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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남산 소개
남산은 서라벌의 진산(鎭山)이다. 북의 금오봉(金鰲峰, 468m)과 남의 고위봉(高位峰, 494m)을 중심으로 동서 너비 4km, 남북 길이 10km의 타원형으로, 한 마리의 거북이 서라벌 깊숙이 들어와 엎드린 형상이다. 골은 깊고 능선은 변화무쌍하여 기암괴석이 만물상을 이루었으니 작으면서도 큰 산이다.
* 경주남산 문화유적 통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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溪谷名 | 先史 遺蹟 |
古墳 | 王陵 | 遺物 散布址 |
窯址 | 寺址 | 城郭 | 建築物 建物址 |
其他 | 佛像 | 塔 | 石燈 | 浮屠 | 其他 | 計 |
長倉谷 | 2 | 1 | 1 | 1 | 1 | 10 | 1 | 3 | 2 | 6 | 8 | 3 | 53 | 92 | |
識慧谷 | 2 | 5 | 2 | 7 | 3 | 1 | 1 | 13 | 3 | 10 | 47 | ||||
王井谷 | 2 | 1 | 1 | 3 | 2 | 3 | 2 | 3 | 3 | 6 | 26 | ||||
절터골 | 3 | 1 | 4 | ||||||||||||
佛谷 | 3 | 2 | 3 | 8 | |||||||||||
塔谷 | 3 | 1 | 6 | 1 | 37 | 7 | 1 | 56 | |||||||
彌勒谷 | 1 | 1 | 5 | 4 | 11 | ||||||||||
명막골 | 1 | 1 | 2 | ||||||||||||
千巖谷 | 1 | 1 | 1 | 3 | |||||||||||
陵谷 | 1 | 1 | 2 | ||||||||||||
鐵瓦谷 | 2 | 2 | 1 | 1 | 1 | 2 | 2 | 3 | 14 | ||||||
國師谷 | 1 | 2 | 7 | 4 | 1 | 4 | 19 | ||||||||
鰲山谷 | 1 | 1 | 2 | 1 | 2 | 2 | 1 | 1 | 11 | ||||||
地巖谷 | 3 | 2 | 5 | ||||||||||||
잠찰골 | 1 | 1 | |||||||||||||
증상골 | 1 | 1 | |||||||||||||
蓬丘谷 | 3 | 1 | 2 | 6 | |||||||||||
僧燒谷 | 1 | 2 | 2 | 5 | |||||||||||
千洞谷 | 2 | 3 | 1 | 6 | |||||||||||
홈태골 | 2 | 2 | |||||||||||||
烽火谷 | 2 | 1 | 8 | 2 | 1 | 6 | 20 | ||||||||
바람골 | 1 | 1 | |||||||||||||
못갓골 | 1 | 1 | |||||||||||||
까치골 | 1 | 1 | 2 | ||||||||||||
정우골 | 1 | 1 | |||||||||||||
어분골 | 1 | 1 | |||||||||||||
밤나무지골 | 1 | 1 | |||||||||||||
別天龍谷 | 2 | 2 | 2 | 6 | |||||||||||
五家里谷 | 2 | 1 | 3 | ||||||||||||
새갓골 | 3 | 1 | 1 | 5 | |||||||||||
陽朝庵谷 | 4 | 1 | 2 | 2 | 9 | ||||||||||
深水谷 | 1 | 1 | 1 | 1 | 4 | ||||||||||
白雲谷 | 1 | 2 | 3 | 1 | 2 | 2 | 11 | ||||||||
天王池谷 | 0 | ||||||||||||||
삼밭골 | 2 | 2 | 2 | 1 | 2 | 2 | 11 | ||||||||
수영골 | 1 | 1 | |||||||||||||
大馬谷 | 1 | 1 | 1 | 4 | 1 | 8 | |||||||||
쪽박골 | 0 | ||||||||||||||
龍山谷 | 2 | 2 | 2 | 1 | 1 | 1 | 9 | ||||||||
어두봉골 | 1 | 1 | |||||||||||||
天龍谷 | 1 | 1 | 1 | 1 | 6 | 9 | 2 | 3 | 7 | 11 | 42 | ||||
틈수골 | 1 | 3 | 4 | ||||||||||||
큰골 | 0 | ||||||||||||||
수산골 | 1 | 1 | 2 | ||||||||||||
茸長溪入口 | 3 | 3 | 1 | 1 | 8 | ||||||||||
法堂谷 | 1 | 1 | 2 | ||||||||||||
涅槃谷 | 5 | 3 | 8 | ||||||||||||
茸長溪寺谷 | 1 | 3 | 1 | 1 | 6 | ||||||||||
隱寂谷 | 4 | 1 | 1 | 6 | |||||||||||
塔上谷 | 1 | 2 | 4 | 1 | 2 | 10 | |||||||||
蓮花臺谷 | 3 | 1 | 3 | 7 | |||||||||||
이영재골 | 3 | 3 | |||||||||||||
池谷 | 4 | 1 | 5 | ||||||||||||
百梁谷 | 1 | 1 | 1 | 1 | 2 | 6 | |||||||||
琵琶谷 | 1 | 1 | 1 | 4 | 3 | 1 | 11 | ||||||||
珊瑚谷 | 1 | 1 | |||||||||||||
藥水谷 | 1 | 1 | 5 | 1 | 2 | 1 | 1 | 12 | |||||||
拜洞절골 | 1 | 3 | 3 | 7 | |||||||||||
삿갓골 | 1 | 2 | 3 | 2 | 1 | 1 | 5 | 15 | |||||||
三稜溪 | 1 | 1 | 3 | 10 | 1 | 16 | 4 | 2 | 1 | 39 | |||||
禪房谷 | 1 | 2 | 4 | 5 | 5 | 1 | 4 | 22 | |||||||
碁巖谷 | 2 | 1 | 2 | 1 | 1 | 7 | |||||||||
鮑石谷 | 1 | 1 | 1 | 9 | 1 | 3 | 4 | 1 | 1 | 2 | 24 | ||||
潤乙谷 | 1 | 2 | 3 | 2 | 1 | 9 | |||||||||
計 | 21 | 37 | 13 | 27 | 9 | 147 | 4 | 20 | 17 | 118 | 96 | 22 | 8 | 133 | 672 |
