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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경묘 전체를 조망하여 촬영
묘역 입구의 금강송 군락지
정이품송 혼인목
묘역 내 비각과 정자각
3단 기단으로 형성된 묘소
묘소에서 아래쪽으로 바라본 모습
묘역 우측의 금강송 군락
준경묘 재실과 목조대왕 구거유지 사이에 있는 서낭당과 서낭목
목조대왕 구거유지 원경
목조대왕 구거유지 근경
준경묘영경묘연건청의궤 발간 1주년에 즈음한 준경묘답사기
필자는 작년 이 무렵, 그러니까 2012년 6월 중순 경 삼척시립박물관장 겸 학예연구사인 김태수 선배로부터 한권의 책을 받았다.
[국역 준경묘영경묘연건청의궤]. 의궤, 말 그대로 조선시대 왕실 및 국가 주요행사 후 후세에 참고하기 위하여 그 일의 전말, 의식절차 등을 총 망라해 놓은 귀중한 책이 아닌가. “의궤는 한때만 행해지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실로 만세에 걸쳐 행해지도록 만드는 것이다.”- 세종실록.“무릇 국가에 일이 있으면 의궤를 작성하여 훗날 살펴 볼 전거로 삼는 것이다.”명종실록. 정1품의 도제조(都提調)가 총괄하는 도감(都監)을 설치하고 행사의 시말을 기록하여 어람용과 분상용 책을 국가적 행사로 제작, 이를‘의궤儀軌’라고 칭한 이유를 위 실록이 말해 주고 있다. 프랑스국립도서관에서 145년 만에 외규장각 의궤가 돌아오면서, 2007년도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조선왕조 의궤가 등재되면서 일반인들이 널리 그 의미를 알게 되었다. 이렇게 한 왕조의 주요 행사와 의식을 총리급이 주관하는 임시기관을 설치하여 방대하고 체계적으로 기록한 유형은 동양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렵다는 점에서 자랑스러운 우리의 문화유산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1899년(광무3년) 우리 지방 ‘삼척’에서 행한 국가적 행사를 기록한 의궤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2012년 삼척시립박물관 조사연구총서 발간의 일환으로 국역 작업까지 마치고 출간된 바로 그 책, 의궤를 필자가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고향 삼척에 정착하여 살며 나름대로 실직국 이래 조선 건국의 탯줄이 여기서부터 발원하였다는 사실을 믿고 삼척 고향 문화에 천착하고 있는 필자로서는 실로 감동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의궤(국역 본과 함께 한문 원본을 스캔 인쇄함)는 짐작하디시피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5대 조부 이양무 장군의 무덤인 준경묘(濬慶墓)와 부인 이씨 무덤 영경묘(永慶墓)의 묘역정비공사를 행하였을 때 영건청을 세우고 그 시말을 책으로 기록한 것이다.
책을 출판한 도서출판 역사공간은 홈페이지에 다음과 같이 간략히 내용을 소개하였다.
「조경단 준경묘 영경묘 영건청의궤」 하편은 준경묘·영경묘의 추봉 경과, 묘역 정비 공사에 참여한 관원과 기술자 명단, 공사의 진행 과정, 관청 간의 업무 협조 내용, 공사에 들어간 물자와 비용, 공로자에 대한 시상 내역, 두 묘소의 관리와 운영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 등을 담고 있다. 즉 두 묘소의 추봉 및 묘역 정비 공사와 관련된 거의 모든 사항을 소상히 기록한 책이라 하겠다. 따라서 「조경단 준경묘 영경묘 영건청의궤」 하편은 삼척 지방사뿐만 아니라 조선 말기 사회사·경제사·건축사 등의 연구에 활용 가치가 높은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역자 강원대학교 배재홍 교수의 이 국역서에서, 고향 삼척 사랑의 끈을 놓지 않는 분들에게 꼭 알리고 싶은 부분을 발췌하여 본다.
영건청을 설치하여 당상(堂上)에 장례원 경(卿) 이호익, 장례원 소경(少卿) 심상황(沈相璜), 전라북도 관찰사 이완용, 장례원 소경(少卿) 이중하를 명하다.
