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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0년 순조(정조의 차남) 10세 즉위. 1790-1834 1800-1834(34.4년) –
정순대비(1745-1805영조의 계비-경주 김씨)가 수렴청정(-1803) - 노론 벽파 득세(김관주,김일주,심환지)
1803년부터 이듬해 1804년까지 장인 김조순이 섭정
– 정조의 친위부대 장용원 혁파, 개형정치의 진원지인 규장각 축소.
– 치세 34년 동안19번의 대홍수
* 심환지 노론 벽파 - [정조어찰] 299통
1801년 신유박해 : 주문모를 비롯하여 이승훈, 정약종 등 사형
– 벽파가 시파, 남인을 (이가환,정약전,권철신)공격
* 황사영 백서 사건.
1802년 순조, 선왕이 간택한 김조순의 딸(순원왕후1789-1856)과 혼례.
1804년 순조의 친정 (15세) - 김조순노론시파(순조의 정비 순원왕후(천주교 세례)의 아버지) 일문의 안동 김씨 등장
<참고> 안동 김씨 세도 정권: 남양 홍씨, 풍양 조씨, 여흥 민씨, 대구 서씨, 반남 박씨 등 명문 가문의 혈연적 연결 세력.
비변사를 장악하여 국가를 운영(왕권은 미약하고 의정부도 제 구실을 하지 못했다.)
1809년 대기근
1811-12년 홍경래의 난 (비변사를 중심으로한 세도정치의 3정의 문란-전정,군역,환곡) * 홍경래의 난
1819년 효명세자, 趙萬永의 딸(신정황후,조대비)을 세자빈으로 삼은 것을 계기로 풍양 조씨(豊壤趙氏) 일문 중용
<참고> 콜레라
1817-1824년동남 아시아 확산→중국 동북부→1821년 평안도 지방(신사년 괴질)
1827-1830년까지 아들 효명세자가 대리청정. 풍양 조씨 등장.
1831년 천주교 조선교구 설치
1832년 영국이 통상 요구
1833년 서울의 쌀 폭동
<참고> 김조순의 자녀
장남:김유근 차남:김원근 장녀:순원왕후 삼남:김좌근 *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1834년 헌종1834-1849(14.7년) (순조의 손자 -효명세자<익종>과 신정왕후(조대비)의 아들 7세 즉위
- 순원왕후(1789-1857 안동 김씨 김조순의 딸 - 천주교 세례) (헌종의 할머니)의 6년간 수렴청정.
- 치세15년에 9년 홍수
1837년‘수령천거법’을 만들어 비변사 당상관이나 관찰사를 지낸 신하들에게 몇 명의 수령을 천거할 수 있는 권한을 줌.
- 김조근 의 딸을 왕비로 맞이(-1844)
1839년 기해박해 – 벽파인 풍양 조씨의 시파(안동 김씨 김유근) 공격
1840년 헌종의 친정.- 풍양 조씨의 세력이 우세(조만영:조대비의 父 -1846)
1846년 병오박해 - 김대건
* 김정희
<참고> 열녀 만들기
공인 열녀 태조-선조: 200 광해-숙종: 300 순조-철종: 350
14)宣祖(41) - 15)光海君(15) - 원종 - 16)仁祖(27) - 17)孝宗(10) - 18)顯宗(15) - 19)肅宗(46) - 20)景宗(4) - 21)英祖(52) - 장조장조 - 22)正祖(24) - 23)純祖(34) - 익종(효명세자) - 24)憲宗(15) - 은언군 - 전계대원군 - 25)哲宗(14)- - 은신군 - 남연군 - 흥선대원군 - 26)高宗(43) - 27)純宗(4) |
조선시대 인구 인계급별 인구
1849년 조선 철종(사도세자의 증손) 즉위 1849-1863(14.6년)
- 순원왕후(헌종의 할머니)의 수렴청정. 안동 김씨 득세
1852년 철종의 친정 – 철종의 장인 김문근이 영은부원군으로 국정을 도맡음.
1853년 김좌근(金左根 김조순의 3남) 영의정(3번이나 영의정 보직)
1860년 경신박해 [庚申迫害] - 청계천 준천사업
최제우(1824-1864)가 동학 창도
1861년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간행
1862년 진주에서 임술민란(진주민란)시발(삼남을 휩쓴 동시다발적 민란). * 임술민란
- 9월 제주 민란을 비롯 삼남 지방에 32개의 민란 발생.(전국 70여 곳)
1863년 고종 황제 12세로 즉위, 1863-1907(43.7년)
(신정왕후(조대비) 섭정1863-1874) 흥선대원군 개혁 - 국민생활의 새 풍조 * 흥선대원군
1864년 동학의 교조 최제우가 처형됨 * 최제우(1824-1864)
- 러시아인 5인이 경흥으로 와서 처음으로 통상 요구(65년에 다시 세차례 요구)
1865년 임란 때 소실한 경복궁 중건 * 경복궁 중건(1865-1872) * 최한기
1866년 병인사옥(병인박해) – 절두산에서 8천여명 절두, 프랑스 신부 9명.(최대 규모).