*포석정 연회장설과 수리학적 고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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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배동 454-3번지에 1963년 01월 21일 사적 제1호로 지정된 포석정지(鮑石亭址, 면적 7,445㎡)가 있다. 포석정이 위치하는 골짜기를 포석골이라 한다. 포석골은 금오봉 정상에서 북으로 약 1km쯤 흐르다가 부엉드미 근처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유느리골 여울물과 합친다. 이어서 배실[碁巖谷] 여울과 합쳐 포석정 옆을 지나 기린내로 들어가는 깊은 골짜기이다. 이 계곡의 물은 거대한 바위에서 폭포를 만들면서 아래에서는 소를 이루며 경사가 급한데서는 여울져 흘러내려 절경을 이룬다. 신라시대 포석정이 이 골짜기 어귀에 있었음도 우연한 일은 아닐 것이고 이 물을 이용하였을 것이다. 포석정 일대는 월성 남쪽의 이궁터[離宮址] 즉, 임금이 행차하였을 때 머무는 별궁(別宮)이라고 한다.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이궁을 지었던 것이라 하지만, 지금 여러 건축터는 알지 못하고 다만 개울가에 자리잡은 포석정터 만 제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돌을 짜 맞추어 홈을 만들고 그 홈에 물을 흐르게 하였다. 그 흐르는 물에 잔을 띄워 주고받으며 즐기던 곳이다. 돌 홈모양이 구불구불하여 전복껍질 모양과 같으므로 포석정이라 하였다. 이곳은 일반적으로 임금이 포석정 유상곡수(流觴曲水)에 술잔을 띄워 놓고 손발처럼 아끼는 신하들과 둘러앉아서 노래와 춤으로 즐기던 곳이라 알려져 있다. 지금까지 포석정에 관하여 연구한 논문으로는 홍사준, 윤국병, 장근식, 이상택·이태열, 유동훈, 이종욱이 있다. 이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홍사준은 포석정의 명칭과 문헌기록을 충실히 따르면서 유상곡수의 현장으로 실물의 실측도면을 제시하고 포석정의 의미해석을 시도하였다. 한편, 윤국병과 이종욱은 포석정이 단순히 유상곡수의 장소는 아니라는 입장에서 포석정의 용도 문제에 접근하였다. 윤국병은 팔관회 장소로, 이종욱은 사당·신궁의 장소로 비정하였다. 마지막으로 장근식과 이상택·이태열과 유동훈은 포석정 구조에 대한 수리적(水理學的) 접근을 시도하였다. 장근식은 1/5.4 모형을 제작하여 실험한 결과 유상곡수 하였을 때 잔이 머무를 수 있는 곳을 도면으로 제시하였다. 이상택·이태열도 유적현상을 직접 실측한 다음 1/5과 1/10 모형을 제작하여 유속을 변화시키고 수량에 변화를 주고 잔의 형태에 관하여 실험을 실시하였다. 유동훈도 유적 현장을 직접 44개 지점에 걸쳐 실측하여 턱의 높이, 수로의 폭, 바닥의 경사를 실측하였다. 이를 바탕 으로 회돌이 형성이 2개의 지점을 중심으로 있음을 주장하였다. 이들에 대하여는 뒤에 자세하게 논할 것이다. 이렇게 오늘날 포석정은 경애왕이 견훤이 쳐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술잔치를 벌이다가 신라를 망하게 한 장소로 되어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과연 합당한 것인가를 문헌기록 등을 통하여 고찰해 보고, 이어서 포석정의 역할을 고찰하는 과정으로 유상곡수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유상곡수가 이루어 졌다면 과연 어떤 과학적 지식이 사용되었는지 연구된 사항들을 점검해 보는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조선시대 이후의 전승에 대해서도 살펴보고자 한다. |
1. 포석정의 현재 포석정은 화강암을 인공적으로 다듬어 안쪽과 바깥쪽에 돌을 세우고 바닥에는 별도의 돌을 깔아서 수로를 만들었는데 전체 길이 22m를 63개의 돌로 조합하여 만들었다. 규모는 동서 길이 10.3m, 남북 길이 4.9m이고, 수로의 폭은 대략 30cm 정도로, 깊이도 불규칙하기는 하지만 대략 22cm 정도이다. 유상곡수에서 물이 돌아가는 주체부와 물이 들어오는 입수부, 그리고 물이 빠져나가는 출수부를 갖추고 있다. 주체부의 모습이 구불구불하여 전복 모양이라고 해서 포석정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운다. 최근에는 입수부와 출수부를 아우른 전체 모습이 고래의 모습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수긍하기에는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입수부에는 원래 거북이 모양의 돌이 있어서 계곡에서 끌어온 물을 공급하였다고 전하지만 현재는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처음 물이 들어오는 곳에는 가운데가 우묵한 원형의 시설이 남아있다. 또한 출수구도 물의 높이를 조절하였을 것이지만 아무런 시설이 남아있지 않고 수로 끝이 열려 있다. 또한 석조 유구 주변에는 원래 흙이 채워져 있었을 것이지만 지금은 상당한 높이까지 드러나 있는 상태이다. 더구나 입수구와 출수구 사이에 수령이 오래된 거목이 자라고 있다. 전체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어 숙연한 분위기를 조성하기는 하지만 뿌리가 굵어짐에 따라 유구가 들리는 현상이 있을 것이고 이로 인하여 전체적인 변형이 우려되기도 한다. 원래 만들어질 당시의 모습은 알 길이 없고 현재 보이는 모습은 일제시대에 철거되었다가 다시 설치하는 과정에서 없어진 돌은 보충하여 새로 설치된 모습이다. 이러한 점은 포석정에 대한 원형과 용도를 고증하는데 있어서 문헌 기록이 없는 점과 함께 가장 큰 애로사항으로 지적되고 있다. 한편, 1997년 '문화유산의 해'를 맞이하여 문화유산조직위원회에서는 포석정 인근에 별도의 모형을 제작·설치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한 논의를 하였다. 이에 경주시에서 본격화하여 포석정 담장 남편의 토지를 매입하여 '포석정모형전시관' 건립을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조사가 의뢰되어 1998년 4월 17일부터 5월 13일까지 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이 조사에서 폐와무지 1개소와 함께 건물지 2개소가 확인되었다. 제1건물지는 남북방향으로 동서 1칸, 남북 2칸이 확인되었다. 