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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누가복음 10:30~37
30.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고 마구 두들겨서 반쯤 죽여 놓고 갔다.
31. 마침 한 사제가 바로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는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32. 또 레위 사람도 거기까지 왔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길을 가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의 옆을 지나다가 그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34.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고는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서 간호해 주었다.
35. 다음날 자기 주머니에서 돈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드리겠소.' 하며 부탁하고 떠났다.
36. 자,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교사가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지금 우리 사회의 핫이슈 중 하나는 제주도에 들어 온 예멘 난민 문제입니다. 이들 예멘 난민 수용 문제를 두고 찬반양론이 팽팽합니다.
지난 5월 말까지 제주도에 500여 명의 예멘 국적 난민들이 몰렸습니다. 내전을 피해 말레이시아에 머무르다 체류 연장에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무비자 입국이 가능하고 거리가 가까운 제주도로 넘어 온 것입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제주 주민들의 거센 항의가 이어졌고 우리 사회는 혐오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냈습니다. 청와대 청원게시판엔 '제주도 불법 난민 신청 문제에 따른 난민법, 무사증 입국, 난민 신청 허가 폐지' 청원이 올라왔고, 7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서명했다고 합니다.
제주도민 난민대책 연대 등 반대 단체들은 난민 중 진짜 난민은 극소수이기에 대다수의 가짜 난민을 위해 지원책을 이어 가는 건 무모하다고 주장합니다. 난민법을 개정해 빠른시간 안에 진짜 난민을 선별해야 하며 여의치 않을 경우 난민 자체의 수용을 재검토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이지요.
또한 일부 교회들은 난민들의 종교가 이슬람인 것을 빌미 삼아 가짜 뉴스까지 뿌리며 그들을 범죄인 취급하고 있습니다. 보수 개신교계의 입장을 대변해 온 단체인 한국교회언론회는 난민문제에 대해 이런 논평을 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난민을 신청한 사람들의 국적과 종교는 한국 사회에도 상당한 파장을 일으킬 소지가 크므로 눈여겨보아야 한다. 우리가 잘 아는 바처럼, 이슬람의 테러 문제는 결코 소홀히 하거나, 인도적 차원에서만 바라볼 수 없는, 복잡한 문제이다. 지금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살상과 테러는 무슬림(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다."
이런 논조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와 시민단체 등은 난민이 위험한 존재라는 생각은 근거 없는 추측에 불가하며 난민들의 생존권이 다른 어떤 가치보다 우선해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가짜 난민에 문제도 현행 법체계로 충분히 대처할 수 있기 때문에 우려할 필요는 없다는 입장입니다.
우리는 예멘 난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앞서 예멘 난민 문제의 본질을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멘 또한 우리나라와 같이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의해 희생을 강요당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예멘은 세계 석유 생산량의 0.2%를 점유하고 있는 작은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석유 유통 부문에서는 매우 중요한 나라라 할 수 있습니다. 예멘은 세계 최대 원유 수출국 사우디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아덴만 해협을 끼고 있는 중동산 원유 수송의 요충지입니다. 아덴만 해협에는 예멘 생산량의 30배에 달하는 하루 380만 배럴의 원유와 정유 제품이 운송되고 있습니다.
오늘 예멘의 비극은 우리나라처럼 강대국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예멘은 홍해와 인도양이 만나는 아라비아반도의 서남부 지역에 자리 잡고있는 동서무역의 요충지입니다. 6세기 에티오피아에 점령된 뒤 이집트, 오스만투르크 등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러던 중 영국이 1839년 동서무역의 중계항인 아덴항을 점령함으로 예멘은 남북으로 분할되게 됩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1918년) 북예멘은 터키로부터 독립하여 자본주의 체제인 예멘아랍공화국을 세웁니다. 남예멘은 1967년에 구소련의 지원으로 영국의 지배에서 독립하여 예멘인민민주공화국을 세우게 됩니다.