미국 상선 대동강의 제너럴셔먼호 사건 명성황후(15세)간택
병인양요(프랑스): 7척의 군함, 강화부를 점령(1개월 만에 철수) - 쇄국양이(鎖國攘夷) 정책 강화
당백전 주조.
오페르트의 남연군묘도굴사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
1868년 궁인 이씨가 완화군(완친왕)을 낳음. 국왕 경복궁으로.
최익현,경복궁 중건 중지를 촉구하며, 원납전, 당백전 비판의 상소문
서원철폐: 서원에 하사한 토지도 세금을 징수하도록 하고, 전국 650개 서원 중 47개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철폐.
일본, 메이지 유신 [明治維新] * 최익현 * 최익현 지부상소
* 흥선대원군
<민란,화적>
1869년 漆原民亂, 光陽民亂, 함경 평안에 흉년,두만강 지역 주민 대거 간도로 이주.
80년대 화적 급증.
1871년 신미양요(미국) - 척화비 세움. 쇄국양이(鎖國攘夷) 정책 강화. 서원철폐령
호포제戶布制 실시 - 양반도 평민과 마찬가지로 군포를 부담.
- 호포제 실시 전(1792): 납부층 양인 15%, 면제층 양반 49%, 면제층 노비 36%
호포제 실시 후(1872): 납부층 양반 양인 74%, 면제층 관리 19%, 면제층 노비 7%
1873년 민승호, 민규호, 조영하 등이 최익현 등의 유학자들을 앞세워 흥선대원군 축출. * 최익현
- 고종 친정(민씨 세도 정치) * 민승호 민규호 민겸호
- 대원군 견제를 위한 淸錢 사용 금지, 광동의 사문포 수입.
1874년 2월 명성황후, 둘째 아들 척(坧, 훗날의 순종)을 낳음.
민승호(명성황후의 양오라버니. 흥선대원군의 처남) 폭사
1873 메이지 6년 정변 = 정한론 정변(征韓論政変)이라고도 한다. - 정한론자들 하야 * 정한론
1875년 운요호 사건 * 운요호 사건
1876년2월 조선과 일본간에 강화도 조약(병자수호조약) 체결 * 강화도 조약
– 부산,원산(1880),인천(1883) 개항 (영국산 면직물, 석유-무관세 ↔ 쌀, 콩, 쇠가죽)' * 청과 일본의 상권 침탈
이준용(대원군의 장손) 추대 음모 * 일본과 청 상인의 경제 침투
1879 일본의 琉球 병합 - 오키나와 현을 설치 (류큐 처분)
1880년 일본으로 김홍집개 일행의 수신사 파견. <조선책략> 고종에 바치다 - 親中國, 結日本, 聯美國
- 지석영, 사설 우두국 설치. * <조선책략>
1881년 중국의 總理各國事務衙門을 모방하여 통리기무아문(개화를 주도할 제도적 중심) 설치하고
별기군 설치 - 오군영(五軍營)으로부터 80명 차출. 나중에 상류층 자제 100명 충당.
9월13일 안기영(남인) 등의 주도로 흥선대원군의 서장자 이재선을 옹립하려는 음모 사건이 발각.
* 임오군란
1882년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체결, (청의 이홍장이 개입 주도.)
7월 임오군란 대원군 1개월(33일) 집권
– 위안스카이(우창칭 휘하)군대 3천 입성, 대원군을 텐진으로 납치(-1885)
8월 30일: 일본과 제물포조약 - 조선 정부의 공식 사과를 위한 수신사 파견(박영효 등)
8월23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
10월: 위안스카이[袁世凱], 조선 장정 1천명을 선발하여 조련
(청국이 포 10문, 포탄 3천 발, 영국식 소총 1천정, 탄약 1천 파운드를 원조)
12월: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 초빙.
1883년5월: 미국 공사 푸트 부임. - 보빙사 미국 파견
* 세창양행
1884년 한로 수호 통상 조약
12월 4일 갑신정변(3일 천하) – 민씨세력 제거 - 8월 청.프랑스전쟁(3개대대 철수)
- 김옥균·박영효·홍영식, 서재필 등 개화당(노론 북학파의 학통)
* 갑신정변
1885년 거문도 사건(- 87/2월) - 영국군이 거문도 점령 - 러시아 견제(아프카니스탄 국경 요지 메르브 점령)
4월 18일, 이또 히로부미와 이홍장의 톈진 협약
10월 대원군 돌아오다.
- 위안스카이[袁世凱], 駐劄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라는 새 직함 받고 부임 ('조선총독'같이 행세)
위안스카이袁世凱1859~1916
1886년 육영공원 설립 (1885년 제중원, 전보국 설립),
이화학당(1886년 1명, 1887년 7명, 1888년 18명, 1893년 30명)
<참고> 신문
한성순보(1883), 한성주보(1886), 독립신문(1896), 제국신문(1898), 황성신문(1898), 대한매일신보(1904),
<참고> 교통
전차(서대문-청량리 1899), 철도(노량진-제물포 1899, 경부선 1905)
1887년 위안스카이, 고종이 러시아에 보호 요청 밀약을 알고, 흥선대원군과 결탁하여 고종을 폐위시키고
이재면을 옹립하려는 계획을 세우다.(프랑스→베트남, 영국→미얀마)
1888년 연무공원 설립
주미 공사로 박정양을 파견했다가 袁世凱의 강요로 부임 10개월만에 소환.(이완용, 참찬관으로 파견)
* 박정양
1889년 함경도 관찰사 조병직이 방곡령을 발표.