위 당상 중 소경 가선대부 이중하가 준경. 영경묘 영건의 총책임을 맡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중하는 고종의 명의 받들고 삼척에 내려와 행한 묘역 중수의 공적 업무 뿐만 아니라, 지리적인 내용, 지방민의 삶까지 소상히 아뢰고 있다.
- 이중하가 아뢰기를 ‘관동빈흥록’어제御製 책문에는 “미로(미로면 일대를 칭함)리 뽕나무와 삼 심은 밭둑길은 예전과 같이 분유(한 고조 유방의 고향)의 경치일세”라고 정조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상이 이르기를 “묘소가 있는 동리의 크기가 어떠한가” 이중하 아뢰기를 “웅장한 산 깊은 골짜기 가운데 산기슭이 둘러싸고 있어 동리가 협소한데 이곳은 삼척 오십천 물길 중 가장 깊은 곳입니다. 오십천은 산봉우리가 휘감아 돌고 길이가 구불구불하여 하천을 만날 때 마다 다리를 놓은 것이 거의 50개나 되기 때문에 그렇게 일컫습니다. 신도 열네 번 하천을 건넜습니다.”상이 이르기를 “연로의 보리농사 작황은 어떠한가? 지난번에 내린 눈이 보리밭에 두껍게 쌓였는가?” 이중하 아뢰기를 “보리와 밀이 풍년을 점칠 수 있었습니다.”
이중하는 척주지(陟州志)를 바탕으로 삼척양묘지를 지어 고종께 바치는데 그 내용은 “목조대왕이 전주에서 삼척현으로 이사함에 따라 따라온 주민이 170여 가였는데, 나중에 바다를 건너 함길도 덕원 용주리로 이어할 때도 따라 갔다. 목조의 옛 집터가 부 서쪽 40리 지점 활기동에 있는데 세 방면 산이 높지만 동쪽 방면에 좋은 전지가 있어 양잠과 삼베로 이익을 올리고 있다. 옛 집터에는 돌담이 아직 남아 있고, 우물이 있다. 태조가 왕위에 오른 후 주민들이 왕대, 왕전, 어정이라 부르며 대대로 전해지고 있다. 중략. 태조께서 계유년(태조2년)에 목조의 외향이라 하여 삼척을 부(附)로 승격 시키고 홍서대를 외향의 후손되는 자에게 하사하여 봉안하게 하였다.”로 요약되는데, 이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 고대 실직국이었던 삼척이 고려조 때 삼척현으로 낮춰졌다가 태조 2년에 지금의 광역시 급으로 승격이 되었고, 백우금관 설화에 나오는 것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전주에서 함께 따라 이주해 온 사실을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중하는 청나라가 간도의 소유권을 주장할 때 토문감계사로 백두산정계비를 세우며 국경 정립에 공헌, 2011년 외교통상부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로 선정됨)
두 묘소의 추봉 및 묘역 정비공사가 끝난 후 고종황제는 대한준경묘大韓濬慶墓, 대한영경묘大韓永慶墓 어필을 쓰고, 비석 음기 시문을 직접 짓는다. 위 비석 전면 대자는 1899년 세운 비석에 어필 그대로 음각되어 있고, 음기 시문은 자헌대부 이근명이 칙령을 받아쓰고 그의 글씨로 음각하였다. “삼척 치소 서쪽 40리에 노동이라는 곳이 있으니 산이 두타산으로부터 뻗어 내려와 국세가 웅장하고 뛰어나 그 형상이 마치 호랑이가 엎드리고 있는 것 같은데, 신방을 등지고 을방을 바라보고 있는 묘소는 나의 목조 황고(皇考)께서 잠들어 계신 곳이다. 하략”
의궤에는 위에서 밝힌 것처럼 절차와 의식 등 모든 것이 망라되어 있으며, 더 세세하게 제를 올릴 때 진설하는 제물의 종류와 방법(첫째 줄 약과 4기, 둘째 줄 각색 과실 4기, 나물 3기등)까지 제시하고 있다. 준경묘의 헌관은 삼척군수, 전사관은 울진군수로 정하였고, 영경묘의 헌관은 강릉군수, 전사관은 평해군수로 후록하여 놓았다.