남북예멘은 1971년과 1978년 두 번의 전쟁을 치릅니다. 그러다 1990년 북예멘 대통령이었던 알리 압둘라 살레를 대통령으로, 그리고 알레 살렘 알베이드 남예멘 대통령을 부통령으로 하는 통일예멘공화국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통일 예멘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993년 부통령 알베이드가 불평등을 이유로 아덴으로 철수합니다. 대통령 살레는 군사력을 동원해 남예멘을 공격합니다. 예멘 전쟁은 1994년 7월 북부의 승리로 끝났고, 살레 대통령은 장기집권에 들어갑니다.
2011년 시작된 '아랍의 봄'은 예멘에도 폭풍을 몰고 옵니다. 튀지니, 이집트, 리비아 등 중동 지역의 장기집권 세력들을 무너졌으며, 예멘의 살레 역시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2013년 2월 사임합니다.
하지만 살레의 사임은 또 다른 불안을 야기합니다. 후임으로 선거를 통해 만수르 하디가 대통령이 되었지만 2014년 9월 예멘 북부를 장악한 후티공화파의 공격으로 다시 전쟁이 시작됩니다. 후티공화파는 시아파 종교-정치운동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다 시아파 종주국을 자처하는 이란의 지원을 받으며 미국·사우디 등 외세에 대항하는 무장세력으로 확장해 나갑니다. 전쟁의 결과는 민중의 지지를 업은 후티공화파의 승리로 돌아가고 만수르 하디는 사우디로 망명합니다.
예멘 사태는 2015년 3월 사우디아라비아가 주도한 동맹군이 개입함으로 국제전 양상으로 번지게 됩니다. 예멘이 후티 공화파에게 돌아가자 미국과 이스라엘, 사우디 왕정은 예멘 토벌에 나서게 되고 예멘은 ‘인종청소’의 도가니로 변하게 됩니다. 이들이 이렇게 광란을 부리는 이유는 아덴만(the Gulf of Aden)을 장악해야 한다는 절박함 때문입니다. 만일 아덴만을 공화파와 예멘 민중에게 뺏기게 된다면 지중해와 홍해 그리고 인도양으로 가는 해양 루트를 통째로 상실하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우디의 경제는 원유 수송 제한으로 크게 타격을 입게 되고 그렇게 된다면 사우디 왕가의 존립도 위태로워 질수 있는 것이죠. 이스라엘 또한 홍해와 아덴만을 거쳐 이란을 타격할 수 있는 공격 루트를 잃어버리게 되어 군사적 열세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석유 지배권을 공고히 하려는 미국의 이해와 맞물려 예멘은 학살의 지옥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지금 예멘은 가자지구(Gaza Strip)처럼 완전히 봉쇄가 된 상태입니다. 사람과 물자가 드나드는 통로를 다 막아놓은 탓에 식량과 식수, 기본 의약품조차도 유입이 안 돼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죠.
4년째 전쟁이 계속되면서 피해도 막심합니다. 국민의 80%가 의식주와 의료 등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사망자만 1만여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전쟁을 피해 조국을 등진 난민도 3만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끔찍한 재앙을 피하기 위해 예멘을 탈출한 일부 망명객이 지금 제주에 와 있습니다. 이들 중에는 후티공화파도 있고 만수르 정권을 지지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 모두는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망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정치성향이 어떻든 종교가 어떻든, 그것이 우선적인 판단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보다 근본적인 생명에 대한 존중과 조국을 등지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형편을 먼저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그들에게 닥친 운명과 고통에 절망하며 힘없이 울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향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한국은 일제 강점기 때로부터 시작하여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국제사회의 도움을 받은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6·25전쟁은 600만 명이 넘는 피란민을 만들었고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난민으로 타국을 찾았습니다. 이때 한국을 도왔던 나라 중에는 이라크, 스리랑카 등과 현재 내전으로 가장 많은 난민이 생기고 있는 시리아도 들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난해 말 기준으로 한국을 찾은 시리아인 1,300여 명 중 난민으로 인정된 경우는 단 4명에 불과합니다.
