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펜젤러 (Henry Gehard Appenzeller, 1858-1902)목사 이야기
미국북감리회가 파송한 최초의 내한 선교사였다.
그는 그의 부인과 미국 북장로교회의 파송을 받은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하여 일본을 거쳐 언더우드선교사와 함께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오후 3시에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아펜젤러 부부는 부인 임심과 갑신정변으로 한양의 치안이 불안하자 며칠간 체류하다가 일본으로 되돌아 갔다가 7월 9일에 재입국했다.
Corea:Hermit Kingdom이란 9판이나 간행된 한국사를 저술한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 1843-1928)는 아펜젤러를 “한국 복음의 개척자”, “한국인의 사도”라고 예찬했다.
아펜젤러는 정동제일감리교회(貞洞第一監理敎會)와 근대 교육의 요람인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설립하여, 구한말(舊韓末) 선교와 교육부분에 있어 큰 공적을 남겼다.
그는 1858년 2월 6일 미국 펜실베니아(Pennsylvania)주 서더튼(Souderton)에서 스위스계인 부친 기드온 아펜젤러(Gideon Appenzeller)와 독일계인 모친 마리아 게르하르트(Maria Gerhart) 사이에 3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메노나이트(Mennonites) 출신 어머니의 경건한 신앙심과 복음주의 신앙의 가정 분위기 속에서 어려서부터 경건한 신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십계명, 주기도문, 사도신경은 물론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줄줄 암송할 만큼 신앙 훈련과 경건의 훈련을 받았다. 가정교육의 중요성을 가르쳐주는 대목이다.
20세 되던 1878년 필라델피아(Philadelphia)주 서부에 위치한 독일계 개혁교회의 교육기관인 프랭클린 마샬대학(Franklin and Marshal College)에 입학하여 고대 그릭, 라틴, 히브리어를 비롯한 고전학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였다. 현대어도 여러 언어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어 다수의 언어를 구사하게 되었다.
아펜젤러는 1879년 당시 랭카스터(Lancaster)의 제일감리교회(The First Methodist Church)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중 영적인 생명력 있는 작은 모임에서 깊은 인상을 받아 선교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1882년 프랭클린 마샬대학(Franklin and Marshal College)을 졸업한 뒤, 선교 사업에 헌신하기 위해 뉴저지주 매디슨(Madison, N.J.)에 있는 드류신학교(Drew Theological Seminary)에 입학하였다.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자신의 인품과 학업 연마에 열중하였다. 감리교회 전통의 부흥신학과 드류 신학교의 신학적 학풍에 대하여 토론하였고 교회 일에도 최선을 다하였다.
드류신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그는 감리교회 외국선교회에 조선(朝鮮)의 선교 사업에 헌신할 뜻을 밝혔으며, 1884년 크리스마스 주간에 북감리교 해외선교부로 부터 임명을 받게 되었다. 아펜젤러가 엘라(Ella Dodge Appenzeller)와 막 결혼한 무렵이었다.
마침내 조선선교사로 1885년 2월 3일 장도에 올랐다. 퍼시픽 메일(the Pacific Male)의 아라빅 호(Arabic)를 타고 아내와 조선으로 출발하였다.
아펜젤러부부는 부산(釜山)을 거쳐 미츠비시(三菱) 배편으로 1885년 4월5일 제물포(濟物浦)에 언더우드 선교사와 같이 도착했다. 아펜절레는 도착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에 도착했다. 이날 사망의 빗장을 산산이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이 얽매여 있는 굴레를 끊으시어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를 허락해 주옵소서!
그러나 조선의 정국은 불안했다. 1884년 12월에 발생한 김옥균, 서재필등이 주동이 된 갑신정변(甲申政變)은 3일 천하로 끝났지만 정치적 불안은 지속되었다. 미국 공사 폴크(G. C. Foulk)는 아펜젤러 부부에게 일본에 좀 더 체류하도록 권유했다. 부부는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같은 해인 1885년 7월 19일 서울에 도착했다. 그 때 언더우드는 독신이라 조선에 남았다.