지면이 허락할지 모르겠지만 필자는 정확한 역사적 사료에 의하여, 고향을 잊지 않고 마음으로 지키시는 분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사실만을 국역 의궤에서 추려 옮겨 보았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준경묘에 서린 백우금관白牛金棺 설화를 빼면 의궤 내용 이해에 미진할 것 같아 간략히 그 내용을 서술해 본다.
“양무의 아들 이안사는 호걸풍으로 전주 관기(官妓)를 총애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주사(知州事)가 전주 고을 안렴사로 부임하는 산성별감을 접대하기 위해서 그 관기를 수청들게 하였다. 평소 지주사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안사는 크게 노했다. 그러자 지주사는 안렴사와 의논하여 이안사를 역적으로 음해하기 시작했다. 그 구실은 이씨가 왕이 된다는 목자왕기설(木子王氣說)을 이안사에게 혐의를 씌웠다. 이러한 사실이 고려조정에 알려지면 역모 죄로 멸문지화를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안사는 병든 아버지와 식솔들을 거느리고 밤을 틈타 머나먼 강원도 삼척으로 도망을 쳤다. 삼척시 미로면 활기동에서 자리를 잡고 산지 1년 만에 아버지 상(喪)을 당하였다. 이안사는 아버지 묘 자리를 구하려고 활기리 노동(盧洞) 산마루에 이르러 몹시 고단하여 나무 밑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이때 한 도승이 동자승과 함께 나타나 주위를 두루 살펴 인적이 없음을 확인한 뒤 한 곳을 가리키면서 "대지(大地)로다 길지(吉地)로다"하는 것이었다. 이안사가 나무 밑에 앉아 지켜보고 있는 것을 모르는 도승은 동자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었다.
"이곳이 제대로 발복 하려면 개토제(開土祭)에 소 백(百)마리를 잡아서 제사를 지내야 하고, 관을 금으로 만든 것을 싸서 장사를 지내야 한다. 그러면 5대손 안에 왕자가 출생하여 기울어 가는 이 나라를 바로 잡고 창업주가 될 것이다. 이 땅은 천하의 명당이니 함부로 발설하지 말라" 하는 것이었다.
이안사는 집으로 돌아와 생각에 골몰하였으나 소 백 마리를 잡을 형편도 아니고, 금으로 만든 관은 더욱 구할 수가 없었다. 이안사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궁여지책을 찾아내게 되었다. 이에 이안사는 소 백(百) 마리는 흰소(白牛) 한 마리로 대신하고 금관은 귀리 짚이 황금색이니 이것으로 대신하면 될 것으로 생각하고 관은 황금색 귀리짚으로 엮었다. 그리고 처가에 있는 흰 얼룩소를 백우(百牛) 제물로 잡아 장례를 올렸다.
부친의 묏자리를 잡은 이안사는 삼척에서 자리를 차츰 잡고 살았다. 그런데 자신과 싸우던 전주지사가 관동안렴사로 부임하여 삼척으로 순시를 나온다는 말을 전해 듣게 되었다. 이에 다시 짐을 꾸려 일족을 거느리고 함길도 덕원군 용주리로 도피하였다. 무예가 뛰어난 그는 여진족의 천호(千戶) 벼슬을 하면서 차차 그 지방에서 기반을 닦았고, 아들 이행리(익조)와 손자 이춘(도조)이 대대로 원의 다루가치를 지냈다. 춘의 아들 이자춘(李子春, 환조)은 원의 총관부 쌍성의 천호로 있으면서 공민왕의 반원정책을 도왔다. 그의 차남 이성계는 1388년 위화도회군 후 1392년 조선을 건국하여 왕에 올랐다. 도승의 예언대로 백우금관(百牛金冠)으로 이양무 묘를 쓰고 나서 5대 162년 만에 조선조 창업의 태조(太祖)가 된 것이다.”