1892년 봄, 운현궁에 화약이 터지고 여러 건물에 장치된 화약이 발각된 사건이 발생
1893년3월 동학 교도의 교조 신원을 호소
<당시 서류상의 조선 총병력 7500, - 경군 친위대 4000, 지방군 진위대2500>
1894년 동학 농민 운동(-1895) * 최시형(1827~1898) 전봉준(1854~1895) 김개남 조병갑
<1차> 음력 1월의 고부 농민 봉기 - 2월 15일
<1.5차> 4월의 전주성 봉기 - 5월4일
<2차> 9월의 전주, 광주 궐기 - 10월
6월3일 민영익이 좌의정 조병세의 명의로 袁世凱에 청군의 청병문을 전달
6월6일 이홍장, 조선 출병을 일본에 알림.
6월10일 일본 해군육전대 430명 서울에 입성일
6월11일 중국 직례총독 섭지초가 이끄는 청군 아산만에 상륙(1500명).- 노략질,부녀자 겁탈
- 농민군 전주성에서 자진 해산. - 전봉준 전주 등지에 집강소, 김개남 남원 함락
6월12일 일본 보병 1000명 인천에 상륙. 16일 4500명.
7월23일 일본군 4천 경복궁 점령, 친일 내각을 구성. 새 내각 청나라와의 모든 조약 파기, 일본군에 북양군을
조선에서 몰아내도록 허가. - 청군 아산만에 500 추가하여 2천명.
(중국이 영국과 러시아에 조정 요청)
* 청일 전쟁지도 (94년7월25일 -95년4월) * 청일 전쟁지도
7/25; 풍도 해전
7/28; 성환 전투 (후퇴하는 청군 황주에서 노략질)
8/28 청군 증원군 압록강 건너 평양 도착(압록강 건너 오는 도중에 악랄한 약탈 행위 ),
9/15; 평양 전투 (청군 1만 5천,) 평양 관찰사 민병석(청군과 연합) ↔ 장위영(일본군 연합)
9/17; 황해 해전 (압록강 하구)
10/23-27 압록강 전투
11/21; 여순 함락.
95년1/23 웨이하이 함락 (대소 군함 15척, 어뢰정 13척 싸움도 못해봄)
3/29 타이완 상륙
* 1894년 3/28 김옥균 암살
* 7월27일 갑오개혁 - 김홍집親日↔ 박영효親日, 박정양, 민영달 * 갑오개혁
-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3개월 동안 210건의 개혁안을 의결
- 대원군이 7,8월 달포에 걸쳐 섭정, 일본과의 입장 차이로 은퇴.(10/21 정계 은퇴 성명) * 김홍집
- 2차 갑오개혁: 홍범 14조의 반포 (1894년12월 - 1895년 5월). 홍범 14조
(1차 개혁 94.7)→(2차 개혁 94.12)→(을미사변 95.8)→(3차 개혁 95.8)→(아관파천-개혁 중단 96.2)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청일전쟁 강화 성립. 타이완, 요동 반도 일본에 할양
5/5 일본이 러,불,독의 3국 간섭 수용(요동반도의 영구 점령 포기)
- 친로적 내각, 친로파 득세, 탐관오리(대부분 민씨 세력) 260명 석방.
10/8 을미사변 (명성황후 시해) * 을미사변 (명성황후 시해)
<참고> 한 때 생명의 위험을 느낀 고종은 통조림과 계란만 먹었다
1896년 연호를 건양으로 정함(1월1일부터 양력 사용) 단발령. * 유길준
2/11 아관파천 (→97년 2/20) - 97년 12월, 러시아 제국의 함대가 여순항에 * 아관파천
5월(1-8월) 민영환 러시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파견(이홍장 대면)
7/22 서재필, 독립협회 결성(안경수, 윤치호, 이상재, 이승만, 박정양 등) 4월 독립신문
* 독립협회
1897년 2월 수리한 경운궁(덕수궁)에 환궁
10월 대한제국 : 고종이 제위에 등극, * 광무개혁(舊本新參)
12월 독립협회 해산
* 안종덕의 상소 * 송규헌의 상소 * 신기선(申箕善)의 상소
1900년 경인선 철도 개통 1901년 경부선 착공
7-11월 중국의 의화단 운동으로 함경,평안 지방에 피해
1902년1월 영일 동맹 성립(러시아 견제)
4월, 중국, 러시아와 만주환부조약 체결(6개월 단위로 3차에 철군하기로 했다가 2차에서 약속을 어김)
- 고종 즉위 40돌 경축(그러나 기념식은 콜레라 창궐과 러일전쟁 등으로 치루지 못함)
조선 총병력 1만7500
(시정 잡배를 뫃아 놓은 군인은 민중을 수탈하는 조직 폭력배,무장 강도-화적보다 악랄했다)
1902-05년 한국인 7000명 하와이 이민.