우리나라는 1992년 유엔난민협약에 가입했고, 2013년에는 아시아 최초로 난민법을 시행한 나라입니다. 유엔난민협약에 따라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난민을 보호해야 할 법적 의무를 지닌다고 하겠습니다.
국제구호단체 옥스팜은 2016년 보고서에서 한국이 경제 규모에 비례하면 난민에 대해 책임져야 할 몫을 거의 이행하지 않는다고 발표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제 규모는 세계 11위지만 난민 인정률은 4.1%로 세계 평균 38%에 비하면 사실상 손을 놓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한국이 중동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일정 부분 책임을 져야 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산업연구원 자료를 보면 2014~2016년 동안 한국은 중동에 19억 원 규모의 방산 무기를 수출하였습니다. 이 가운데는 예멘 정부군을 지원하는 사우디아라비아도 포함돼 있습니다.
너무도 당연한 난민 보호 의무를 국가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아서 국민 갈등을 키웠다는 비판을 받는 것은 너무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멘의 전쟁상황과 난민 현실에 대한 믿을 만한 정보가 부족하다 보니 근거 없는 반대와 혐오 여론이 급격히 확산 되었습니다.
예멘 난민이 취업을 노린 ‘가짜 난민’이라든가, 범죄를 저지를 우려가 있다는 소문들이 국민의 불안을 가중시켰습니다. 난민 반대를 요구하는 가짜 뉴스들이 양산되고 일부 교회는 이슬람 종교를 문제 삼아 난민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중 극우 논객 정규재씨가 발행하는 펜앤드마이크 뉴스의 조준경 기자 기사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2015년 중동과 북아프리카 이슬람권 이민자들이 유럽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이들이 진짜 난민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들은 같은 종교를 믿는 사우디아라비아로 가지 않았다. 이슬람 국가인 터키에 안착했지만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넜다. 디폴트로 휘청거리는 그리스를 뒤로하고 북쪽 독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려 150만 명에 달하는 건장한 청년들이 ‘복지 천국’ 독일에 입경했다.
2016년으로 넘어가는 신년 밤, 독일 쾰른역으로 쏟아져 나온 중동 이민자 수천 명은 닥치는 대로 독일 여성들을 유린했다. 누가 상상이나 해봤나? 번화한 선진국 길거리에 중세시대 사라센족과 같은 이질적 생김새의 ‘개떼’들이 트렌치코트와 머플러를 멋스럽게 두른 ‘모던 여성’들을 뚜드려 패고 겁탈을 했다. 같은 날 독일 내 12개 주에서 비슷한 일들이 발생했다. 접수된 피해 신고는 1,072건이었다. 그 중 692건은 신체상해나 재산 손괴, 384건은 성폭력이다.
이들이 즐긴 ‘놀이’는 ‘타하루시(집단 성폭행)’라 불리는 이슬람 악습이다. 2016년 1월 21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타하루시는 남성들이 표적이 된 여성을 포위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막는 ‘바람잡이’ 역할을 하면서 한 명씩 들어가 범행을 저지르는 식이다. 타하루시 같은 놀이가 자행되는 이유에 대해선 여러 해석이 나온다. ‘히잡’이나 ‘니캅’을 쓰지 않은 여성은 비이슬람교도이기 때문에 성폭행해도 된다는 경멸감이 나왔을 수도, 서구사회가 모르는 중동 남성들의 여성관이 작동했을 수도 있다. 요점은 이들을 자세히 알아보고 조심해야 한다는 거다.>
확인되지도 않는 이런 가짜 뉴스로 국민을 현혹하는 저의는 과연 무엇일까요?
