앞에 병마원수강공지총(兵馬元帥姜公之塚)이란 큰 비석이 있었다고 하는데, 중국 문화혁명 때 소멸되고 돌조각과 거북좌대만이 묘역에 남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설은 확인된 바가 없다.
분적종 및 분파
《조선씨족통보》에 의하면 강씨는 진주, 금천(衿川), 안동(安東), 배천(白川), 해미(海美), 동복(同福), 광주(光州) 등 여러 본관이 있다. 그러나 현전하는 강씨는 모두가 진주강씨에서 분적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강이식을 동일 시조로 하여, 강계용(姜啓庸)을 중시조로 하는 박사공파(博士公派), 강위용(姜渭庸)을 중시조로 하는 소감공파(少監公派), 강원용(姜遠庸)을 중시조로 하는 시중공파(侍中公派), 강민첨(姜民瞻)을 중시조로 하는 은열공파(殷烈公派), 강감찬(姜邯贊)의 아버지 강궁진(姜弓珍)을 중시조로 하는 인헌공파(仁憲公派) 등이 있다. 박사공파는 어사공파(御使公派)라고도 하며, 시중공파는 관서대장군파(關西大將軍派)라고도 한다.
인헌공파는 강감찬의 출생지가 금천(衿川)이라고 하여 금천강씨라고 한다.
주요 세거지
경상남도 남해시
경상남도 진주시
경상북도 영풍군
전라북도 순창군
제주도 북제주군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진주강씨는 300,724가구 총 966,710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尹昌鉉, 보명사, 1929)
《
진주강씨대동보(晉州姜氏大同譜)》(1994)
진주강씨 사적연구회 사이트(
www.jinjukang.co.kr)
[진주강씨(晉州姜氏)의 인물들]
[진주강씨(晉州姜氏)의 과거 및 취재 합격자]
고려문과
무과
무보
문과
생원진사시
역과
음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