1904년 2/8 러일 전쟁 , 2/23한국과 일본간에 한일의정서 체결
8월22일 제1차 한일 협약
1905년 9월, 미국의 주선으로 러일전쟁의 강화조약인 포츠머스 조약 조인.
11/17 을사조약 체결 (五賊: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반대: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기권: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 無關: 궁내부대신 이재극
1860년 베이징 조약 - 영국, 프랑스, 러시아와 체결한 조약(약탈, 방화, 조직적인 원명원 약탈)- 러시아에 연해주(주도 블라디보스톡) 할양(1689네르친스크 조약’ 1858아이훈 조약 –흑룡강 북쪽의 땅 할양)1866년 병인양요(프랑스)- 쇄국양이(鎖國攘夷) 정책 강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 사건 1868년 메이지 유신 [明治維新]1871년 청일통상조약(淸日通商條約)체결.1876년 조선과 일본간에 강화도 조약(병자수호조약) 체결 – 부산,원산,인천 개항1880년 김홍집개 일행의 수신사 파견. <조선책략> 고종에 바치다 - 親中國, 結日本, 聯美國,- 러시아 젼제1881년 통리기무아문(개화를 주도할 제도적 중심) 설치. 일본으로 조사시찰단(신사유람단)개 파견, 별기군 설치 1882년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체결, 임오군란1884년 한로 수호 통상 조약 갑신정변(3일 천하)1894년 동학 농민 운동(-1895). 청일 전쟁 (94년7월25일 -95년4월). 갑오개혁1895년 3국 간섭. 을미사변 (명성황후 시해)1896년 2/11 아관파천 (→97년 2/20) 7/22 서재필, 독립협회 결성1897년 대한제국 |
1906년 통감부 설치 (초대통감 06년 3/2 – 09년 6/14)
1907년 6어, 헤이그 특사 사건 - 고종 깅제 퇴위 * 신민회
7/20 순종황제 즉위 1907-1910(3.년)
7/24 제3차 한일신협약 8/1 일본군이 포위한 가운데 군대 해산식.
12/5 영친왕 일본 유학
장인환 전명운 의거 * 전명운 장인환
1909년 9월 청일간의 간도 협약
10/26 안중근(1879-1910.3.26)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
<참고> 조선 인구 변동
1670-71년 경신 대기근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조선총독부 설치 이완용 이용구 송병준
의병 황동
1911년 제1차 조선교육령 공포
1912년 토지조사령 공포 * 조선 토지 조사 사업
조선태형령 시행 규칙 제정
· 대조선국민군단
1914년 하와이에서 국민군단 조직
1917년 6월 순종의 일본 방문.
1918년 한인사회당 결성
임시 정부
1919년 1/21 고종 사망, 3·1 독립운동,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
4/15 제암리 학살사건
1920년 산미증식계획
6월 홍범도 봉오동 전투
의열단 - 김원봉(1898-1958) * 김원봉(1898-1958)
1923년 제2차 조선교육령
1923년 조선물산장려회가 창립 * 물산장려운동
1925년 조선공산당 결성 * 조선공산당
1927년 신간회 창립 - 회장 이상재, 부회장 권동진, 안재홍, 신석우, 문일평을 비롯한 간사 35명,
* 민족유일당운동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남 * 이회영 * 이시영
1932년 이봉창·윤봉길 의거 * 김구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 결성
1936년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이 금메달, 남승룡이 동메달을 수상,
1936년 보천보 전투
1936년 조선의용대 창설
1937년 연해주 고려인의 강제 이주
1938년 일본, 국가 총동원법 의회 통과 - 의회의 동의 없이 전쟁 수행에 필요한 어떤 조치도 즉각 실시할 수 있는 법
- 조선, 타이완, 만주국에서 강제징용, 징병(징병은 1943년에 시행), 식량 공출 등 전시통제체제가 시행되었다
1939년 징용령
1940년 한국 광복군 창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
1943년 카이로 선언 발표
1945년 8월 15일 광복,
8월 15일 여운형과 안재홍등을 주축으로(이북에는 조만식) 건국준비위원회(건준)창립.
8월 18일 박헌영, 조선 공산당 재건준비 위원회회 결성, 9월에 공산주의 세력 건준 장악.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인공)수립,(박헌영이 주도)
9월 9일 미군, 서울 입성.
10월 10일 “38도 이남에는 미군정만 있다” 선포
10월 14일 김일성, 평양에 공식 등장
10월 16일 이승만 귀국
11월 23일 김구 등 임정 요인 귀국.