아펜젤러 목사 선교사의 조선 내에서의 주요 활동과 업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배재학당(현, 배재고등학교)의 창설(1886. 6. 8)을 하였다
배재학당은 고종(高宗, 1852-1919)이 지어준 이름으로 정부의 정식인가를 받아 교육기관으로 설립된 한국 역사상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 중 하나이다.
최초의 학생은 2명의 고아였다. 양반들은 서양 오랑캐의 교육을 하찮게 여겼다. 대상으로 시작하여 1887년 새 교사를 짓기 시작하여 1888년에 완공하게 되었다. 조선 최초의 르네상스식 벽돌 건물이었다. 배재학당이라는 칭호와 현판은 1887년 2월 고종이 하사했다. 전도는 불허했지만 교육은 인정한 것이 되었다.
아펜젤러 목사가 세운 배재학당에서는 영어, 중국 고전, 서구의 과학과 문학 등을 남학생 대상으로 가르쳤다.
또한 북 감리회 선교부는 스크랜턴 대부인과 그가 참여하여 세운 이화학당에서는 여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학교였다. 안방에서 여자를 이끌어내어 남녀 차별을 끊는 동력이 되었다. 실제로 여성의 지위 향상의 첫걸음이 되었다.
배재학당을 통해 이승만(李承晩, 1875-1965)을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민족지도자들이 배출되었다. 일례로 당시 크게 무시당하던 천민 백정인 박성춘(朴成春)의 아들 박서양(朴瑞陽, 1885-미상)을 입학시켰다. 박서양은 이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하여, 1908년 1회 졸업생이 되었으며, 이후 만주(滿洲)에서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
참고로, 그의 자녀들인 아들 헨리 다지 아펜젤러는 미국에서 공부한 뒤 아버지를 이어 배재학당에 교장으로 취임해 학생들의 교육에 헌신했고, 딸 엘리스 레베카 아펜젤러 역시 이화학당(현 이화여자고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을 발전시키는 데 큰 업적을 남겼다.
둘째, 한국감리회 최초의 정동제일감리교회의 설립이다.
아펜젤러 목사는 1885년 조선에 도착한 이래 지속적인 전도 여행을 전개하는데, 이러한 일련의 선교활동 속에서 “믿는 자들의 모임”인 교회 운동이 성숙되어 갔다. 그리하여 언더우드와 함께 암암리에 1885년 10월 11일 한국 개신교 최초의 성찬식이 거행되었다.
선교의 자유가 완전하게 허락되지 않은 상태에서 벧엘교회는 1888년 3월 11일 주일에는 14명이 모여 예배를 드렸다. 비록 영어로 진행된 것이긴 하지만 이무렵 주일학교도 아펜젤러 목사의 집에서 30분간 인도되었다. 이 때 스크랜튼 대부인(Mary Fletcher Benton Scranton, 1832-1909)이 주관한 여성들을 위한 저녁 예배도 시작되었다. 이는 최초의 부인예배로서 첫째 날에 21명이 참석했다. 아펜젤러 목사는 이를 두고 “이처럼 주께서 우리의 수고와 그의 영광스러운 사역의 번창 함에 함께 하신다”고 기록했다.
셋째, 중국으로부터 독립운동의 적극 지원이다. 아펜젤러 목사는 1895년 협성회(協成會)를 조직하고 서구식 의회법 시행을 제일 먼저 주장하였으며 벙커(Dalzell A. Bunker, 1853-1932)와 함께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을 도왔다.