필자는 고등학교 때 준경묘를 처음 가 보았다. 신기에 살고 있는 친구 따라 몇 명이 함께 갔는데, 당시만 해도 38국도 도로가 나지 않았고 지금처럼 올라가는 길도 정비가 되지 않아 어느 간이역에서 내려 무척 험한 길을 올랐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전설을 먼저 듣고 간 탓인지 모르지만 아직 세상물정 모르는 고등학생이 보이기에도 천하 명당의 지기를 느꼈던 기억이 난다.
그 후 30년이 넘도록 다시 가 볼 기회를 찾지 못하였다. 그런데 2012년 준경묘제례행사를 동행 취재하여 삼척문인협회 사이트에 올린 정연휘 시인(전 삼척문인협회장)의 포토엣세이를 보고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졌다. 영경묘는 2년 전 한번 다녀왔기에 후를 기약해도 되지만, 준경묘는 마침 이 글을 쓰기 위하여 꼭 다시 한 번 가보길 다짐하였고 6월 마지막 주 토요일, 마침 날씨가 좋은 날 답사를 다녀 올 수 있었다.
미로면 활기리 준경묘역과 오르는 길은 언제부터인가 삼척시에서 직원을 상주, 직접 관리를 하여 오르는 길부터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산등성이를 오르는 길은 생각보다 가팔랐고 시멘트 포장을 하였으나 무리하게 자연을 훼손하였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팔부능선까지는 참나무 군락이 이어졌다. 굴참나무, 졸참나무, 상수리나무 군락은 푸른빛이 더 짙어졌고 초여름 매미 떼 높은 음 소리에 여치의 울음소리도 함께 어우러져 여름 산행의 운치를 더 하였다. 몇 구비를 오르자 윗 능선부터는 완만한 황톳길이 쭉 이어진다. 이제부터는 솔숲이다. 아름드리 금강송이 길 양편으로 즐비하게 늘어서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2008년 숭례문 소실 후 복원에 쓰일 소나무가 이곳 준경묘역에서 대목장의 “어명이요”라는 소리를 받고 벌채되면서 준경묘와 일대의 원시림이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수령 수백년은 족히 됨직한 금강송들이 뿜어내는 피톤치드의 강한 기운이 폐부로 스미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길은 2005년 [아름다운 천년숲길]로 선정되어 삼림욕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품 숲길이 되었다.
묘역에 들어서자 왼편 창포를 심어 놓은 습지가 나타나고, 오른쪽 작은 도랑에는 자주빛 붓꽃과, 애기똥풀이 지고 있는 자리에 산괴불주머니꽃이 군락을 이루며 주위를 노랗게 밝히고 있다. 눈을 들어 묘역을 보니 붉은 홍살문, 단청 고운 비각과 정자각이 자리 잡고 있고 묘역 일대 수백평 잔디밭은 잔디를 깎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함초롬히 곱고 푸르게 펼쳐져 있었다.
비각은 굳게 잠겨 있었지만 안으로 자세히 보니 대한준경묘大韓濬慶墓 웅혼한 전서체 글씨가 뚜렷한데 바로 고종황제 어필이다. 의궤에서 본대로 비석 후면에는 음기 시문을 쓴 자헌대부 이근명이 칙명으로 글씨를 썼다는 내용도 어렴풋이 읽을 수 있었다. 묘 봉분은 3단 기단으로 널찍이 둘러싸여 있는데 기단의 석재에 낀 검은 이끼 자국이나 놓인 품새를 보아 의궤에서 밝힌 것처럼 영건청을 세우고 묘역을 중수한 1899년 당시 모습 그대로임을 짐작 할 수 있었다. 봉분 뒤, 좌우의 소나무들은 영월의 장릉처럼 묘를 향하여 경배하는 모습으로 몸을 숙이고 있었다. 봉분의 기단에 서서 동남쪽을 바라보니 웅혼하고 상서로운 기운이 감돌았다. 30년 세월이 훌쩍 지나 이제 지천명에 이른 필자가, 그 옛날 17세 청소년 때 이곳에서 느꼈던 기운을 다시 눈으로, 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정자각 아래에서 샘물을 마시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 샘물은 준경묘를 중심으로 좌우측에서 흘러온 양수와 음수가 합쳐져 진응수眞應水라고 부르는데, 몸에 이로운 기를 북돋아 준다고 한다. 정연휘 시인의 말에 의하면 실제로 생남 등 효험을 본 사람이 많다고 한다.