제2건물지는 동서방향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건물규모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또 폐와무지에서는 [포석(砲石)] 글씨 기와편도 출토되었는데, 건물지와는 별도로 후대에 주변의 기와를 모아 폐기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현재 이곳은 전시관을 건축하지 못하고 정비·식목하여 보존 조치되었다. 2. 포석정에 대한 {삼국유사}의 기록 이곳 포석정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 2회(※4회), {삼국사기}에 1회(※3회) 기록되어 있다. 먼저 제49 헌강왕(憲康王 : 재위 876-886)이 포석정에서 신하들과 향연을 베풀었다는 기록이다. (A) 왕이 또 포석정에 행차했더니, 남산의 신이 왕 앞에 나와 춤을 추었다. 좌우 신하들 눈에는 보이지 않았으나 왕만은 홀로 이것을 보았다. 사람[신]이 앞에 나타나 춤을 추었으니 왕 자신이 춤을 추어 그 형상을 보이었다. 신의 이름을 혹 상심(祥審)이라 한다. 옛부터 지금까지 나라 사람들이 이 춤을 일러 어무상심(御舞祥審) 또는 어무산신(御舞山神)이라고 전한다. 어떤 이는 신이 이미 나와 춤을 추자 그 모습을 살펴 본떠 공인(工人)에게 명하여 모습을 새겨 후세 사람에게 보이게 했으므로 상심(象審) 혹은 상염무 (霜髥舞)라고도 한다. 이는 그 형상에 따라 일컬은 것이다. 다음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실로, 신라 제55 경애왕(景哀王)이 연회를 베풀다가 후백제 견훤에게 자결을 강요당한 비운의 현장으로 나타나 있다. (B) 천성 2년(927) 정해 9월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침범하여 고울부까지 이르렀다. 경애왕은 우리 고려 태조에게 구원을 청했다. 태조는 장수에게 명령하여 강한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했다. 구원병이 미처 이르기 전에 견훤은 그 해 겨울 11월 불시에 서울로 쳐들어 왔다. 이 때 왕은 비빈 종척들과 포석정에서 잔치를 베풀고 즐겁게 놀고 있었다. 적병이 오는 것을 알지 못하다가 갑자기 닥치자 어찌할 줄을 몰랐다. 왕과 왕비는 달아나 후궁으로 들어가고 종척과 공경대부와 사녀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다가 적에게 사로잡혔다. 귀천을 가릴 것 없이 모두 땅에 엎드려 종이 되기를 빌었지만 견훤은 군사를 놓아 공사간의 재물을 약탈하고 왕궁에 들어가 거처했다. 이에 좌우 사람을 시켜 왕을 찾게 하니 왕은 비첩 몇 사람과 후궁에 숨어 있었다. 이를 군중으로 잡아다가 왕은 억지로 자결해 죽게하고 왕비를 욕보였으며 부하들을 놓아 왕의 빈첩들을 모두 욕보였다. 왕의 족제인 부(傅)를 세워 왕으로 삼으니 왕은 견훤이 세운 셈이 되었다. 왕위에 오르자 전왕의 시체를 서당에 안치하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통곡했다. 이 때 우리 태조는 사신을 보내어 조상하였다. 이듬해(928) 무자 봄 3월에 태조는 50여 기병을 거느리고 신라 서울에 도착하니 왕은 백관과 함께 교외에서 맞아 대궐로 들어갔다. 이렇게 경애왕은 적의 침입을 모른 채 포석정에서 왕비를 비롯한 여러 신하들을 모두 거느리고 잔치를 베푼 것으로 되어있다. 천년 신라의 종말을 포석정에서 내리게 되니 이곳은 언제나 원한의 대상으로 미움을 받아 왔다. 조선시대의 여러 시인 묵객들의 글에도 마치 포석정 때문에 신라가 망한 것처럼 되어 있다. 그러면 위 사료에 나타나는 [어무상심]의 의미부터 고찰하기로 한다. 3. [어무상심(御舞祥審)]의 의미 해석 사료(A)에 헌강왕이 포석정에 갔을 때 남산신이 왕 앞에 나타나 춤을 추었는데 신의 이름을 상심(祥審)이라고 하였다. 남산신의 춤 모습을 그대로 임금이 추었는데 그 춤을 어무상심(御舞祥審) 또는 어무산신(御舞山神)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상심은 산신과 같은 뜻으로 풀이한 경우가 있지만, 같은 이야기의 다음 부분에는 신이 춤추는 모습을 공인에게 명해서 새긴 것을 [상심(象審)]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상심]이란 [심의 모습]이라는 뜻이 되므로 [심(審)]은 바로 [신(神)]을 의미하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어무상심에서 [상심] 과 어무산신에서 [산신]이 같은 뜻이 아니라 상심에서의 [상(祥)]은 한자 그대로 [조짐] 즉, 길하고 흉함을 미리 보여 준다는 뜻으로 풀이하면 될 것이다. 그렇게 하면 어무산신의 [산신]은 [남산의 신]이라는 의미로 해석되어 자연스러워 지게 된다. 그렇게 보아야할 또 다른 이유는 {삼국유사}에서 이 이야기 뒤에 헌강왕이 금강령에 갔을 때 북악의 신이 나타나 춤을 추고 신라의 멸망을 예언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신이 왕에게 나타나는 것은 조짐으로 보아야 하고, 어무상심도 남산신이 조짐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왕이 남산 산신이 조짐으로 보인 춤을 다시 추어보인 것이므로 [어무상심]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런가하면, 보통 안압지라고 부르고 있는 월지[月池宮] 발굴 과정에서 [용왕신심(龍王辛審)] 또는 [신심용왕(辛審龍王)]이라는 글씨가 나왔다. 출토된 접시와 대접 등의 바닥이나 안쪽에 쓰여져 있었다. 또 월지궁에서 [용왕신심]과 함께 출토된 유물의 글씨 중에 [본궁신심(本宮辛審)]이 있다. 이는 [본궁의 신]이라고 해석할 수 있으므로 [상심]은 [신]을 의미하는 것이 명확해 진다. 월지의 용왕신심은 [용왕산신]도 아니고 [용왕]과 [산신]도 아니며 바로 [용왕신(龍王神)]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어무상심]은 [신이 조짐으로 추어 보인 춤을 왕이 춘 춤]이 되는 것이다. 