군정청 설치
12월 모스크바 삼국 외상 회의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
7월, 좌우합작운동 좌우합작운동
1947년
1948년 4월 3일 제주 4·3 사건
4월 김구, 김규식이 김일성과 김두봉을 상대로 남북 협상 전개
5월 10일 남한 총선거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9월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10월 여수·순천 사건
1949년 6월 농지개혁 [農地改革] * 농지개혁법
6월 21일 국회 프락치 사건 * 조작 여부로 논란 많은 국회프락치 사건
12월 문경 양민학살 사건.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 발발 * 한국 전쟁
북한군: 13만 5천여 명 대한민국: 정규군 6만 5천여 명, 해양경찰대 4천여 명, 경찰 4만 5천여 명
인구 : 남한 2.100만 북한: 900만
6월 25일 새벽 4시 경, 기습 남침하였다. 오전 9시경 개성방어선 격파 당일 오전에 동두천과 포천을 함락
26일 오후 의정부, 27일 정오 서울 도봉구의 창동방어선을 넘었다.
27일 미국 출병, 7함대를 타이완해안에 배치
28일 새벽 서울 시내 점령, 오전 2시 30분 한강대교 폭파,
9월 15일 더글러스 맥아더의 총지휘하에 인천 상륙 작전을 감행하여 성공하였다.
9월 28일 낙동강 방어선을 넘어 대대적 반격 개시, 같은 날 서울 중앙청에서 이승만 대통령 서울수복식 거행.
10월 19일 평양 탈환, 26일에는 국경지대인 초산까지 이르렀다.
10월 25일 중공군 개입(41만)
11월 26일 - 12월 13일 장진호 전투
12월 15일-12월 24일, 흥남 철수: 193척의 군함으로 군인 10만 명, 민간인 10만 명을 남쪽으로 탈출
1951년 1월 4일, 1·4 후퇴
2월 거창 양민학살 사건
1월-2월 국민 방위군 사건
3월 14일, 서울 재수복
7월 8일, 개성에서 정전회담 예비회담 개최, 10월 25일 회담장소를 판문점으로 옮김
11월 28일, 당시 전선을 임시 휴전선으로 채택, 전투가 소강상태에 들어감 - 제한공격(制限攻擊) 전법 채택
1952년 6월 20일 국제구락부사건
1952년 7월 4일 부산 정치 파동 – 발췌 개헌
1953년 6월18일 반공 포로 석방
7월 27일 휴전 협정 조인
1954년 11월 17일 사사오입 개헌
1958년 1월 13일 진보당 사건
1958년 3월 3일 천리마 운동이 시작
1960년 3월 15일 3·15 부정선거
1960년 4월 19일 4·19 혁명
6월 15일 대한민국 제2공화국 헌법 공포, 윤보선 대통령 취임
8월 장면 내각 출범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등이 5·16 군사 정변
1963년 12월 26일 대한민국 제3공화국 헌법이 공포, 박정희 대통령 취임
1964년 10월 31일 대한민국과 월남 간에 파병 협정이 체결
1965년 6월 22일 대한민국과 일본 간에 한일기본조약 조인되어 국교가 정상화
1965년 7월 동백림 간첩단사건
1969년 3월 28일 김수환 대주교, 추기경에 서품
10월 3선개헌 국민 투표 통과
1969년 7월 21일 경인고속도로 개통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 개통
1971년 박정희, 김대중을 누르고 대통령 3선 당선.
1972년 7월 4일 7·4 남북 공동 성명 발표
12월 27일 대한민국 유신헌법 공포
1974년 8월 15일 서울 지하철 1호선 개통, 영부인 육영수가 피격당해 사거
1975년 긴급조치 제9호
1977년 100억달러 수출 달성
1979년 10월 26일 10·26 사건이 일어나 박정희 대통령 피격 사망
1979년 12월 12일 12·12 군사 반란
1980년 5월 18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1980년 10월 27일 대한민국 제5공화국 헌법 공포
1983년 6월 30일 KBS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이 시작
1983년 10월 9일 아웅산묘역 폭탄테러사건이 일어남
1984년 5월 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
1985년 7월 19일 부산 도시철도 1호선이 개통
1987년 1월 14일 박종철이 고문으로 사망
1987년 6월 29일 6.29 선언
1987년 10월 29일 대한민국 현행 헌법이 공포
1987년 11월 29일 대한항공 858편 실종사건이 일어남
1988년 9월 17일 88 서울 올림픽
1990년 1월 22일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이 3당 합당을 선언하고 민주자유당을 결성
1991년 소련, 25개 공화국으로 해체
1993년 2월 25일 김영삼 대통령 취임, 문민정부 출범
1993년 3월 12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핵 확산 금지 조약 탈퇴를 선언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사망, 김정일 국방위원장 집권
1994년 10월 21일 성수대교가 붕괴
1995년 4월 28일 대구 상인동 가스 폭발 사고가 일어남
1995년 6월 29일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일어남
1997년 2월 12일 황장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노동당서기가 대한민국으로 망명
1997년 8월 6일 대한항공 801편이 괌에서 추락
