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 당신
김은영
이젠 당신이 그립지 않죠.보고 싶은 마음도 없죠.
사랑한 것도 잊혀 가네요. 조용하게.
내가 좋아하는 노래 ‘비와 당신’의 한 소절이다. 봄비가 나는 좋다. 아침에 눈을 뜨면 금방 깨끗한 수건으로 닦은 듯한 햇살이 뿌려진 풍경을 맞이하는 것도 좋고, 희뿌연한 안개를 덮고 촉촉하게 젖은 풍경을 맞이하는 것도 좋다. 지난겨울, 몹시 가물었기에 더 간절하게 비를 기다려왔다. 더욱이 올 봄에는 봄꽃들이 웬만큼 꽃을 피운 다음 오는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주말 여기저기 전국의 산에 불이 나서 걱정이었는데 때맞춰 내린 비 덕분에 잔불을 끌 수 있어 더 고마운 봄비다.
‘봄비’ 하면 떠오르는 안타까운 인연이 있다. 대학 입학하고 첫 등교일, 오후 늦게 비가 세차게 내렸다. 수업을 마치고 서류를 하나 떼야 해서 본관에 갔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진 것이다. 우리 대학은 전국에서도 캠퍼스가 넓기로 손꼽혔고 학교 본관은 캠퍼스 가장 안쪽에 위치하여 있었다. 기차 통학을 하고 있어서 통근 열차에 맞춰 가자면 서둘러 나가야 하는데 굵은 빗방울은 그칠 줄을 몰랐다. ‘에이, 모르겠다!’ 그냥 비를 맞으며 캠퍼스 중간쯤 나오니 수업을 마치고 우르르 학우들이 쏟아져 나왔고 나는 뭇 학우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 수밖에 없었다. 창피함에 얼굴을 들지 못하고 교문을 향해 바삐 가고 있는데 우산을 씌워주는 이가 있었다. 세 명의 남학생이었는데 한 명은 내게 우산을 받고 있었고 그 옆 둘은 자기들의 가방을 머리에 들고 있었다. 그들은 버스 정류장까지 와서 내가 탈 버스에 태워주고 갔다. 그때 나는 촌스럽고 부끄럼이 많던 때라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했고 창피한 생각에 얼굴도 들지 못해 그들의 얼굴조차도 못 보고 지나고 말았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좋은 인연을 맺을 수도 있는 일이었는데. 그들은 얼마나 염치없는 사람이라 여겼을까.
비는 도닥도닥 듣는 소리, 차락차락 차바퀴에 닿는 소리로 다가온다. 그리고 창을 타고 내리는 빗물로 우리를 우수에 젖게 하고 피부에 닿는 찹찰한 수분기로 기분을 갈앉게 한다. 친구의 새 아파트를 구경하면서 넓은 거실보다도 그 거실 창밖을 보며 ‘야아, 비 오면 멍 때리기 좋겠다!’
는 찬탄이 나오는 걸 보면 나는 비를 좋아하나 보다. 특히 봄비는 나무가 뿌리를 힘껏 뻗어 물관이 뻐근하도록 물을 길어 올려 연초록의 새잎들을 힘차게 뻗어내 온 들판을 올리브 그린의 빛으로 꾸며내지만 젊음의 뒤안길을 돌아가는 나의 삶에도 젊은 날의 추억 같은 촉촉한 물기를 주어 비를 보며 여운에 젖게 한다.
일기예보처럼 주말에 비가 오면 홀로 동네 산책길에 나서야겠다. 촉촉이 대지를 적시는 빗물을 밟으며 차르륵 빗소리를 들으리라. 그리고 나지막한 오두막 커피집을 찾아 주인장이 정성스레 내려주는 커피를 앞에 놓고 잔돌멩이가 깔린 마당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며 비 멍을 때려야겠다. 그리고 ‘비와 당신’이라는 노래를 들으며.
아련해지는 빛 바랜 추억
그 얼마나 사무친 건지
미운 당신을 아직도 나는 그리워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