남산신이 왕 앞에 나타나 보인 사실은 포석정이 단순히 여흥의 장소가 아님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 나타난 기사만을 가지고 보면 포석정은 임금을 비롯한 신하들이 술잔치를 벌이는 유상곡수 장소에 불과하다. 과거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록 자체를 신빙하여 경애왕은 단순히 연회를 베풀었던 것으로 이해하여 왔다. 이렇게 포석정이라는 곳이 단순히 술잔치를 벌이는 곳이라고 한다면 하필 나라를 지키는 병사들이 머물고 곡식과 무기를 저장해 둔 남산신성(南山新城) 바로 밑에 있을까 하는 점은 의아하다 할 것이다. 이에 대해 포석정이 단순히 술잔치를 벌이는 곳이라는 종전의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는 견해들이 구체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윤국병과 강돈구 그리고 이종욱의 견해를 살펴 보기로 한다. 윤국병은 계욕과 유상곡수의 역사를 중국의 {진서}, {후한서} 등과 우리나라의 기록을 검토하여 포석정은 유상곡수연을 즐기던 정원유적으로 이해하였다. 결국 포석정은 이궁의 정원 속에 계욕과 그것에 부수되는 계음을 위하여 꾸며 놓았던 시설이라는 것이다. 결론으로 제시한 사항을 옮겨 보기로 한다. 첫째, 곡수연은 태고 때 행하던 계욕( 浴) 즉 일년동안 몸에 배인 부정을 냇물로 씻는 일종의 제사에 부수된 계음( 飮)이 놀이의 형태로 변형된 것이다. 둘째, 계욕은 기원전 수백 년 되는 시기에 중국의 주(周) 나라에서 시작된 연중행사의 하나로서 음력 3월 3일에 실시되었다. 셋째, 계욕은 일종의 제사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음복과 같이 계음이 뒤따랐으며 주흥을 돋구기 위해 잔을 물에 띄운 것이 유상곡수의 형태로 발전한 것이다. 넷째, 계욕은 오늘날에도 부락제인 동제를 주관하는 제관이 찬물로 목욕재계하고 일부지방에서 득남을 위해 부인들이 음력 3월 3일에 냇물로 목욕하고 기도드리는 풍습 속에 남아있다. 다섯째, 포석정을 향해 흐르는 윤을곡의 계류 속 암반에 미역감기에 알맞은 크기로 인위적인 웅덩이가 조성된 것이 남아있다. 이것을 보면 신라시대에는 포석정에서 곡수연에 앞서서 계욕도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여섯째, 중국의 곡수연지는 그 거의 모두가 석거각 유배정, 유상정 등 단적으로 곡수연을 가리키는 정자명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일본에도 유점(流店)이라고 하는 곡수연지가 현존한다. 일곱째, 이들 곡수연지 가운데 북경 자금성의 계상정은 정자 속에 유배거가 꾸며져 있으며 송시대의 유적인 개봉 숭복궁 핍상정의 경우에는 정자는 없어졌으나 유배거 주위에 깔려 있는 전들 가운데에 초석이 부각된 것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포석정을 본떠 꾸몄다고 전해지는 일본 후락원의 유점도 건물 속을 물이 흐르고 있다. 여덟째, 이러한 사실을 볼 때 곡수연을 위한 유배거는 정자형식의 건물에 덮혀 있는 것이 전통적인 꾸밈새로 보이며 포석정 또한 예외는 아닐 것이다. 아홉째, 유배거가 정자에 의해 덮혀 있어야 한다면, 포석정은 적어도 남북 5칸, 동서 4칸반 정도의 크기를 가진 건물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강돈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분석하여 첫째, 포석정의 행사에서 가무가 중요한 부분이라는 점, 둘째, 포석정 행사에 화랑이 참석한다는 점, 셋째, 국가적 위기 상황임에도 왕과 비빈, 종척 등 중요한 인사들이 참석한다는 점을 알았다. 이에 기초하여 기존의 유상곡수나 연회장소가 아니라 종교적 성소일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나아가 개최시기가 10월이었으며 장소는 외사(外寺)로 보고, 고려시대의 자료를 활용하여 팔관회가 열린 장소로 추정하였다. 이종욱은 필사본 {화랑세기}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에 의거하여 논지를 전개하였다. 첫째, 음력 11월은 한겨울이다. 과연 한겨울에 포석정에서 술잔을 띄우고 [유상곡수]놀이를 할 수 있었을까. 둘째,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잔치를 하며 놀기 두 달 전 후백제 견훤은 경주에 이웃한 영천의 고울부까지 쳐들어와 있었다. 셋째,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포석사(鮑石祠 또는 鮑祠)라고 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사실이다. 사(祠)는 신주를 모시는 사당 또는 묘(廟)이다. 그 증거로 문노의 초상을 모셨는데 문노의 화랑도를 호국선이라고 불렀다. 또, 포석사에서는 김춘추와 문희의 길례(吉禮), 문노와 그 부인의 길례가 있다. 신궁이 만들어지면서 시조묘가 포석사라고 불리게 되었을 것이다. 넷째, 포석 기와가 발굴되었는데, 기와의 제작 연대는 삼국시대로 소급할 가능성이 많다. 결국 포석정은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는 성스럽고도 경건한 사당으로 가장 중요한 장소였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이상 세 사람의 견해를 살펴보았는데 필자도 유상곡수가 행해진 장소라는 점에 일단 동의를 한다. 또한 포석정터는 유상곡수를 위한 장소일 뿐만 아니라 특별한 장소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장국병의 견해에는 별다른 무리가 없다고 판단되며 강돈구의 견해에서 일단 통일신라시대의 외사가 어디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팔관회가 행해졌다고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종욱의 견해에도 부분적으로 문제는 있을 수 있으나 대체적으로 동의하고 싶다. 이상과 같이 지금까지의 연구에서 포석정은 단순히 술잔치를 벌이는 장소는 아니라고 한다. 