필자는 묘역에서 다시 한 번 경배하고, 천천히 오던 길을 되짚어 하산을 하였다.
활기리 마을에서 그냥 돌아 올 수는 없어 목조대왕 구거지를 찾아보기로 하였다. 대왕의 구거지는 활기마을 위 쪽 지방도 도로에서 얼마 지나지 않는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준경묘 재실과도 멀지 않는 곳이다. 이중하가 척주지를 바탕으로 고종께 아뢰었던 바로 그 마을 터인데 당시는 뽕나무와 대마 농사를 지었을 이 조붓한 벌판에 지금은 푸른 벼가 자라고 있다. 부친을 저 산 너머 노동에 안장하고, 목조 이안사는 이곳에서 17년을 살았다. 그가 삼척을 떠난 지 150년 후 4대손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개국 2년 만에 5대 조부 묘소에 대한 추념의 정으로 삼척을 부로 승격시키고 외향으로 우대하였다. 후에 도호부로 개편하였지만 대한제국에 이르러 전국이 군(郡)으로 개편될 때까지 삼척은 부(府)의 지위를 유지하였다. 백우금관 설화의 주인 고려장군 이양무의 24세손 고종황제는 그가 삼척 활기리 노동에서 잠든 지 600년이 지나 묘역을 정비, 중수하고 준경이라는 묘호를 올린다. 그리고 「조경단 준경묘 영경묘 영건청의궤」를 후대에 남겼다.
일제강점기 강압으로 제례가 끊기고 해방 후 영동 4개 시 군의 이씨종친으로 구성된 봉향회에서 지내던 준경묘 제례가 2011년부터는 왕릉제례보존회와 전주이씨대종약원에서 주관하며 종묘제례형식에 따라 봉행하고 있다. 조선시대 왕릉(王陵) 40기는 2009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고, 종묘제례는 2001년도에 이보다 먼저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에 기록되었다.
필자는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세계만방에 선포하였을 때, 그리고 1899년 묘호를 올리고 중수를 할 때 황제국으로서 목조의 부친 이양무 고려장군을 왕으로 1대 더 추존하고, 왕릉으로 묘역을 단장하였다면, 우리 삼척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1기를 보유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가져 보았다. 그러나 더 알아보니 고종황제는 황제국의 예에 따라 7대 추존을 모두 한 것을 알게 되었다. 정조의 양부 효장세자(영조의 장남)를 진종으로 추존하며 7대 추존을 마무리 한 것이다. 이에 고종황제는 준경묘의 주인을 ‘나의 목조 황고(皇考)’로 칭한 것이다. 그리니 이제 준경묘를 릉(陵))으로 올릴 명분은 없는 것이다.
명분, 형식보다 실질이 중요할 수 있다. 우리지방은 가장 [아름다운 천년숲길]을 간직하고 있고, 세계만방에 내 세울 수 있는 수많은 문화유산. 기록유산을 남기며 500년 나라를 이어나간 조선 왕조 탄생의 비밀을 간직한 신비로운 고장이 아닌가. 준경묘·영경묘는 그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2년 7월 12일에 강원도 기념물 제43호에서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24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첫댓글 재경삼척시민회지 편집인인 동창(전 여원 기자)이 삼척 문화에 대한 원고를 청하기에 졸고를 써 보았습니다. 개경삼척시민회에 누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좋은 사진,좋은 글 잘 보고 잘 읽었습니다.
자주 기행문 등을 올리다 보면 한 권의 수필집 자산이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