1997년 11월 21일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
1998년 2월 25일 김대중 대통령 취임, 국민의 정부 출범
1999년 11월 18일 금강산 관광이 시작
2000년 6월 15일 6·15 남북 공동 선언 발표
2002년 5월 31일 축구 월드컵 한국과 일본에서 공동 개최
2003년 2월 18일 대구 지하철 화재사고가 일어남
2003년 2월 25일 노무현 대통령 취임, 참여정부 출범
2004년 3월 12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이 국회를 통과
2004년 4월 1일 KTX 개통
2004년 4월 22일 룡천 열차폭발 사고가 일어남
2004년 5월 14일 대한민국의 헌법재판소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을 기각
2004년 10월 21일 대한민국의 헌법재판소가 신행정수도법 위헌 확인 결정|행정수도 이전법을 위헌이라고 확인
2005년 2월 3일 대한민국의 헌법재판소가 호주제에 대해 헌법 불합치 선고를 내림
2006년 12월 5일 수출 3000억 달러 돌파
2007년 1월 23일 인민혁명당 사건에 대해 대한민국의 대법원이 무죄를 선고
2007년 10월 2일~10월 4일 제2차 남북정상회담 개최.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 발표
2008년 2월 25일 이명박 대통령 취임, 이명박 정부 출범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2009년 8월 18일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2010년 3월 26일 천안함 침몰
한국인의 디아스포라
미국 209만 캐나다 20만 중남미 11만 유럽 61만 아프리카 1만 중동 2만
중국 257만 일본 89만 아시아 기타 48만
현재 176개국 7백만 인구대비 세계 4위(중국,이스라엘, 이탈리아)
[ 조선의 통치 기구 ]
국왕 | |||||||||||||||
종친부 | 경연 | ||||||||||||||
돈녕부 | |||||||||||||||
충훈부 | |||||||||||||||
의빈부 | 의금부 | 승정원 | |||||||||||||
중추부 | |||||||||||||||
한성부 : 정2품 판윤개성부 : 종2품 유수각 도 감영종2품 관찰사각 부(관찰사와 동급)종2품 부윤각 도 군영병영 병마절도사수영 수군절도사 | |||||||||||||||
사헌부 | 사간원 | ||||||||||||||
내금위 | 오위도총부 | ||||||||||||||
겸사복 | |||||||||||||||
의정부 | |||||||||||||||
이조 | 호조 | 예조 | 병조 | 형조 | 공조 | ||||||||||
・ 충익부・ 내시부・ 상서원・ 종부시・ 사옹원・ 내수사・ 액정서 | ・ 내자시・ 내섬시・ 사도시・ 사섬시・ 군자감・ 제용감・ 사재감・ 풍저창・ 광흥창・ 전함사・ 평시서・ 사온서・ 의영고・ 장흥고・ 사포서・ 양현고・ 오부 | ・ 홍문관・ 예문관・ 성균관・ 춘추관・ 승문원・ 통례원・ 봉상시・ 교서관・ 내의원・ 예빈시・ 장악원・ 관상감・ 전의감・ 사역원・ 세자시강원・ 종학・ 소격서・ 종묘서・ 사직서・ 빙고・ 전생서・ 사축서・ 혜민서・ 도화서・ 활인서・ 귀후서・ 사학・ 문소전・ 연은전・ 경기 능전 | ・ 오위・ 훈련원・ 사복시・ 군기시・ 전설사・ 세자익위사・ 세손위종사 | ・ 장례원・ 전옥서 | ・ 상의원・ 선공감・ 수성금화사・ 전연사・ 장원서・ 조지서・ 와서 |
[ 조선의 품계 ]
품계 | 상하 | 문산계 | 관직 | 부서 | |
당상관 | 정1품 | 상하 | 대광보국숭록대부보국숭록대부 | 영의정좌의정, 우의정 | 의정부 |
당상관 | 종1품 | 상하 | 숭록대부숭정대부 | 좌찬성, 우찬성판사 | 의금부 |
당상관 | 정2품 | 상하 | 정헌대부자헌대부 | 판윤 좌참찬, 우참찬대제학, 판서 | 한성부홍문관, 육조 |
당상관 | 종2품 | 상하 | 가의대부가선대부 | 대사헌, 관찰사, 부윤참판, 동지중추부사 | 사헌부 |
당상관당하관(참상관) | 정3품 | 상하 | 통정대부절충장군통훈대부어모장군 | 승지, 목사, 부사, 참의충익위장, 첨지, 대사성대사간오위장, 별장 | 승정원사간원 |
당하관(참상관) | 종3품 | 상하 | 중직대부건곤장군중훈대부보공장군 | 집의[3], 도호부사, 사간선전관, 첨사대호군 | 사간원 |
당하관(참상관) | 정4품 | 상하 | 봉정대부진위장군봉렬대부소위장군 | 응교[3], 전첨호군군수, 사인, 장령[3] | 홍문관 |
당하관(참상관) | 종4품 | 상하 | 조산대부정략장군조봉대부선략장군 | 경력, 첨정부호군, 만호수문장 | 의금부 |
당하관(참상관) | 정5품 | 상하 | 통덕랑과의교위통선랑충의교위 | 전수, 정랑, 헌납사직지평, 교리, 별좌 | 내수사 |
당하관(참상관) | 종5품 | 상하 | 봉직랑현신교위봉훈랑창신교위 | 판관, 도사, 현령부사직 | 한성부 |
당하관(참상관) | 정6품 | 상하 | 승의랑돈용교위승훈랑진용교위 | 수찬좌랑, 감찰 | 홍문관 |
당하관(참상관) | 종6품 | 상하 | 선교랑여절교위선무랑병절교위 | 부수찬[3], 교수, 현감부장, 종사관찰방, 주부, 전적, 인의감목관, 부사과 | 홍문관 |
참하관 | 정7품 | 무공랑적순부위 | 박사사정, 참군 | 홍문관 | |
참하관 | 종7품 | 계공랑분순부위 | 직장부사정 | ||
참하관 | 정8품 | 통사랑승의부위 | 저작사맹 | ||
참하관 | 종8품 | 승사랑수의부위 | 봉사부사맹 | ||
참하관 | 정9품 | 종사랑효력부위 | 정자, 훈도사용, 선전관, 세자익위사, 좌세마, 우세마 | ||
참하관 | 종9품 | 장사랑전력부위 | 참봉, 역승, 도승초관, 부사용, 선전관, 수문장, 척후장 |
<참고> 당상. 참상.