여기에 조금의 의미를 보태어 보기로 한다. 첫째, 경애왕이 이곳 포석정에 행차한 것은 음력으로 11월이다. 이를 양력으로 환산하여 보면 927년의 음력 11월 1일은 양력 12월 1일이고, 음력 11월 30일은 양력 12월 30일이다. 즉 음력 11월에 행차하였다는 것은 날짜로는 몇 일이 되든 양력 12월에 이곳으로 행차하였다는 것이 된다. 동짓달 초하루에 행차하였든 또는 적어도 중순이 넘어갔을 것으로 가정을 하든 날씨는 제법 추웠을 것이다. 이 추운 겨울에 흐르는 물에 잔을 띄우는 술잔치를 벌였을까? 날씨가 추워 불을 피웠다 하더라도 굽이치는 물이 얼었을 것이고, 그러면 술잔이 제대로 돌았을까? 어찌되었건 겨울에 술잔치를 벌인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곤란한 일일 것이다. 둘째, 이미 9월에 견훤이 영천까지 침입하였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로 인해서 왕건에게 도움을 청해 둔 상태였다. 영천에서 경주는 40km 미만이므로 지척이라고 표현해야 할 것인데, 가까이에 적이 있는 줄을 알면서 술잔치나 벌이려고 행차한다면 이는 정신나간 짓일 것이다. 물론 지척의 거리를 두고도 몇 달 동안 공격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공격할 의사가 없다고 방심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합리적인 설명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셋째, 헌강왕이 이곳에 행차하였을 때 남산신이 나타나서 춤을 추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앞에서 잠시 언급하였듯이 사료(A)에서, 남산신은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다만 임금의 눈에만 보였다. 이는 단순하게 나타난 신이 아니라 임금에게 어떤 계시를 주고자 하였을 가능성이 더 짙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신이 아무 곳에나 나타나는 것은 아닐진대 이곳 포석정은 특별한 곳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넷째, 경애왕이 견훤에게 자진을 당한 뒤 신라에서의 반응을 살펴보면, 시신을 서당에 모시고 경순왕과 신하들이 슬피 통곡을 하였다는 점 또한 주목된다. 만약 경애왕이 단순히 술잔치를 벌였다면 과연 신하들이 후히 장사를 지내줄 수 있었을까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이는 포석정에서의 행사가 아마도 나라를 위해 무엇인가 국가적인 의식을 행하였을 가능성이 많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이렇게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단순히 술잔치를 벌이다가 후백제 견훤에게 침략을 당하고 신라 멸망의 길로 가는 과정이라고 왜곡된 원인은 아마 고려의 입장에서 서술되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신라는 고려에 귀부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을 의도적으로 만들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볼 수 있는 결정적인 내용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후백제 견훤의 신라 침입 서술에 이어서, "신라의 군신들은 망해가는 세상에 다시 일어날 수가 없으므로 우리 태조를 끌어들여 좋은 의(誼)를 맺어서 자기들을 후원해 주도록 했다."는 서술이 있다. 이어서 {삼국유사} 견훤조의 사론에서 "신라는 운수가 다하고 올바른 도리를 잃어 하늘이 돕지 않고 백성이 돌아갈 곳이 없이 되었다. … 하물며 궁예와 견훤 같은 흉한 자들이 어찌 우리 태조를 대항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하였다. 고려가 조선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도 이러한 역사는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즉 고려 말에 우왕의 출신을 둘러싼 여러 설이나 신돈과 관련된 기록들, 우왕은 {고려사}에서 왕의 기록인 세가에 기록되지 못하고 열전에 기록된 사실들 또한 이러한 맥락이라고 보여진다. |
포석정에서 어떤 일이 행해지고 있었는지 지금으로서는 확실하게 알아보기에는 자료가 너무 부족하다. 하지만 현재 남아있는 유적의 형태로 보아 유상곡수가 행해졌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이에 일단 유상곡수에 대하여 알아보고 유적에 내포된 수리학적 의미를 검토해 보기로 한다. 1. 유상곡수 유상곡수(流觴曲水)의 확실한 시작은 중국(中國) 동진(東晋) 목제(穆帝) 영화(永和) 9년(AD 353) 봄 3월 3일에 있었다. 왕희지 외 41명이 절강성 남서 회계산(會稽山) 북쪽의 난정(蘭亭)에 모여 개울물에 몸을 깨끗이 씻고 결제사를 올리고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술잔이 자기 앞에 올 때까지 시를 읊는 놀이를 하였다. 이 때의 시를 기록하면서 서문을 왕희지가 쓴 것이 행서의 전범으로 유명하게 된 {난정서}이다. 이후 중국에서는 왕궁에 유배거(流盃渠)를 만들어 북경의 고궁에도 남아있다. 송나라 때의 유배거 조성의 2가지 형식[ 鑿流盃, 壘鑿流盃]이 {영조법식}에 전하고 있다. 유배 석거는 네모이고 한 변의 규모는 1장 5척이므로 3척의 돌 25개를 사용하는데 두께는 1척 3촌을 사용하여 조성한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수로의 폭[道廣]을 1자 즉 30cm 정도로 하였음과 깊이를 9촌으로 한다고 한 점은 주목해 두고자 한다. 