1898년부터는 주간지로 《협성회회보》를 발간하였다. 이 잡지는 한국 최초의 시간주간지였다. 협성회의 토론회와 출판 활동은 개화기의 민족의식과 계몽사상(啓蒙思想) 확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서재필을 중심으로 독립협회(獨立協會, 1896-1898)와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가 탄생하는 진원지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수구파의 역모 공작으로 1898년 독립협회는 해체되었다. 중요한 인물들이 한성 감옥에 투옥되었다. 당시 아펜젤러를 비롯한 선교사들은 감옥을 순례하며 구호와 전도 활동을 하였다. 선교사들과 힘을 모아서 한성 감옥 수감자들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였고 무엇보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식자층이라 각종 서적을 투입했다. 결국 이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져서 그들은 자유롭게 차입도 하고 전도도 할 수 있게 되었다.
한성 감옥에서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 영어만 배웠던 것을 회개하고 기독교로 회심하였다. 감옥에서 독서와 저작에도 힘을 기울여 후에 미국서 출판한 《독립정신》도 저술했다. 이러한 일을 통해 이때까지의 서민층이 교인들이었으나 이상재(李商在, 1850-1927), 이원긍(李源兢, 1849~?), 안국선(安國善, 1878~1926) 등 12명의 고관 출신 양반과 선비들이 최초로 예수를 믿게 되어 이후 이들은 초기 기독교인으로서 중요한 사역을 감당하였다.
넷째, 성경 번역사업과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를 순 한글로 창간(1897.2)하여 당시 한문(漢文) 위주의 사회에서 언문일치와 띄어쓰기를 실행하며 한글을 장려하고 교회 뿐 아니라 일반 사회에 계몽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이 밖에도 마가 복음서를 번역하고,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元杜尤, 1858-1916), 헤론(John W. Heron, 惠論, 1857-1890), 스크랜튼 등과 성서 번역위원회를 조직(1890)하여 성서 번역 진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한편, 아펜젤러 목사는 1888년에 1월 배재학당 내에 한(韓), 중(中), 영(英)의 삼국어로 인쇄할 수 있는 출판사인 삼문 출판사(三文出版社, Trilingual Press)를 설립하여 신문, 잡지 등을 출판하였다. 한국의 현대식 인쇄 시설의 효시였다. 기독교 주간지인 「코리언 크리스천 애드보케이트」(The Korean Christian Advocate)와 영문 월간지인 「코리언 리포지토리」(Korean Repository)는 폐쇄적인 한국 사회를 국제 사회에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오늘날 ‘한국학’의 고전적 일차 사료가 되었다.
1896년부터는 서재필의 독립신문(獨立新聞)을 인쇄하면서 편집에 도움을 주었으며 1897년에는 한글로 된 최초의 종교 신문인 「죠션 그리스도인회보」를 창간해 선교사업 외에 민족 계몽운동에도 힘썼다. 1900년까지 25만권의 서적을 인쇄, 출판하였고 배재학당, 이화학당, 인천 영화학교 등 기독교 계통학교의 교과서 및 성경 및 찬송가 그리고 언더우드 등과 함께 여러 신약성서를 출판하였는데 이것은 현대적인 인쇄와 출판물들이었다.
또한 아펜젤러 목사는 1890년에는 종로서점(鐘路書店)을 설치하였고 선교 및 교육 활동에만 치중한 것이 아니라 어지러운 현실에서 독립신문 발행 등을 통해 한국의 독립과 주체 의식의 회복 그리고 근대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1902년 44세가 되던 해에 인천 제물포에서 출발하여 전라남도 목포로 가던 일본배인 구마가와마루와 같은 회사소속인 기소가와마루가 어청도 서북방 2-3해리 지역에서 충돌해 구마가와마루가 침몰하면서 조선인 여학생을 구하려다 익사했다.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 선교사 묘지에 있는 아펜젤러의 묘지는 가묘이다. 시신은 아직 여학생과 조사 조한규와 함께 어청도 바다 밑에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들인 H. D.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Dodge, 亞扁薛羅2世, 1889~1953)도 역시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