당상: 정3품 상위/정3품 히위 참상:6품/7품 목민관은 참상관 이상이어야 함
<내명부>
품계 | 무계 상(上) | 무계 하(下) | 정1품 | 종1품 | 정2품 | 종2품 | 정3품 | 종3품 | 정4품 | 종4품 | 정5품 | 종5품 |
내명부 | 왕비(王妃)내명부 수장 | 빈(嬪) | 귀인(貴人) | 소의(昭儀) | 숙의(淑儀) | 소용(昭容) | 숙용(淑容) | 소원(昭媛) | 숙원(淑媛) | |||
세자궁 | 세자빈세자궁 수장 | 양제(良娣) | 양원(良媛) | 승휘(承徽) | 소훈(昭訓) |
궁관 -《경국대전》의 내명부 제도
종9품 - 주변징(奏變徵), 주징(奏徵), 주우(奏羽), 주변궁(奏變宮)
무수리는 궁관에 속하지 않으며(궁관의 하인 격이다), 세자궁에는 종6품에서 종9품까지만 있었다.
방계 혈통 임금
조선 14대 왕: 선조 (중종과 창빈 안씨의 아들 덕흥대원군의 3남)→명종과 인순왕후에게 출계
조선 15대 왕: 광해군 (선조와 공빈 김씨의 차남)→명나라의 세자책봉 고명을 받지 못한 채 즉위
조선 16대 왕: 인조 (선조와 인빈 김씨의 아들 정원군의 장남)
조선 20대 왕: 경종 (숙종과 희빈 장씨의 아들)→인현왕후에게 입적
조선 21대 왕: 영조 (숙종과 숙빈 최씨의 아들)→인원왕후에게 입적
조선 22대 왕: 정조 (영조와 영빈 이씨의 아들 사도세자의 차남)→진종과 효순왕후에게 출계
조선 23대 왕: 순조 (정조와 수빈 박씨의 아들)→효의왕후에게 입적
조선 25대 왕: 철종 (사도세자의 후손, 은언군의 손자, 전계대원군의 3남)→순조와 순원왕후에게 출계
조선 26대 왕: 고종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후손, 연령군-낙천군-은신군 가계로 출계한 남연군의 손자, 흥선대원군의 차남)→익종과 신정왕후에게 출계
조선 국왕의 수명
재위순서/칭호 | 수명 |
1대 태조 | 74 |
2대 정종 | 63 |
3대 태종 | 56 |
4대 세종 | 54 |
5대 문종 | 39 적장자 |
6대 단종-노산군 | 17 적장자 |
7대 세조 | 52 |
8대 예종 | 20 |
9대 성종 | 38 |
10대 폐왕-연산군 | 31 적장자 |
11대 중종 | 57 |
12대 인종 | 31 |
13대 명종 | 34 |
14대 선조 | 57 방계 혈통 |
15대 혜종-광해군 | 67 방계 혈통 |
16대 인조 | 55 방계 혈통 |
17대 효종 | 41 |
18대 현종 | 34 적장자 |
19대 숙종 | 60 적장자 |
20대 경종 | 37 방계 혈통 |
21대 영조 | 83 방계 혈통 |
22대 정조 | 49 방계 혈통 |
23대 순조 | 45 방계 혈통 |
24대 헌종 | 23 적장자 |
25대 철종 | 33 방계 혈통 |
26대 고종 | 67 방계 혈통 |
27대 순종 | 53 적장자 |
· 조선시대 인구
[조선 시대 인구]
(13) 조선시대의 인구 -장기 변동
작성된 호구단자. 경주부에 제출한 것으로 가족은 본인 포함 8명(처, 아들 3명, 며느리 2명, 손자 1명)으로 적고 있다. 가족 외에 노비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록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조선시대 전 기간의 경제적 변화를 한눈에 파악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인구 추세를 그려보는 것이다. 인위적인 산아제한이 곤란하였던 전근대 사회에서 인구는 경제적 변화를 초래하고 생활수준을 결정하는 근본 요인이었을 뿐 아니라 결과이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상황이 호전되어 자원, 특히 식량이 풍부해지면 출생률이 높아지고 사망률이 낮아져서 인구 증가율이 높아지지만, 자원에 비하여 인구가 많아져 인구 압력이 높아지게 되면 출생률이 낮아지고 특히 사망률이 높아지게 되어 인구 증가율이 낮아지고 심하면 인구가 감소하게 된다. 전근대는 ‘다산다사’의 시대로 출생률이 높았지만 사망률도 높았기 때문에 인구증가율은 매우 낮은 수준이었다. 인구 규모로부터 변화의 속도나 방향, 그리고 원인까지 알 수 있게 된다면 전근대 농업사회의 경제적 변화에 관해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조세 징수 목적으로 3년마다 호구조사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의 전근대 인구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비교적 자료가 많이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인구에 대해서도 아직 정설이 확립되어 있지 못하다. 조선시대에는 3년마다 매 가호에서는 『경국대전』의 규정(戶口式)에 따라서 가족과 노비를 기록한 ‘호구단자’(戶口單子)를 소속 군현의 수령에게 제출하였다.