우리나라에도 조선시대의 창덕궁 옥류천에 소요암을 만들었고 일본의 경우에도 顯宗天皇 때에 곡수연을 베푼 기록이 남아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신라시대에도 유상곡수연이 틀림없이 있었을 것이고 그 유적이 바로 포석정이라 미루어 짐작된다. 따라서 포석정에서는 유상곡수의 연회도 열렸지만 단순히 연회만을 위한 장소가 아니고 특별한 의례를 행하는 성스런 장소로 여겨진다. 2. 수리학적(水理學的) 검토 포석정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므로 실제로 현장에서 유상곡수연 실험을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축소 모형이나 컴퓨터를 통하여 장근식과 이상택·이태열과 유동훈에 의하여 실험한 예가 있다. 장근식은 수로모형을 제작함에 있어 1/5.4의 축소비율로 함석을 재료로 사용하였다. 수리학(水理學)적인 측면에서 모형에 물을 흘리면서 알루미늄 가루를 뿌려 시각적으로 와류가 형성되는 위치 분포까지를 작성하였다. (<도면 7> 참조) 이상택과 이태열은 1/5과 1/10 모형을 만들어 여러 가지 실험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를 여덟 가지로 정리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 포석정은 돌홈에 흐르는 수류의 가운데를 부유체[잔]가 이동하게 설계, 제작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현재는 당시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둘째, 포석정의 구조적 특성은석거(石渠)의 수류에 띠운 부유체가 수로의 중앙선을 따라 이동하도록 하기 위해 굴곡인 외곡(外曲)과 내곡(內曲)을 번갈아 설계하여 유속과 수류의 흐름을 변화 시켰다. 수류가 닿는 석거 표면을 거칠게 처리하여 곳곳에 와류가 생기도록 하였고, 와류 사이 구간은 석거 폭을 좁게 하여 잔의 이동을 빠르게 하였으나 와류가 중심수류를 침범하지 못하도록 설계되어 있었을 것이다. 셋째, 수량이 많을수록 수심이 깊어지고 유속이 느려지며, 수류가 안정되어 부유체가 수로의 중앙선을 이동하였으며, 이로 보아 수량은 석거 깊이의 95% 정도가 되도록 유입시켰을 것으로 추정된다. 넷째, 유출수로의 제어문 높이가 석거 깊이의 50%일 때 부유체가 수로의 중앙선을 따라 안정성 있게 이동한 것으로 보아 포석정에는 수위 조절 장치인 제어문이 있었으며, 제수문으로 수위를 조절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섯째, 수로의 경사가 있을수록 유속이 빨라져 부유체가 수로의 가운데를 벗어나 석벽에 부딪히고, 물이 넘치는 것으로 보아 원형의 수로는 수평이었는데 현재는 지반의 변형으로 기울어진 것이라 추정하였다. 여섯째, 수류에 띄운 부유체는 물 속에 잠기는 부분이 많은 구형, 반구형일 때 수류의 중앙선을 안정성 있게 이동한 것으로 보아 포석정에 띄운 잔은 밀도가 균일한 둥근 모양이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일곱째, 수류 실험 결과 신라 시대 조상들은 포석정의 와류가 생기는 곳곳에 둘러앉아 중심 수류를 따라 이동하는 잔이 앞에 왔을 때 와류의 영향권으로 끌어들여 잔이 머무르게 하여 술을 마신 다음 중심 수류로 빈잔을 밀어 넣어 다음 사람에게로 이동시켰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여덟째, 따라서 현재의 포석정은 원래의 기능을 할 수 있도록 복원하려면 본수로의 경사를 5°이하로 하고, 석거 깊이의 95%에 해당하는 수량을 유입하며, 잠류를 석거 깊이의 95%로 유지할 수 있는 제어문 장치를 설치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도면 8, 9> 참조) 유동훈은 현대수리학(現代水理學)에 기초하여 수리 구조와 수리학적인 특성을 살폈다. 전체를 44개 지점으로 나누어 높이와 폭, 바닥의 좌우 경사도를 측정하고 2개의 지점(<도면 10>의 ㉠과 ㉡)에서 회돌이 현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정리하였다. 결론을 정리하여보면 다음과 같다.첫째, 초반 인입 구간에서 1/10의 급경사를 두어 충분한 관성력을 발생하도록 하였고 수로의 바닥과 측면을 파형으로 구성하여 수면파를 매끄럽게 제어되도록 조치하였다. 둘째, 두 지점의 회돌이 형성방법은 판이하게 달라서 첫 번째 회돌이는 인입 구간에서 생성된 과도한 관성력을 파형의 벽면처리로 제어하면서 수로 내측의 함몰로 원심력이 회돌이 형성에 지장을 초래하는 것을 감소시켜 주는 역할을 한 반면, 두 번째 회돌이는 급한 횡굴곡을 사전에 조성하여 전단계 구간인 초반회돌이 구간에서 점층적으로 감소되어 충분치 않은 관성력으로도 회돌이가 형성되도록 하였다. 셋째, 출구 구간에서 완만한 역구배를 두어 전구간에 충분한 수심을 유지시켜 줌과 동시에 후반 회돌이 구간의 유속을 적절히 조절하도록 하였다. (<도면 10> 참조) 이상의 3가지 연구에서 축소 모형을 실험에 사용하였기 때문에 실제에서와 다른 점이 나타난다. 첫째, 이들 실험에서 가장 큰 오류는 축소 모형으로 실험하였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세 경우 모두 잔의 이동은 중심선 물길을 따라 흘러가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1997년 4월 12일 창조사에서 포석정 모형을 제작하였는데, 전체 석물의 크기는 1/2로 축소하고 수로의 간격은 원래의 폭으로 설치하여 물을 흘려 실험한 일이 있다. 이때 지름 15cm 정도의 토기잔을 띄워보았다. 이 실험에서 잔이 머무는 와류가 형성되는 위치는 뜻밖에도 수로에서 들어온 부분이 아니라 돌출 된 위치였다. 수로의 폭이 좁은 경우에는 수로의 중심을 따라 이동하지만 일정 크기 이상으로 넓어지면 전혀 다른 현상을 일으킨다. 즉 수로의 좌우에 부딪히면서 이동하며, 돌출 된 부분에서 와류가 형성된다. 이러한 현상은 하천에서 물길이 굽이칠 때 바깥쪽은 침식되어 소(沼)를 형성하지만 안쪽에는 모래가 퇴적되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이를 곡류(曲流; 蛇行)에서는 포인트바(point bar)라 하고 퇴적물은 사행의 안쪽에 쌓인다고 한다. 