촛불 정국 이후 극우 보수진영은 종북 논리가 더이상 국민들에게 먹히지 않자 동성애 문제를 들고 나왔습니다. 6.13 지방선거에서 극우 보수는 성소수자 문제를 가지고 보수 정당과 공조했지만 절망적 패배를 맛봅니다. 선거 이후 흔들리는 보수 프레임 출구로 예멘 난민이 표적이 되었다고 보여지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3년 전, 독일에서는 120만 명의 난민을 받아들인 바 있습니다. 그중 난민으로 인정된 사람들은 90만여 명에 달합니다. 작년(2017년)에는 18만5천 명이 난민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독일의 사례를 비추어 볼 때 제주에 예멘 난민이 500여 명 들어온 것은 문제의 소지조차도 되지 않는 규모입니다. 그런데 이를 두고 보수진영이 나라가 망할 것처럼 난리법석을 떠는 데는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난민인정율이 4.1%인 것을 감안하면 이들 중 난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은 20여 명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하느님 나라가 가난하고 억눌린 자, 배고프고 슬프고, 핍박받고 옥에 갇힌 사람들의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런 처지에 놓여 있는 자들에게 작은 선의를 배푸는 것이 곧 예수님께 한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 31절~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 이야기를 보면 인생의 끝자리에서 만나게 될 지옥과 천국의 갈림길의 기준이 나옵니다.
사람의 아들이 모든 천사들을 거느리고 와서 영광스러운 왕좌에 앉습니다. 그 자리에 모든 민족들을 불러놓고 그들을 구분하여 앉게 합니다. 양의 무리는 오른편에, 염소의 무리는 왼편에 자리잡게 합니다.
그리고 심판자 예수님은 자기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내 아버지의 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주었다.'
이 말을 듣고 양의 무리인 의인들이 말합니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또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으며, 언제 주님께서 병드셨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저희가 찾아가 뵈었습니까?'
그에 대해 주님은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라는 답을 줍니다.
이번에는 왼편에 있는 염소의 무리들에게 말씀합니다. '이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졸도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속에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양의 무리에게 한 것과 같습니다.
이 말을 듣고 염소의 무리들이 항변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언제 굶주리고 목마르셨으며, 언제 나그네 되시고 헐벗으셨으며, 또 언제 병드시고 감옥에 갇히셨기에 저희가 모른 체하고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 또한 전과 동일합니다.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란 것이죠.
이 기준에 의해 영원히 벌 받는 곳으로 쫓겨날 사람들과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갈 사람들이 정해지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의 내용을 한마디로 정리하라고 한다면 떠돌이들의 삶과 애환을 담은 역사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선조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삶이 그러했고 그의 후손들 역시 떠돌이의 삶을 살았습니다. 정착 과정에서 환대를 받기도 했고 전쟁도 치러야 했습니다. 외세에 의해 포로로 끌려가기도 하고 외세의 지배를 피해 난민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기독교 신앙의 깊은 곳에는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애환이 깊이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나그네를 환대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 이야기를 본문으로 읽었습니다. 너무도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잘 알기는 하지만 실천은 쉽지 않은 이야기기도 합니다.
주님은 강도 만나 죽게 된 사람을 돌보아 준 사마리아인이야말로 진정한 이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온갖 편견에 시달리면서도 지금 눈앞에서 죽어가는 이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이런 사랑의 실천이 사마리아 사람을 강도 만난 자의 이웃, 즉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게 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며 주님은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에게 단호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너도 가서 사마리아 사람처럼 그렇게 하라.’는 명령울 듣습니다.
지금 이 나라에 자신의 생존을 걸고 있는 난민의 문제는 그 자체로도 보호받고 존중받아야 할 것입니다. 법과 제도, 인도적인 차원에서 이 문제는 적극적으로 다뤄져야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이러한 난민이 발생되지 않도록 강대국이나 독재자들의 횡포가 없는 세상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
저는 “지금 울며 슬퍼하는 자가 복이 있다”하시며 고통당하는 이들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너희가 웃게 되고 위로받게 될 것”이라는 위로의 말씀을 떠올려 봅니다.(마태 5:4; 누가 6:21)
우리가, 우리 사회가, 우리 교회가 이 예수님의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난민 아닌 난민처럼 살아왔던 우리 역사를 생각하며 이 세상에 고통당하는 모든 이들에게 주님의 위로와 돌보심이 늘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018. 7.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