각 군현에서는 이에 기초하여 호적대장을 3부 작성하여 한 부는 해당 군현에서 보관하고 다른 2부는 감영과 호조로 보냈는데, 이로부터 전국의 호구 총수가 집계되었다.
이 호구 총수(1393~1861)에 의하면 조선왕조의 인구는 건국이후 15세기의 빠른 증가, 임진왜란(1592~1598) 이후 감소, 전쟁이후 17세기의 급속한 증가, 18세기의 정체, 19세기의 감소라는 추세를 그리며 변동하고 있었다(그림).
인구 임진왜란으로 감소 후 다시 증가
건국 이후 15세기에 인구가 빠르게 증가한 것은 정치적 혼란이 수습되고 국방이 강화되어 사회적 질서가 수립되는 한편 농업기술의 발전에 의해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능력이 커졌기 때문일 것이다. 16세기 중엽에는 남부지방에는 더 이상 개간할 땅이 없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인구 증가가 한계에 도달한 것 같다. 여기에 임진왜란에 의한 인명 손실과 경지 황폐, 그리고 기근과 질병으로 인구가 격감하였다. 국가가 파악한 인구가 1543년 416만여명이었는데, 1639년에는 152만여명에 불과하였다. 이와 함께 임진왜란 직전에 150만결이었던 경지 면적도 전쟁 직후인 1601년에는 30만여결로 줄어들었다. 17세기에는 인구 압력이 해소되고 경제상황이 호전되어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였다. 버려졌던 경지가 다시 개간되었으며 1688년께에는 “산골짜기 사이와 바닷가의 조그만 토지도 모두 개간되어 실로 노는 땅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비변사등록 숙종 14년).
조선 건국 초기 인구 550만명 추정
조선시대의 인구와 연평균 증가율
이와 같이 호구 총수만으로 조선시대의 인구를 파악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조선왕조가 파악한 호구는 실상과 큰 차이가 있었다. 조선왕조가 파악한 인구는 1393년 30만여명, 1519년 374만여명, 1861년 674만여명에 불과하였지만 조선왕조의 호구 총수로부터 추정한 실제 인구수는 조선왕조 건국 초에 550만명, 19세기 1800만명 정도였다(표 참고). 국가가 조사한 호구 총수는 실제 인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런 차이가 발생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호구조사가 1925년부터 실시된 인구센서스와 같이 인구 관련 정보를 파악할 목적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조세 징수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세를 회피할 목적으로 인구를 실상보다 적게 신고할 인센티브가 지방 군현과 민간 모두 매우 컸다.
19세기 식량 부족 인구 증가율 정체
인구의 절대 규모도 문제지만 인구 변화의 속도와 방향을 호구 총수가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지도 의문이다. 특히 호구 총수로는 18세기에 인구가 정체되고 19세기에는 인구가 감소하였는데 이것이 실상을 제대로 반영한 것인지가 의심스럽다. 1788년 발간된 『탁지지』(度支志) 서문에 당시 1000만 인구가 필요로 하는 식량(5700만석)과 소비량(6000만석)을 비교하고 식량이 부족하여 굶주릴 수밖에 없다고 한 것을 보면 인구 압력이 매우 높았음은 틀림없다.
최근의 한 연구는 18~19세기는 국가의 통치력이 약화되는 시기였기 때문에 호구 총수가 실상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고 판단하고 양반 가문에서 전하는 족보를 이용하여 추계하였는데, 연평균 증가율이 18세기에 0.35%, 19세기에 0.83%로 19세기의 인구 증가 속도가 더 빨랐다. 이와 같이 19세기에도 인구 증가가 계속되었을까, 아니면 호구 총수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18세기에 인구 증가율이 낮아져서 19세기에는 인구가 정체하거나 감소하게 되었을까.
아직 어느 쪽이라고 확실하게 답할 수는 없지만 19세기에 조선 사회가 인구 압력에 시달리고 있었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