모래가 퇴적되는 위치가 바로 잔이 머물 수 있는 와류의 위치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잔을 받을 사람이 앉는 위치는 와류가 형성되는 곳이므로 장근식과 이상택·이태열의 실험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판단된다. 이와 같이 수로의 폭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영조법식}에서도 수로의 폭을 1자로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포석정의 경우 수로의 폭을 30cm 정도로 한 것은 아마 와류가 형성되는 임계수치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된다. 이러한 사실이 맞다면 신라인들은 수리학적(水理學的) 지식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둘째, 수량은 석거의 95%정도라고 하였는데, 어느 부분까지 채웠을 때를 말하는 것인지 명확하지가 않다. 참고로 일제시대 작성된 수로의 단면을 보면 안쪽 벽면은 바깥쪽 벽면보다 상당히 높게 되어 있다. 이것은 지금 유적의 수로 안쪽으로는 물이 넘어 들어가지 않도록 하였음을 알 수 있다.(<사진 4>, <도면 12> 참조) 이로 미루어 유적 수로의 안쪽과 바깥쪽의 용도는 확연히 달랐을 가능성을 제시한다고 보여진다. 셋째, 잔의 형태는 지금으로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중국 난정에서의 연회 장면이나 일본에서 지금 재현되는 장면들을 살펴보면 잔은 부유체에 얹어서 이동시킨다는 점이다. 넷째, 유동훈의 자료에서 회돌이를 2번으로 해석하였다. 실제로 자료를 다시 해석하여보면 같은 현상이 <도면 10>의 ㉢부분에서도 나타나므로 3곳에서 일어나는 것이 된다. 이상에서 축소 모형에 의한 실험 결과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제시하였다. 그 외에도 더 있을 것이므로 이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축소 모형이 아닌 1: 1 모형에 의한 다양한 실험이 실시되어야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
포석정에 관한 기록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삼국유사}에 헌강왕의 행차한 사실(사료(A))과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후백제 견훤의 침입과 관련된 사실(사료(B))이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그 후,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C) 포석정은 부의 남쪽 7리, 금오산의 서쪽 기슭에 있다. 돌을 다듬어 포어(鮑魚)의 형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지은 것이다. 유상곡수(流觴曲水)의 유적이 완연히 남아 있다. 이 기록 뒤에는 {삼국사기}에 전하는 경애왕과 후백제 견훤의 입관련 내용을 싣고 있다. 이 기록에서 처음으로 포석의 의미는 전복모양을 하였기 때문에 이름을 포석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유상곡수의 유적으로 이해하고 있음도 나타나 있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포석정의 의미인 것이다. 이어서 시 몇 편을 함께 실었는데 이를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D) 이인로(李仁老)의 시 석호궁 안에는 가시덤불 우거지고,/ 동타의 언덕 위엔 행인도 없네.// 높은 정자 금송정도 절반은 퇴락했고,/ 쇠잔한 달빛만 한가로이 옛 성을 비추네.// 당시의 관현악 소리 처량함을 다하고,/ 황금물 술잔은 둥실둥실 구비 따라 흘렀네.// 중류에서 찬탄했던 위나라 산하는 애닯게 되었으니,/ 취향에는 진나라 세월도 아랑곳없다네. (E) 조위(曹偉)의 시 한 줄기 맑은 계곡물 굽이쳐 흐르는데,/ 황량하니 파인 돌만 구불구불 열렸네.// 포어는 계곡물 가에 떨어져 흩어졌으니,/ 봄은 지고 돌은 오래되어 파란 이끼 덮였네.// 옛날 신라왕은 정치하기 싫어하여,/ 금수레 옥가마로 놀러만 다니었네.// 계곡물 이어진 이곳에는 맑은 물만 희롱하니,/ 깃달린 술잔 둥실둥실 물결 따라 내려왔네.// 임금과 신하들 흥에 겨워 노래 불러 취향에 들었으니,/ 피리 소리 북 소리는 봄철 천둥처럼 땅을 진동하네.// 적병이 심장에 들어오는 것도 몰랐는데,/ 대낮에 갑옷입고 말탄 병사들 재갈 물고 몰래 달려 왔네.// 피뿌린 궁정 짓밟힌 일 차마 어찌 입에 담을까,/ 창황한 궁궐터 서라벌에는 먼지만 날리네.// 궁녀들 딩굴며 적군 앞에 울부짖으니,/ 보배 비녀 떨어져 풀밭에 버려졌네.// 해목령 위에는 근심어린 구름만 드리우고,/ 소나무 바람 소리 천년의 슬픔 아직 머금었네.// 임금없는 임춘각에 흐뭇하게 취하니,/ 문 밖에는 한 장군 온 것도 몰랐네.// 옥수 벽월의 노래 끝나기도 전에,/ 진나라 강남 왕업 연기처럼 사라졌네.// 앞 수레 엎어짐은 뒷 수레의 경계되련만,/ 뒷 수레도 연이어서 엎어지네.// 내 원하노니, 천공이 귀신 시켜,/ 뒷사람과 더불어 이 돌로써 거울되게 하소서. (F) 서거정의 시 포석정 앞에 말 세울 때에,/ 생각에 잠겨 옛 일을 그리네.// 유상곡수하던 터는 아직 남았건만,/ 취한 춤 미친 노래 부르던 옛일은 이미 틀렸네.// 지극히 음탕했어도 망하지 않은 나라 없으니,/ 강개한 심정 어찌 홀로 견딜까.// 가며가며 읊조리며 오릉길을 지나노니,/ 돌 유구와 금성은 모두 빛을 잃고 말았네. (G) 어세겸의 시 포석정 가에 해 떨어질 때에,/ 들판의 해당화는 주인없이 서로 의지하네.// 침당년에 삼풍계를 살피지 않더니,/ 눈 깜박할 사이 만사가 틀어지니 슬프기만 하네.// 꽃은 떨어져 맑은 물 따라 흐르니 막을 수 없고,/ 푸른 옷 갈아입고 술시중 드는 일 어찌 차마 하였는가.// 이곳의 끝없는 한을 곰곰이 생각하니,/ 우는 새 저무는 석양을 원망하는 데에 부치노라. 이상의 내용들이 실려 있는데 그 뒤로 {동경잡기} 등에도 거의 같은 내용이 실려있다. 여기에서 눈에 띠는 점은 포석정은 경애왕이 술잔치를 벌이다가 견훤에게 신라가 망하게 한 원인으로 전승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단순히 술잔치를 벌이는 유상곡수의 장소라고 하기보다는 신성한 제사 공간이었을 가능성이 보다 비중있게 제시되었다. 이곳 [포석정모형전시관부지 시굴조사] 과정에서 출토된 기와편 중에 [포석(砲石)]이라는 글씨가 찍힌 암키와가 8점 확인되었다. 여기에 찍힌 [포석]이란 글씨는 우리가 알고 있는 [포석(鮑石)]과는 다르다. 물론 고대에는 음이 같으면 서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서 풀이하고 있는 것과 같이 전복껍질 모양을 하고 있다는 설명은 재고의 여지가 있을 것 같다. 신라에서는 다른 뜻으로 [포석]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후대에 특히 조선시대에 오면서 특별히 의미부여를 한 경우일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 한 예로 월지궁은 불교사상에 의하여 조영되었는데도 연못 속의 섬 3개를 삼신산으로 비정하여 신선사상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바로 그런 것이다. 포석이라는 의미 해석은 앞으로 보다 적극적이고 신중한 연구가 기대된다. 참고로 {화랑세기}에 포석정은 길례를 행하였다는 포사(鮑祠)로 2번, 대왕이 행차하거나 화상을 모셔 둔 포석사(鮑石祠)로 2번 나온다. 이러한 사실은 무엇인가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장소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포석정의 조성 시기에 대하여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는 기록이 없다. 다만 헌강왕 때에 포석정이 기록에 나타나고 있으므로 홍사준 이후 대체로 통일신라시대인 경문왕(景文王:재위 861∼875) 때에 조성된 것으로 보아 왔다. 그러나 최근의 발굴 결과에 의하면 이미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는 견해도 제시되었다. 하지만 발굴자들은 통일신라 하대 또는 고려시대의 기와로 추정하고 있어서 포석정의 조성 시기는 삼국시대일 것이라는 견해는 수정될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포석정의 조성 시기에 대하여는 다른 자료의 출현을 기다려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
포석정은 경애왕이 술잔치를 벌이다가 후백제 견훤이 침입하는 것도 모르고 있다가 망해가던 신라가 결정적으로 멸망하는 일익을 담당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이러한 전승은 잘 못 된 것이라는 점을 살펴보았다. 그런데도 조선시대에는 신라멸망의 비운의 장소로만 인식되었음도 보았다. 또한 [어무상심]에서 상심(詳審)은 [산신]이 아니라 단순히 [신(神)]이라는 의미일 뿐임도 알아보았다. 이어서 포석정에서 견훤이 쳐들어올 때는 아니지만 언젠가는 유상곡수(流觴曲水)가 열렸다는 점을 인정하고 유상곡수의 역사를 중국·한국·일본의 경우를 더듬어 보았다. 여기에는 수리학적(水理學的)인 문제가 결부되어 있음을 검토하였는데 지금까지 모형을 사용한 결과 사실과 다른 점이 발견되었다. 즉 물이 수로의 중간을 통과하므로 잔이 머무는 위치는 수로가 들어간 부분이라고 하였으나 오히려 돌출부분이 되어야 한다. 또 신라인들은 수리학·유체역학(流體力學)에 관하여 상당한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현재의 모습은 일제시대에 개축되어 원래의 모습을 제대로 알 길이 없는데 앞으로 보다 정밀하고 다양한 실험이 이루어져 포석정에 숨어있는 신라 과학의 단면을 알 수 있게 되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포석정이 언제 조성되었는가 하는 문제는 아직 정확하게 규명하지 못하였다. 또한 포석정 전시관 부지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포석(砲石)]이라는 글씨 기와가 출토됨으로써 포석(鮑石)의 의미는 조선시대의 풀이처럼 [전복모양]이라는 의미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끝으로, 포석정은 앞에서 기술한 것처럼 일반적으로 이궁(離宮)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에 관련하여, {삼국유사}의 사료 (B)에서 [왕과 왕비는 달아나 후궁(後宮)으로 들어가고]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포석정 설명문에는 [경애왕은 왕비와 함께 달아나 성남(城南) 이궁(離宮)에 숨고]라고 되어 있다. {삼국유사}에서 경애왕이 포석정을 떠나 후궁에 숨었다고 하여 정궁(正宮)의 뒤쪽 궁전에 숨었다는 의미로 기록하였다. 반면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성의 남쪽에 있는 이궁에 숨었다고 하여 조금 변화되었는데, 성의 남쪽이 어디를 가리키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이러한 기록들이 후대에 포석정에서 달아나 숨었다고 하는 이궁이 잘 못 전해져 지금은 포석정 자체가 이궁인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 과연 포석정 인근에 있었던 건물에 숨었다면 [달아나]라는 표현을 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포석정이 신라 왕실의 이궁이라는 견해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판단된다. |
* 부흥사 대웅전
* 늠비봉 오층석탑
*금오정
* 통일전 입구
* 까마귀 떼
* 그 유명한 경주황남빵 본점 내부(황남동 미추왕릉 북쪽 도로 건너에있다-사진촬영은 금지 ..)